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차 원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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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2차 원주 전투는 한국 전쟁 중 중공군의 제3차 공세에 맞서 1950년 12월 31일부터 1951년 1월 30일까지 원주시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를 의미한다. 북한군의 공격과 유격전으로 시작된 제1차 원주 전투에서 유엔군은 원주를 상실했으나, 제2차 원주 전투를 통해 247고지를 탈환하고 원주를 재점령했다. 이 전투는 혹독한 기후 조건 속에서 치러졌으며, 유엔군의 중부 및 동부 전선 방어 강화에 기여했다. 전투 결과, 북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유엔군은 전술적 우위를 확보하여 이후 공세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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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차 원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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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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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50년 12월 31일 – 1951년 1월 20일 |
장소 | 원주시, 대한민국 |
좌표 | 37°21′09″N 127°56′58″E |
결과 | 유엔군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
교전국 2 | |
지휘관 | |
지휘관 1 | 매튜 리지웨이 에드워드 알몬드 로버트 B. 맥클루어 클라크 L. 러프너 유재흥 이형근 랄프 몽클라르 D. 아르부지스 마리누스 덴 오우덴 |
지휘관 2 | 펑더화이 김웅 박일우 최현 방호산 |
병력 규모 | |
병력 1 | 79,736명 불명 |
병력 2 | 약 61,500명 |
부대 | |
부대 1 | 제2군단 제3군단 제10군단 제1해병사단 제2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제187보병연대 프랑스 대대 판 회츠 연대 제5기갑연대 그리스 한국 원정군 |
부대 2 | 제42집단군 제66집단군 제2군단 제3군단 제5군단 |
사상자 규모 | |
사상자 1 | 약 600명 사망 약 18명 사망 |
전체 | 불명 |
사상자 2 | 약 18,000명 (추정) |
6.25 전쟁 | |
관련 정보 | 6.25 전쟁 |
2. 배경
1950년 6월 조선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20] 같은 해 9월, 낙동강 전투와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국제 연합군은 전세를 역전시켰다. 조선인민군 잔존 병력은 북쪽으로 후퇴하여 한중 국경 지대의 산악 지역에 은신했다.[21]
조선인민군의 궤멸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참전을 야기했다. 1950년 11월부터 중공군은 국경 지역에서 유엔군을 상대로 대규모 기습 공격을 시작했다.[22] 제2차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 결과, 유엔군은 1950년 12월 38도선 일대로 후퇴해야 했다.[23] 동부 전선에서는 미국 제10군단이 흥남 항구에 포위되었다가 1950년 12월 24일 해상 철수를 통해 북한 지역에서 벗어났다.[24]
대한민국 국군은 미군이 철수한 38선 일대의 중부 및 동부 전선 방어 임무를 인계받았으며,[25] 여기에는 중부 전선의 주요 교차로인 원주시도 포함되어 있었다.[26] 유엔군의 갑작스러운 패배로 북한군은 병력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21]
2. 1. 중공군 3차 공세와 마오쩌둥, 김일성의 입장
조선인민군이 대한민국을 기습 공격한 후, 낙동강 전투와 인천 상륙 작전으로 국제 연합군에 의해 분쇄되자, 중화인민공화국은 한국 전쟁에 즉각 개입했다.[20][21][22] 제2차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로 유엔군은 1950년 12월 38도선 일대로 철수했고, 흥남 항구에 포위되었던 미국 제10군단은 1950년 12월 24일 해상으로 북한 지역에서 철수했다.[23][24]
중공군의 성공 이후,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독촉으로 유엔군에 맞선 또 다른 공세를 지시했다.[27] "제3차 대공세"라 불리는 이 공세는 38도선을 따라 배치된 대한민국 국군을 전멸시키고 한반도에서 유엔군을 철수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28][29]
2. 2. 미 8군 사령관 교체와 리지웨이의 전략
1950년 12월 23일 미국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이 사망하면서, 1950년 12월 26일 매슈 리지웨이 중장이 제8군 사령관직을 인계받았다.[32]3. 전투의 전개
제1·2차 원주 전투는 1950년 12월 31일부터 1951년 1월 30일까지 원주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중국인민지원군은 제3차 공세에서 서부 지역을, 북한군은 동부 지역을 담당했다.[34][48] 북한군은 제2, 3, 5군단을 동원하여 중부 전선의 유엔군에 맞섰다.[34][48]
북한군의 전략은 방호산 중장이 지휘하는 제5군단이 원주를 정면 공격하고, 최현 중장이 지휘하는 제2군단이 유격전으로 미국 제10군단의 후방을 교란해 29번 국도를 차단하는 것이었다.[26][33] 이 작전의 목표는 서울을 공격하는 중공군과 협력하여 미 제10군단을 압박하고, 한국군을 태백산맥 일대에 고립시키는 것이었다.[34][49]
매슈 리지웨이는 북한군의 공세에 맞서 미 제10군단에게 한국군 방어진지를 강화하라고 명령했다.[36] 그러나 미 제10군단 대부분은 부산에 집결 중이었고, 즉시 응할 수 있는 부대는 청천강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본 미국 제2보병사단뿐이었다.[42]
3. 1. 지리적, 기후적 조건
원주는 남북으로 뻗은 29번 도로가 있는 교차로 지역의 중요한 마을로, 38선의 춘천과 부산 교두보의 대구를 잇는 지역이다.[26][33] 북서쪽으로 뻗은 또 다른 도로는 원주에서 29번 국도와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을 이었다.[26] 춘천과 원주 사이에는 횡성이 있었고, 원주와 대구 사이에는 제천시, 단양군, 풍기읍, 안동시 등이 있었다.[26][34][35] 이 도로망 전체는 태백산맥의 비교적 언덕이 많은 지역에 있었다.[36] 원주 일대에서의 전투는 한반도에서 가장 열악한 겨울 환경에서 벌어졌다. 기온은 최대 -30°C까지 내려갔고, 눈도 36cm나 쌓였다.[9] 실제로 날씨가 매우 추워 포 여러 문의 금속이 갈라질 정도였고, 물을 끓이는 데 1시간 반이 걸렸다.[37] 추운 날씨 때문에 모든 군사 활동이 정지되기도 했으며, 전투 과정에서 발생한 사상자보다 동상으로 인한 사상자가 더 많았다.[9]3. 2. 양측 군대의 배치와 전략
중국인민지원군 제13군은 중공군 제3차 공세의 서부 지역을, 북한군은 동부 지역을 담당했다.[34][48] 북한군은 총 61,500명으로 추산되는 제2, 3, 5군단을 동원하여 중부 전선의 유엔군에 맞섰다.[34][48]
북한군의 전략은 방호산 중장이 지휘하는 제5군단이 원주를 정면 공격하는 동시에, 최현 중장이 지휘하는 제2군단이 유격전을 통해 미국 제10군단의 후방을 교란하여 29번 국도를 차단하는 것이었다.[26][33] 이 작전의 목표는 서울을 공격하는 중공군과 협력하여 미국 제10군단을 압박하고, 한국군을 태백산맥 일대에 고립시키는 것이었다.[34][49] 중국인민지원군의 제42야전군과 제66야전군은 춘천 인근에 배치되어 전투 초기 단계에서 조선인민군 제5군단을 지원했다.[28] 한편, 조선인민군 제3군단은 제2군단과 제5군단의 예비 병력으로 활동했다.[26]
매튜 리지웨이는 북한군의 공세에 맞서 미국 제10군단에게 대한민국 방어진지를 강화하라고 명령했다.[36]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 제10군단 부대는 부산에 집결 중이었고, 명령에 즉시 응할 수 있는 부대는 청천강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보고 재편 중인 미국 제2보병사단뿐이었다.[42] 12월 28일, 리지웨이는 미국 제2보병사단에게 원주를 방어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제2보병사단을 미국 제10군단 통제 하에 두었다.[46] 12월 30일, 미국 제10군단의 제7보병사단이 재편성을 완료하자, 리지웨이는 에드워드 알몬드 중장에게 29번 국도를 주요 보급로로 개발하고, 제7보병사단에게 이 도로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겼다.[47]
3. 2. 1. 대한민국 국군의 상황
월턴 워커는 죽기 며칠 전부터 대한민국 국군을 춘천부터 동해안까지 배치하여 38선의 중부 및 동부 구역 방어를 강화하고자 했다.[25] 그의 지시에 따라 제3군단은 춘천으로, 제1군단은 동해안으로 배치되었다.[25] 장진호 전투의 여파로 규모가 사단 1개급으로 축소된 제2군단[38]은 제1군단과 3군단 사이를 메웠다.[25] 그러나 미국 제10군단의 부재로 중부 및 동부 지역의 유엔군 방어는 얇게 펴져 있었고, 대한민국 부대 중 병력이 적은 부대 사이에 틈새가 발생했다.[25][39] 1950년 말 대한민국 국군은 약 4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에,[40] 대부분의 부대원들은 훈련을 적게 받은 신병들이 대다수였고,[41] 춘천을 방어하고 있던 대한민국 4개 사단 중 1개 사단만이 전투를 훌륭히 이끌 것으로 평가되었다.[42]3. 2. 2. 북한군의 상황
북한군도 한국군과 마찬가지로 병력이 크게 줄었고, 전투력도 약화된 상태였다. 북한군은 10개 이상의 보병사단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49] 대부분의 사단은 실제로는 보병연대 수준의 병력만 보유하고 있었다.[26] 한국 전쟁 초기의 기계화부대와는 달리, 새로 재건된 북한군 부대들은 훈련과 무장이 부족했다.[50]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보름달이 뜨는 새해 전날을 공격 개시일로 정했는데, 이는 휴일 분위기에 휩싸여 경계심이 느슨해진 유엔군 병사들의 허점을 노린 것이었다.[28]3. 3. 제1차 원주 전투 (1950년 12월 31일 ~ 1951년 1월 7일)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과 북한군은 춘천-원주-강릉을 잇는 38선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매슈 리지웨이는 중부 전선에 대한 조중 연합군의 공격이 서울의 유엔군 방어자들을 포위하기 위한 시도라고 판단하여, 1월 3일 서울 주둔 유엔군에게 즉각적인 철수를 명령했다.[62][63] 1월 5일, 리지웨이는 D 라인이라 명명된 새로운 방어선을 설립하기 위해 모든 유엔군 병력에게 37도선 이남으로 철수할 것을 지시했고, 중부 및 동부 전선의 유엔군은 원주와 해안마을인 주문진 사이에 방어진지들을 설치했다.[62][64] 같은 시기에 중국인민지원군 제42군단과 제66군단을 구호하기 위해 중국군은 조선인민군 제2군단과 제5군단과 함께 공세 작전을 중단했다.[30][65]
3. 3. 1. 춘천-홍천 전투와 대한민국 국군의 붕괴
1·4 후퇴 당시, 중부 전선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3군단은 가평군과 춘천 북쪽의 38도선을 방어하고 있었다.[51] 제2, 제5, 제7, 제8보병사단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제3군단은 가평 북쪽의 고지가 있는 군단 좌측방에 제2군단을 배치했고, 제5보병사단은 춘천에서 군단의 중심지를 방어했다.[51] 폭설이 진지 건설을 방해하고, 언 도로가 식량과 탄약의 재보급을 제약하는 등 겨울의 상황은 한국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다.[51]중국인민지원군 제42군단과 제66군단은 서울과 춘천간 도로를 차단하고, 서울 점령을 위한 중국군의 좌측방을 보호하기 위해 대한민국 제2보병사단과 제5보병사단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았다.[52] 이들은 새해 전날 자정 이후 재빨리 공격을 개시했다.[53] 중국인민지원군 제124사단은 대한민국 제2보병사단의 측면을 뚫고 철수로를 차단하여, 제17연대와 제32연대는 혼란 속에 후퇴했다.[53][54] 중국인민지원군 66군단이 대한민국 제5보병사단의 전선을 압박하는 동안, 중국인민지원군 제124사단은 한국군의 후방인 동쪽으로 진격해 대한민국 제5보병사단의 철수로도 차단했다.[54] 이로 인해 대한민국 제5보병사단의 제36연대는 중공군에게 둘러싸여 산악도로를 따라 중공군 방어선을 뚫으며 철수해야 했다.[55] 1월 1일, 대한민국 제3군단은 전면철수한 상태였고, 군단의 본부는 제2, 제5보병사단과 연락이 두절되었다.[56]
북한군은 유엔군의 후방에 침투하여 한국군의 철수로를 차단하고 있었다.[57] 중공군 제3차 대공세가 시작되기 며칠 전, 조선인민군 제2군단은 10,000명의 병사를 동원해 횡성 북쪽에서 도로차단을 실시해 대한민국 제3군단의 철수를 막았다.[51][58] 대한민국 제2군단과 미국 제2보병사단은 남북 양쪽으로부터 도로차단을 뚫기 위해 포위 작전을 시작했고, 차단된 도로는 1월 2일 다시 개통되었다.[59][60] 유엔군이 도로차단을 실시한 북한군 사단을 제거했지만, 대한민국 제2군단은 전투 기간 동안 거의 궤멸되어 1월 10일 해체되었다.[61]
3. 3. 2. 원주 함락
한국군 붕괴 이후, 조선인민군 제5군단은 미군 제10군단의 전방 공격을 개시하는 한편, 조선인민군 제2군단은 원주 동쪽 지역을 통해 유엔군의 후방으로 침투했다.[66] 미국 제2보병사단의 위치는 북쪽의 핵심적인 지역이 노출되었고,[67] 방어진지들은 원주를 둘러싼 분지에 의해 방해받고 있었다.[68] 그러나 매슈 리지웨이는 한반도 중부를 통제하기 위한 원주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지하고,[26] 서울에 버금가는 지역이라 선언하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원주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67] 리지웨이의 지시에 따라 에드워드 알몬드는 미국 제2보병사단에게 원주 북방의 고지들을 방어하라고 지시했지만, 미국 제2보병사단의 소장 로버트 B. 맥클러는 사단의 사기 저하와 지형 문제로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69] 1951년 1월 7일, 조선인민군 제5군단의 2개 보병대대가 미국 제2보병사단을 공격했다.[70] 북한군 1개 대대는 피난민으로 위장하여 미군 진지를 침투하려 했고, 다른 대대는 전방 공격을 개시했다.[70][71] 미군은 북한군 부대 간 협조 부족으로 공격을 물리치고 114명의 침투자를 생포했다.[72][73] 북한군의 공격이 미군에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미국 제2보병사단 후방 침투로 인한 혼란 때문에 맥클러는 1월 7일 원주를 포기했다.[70] 알몬드는 원주가 UN군 포병 사격 범위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4.8km만 철수하는 조건으로 맥클러의 결정에 동의했다.[74] 그러나 맥클러는 사단에 13km 철수를 명령하여 원주가 포병 사격 범위에서 벗어나게 했다.[75] 원주가 북한군에 점령되자 중국군은 제3차 공세가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선언했다.[76]
3. 4. 제2차 원주 전투 (1951년 1월 8일 ~ 1월 30일)
1951년 1월 8일, 미국 제2보병사단은 원주를 탈환하라는 지시를 받고 반격을 시도했다.[80] 폴 L. 프리먼 주니어 대령이 지휘하는 미국 제23보병연대가 원주 공격에 나섰으나,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과 혹한의 날씨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80]1월 9일, 미 제2보병사단은 프랑스 및 네덜란드 부대의 지원을 받으며 다시 원주 탈환을 시도했지만, 추운 날씨와 공중 지원 부족으로 247고지에서 공격이 정지되었다.[77][80][81] 1월 10일까지 이어진 247고지 전투는 강한 눈폭풍 아래 공중 지원 없이 진행되었으며, 특히 프랑스 대대의 총검돌격이 돋보였다.[12][81][82]
1월 11일부터 공중 지원이 시작되면서 유엔군은 247고지를 점령했지만,[9][83] 원주에 진입하지는 못했다.[84] 그러나 247고지 점령으로 원주 전역이 유엔군 포 사격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되면서 원주는 곧 파괴적인 포격으로 무인 지대가 되었다.[84]
조선인민군 제5군단이 원주를 포기한 후에도,[50][85] 조선인민군 제2군단은 유엔군 후방 지역에서 유격전을 펼치며 위협을 가했다.[86][87] 매슈 리지웨이는 전선을 안정화하기 위해 미군 부대들을 철수시키는 한편, 북한 유격대원들을 소탕하기 위해 제1해병사단등을 파견했다.[76][90][91][92]
에드워드 알몬드는 10군단 부대와 특수 훈련부대에게 북한군 보급기지와 유격 대원 무리들을 격멸하기 위한 공격적 정찰을 명령했다.[94][95] 지속적인 유엔군의 압박으로 조선인민군 제2군단의 탄약과 병력이 서서히 감소되기 시작했고,[86] 1월 30일, 미군 제9보병연대가 큰 저항없이 원주를 탈환하려고 했다.[97] 강화 병력 및 보급품 부족으로 조선인민군 제2군단은 1월 말 흩어졌고, 제10사단을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전멸했다.[98][99]
3. 4. 1. 247고지 전투
247고지는 원주 남쪽 4.8km 지점에 있는 고지들 중 하나로,[75] 원주 시가를 감제할 수 있는 중요한 고지였다.[77] 1월 8일, 미국 제2보병사단은 원주를 탈환하라는 지시를 받고, 폴 L. 프리먼 주니어 대령이 지휘하는 미국 제23보병연대가 원주 공격에 나섰다.[80] 이들은 기습을 통해 북한군 연대를 포로로 잡았지만, 측면 공격을 받고 철수했다.[80]1월 9일, 미국 제2보병사단은 프랑스 및 네덜란드 부대의 지원을 받으며 다시 원주 탈환을 시도했다.[81] 미국 제23보병연대와 제38보병연대의 4개 대대가 진격했지만, 추운 날씨와 공중 지원 부족으로 247고지에서 공격이 정지되었다.[77][80] 다음 날, 유엔군은 7,000명으로 추정되는 북한군 6개 대대와 맞닥뜨렸다.[82]
1월 10일까지 이어진 247고지 전투는 강한 눈폭풍 아래 공중 지원 없이 진행되었으며,[81] 특히 프랑스 대대의 전투가 격렬했다.[82] 프랑스 대대는 탄약이 부족한 상황에서 총검돌격으로 북한군의 반격을 여러 번 막아냈다.[12] 이들의 활약은 매슈 리지웨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 그는 한국에서 전투 중인 모든 미군 부대에게 총검 사용을 독려했다.[12]
북한군은 유엔군을 포위하려 했으나 포병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약 2,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12] 1월 11일부터 공중 지원이 시작되면서,[83] 유엔군의 공격으로 북한군은 1,100명의 사상자가 추가 발생했고, 1월 12일 유엔군은 247고지를 점령했다.[9] 추운 날씨와 북한군의 완강한 방어로 유엔군은 원주에 진입하지 못했지만, 247고지 점령으로 원주 전역이 유엔군 포 사격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되면서 원주는 곧 파괴적인 포격으로 무인 지대가 되었다.[84]
3. 4. 2. 북한군의 유격전과 유엔군의 대응
조선인민군 제5군단이 1951년 1월 17일 427고지 점령으로 큰 피해를 입고 원주를 포기했지만,[50][85] 조선인민군 제2군단의 유엔군 후방 지역 침투는 매우 심각하여 유엔군 전선 전체의 측면이 공격받을 위험이 있었고, 1월 중순까지 한국군 전체가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86][87] 미국 제10군단 대부분이 원주 남쪽에서 연결 작전을 하는 동안 대한민국 제3군단은 혼란에 휩싸였고, 원주와 동해안 사이의 전선이 방어되지 않아 16,000명의 북한군이 틈새로 진입해 단양부터 안동 사이에 유격 진지를 설립하기 시작했다.[88] 중부 전선 일대의 전투들은 곧 중대 규모의 유엔군 정찰대와 북한 유격대 무리 사이의 비정규전으로 변화되었다.[89]
리지웨이는 전선을 안정화하기 위해 미국 제2보병사단에게 원주에서 철수하는 한편 원주와 삼척 사이의 지역으로 중부 및 동부 전선을 후퇴시켰다. 이는 유엔군이 64km 정도 철수하는 결과를 낳았다.[76][90] 리지웨이는 북한 유격대원들이 29번 도로 동쪽과 안동 및 영덕의 북쪽을 점령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미국 제187보병연대과 미국 제5기갑연대, 미국 제1해병사단과 그리스 한국 원정군을 파견했다.[91][92] 1월 중순, 약 30,000명의 미국 보병이 중부 전선에 배치되었고,[93] 북한 유격대원들은 29번 도로 동쪽의 고지를 따라 난 좁은 고립지역에서 차단되었다.[94]
알몬드는 유엔군 후방에 있는 북한 유격대원들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29번 도로 상에 있는 모든 10군단 부대에게 북한군 보급기지와 유격 대원 무리들을 격멸하기 위한 공격적 정찰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95] 10군단 특별 행동 조치단을 비롯한 비정규군 특수 훈련부대도 유격대원들처럼 작전을 수행하며 북한군 부대를 소탕했다.[94] 지속적인 유엔군의 압박으로 조선인민군 제2군단의 탄약과 병력이 서서히 감소되기 시작했고,[86] 유재흥 소장은 대한민국 제3군단을 결집해 1월 22일 동해안과 원주 사이의 틈을 봉합했다.[96] 1월 30일, 미국 제2보병사단 휘하 제9보병연대가 수행한 정찰대가 큰 저항없이 원주를 탈환하려고 했다.[97] 강화 병력 및 보급품 부족으로 조선인민군 제2군단은 1월 말 흩어졌고, 8,600명의 조선인민군 제2군단 병사들만이 살아남아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98] 조선인민군 제2군단의 선봉이었던 제10사단은 유엔군의 대유격작전 중 전멸했다.[99]
4. 결과 및 영향
조선인민군의 패배로 유엔군은 한반도의 중부 전선 및 동부 전선을 강화할 수 있었다.[99] 이로써 유엔군은 전방과 동측방을 확보하게 되었고, 서부 전선에서 퇴각하던 미국 제8군은 공세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102] 미국 제10군단이 1월 말 중부 전선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 매슈 리지웨이는 1951년 1월 25일 미국 제8군에게 중공군과 조선인민군에 맞서 선더볼트 작전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102][103]
4. 1. 인명 피해
조선인민군 제2군단은 유격전 과정에서 큰 피해를 보아 병력이 16,000명에서 8,000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16] 원주를 점령하려던 조선인민군 제5군단 역시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병력이 32,000명에서 22,000명으로 감소한 것으로 추산되었다.[16] 반면 유엔군은 같은 기간 동안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를 입었다.[100][101]4. 2. 전술적, 전략적 영향
1951년 1월 말, 조선인민군 제2군단은 유격전 동안 큰 피해를 입어 병력이 16,000명에서 8,000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16] 조선인민군 제5군단이 원주를 점령하려던 시도 또한 사상자가 증가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제5군단은 32,000명에서 22,000명으로 병력이 감소된 것으로 추산되었다.[16] 대조적으로 유엔군의 손실은 같은 기간에 비교적 적은 피해를 입었다.[100][101]북한군의 패배로 유엔군은 한반도의 중부 전선 및 동부 전선을 강화시킬 수 있었고,[99] 전방과 동측방이 확보된 이후 서부 전선에서 퇴각하던 미국 제8군은 마침내 공세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102] 미국 제10군단이 1월 말 중부 전선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 매슈 리지웨이는 곧바로 미국 제8군에게 1월 25일 중공군과 북한군에 맞서 선더볼트 작전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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