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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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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곽가는 후한 말 조조를 섬긴 책사로, 뛰어난 통찰력으로 조조의 천하 통일에 기여했다. 젊은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원소를 거쳐 조조를 만나 사공군제주로 임명되었고, 여포 토벌전, 관도대전, 오환 정벌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 곽가는 조조의 신임을 받아 '나의 진의를 아는 사람은 봉효뿐이다'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오환 정벌 후 풍토병으로 38세에 요절했다. 사후 정후의 시호를 받았으며, 적벽대전에서 조조는 곽가의 부재를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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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곽가의 청나라 삽화
곽가의 청나라 삽화
이름곽가
본관영천군 양적현
시대후한 말기
출생170년
사망207년 10월 (추정)
향년37세
사인병사
봉효(奉孝)
시호정후(貞侯)
작위위양정후(洧陽亭侯)
주요 활동조조의 모사
가족아들 곽혁
관직
최종 관직사공좨주(司空祭酒)
임관196년 이후
주군조조
기타 정보

2. 생애

곽가는 영천군(潁川郡) 양재현(陽翟縣) (현재 허난성 위저우 시) 출신으로,[2] 젊은 시절부터 총명함과 장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으로 명성이 높았다. 20세 무렵에는 이름과 경력을 숨기고 속세와 거리를 두며 천하의 영걸들과 교류했다.[3] 처음에는 당시 북중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원소를 만났으나, 그가 큰일을 도모할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떠났다.[4]

이후 조조 휘하의 순욱이 일찍 사망한 책사 戲志才|희지재zho의 후임으로 곽가를 추천했다.[5] 조조는 곽가를 만나 천하의 대세에 대해 논의한 후 "나의 대업을 이룰 자는 이 사람밖에는 없다"고 극찬했으며, 곽가 역시 "진정 나의 주군이다"라며 조조를 섬기기로 결심했다.[5] 조조는 곽가를 당시 사공( 司空|사공zho )의 직위에 있던 자신의 군대에서 祭酒|제주zho로 임명했고,[5][48] 곽가는 이후 11년간 조조의 핵심 참모로 활약하며 수많은 중요한 조언을 남겼다.

곽가는 조조를 도와 여포를 토벌하는 데 기여했으며,[19][20] 관도 전투를 앞두고 손책의 허[59] 기습 가능성에 대한 군 내부의 불안감을 그의 이른 죽음을 예측함으로써 해소시켰다. 원소 사후에는 그의 아들들인 원담원상 사이의 내분을 유도하여 조조가 기주를 평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0][53] 또한 오환 정벌 당시,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벌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경기병을 이용한 신속한 기습 작전을 제안하여 백랑산 전투의 승리와 북방 평정에 크게 기여했다.[32][33] 곽가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계책을 제시하는 능력으로 조조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으며, 조조는 "오직 봉효(곽가의 자)만이 나의 참뜻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평소 품행이 단정치 못하다는 이유로 진군에게 여러 차례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조조는 곽가의 뛰어난 재능을 아껴 계속 중용하는 한편, 공정하고 인물 감정에 뛰어났던 진군 역시 중용했다. 이는 조조의 인재 등용 방식을 보여주는 일화로 여겨진다.

207년, 오환 정벌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풍토병에 걸려 3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55] 조조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장례식에서 "천하가 태평해지면 후사를 그에게 맡기려 했었다"고 탄식했다.[36] 조조는 헌제에게 상주하여 곽가의 식읍을 800호 더해 총 1,000호가 되게 하고, 貞侯|정후zho라는 시호를 내렸다.[37][38] 208년 적벽 대전에서 크게 패배했을 때, 조조는 "곽봉효가 살아있었다면 내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의 부재를 깊이 안타까워했다.[39][40]

곽가의 생애에 대한 권위 있는 역사적 자료는 3세기 진수가 저술한 《삼국지》이며, 5세기 배송지가 《삼국지》 주석을 통해 부현의 《부자(傅子)》, 왕침 등의 《위서(魏書)》, 곽송의 《세어(世語)》 등 다양한 자료를 통합하여 전하고 있다.

2. 1. 초기 생애와 은둔

곽가는 영천군(潁川郡) 양재현(陽翟縣) (현재의 허난 성 위저우) 출신이다.[2] 젊은 시절부터 총명함과 장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으로 명성이 높았다. 19세 무렵 성인이 되었고, 천하가 혼란해지자 20세부터는 이름과 경력을 숨기고 속세와 거리를 두며 지냈다. 그는 전국을 다니며 사대부 및 재능 있는 인물들과 교류했지만, 일반 대중과는 어울리지 않았기에 그를 아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아는 이들은 모두 그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았다. 26세(혹은 27세)에는 한나라 정부에서 사도( 司徒|쓰투중국어 ) 직책의 하급 관리로 잠시 일했다.[3]

이후 당시 북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벌이었던 원소를 만나기 위해 허베이로 갔다. 그러나 직접 만나본 뒤 원소는 함께 일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곽가는 원소의 참모였던 신평곽도에게 "총명한 참모는 주군을 선택할 때 신중해야 하며, 그래야 주군이 그의 모든 조언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러면 참모는 명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원공(원소)은 인재를 등용하여 섬기게 하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불필요한 세부 사항에 너무 집중하고 요점을 간과하며, 많은 의견을 듣는 것을 좋아하지만 결단력이 없습니다. 그가 제국의 어려움을 구하고 여러 군벌에 대한 패권을 달성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원소를 떠났다.[4] 이후 다시 은둔했다.

2. 2. 원소와의 만남과 결별

곽가는 젊은 시절부터 장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뛰어났다고 한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자신의 이름과 경력을 숨긴 채 천하의 영웅호걸들과 교류하며 세속적인 삶과는 거리를 두었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오직 식자들 사이에서만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27세에는 사도의 관청으로부터 초빙을 받기도 했다.

곽가는 당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원소를 만났으나, 그와 함께 큰일을 도모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그의 곁을 떠났다. 이후 조조가 곽가에게 하북의 원소에 대한 대책을 묻자, 곽가는 조조에게는 열 가지 승리 요인이 있고 원소에게는 열 가지 패배 요인이 있다고 분석하며 조조의 승리를 예측했다. 이를 '십승십패론(十勝十敗論)'이라 부른다.[56]

곽가가 분석한 조조의 십승(十勝)과 원소의 십패(十敗)는 다음과 같다.[56]

구분조조 (승리 요인)원소 (패배 요인)
도 (道)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러움번거로운 예법에 얽매임
의 (義)황제를 받들어 대의명분을 세움천자의 권위에 도전함
치 (治)법에 따른 엄격한 통치관대함으로 관대함을 구하는 느슨한 통치
도 (度)재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함의심이 많고 혈연관계에 따라 사람을 씀
모 (謀)뛰어난 책략을 세우고 즉시 실행함계획만 세우고 결단을 내리지 못함
덕 (德)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대의를 추구함겉치레에 능한 사람들이 모여듦
인 (仁)백성들의 보이지 않는 고통까지 헤아림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여 백성을 돌보지 않음
명 (明)명확한 판단력으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음주변의 참언(讒言)에 쉽게 휘둘림
문 (文)공과 사를 구별하여 상벌을 명확히 함상벌의 기준이 불분명함
무 (武)병법의 요체를 파악하고 정예병을 활용함허세를 부리고 병력 수에만 의존함



이 분석을 통해 곽가는 원소의 한계를 명확히 지적하고 조조가 천하 통일에 더 적합한 인물임을 설명했다. 동시에, 원소가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 조조에게 남쪽의 여포를 먼저 격파할 것을 진언하기도 했다.[56]

2. 3. 조조와의 만남과 등용

곽가는 젊은 시절부터 장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20세가 되자 이름과 경력을 숨기고 천하의 영걸들과 교류하며 속세와는 거리를 두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고, 식자들 사이에서만 이름이 알려졌다. 27세에는 사도의 관청에서 초빙을 받기도 했다.

곽가는 처음에 원소를 만났으나, 그의 사람됨과 방식이 자신과 맞지 않다고 여겨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미 원소를 섬기고 있던 같은 군 출신의 신평곽도에게 원소의 결점을 지적하며 경고한 뒤 조용히 그를 떠났다.

당시 조조에게는 戲志才|희지재zho라는 촉망받는 책사가 있었으나 일찍 사망했다. 조조는 희지재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함께 계책을 논할 사람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는 같은 영천 출신인 순욱에게 "희지재를 대신할 만한 인재가 없는가?"라고 물었고, 순욱은 곽가를 추천했다.[5] 조조의 부름을 받은 곽가는 조조와 만나 천하의 대세에 대해 깊이 논의했다. 대화 끝에 조조는 크게 만족하며 "나의 대업을 이룰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극찬했다. 곽가 역시 물러나면서 "진정 내가 섬길 주군이다"라며 기뻐했다.[5] 조조는 즉시 곽가를 당시 사공 직위에 있던 자신의 군대에서 祭酒|제주zho로 임명했다.[5][48] 이후 곽가는 죽을 때까지 11년간 조조를 섬기며 중요한 순간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부자(傅子)》에 따르면, 조조가 당시 하북에서 강대한 세력을 이루고 있던 원소에 대한 대처 방안을 묻자, 곽가는 조조가 원소보다 뛰어난 열 가지 이유를 들며 조조의 승리를 예측했다.[6] 조조가 "원소는 기주, 청주, 병주를 아우르며 광대한 영토와 많은 병력을 가졌고,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이는데, 나의 군대는 그보다 약하니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7] 곽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 "누구나 유방과 항우의 경쟁을 알고 있습니다. 유방은 지략으로 승리했고, 항우는 강했지만 결국 패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원소에게는 열 가지 단점이 있고, 공(조조)에게는 열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원소의 군대가 많다 한들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 # '''도(道)''': 원소는 형식적인 예법에 얽매이지만, 공께서는 자연스러우니 도에서 앞섭니다.[8]

: # '''의(義)''': 원소는 천자에게 거역하지만, 공께서는 한실의 권위를 받들어 천하를 호령하니 의에서 앞섭니다.[9]

: # '''치(治)''': 한나라는 법과 규율이 해이해져 쇠퇴했습니다. 원소는 관대함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느슨하여 기강이 서지 않으나, 공께서는 엄격하게 다스리니 치에서 앞섭니다.[10]

: # '''도(度)''': 원소는 겉으로는 포용하는 듯하나 속으로는 의심이 많아 친족만 신임하지만, 공께서는 겉은 단순해 보여도 속은 명철하며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고 신뢰하니 도량에서 앞섭니다.[11]

: # '''모(謀)''': 원소는 결단력이 부족하여 많은 계획을 세우고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지만, 공께서는 결단력 있게 계책을 실행하고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니 모략에서 앞섭니다.[12]

: # '''덕(德)''': 원소는 명성을 이용해 사람을 모으지만 주변에는 현란한 말로 자신을 포장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공께서는 진심으로 인재를 대하며 충성스럽고 유능한 이들이 따르니 덕에서 앞섭니다.[13]

: # '''인(仁)''': 원소는 눈앞의 굶주림과 추위에는 관심을 보이나 보이지 않는 고통은 헤아리지 못합니다. 공께서는 때로 사소한 것을 지나치기도 하나, 큰일을 처리할 때는 사해의 백성을 아우르며 그들의 실질적인 필요를 채워주니 인에서 앞섭니다.[14]

: # '''명(明)''': 원소의 진영에는 파벌 다툼과 참언이 끊이지 않지만, 공께서는 올바른 원칙으로 조직을 이끌어 부정이 없으니 명철함에서 앞섭니다.[15]

: # '''문(文)''': 원소는 옳고 그름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지만, 공께서는 공과 사, 상벌이 분명하니 문에서 앞섭니다.[16]

: # '''무(武)''': 원소는 허세를 부리고 병력 수에만 의존하며 용병의 요체를 모르지만, 공께서는 적은 병력으로도 뛰어난 용병술로 승리하니 마치 전쟁의 신과 같아 무에서 앞섭니다."[17]

조조는 이 말을 듣고 웃으며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게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오."라고 답했다. 곽가는 이어서 "원소는 지금 북쪽의 공손찬과 싸우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기회에 동쪽의 여포를 먼저 공격해야 합니다. 만약 여포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훗날 원소가 남하할 때 여포가 배후에서 그를 도울 것이니 심각한 위협이 될 것입니다."라고 진언했고, 조조는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18][56]

한편, 유비가 조조에게 의탁해왔을 때, 조조는 그를 예주목으로 임명했다. 이때 어떤 이[49]는 유비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조조에게 진언했다. 이에 대한 곽가의 반응은 기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위서(魏書)』에 따르면 곽가는 명성이 높은 유비를 살해함으로써 조조의 평판이 떨어지고 현자들이 조조에게 벼슬하는 것을 꺼릴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고, 조조는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반면 『부자(傅子)』에서는 곽가가 유비의 큰 재능과 인심을 얻고 있는 점을 들어 결코 다른 사람 밑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며 후환을 없애기 위해 제거할 것을 진언했다고 기록한다.[57] 유비가 훗날 조조에게서 독립하여 대적하자, 조조는 곽가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전해진다.[57]

2. 4. 조조의 책사로서 활약

순욱조조에게 희지재의 후임자로 곽가를 추천했다. 조조는 곽가를 만나 천하의 대업에 대해 논의한 후 "나의 대업을 이룰 자는 이 사람밖에는 없다"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곽가 역시 "진정 나의 주군이다"라고 기뻐하며 조조를 섬기기로 결심했다. 조조는 곽가를 군사제주[48]로 삼았고, 이후 곽가는 11년간 조조의 핵심 참모로 활동하며 수많은 중요한 조언을 남겼다.

곽가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계책을 제시하는 능력으로 조조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조조는 "오직 봉효(곽가의 자)만이 나의 참뜻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주요 활약으로는 여포 토벌전에서 퇴각을 고려하던 조조에게 순유와 함께 맹공을 주장하여 승리를 이끈 것, 관도 전투를 앞두고 손책의 허[59] 기습 가능성에 대해 그의 때이른 죽음을 예측하여 군심을 안정시킨 것 등이 있다. 또한 원소와의 결전을 앞두고 조조가 가진 10가지 장점과 원소의 10가지 단점을 비교 분석하며 조조에게 승리의 확신을 심어주기도 했다.[6][7] 《부자(傅子)》에 따르면, 곽가는 조조가 원소보다 도(道), 의(義), 치(治), 도(度), 모(謀), 덕(德), 인(仁), 명(明), 문(文), 무(武)의 10가지 측면에서 우월하다고 분석했다.[8][9][10][11][12][13][14][15][16][17] 이 분석과 함께, 원소가 북쪽의 공손찬과 싸우는 동안 동쪽의 여포를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조언했고, 조조는 이를 따랐다.[18]

유비의 처우 문제에 대해서는 상반된 기록이 존재한다. 《위서(魏書)》는 곽가가 명망 높은 유비를 죽이면 조조의 평판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고 기록한 반면,[22] 《부자(傅子)》는 유비의 야심과 인망을 경계하며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전한다.[23] 배송지는 두 기록 중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하지 않았다.[24]

원소 사후, 그의 아들들인 원담원상이 후계 다툼을 벌이자, 곽가는 즉시 공격하기보다 형제간의 내분이 격화되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할 것을 조언했다. 조조가 이 계책을 받아들여 남쪽의 유표를 치는 척하자, 예상대로 원씨 형제는 서로 싸우기 시작했고, 결국 조조는 이들을 각개격파하여 기주를 평정할 수 있었다.[30][53] 이 공으로 곽가는 위양정후에 봉해졌다.[31]

이후 원상과 원희오환족에게 의탁하여 변방을 소란스럽게 하자, 조조는 오환 정벌을 결심했다. 많은 신하들이 유표의 배후 공격을 우려하며 반대했지만, 곽가는 유표가 유비를 중용하지 못할 것이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오환과 손잡은 원씨 잔당을 방치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오환이 방심하고 있을 때 치중을 버리고 경기병으로 신속하게 기습해야 한다고 진언했다.[32][33] 조조는 곽가의 계책을 따라 백랑산 전투에서 오환을 대파하고 북방을 평정했다.

그러나 곽가는 오환 정벌에서 돌아오는 길에 풍토병에 걸려 3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55] 조조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그대들은 모두 나와 동년배이지만, 곽가만이 매우 젊었다. 천하가 태평해지면 후사를 그에게 맡기려 했었다"고 탄식했다. 조조는 헌제에게 상주하여 곽가의 식읍을 800호 더해 총 1,000호가 되게 하고, 정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208년 적벽 대전에서 대패했을 때, 조조는 "곽봉효가 살아있었다면 내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의 부재를 안타까워했다.

한편, 진군은 곽가의 평소 품행이 단정치 못함을 여러 차례 지적하며 탄핵했지만, 조조는 곽가의 뛰어난 재능을 아껴 계속 중용하는 한편, 공정하고 인물 감정에 뛰어났던 진군 역시 중용했다. 이는 조조의 인재를 아끼는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로 평가받는다.

2. 4. 1. 여포 토벌전

198년, 조조는 경쟁자 여포를 상대로 서주에서 군사 작전을 개시하여 하비 전투로 이어졌다. 여포는 세 번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하비(현재의 피저우시, 장쑤성)로 후퇴했다. 조조의 군대는 수개월 동안 도시를 포위했지만 여포와 그의 부대가 완강하게 저항하여 함락시키지 못했다. 당시 조조의 병사들은 지쳐 있었고, 조조는 군대를 철수할 생각까지 했다.[19][20]

이때 곽가는 순유와 함께 퇴각하려던 조조에게 계속 공격할 것을 진언했다. 곽가는 "여포는 용감하지만 무모합니다. 그의 군대는 이미 세 번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기가 저하되어 있습니다. 병사들은 지휘관을 따르는데, 지휘관이 약점을 보이면 싸울 의지를 잃을 것입니다. 여포에게는 지략가인 진궁이 있지만 그의 전략은 항상 한발 늦습니다. 지금 여포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고 진궁이 아직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하여 맹렬히 공격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조언했다.[19][20]

''부자''에는 곽가가 조조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과거 항우는 70번이 넘는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불리해지자 결국 패망했습니다. 이는 그의 개인적인 용기에만 의존하고 전략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여포는 세 번의 전투에서 연달아 패배했고, 군대의 사기가 떨어졌으며 방어는 약화되었습니다. 그의 힘은 항우에 비할 바가 아니며, 지금 그는 패배와 피로에 지쳐 있습니다. 우리의 우세를 이용하여 그를 공격하면 격파할 수 있습니다."[21]

조조는 곽가와 순유의 조언을 받아들여 공세를 계속했고, 沂강과 사 강의 물줄기를 하비성으로 돌려 수공을 펼쳤다. 결국 여포는 패하여 사로잡혔고, 조조는 하비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19][20][50]

2. 4. 2. 관도 대전

관도 전투를 앞두고 조조원소보다 먼저 서주를 장악한 유비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일부 참모들은 조조가 자리를 비운 사이 원소가 공격해 올 것을 우려했다. 조조가 고민하자 곽가는 의견을 제시했다. 《부자(傅子)》에 따르면, 곽가는 "원소는 의심이 많고 결단력이 부족해 빨리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 유비는 서주를 막 장악하여 기반이 불안정합니다. 우리가 빠르고 강력하게 공격하면 쉽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이 결정적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라고 조언했다. 조조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즉시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 유비를 격파했다. 패배한 유비는 하북의 원소에게 의탁했지만, 그동안 원소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28] 그러나 배송지는 《삼국지》 조조전(曹操傳)을 근거로, 곽가가 아닌 조조 자신이 이 계책을 생각해냈다고 평가했다.[29]

이보다 앞서 유비가 조조에게 의탁했을 때, 그를 죽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때 곽가의 조언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위서』에서는 곽가가 명망 높은 유비를 죽이면 조조의 평판이 떨어지고 인재 등용에 어려움이 생길 것이라며 반대했다고 한다. 반면 『부자』에서는 유비의 재능과 인망을 고려할 때 언젠가 위협이 될 것이므로 제거해야 한다고 진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조가 원술의 북상을 막기 위해 유비를 서주로 파견하려 했을 때, 곽가는 정욱과 함께 반대했다. 그러나 조조는 유비를 보냈고, 결국 유비가 배반하자 조조는 이를 후회했다고 전해진다("무제기").

200년,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강동손책이 허도를 기습할 움직임을 보이자 조조군은 불안에 휩싸였다.[59] 그러나 곽가는 손책이 강동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숙청으로 많은 원한을 샀고, 스스로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으므로 머지않아 암살당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실제로 손책은 사냥 중에 과거 자신이 죽인 허공의 식객들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었고, 이 부상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

관도 전투에서 패배한 원소가 병사하자, 그의 아들 원담원상 사이에 후계자 다툼이 벌어졌다. 조조는 이 기회에 원씨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려 했으나, 곽가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원소는 후계자를 명확히 지명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지금 공격하면 그들이 힘을 합칠 것이니, 그냥 내버려두면 서로 싸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남쪽의 유표를 공격하는 척하며 상황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조언했다. 조조가 이 말을 따라 군대를 물리고 유표를 치기 위해 서평으로 이동하자, 예상대로 원담과 원상은 내분을 시작했다.[53]

후계자 싸움에서 밀려난 원담이 신비를 보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조조는 원상을 격파하고 을 함락시켰다. 그 후 원담이 약속을 어겼다는 명분으로 공격하여 남피에서 그를 참수하고 기주를 완전히 평정했다. 이 공으로 곽가는 양정후(陽亭侯)에 봉해졌다.

2. 4. 3. 원소 사후 내분 진압

원소 사후 그의 아들 원담원상은 아버지의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조조는 202년에서 203년에 걸쳐 여양 전투에서 원담과 원상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조조 휘하의 많은 장수들은 이 기세를 몰아 원씨 세력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곽가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원소가 생전에 두 아들을 모두 아꼈기에 후계자를 명확히 지명하지 않았고, 곽도방기와 같은 참모들이 각기 다른 아들을 지지하고 있어 내부 갈등이 필연적이라고 분석했다. 곽가는 "만약 우리가 계속 공격한다면 원씨 형제는 위기감 속에 단결하여 우리에게 저항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군대를 물리고 남쪽의 형주 자사 유표를 공격하는 척하면, 그들은 내부 분열을 일으켜 서로 싸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를 기다렸다가 공격하면 쉽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조언했다.[30][53]

조조는 곽가의 전략을 받아들였다. 그는 군대를 철수시키고 유표를 공격할 것처럼 서평으로 출병하는 등 남진할 준비를 했다.[30][53] 곽가의 예측대로 원담과 원상 사이에 격렬한 내분이 발생했고, 결국 원담은 원상에게 패배하여 평원으로 후퇴했다. 궁지에 몰린 원담은 신비를 사신으로 보내 조조에게 항복하고 원상을 치는 데 도움을 요청했다.

조조는 원담의 항복을 받아들인 후, 군대를 북쪽으로 진격시켜 204년 업 전투에서 원상을 격파하고 기주의 중심지인 업을 함락시켰다. 이후 205년, 조조는 원담이 약속을 어겼다는 등의 명분을 내세워 그를 공격했고, 남피 전투에서 원담을 격파하고 참수했다. 이로써 조조는 중국 북부의 핵심 지역인 기주 대부분을 평정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곽가의 통찰력과 전략적 조언은 원씨 세력 격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공헌을 인정하여 한나라 조정은 곽가에게 위양정후(洧陽亭侯)의 작위를 하사했다.[31]

2. 4. 4. 오환 정벌

원소 사후 그의 아들들인 원상원희는 조조에게 패배하여 북방의 오환족에게 망명했다. 이들은 오환의 지원을 받아 조조의 국경 지역을 계속 침공하며 반란을 부추겨 조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32] 더 이상 피해를 지켜볼 수 없었던 조조가 오환 정벌을 논의했을 때, 대부분의 신하들은 유표유비를 이용해 수도 허를 공격할 것을 염려하며 반대했다. 그들은 남쪽의 유표를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4][32]

그러나 곽가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유표가 의심이 많아 유능한 유비를 중용하지 못할 것이므로 남쪽의 위협은 크지 않다고 분석했다. "유표는 자신이 유비를 제대로 다룰 그릇이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으므로, 중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심하고 원정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우려를 불식시켰다.[54] 오히려 살아생전 신망이 높았던 원소의 후계자인 원상이 오환과 손잡고 옛 원소 세력의 내응을 유도하며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할 경우, 유주는 물론 청주와 기주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곽가는 오환이 조조의 군대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해 방심하고 있을 것이므로, 지금 기습 공격을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2] 결과적으로 조조가 오환을 공격하는 동안 유표는 실제로 아무런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54]

조조는 곽가의 의견을 받아들여 오환 원정에 나섰다. 군대가 역현(易縣)에 이르렀을 때, 곽가는 다시 한번 계책을 진언했다.

“병사는 신속함을 귀하게 여깁니다('''병귀신속'''). 지금 천 리 밖에 있는 적을 습격하므로 치중(輜重, 보급품)이 많으면 유리한 지점에 빨리 도착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적들이 우리의 접근을 알게 된다면 필히 방비를 튼튼히 할 것입니다. 지금 바로 치중을 남겨두고, 경기병(輕騎兵)을 동원해 밤낮없이 행군하여 적의 허를 찔러야 합니다.”[33]

조조는 이 계책을 채택하여 군대를 이끌고 률룡새(盧龍塞)의 비밀 통로를 지나 오환 추장의 본거지로 향했다. 오환은 조조군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충격을 받고 급히 군대를 모았으나, 백랑산 전투에서 조조에게 크게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오환의 수장 답돈은 전사했다. 원상과 원희는 요동으로 도망쳐 군벌 공손강에게 의탁했으나, 공손강은 그들을 붙잡아 처형하고 그들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다.[33] 이로써 조조는 북방 지역을 완전히 평정하게 되었다.

오환 정벌을 마치고 유성(柳城)에서 귀환하던 도중, 곽가는 풍토병에 걸려 병을 치료하다 3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55] 조조는 곽가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장례식에서 순유 등 다른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군들은 모두 나와 동년배인데, 곽가 혼자만 유난히 젊었다. 천하가 태평해지면, 후사를 그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조조는 헌제에게 상주하여 곽가의 식읍을 800호 더해 총 1,000호가 되게 하였고, '정후'(貞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이 작위를 이었다.

208년 적벽 대전에서 크게 패배했을 때, 조조는 "만약 봉효(곽가의 자)가 있었다면, 내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탄식하며 그의 부재를 깊이 아쉬워했다.

경원 3년(262년), 조환(원제) 시대에 곽가는 조조의 묘정에 공신으로 제사되었다. 이는 하후돈, 조인, 정이 등 다른 주요 공신들이 조예(명제)나 조방(제왕) 시대에 제사된 것에 비해 상당히 늦은 시점이었다. 배송지는 정이를 먼저 제사하고 곽가를 뒤늦게 포함시킨 조치에 대해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평했다.

2. 5. 요절과 조조의 애도

오환 정벌이 끝나고 유성에서 귀환하던 도중, 곽가는 풍토병에 걸려 병을 치료하다가 207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55] 조조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장례식에서 순유 등 신하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36]

> "그대들은 모두 나와 동년배이다. 곽가만이 매우 젊었다. 천하가 태평한 시기가 오면 후사를 그에게 맡기려 했었는데, 그는 어린 나이에 죽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조조는 헌제에게 상소를 올려 곽가의 공적을 기리며 그의 식읍을 800호 더해 총 1,000호로 만들어 주었고, 貞侯|정후중국어라는 시호를 내렸다.[37][38] 곽가의 아들이 그의 작위를 이었다.

208년 적벽 대전에서 크게 패배한 조조는 허창으로 돌아가던 중 巴丘|파구중국어를 지나며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39][40]

> “곽봉효가 살아있었다면 내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조는 곽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순욱에게 두 차례 편지를 보내 슬픔을 표하기도 했다.[41]

후일 경원 3년(262년), 조환(원제) 시대에 곽가는 조조의 묘정에 공신으로 제사되었다. 이는 하후돈, 조인, 정이 등이 조예(명제) 시대에, 다른 21명의 공신들이 조방(제왕) 시대에 제사된 것에 비해 상당히 늦은 것이었다. 배송지는 정이를 먼저 제사하고 곽가를 나중에 포함시킨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언급했다.

3. 평가

조조는 곽가가 사리에 밝고 정확한 통찰력을 가졌다고 평가하며 "나의 진의를 이해하는 것은 봉효(곽가의 자)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그러나 진군은 곽가의 행동이 모범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자주 그를 탄핵했다. 곽가는 이러한 비판에 개의치 않았고, 조조 역시 곽가의 재능을 아껴 계속 중용했다. 동시에 조조는 공정한 진군의 재능 또한 똑같이 아꼈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곽가를 정욱, 동소, 유엽, 장제와 함께 뛰어난 책략가로 평가했다. 다만, 순유와 비교하며 덕업(德業)이 없었다고 평했다.

4. 삼국지연의에서의 곽가

삼국지연의에서도 곽가는 정사와 마찬가지로 천재적인 통찰력을 지닌 군사로 묘사된다. 조조를 섬기게 된 경위는 순욱정욱을 추천하고, 정욱이 다시 곽가를 추천하는 형식으로 그려진다. 곽가 자신도 유엽을 추천하였다.

유비여포에게 패배하여 조조에게 의탁하려 할 때, 주변에서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유비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곽가는 유비를 받아들여 천하에 조조의 덕을 보여야 한다고 반대했는데, 이는 정사 본문에는 없는 내용으로, 연의가 주석으로 인용된 《위서》의 기록을 따른 것이다.

소설 제33장에서는 조조를 따라 원상, 원희 형제와 오환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병을 얻는 것으로 나온다. 이때 곽가는 조조에게 무거운 짐을 뒤에 두고 가벼운 군대로 신속하게 적을 공격하라고 조언했고, 이는 이후 백랑산 전투에서 조조가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곽가는 요주(易州)에 남아 요양했으나 결국 병사했고, 조조는 그의 죽음을 깊이 슬퍼했다.[47]

곽가는 죽기 전에 조조에게 편지를 남겼는데, 이 편지에는 요동으로 도망친 원상과 원희 형제의 최후에 대한 예측이 담겨 있었다. 조조가 원씨 형제를 치러 가려 할 때 부하들은 요동 공격이나 수도 허(許; 현재의 쉬창 시, 허난 성)로의 귀환을 주장했지만, 조조는 곽가의 편지를 떠올리며 기다렸다. 얼마 후, 공손강이 원씨 형제를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보내오자 조조는 곽가의 편지를 공개했다. 편지에는 "공손강은 오랫동안 원씨 형제가 자신의 영토를 탐낼까 두려워했으므로, 그들이 의탁해 오면 반드시 의심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면 공손강과 원씨 형제는 연합하여 저항하겠지만,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그들은 서로 싸우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47] 이는 연의에서 곽가의 공으로 묘사되지만, 정사에서는 조조 자신의 예측으로 기록되어 있다.[60]

이처럼 삼국지연의에서는 순유동소 등 다른 조조 휘하 책사들의 활약이 정사보다 줄어든 반면, 곽가는 뛰어난 지략가로서의 면모가 더욱 부각되어 묘사된다.

5. 가족 관계


  • '''곽가''' (嘉)
  • * 아들: 곽혁 (奕) - 자는 백익(伯益).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했다.[42] 왕창은 자신의 저서 《가계》(家誡)에서 곽혁에 대해 "학문이 깊고 총명했지만 편견이 심하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데 너그럽지 못했다. 그가 총애하는 사람에게는 존경을 표했지만,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경멸했다."고 평가하며 자식들이 그를 본받지 않기를 바랐다.[43] 곽혁은 삼국 시대 조위에서 태자 문학(太子文學)을 지냈으나, 아버지처럼 비교적 일찍 사망했다.[44]
  • ** 손자: 곽심 (深) - 아버지 곽혁의 작위를 계승했다.[45]

증손자: 곽렵 (獵) - 아버지 곽심의 작위를 계승했다.[45]

  • * 손자: 곽창 (敞) - 자는 태중(泰中). 총명함으로 알려졌으며, 삼국 시대 조위에서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지냈다.[46]

6. 대중문화 속의 곽가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진・삼국무쌍 7의 확장판 ''맹장전''에서 처음으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또한 코에이의 ''삼국지전기''와 ''삼국지'' 시리즈에도 등장한다.

緒里 たばさ|이오리 타바사일본어의 만화 王者の遊戯|오자노 유기|왕자의 유희일본어의 주인공이다.

2010년 중국 텔레비전 드라마 ''삼국''에서는 배우 왕진신이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14
[2] 서적 Sanguozhi vol. 14
[3] 서적 Sanguozhi vol. 14
[4] 서적 Sanguozhi vol. 14
[5] 서적 Sanguozhi vol. 14
[6] 서적 Sanguozhi vol. 14
[7] 서적 Sanguozhi vol. 14
[8] 서적 Sanguozhi vol. 14
[9] 서적 Sanguozhi vol. 14
[10] 서적 Sanguozhi vol. 14
[11] 서적 Sanguozhi vol. 14
[12] 서적 Sanguozhi vol. 14
[13] 서적 Sanguozhi vol. 14
[14] 서적 Sanguozhi vol. 14
[15] 서적 Sanguozhi vol. 14
[16] 서적 Sanguozhi vol. 14
[17] 서적 Sanguozhi vol. 14
[18] 서적 Sanguozhi vol. 14
[19] 서적 Sanguozhi vol. 14
[20] 서적 Sanguozhi vol. 10
[21] 서적 Sanguozhi vol. 14
[22] 서적 Sanguozhi vol. 14
[23] 서적 Sanguozhi vol. 14
[24] 서적 Sanguozhi vol. 14
[25] 서적 Huayang Guo Zhi vol. 6
[26] 서적 Sanguozhi vol. 14
[27] 서적 Sanguozhi vol. 14
[28] 서적 Sanguozhi vol. 14
[29] 서적 Sanguozhi vol. 14
[30] 서적 Sanguozhi vol. 14
[31] 서적 Sanguozhi vol. 14
[32] 서적 Sanguozhi vol. 14
[33] 서적 Sanguozhi vol. 14
[34] 서적 Sanguozhi vol. 14
[35] 서적 Sanguozhi vol. 14
[36] 서적 Sanguozhi
[37] 서적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38] 서적 Sanguozhi
[39] 서적 Sanguozhi
[40] 서적 Fu Zi annotation in Sanguozhi
[41] 서적 Fu Zi annotation in Sanguozhi
[42] 서적 Pei Songzhi's annotation in Sanguozhi
[43] 서적 Sanguozhi
[44] 서적 Sanguozhi
[45] 서적 Sanguozhi
[46] 서적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47] 서적 Sanguo Yanyi
[48] 서적 武帝紀
[49] 서적 程昱伝
[50] 서적 武帝紀 198
[51] 문서 199
[52] 서적 董昭伝
[53] 서적 武帝紀 203
[54] 서적 武帝紀
[55] 서적 武帝紀 207
[56] 서적 荀彧伝
[57] 서적 魏書
[58] 서적 武帝紀
[59] 문서 당시 후한의 서울
[60] 문서 삼국지 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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