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식 (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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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식(張寔)은 271년에 태어나 320년에 사망한 전량의 지배자이다. 그는 장궤의 아들이자 양주 자사를 역임했으며, 서진 정부에 복종하며 군사 지원을 했다. 전조의 멸망 이후 동진에 복속했지만 서진 민제의 연호를 계속 사용했다. 장식은 320년 유홍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 염섭에게 암살당했으며, 사후 소공으로 시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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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 (전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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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장식 |
작위 | 원공 (元公, 동진 추증) 명왕 (明王, 장조 추증) |
묘호 | 고조 (高祖, 장조 추증) |
시호 | 소공 (昭公) |
시대 | 전량 |
재위 기간 | 314년 ~ 320년 |
연호 | 건흥 (建興): 317년 ~ 320년 |
아버지 | 장궤 |
관직 | |
추증 관직 | 시중 (侍中) 태위 (太尉) 양왕 (涼王) |
생전 관직 | 지절 (持節) 도독양주제군사 (都督涼州諸軍事) 서중랑장 (西中郎將) 양주자사 (涼州刺史) 영호강교위 (領護羌校尉) 서평공 (西平公) |
생애 | |
출생 | 태시 7년 (271년) |
사망 | 건흥 8년 (320년) |
능묘 | 녕릉 (寧陵) |
2. 생애
장식은 271년 장궤(張軌)의 아들로 태어났다. 314년 장궤가 병으로 양주자사(凉州刺史) 직위에서 물러나자 뒤를 이어 양주자사가 되었고, 장궤가 죽자 서평공(西平公) 작위도 이었다. 장안(長安)의 서진(西晉) 정부에 계속 복종하며 군사적 지원을 하였으나, 317년 전조(前趙)에 의해 서진이 멸망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후 강남에서 동진(東晉)이 부활하자 이에 계속 복종하는 한편, 간쑤성 동부의 진주(秦州)에서 전조에 맞서는 사마보(司馬保)를 적극 지원하였다. 그러나 사마보의 군대가 양주로 들어오는 것은 거부하였다. 동진에 복속하기는 하였으나 동진의 정통성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진의 연호를 따르지 않고 서진 민제(愍帝)의 연호인 건흥(建興)을 계속 사용하였다.
320년 유홍이 종교 반란을 일으키자 장식은 반란을 수습하였으나, 유홍의 신자인 염섭에게 암살당했다. 시호는 소공(昭公)이며, 동진 원제(元帝)는 원공(元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354년 장조가 명왕(明王)으로 추존하였다.[5]
2. 1. 초기 생애와 서진 조정에서의 활동
태시 7년(271년)에 장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학문에 대한 견식이 깊고, 현인을 존경하고 선비를 아꼈다. 이윽고 수재로 추천되어 낭중이 되었고, 후에 효기장군에 임명되었으나 굳이 사양했다.영가 원년(307년),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인 량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여 조정에 허락을 받아 의랑으로 개임되었다. 당시 아버지 장궤가 량주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장월·조거 등이 난을 일으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영가 2년(308년) 2월경, 장식은 량주의 치소인 고장에 도착하자 아버지에 의해 중독호에 임명되어 즉시 난의 진압을 명받았다. 장식은 군을 이끌고 남진하여 조거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그 후 다시 조거 공격을 명받자, 윤원·송배를 비롯한 보병과 기병 3만여 명을 이끌고 군을 진격시켰다. 조거는 국조를 황판에 파견하여 장식의 대군과 대치하게 했다. 장식은 몰래 소로에서 호면으로 나와 파강으로 진격하여 조거와 교전했다. 그리고 아문장 전요를 참살하자, 기세를 몰아 조거를 토벌했다. 장월은 크게 두려워하여 도주했고, 량주의 소란은 진정되었다. 공적으로 건무정후에 봉해졌다. 얼마 후 서중랑장이 되었고, 작위는 복록현후로 진급했다.
영가 6년(312년) 9월, 서평군 출신 왕숙과 조거의 잔당인 국유 등은 전 복록현령 국각을 협박하여 맹주로 추대하고, 서진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서평군 태수 조이를 사로잡고, 조정에 반역한 진주자사배포 등과 호응했다. 장식은 그들을 토벌하러 가서 국유 등을 격파하고 주살했으며, 주범이었던 600여 가구를 이주시키도록 했다. 치중 령호류는 "악인을 일소하려면 농부가 풀을 베어내듯, 두 번 다시 재생하지 못하도록 뿌리부터 제거해야 합니다. 지금 즉시 반란자들의 집을 모두 퇴거시키고, 뒤탈을 없애야 합니다"라고 진언했으나, 장식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국유의 잔당들은 령호류가 우려한 대로 난을 일으켰지만, 장식은 군사를 이끌고 즉시 평정했다.
건흥 원년(313년), 서중랑장에서 호강교위로 옮겼다.
2. 2. 전량의 통치자
314년 장궤가 병으로 양주자사(凉州刺史)에서 물러나자 뒤를 이어 양주자사가 되었으며, 장궤가 죽자 서평공(西平公)의 작위도 이었다. 장안(長安)의 서진(西晉) 정부에 계속 복종하며 군사적 지원을 하였으나, 317년 전조(前趙)에 의해 서진이 멸망하는 것을 막는 데는 실패하였다. 이후 강남에서 동진(東晉)이 부활하자 이에 계속 복종하는 한편, 진주(秦州 : 간쑤성 동부)에서 전조에 맞서는 사마보(司馬保)를 적극 지원하였다. 그러나 사마보의 군대가 양주로 들어서는 것은 거부하였다. 동진에 복속하기는 하였으나 동진의 정통성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진의 연호를 따르지 않고 서진 민제(愍帝)의 연호인 건흥(建興)을 계속 이어서 사용하였다.건흥 2년(314년) 2월, 장궤가 노령으로 병에 눕게 되자 장식은 부자사(副刺史)·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에 임명되어 보좌했다.[1] 같은 해 5월, 장궤는 병세가 위중해지자 장식에게 뒤를 잇도록 유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1] 장사(長史) 장새(張璽) 등은 장식을 추대하여 아버지의 지위를 대행하게 했다.[1] 10월, 장식은 장안에서 즉위한 서진 민제(愍帝 (西晉))로부터 지절(持節)·도독 양주 제군사(都督涼州諸軍事)·서중랑장(西中郎將)·양주자사(涼州刺史)·령호강교위(領護羌校尉)·서평공(西平公)을 받았다.[1]
건흥 3년(315년) 10월, 난지장(蘭池長) 조석(趙奭)의 상군(上軍)이었던 장빙(張冰)이라는 인물이 '황제행새(皇帝行璽)'라는 글자가 새겨진 인새(印璽)를 발견하여 장식에게 헌상했다.[2]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군신(群臣)들은 모두 장식이 황제에 오를 조짐이라며 축하를 했다.[2] 그러나 장식은 삼국 시대의 원소(袁紹) (당시 황제였던 헌제(劉協)를 제쳐두고 유우(劉虞)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고자, 옥인을 입수하여 대의명분으로 삼았다)를 예로 들며 군신들을 간하고, 이 인새를 장안에 있는 민제의 밑으로 보내 전달했다.[2]
건흥 4년(316년) 4월, 장식은 양주(涼州) 일대에 "두려운 마음으로 내가 선인의 사업을 계승하였다. 형사(刑事)·정사(政事)가 민중의 환란이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해마다 기근·한해가 일어나고 있으니, 이는 내게 어떤 결점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지금, 그것을 전하는 자가 있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라는 명을 내렸다.[3] 관리·백성 중에서 자신의 과실을 신고한 자에게는 포견(布絹)·양·광비(筐篚)·곡물을 주었다.[3] 고창(高昌)의 적조좌(賊曹佐)였던 외근(隗瑾)은 장식이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든 정무의 결재를 스스로 하고 있는 것을 간하고, 하급 관리에게서도 의견을 구하도록 진언하자, 장식은 이 진언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외근의 지위를 3등 승진시키고 비단 40필을 하사했다.[3]
같은 해, 장궤는 독호 왕해를 장안으로 파견하여 지방의 진귀한 물품, 명마, 경서, 서적 등의 여러 군의 공물을 헌상했다.[4] 8월, 한(후의 전조)의 중산공 유요가 장안을 습격하자 장궤는 구원을 위해 다시 왕해를 파견했다.[4] 민제는 장궤의 충성을 칭찬하며, 도독 섬서 제군사에 임명했다.[4] 그러나 이때에는 거듭된 유요군의 침공으로 장안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식량 부족에 시달린 장안에서는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 참극이 벌어져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4] 장궤의 숙부 장숙은 장안의 위기를 듣고 스스로 선봉이 되어 유요를 격파하고 싶다고 청했으나, 장궤는 장숙이 노령이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4]
11월, 민제는 유요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황문랑 사숙, 시어사 왕충을 량주로 파견했다.[5] 사숙 등은 장궤를 접견하여 "황제께서 항복하셨습니다. 저희는 폐하의 조서를 받들어 여기까지 도망쳐 왔습니다"라고 말하며, 장궤를 대도독, 량주목, 시중, 사공에 임명하고, 함께 강남으로 피신한 낭야왕 사마예를 새로운 황제로 보좌하도록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5] 장궤는 두 명의 칙사를 사흘 밤낮으로 성대하게 접대했지만, 임명된 관직은 모두 사퇴했다.[5] 장안 함락의 소식을 들은 숙부 장숙은 비분강개하여 사망했다.[5]
건흥 5년(317년) 1월, 한제 유총이 민제를 강제로 황제에서 폐위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 장궤는 여러 장수를 전조의 수도인 평양으로 파견했다. 또한 남양왕 사마보에게도 서신을 보내 함께 한을 토벌할 것을 요청했다. 장궤군의 무장인 태부사마 한박은 남안까지 군대를 진격시켰지만, 여러 강족에 의해 진격을 방해받았다. 양군은 백여 일 동안 대치했고, 한박군의 병량과 화살이 다 떨어졌지만, 늦게 도착한 원군과 협공하여 한군을 대파하고 수천의 수급을 얻었다. 그러나 한박의 군대는 더 이상 진격을 계속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2. 3. 내치와 외치
영가 2년(308년), 장식은 고장에서 조거의 난을 진압하고 건무정후에 봉해졌으며, 서중랑장으로 승진하고 작위는 복록현후로 올랐다.[1] 건흥 원년(313년)에는 호강교위로 옮겼다.[3]건흥 2년(314년) 5월, 아버지 장궤(張軌)가 사망하자 장사(長史) 장새(張璽) 등의 추대로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했다.[4] 10월에는 민제(愍帝 (西晉))로부터 여러 관직을 받았다.[4]
건흥 4년(316년) 4월, 장식은 양주(涼州)에 명을 내려 관리와 백성들에게 자신의 과실을 신고하도록 하고 포상했다.[5] 고창(高昌)의 외근(隗瑾)의 건의를 받아들여 하급 관리의 의견도 구하고, 외근의 지위를 승진시키고 비단을 하사했다.[5]
건흥 6년(318년) 3월, 안정군 태수 초숭과 진안이 상규의 사마보를 공격하자, 사마보의 요청에 따라 금성군 태수 두도 등에게 군사 2만을 주어 구원하게 했다. 사마보가 황제에 즉위하려 하자 반대했고, 민제가 처형되자 사마예에게 황제 즉위를 권했다. 사마예는 건업에서 즉위했지만, 장식은 계속 서진의 연호인 건흥을 사용했다. 사마보는 진왕을 자칭하며 장식을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과 의동삼사에 임명했다.
진안이 저족과 강족을 이끌고 사마보를 공격하자, 장식은 한보에게 군사 5천을 주어 구원하게 했다. 진안이 물러나자 사마보는 상규로 돌아갔으나, 다시 진안에게 패배하여 장식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장식은 송의를 파견하여 진안을 공격하고 철수시켰다. 사마보가 유요에게도 공격받아 양주로 도망치려 하자, 장식은 사마보의 명망을 두려워하여 부하 음감(음담의 동생)을 보내 호위하는 척하며 막았다. 사마보가 죽자 그의 부하들이 양주로 피신해 오는 자가 1만 명이 넘었다.
이 무렵부터 장식은 하서가 험준하고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점점 자만해졌다고 한다.
2. 4. 암살과 최후
320년 유홍이 종교 반란을 일으키자 장식은 반란을 수습하였으나 유홍의 신자인 염섭에 의해 암살당했다.[5] 동진 원제는 원공(元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고, 354년 장조가 명왕(明王)으로 추존하였다.[5]당시 량주(涼州) 천제산(天梯山)에는 사악한 술법에 능한 유홍이라는 인물이 살고 있었는데, 백성들의 신앙을 얻어 천여 명을 따르게 했고, 장식의 주변 사람들도 차츰 그를 숭배하게 되었다. 장식의 부하인 염섭과 조앙은 유홍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특히 그를 광적으로 믿었다. 320년(건흥 8년), 유홍은 그들에게 "하늘이 나에게 신새(神璽)를 내려 량주에서 왕이 되라고 알렸다"고 말하자 염섭과 조앙은 이를 깊이 믿고 몰래 장식의 측근 10여 명과 모의하여 장식을 암살하고 유홍을 군주로 옹립하려 했다. 장식의 동생 장무는 그들의 계획을 알고 유홍을 죽일 것을 요청했다. 장식은 이에 동의하고, 사초에게 유홍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사초가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염섭 등은 계획을 실행에 옮겨 흉기를 품고 장식의 저택에 침입하여 장식을 살해했다.[5]
그 후 사초가 유홍을 죽이러 가자 유홍은 "장사군(張使君)은 이미 죽었다. 이제 와서 나를 죽여도 늦다"고 말했다. 사초는 격노하여 유홍의 혀를 자르고 감옥에 가두었다. 이후 유홍은 고장성(姑臧城) 시가지로 끌려 나와 거열형에 처해졌고, 유홍의 무리 수백 명도 주살되었다. 좌사마(左司馬) 음원 등은 장식의 아들 장준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동생 장무를 량주자사(凉州刺史) · 서평공(西平公)으로 세우고, 경내에 대사령을 내렸다. 장무가 자리를 계승한 후, 장식은 소공(昭公)으로 시호되었고, 영릉(永陵)에 묻혔다. 원제 사마예는 대사마(大司馬) · 량주목(凉州牧)을 추증하고, 원공(元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5]
이윽고 손자 장조가 왕위를 칭하자 소왕(昭王)으로 추시되었고,[5] 묘호는 고조(高祖)로 정해졌다.
3. 일화
영가 연간(307년~313년) 동안 장안에서는 "진천(秦川)은 온통 피바다가 되어 팔까지 잠길 지경이다. 그러나 량주(涼州)에 있으면 안심하고 볼 수 있다."라는 노래가 유행했다.[1] 장식 시대에 저족(氐)과 강족(羌)이 롱우(隴右)·옹주(雍州)·진주(秦州) 지역을 약탈하면서[1] 이 지역에서는 열 명 중 여덟, 아홉 명이 전쟁으로 죽는 참혹한 상황이었지만, 량주만은 평안했다.[1] 이로 인해 노래의 내용이 현실이 되었다.[1]
장식의 침실 기둥에는 머리가 없는 사람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 그림이 사라지자 장식은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2] 얼마 지나지 않아 장식이 죽었다.[2]
4. 가계
張寔|장식중국어은 271년에 장궤(張軌)의 아들로 태어났다.[1] 동진 원제는 소공(昭公) 사후에 원공(元公)이라는 시호를 추가로 하사하였다.[1] 354년 장조는 명왕(明王)으로 추존하였다.[1]
참조
[1]
간행물
Zizhi Tongjian
0320-07-22 ~ 0320-08-20
[2]
서적
Shiliuguo Chunqiu
[3]
서적
Book of Jin
[4]
문서
一説には永安
[5]
문서
『十六国春秋』では明王と記載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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