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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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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순은 당나라 중기의 인물로, 안사의 난 당시 수양을 지키는 과정에서 보여준 충절과 군사적 재능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그는 709년에 태어나 과거에 급제한 후, 안록산의 반란에 맞서 영구, 수양 등지에서 격전을 벌였다. 특히 수양 전투에서 식량이 고갈되자 인육을 먹는 극한 상황에서도 항전을 멈추지 않았으나, 결국 함락되어 처형되었다. 그의 행적은 후대 평가에서 엇갈리지만, 그의 충절과 군사적 능력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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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 (당나라)
기본 정보
장순
직업장군
출생709년
사망757년 11월 24일

2. 생애

755년, 안록산이 범양(현재 베이징)에서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점령하고 의 황제를 칭하자, 장순은 연에 항복하라는 상사의 명령을 거부하고 노자 사당에서 당나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수천 명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영구에서 연군에 맞서 싸웠고, 여러 차례 승리하며 당나라의 주요 거점을 지켜냈다.[6][7][8]

756년 봄, 영호초(令狐潮)가 이끄는 연군이 영구를 다시 포위하자, 장순은 현종의 초상화에 절하며 항복을 주장하는 장교 6명을 처형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9] 이후 영구의 보급선이 차단되고 다른 당나라 도시들이 함락되자, 장순은 영구를 포기하고 영릉으로 철수하여 허원(許遠)과 합류, 하남절도사(河南節度使) 곽왕 이거(李巨)의 부관이 되었으나, 이거는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다.[10]

안록산이 암살되고 안경서가 연의 황제가 된 후, 장군 윤자기(尹子奇)가 수양을 공격하자, 허원의 요청으로 장순은 영릉을 떠나 수양 방어에 합류했다. 허원은 군사 지휘권을 장순에게 넘기고 병참을 담당했다.[10] 장순은 수양 전투에서 뛰어난 지략과 용맹을 보여주며,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대응하고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하며 사기를 높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싸우는 투지를 보였고,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첩까지 죽여 병사들에게 먹이는 비장함을 보였다.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당 중종 재위 기간인 709년에 태어났다.[6] 그는 키가 1.9미터가 넘고 위압적인 외모를 지녔다고 묘사되었다. 공식 역사서인 구당서신당서는 장순의 출신지에 대해 다르게 언급하는데, 구당서는 그가 산시성 윈청 시 인근의 푸저우(蒲州) 출신이라고 기록했고[7], 신당서는 그가 허난성 난양 시 인근의 덩저우(鄧州) 출신이라고 기록했다.[6] 어려서부터 병법을 공부하며 큰 포부를 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는 군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만 교류하여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 현종의 치세인 개원 연간(713-741) 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에는 현종의 태자 이형의 참모로 일하다가 허베이성 싱타이 시에 위치한 칭허 현(清河)의 현령으로 임명되었다. 칭허에서 그는 유능하게 업무를 수행했으며, 그곳에 있는 동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임기가 끝나자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돌아갔다. 당시 조정의 정치는 재상 양국충이 장악하고 있었고, 장순의 친구들은 그에게 양국충을 만나 다른 관직을 얻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장순은 신하가 아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이를 거절했다. 이후 허난성 저우커우 시에 위치한 전원 현(真原)의 현령을 지냈다. 당시 이 현의 대가문들은 권력이 막강하고 간교했는데, 그 중 하나인 화남진(華南金)이라는 지방 관리가 현 정부에서 너무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사람들은 "화남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정부의 손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장순은 전원에 부임한 후, 권력을 남용한 화남진을 처형했지만, 뉘우친 화남진의 동료들은 사면했다. 그는 또한 검소하게 현을 다스렸고, 백성들은 그의 통치를 칭찬했다.[6] 그의 형인 장효(張曉) 역시 조정의 관료였으며, 형제는 모두 문재(文才)로 명성이 높았다.[7]

2. 2. 안사의 난과 활약

755년, 안록산이 범양(현재 베이징)에서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점령하고 의 황제를 칭했다. 장순은 연에 항복하라는 상사의 명령을 거부하고, 노자 사당에서 당나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수천 명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영구에서 연군에 맞서 싸웠고, 여러 차례 승리하며 당나라의 주요 거점을 지켜냈다.[6][7][8]

756년 봄, 영호초(令狐潮)가 이끄는 연군이 영구를 다시 포위하자, 장순은 현종의 초상화에 절하며 항복을 주장하는 장교 6명을 처형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9] 이후 영구의 보급선이 차단되고 다른 당나라 도시들이 함락되자, 장순은 영구를 포기하고 영릉으로 철수하여 허원(許遠)과 합류, 하남절도사(河南節度使) 곽왕 이거(李巨)의 부관이 되었으나, 이거는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다.[10]

안록산이 암살되고 안경서가 연의 황제가 된 후, 장군 윤자기(尹子奇)가 수양을 공격하자, 허원의 요청으로 장순은 영릉을 떠나 수양 방어에 합류했다. 허원은 군사 지휘권을 장순에게 넘기고 병참을 담당했다.[10]

2. 2. 1. 영구 전투

755년 말, 장순이 진원현에서 복무할 때, 장군 안록산이 범양(현대 베이징)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안록산은 빠르게 남쪽으로 진격하여 당나라의 동쪽 수도 낙양을 점령하고, 스스로를 새로운 의 황제로 선포했다. 그의 장군 중 한 명인 장통무(張通晤)는 낙양에서 동쪽으로 진격하여 여러 당나라 관료들의 항복을 이끌었다. 장순의 상사였던 양만석(楊萬石)은 장순에게 비서실장이 되어 장통무를 환영하는 대표단을 이끌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장순은 대표단을 노자의 사당으로 이끌고, 연에 대항하여 당나라에 대한 충성을 계속 선언했다. 수천 명의 관리와 일반 시민들이 그를 따랐으며, 그는 1,000명의 병사를 선발하여 영구로 갔다.[6][7]

영구에서 또 다른 연 저항군인 가분(賈賁)이 당나라 관료 출신이자 연 장군인 영호초(令狐潮)에 대항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영호가 반격했을 때, 가분은 전투에서 사망했고 장순은 영구 방어를 위한 당나라 군대의 단독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이 지역의 당나라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인 오왕 이지(李祇)에게 항복했고, 이지는 그에게 어사(御史)의 칭호를 수여하여 영구의 군대에 대한 공식적인 지휘권을 부여했다.[6][7]

영호는 곧 40,000명의 연군과 함께 다른 연 장군 이회선, 양조종(楊朝宗), 사원동(謝元同)을 이끌고 돌아왔다. 장순은 그의 2,000명의 병력을 방어 그룹과 공격 그룹으로 나누었고, 연군이 도시를 포위하자 그는 수많은 기습 반격을 감행하여 연군에게 피해를 입혔다. 영구는 약 60일 동안 포위되었지만, 연군은 영구를 점령할 수 없었고 철수해야 했다.[8]

756년 봄, 영호가 돌아와 영구를 다시 포위했다. 절박한 포위 공격 중에 장순의 장교 6명이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순은 동의하는 척하며 다음 날 아침, 현종 황제의 초상화를 내걸고 병사들을 이끌고 그것에 절을 한 다음, 6명의 장교를 소환하여 처형했다. 영구를 함락시키지 못하자, 영호는 다시 포위를 풀고 진류(陳留, 현대 카이펑, 허난)로 철수해야 했다. 한편, 또 다른 연 장군 이정망(李庭望)이 영구를 통과하여 영릉과 상읍(襄邑, 둘 다 현대 상추, 허난)을 공격하려 하자, 장순은 그를 공격하여 영릉과 상읍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게 만들었다.[9]

756년 겨울, 영호는 왕복덕(王福德)과 함께 다시 영구를 공격했지만 장순에게 다시 격퇴되었다. 그러나 영호와 이정망은 영구 북쪽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여 영구의 보급선을 차단했다. 이 지역의 다른 여러 당나라 소유 도시들이 함락되고 양조종이 다시 영릉을 공격할 준비가 되자 장순은 영구를 포기하고 영릉으로 철수하여, 영릉에서 수양군(睢陽, 대략 현대 상추) 태수 허원(許遠)과 합류했다. 그들은 양조종의 공격을 격퇴하여 그를 도망치게 했다. 장순은 이후 하남절도사(河南節度使, ''절도사'')인 곽왕 이거(李巨)의 부관이 되었지만, 팽성(彭城)에 있던 이거에게 지원을 요청했을 때, 이거는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고 장순의 부하들에게만 공식 직함을 부여했다.[10]

이 시점에서 안록산은 암살되었고 그의 아들 안경서가 연의 황제로 교체되었다. 안경서가 왕위를 계승한 후, 그는 장군 윤자기(尹子奇)를 보내 수양(즉, 수양군의 수도)을 공격했다. 그 시점에서 수양으로 돌아온 허원은 장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따라서 장순은 그의 부하 연탄(廉坦)에게 영릉 방어를 맡기고 대부분의 군대를 수양으로 데려가 함께 도시를 방어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윤자기의 공격을 격퇴했지만, 윤자기는 곧 재집결하여 수양을 포위했다. 허원은 자신이 군사에 정통하지 않은 민간 관료라는 점을 언급하며, 그들의 연합 군대의 지휘권을 장순에게 부여하고 군사 문제에 대한 책임을 장순에게 맡기고 병참만 담당했다.[10]

2. 2. 2. 수양 전투

안사의 난 중 수양에서 장순의 작전을 보여주는 지도


은자기는 수양을 반복적으로 공격했지만, 장순은 매번 이를 격퇴했다. 수비에 대비해 서원이 비축해 둔 식량은 이구의 강요로 다른 지휘부에 할당되면서 고갈되기 시작했다. 757년 여름, 수양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병사들은 쌀, 차 잎, 종이, 나무 껍질을 섞어 먹었다. 많은 이들이 질병으로 고통받았지만, 장순은 계속 공격을 격퇴했다. 그는 수비 구역을 서원과 나누어, 자신은 북동쪽을, 서원은 남서쪽을 방어하며 낮과 밤을 병사들과 함께 보냈다. 그는 연군에게 당의 대의가 정의롭다고 설득했고, 이에 감동한 연군 병사들이 항복하여 그의 군대에 합류하기도 했다.[10]

장순은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부하 남제운(南霽雲)을 린회(臨淮, 현대의 화이안시, 장쑤성)로 보냈다. 그러나 린회의 당나라 장군 힐란진명(賀蘭進明)은 구원을 거부했다. 그는 수양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수양이 함락되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힐란은 장순과 서원을 질투했고, 재상 방관의 동맹이었던 서숙기(許叔冀)의 공격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힐란은 남제운을 자신의 부하로 삼으려 했지만, 남제운은 거절했다. 그는 닝링으로 가서 련탄과 3,000명의 병력과 합류한 다음 수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수양에 도착하여 다시 도시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었고, 1,000명의 병력만이 생존하여 수비대에 합류했다.[10]

장순의 부하들은 수양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도망갈 것을 제안했다. 장순과 서원은 논의 끝에 도시를 계속 방어하기로 결정했다. 수양을 포기하면 연군이 회수와 양쯔강 사이 지역을 공격할 수 있으며, 병력이 약해 수양을 포기해도 재앙을 피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량이 더욱 고갈되어 군마를 죽여 식량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말이 다 죽자 참새와 쥐를 먹었다. 결국 장순은 자신의 후궁을 죽여 병사들이 먹게 했다. 서원은 하인을 죽여 식량으로 삼았고, 그 다음에는 도시의 여성, 몸을 쓸 수 없는 남자들을 죽였다. 모두가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저항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도시에는 400명만이 남았다.[11]

3. 평가

757년 11월 24일,[2] 연(燕) 군이 수양(睢陽)을 함락시키면서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은 포로로 잡혔다. 은자기는 장순을 존경하여 살리려 했으나, 부하들의 반대로 장순, 남제운(南霽雲), 뇌만춘(雷萬春중국어)을 포함한 핵심 장교 36명을 처형했다. 허원은 낙양(洛陽)으로 압송되던 중 살해되었다.[11]

숙종은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후, 연군과 싸우다 죽은 많은 관료들에게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수양에서의 식인 행위 때문에 장순과 허원에게 시호를 내릴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장순의 친구 이한(李翰)은 장순의 전기를 써서, 장순이 없었다면 당나라가 전쟁에서 완전히 패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1] 이한 외에도 이서(李紓)(李紓중국어), 동남사(董南史), 장건봉, 범황(樊晃)(樊晃중국어), 주거천(朱巨川) 등이 장순을 옹호했다. 숙종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장순, 허원 등에게 시호를 내리고 그들의 가족에게 큰 포상을 내렸다.[6]

수양에는 장순과 허원을 기리는 사당인 쌍묘(雙廟)가 세워졌다.[6] 이들은 중국 사찰과 도교 사찰에서 문신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장순과 그의 행적은 후대 학자, 정부 관리, 작가들에게서 칭송받았다. 송나라 관리 문천상은 《정기가》(正氣歌)에서 장순을 의로운 인물 중 한 명으로 꼽았다.[12] 그러나 청나라 학자 왕부지는 장순이 식인을 허용하고 장려한 점을 비판했으며,[4] 현대 역사가 보양은 장순의 행동의 비참함을 지적했다.[13]

3. 1. 대한민국에서의 평가

장순이 죽은 직후, 이미 고립된 성이 된 수양을 굳이 지키려 한 것을 비판하며 사람을 잡아먹은 일이나 백성을 지키지 못한 점을 헐뜯는 의견도 있었다.[1]

그러나 장순의 친구 이한은 그를 위해 전을 지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1]

: "순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물리치고 강, 회를 보존하여 폐하를 기다렸습니다. 그의 공적은 위대합니다. 그런데도 논의하는 자들은 그가 사람을 잡아먹었다거나, 죽도록 지킨 것은 어리석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선을 가로막고 악을 드러내는 행위이며, 신은 이를 안타깝게 여깁니다. 순이 굳게 지킨 것은 구원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도착하기 전에 식량이 다 떨어져 부득이 사람을 먹었지만, 그의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순은 큰 난관 속에서 죽었으며, 다만 명성만이 그의 영광입니다. 지금 이를 기록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삶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신은 감히 한 권을 편찬하여 이를 헌상합니다."

이 일로 인해 장순에 대한 평가는 정해졌다고 여겨진다.[1]

고스기 호안처럼 "구스노키의 지하야 성에 비할 만한 칭찬받을 만한 공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지만, 왕부지처럼 "두 안씨(안진경, 안고경)가 하북에서 일어나고, 장허(장순·허원)가 수양을 지킨 것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을 이끌고 싸운 것이다. 이는 적들이 우습게 여기는 대상이다."라고 현종의 군정 실패로 인한 희생자로 보는 역사가도 있다.[1]

4. 기타

군중문적(軍中聞笛)
岧嶤試一臨|초요시일림중국어초요(岧嶤)에 시험 삼아 한 번 다다르니
虜騎附城陰|로기부성음중국어오랑캐 기병은 성의 그늘에 붙어있네
不辨風塵色|불변풍진색중국어풍진의 색을 분간하지 못하면
安知天地心|안지천지심중국어어찌 천지의 마음을 알리오
門開邊月近|문개변월근중국어문이 열리니 변방의 달이 가깝고
戦苦陣雲深|전고진운심중국어싸움은 고되고 진의 구름은 깊어라
旦夕更樓上|단석경루상중국어아침 저녁으로 경루(更樓) 위에서
遙聞横笛音|요문횡적음중국어멀리서 들려오는 횡적(横笛)의 소리


5. 관련 자료


  • 舊唐書중국어 ([https://web.archive.org/web/20080621193221/http://www.sidneyluo.net/a/a16/187b.htm 권187, 2부])
  • 新唐書중국어 ([https://web.archive.org/web/20071226122600/http://www.sidneyluo.net/a/a17/192.htm 권192])
  • 資治通鑑중국어 권 217, 218, 219, 220
  • 아사미 쿄사이 저 『정헌유언』은 중국 역사상 유명한 충의 의사 8명을 골라 대표적인 시문을 엮은 결정체이다. 그중에 안진경이 언급되었다. 안진경의 전기가 끝난 뒤, 후기로서 장순의 전기가 시작된다. 같은 난리에 처한 두 사람의 운명이다.
  • 구당서』 권187 하 열전 제137 하 충의 하 「장순전」
  • 신당서』 권192 열전 제117 충의중 「장순전」
  • 한유 「장중승전후서」

참조

[1] 서적 New Book of Tang
[2] 서적 Zizhi Tongjian 0757-11-24
[3] 서적 Zizhi Tongjian
[4]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0757
[5] 웹사이트 Old Book of Tang https://web.archive.[...] 2008-06-21
[6] 서적 New Book of Tang
[7] 서적 Old Book of Tang
[8] 서적 Zizhi Tongjian
[9] 서적 Zizhi Tongjian
[10] 서적 Zizhi Tongjian
[11] 서적 Zizhi Tongjian
[12] 기타 Song of Righteousness
[13]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0757
[14] 서적 唐詩及び唐詩人 角川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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