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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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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는 15세기 보헤미아의 귀족이자 후스파의 지도자였다. 그는 알브레히트 2세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내전에서 승리하여 보헤미아의 섭정이 되었으며, 1458년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유럽 평화를 위한 연맹을 제안했지만 교황과의 갈등으로 실패했고, 헝가리 왕 마차시 1세와의 전쟁 끝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 폴란드의 울라슬로 2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었으며, 현재 프라하의 광장과 지하철역, 여러 도시의 광장, 기마상, 군부대 명칭 등으로 그의 업적이 기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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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1607년 코덱스)"
출생일1420년 4월 23일
출생지추정 포데브라디 성
사망일1471년 3월 22일
사망지프라하
종교양형영성체파 후스교
신분
군주보헤미아 국왕
통치 기간1458년 3월 2일 ~ 1471년 3월 22일
대관식1458년 3월 2일, 프라하 http://www.kralovskacesta.cz/en/texts/the-royal-route.html
이전 통치자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
다음 통치자울라슬로 2세
가족 관계
아버지뮌스터베르크의 빅토르
배우자쿤군다 제 슈테른베르카
요하나 즈 로주미탈
가문포데브라디 가문
이름
체코어Jiří z Poděbrad
독일어Georg von Podiebrad
별칭(두 백성의 왕)

2. 국왕 즉위 이전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는 후스 전쟁 이후 혼란스러운 보헤미아 정국에서 후스파의 주요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2세 세력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1448년 군대를 이끌고 프라하를 장악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확보했다. 이후 벌어진 내전에서도 교황청을 지지하는 가톨릭 귀족 세력을 제압하였다.

145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에 의해 당시 미성년 국왕이었던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의 후견인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으며, 같은 해 보헤미아 의회로부터 왕국의 섭정으로 추대되어 보헤미아를 통치했다. 1457년 라디슬라우스 국왕이 후사 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이르지가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보헤미아 귀족 가문인 포데브라트 가문 출신으로, 뮌스터베르크 공작이었던 쿤슈타트와 포데브라디의 빅토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모라바 변경백국 출신이었다. 아버지 빅토르는 후스 전쟁 당시 온건파인 양형영성체파(우트라키스트파)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이르지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가 혼외 관계로 태어났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여 평생 그의 출신에 대한 조롱에 시달렸다.

이르지는 1427년 아버지가 사망하여 일찍 고아가 되었으며, 14살이 되던 1434년에는 급진 후스파인 타보르파와 오레브파의 몰락을 가져온 리파니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는 후스 운동의 혁명적 단계가 끝나는 계기가 되었다.

성인이 된 이르지는 후스파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뒤를 이어 보헤미아, 독일, 헝가리 왕위를 계승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2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대를 물리쳤다. 이르지는 동료 지도자였던 힌체 프타체크가 사망한 후 후스파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2][3]

알브레히트 2세 사후 그의 유복자 아들인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가 왕위에 올랐다. 라디슬라우스의 통치 기간 동안 보헤미아는 교황청에 충성하는 가톨릭 세력과 이르지가 이끄는 후스파 세력으로 첨예하게 나뉘었다. 가톨릭 세력은 유력 귀족인 올드리히 2세 즈 로젬베르크가 이끌었다.[2]

여러 차례의 화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르지는 군사적 해결을 모색했다. 그는 후스파의 기반이 강하고 조상 대대로 본거지였던 리티체 성이 위치한 보헤미아 북동부에서 점진적으로 군대를 조직했다. 1448년, 이르지는 약 9,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쿠트나 호라에서 프라하로 진군하여 거의 저항 없이 수도를 장악했다.[3]

이후 내전이 벌어졌으나, 이르지는 가톨릭 귀족 세력을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145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어린 라디슬라우스 왕의 후견인이었던 프리드리히 3세는 이르지에게 보헤미아의 행정권을 위임했다. 같은 해 프라하에서 소집된 보헤미아 의회는 이르지를 보헤미아 왕국의 섭정으로 공식 추대했다.[3]

2. 2. 후스파 지도자로 부상

이르지는 보헤미아 귀족인 포데브라트 가문의 빅토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빅토르는 후스 전쟁 당시 온건 파벌인 양형영성체파(우트라키스트파)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2][3] 이르지는 14세였던 1434년에 리파니 전투에 참전했는데, 이 전투는 후스파 내 급진 파벌이었던 타보르파와 오레브파의 몰락을 가져왔고 후스 운동의 혁명적 단계를 종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1427년에 사망하여 이르지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상태였다.

성인이 된 이르지는 후스파의 주요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뒤를 이어 보헤미아, 독일, 헝가리의 왕위를 계승한 합스부르크의 알브레히트 2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대를 물리쳤다. 후스파의 또 다른 지도자였던 힌체 프타체크 오브 피르크슈타인이 사망하자, 이르지는 후스파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다.[2][3]

알브레히트 2세 사후 그의 아들인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가 왕위에 올랐다. 라디슬라우스의 통치 기간 동안 보헤미아는 이르지가 이끄는 후스파 세력과 올드리히 2세 오브 로젠베르크가 이끄는 로마 가톨릭 충성파 세력으로 첨예하게 나뉘었다.[2] 양측의 화해를 위한 여러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르지는 군사적 해결을 모색했다. 그는 후스파의 지지 기반이 강하고 그의 가문 대대로 본거지였던 리티체 성이 위치한 보헤미아 북동부 지역에서 군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1448년, 이르지는 약 9,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쿠트나 호라에서 수도 프라하로 진군하여 거의 저항 없이 도시를 장악했다.[3]

프라하 점령 이후 내전이 발발했지만, 이르지는 로마 충성파 귀족들을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1451년, 당시 어린 라디슬라우스 국왕의 후견인이었던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는 이르지에게 보헤미아의 행정권을 위임했다. 같은 해 프라하에서 소집된 보헤미아 의회는 이르지를 공식적인 섭정으로 추대했다.[3] 1452년에는 과거 후스파 급진 세력의 중심지였던 타보르를 정복하여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1453년 라디슬라우스가 보헤미아 국왕으로 정식 즉위하면서 이르지의 입지는 다소 미묘해졌다. 라디슬라우스는 교황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보헤미아 귀족들의 전통적인 특권과 계약을 인정했다. 이로 인해 후스파와 교황파 사이의 갈등 속에서 이르지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1457년 라디슬라우스 국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이르지가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훗날 1985년에 이루어진 시신 부검을 통해 라디슬라우스의 사인이 백혈병이었음이 밝혀졌다.

3. 국왕 즉위

1457년 보헤미아의 국왕 라디슬라우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왕위가 공석이 되었다. 당시 일각에서는 섭정이었던 이르지가 국왕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훗날(1985년) 연구를 통해 사인은 급성 백혈병으로 밝혀졌다.[3]

1458년 3월 2일, 보헤미아의 신분 의회(영방 의회)는 만장일치로 이르지를 새로운 국왕으로 선출했다.[2][3] 후스파였던 이르지의 즉위는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온건 후스주의 2세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의 온건한 정책 방향과 외국인 통치자를 원치 않는 당시 보헤미아 민중의 정서를 고려하여, 일부 가톨릭 및 교황파 지지자들까지 이르지에게 표를 던졌다.[2][3]

이르지는 프라하 협정에 기초하여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며 후스파가톨릭 양측의 화합을 추구하는 온건한 통치를 펼치려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일부 가톨릭 신도들의 지지를 얻기도 했지만, 즉위 초기부터 그의 통치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교황 비오 2세의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3. 1. 보헤미아 왕 선출

1457년 국왕 라디슬라우스가 급사하자 이르지에 의한 독살설이 돌기도 했으나(사망 원인은 1985년 백혈병으로 밝혀졌다), 왕위는 공석이 되었다. 1458년 2월 27일, 보헤미아의 신분 의회는 만장일치로 이르지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후스파였던 이르지의 즉위는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온건 후스주의 2세대의 시작을 의미했다. 그는 프라하 협정에 기반하여 평화와 질서를 표방하며 후스파가톨릭 양측의 화합을 추구하는 온건한 통치 정책을 펴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온건 노선과 외국인 통치자를 원치 않는 정서 덕분에, 일부 교황파 세력과 대의원들까지도 그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르지에게 적대적이었던 교황 피우스 2세는 포데브라트 가문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며, 후스 전쟁 종결의 기반이 된 1436년 이흘라바 협약(프라하 협정 비준) 및 프라하 협정 자체의 무효를 선언하고 이르지에게도 이를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이르지는 교황의 요구를 거부했지만, 한편으로는 후스파 내 급진 세력을 탄압하며 교황청의 지지를 얻으려 시도하기도 했다.

3. 2. 종교적 화합과 갈등

1458년 3월 2일, 보헤미아의 영방 의회는 만장일치로 이르지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이는 후스파 2세대의 등장을 의미했으며, 이르지는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공존을 모색하며 평화와 질서를 추구했다. 그의 온건한 정책과 외국인 지배자에 대한 민중의 반감을 고려한 점 때문에 일부 교황파 지지자들까지 그에게 표를 던졌다.[2][3] 이르지는 프라하 협약에 기초하여 온건한 통치를 시행하려 노력했고, 일부 가톨릭 신도들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교황 비오 2세는 후스파인 이르지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후스 전쟁의 종결을 공식화한 1436년의 이흘라바 협약(프라하 협약)을 1462년에 무효라고 선언하며 이르지에게 이를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르지는 이 요구를 거부했지만, 타보르파와 같은 급진 후스파나 새로 창설된 형제 연합 교회를 탄압하며 교황청의 환심을 사려 시도하기도 했다.

1462년, 이르지는 교황청에 맞서 유럽 군주들의 '평화 연맹' 창설을 제안했다. 이는 오늘날의 유엔이나 유럽 연합의 선구적인 구상으로 평가받는다. 이 구상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군주들과 제후들이 먼저 기독교 세계의 동맹을 맺고, 추후 스페인 등이 합류하는 방식이었다. 연맹의 주된 목적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을 공동으로 저지하는 것이었다. 이르지는 레오 오브 로즈미탈을 특사로 파견하여 유럽 각국 궁정에 조약 초안을 설명하게 했고, 1464년 조약 발효를 기대했다.

''이르지 포데브라트, "두 민족의 왕": 조약을 준수해야 한다''. (1923) 알폰스 무하의 그림. 교황 사절 판티누스 데 발레가 이르지에게 대관식 서약을 상기시키며 보헤미아를 "참된 교회의 품으로 되돌리고" "이단자"(후스파)를 근절하라고 요구하자, 왕은 자신이 이단자가 아니며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신앙에 충실하다고 반박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하지만 이르지의 평화 연맹 구상은 프랑스루이 11세가 교황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거부하면서 다른 군주들도 동조하지 않아 결국 좌절되었다. 로마와의 화해를 위한 이르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1464년 보헤미아에 대한 십자군을 구상하던 교황 비오 2세가 사망하고 교황 바오로 2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지만, 이르지는 새 교황 역시 자신에게 적대적임을 확인했을 뿐 평화 협상에 실패했다.

이르지의 통치 기간 내내 후스파와 교황파(로마 충성파)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453년 즉위한 젊은 국왕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가 친로마적 성향을 보이면서 섭정이었던 이르지의 입지는 어려워졌다. 1457년 라디슬라우스가 갑자기 사망하자 이르지가 독살했다는 비난이 일었으나, 1985년 연구 결과 사인은 급성 백혈병으로 밝혀졌다.

결국 교황과의 갈등과 내부 반발은 더욱 격화되었다.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보헤미아 귀족들은 이르지에게 등을 돌리고 1465년 11월 28일 젤레나 호라에 모여 반 국왕 연맹을 결성했다. 이 연맹은 교황 바오로 2세의 지지를 받았다. 1466년 12월 23일, 교황 바오로 2세는 이르지를 파문하고 보헤미아 왕위에서 폐위한다고 선언했으며,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모든 신민의 의무를 해제했다. 과거 이르지의 동맹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헝가리 왕 머제시 1세마저 보헤미아 귀족 반란에 가담했다. 머제시 1세는 모라바 대부분을 정복하고, 1469년 5월 3일 올로모우츠에서 교황파 귀족들에 의해 보헤미아의 대립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르지는 머제시 1세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지지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470년 헝가리 왕과 휴전을 맺었다. 그는 1471년 3월 22일 사망했고, 그의 지지자들은 폴란드 왕국카지미에시 4세의 아들인 블라디슬라프 2세를 후계자로 선출하여 머제시 1세와의 싸움을 이어갔다.

3. 3. 유럽 평화 연맹 제안

1462년 이르지는 교황청에 대항하여 유럽 군주들의 '평화 연맹' 창설을 제안했다. 이는 후스주의 지도자였던 이르지가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왔지만, 교황 비오 2세와의 적대 관계 속에서 추진되었다. 교황 비오 2세는 이르지의 보헤미아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후스 전쟁을 종결시킨 1436년의 이흘라바 협약의 무효를 선언하는 등 갈등이 깊었다.[3]

이르지의 제안은 기독교 세계의 동맹을 통해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오스만 제국("끔찍한 터키인")의 유럽 침공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5] 제안된 연맹은 명시적으로 "유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의 유엔이나 유럽 연합의 선구적인 형태로 평가받는다.[4][6]

연맹의 창립 회원국으로는 보헤미아를 포함하여 독일 지역의 바이에른 공국,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작센 선제후국, 그리고 프랑스 왕국, 부르고뉴 공국, 이탈리아 국가들과 그 군주들이 구상되었으며, 이후 스페인 세력의 합류도 계획되었다. 회원국들은 모든 분쟁을 오직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것을 약속하고, 공동 의회와 같은 공통 기관 및 통일된 상징을 갖추도록 했다.

이르지는 이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매제인 로즈미탈의 야로슬라프 레프를 특사로 파견하여 유럽 각국 궁정에 평화의 메시지 초안을 전달하며 조약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는 이 조약이 1464년에 발효되기를 기대했다.

피니스테레 곶에 있는, 이르지 폰 포데브라디와 로즈미탈의 야로슬라프 레프의 평화 사절단을 기념하는 현판


그러나 이르지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프랑스루이 11세교황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제안을 거부하자 다른 군주들도 이에 동조했다. 이르지가 로마와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1464년 교황 비오 2세가 사망한 뒤 새로 선출된 교황 바오로 2세 역시 이르지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했다.[3] 결국 로마와의 평화를 확보하려던 이르지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3. 4. 교황과의 대립과 파문

이르지는 후스파였지만, 프라하 협약에 기초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공존을 추구하는 온건한 통치 방식을 시도했다.[2][3] 일부 가톨릭교도들도 그의 정책을 지지했으나,[2][3] 교황 비오 2세는 이르지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비오 2세는 1462년 후스 전쟁의 종결을 명시한 1436년의 이흘라바 협약(혹은 프라하 협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이르지에게 이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이르지는 이 요구를 거부했지만, 타보르파와 같은 급진 후스파나 새로 창설된 형제 연합 교회를 처벌함으로써 교황청의 호의를 얻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1462년 이르지는 교황청에 대항하여 현재의 유럽 연합과 같은 유럽의 단일 기구를 수립하는 유럽 군주들의 '평화 연맹' 창설을 제안했다. 이는 오늘날의 유엔이나 유럽 연합의 선구적인 구상으로 평가받는다. 이르지의 제안에 따르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주권자 및 제후들과 보헤미아가 먼저 동맹을 맺고 이후 스페인 등이 합류하는 방식이었다. 이 제안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적인 성격("유럽"이라고 명시하지 않음)이었으며,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끔찍한 터키인"(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구상이었다. 이르지는 특사를 파견해 유럽 국가들의 궁정에 조약의 취지를 설명했으며, 이 조약이 1464년에 발효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로마와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던 이르지의 구상은 프랑스루이 11세가 교황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를 거부하자 다른 군주들도 이에 동조하면서 좌절되고 만다.

1464년 보헤미아에 대한 십자군을 구상하던 교황 비오 2세가 사망하고 교황 바오로 2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르지는 새 교황과 평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바오로 2세 역시 자신을 적대시하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이르지는 교황파 출신 귀족들을 자신의 적으로 만들었다. 1465년 11월 28일, 교황파 출신 가톨릭 귀족들은 Zelená Hora|젤레나 호라cs(Grünberg|그륀베르크de)에 모여 이르지 국왕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했고, 이 동맹은 결성 당시부터 교황 바오로 2세의 지지를 받았다. 1466년 12월 23일 교황 바오로 2세는 이르지 국왕을 파문하고 보헤미아의 국왕에서 폐위되었음을 선언했다. 이는 보헤미아 왕관의 모든 신하가 이르지에 대한 충성 서약에서 면제됨을 의미했다.[3]

교황의 파문 선언 이후, 과거 이르지의 동맹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가 보헤미아 귀족들의 반란에 가세하여 보헤미아 전쟁이 시작되었다.[3] 마차시 1세1469년 2월의 전쟁에서 이르지 왕에게 포위되어 협조를 맹세하고 풀려났으나, 약속을 어기고 1469년 5월 3일 올로모우츠에서 교황파 세력의 지지를 받아 보헤미아 국왕으로 즉위했다.[3]루사티아, 실레시아, 그리고 대부분의 모라비아 가톨릭교도들이 마차시 1세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르지는 마차시 1세에 맞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추종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1470년 헝가리 왕과 합의를 보았다.

4. 헝가리와의 전쟁과 죽음

이르지는 교황파 가톨릭 귀족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이들은 1465년 11월 28일 젤레나호라에서 이르지에 반대하는 동맹을 결성하여 교황 바오로 2세의 지지를 얻었다. 1466년 12월 23일 교황은 이르지를 파문하고 보헤미아 국왕 폐위를 선언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 과거 이르지의 동맹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가 반란에 가담했다. 특히 마차시 1세1469년 5월 3일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받아 올로모우츠에서 보헤미아 국왕을 자칭하며 루사티아, 실레시아, 모라바 등지의 지지를 확보했다.

이르지는 1470년 마차시 1세와 휴전했으나 1471년 3월 22일 사망했다. 그의 사후 지지자들은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아들 울라슬로 2세를 왕으로 선출했지만, 마차시 1세 역시 왕위를 주장하며 전쟁이 계속되었다. 결국 올로모우츠 협약으로 보헤미아 왕국은 분할 통치되었고, 1490년 마차시 1세가 사망한 뒤에야 울라슬로 2세가 왕국 전체를 통치하게 되었다.

4. 1. 헝가리 왕 마차시 1세와의 대립

이르지는 교황파 귀족들 사이에서 반발을 샀다. 이들은 1465년 11월 28일 젤레나 호라(Grüneberg)에 모여 이르지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했다. 이 동맹은 처음부터 교황 바오로 2세의 지원을 받았다. 교황 바오로 2세는 1466년 12월 23일 이르지를 파문하고 보헤미아 국왕 자리에서 폐위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보헤미아 왕국의 모든 신하들이 이르지에 대한 충성 서약에서 벗어남을 의미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헝가리 왕 마차시 1세는 이르지의 이전 동맹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을 일으킨 보헤미아 귀족 편에 가담하여 보헤미아 전쟁을 시작했다. 마차시 1세는 모라비아의 상당 부분을 정복했고, 1469년 5월 3일 모라비아의 올로모우츠에서 교황파에 의해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했다.[3]

이르지는 마차시 1세에 맞서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1470년 지지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헝가리 왕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1471년 봄 이르지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3월 22일에 사망했다. 그는 성 비투스 대성당의 왕실 묘에 묻혔으며, 그의 심장과 내장은 구시가지의 틴 앞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 안치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아들인 울라슬로 2세(블라디슬라프 2세)를 후계자로 선택하여 마차시 1세에 맞서 싸움을 계속하려 했다. 하지만 교황청을 비롯해 루사티아, 실레시아, 모라비아 지역과 보헤미아 왕국 내 가톨릭교도 대부분은 마차시 1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계속되었다.

마차시 1세는 가톨릭 세력의 지원을 받아 계속 보헤미아 왕위를 주장했다. 결국 울라슬로 2세 측과 마차시 1세 측은 올로모우츠에서 올로모우츠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에 따라 보헤미아는 울라슬로 2세의 통치를 인정하고, 모라비아, 실레시아, 루사티아마차시 1세의 지배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1490년 마차시 1세가 사망하자 울라슬로 2세는 마침내 보헤미아 왕국 전체의 지배권을 회복하였다.

4. 2. 이르지의 죽음과 왕위 계승

1470년 이르지는 자신을 지지하던 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의 국왕 마차시 1세와 휴전 협정을 체결했으며, 1471년 3월 22일에 사망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폴란드의 국왕이었던 카지미에시 4세의 아들인 울라슬로 2세(블라디슬라프 2세)를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을 비롯해 루사티아, 실레시아, 모라바 지역은 물론이고 보헤미아 왕국 내의 가톨릭교도들 대부분이 마차시 1세를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위를 둘러싼 전쟁은 계속되었다. 마차시 1세는 가톨릭 세력의 지원을 받아 계속 보헤미아의 왕권을 주장했다.

결국 블라디슬라프 2세 측과 마차시 1세 측은 올로모우츠에서 올로모우츠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에 따라 보헤미아는 블라디슬라프 2세의 통치를 인정하고, 다른 지역인 모라바, 실레시아, 루사티아에서는 마차시 1세의 지배를 인정했다. 그러다 1490년 마차시 1세가 사망하자 블라디슬라프 2세는 분할되었던 영토를 모두 회복하여 전체 보헤미아 왕국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4. 3. 올로모우츠 협약과 블라디슬라프 2세의 통치

1470년 이르지는 자신을 지지하던 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의 국왕 마차시 1세와 휴전 협정을 체결했으며 1471년 3월 22일에 사망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폴란드의 국왕이었던 카지미에시 4세의 아들인 블라디슬라프 2세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을 비롯해 루사티아, 실레시아, 모라바 지역은 물론이고 보헤미아 왕국 내의 가톨릭교도들 대부분이 마차시 1세를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계속되었다. 마차시 1세는 가톨릭 세력의 지원을 받아 계속 보헤미아의 왕권을 주장했다.

결국 블라디슬라프 2세 측과 마차시 1세 측은 올로모우츠에서 올로모우츠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에 따라 보헤미아는 블라디슬라프 2세의 통치를 인정하고, 모라바, 실레시아, 루사티아에서는 마차시 1세의 지배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1490년 마차시 1세가 사망하자 블라디슬라프 2세는 분할되었던 영토를 모두 회복하여 전체 보헤미아 왕국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5. 유산 및 평가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는 보헤미아 역사상 유일한 후스파 국왕으로, 종교적 갈등이 첨예했던 시기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1458년 신분 의회의 만장일치 추대를 받았는데, 이는 그의 정치적 역량과 가톨릭 세력과의 타협을 모색하는 온건 노선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의 통치는 "프라하 협정"에 기반한 종교적 공존을 추구했으나, 교황청의 강한 반대와 내부 가톨릭 귀족들의 저항에 직면하며 끊임없는 정치적, 군사적 갈등을 겪어야 했다. 특히 교황 피우스 2세와 바오로 2세와의 대립은 그의 통치 기간 내내 지속된 주요 난관이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 유럽 국가들의 연합을 제안하는 등 시대를 앞선 외교적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다. 비록 그의 구상과 정책들이 당대에 온전히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보헤미아의 독자성을 지키려 노력하고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국가를 이끌었던 그의 통치는 후대에 중요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5. 1. 후대에 미친 영향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유산 중 하나는 시대를 앞서간 유럽 통합 구상이다. 그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참여하는 연합체 결성을 제안했다. 이 구상에는 가맹국 간 분쟁의 평화적 해결 원칙, 공동 의회 및 기구 설립 등 현대의 유럽 연합을 연상시키는 혁신적인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르지는 레오 오브 로즈미탈을 각국 궁정에 파견하여 이 구상을 알리고 1464년까지 조약 발효를 목표로 했으나, 여러 정치적 이유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의 통치기는 후스파와 가톨릭 세력 간의 끊임없는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1457년 국왕 라디슬라우스 사후, 1458년 보헤미아 신분 의회는 만장일치로 이르지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는 "프라하 협정"에 기반한 온건한 통치를 지향했으나, 교황 피우스 2세는 프라하 협정의 무효화를 요구하며 이르지를 압박했다. 이르지는 이를 거부하면서도 후스 급진파를 탄압하는 등 교황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후임 교황 바오로 2세 역시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했고, 1466년 12월 23일에는 이르지를 파문하고 보헤미아 왕위 폐위를 선언했다.

교황의 이러한 입장은 보헤미아 내부의 가톨릭 귀족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465년 11월 28일, 이들은 젤레나 호라에 모여 반 국왕 연맹을 결성하고 교황의 지지를 받았다. 외부에서는 과거 이르지의 동맹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헝가리 왕 머제시 1세가 이 반란에 가담했다. 특히 머제시 1세는 모라바 대부분을 점령하고 1469년 5월 3일 올로모우츠에서 일부 가톨릭 귀족들에 의해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이르지는 군사적으로는 머제시 1세에게 승리를 거두었으나, 1470년 지지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 1471년 3월 22일 그가 사망하자, 후스파 귀족들은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4세의 아들인 블라디슬라프를 새 국왕으로 선출했다. 이는 보헤미아의 독자적인 국왕 선출 전통에 영향을 미쳤으며, 블라디슬라프는 이후 머제시 1세와의 전쟁을 계속하게 된다.

5. 2. 기념물 및 문화적 영향

프라하 3에 있는 거대한 이르지호 z 포데브라트 광장과 인근의 동명의 지하철역은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의 이름을 딴 다른 광장들은 다음과 같다.

도시명명된 장소
오스트라바광장
호르지체광장
토우짐광장
르제브니체광장
쿤슈타트광장
노비 크닌광장



1896년에는 보후슬라프 슈니르흐가 조각한 국왕 이르지의 기마상이 포데브라디에 세워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7년 초, 러시아에서 창설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제2 체코슬로바키아 소총 연대는 국왕 이르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7]

참조

[1] 웹사이트 The Royal Route https://web.archive.[...] 2013-07-11
[2] 논문 Problems of the Reign of George of Poděbrady http://www.jstor.org[...]
[3] EB1911
[4] 간행물 Chrétienté et Europe: le projet de Georges de Podiebrad au xve siècle http://chretienssoci[...] Chrétiens et sociétés
[5] 서적 The Birth of Europe Blackwell
[6] 뉴스 National Identity and the Idea of European Unity 1992-01
[7] 서적 Masaryk a legie Paris Karviná in association with Masaryk democratic movement in Prague
[8] 서적 プラハ迷宮の散歩道 百塔の都をさまよう愉しみ ダイヤモンド・ビッグ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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