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 (중산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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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승(중산정왕)은 전한 경제의 아들로, 기원전 154년 중산국의 왕으로 봉해졌다. 그는 주색을 즐기고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무제 시대에 제후왕 탄압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유승은 42년간 재위하다 기원전 113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무덤에서는 금루옥의와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유승의 후손으로는 유비와 유곤 등이 있다고 전해진다.

유승 (중산정왕)
기본 정보
이름류성 (劉勝)
로마자 표기Ryu Seung
봉호중산정왕 (中山靖王)
가문한나라
아버지경제
어머니가희
배우자두완
자녀유창, 유진
생년미상
사망기원전 113년
묘소미상
재위 기간기원전 154년 - 기원전 113년
봉국
봉국중산국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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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의 옥으로 만든 장례복, 허베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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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대기

기원전 154년, 경제 3년에 오초칠국의 난이 진압된 후, 교서우왕 유단과 함께 제후왕으로 봉해져 중산국의 왕이 되었다. 중산국의 수도는 노노였다. 유승은 친형 유팽조가 광천왕에 책봉된 다음 해에 중산왕에 책봉되었다.

기원전 138년, 건원 3년에 대왕 유등, 장사유발, 중산왕 유승, 제천왕 유명이 함께 입조하자, 무제는 연회를 베풀었다. 유승은 이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제후왕에 대한 탄압 정책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했고, 무제는 이를 받아들여 제후왕에 대한 예우를 후하게 하였다. 그러나 무제는 후에 주보언의 제안으로 추은령을 시행하여 제후왕의 영지를 축소시켰다.

유승은 평소 주색을 즐기고 많은 희첩을 거느려 아들과 손자를 합쳐 120여 명이나 두었다. 유승과 그의 형 유팽조는 서로 다른 통치 방식으로 인해 갈등을 빚었다.

기원전 113년, 재위 42년 만에 사망하였고, 아들 중산애왕 유창이 뒤를 이었다. 1968년, 허베이성 보정시 만성구의 만성 한묘에서 유승과 왕비 두씨(휘는 완)의 관이 발굴되었다. 이때 금루옥의, 은루옥의 등 유품도 함께 발견되었다.

2.1. 초기 생애와 중산왕 즉위

기원전 154년, 경제 3년에 오초칠국의 난이 진압된 후, 교서우왕 유단과 함께 제후왕으로 봉해져 중산국의 왕이 되었다. 중산국의 수도는 노노였다. 유승은 친형 유팽조가 광천왕에 책봉된 다음 해에 중산왕에 책봉되었다.

기원전 138년, 건원 3년에 대왕 유등, 장사유발, 중산왕 유승, 제천왕 유명이 함께 입조하자, 무제는 연회를 베풀었다. 유승은 이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제후왕에 대한 탄압 정책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했고, 무제는 이를 받아들여 제후왕에 대한 예우를 후하게 하였다.

유승은 평소 주색을 즐기고 많은 희첩을 거느려 아들과 손자를 합쳐 120여 명이나 두었다. 반면, 그의 친형 유팽조는 조정에서 파견한 국상의 권한을 빼앗고 하급 관리들의 일까지 직접 처리하며 조나라를 다스렸다. 이 때문에 유승과 유팽조는 서로를 비난했는데, 유승은 "형은 왕으로서 관리를 대신해 정치를 독차지하고 있다. 왕이라면 마땅히 날마다 음악을 듣고 여자를 즐겨야 한다!"라고 비판했고, 유팽조는 "중산왕은 사치하고 음란할 뿐 천자를 도와 백성을 돌보지 않는데, 어찌 번신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맞받아쳤다.

2.2. 제후왕 탄압 정책 비판

건원 3년(기원전 138년), 대왕 유등, 장사유발, 중산왕 유승, 제천왕 유명이 함께 입조했고 무제는 주연을 베풀었다. 유승은 그 자리에서 울었고, 무제가 그 이유를 묻자 제후왕에 대한 적극적인 탄압 정책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경제와 무제 시대에는 조조의 정치를 따라 제후왕의 영토를 삭감하는 정책을 일관적으로 시행해 왔고, 제후왕의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찾아내 상주했다. 잘못이 없다면 그 수하들을 모욕하고 태형에 처하기도 해 제후왕들의 잘못을 날조하려고도 했다. 그렇기에 제후왕들은 이에 대한 원한이 많이 쌓였다.

무제는 유승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후왕에 대한 예를 후하게 했고, 제후왕의 일을 상주하는 일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무제는 나중에 주보언의 제안을 받아들여 추은령을 시행해 제후왕의 영지를 그 자제들에게 나누어 한나라에서 봉호를 정하고 그 봉토는 한나라의 군에 속하게 하니, 제후왕의 영지는 잘게 나뉘어 결국 약소해졌다.

2.3. 유팽조와의 관계

유승은 주색을 좋아하고 궁중에 사랑하는 희첩이 많아 아들과 손자가 합쳐서 120여 명이었다. 친형 유팽조는 계략을 써서 조정에서 파견한 국상의 권한을 빼앗아 하급 관리들의 일까지 직접 맡으며 조나라를 다스렸는데, 그 때문에 서로 비난하였다. 유승은 “형은 왕으로써 관리를 대신해 통치를 오로지한다. 왕이라면 마땅히 날마다 음악을 듣고 여자를 즐겨야지!”라고 했고, 유팽조는 “중산왕은 사치하고 음란할 뿐 천자를 도와 백성을 돌보지 않는데, 어찌 번신이라 일컫는가!”라고 했다.

동복 형인 유팽조는 유승에게 "너는 나와 어머니가 같은 동생이지만, 왕이면서 음락에 빠져 왕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어찌 네가 전한의 번왕의 신분이라 할 수 있겠느냐"라고 신랄하게 평가했다. 그러나 유승도 형에게 대항하여 "형님이야말로, 왕이면서 어째서 혹리 같은 짓을 하십니까? 매일 도적을 잡아서 처형하는 생활을 보내면서 즐겁습니까? 또 형님은 법률을 엄격하게 하여 밤늦도록 몸을 혹사하는 것 같은데, 그것도 즐겁습니까? 왕이란 향락과 도락을 즐겨야 합니다"라고 형의 아픈 부분을 찔렀다. 이처럼 유승과 유팽조는 같은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였지만, 성격은 달랐다.

2.4. 사망

기원전 113년, 재위 42년 만에 사망하였고, 아들 중산애왕 유창이 뒤를 이었다. 유승은 술과 여색을 밝혔으며, 자녀가 50명 이상, 손자까지 합쳐 120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1968년, 허베이성 보정시 만성구의 만성 한묘에서 유승과 왕비 두씨(휘는 완)의 관이 발굴되었다. 이때 금루옥의, 은루옥의 등 유품도 함께 발견되었다.

3. 유적

허베이성 바오딩 시 만청 구 능산(陵山)에 중산정왕의 묘가 있다. 1968년 발견돼 발굴됐고, 중산정왕과 왕후 두관의 유해를 싼 금루옥의와 술항아리, 박산향로, 장신궁등 등이 나왔다. 금루옥의로 추정해보건대 중산정왕의 키는 약 185cm~186cm 정도로 추정됐다.

금으로 상감된 청동 향로; 서한 시대, 허베이 만성, 중산왕 유승의 묘에서 출토
금으로 상감된 청동 향로; 서한 시대, 허베이 만성, 중산왕 유승의 묘에서 출토


유승의 묘는 1968년 왕중수에 의해 만성 허베이 성 베이징 서쪽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아내인 두완과 함께 묻혔다. 이 묘는 서한 시대에 발견된 최초의 미개봉 묘였다. 두 사람은 산비탈 안의 두 개의 동굴에 묻혔다. 각 동굴에는 보관을 위한 두 개의 측면 방, 관을 위한 뒷방, 그리고 타일 지붕과 나무 지지대가 있는 커다란 중앙 방이 있었는데, 현재는 무너진 상태이다. 묘에서는 2,700점 이상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발굴된 유물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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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수량
청동 유물419점
철기 유물499점
금 유물21점
은 유물77점
옥 유물78점
칠기 유물70점
수레6대 (남쪽 방)
도자기571점 (북쪽 방)
비단-


유물에는 금과 은 침, 장식용 철 단검 등이 포함되었다. 주요 유물 두 점은 박산로라고 알려진 청동 향로와 유승의 옥 의복이다. 박산로는 동해의 신성한 불사의 산을 닮았다. 한나라의 도교 신자들은 그 산이 영원한 삶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었다. 깊은 반구형 그릇과 고전적인 중국식 용이 얽혀 있는 우아한 받침대가 있다. 작품에는 물결 모양의 금 상감 선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동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들쭉날쭉한 봉우리에서 인간과 동물의 부조가 솟아 있다. 박산은 유승의 막대한 부와 한나라 청동 주조 기술에 대한 헌정이다. 유승과 그의 아내는 각각 2,000개가 넘는 옥 조각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옥 의복과 함께 묻혔다.

4.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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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비고
아버지한 경제전한의 황제 (9번째 아들)
어머니가부인
부인두완두황후의 조카
아들유창중산애왕
아들광망절후 유안중 또는 유충원삭 2년(기원전 127년) 6월 갑오일에 봉해짐
아들장량후(將梁侯) 유조평원삭 2년(기원전 127년) 6월 갑오일에 봉해짐
아들신관후(薪館侯) 유미앙원삭 2년(기원전 127년) 6월 갑오일에 봉해짐
아들육성후 유정 (혹은 형성후(陘城侯))원삭 2년(기원전 127년) 6월 갑오일에 봉해짐, 유비의 선조로 여겨짐
아들신처후(薪處侯) 유가원삭 2년(기원전 127년) 6월 갑오일에 봉해짐
아들육지후(陸地侯) 유의 (혹은 형성후(陘城侯))원삭 3년(기원전 126년) 3월 을묘일에 봉해짐
아들임악약후 유광원삭 4년(기원전 125년) 4월 갑오일에 봉해짐
아들동야대후(東野戴侯) 유장원삭 4년(기원전 125년) 4월 갑오일에 봉해짐
아들고평후(高平侯) 유희원삭 4년(기원전 125년) 4월 갑오일에 봉해짐
아들광천후(廣川侯) 유파원삭 4년(기원전 125년) 4월 갑오일에 봉해짐
아들승구절후(乘丘節侯) 유장야 (혹은 상구절후(桑丘節侯) 유양(劉洋))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에 봉해짐
아들고구애후(高丘哀侯) 유파호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에 봉해짐
아들유숙이후(柳宿夷侯) 유개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에 봉해짐
아들융구후(戎丘侯) 유양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에 봉해짐
아들번여절후 유수 (혹은 유조(劉條))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에 봉해짐
아들곡성후(曲成侯) 유만세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에 봉해짐
아들안곽우후(安郭于侯) 유전부 (혹은 유부(劉傅))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에 봉해짐
아들안험후(安險侯) 유응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에 봉해짐
아들안도후(安道侯) 유회 (혹은 안요후(安遙侯))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에 봉해짐
아들팽후 유굴리정화 2년(기원전 91년) 3월 정사일에 봉해짐, 전한의 승상, 그의 아들의 아내는 이광리의 딸
아들유쾌(劉噲)이름만 확인되며, 봉작 기록은 없음
기타 자손유비촉한을 건국, 유정의 후손으로 여겨짐
기타 자손유곤서진 시대부터 오호 십육국 시대에 걸친 무장·정치가·문학가

유승은 손자를 포함해 120명 이상의 자손을 두었다. 그 때문에 후한 말 시대에는 전한 중산왕의 후손이 탁군이나 상산군 등지로 퍼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촉한을 건국한 유비도 그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당나라의 시인 유우석은 유승의 자손을 자칭했지만, 흉노의 후예이다.

5. 후손

중산정왕 유승은 자손이 많아, 손자를 포함해 120명 이상의 자손을 두었다. 다음은 그 중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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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위 || 봉해진 시기 || 비고
유창중산애왕
유안중 (혹은 유충)광망절후원삭 2년(기원전 127년) 6월 갑오일
유조평(劉朝平)장량후원삭 2년(기원전 127년) 6월 갑오일
유미앙(劉未央)신관후원삭 2년(기원전 127년) 6월 갑오일
유정육성후(혹은 형성후)원삭 2년(기원전 127년) 6월 갑오일
유가(劉嘉)신처후원삭 2년(기원전 127년) 6월 갑오일
유의(劉義)육지후(혹은 형성후)원삭 3년(기원전 126년) 3월 을묘일
유광임악약후원삭 4년(기원전 125년) 4월 갑오일
유장(劉章)동야대후원삭 4년(기원전 125년) 4월 갑오일
유희(劉喜)고평후원삭 4년(기원전 125년) 4월 갑오일
유파(劉頗)광천후원삭 4년(기원전 125년) 4월 갑오일
유장야(劉將夜) (혹은 유양(劉洋))승구절후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
유파호(劉破胡)고구애후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
유개(劉蓋)유숙이후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
유양(劉讓)융구후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
유수 (혹은 유조(劉條))번여절후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
유만세(劉萬歲)곡성후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
유전부(劉傳富) (혹은 유부(劉傅))안곽우후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
유응(劉應)안험후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
유회(劉恢)안도후(혹은 안요후)원삭 5년(기원전 124년) 3월 계유일
유굴리팽후정화 2년(기원전 91년) 3월 정사일
유쾌(劉噲)이름만 확인되며, 봉작 기록은 없음


후한 말 시대에는 전한 중산정왕의 후손들이 중산국을 비롯하여 탁군, 상산군 등지로 퍼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촉한을 건국한 유비도 그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삼국지』 「선주전」은 유비를 유승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지만, 유승의 아들 유정이 작위를 잃은 이후 유비의 조부인 유웅까지의 기술은 누락되어 있다.

서진 시대부터 오호 십육국 시대에 걸친 무장, 정치가, 문학가인 유곤도 유승의 자손을 자칭하고 있다.

당나라시인 유우석은 유승의 자손을 자칭했지만, 흉노후예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