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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상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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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상(후한)은 후한 말 원소의 아들로,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으나 후계자 다툼과 조조와의 대립 끝에 몰락한 인물이다. 원소 사후 형 원담과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투었으며, 조조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세력을 잃었다. 이후 유주로 도망가 오환족과 연합하여 저항했으나 실패하고, 요동의 공손강에게 의탁했으나 결국 살해당했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권력욕과 판단력 부족으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며, 삼국시대의 흐름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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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상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원상
로마자 표기Yuan Shang
한자 표기袁尚
현보 (顯甫)
직책기주목 (冀州牧)
생몰년불명 ~ 207년
사망 장소요양 (랴오닝 성)
아버지원소
어머니유부인
형제원담 (이복형)
원희 (형)
생애
활동 시기후한 말기
주요 활동원소 사후 세력 계승
조조와 대립
오환족과 연합
공손강에게 피살
관직
기주목202년 ~ 207년
임관 시기원소 사후
전임원소
후임공석 (조조에 의해 기주 평정)
가계
아버지원소
어머니유부인
원담, 원희

2. 원소의 후계자

삼국지와 《전략》의 기록에 따르면, 원소는 수려한 외모를 가진 원상을 편애하여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2] 그러나 원소는 기주를 누구에게 물려줄지 결정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202년 원소 사후, 많은 이들이 장자인 원담이 가문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유씨 부인과 심배, 방기는 원상을 지지하며 그를 후계자로 내세웠다.[3] 유씨 부인은 원소의 다섯 첩과 그 가족들을 모두 살해하여 상속 분쟁을 종결시켰다. 원담은 거기장군에 임명되었으나, 이로 인해 원담과 원상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관도 전투에서 원소를 격파한 조조는 202년에 다시 북쪽으로 공격해왔다. 원담은 여양에 주둔하며 병력을 요청했지만, 원상은 원담이 군사 통제권을 가져갈 것을 우려하여 거절했다.[4] 원상은 심배를 업성에 남겨 방어하게 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여양으로 갔다.

2. 1. 후계자 계승 배경

원소는 셋째 아들(혹은 막내아들) 원상을 총애하였으며, 원상은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고 전해진다.[2] 원소의 후처 유씨(劉氏)는 원상을 편애하였고, 원소에게 원상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종용하였다.[3] 이에 원소는 장자 원담을 죽은 형의 양자로 입적시켜 후계 구도에서 제외하고, 원희고간을 각각 유주자사와 병주목으로 보내 권력에서 소외시켰다.

202년 원소가 죽자, 원소군 막료인 곽도신평원담을, 봉기심배원상을 후계자로 옹립하여 대립했다. 『후한서』 원소전에서는 여러 사람들도 연장자인 원담을 지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심배 등은 원소의 유언을 위조했고,[3] 원상이 후계자를 선언하자 유씨 부인은 원소의 총첩 5명을 멸족시켰다.

여양에 있던 원담은 원상에게 반발하여 거기장군을 자칭했다. 이로 인해 형제간의 내분은 격화되었고, 조조가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2. 2. 후계자 쟁탈전

202년, 관도 전투에서 패배 후 원소가 병사하자, 후계자 자리를 두고 원담원상 간의 쟁탈전이 벌어졌다.[3] 많은 이들이 장자인 원담을 지지했으나, 심배봉기는 원소의 유명을 조작하여 원상을 옹립했다.[3] 이에 원담은 거기장군을 자칭하며 반발했다.[3]

유씨 부인은 원소의 총첩 5명과 그 가족들을 살해하여 상속 분쟁을 종결시켰다.[3] 원담은 여양에서 원상에게 반발하였고, 조조가 여양으로 공격해오자 원상은 원군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했다. 이로 인해 원담과 원상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4]

원상은 고간, 곽원, 호주천에게 조조의 배후인 관서 지역을 공격하게 했지만, 종요, 마초, 방덕 등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203년, 원상과 원담은 조조의 공격에 여양을 포기하고 으로 후퇴했다. 조조는 퇴각했지만, 곽도와 신평의 지원을 받은 원담이 업을 공격하면서 형제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원상은 원담을 평원으로 몰아넣었으나, 원담은 조조에게 항복했다.

이러한 내분은 조조의 개입을 불렀고, 결국 원소 세력의 붕괴를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3. 원담과의 내분

원소 사후, 후계 다툼에서 원담을 지지하는 곽도, 신평원상을 지지하는 심배, 봉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 다수의 사람들은 연장자인 원담을 지지했지만[6], 심배 등은 원소의 유언을 위조하여 원상을 후계자로 옹립했다.[10] 원담은 이에 반발하여 거기장군을 자칭했다.

3. 1. 여양 전투와 갈등 심화

202년 9월, 조조가 북상하여 여양의 원담을 공격하자, 원담은 원상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원상은 원담이 군사 통제권을 가져갈 것을 우려하여 지원을 거절했다.[4] 원상은 심배업성에 남겨 방어하게 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여양으로 가서 방어전을 도왔다. 원상은 곽원, 호주천 등을 시켜 조조의 배후인 관서 지역을 공격하게 했지만, 종요, 마초, 방덕 등의 반격으로 곽원이 전사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203년 봄, 조조의 총공세에 원상과 원담은 여양을 포기하고 으로 귀환했다. 조조는 업까지 진격했으나, 원상은 이를 역습하여 격파했다. 조조는 패퇴하여 허로 귀환했다. 그러나 곽도, 신평의 조언과 지원을 받은 원담이 업 성 밖 문으로 선제 공격을 가해오면서 원씨 형제의 대립은 결정적이 되었다. 원상은 반격하여 같은 해 8월 원담을 격파하고 평원으로 몰아넣었다.[6] 유표는 원담과 원상에게 각기 편지를 보내 골육상쟁을 말렸으나, 원담과 원상 모두 이를 따르지 않았다.

3. 2. 원담의 몰락과 조조의 개입

202년 원소가 죽은 후, 후계 다툼에서 원담을 지지하는 곽도, 신평원상을 지지하는 심배, 봉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 다수의 사람들은 연장자인 원담을 지지했지만[6], 심배 등은 원소의 유언을 위조하여 원상을 후계자로 옹립했다.[10] 원담은 이에 반발하여 거기장군을 자칭했다.

조조가 여양으로 쳐들어오자 원상은 원담의 원군 요청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여 원담이 봉기를 살해하는 등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원상은 고간, 곽원, 호주천에게 조조의 배후를 공격하게 했지만, 종요, 마초, 방덕 등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203년, 원상과 원담은 조조의 공격에 까지 후퇴했으나, 원상은 조조를 격파하고 퇴각시켰다. 그러나 곽도, 신평의 지원을 받은 원담이 선제공격을 가해오면서 원씨 형제의 대립은 결정적이 되었다. 원상은 원담을 평원으로 몰아넣었다.[6]

궁지에 몰린 원담은 조조에게 항복했고, 조조는 원담과의 동맹을 통해 원상을 압박했다.[6] 204년, 조조가 북상하자 원상은 업으로 돌아갔으나, 여광여상이 조조에게 투항했다. 조조가 업성을 포위하자, 원담은 기회를 틈타 원상을 공격했고, 원상은 유주 자사였던 원희에게 의탁했다.

4. 몰락과 최후

204년 봄, 원상은 원담을 공격했지만, 조조가 그 틈을 노려 심배가 지키는 업을 포위했다. 같은 해 7월에 원상은 업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왔지만, 처참하게 격파당했다. 게다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도 거부당했기에, 중산으로 도주했다. 원상에게 버려진 업도 다음 달에 함락되었고, 심배는 처형되었다.[7]

원상은 중산에서도 원담에게 격파당하여 유주원희를 의지하여 그 관할지인 고안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원희 군대의 초촉·장남에게 배신당하여 원희와 함께 오환의 어른(단우) 누반을 의지하여 요서로 도주했다. 207년, 요서로 진군해 온 조조를 원희·원상은 오환왕 답돈(누반의 족형) 등과 유성에서 맞이하여 격퇴하려 했으나(백랑산 전투) 또다시 패배하여, 마지막에는 요동의 공손강에게 의지하여 도망쳤다.[7][10]

조조를 두려워한 공손강은 원희와 원상을 참수하여 그 머리를 조조에게 바치려 하였고, 두 사람을 거짓으로 환영했다. 이에 원희는 의심을 품었지만, 원상은 공손강의 군대를 빼앗으려 생각했기에 그대로 공손강의 휘하로 향했다. 공손강은 도착한 원희와 원상을 붙잡아 참수하고, 두 사람의 수급을 조조에게 보냈다. 원상의 유해가 업으로 운반되자, 과거 원상이 자신의 진영에 초청하려 했던 전주가 조문했다.[10]

4. 1. 거듭된 망명과 재기 시도

205년 1월, 원희의 부하장수 초촉장남이 원희를 배반하고 주를 장악했다. 이에 원상은 재차 오환족의 왕 답돈에게로 달아났다.[7] 원상은 답돈의 원조를 받으며 재기할 기회를 노렸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조조에 대한 반란을 사주하며 오환족을 이끌고 유주 일대를 공격해 피해를 입히는 등 조조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207년 조조는 곽가의 진언을 받아들여 원씨의 재기를 뿌리뽑기 위해 오환을 공격했으며, 원상은 오환족과 함께 조조에게 맞섰다. 당시 조조군은 무종을 통해 오환을 공격하고 있었으나 큰 길은 비로 인해 끊겼고, 여러 샛길들은 원상과 답돈이 선점하여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오환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전주는 조조가 오환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리를 모아 조조에게 합류했는데 그는 2백 년 동안 이용이 끊겨 있었던 고로를 안내하며 진군할 것을 권했고, 이를 받아들인 조조는 작전을 바꿔 철수하는 것으로 위장한 뒤 노룡 방면의 길을 통해 오환의 본거지를 향해 잠행한다.

원상과 답돈은 노룡을 통한 샛길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으므로 조조군이 사라지자 몇 차례의 척후 끝에 실제로 조조가 철수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총사령부인 유성에서 불과 약 321.87km 지점에서 조조의 대군이 포착되자 경악한다. 황급히 군사를 끌어모아 조조와 맞섰으나 답돈은 백랑산 전투에서 우연히 조조와 마주쳐 교전하다가 죽는다.[7] 전혀 생각지도 못한 습격을 받은 데다 지도자까지 허무하게 잃어버린 오환족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원상은 기병 수천 기를 이끌고 오환의 지도부를 규합해 요동의 군벌 공손강에게로 달아났다.[10]

4. 2. 요동에서의 죽음

207년 조조곽가의 진언을 받아들여 원씨의 재기를 뿌리뽑기 위해 오환을 공격했으며, 원상은 오환족과 함께 조조에게 맞섰다. 당시 조조군은 무종(無終)을 통해 오환을 공격하고 있었으나 큰 길은 비로 인해 끊겼던 데다, 여러 샛길들은 원상과 답돈이 선점하여 철저히 지키고 있었으므로 고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오환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으며, 독자적인 세력을 이끌면서 오랫동안 재야의 명사로 지냈던 전주는 조조가 오환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리를 모아 조조에게 합류했는데 그는 2백년 동안 이용이 끊겨 있었던 고로를 안내하며 진군할 것을 권했고, 이를 받아들인 조조는 작전을 바꿔 철수하는 것으로 위장한 뒤 노룡(盧龍) 방면의 길을 통해 오환의 본거지를 향해 잠행한다.

원상과 답돈은 노룡을 통한 샛길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으므로 조조군이 사라지자 몇 차례의 척후 끝에 실제로 조조가 철수한 것으로 믿고 있었으나 총사령부인 유성(柳城)에서 불과 2백리 지점에서 조조의 대군이 포착되자 경악한다. 황급히 군사를 끌어모아 조조와 맞섰으나 마침 답돈은 백랑산(白狼山)에 올랐다가 우연히 조조와 마주쳐 교전하다가 죽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습격을 받은 데다 지도자까지 허무하게 잃어버린 오환족은 완전히 와해되기에 이른다. 원상은 기병 수천 기를 이끌고 오환의 지도부를 규합해 요동의 군벌 공손강에게로 달아났다. 한 번 싸움에 오환족을 철저히 붕괴시켜버린 예상외의 결과에 자극받은 조조 진영에서는 여세를 몰아 요동까지 진군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조조는 여러 가지 무리수를 안고 시작한 오환 원정이 성공으로 끝난 것은 사실상 철저히 행운이 따른 결과로 여겼고 또한 공손강이 원상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으므로 요동으로 도망간 원상 형제를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군사를 물렸다.[10]

원상원희는 요동으로 달아나 군벌 공손강에게 몸을 의탁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손강에게 배신당하여 처형당했고, 그들의 머리는 조조에게 보내졌다.

조조를 두려워한 공손강은 원희·원상을 참수하여 조조에게 바치려 하였고, 두 사람을 거짓으로 환영했다. 이에 원희가 의심을 품었지만, 원상은 공손강의 군대를 빼앗으려 생각했기에, 그대로 공손강의 휘하로 향했다. 공손강은 도착한 원희·원상을 붙잡아 참수하고, 두 사람의 수급을 조조에게 보냈다. 원상의 유해가 업으로 운반되자, 과거 원상이 자신의 진영에 초청하려 했던 전주에 의해 조문되었다.

원상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여러 가지가 있다.

  • 후한서: 《후한서(後漢書)》에 의하면 원상이 공손강을 만날 때 원희는 문득 두려워하며 의심을 품고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대담한 성격이었던 원상은 이를 강하게 제지했으므로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고 한다.
  • 삼국지: 《삼국지》 위서 6권 원소전의 주석 《전략(典略)》에 의하면 원상 형제는 공손강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묶인 후 얼어붙은 땅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이때 날씨가 무척 추웠다. 원상은 앉을 자리를 요구했으나 이를 들은 원희는 ‘머리가 만릿길을 가게 되었는데, 자리를 구해 무엇하겠느냐!’고 했고, 뒤이어 공손강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후한서: 《후한서(後漢書)》 원상 형제가 포박되어 얼어붙은 땅에서 심문을 받았다는 것까지는 비슷하다. 하지만 원상은 '죽지 않는 동안의 추위를 참을 수 없으니, 앉아있을 자리나 마련해줌이 옳소.'라고 말한 것으로 나오며 전략에 비해 비교적 묘사가 상세한데, 이에 의하면 원상이 자리를 구한 것은 자신의 죽음을 모른 것이 아니라 공손강을 향한 이죽거림이나 혹은 허세에 가깝다. '경의 머리가 만릿길을 가게 되었는데 자리를 구해 무엇에 쓰려는가!'는 말 역시 이 비아냥에 대한 공손강의 화답이다.
  •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선 원상이 붙잡히기 전에 먼저 자리를 요구하고 이에 공손강이 ‘경의 머리가 만 리 길을 헤맬 것인데 자리를 구해 무엇하겠는가!’라고 꾸짖은 뒤 복병을 불러들여 원상을 죽이는 것으로 되어 있어 정황이 완전히 다르다.

5. 평가 및 영향

원상은 그릇된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삼국지』 위서 최염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원담과의 후계 다툼 중에 양측이 최염을 불렀지만, 최염은 병을 핑계로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화가 난 원상은 최염을 감금했다. 그러나 원상군의 음규·진림이 중재한 덕분에 최염은 사면되었다.[9]

『삼국지』 위서 원소전 부·원담원상전 주에 인용된 『전략』에 따르면, 공손강에게 처형되기 직전 원상은 추위를 타서 자리를 구했지만, 형인 원희로부터 "수급이 만 리의 여행을 떠나는데, 이제 와서 왜 자리가 필요한가"라고 꾸짖음을 받았다고 한다.[9]

원상은 기본적으로 형인 원담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졌다. 『후한서』 원소전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연장자인 원담을 지지했다. 그럼에도 심배 등은 원소의 유명을 위조해서까지 원상의 후계를 강행했다. 간부급으로 볼 때, 원상 지지자는 기주 출신인 심배·저곡(저수의 아들), 원소 측근인 봉기, 그리고 원희·고간 등 가족이나 간부의 대부분이었다. 즉, 곽도·신평(모두 영천 출신, 즉 하북 출신이 아님)을 중심으로 하는 원담 파에 비해 상당히 우세했음을 알 수 있다.

6.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 원상은 유씨와 친자관계로 설정되었으며, 관도 전투에서 조조의 승리가 거의 굳혀졌을 무렵, 조조가 거짓으로 업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원소의 명에 따라 업을 구원하러 가는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 원소가 다시 창정(倉亭)에서 조조와 싸울 때는 사환을 일기토로 죽이는 등 활약하지만, 조조가 여양을 침공했을 때는 병상에 누워있던 원소 대신 총대장을 맡고도 자신의 무용에 도취되어 형들의 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마음대로 싸우다가 장료에게 참패하여 분노한 원소가 피를 토하고 죽게 만든다.[1]

이후에도 심배 등과 짜고 원소의 유명을 조작해 후계자가 되는 등 원담에 못지않은 불초자식으로 묘사된다. 훗날 조조에게 쫓겨 요동으로 달아났을 때 공손강과 만난 후 앉을 자리를 요구하는 내용이 먼저 나오며 그 후 군사들에게 살해되는 것으로 나온다.[1]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미모와 무예에 뛰어난 젊은 무장으로 등장하며, 창정 전투에서는 사환을 일기토에서 쳐 죽이는 활약을 보인다. 이후에는 거의 역사와 같은 전개가 이루어지지만, 형인 원담과의 말다툼, 일기토라는 각색까지 더해져 제멋대로인 모습과 무모함이 더욱 강조되어 묘사된다.[1]

7. 가계

원상의 가계도

참조

[1] 서적 11th month of the 12th year of the ''Jian'an'' era, per Emperor Xian's biography in ''Book of the Later Han''. The month corresponds to 7 Dec 207 to 5 Jan 208 in the Julian calendar.
[2] 서적 Sanguozhi vol. 6
[3] 서적 Sanguozhi vol. 6
[4] 서적 Sanguozhi vol. 6
[5] 서적 Sanguozhi vol. 14
[6] 서적 Sanguozhi vol. 6
[7] 서적 Sanguozhi vol. 6
[8] 문서 袁買は、弟という説と、兄の子という説がある。
[9] 서적 『後漢書』袁紹伝によると、これは直後に二人を斬る公孫康の言葉である。
[10] 문서 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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