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토 세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토 세이는 일본의 소설가, 평론가, 번역가이며, 일본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1926년 시집 『눈보라 길』로 데뷔했으며,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 등을 번역했다. 특히 『채털리 부인의 연인』 번역으로 외설 혐의 재판을 겪으며 문학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이끌었다. 소설, 평론, 번역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1990년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이토 세이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타루 상과대학 동문 - 고바야시 다키지
    고바야시 다키지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 작가로, 홋카이도척식은행에서 근무하며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소설 ≪게잡이 공선≫을 발표하고 일본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으로 사망했다.
  • 오타루시의 역사 - 데미야선
    데미야선은 홋카이도 오타루시의 남오타루역과 테미야역을 잇는 2.8km 철도 노선으로 1880년 개통되었으나 이용객 감소와 국철 경영 악화로 1985년 폐지되었고 폐선 부지는 산책로로 활용되고 있다.
  • 오타루시의 역사 - 나가쿠라 신파치
    나가쿠라 신파치는 마쓰마에 번 출신으로 신센구미 2번대 조장으로서 뛰어난 검술 실력과 이케다야 사건에서의 활약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곤도 이사미의 독단적인 행동에 반발하여 신센구미를 탈퇴한 후 보신 전쟁에 참여하고 검술 사범 및 저술가로 활동하며 신센구미 재평가에 기여, 대중문화 콘텐츠에서도 재해석되는 인물이다.
  • 도쿄 공업대학 교수 - 우에하라 에쓰지로
    일본의 정치인이자 학자인 우에하라 에쓰지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에 참여, 중의원 부의장과 국무대신, 내무대신을 역임하며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으나, 전후에는 일본 헌법 제9조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등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 도쿄 공업대학 교수 - 모리 마모루
    모리 마모루는 일본의 우주비행사이자 과학자이며, 홋카이도 대학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일본 최초의 우주비행사로 선발되어 우주 비행을 했으며, 일본과학미래관 관장을 역임했다.
이토 세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4년의 이토 세이
1954년의 이토 세이
본명이토 히토시
출생일1905년 1월 16일
출생지일본 홋카이도 마쓰마에군 마쓰마에정
사망일1969년 11월 15일
사망지일본 도쿄도
묘지고다이라 영원
직업작가, 번역가
국적일본
문학 사조문학적 모더니즘
대표 작품『눈 밝은 길』 (1926년, 시집)
『도쿠노 고로의 생활과 의견』 (1941년)
『소설의 방법』 (1948년, 평론)
『젊은 시인의 초상』 (1956년)
『범람』 (1958년)
『변용』 (1968년)
『일본 문단사』 (1953년 ~ 1973년, 평론, 중단)
활동 시기1926년 ~ 1969년
데뷔 작품『눈 밝은 길』 (1926년)
수상기쿠치 간 상 (1963년)
일본 예술원상 (1967년)
훈3등 서보장 (1969년)
일본 문학대상 (1970년)
가족이토 시게루 (장남)
이토 레이 (차남)
호시노 유키노부 (외종손)
무로타 미즈키 (증외종손)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Itō Sei
일본어 표기伊藤 整 (いとう せい)
본명 (일본어)伊藤 整 (いとう ひとし)
별칭세이 이토
학력도쿄상과대학(현 히토쓰바시대학교) 중퇴
문학 사조무뢰파(신심리주의) 채털리 사건
장르소설, 문예 평론, 번역,
언어일본어

2. 생애

이토 세이(伊藤整)는 홋카이도 마쓰마에(松前町, Hokkaido)에서 이토 히토시(伊藤仁)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3] 오타루 고등상업학교(현 오타루상과대학)를 졸업한 후 도쿄로 이주하여 도쿄상과대학(현 히토쓰바시대학)에 입학했으나 중퇴하였다.[2] 1926년, 시집 「설국길」(Yukiakari no michi)로 데뷔했다.[2] 니시와키 준자부로(西脇順三郎), 요코미쓰 리이치(横光利一), 아베 토모지(阿部知二) 등의 작가들과 함께 문예지 「시와 시론」(Shi to shiron)에서 유럽 모더니즘 문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으며,[4] 일생 동안 자신이 말하는 "모더니즘"을 추구했다.[5]

1931년부터 마사마쓰 사다무(正松貞茂)와 쓰지 히사노리(辻久紀)와 함께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시스」(Ulysses)를 일본어로 완역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1930년대에 완역을 출판했다.[3][6] 이토 세이의 1937년 소설 「악령의 거리」(Yūki no machi)는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의 영향을 보여주었고, 그의 문체는 "신심리주의"(Shin shinri shugi)로 알려지게 되었다.[4] 1950년에는 D. H. 로렌스(D. H. Lawrence)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Lady Chatterley's Lover)을 완역하여 외설 사건으로 논란을 일으켰다.[2][3] 그는 1963년 「일본 근대 문학 체계」(Nihon kindai bungaku taikei)로 기쿠치 간상(菊池寛賞)을, 1969년에는 일본예술원상을 수상했다.[3]

=== 시인으로서의 출발 (홋카이도 시절) ===

이토 세이는 1905년 홋카이도 마쓰마에에서 태어났다.[3] 아버지 이토 마사마사는 히로시마현 출신으로, 청일전쟁에 참전했다가 해군 수로부 측량원으로 홋카이도에 건너갔다.[7] 이후 교사가 되었으며, 세이가 태어난 해에는 러일전쟁에 참전하여 203고지에서 중상을 입었다.[7]

오타루 고등상업학교(현 오타루상과대학) 재학 시절, 이토 세이는 2년 선배인 스즈키 시게미치(기타미 준키치)의 영향으로 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8] 고바야시 타키지 등이 상급생으로 있었고, 함께 프랑스어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1923년 친구 가와사키 노보루(사가와 치카의 형)와 함께 동인지 『青空』을 발행했다. 1926년에는 히야쿠다 소지가 주재하는 『椎の木』에 편지를 보내 동인이 되었고, 자비로 출판한 서정시 시집 『雪明りの路』는 히야쿠다 소지, 미요시 다쓰지에게 호평을 받았다.[2]

=== 소설과 평론 활동 (도쿄 시절) ===

이토 세이는 오타루 고등상업학교(현 오타루상과대학)를 졸업하고 도쿄상과대학(현 히토쓰바시대학)에 입학했으나 중퇴하였다.[2] 1927년 구제 도쿄상과대학에 입학하여 내토 다쿠(内藤濯) 교수의 세미나에서 프랑스 문학을 배웠다.[9] 하숙집에서 가지이 모토지로(梶井基次郎),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 세누마 시게키(瀬沼茂樹) 등과 교류하였고,[9] 세누마 시게키가 주최하던 「일교문예(一橋文芸)」에 단편소설을 기고했다.[9] 세누마 시게키와는 평생 동안 친분을 유지했다.[10]

1930년에는 소설 「송환(送還)」「감정세포의 단면(感情細胞の断面)」을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추천받았으며, 평론 「문학영역의 이동(文学領域の移動)」「제임스 조이스의 메소드 「의식의 흐름」에 대하여(ジェイムス・ジョイスのメトオド『意識の流れ』に就いて)」 등을 발표했다.[11] 오가와 사다코(小川貞子)와 결혼하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나가마쓰 사다무(永松定), 쓰지노 히사노리(辻野久憲)와 함께 번역하여 「시·현실(詩・現実)」에 연재했다.[11] 1931년부터 마사마쓰 사다무(正松貞茂)와 쓰지 히사노리(辻久紀)와 함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일본어로 완역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1930년대에 완역을 출판했다.[3][6] 1931년에 20세기 문학 번역에 중점을 둔 「신문학연구(新文学研究)」를 편집하고, 도쿄상과대학을 퇴학했다.[11]

1932년 처녀 평론집 『신심리주의 문학(新心理主義文学)』에서 제임스 조이스버지니아 울프 등의 영향을 받은 ‘신심리주의’를 제창하여 가와바타 야스나리요코미쓰 리이치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12] 이토 세이의 1937년 소설 「악령의 거리(Yūki no machi)」는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의 영향을 보여주었고, 그의 문체는 "신심리주의"(Shin shinri shugi)로 알려지게 되었다.[4]

1935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대학 예술과 강사를 역임했다.[16] 1935년에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번역하여 출판했다.[11] 1950년에는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완역하여 외설 사건으로 논란을 일으켰다.[2][3] 신작 장편소설 『청춘(青春)』(1938년), 『서리꽃(霧氷)』『덴코의 생활(典子の生き方)』(1939년), 전시하에서 사소설의 기법을 역이용하여 자기 은폐를 통해 사회를 풍자하는[13] 『도쿠노 고로의 생활과 의견(得能五郎の生活と意見)』(1940년) 등을 발표했다.

=== 전후 활동과 채털리 재판 ===

1948년 일본문예가협회 이사를 맡았다.[19] 1950년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 완역본을 출간하였으나 외설 혐의로 기소되었다.[19] 1949년부터 1950년까지 와세다대학 제1문학부 강사, 1949년 도쿄공업대학 전임강사(영어)를 역임하고, 일본 펜클럽 간사를 지냈다.[19] 1950년에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Lady Chatterley's Lover) 완역본을 고야마서점에서 출판하여 상하권 20만 부의 판매고를 올렸으나, 외설문서로 압수되어 고야마 큐지로(小山久二郎)와 함께 기소되었다.[19]

이 재판의 1심과 병행하여 발표된 에세이 『이토 세이(伊藤整) 씨의 생활과 의견』이나, 채털리 사건(チャタレイ事件)의 논픽션 『재판』도 화제가 되었다.[19] 1953년 『부인공론』(婦人公論)에 연재한 로렌스의 사상 등을 소개한 희문 에세이를 이듬해 『여성에 관한 십이장』(女性に関する十二章)으로 한 권으로 엮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9] 같은 제목의 영화(이치카와 곤(市川崑) 감독)에 본인도 내레이션 및 단역으로 출연하였고, "○○에 관한 십이장"이라는 서적 출판이 잇따르는 등 "십이장 붐"을 일으켰으며, 신서판 붐의 신호탄이 되기도 하였다.[19]

이 무렵부터 원고와 강연 요청이 쇄도하였고, 혼혈 신극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 『불새』(火の鳥)도 호평[20]을 받았다. 『요미우리 신문』(読売新聞) 연말의 "1953 베스트 3" 기사에서는 평론가 10명 중 9명에게 선정되었다. 1954년 베스트셀러 중 1위 『여성에 관한 십이장』, 3위 『불새』, 5위 『문학입문』(文学入門)을 차지했고, 평론 『문학과 인간』(文学と人間)[21] 등도 베스트셀러가 되어,[22] 연간 70만 부를 판매했다고 한다.[23] 1953년 문단 고액 소득 순위에서도 8위를 차지했다.

1954년 스기나미구(杉並区) 구가야마(久我山)로 이사했다. 1956년에는 『문학계』(文學界) 신인상(文學界新人賞)에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의 『태양의 계절』(太陽の季節)을 강력히 추천하여 논쟁을 일으켰다.[24] 1958년 도쿄공업대학 교수로 승격되었고, 파리(パリ)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国際ペンクラブ) 집행위원회에서 발표한 후, 타슈켄트(タシュケント)의 아시아·아프리카 회의(アジア・アフリカ会議), 런던(ロンドン)의 영국 펜클럽 모임에 참석하고, 뮌헨(ミュンヘン), (ウィーン), 이탈리아(イタリア) 등을 여행한 후 1959년 귀국했다. 1960년부터 초빙되어 컬럼비아 대학교(コロンビア大学) 및 미시간 대학교(ミシガン大学)에서 강의했다. 귀국 후, 히라노 켄(平野謙)의 "순수문학 역사설"이나,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 미즈카미 츠토무(水上勉) 등의 사회파 추리소설 유행에 자극받아 "『순』문학은 존재할 수 있는가"를 발표하여, "순문학 논쟁"(純文学論争)을 일으켰다.

1957년 채털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19] 재판에서는 예술성이 높은 문학작품을 성적인 소재를 다룬다고 하여 외설서적으로 분류하는 것에 대한 타당성 및 그 번역자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가 등의 논쟁이 법정에서 벌어졌으나, 1957년 출판사 및 이토 세이 모두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19] 이 번역물은 1964년에 전후로서는 드물게 복자(伏字)처리되어 출판되었다.[19] 1996년, 차남이 같은 신초사의 작품의 삭제부분을 보충한 완역판을 출판하였으나, 현재까지 이 책은 외설서적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 만년 ===

이토 세이는 1962년 일본펜클럽 부회장이 되었다.[25] 오다기리 신, 타카미 준 등과 함께 일본근대문학관 설립 운동을 시작하여 설립 당시 이사가 되었으며, 1965년부터 이사장을 역임했다.[25] 1963년 『일본문단사』로 기쿠치 칸상을 수상했다.[3][25] 1964년 도쿄공업대학을 퇴직하고, 1967년 일본예술원상을 수상[25], 1968년 일본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66년 홋카이도 문학전과 1967년 홋카이도립문학관 설립에도 협력했다.[26]

1969년 장폐색으로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고, 위암 진단을 받고 재입원하여 11월 15일, 암성 복막염으로 도쿄도토시마구카미이케부쿠로의 암연구회 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27] 아오야마 장례식장에서 고별식이 거행되었고, 법명은 해조원석정원이다. 정오위, 훈삼등훈장 녹조훈장을 받았다. 『변용』에 이은 작품으로 『석양』의 구상이 준비되어 있었다.[28]

일본근대문학관 설립에 힘쓴 (도쿄도메구로구고마바 공원 내)

2. 1. 시인으로서의 출발 (홋카이도 시절)

이토 세이는 1905년 홋카이도 마쓰마에에서 태어났다.[3] 아버지 이토 마사마사는 히로시마현 출신으로, 청일전쟁에 참전했다가 해군 수로부 측량원으로 홋카이도에 건너갔다.[7] 이후 교사가 되었으며, 세이가 태어난 해에는 러일전쟁에 참전하여 203고지에서 중상을 입었다.[7]

오타루 고등상업학교(현 오타루상과대학) 재학 시절, 이토 세이는 2년 선배인 스즈키 시게미치(기타미 준키치)의 영향으로 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8] 고바야시 타키지 등이 상급생으로 있었고, 함께 프랑스어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1923년 친구 가와사키 노보루(사가와 치카의 형)와 함께 동인지 『青空』을 발행했다. 1926년에는 히야쿠다 소지가 주재하는 『椎の木』에 편지를 보내 동인이 되었고, 자비로 출판한 서정시 시집 『雪明りの路』는 히야쿠다 소지, 미요시 다쓰지에게 호평을 받았다.[2]

2. 2. 소설과 평론 활동 (도쿄 시절)

이토 세이는 오타루 고등상업학교(현 오타루상과대학)를 졸업하고 도쿄상과대학(현 히토쓰바시대학)에 입학했으나 중퇴하였다.[2] 1927년 구제 도쿄상과대학에 입학하여 내토 다쿠(内藤濯) 교수의 세미나에서 프랑스 문학을 배웠다.[9] 하숙집에서 가지이 모토지로(梶井基次郎),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 세누마 시게키(瀬沼茂樹) 등과 교류하였고,[9] 세누마 시게키가 주최하던 「일교문예(一橋文芸)」에 단편소설을 기고했다.[9] 세누마 시게키와는 평생 동안 친분을 유지했다.[10]

1930년에는 소설 「송환(送還)」「감정세포의 단면(感情細胞の断面)」을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추천받았으며, 평론 「문학영역의 이동(文学領域の移動)」「제임스 조이스의 메소드 「의식의 흐름」에 대하여(ジェイムス・ジョイスのメトオド『意識の流れ』に就いて)」 등을 발표했다.[11] 오가와 사다코(小川貞子)와 결혼하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나가마쓰 사다무(永松定), 쓰지노 히사노리(辻野久憲)와 함께 번역하여 「시·현실(詩・現実)」에 연재했다.[11] 1931년부터 마사마쓰 사다무(正松貞茂)와 쓰지 히사노리(辻久紀)와 함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일본어로 완역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1930년대에 완역을 출판했다.[3][6] 1931년에 20세기 문학 번역에 중점을 둔 「신문학연구(新文学研究)」를 편집하고, 도쿄상과대학을 퇴학했다.[11]

1932년 처녀 평론집 『신심리주의 문학(新心理主義文学)』에서 제임스 조이스버지니아 울프 등의 영향을 받은 ‘신심리주의’를 제창하여 가와바타 야스나리요코미쓰 리이치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12] 이토 세이의 1937년 소설 「악령의 거리(Yūki no machi)」는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의 영향을 보여주었고, 그의 문체는 "신심리주의"(Shin shinri shugi)로 알려지게 되었다.[4]

1935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대학 예술과 강사를 역임했다.[16] 1935년에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번역하여 출판했다.[11] 1950년에는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완역하여 외설 사건으로 논란을 일으켰다.[2][3] 신작 장편소설 『청춘(青春)』(1938년), 『서리꽃(霧氷)』『덴코의 생활(典子の生き方)』(1939년), 전시하에서 사소설의 기법을 역이용하여 자기 은폐를 통해 사회를 풍자하는[13] 『도쿠노 고로의 생활과 의견(得能五郎の生活と意見)』(1940년) 등을 발표했다.

2. 3. 전후 활동과 채털리 재판

1948년 일본문예가협회 이사를 맡았다.[19] 1950년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 완역본을 출간하였으나 외설 혐의로 기소되었다.[19] 1949년부터 1950년까지 와세다대학 제1문학부 강사, 1949년 도쿄공업대학 전임강사(영어)를 역임하고, 일본 펜클럽 간사를 지냈다.[19] 1950년에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Lady Chatterley's Lover) 완역본을 고야마서점에서 출판하여 상하권 20만 부의 판매고를 올렸으나, 외설문서로 압수되어 고야마 큐지로(小山久二郎)와 함께 기소되었다.[19]

이 재판의 1심과 병행하여 발표된 에세이 『이토 세이(伊藤整) 씨의 생활과 의견』이나, 채털리 사건(チャタレイ事件)의 논픽션 『재판』도 화제가 되었다.[19] 1953년 『부인공론』(婦人公論)에 연재한 로렌스의 사상 등을 소개한 희문 에세이를 이듬해 『여성에 관한 십이장』(女性に関する十二章)으로 한 권으로 엮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9] 같은 제목의 영화(이치카와 곤(市川崑) 감독)에 본인도 내레이션 및 단역으로 출연하였고, "○○에 관한 십이장"이라는 서적 출판이 잇따르는 등 "십이장 붐"을 일으켰으며, 신서판 붐의 신호탄이 되기도 하였다.[19]

이 무렵부터 원고와 강연 요청이 쇄도하였고, 혼혈 신극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 『불새』(火の鳥)도 호평[20]을 받았다. 『요미우리 신문』(読売新聞) 연말의 "1953 베스트 3" 기사에서는 평론가 10명 중 9명에게 선정되었다. 1954년 베스트셀러 중 1위 『여성에 관한 십이장』, 3위 『불새』, 5위 『문학입문』(文学入門)을 차지했고, 평론 『문학과 인간』(文学と人間)[21] 등도 베스트셀러가 되어,[22] 연간 70만 부를 판매했다고 한다.[23] 1953년 문단 고액 소득 순위에서도 8위를 차지했다.

1954년 스기나미구(杉並区) 큐가야마(久我山)로 이사했다. 1956년에는 『문학계』(文學界) 신인상(文學界新人賞)에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의 『태양의 계절』(太陽の季節)을 강력히 추천하여 논쟁을 일으켰다.[24] 1958년 도쿄공업대학 교수로 승격되었고, 파리(パリ)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国際ペンクラブ) 집행위원회에서 발표한 후, 타슈켄트(タシュケント)의 아시아·아프리카 회의(アジア・アフリカ会議), 런던(ロンドン)의 영국 펜클럽 모임에 참석하고, 뮌헨(ミュンヘン), 비엔나(ウィーン), 이탈리아(イタリア) 등을 여행한 후 1959년 귀국했다. 1960년부터 초빙되어 컬럼비아 대학교(コロンビア大学) 및 미시간 대학교(ミシガン大学)에서 강의했다. 귀국 후, 히라노 켄(平野謙)의 "순수문학 역사설"이나,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 미즈카미 츠토무(水上勉) 등의 사회파 추리소설 유행에 자극받아 "『순』문학은 존재할 수 있는가"를 발표하여, "순문학 논쟁"(純文学論争)을 일으켰다.

1957년 채털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19] 재판에서는 예술성이 높은 문학작품을 성적인 소재를 다룬다고 하여 외설서적으로 분류하는 것에 대한 타당성 및 그 번역자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가 등의 논쟁이 법정에서 벌어졌으나, 1957년 출판사 및 이토 세이 모두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19] 이 번역물은 1964년에 전후로서는 드물게 복자(伏字)처리되어 출판되었다.[19] 1996년, 차남이 같은 신초사의 작품의 삭제부분을 보충한 완역판을 출판하였으나, 현재까지 이 책은 외설서적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2. 4. 만년

이토 세이는 1962년 일본펜클럽 부회장이 되었다.[25] 오다기리 신, 타카미 준 등과 함께 일본근대문학관 설립 운동을 시작하여 설립 당시 이사가 되었으며, 1965년부터 이사장을 역임했다.[25] 1963년 『일본문단사』로 기쿠치 칸상을 수상했다.[3][25] 1964년 도쿄공업대학을 퇴직하고, 1967년 일본예술원상을 수상[25], 1968년 일본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66년 홋카이도 문학전과 1967년 홋카이도립문학관 설립에도 협력했다.[26]

1969년 장폐색으로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고, 위암 진단을 받고 재입원하여 11월 15일, 암성 복막염으로 도쿄도토시마구카미이케부쿠로의 암연구회 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27] 아오야마 장례식장에서 고별식이 거행되었고, 법명은 해조원석정원이다. 정오위, 훈삼등훈장 녹조훈장을 받았다. 『변용』에 이은 작품으로 『석양』의 구상이 준비되어 있었다.[28]

3. 채털리 재판

1950년, 이토 세이가 번역한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외설문서에 해당한다는 죄목으로 경시청으로부터 적발되었다.[19] 번역자 이토 세이와 출판사인 신초사가 외설 혐의로 기소되었다. 재판에서는 예술성이 높은 문학작품을 성적인 소재를 다룬다고 하여 외설서적으로 분류하는 것에 대한 타당성 및 그 번역자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법정에서 벌어졌다.[19] 1957년 대법원은 이토 세이와 출판사 모두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 번역물은 1964년에 복자(伏字)처리되어 출판되었다. 1996년, 차남 이토 레이가 삭제 부분을 보충한 완역판을 출판하였으나, 현재까지 이 책은 외설서적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이토 세이의 저서 『재판』은 당사자의 입장에서 문학 재판을 방대하고 상세한 기록으로 문제 제기한 논픽션이자 대표작 중 하나이다.

4. 주요 작품


  • 1926년: 『눈보라 길』(유키아카리노미치/雪明りの路일본어) (시집)
  • 1931년: 『M백화점』(M Hyakkaten, 단편소설)
  • 1937년: 『악령의 거리』(Yūki no machi, 장편소설)
  • 1940-41년: 『도쿠노 고로의 생활과 의견』(Tokuno Goro no seikatsu to iken, 장편소설)
  • 1946-48년: 『센키치 나루미』(Senkichi Narumi, 장편소설)
  • 1948년: 『소설의 방법』(Shōsetsu no hōhō, 수필집)
  • 1955-1969년: 『일본 근대 문학 대계』(Nihon kindai bungaku taikei)

4. 1. 시집

이토 세이는 1926년에 시집 『눈보라 길』(유키아카리노미치/雪明りの路일본어)을 출간했다. 1937년에는 『겨울밤』(후유야/冬夜일본어)을 출간했고, 1954년에는 『이토 세이 시집』을 출간했다.

4. 2. 소설

이토 세이는 소설가로서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1932년에는 『생물제』를 출판했고, 1933년에는 『이카루스 추락』을 발표했다. 1941년에는 『도쿠노 고로의 생활과 의견』을 발표했는데, 이는 단편 「채찍」, 「도쿠노 고로의 생활과 의견」 등을 개작하여 장편화한 것이다. 1950년에는 『나루미 센키치』를 발표했다. 1953년에는 『불새』를 출간했고, 1956년에는 『젊은 시인의 초상』을 발표했는데, 이는 「바다가 보이는 마을」, 「젊은 시인의 초상」, 「눈이 내릴 때」, 「아버지의 죽음까지」 등의 단편을 가필, 집성한 것이다. 1958년에는 『범람』을 발표했다.

4. 3. 평론 및 수필

이토 세이는 다양한 평론과 수필을 발표하며 문학적 업적을 남겼다. 1932년에는 『신심리주의 문학』을 발표하였고, 1948년에는 『소설의 방법』을 출간하여 소설 작법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였다. 1952년에는 『재판』을 통해 사회 문제를 다루었으며, 1954년에는 『여성에 관한 십이장』과 『문학 입문』을 발표하여 여성과 문학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특히 1953년부터 1973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집필한 『일본 문단사』는 일본 근대 문학사를 폭넓게 다룬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4. 4. 번역

이토 세이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쓰지노 히사노리(辻野久憲), 나가마쓰 사다무(永松定)와 공동 번역하여 제일서방(第一書房)에서 출판했고, 1938년에는 가와데쇼보(河出書房)에서 출판했다.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1935년에 건문사(健文社)에서 삭제판으로 처음 번역 출판되었고, 이후 1950년 소산서점(小山書店)에서 『채털리 부인의 연인 로렌스 선집』으로, 1964년 신초문고(新潮文庫)에서 『채털리 부인의 연인』으로 출판되었다. 1996년에는 이토 레이(伊藤礼)의 보역을 거쳐 같은 출판사에서 완역본이 출간되었다.

이 외에도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라 포르트 에트루아트/La Porte étroite프랑스어)과 『위조지폐범』(레 포 모네외르/Les faux-monnayeurs프랑스어)(1935년), D. H. 로렌스의 『연애론』(1936년), 쏜튼 와일더의 『운명의 다리』(1940년), 에디스 워튼의 『더러워지지 않은 시대』(1941) 등을 번역했다. 피오트르 크로포트킨의 『러시아 문학 강화』 상·하를 1938년-1939년에 걸쳐 번역했으며, 이는 1947년 세누마 시게키(瀬沼茂樹)와의 공역을 통해 『러시아 문학의 이상과 현실』로 재출간되었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작은 공주』(어 리틀 프린세스/A Little Princess영어)는 1949년에 번역하여 가마쿠라쇼보(鎌倉書房)에서 출판했고, 나중에 신초문고(개정판 2004)에서 다시 나왔다. 그레이엄 그린의 『사건의 핵심』은 1951년 신초사(新潮社)에서 번역 출판되었고, 이후 신초문고(개정판)로 재출간되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즐거운 사람들, 검은 화살』은 니시무라 코우지(西村孝次)와 공동 번역하여 1955년 소산서점(小山書店)의 세계대중소설전집(世界大衆小説全集)에 수록되었다.[51] 올더스 헉슬리가 편집한 『D. H. 로렌스의 편지』 상·하는 나가마쓰 사다무(永松定)와 공동 번역하여 1956년-1957년에 야요이쇼보(彌生書房)에서 출판되었고, 1971년 야요이선서(彌生選書)로 다시 나왔다. D. H.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은 1960년 가와데쇼보신샤(河出書房新社)의 세계문학전집(世界文学全集)에 번역 수록되었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은 1962년 고단샤(講談社)의 소년소녀세계명작전집(少年少女世界名作全集)에 번역 수록되었다.

5. 수상 경력

오에 겐자부로(大江 健三郎, Kenzaburō Ōe)와 쓰시마 유코(津島 佑子, Yūko Tsushima) 등이 이토 세이 문학상을 수상했다.[2]

6. 평가 및 영향

이토 세이는 일본 근대 문학에서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2] 제임스 조이스마르셀 프루스트의식의 흐름 기법을 연구하여 1932년 "신심리주의문학"을 발표, '신심리주의'를 통해 일본 문학에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다.[33] 요코미쓰 리이치의 「기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수정 환상」 등도 이러한 신심리주의적 기법을 사용한 작품으로 평가된다.[18]

『신심리주의문학』 코세이카쿠 1932년


이토 세이는 소설, 평론, 번역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33] 1948년에 출간한 『소설의 방법』은 근대 일본 문학을 서구 문학과 비교하면서 최초로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파악한 문예 비평으로 평가받는다.[30] 본다 슈고는 『이야기 전후 문학사』에서 이 책이 마르크스주의 예술론과 '인격미학'에 종언을 고하고 '조직'의 힘을 인식했다고 평가했다.[36]

채털리 부인의 연인 번역과 관련하여 일본에서 발생한 채털리 재판은 문학의 자유와 검열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발했다.[30] 이토 세이는 이 재판의 경험을 바탕으로 예술은 "생명의 쪽에 서서, 인간을 억압하는 질서에 반항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제시했다.[30]

1990년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토 세이 문학상이 제정되었다.[2]

참조

[1] 웹사이트 Sei Ito https://www.findagra[...] 2021-11-28
[2] 서적 The A to Z of Modern Japanese Literature and Theater Scarecrow Press
[3] 웹사이트 伊藤整 (Itō Sei) https://kotobank.jp/[...] 2021-11-28
[4] 서적 Encyclopedia of Literary Modernism Greenwood Press
[5] 서적 The Columbia Anthology of Modern Japanese Literature: From Restoration to Occupation, 1868-1945 Columbia University Press
[6] 서적 A Companion to James Joyce Wiley
[7] 웹사이트 白樺文学館公式ホームページ>171. 「小林多喜二と伊藤整」및 伊藤整:作家事典:ほら貝 http://www.shirakaba[...]
[8] 서적 伊藤整詩集 新潮文庫
[9] 서적 新潮日本文学31 伊藤整集 新潮社
[10] 서적 瀬沼茂樹文庫目録 日本近代文学館
[11] 서적 伊藤整とモダニズムの時代 文学の内包と外延 花鳥社
[12] 서적 言語にとって美とはなにか
[13] 서적 日本文学史 近代から現代へ 中央公論社
[14] 간행물 文学的自伝 新潮社
[15] 서적 昭和文学盛衰史 講談社
[16] 웹사이트 メディア展望 2011年11月1日号 https://www.chosakai[...] 2024-10-14
[17] 웹사이트 伊藤整氏奮闘の生涯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 2024-10-14
[18] 서적 昭和文学史 筑摩書房
[19] 서적 文壇栄花物語 ちくま文庫
[20] 서적 現代世相風俗史年表:1945-2008 河出書房新社
[21] 뉴스 サザエさんをさがして――伊藤整――タイトルは時代を表す 朝日新聞東京本社 2009-08-29
[22] 웹사이트 昭和29(1954)年のベストセラー http://www.indierom.[...]
[23] 서적 伊藤整ブームと『日本文壇史』の方法 講談社学術文庫
[24] 서적 文壇挽歌物語 ちくま文庫
[25] 뉴스 朝日新聞東京本社 1967-04-07
[26] 서적 様々お世話になった人-伊藤整と北海道 講談社文芸文庫
[27] 서적 作家の臨終・墓碑事典 東京堂出版
[28] 서적 著者に代わって読者へ 回転書棚の軋み 講談社文芸文庫
[29] 웹사이트 Sei Itō https://www.nobelpri[...]
[30] 서적 解説 中央公論社
[31] 서적 解説 岩波文庫
[32] 서적 伊藤整詩集 新潮文庫
[33] 서적 日本近代文学評論選 岩波文庫
[34] 서적 新潮社
[35] 서적 解説 岩波文庫
[36] 서적 小説の方法 筑摩叢書 1989
[37] 서적 男の小説 集英社 2017
[38] 서적 作家案内 伊藤整 伊藤整と三島由紀夫 講談社学術文庫 1994
[39] 서적 得能五郎の生活と意見 新潮文庫 1954
[40] 서적 得能物語 新潮文庫 1954
[41] 문서 得能五郎と鳴海仙吉
[42] 서적 女性に関する十二章 中公文庫 1974
[43] 서적 誘惑 角川文庫 1962
[44] 서적 感傷夫人 新潮文庫 1959
[45] 서적 日本の現代小説
[46] 서적 伊藤整の評論-伊藤整の周辺(6) 講談社文芸文庫 1997
[47] 서적 伊藤整『日本文壇史』の特質 講談社文芸文庫 1994
[48] 서적 紙つぶて(完本版) PHP文庫 1999
[49] 서적 紙つぶて(完本版) PHP文庫 1999
[50] 문서 評論選集
[51] 문서 短編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