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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기 (18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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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홍기(1831년 ~ 1884년?)는 조선 후기의 한의사이자 개화 사상가로, 김정희에게 글을 배우고 오경석 등과 교류하며 개화 사상을 접했다. 그는 개화당 인사들을 양성하고 갑신정변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정변 실패 후 행방불명되었다. 1908년 애국사사추도회에서 추도되었으며, 1910년 규장각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2. 생애

1831년 한성의 무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직업은 한의사였다. 김정희에게서 글과 금석문 해독법을 배웠고, 역관 오경석청나라에서 가져온 서학 서적을 탐독하며 개화에 눈을 떴다. 병인양요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 서세동점의 위기가 조선에도 닥쳤다고 판단, 개항과 개화를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외세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위정척사파와 조정 수구파는 이를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치부하였다.

오경석과 함께 한성부 북촌의 양반 자제들에게 개화사상과 신문물을 소개하고 가르쳤다. 1869년 평안도관찰사였던 박규수가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되자, 이 방안을 박규수에게 제안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1879년 오경석 사후에는 혼자서 개화파를 지도하여 백의정승으로 불렸다.

그의 집 사랑방은 개화혁신 사상의 온상이었으며, 각계각층 사람들을 만나 세계의 신지식과 개화사상을 전파했다.

1882년 감생청 참봉으로 관직에 진출, 개항 이후 개화파의 정계 진출과 정부의 개화 정책에 따라 행정 기구를 개편하기 위한 임시 기관인 감생청에서 어윤중의 자문역을 겸했다. 그러나 감생청은 수구파와 위정척사파의 반대로 6개월 만에 폐지되었고, 어윤중, 김옥균의 다른 직책 제의를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1884년 음력 10월 17일 갑신정변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변 실패 후 오세창 가족과 파주로 피신했으나, 음력 10월 21일 집을 나간 뒤 행방불명되었다. 갑신정변 사후 처리 과정에서 수구파에게 암살된 것으로 추측된다.

2. 1. 초기 활동 (1831년 ~ 1860년대)

1831년 한성의 무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직업은 한의사였다.

2. 1. 1. 유년 시절과 가르침

1831년 한성의 무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의사가 직업이었다. 추사 김정희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금석문 해독법도 배웠다. 이후 친구인 역관 오경석청나라에서 가져온 서학 서적을 탐독하며 개화에 눈을 떴다.

2. 1. 2. 개화 사상 형성

김정희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금석문을 해독하는 것도 배웠다. 이후 친구인 역관 오경석청나라에서 가져온 서학 서적을 탐독하고 개화에 눈을 떴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 청년들이 그의 문하에 출입하며 오경석, 박규수 등과 함께 문인들을 길러냈다. 그 뒤 유홍기는 개화당 인사들의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교 사상이 인간의 자유로운 사상을 억압한다고 본 그는 불교를 깊이 신앙하였으며 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 고금의 역사 지식도 해박하였다. 신체가 장대하고 변설이 유창하였다고 한다.

이웃에 살던 친구이자 역관, 개화사상가인 오경석이 중국에서 구해온 《해국도지》, 《영환지략》, 《박물신편》 등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소개한 서적을 보고 탐독했다. 무력을 동원하여 동양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서양 세력의 실체와 아편전쟁 이후 밀려오는 서양 세력에 의해 반식민지가 되어가던 중국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점차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2. 2. 학문 및 개화 운동 (1860년대 ~ 1882년)

병인양요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겪은 뒤, 유홍기는 서세동점의 위기가 조선에도 급박해졌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외세가 조선으로 침입할 것에 대비하여, 먼저 개항과 개화를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위정척사파와 조정의 수구파는 이러한 주장을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치부하였다.

2. 2. 1. 개화파 양성 노력

오경석과 상의해 한성부 북촌의 영민한 양반 자제들을 뽑아 개화사상과 오경석이 중국 청나라 여행길로부터 구입해 온 신문물을 소개한 서적들을 젊은이들에게 소개하고 가르쳤다. 그리고 새 사상에 동조하는 인사들을 규합해서 나라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는 정치를 실행하게 하자고 합의하였다. 1869년(고종 6년) 평안도관찰사였던 박규수(朴珪壽)가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되어 오자, 유홍기와 오경석은 이 방안을 박규수에게 제안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2. 2. 2. 개화파 지도

1877년 박규수가 병으로 죽자, 오경석을 통하여 박규수의 영향 아래 있던 김옥균, 박영효, 박영교,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백춘배, 유길준, 오세창, 윤치호, 정병하, 이종원, 이정환, 박제경, 이동인, 탁정식 등의 청년들을 소개받아 함께 지도하게 되었다. 1879년 오경석이 병으로 죽게 된 뒤로는 혼자서 이들을 지도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연고로 세간에서는 그를 백의정승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유홍기는 개화당 인사들 뿐 아니라 각계각층 사람들을 만나 담론할 때마다 세계의 신지식(역사, 지리, 풍속, 외교, 국방, 과학기술, 국제정세 등)을 전달하고, 개화사상을 주입시키거나 그 필연성을 강조했다. 당시 중인들이 많이 살던 관철동 그의 집 사랑방은 개화혁신 사상의 온상이며 담론의 장소였다. 그는 교제 범위가 넓고 대단히 신축성이 있었고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개화승 이동인을 비롯한 탁정식, 환속한 차홍식과 김정모 같은 불교계 인사와도 접촉이 많았다.

유홍기는 개화파 인사들과의 연락 행동 책임자로 이동인1879년 8월 일본 본원사 승려의 도움으로 일본에 밀항케 했다. 이동인이 일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올 때 서울에 있던 유홍기는 부산에 가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이때 이동인대원군 계열의 동래부사에게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유홍기가 백방으로 주선하여 석방했다.

2. 3. 관료 생활과 갑신정변 (1882년 ~ 1884년)

유홍기는 백의정승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질 만큼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1882년(고종 19년) 감생청 참봉으로 관직에 진출했다. 개항 이후 개화파들이 정계에 진출하고 정부에서도 개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행정 기구를 미국이나 일본식으로 본뜬 새 기관으로 개편하기 위한 임시 기관으로 감생청이 설치될 때 직원으로 임명되었다.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특채로 관직에 오른 그는 말단 실무 관료였지만, 감생청 제조 어윤중의 자문역을 겸했다. 감생청 직원들을 지도하여 국가 제도 전반에 걸친 정리안을 마련하였으나, 수구파와 위정척사파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감생청은 수구파와 위정척사파의 반대와 규탄 상소로 6개월 만에 폐지되었고, 어윤중, 김옥균의 다른 직책 제의를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윤치호 등 개화파 인사들이 고종에게 여러 번 등용을 상주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 3. 1. 감생청 활동

1882년(고종 19년) 감생청의 참봉으로 출사하여 감생청 직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개항 후 개화파들이 정계에 진출하고 정부에서도 개화정책을 실시하면서, 행정기구를 미국 혹은 일본식으로 본뜬 새 기관으로 행정조직을 개편 정리하기 위한 임시기관으로 감생청을 설치할 때 직원으로 임명된 것이다.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특채로 관직에 올랐으며, 말단 실무관료 직책이었지만 감생청 제조 어윤중의 자문역을 겸하였다. 어윤중은 유홍기로부터 지도를 받고 일본과 중국을 시찰하였으며, 귀국한 뒤에는 유홍기를 방문하여 견문 사항을 이야기하며 논의했다.

유홍기는 감생청 직원들을 지도하여 국가 제도 전반에 걸친 정리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수구파와 위정척사파의 반대로 정리안은 시행되지 못했다. 유홍기는 감생청 직원이 된 지 1개월 만에 감생청부사용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사용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감생청은 수구파와 위정척사파들의 반대와 규탄 상소로 결국 6개월 만에 폐지되었고, 그는 다른 직책을 주선해 주겠다는 어윤중, 김옥균의 제의를 사양하고 관직에서 떠나게 되었다. 이후 당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있던 윤치호 등 개화파 인사들이 고종에게 여러 번에 걸쳐 그를 등용할 것을 상주했으나 등용되지는 못했다. 개화파 인사들은 고종에게 유홍기의 인품과 식견을 이야기하면서 그를 등용할 것을 권했으나, 끝내 등용되지 못했다.

2. 3. 2. 갑신정변과 최후

1884년(고종 21년) 음력 10월 17일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오경석의 아들인 오세창의 가족과 함께 경기도 파주로 피신하였다. 이후 음력 10월 21일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로 수구파가 급진 개화파에게 대대적인 보복을 행할 때 암살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3. 사후

1908년 개화파 인사들이 경성에서 애국사사추도회(愛國死士追悼會)를 열었을 때, 유홍기는 순국한 애국자 중 한 명으로 추도되었다. 1910년에는 통정대부 규장각 부제학으로 추증되었다.

3. 1. 복권과 추모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갑신정변 관련 인물들이 복권되었으나, 유홍기의 행적은 드러나지 않았다. 1908년 개화파 인사들이 경성에서 애국사사추도회(愛國死士追悼會)를 열었을 때, 유홍기는 순국한 애국자 중 한 명으로 추도되었다.

3. 2. 추증

1910년(순조 3년) 8월 유홍기에게 정삼품 통정대부 규장각 부제학 벼슬이 특증되었다.

4. 논란과 의혹

갑신정변 실패 이후 유홍기의 행적과 사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혹과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4. 1. 사망 관련 의혹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12월 8일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의 최후를 두고는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는 '유대치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김의환의 논문 <조선개화당의 막후 지도자 유대치의 활약과 그의 최후>에서는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경기도 용문산에 토굴을 짓고 살면서 1890년경 임종할 때까지 좌선으로 일관하며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5. 유홍기를 연기한 배우들

배우작품방송사방영 연도
박병호풍운KBS11982년
한인수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MBC1990년
이정길찬란한 여명KBS11995년


6. 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유흥오(劉興五)
아버지유익소(劉益昭)
어머니김해 김씨
부인강릉 최씨최영원(崔榮遠)의 딸
장남유운두(劉運斗)
장녀김영찬(金永餐)의 부인
차녀이승준(李承俊)의 부인
삼녀김효철(金孝哲)의 부인
유한기(劉翰基)
동생최택전(崔宅銓), 최규순(崔圭珣), 장홍기(張鴻基), 조정삼(趙鼎三)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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