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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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티노스 4세는 668년부터 685년까지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다. 콘스탄스 2세의 장남으로, 654년에 부황과 함께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그의 치세 동안 이슬람 세력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열어 단의론을 폐기하는 등 종교적 안정을 꾀했다. 불가르족과의 전쟁에서는 패배하여 불가리아 제1제국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쳐야 했다. 그는 33세의 나이로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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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스 4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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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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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콘스탄티누스 4세 |
로마자 표기 | Kōnstantînos |
다른 이름 |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노스 |
별칭 | 호 네오스 (ὁ νέος) |
통치 | |
작위 | 동로마 황제 |
재위 | 668년 9월 - 685년 7월 |
즉위식 | 654년 4월 13일 |
즉위식 종류 | 대관식 |
선임자 | 콘스탄스 2세 |
섭정 | 콘스탄스 2세 (654년–668년) |
공동 황제 | 헤라클리우스 (659년–681년) 티베리우스 (659년–681년) |
후임자 | 유스티니아누스 2세 |
가문 | |
왕조 | 헤라클리우스 왕조 |
아버지 | 콘스탄스 2세 |
어머니 | 파우스타 |
개인 정보 | |
출생 | 650년경 |
출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터키이스탄불) |
사망 | 685년 7월 10일 (약 35세) |
사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
매장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성 사도 교회 |
배우자 | 아나스타시아 |
자녀 | 유스티니아누스 2세 헤라클리우스 |
종교 | 칼케돈 기독교 |
신앙 | |
칭호 | 거룩하고 올바른 믿음을 가진 로마 황제 |
공경 대상 | 동방 정교회 |
축일 | 9월 3일 |
상징 | 황실 복장 |
주요 성지 | 성 사도 교회 |
기타 | |
별명 | 포고나토스 (Πωγωνᾶτος) |
2. 생애
654년 아버지 콘스탄스 2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으며, 668년 아버지가 시칠리아에서 암살당하자 제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시칠리아에서 미지지오스가 일으킨 반란과 소아시아에서 사보리오스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했다. 재위 초기 669년에는 소아시아 반란 과정에서 공동 황제로 추대되었던 두 동생 헤라클리우스와 티베리우스를 처형했다는 기록과, 681년 그들의 공동 황제 지위를 박탈하고 코를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치세의 가장 큰 위협은 우마이야 왕조의 침공이었다. 661년 무아위야 1세가 칼리파가 된 이후 동로마 제국에 대한 공세가 거세졌고, 674년부터 678년까지 4년간 이어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수도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 화약"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80년 무아위야 1세가 사망한 후 야지드 1세와 평화 조약을 맺어 이슬람 세력의 위협을 일시적으로 막아냈으며, 이 승리로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한편, 북방에서는 불가르족의 위협에 직면했다. 680년 아스파루흐가 이끄는 불가르족이 다뉴브강을 건너 제국 영토를 침공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섰으나 온글 전투에서 패배했다. 결국 681년 불가르족에게 영토를 할양하고 불가리아 제1제국의 성립을 인정하며 매년 공물을 바치기로 협정했다. 이탈리아에서는 680년경 랑고바르드 왕국과 강화 조약을 맺었다.
종교적으로는 680년과 681년에 걸쳐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개최하여 단의론을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칼케돈 공의회의 정통 교리를 재확인함으로써 제국 내 종교적 통합을 시도했다. 이는 우마이야 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동방 속주의 단의론 지지자들을 더 이상 고려할 필요가 없어진 정치적 상황 변화와 맞물려 이루어졌다.
685년 이질에 걸려 33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콘스탄스 2세와 파우스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파우스타는 귀족 발렌티누스의 딸이었다.[7] 콘스탄티노스 4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9] 대략 650년경으로 추정된다.[10] 그는 654년 부활절(4월 13일)에 아버지 콘스탄스 2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8]668년 9월, 아버지 콘스탄스 2세가 시칠리아에서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전해지면서 황제 자리에 올랐다.[33] 즉위 직후 첫 번째 과제는 아버지의 죽음을 초래한 메제지우스가 이끄는 시칠리아 군대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었다.[11] 콘스탄티누스 4세는 교황 비탈리아누스의 지지를 받아 즉위 7개월 만에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12] 이 과정에서 충성파 해군 제독 세베루스와 콘스탄티노스에게 합류한 비잔틴 해군의 역할이 컸다. 콘스탄티누스는 시라쿠사에 상륙하여 메제지우스를 체포하고 참수했으며, 그의 지지자들은 사슬에 묶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다.[20]

제위 초기는 이슬람 세력의 거센 압박에 직면한 시기였다. 668년 초,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무아위야 1세는 아르메니아 주둔군 사령관 사보리오스로부터 황제 전복을 돕겠다는 제안을 받았다.[13] 무아위야는 아들 야지드를 보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게 했다. 야지드는 칼케돈까지 진격하여 중요한 도시인 아모리움을 잠시 점령하기도 했다.[14] 669년에는 아랍인들이 카르타고와 시칠리아를 공격했으며,[15] 670년에는 키지쿠스를 점령하여 제국의 심장부를 공격할 발판을 마련했다.[16] 672년에는 스미르나를 비롯한 해안 도시들을 점령하고 대규모 함대를 동원해 해상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직접 공격하기도 했다.[17]
아버지 콘스탄스 2세의 시라쿠사 천도와 암살 이후의 혼란, 그리고 계속되는 아랍의 침공으로 인한 영토 및 광산 상실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초래했다. 특히 귀금속 부족으로 화폐 가치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4세는 고액권의 가치를 조정하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의 무거운 구리 폴리스를 재발행하는 등 통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후 아들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태어나자, 아버지 콘스탄스 2세의 교회 정책과는 다른 방향을 모색하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의 디자인을 따른 화폐 시스템을 재구조화했는데, 이는 자신의 통치를 로마 제국의 부활과 연결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19]
제위 초기 669년 소아시아에서 발생한 반란 당시 공동 황제로 추대되었던 두 동생 헤라클리우스와 티베리우스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처형했다는 기록과,[11] 이후 681년에 공동 황제 지위를 박탈하고 코를 잘랐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그는 후계자인 아들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공동 황제로 삼지 않고, 685년 사망할 때까지 단독 황제로 통치했다.
2. 2. 이슬람과의 전쟁
무아위야 1세가 알리와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661년 우마이야 왕조를 열면서 이슬람 세력과의 충돌이 본격화되었다. 새로운 칼리파가 된 무아위야는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고 동로마 제국 영토 침공을 재개했다.[13] 소아시아에서는 이미 662년부터 공격이 시작되었고, 669년에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맞은편의 칼케돈까지 이슬람 군대가 진출했다.[14][15]668년 초, 칼리프 무아위야 1세는 아르메니아콘 테마의 장군 사보리오스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제를 전복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13] 무아위야는 이를 기회로 삼아 아들 야지드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다. 야지드는 칼케돈에 도착하여 중요한 아모리움을 잠시 점령하기도 했다.[14] 비록 사보리오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반란은 실패했지만, 무아위야는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667년 여름, 파달라 b. 우바이드 알-안사리가 지휘하는 아랍 육군은 동로마 영토를 침공하여 그해 말 칼케돈에 도달해 겨울을 보냈다.[19] 같은 해 가을, 야지드가 이끄는 이집트와 시리아 함대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이 함대에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인 압달라 b. 압바스, 압달라 b. 우마르, 압달라 이븐 알-주바이르, 아부 아이유브 알-안사리 등 주요 인물들이 동승했다.[21]
육군과 해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앞에서 합류하여 수도를 봉쇄했으나, 668년 봄 본격적인 포위 공격 중 심각한 기근과 천연두 유행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야지드는 포위를 풀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19] 이후 아랍 군대와 함대는 키지쿠스에 머물며 소규모 전투와 약탈을 벌이다 669년 또는 670년경 시리아로 돌아갔다. 이슬람 세력은 670년경 키지쿠스를 점령하여 제국 심장부를 공격할 기지로 삼았고,[16] 672년에는 함대가 스미르나 등 해안 도시들을 공격했다.[17]
전통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은 674년부터 678년까지 4년간 지속되었다고 알려졌으나,[17] 일부 현대 연구는 이를 연대기 기록 오류로 보고 실제 주요 공방전은 667년- 668년에 벌어졌다고 주장한다.[19] 이 공방전에서 동로마 제국은 비밀 병기인 "그리스 화약"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우마이야 군대가 먼저 사용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콘스탄티노스 4세는 즉위 직후 시칠리아에서 아버지 콘스탄스 2세를 암살하고 황제를 참칭한 메제지우스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11][20] 그는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가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해군력을 확보했는데, 이는 아랍 해군의 위협에 맞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2][20] 아랍의 위협에 맞서 콘스탄티노스 4세는 672년부터 680년까지 이집트와 시리아에 대한 반격을 통해 공세를 취하며 제국 부활을 꾀하기도 했다.[19]
결국 콘스탄티노스 4세는 수도 방어에 성공했고, 680년 5월 무아위야 1세가 사망하자[19] 그의 후계자 야지드 1세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따라 우마이야 왕조는 매년 공물을 바치고 점령했던 로도스 섬 등에서도 철수했다. 이 승리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전 유럽 기독교권 국가들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한편,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에서는 우마이야 왕조가 670년 내륙에 카이르완을 건설하며 카르타고를 위협했다. 그러나 683년 현지 베르베르족과 동로마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카이르완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후퇴했다. 같은 해 야지드 1세가 사망하면서 우마이야 왕조 내에서 제2차 내란이 발발하자,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대규모 공세는 한동안 멈추게 되었다.
2. 3. 불가르족과의 전쟁
불가르족은 원래 투르크족의 일파로, 다뉴브강(도나우강) 연안에서 점차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었다. 670년대에 아랍과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인해 콘스탄티누스는 서쪽의 롬바르드족과 조약을 맺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10]680년, 칸 아스파루흐가 이끄는 불가르족은 형식상 제국 영토였던 다뉴브강을 건너와 현지 공동체와 슬라브족 부족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28] 같은 해, 콘스탄티노스 4세는 이 침략자들에 맞서 육군과 해군을 동원한 합동 작전을 이끌고 도브루자에 있는 불가르족의 요새화된 진지를 포위했다.[29]

그러나 황제는 건강이 악화되어 군대를 떠나야만 했고, 지휘관을 잃은 동로마 군대는 혼란에 빠져 온갈 전투에서 불가르족에게 패배했다.[30] 결국 681년, 콘스탄티노스 4세는 모에시아 지역에 불가르족 국가가 세워지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했다.[23] 또한, 불가르족이 동로마 제국의 트라키아 지역을 더 이상 침입하지 못하도록 매년 조공(보호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23] 이 패배와 불가르족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콘스탄티노스 4세는 트라키아 테마를 창설했다.[10]
2. 4. 종교 정책
아랍의 위협이 일시적으로 물러가자 콘스탄티노스 4세는 단의설과 정통파 사이에서 분열된 교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23] 그는 680년 11월, 제6차 세계 공의회(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라고도 불림)를 소집하여 기독교 교리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노력했다.[24]
콘스탄티노스 4세는 공의회 초기 11번의 회의와 마지막 18번째 회의에 궁정 관리들과 함께 직접 참석하여 공식적인 절차를 주재했지만, 신학적인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25] 이 공의회에서는 451년 칼케돈 공의회의 정통 교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단의론을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이러한 결정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당시 단의론을 지지하던 신자들의 대부분이 우마이야 왕조 칼리프의 통치 아래 있었고,[26] 아버지 콘스탄스 2세 시대와 달리 오리엔트의 단성론 및 단의론 신자들을 배려할 정치적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공의회는 681년 9월에 마무리되었다.[27]
2. 5. 죽음
685년 콘스탄티노스는 33세의 나이로 이질에 걸려 갑자기 사망했다.3. 가족 관계
콘스탄티노스 4세는 그의 아내인 아나스타시아와의 사이에서 최소 두 아들을 두었다.
- 유스티니아노스 2세 (669년 출생), 그는 16세의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34]
- 헤라클리오스 (약 670년 출생), 그의 아버지인 콘스탄티노스 4세가 자신의 아들과 동생의 머리카락을 교황 베네딕토 2세에게 보낸 일화로 알려져 있다.[35][3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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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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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Ö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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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was Constantine Pogona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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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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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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