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한국 원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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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 한국 원정군은 한국 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육군과 공군 부대를 통칭한다. 그리스는 1940년 이탈리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과 내전을 겪은 후 반공주의적 정서 속에서 한국 전쟁 참전을 결정했다. 스파르타 대대를 시작으로 연대, 대대 규모로 부대를 파견했으며, 공군 제13 수송 편대는 병력 및 물자 수송, 전사상자 후송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이천 381고지 전투, 연천 313고지 전투, 철원 420고지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192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한국 정부는 그리스 참전을 기리고자 기념비를 건립했으며, 그리스에서도 참전 용사를 기리는 기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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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한국 원정군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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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정보 | |
부대 명칭 | 그리스 한국 원정군 |
원어 명칭 | Εκστρατευτικόν Σώμα Ελλάδος στην Κορέα (Ellinikós Ekstrtevτικόn Sóma Elládos stin Koréa) |
약칭 | EKSE |
영문 명칭 | Greek Expeditionary Force in Korea (G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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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기간 | 1950년 11월 – 1958년 5월 |
국가 | [[File:State Flag of Greece (1863-1924 and 1935-1973).svg|25px]] 그리스 왕국 |
병과 | 그리스 육군 그리스 공군 |
종류 | 강화된 보병 대대, 이후 연대 수송기 비행 편대 |
역할 | 해당 사항 없음 |
규모 | 해당 사항 없음 |
지휘 구조 | 제15보병연대 미국 제1기병사단 미국 제3보병사단 |
주둔지 | 해당 사항 없음 |
별칭 | 해당 사항 없음 |
수호 성인 | 해당 사항 없음 |
모토 | 해당 사항 없음 |
상징색 | 해당 사항 없음 |
군가 | 해당 사항 없음 |
마스코트 | 해당 사항 없음 |
장비 | 해당 사항 없음 |
참전 | |
주요 전투 | 6.25 전쟁 |
훈장 | |
수훈 내역 | [[File:GRE Commander's Medal of Valour ribbon.svg|30px]] 용맹 십자훈장 사령관 십자장 [[File:U.S. Army and U.S. Air Force Presidential Unit Citation ribbon.svg|30px]]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 2회 수상 [[File:Presidential Unit Citation (South Korea).svg|30px]]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 표창 |
전투 훈장 | 해당 사항 없음 |
주요 지휘관 | |
지휘관 목록 | 준장 이오아니스 다스칼로풀로스 (Ioannis Dascalopoulos) 중령 디오니시오스 아르부지스 (Dionysios Arbouzis) 중령 요르요스 쿠마나코스 (Georgios Koumanakos) 편대장 요르요스 플레이오니스 (Georgios Pleionis) |
2. 배경
그리스 왕국은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이 기울어진 상태였다.[18][19] 요안니스 메탁사스 독재정권은 파시스트 정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1940년 10월 28일 이탈리아의 영토 확장을 위한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리스군은 이탈리아군을 격퇴하고 알바니아 지역으로 진군했다. 1941년 4월 6일 독일이 이탈리아 지원 및 발칸반도 안정화를 위해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했다. 파파고스 장군 휘하 연합군은 패배하고 그리스 망명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본토에서는 공산주의 세력의 레지스탕스 활동이 그리스 내전으로 이어졌다.
왕당파와 공화파의 갈등은 우파와 좌파의 대립으로 변했고, 1943년 레지스탕스 내부 좌우대립은 내전으로 증폭되었다. 그리스 공산당이 통제하던 민족 해방 전선과 우파 조직 간 분쟁은 통합 정부 구성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1944년 정부의 무장해제 요구에 좌익 세력들이 불응하며 2차 내전이 시작되었고, 영국 지원을 받은 정부군이 승리하였다.
1946년 그리스 공산당의 그리스 민주군 등 좌익 무장 세력들이 내전을 재개했다. 소련은 지분 협정으로 지원을 거부했고,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만이 이들을 지원했다. 반면 정부군은 영국,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승기를 잡았다. 스탈린과 티토의 갈등으로 그리스 공산당도 분열되었다. 1949년 10월 16일 내전이 끝나고 우파 정권이 자리를 잡았고, 국민 정서는 반공주의에 가까웠다. 이러한 상황은 그리스의 6.25전쟁 파병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20] 트루먼 독트린 실현을 위해 밴 플리트 장군은 그리스에서 미국의 원조금을 관리하고 자문단을 이끌며 내전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밴 플리트는 6.25전쟁에도 참전하여, 내전을 겪었던 그리스의 경험을 토대로 미 8군과 유엔군을 이끌었다.
2. 1. 그리스-이탈리아 전쟁과 독일의 침공
2. 2. 그리스 내전
2. 3. 전후 그리스 상황과 한국전쟁 참전 결정
요안니스 메탁사스의 독재정권 하에 있던 그리스 왕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그리스-이탈리아 전쟁과 독일의 그리스 침공을 겪었다.[18][19] 본토가 함락된 후, 그리스 망명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공산주의 세력은 독자적인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치며 그리스 내전의 불씨를 지폈다.전쟁 이후, 왕당파와 공화파의 갈등은 우파와 좌파의 대립으로 변모했고, 레지스탕스 내부의 좌우 대립은 1943년 내전으로 이어졌다. 좌우 통합 정부가 구성되었지만, 1944년 좌익 세력의 무장 해제 불응과 폭동으로 2차 내전이 발발했다.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은 나치 부역자까지 동원하여 승리하였다.
1946년, 그리스 공산당과 좌익 무장 세력은 내전을 재개했지만, 소련은 지분 협정에 따라 지원을 거부했고,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만이 이들을 지원했다. 반면 정부군은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승기를 잡았다. 스탈린과 티토의 갈등 속에서 그리스 공산당은 분열되었고, 1949년 10월 16일 내전은 우파 정권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그리스는 내전을 통해 반공주의적 국민 정서가 강해졌고, 이는 한국전쟁 파병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20] 특히,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그리스 내전 당시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받은 경험은 한국전쟁 참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그리스 내전과 한국전쟁 모두에 참전하여 이념 대립으로 인한 내전 경험을 바탕으로 유엔군을 이끌었다.
3. 스파르타 대대
스파르타 대대는 그리스 내전에 참여하였던 인원들로 편성되어 경험이 풍부한 부대였으며 장교 50명과 사병 738명으로 이루어졌으며, 보충대는 장교 3명과 사병 58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모두 1 보병사단과 8 보병사단, 9 보병사단의 자원자들이었다. 알부지스(Dionysios Arbouzis) 중령 지휘아래 미군 수송선으로 11월 16일 피레우스 항을 출항하여 23일 뒤인 12월 9일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이후 김해 공군기지 부근의 유엔군수용대에서 현지수용훈련을 수료하였다. 12월 16일 미군 제1기병사단 7기병연대에 제4대대로 편성되어 1951년 1월초부터 전투에 투입되었다.[8]
그리스 정부는 원래 한국에 여단을 파견할 계획이었으나, 1950년 가을 유엔군의 빠른 승리로 인해 파견 부대는 강화된 보병대대로 축소되었다. 이후 그리스는 추가 병력 파견을 제안했지만, 더글러스 맥아더는 유엔군이 승리하고 있으며 곧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판단하여 제안을 거절했다.[6] 스파르타 대대라고 불린 이 육군 부대는 1950년 12월 9일 스파르타 출신 게오르기오스 쿠마나코스 중령의 지휘하에 오랜 항해 끝에 부산에 도착했다. 이 부대는 사령부 중대, 3개의 소총 중대, 각 중대당 1개의 기관총/박격포 소대와 3개의 소총 소대로 구성되었으며 총 849명의 병력과 6대의 차량을 보유했다. 병사들은 제1, 제8, 제9 보병사단에서 차출된 지원병이었다.[9] 부대 장교는 영어 구사 능력을 기준으로 선발되었다.[5]
1951년 8월 23일부터 병력은 1,063명으로 증강되었고, 1953년 12월 휴전까지 이 규모를 유지했다. 이후 1955년 4월까지 2,163명 수준으로 증강되었다. 1955년 9월 그리스에 반대하는 이스탄불 포그롬 이후, 그리스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동맹국인 튀르키예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아테네는 한국에 주둔한 자국 부대를 소환하기로 결정했다.[10] 그 결과 1955년 12월까지 191명만이 한국에 남아있었다. 장교 1명과 병사 9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은 1958년 5월까지 남아 있었다.
== 주요 전투 ==
=== 이천 381고지 전투 ===
1951년 1월 29일부터 이틀간 이천 381고지에서 벌어진 381고지 전투는 중공군의 제3차 공세에 대한 반격으로 미 제9군단이 실행한 '썬더볼트(Thunderbolt) 작전'의 일환이었다. 그리스의 스파르타 대대는 이 작전에서 중공군 제38군 예하 제112사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21][22]
미국 제1기병사단에 배속된 스파르타 대대는 1월 25일, 이천-곤지암-경안리 도로축선을 따라 진격하며 도로 양측 고지들을 공략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작전 당일 이천을 점령하고 북쪽 정개산까지 진출했으며, 26일에는 맹개산(407고지) 부근에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4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당하는 첫 인명피해를 입었다. 이후 전투지경선 조정에 따라 관리로 이동, 곤지암 공략을 위해 양각산 북쪽 381고지와 307고지, 258고지를 점령했다.[21][22]
381고지는 적이 완만한 능선을 따라 공격하기 쉬운 반면, 아군은 병력 및 보급품 지원이 어려운 지형이었다. 대대 정면에는 중공군 제112사단 제334연대가 307고지 북쪽과 서북쪽의 344고지, 441고지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다른 2개 연대는 후방에서 증원 대기 중이었다. 이에 스파르타 대대는 제1중대를 307고지에, 제3중대를 381고지에, 제2중대를 258고지에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21][22]
1월 29일 0시 20분경, 중공군 제334연대가 공격준비사격 없이 기습 공격을 개시했다. 약 500~600명의 중공군이 제3중대 진지 좌측으로 우회 접근했고, 400~500명은 441고지에서 제3중대를 향해 정면 공격을 가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아군 포병의 지원사격으로 중공군의 공세는 중단되었다.[21][22]
1월 30일 01시경, 증원된 중공군이 양측에서 진지를 공격하며 백병전이 벌어졌다. 제3중대는 통신이 두절된 채 고립되었으나, 아르부지 중령이 제2중대 1개 분대를 지원하여 총검으로 포위망을 돌파, 제3중대와 합류했다. 증원군의 도움으로 중대는 적의 2차 공세를 막아냈다.[21][22]
02시 20분경, 중공군은 다시 3차 공세를 개시했다. 제3중대는 고지 정상에서 백병전을 치렀고, 아군기의 조명탄 투하와 폭격, 기총소사 지원에 힘입어 중공군을 격퇴했다. 아군기는 적의 퇴로를 차단했고, 중대는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04시 30분에 전투를 종료했다.[21][22]
약 3천 명의 중공군이 381고지를 점령하려 했으나, 스파르타 대대 제3중대의 용맹한 방어로 실패했다. 스파르타 대대는 11명 전사, 14명 부상, 1명 실종의 인명피해를 입었지만, 최소 2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을 격퇴하고 8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21][22]
=== 연천 313고지 전투 ===
1951년 10월 3일부터 5일까지 미 제1군단의 코만도 작전의 일환으로, 스파르타 대대는 연천 북방의 313고지(스코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중공군 제47군 예하 제139사단 및 제141사단과 3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23] 이 작전은 철의 삼각지대 좌측 지역에 대한 방호와 임진강 서안을 감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1951년 8월, 아르부지 중령으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은 스필리오풀로스 중령은 10월 1일, 313고지와 334고지를 점령하고 일대를 사수하라는 제7연대의 명령을 받았다.[23] 10월 3일, 제1중대가 공격을 개시했지만,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과 역습으로 고지 기슭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소대장 스테파노스 마브로마타티스 중위를 비롯한 14명이 전사했다.[23]
당시 중공군은 아군의 진격로에 야포와 박격포 전력을 집중하고, 10~12정의 기관총과 많은 수의 수류탄을 운용하여 아군의 접근을 어렵게 했다.[23]
10월 4일, 제2중대가 다시 공격을 개시했으나, 중공군의 증원과 화력 지원으로 공격이 중단되었다. 제2중대는 재돌격하여 적 진지에 돌입했지만, 적의 역습으로 철수해야 했고, 이날 14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24]
10월 5일, 대대는 재정비 후 제2중대를 선봉에 세워 공격을 재개했다. 중공군은 누적된 피해로 418고지에서 후퇴했고, 스파르타 대대는 14시경 저항 없이 313고지를 점령했다.[24][25] 이 전투로 대대는 105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24][25]
=== 철원 420고지 전투 ===
1953년 6월 16일부터 18일까지 '마의 고지'라고 불렸던 420고지(해리 초소)에서 그리스 대대가 중공군 제24군 제74사단 예하 제221연대의 공격을 방어한 전투이다. 당시 420고지에는 스파르타 대대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미군이 아닌 그리스군이 이 고지를 방어하고 있어 중공군은 420고지에 전투력을 집중하기로 결정하였다.[26]
17일 자정, 중공군의 첫 공격이 시작되었다. 대대는 조명탄을 발사하여 시계를 확보하였다. 2개 대대규모의 적이 좌우측 측면으로 포위접근하였고, 게오르기오스 쿠마나코스 중령은 강력한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철수를 이끌어내었다.[26]
그러나 적은 비가 그치자 마자 연대규모로 증강된 병력으로 02시 40분, 고지에 대해 다시 포위공격을 실시하였다. 고지에 배치되었던 제3중대는 맹렬히 적을 공격하였으나, 전장 일부에서 전투력이 1:10의 비율로 차이가 났을 정도로 열세였고, 인명피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격하는 중공군으로 인해 03시 13분 경 백병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중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쿠마나코스 중령은 제15연대에 전차를 요청하여 1개 전차소대와 함께 1개 소대의 병력을 증원하여 적의 측후방을 공격, 중공군의 공격을 돈좌시키고 고지를 사수할 수 있었다.[26]
18일 새벽에는 중공군이 3차 공격을 실시하였다. 제3중대는 저돌적인 돌격을 감행하며 고지를 향해 접근해오는 중공군을 최대한 막아내고자 하였으나 누적된 피해와 피로로 인하여 고지를 사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쿠마나코스 중령은 즉각 예비대였던 제1중대를 고지로 증원하였고, 제3중대가 위태로운 순간에 고지에 도착하여 고지를 지켜낼 수 있었다. 중공군은 날이 밝아오자 더 이상의 공격이 무용함을 깨닫고 철수하였다.[26]
대대는 약 5시간 동안의 전투로 전사 5명, 부상 20명의 손실을 입었으나 중공군에 500여 명의 전사상자를 강요하는 뛰어난 전과를 거두었다. 중공군이 22,000발에 달하는 화력지원을 받았음에도 중대규모로 연대규모의 공격을 막아낸 그리스 대대는 이 전투로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26]
=== 북정령 전투 ===
북정령 전투는 1953년 7월 16일부터 7월 26일까지 중공군 제68군 제203사단 제608연대 및 제54군 제130사단 제390연대에 맞서 북정령(364고지) 남쪽 구릉지대에서 스파르타 대대가 방어전을 수행한 전투이다. 중공군은 7차 공세(7월공세)를 개시하여 금성 돌출부를 제거하고 화천까지 진격하고자 하였고, 미군 제9군단은 제3사단을 국군 수도사단 증원을 위해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이에 그리스 대대가 배속되었던 제15보병연대는 금성 서남쪽에 배치되었고, 그리스 대대는 북정령 남쪽 구릉지대에 배치되었다.
7월 15일 밤, 미군의 제3보병사단 전진진지를 정찰하던 중공군 제608연대는 16일 밤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제15연대 제1대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자정에 이르러서는 제15연대가 관할하는 전 지역에 포격이 확산되었고, 진지가 완전히 구축되지 못하였던 그리스 대대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제1대대가 492고지와 532고지를 잘 방어해내자 중공군은 1개 대대에 그리스 대대가 주둔해있던 495고지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렸다. 대대는 진내전까지 치른 후 새벽 무렵 겨우 중공군을 밀어냈다. 포격으로 손상된 진지를 보수하던 대대는 15시경 중공군 2개 중대의 공격을 받았고 495고지를 방어하던 제3중대는 아군의 화력지원을 받아 약 2시간 30분 간 전투를 벌여 적을 격퇴하였다.
7월 20일 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대대는 국군 제1기갑연대 제1대대에 작전 지역을 인계하고 북정령 남쪽 532고지와 492고지를 인수하였다. 492고지에는 제3중대를, 532고지에는 제2중대를 배치하였고 제1중대를 595고지 능선에 배치하여 중공군 제390연대와 마주하게 되었다. 제15보병연대장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으로 철수할 것을 그리스 대대 대대장이었던 엘리아스 프로코스(Elias Prokos) 중령에게 지시하였으나 프로코스 중령은 진지사수의 의지를 밝혔다. 21일 밤 중공군이 공격해왔으나 이는 예상된 공격이었고, 23일 새벽 공격을 격퇴하였다. 24일 저녁에는 2개 연대를 투입, 전선 돌파를 시도하였고 제2중대가 위치하였던 532고지를 목표로 강력하게 공격해왔지만 제2중대가 잘 방어해내어 중공군의 돌파시도는 좌절되었다.
휴전까지 3일을 앞둔 7월 25일 22시 30분 중공군은 증강된 대대병력을 앞세워 포병화력을 집중한 후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공군은 도로 개활지를 횡단하여 492고지와 532고지 사이를 돌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2개 중대를 각각 492고지 정면, 532고지 좌측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프로코스 중령은 포병화력을 집중하여 도로를 횡단하던 적을 집중 공격하였고, 파상공격을 해오던 중공군은 26일 01시 일시적으로 철수하였으나, 02시경 재공격을 개시하였다. 2개 중대가 492고지를, 1개 중대가 532고지를 향해 돌격해왔으나 30분 만에 이를 격퇴하였고, 적의 전선돌파는 무위로 돌아갔다.
대대는 19명이 전사하고 28명이 부상하였으나 중공군 105명을 사살, 27명을 포로로 획득하는 전과를 얻었다. 스파르타 대대가 진지를 고수하고 중공군을 막아낸 덕분에 승암고개가 휴전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영토로 남을 수 있었고, 휴전 직전 7월 공세를 통해 입지를 강화하려던 중공군을 잠시 멈추게 만들었다.
구분 | 사망/전사 | 부상 | 실종 | 포로 | 계 |
---|---|---|---|---|---|
그리스 대대 | 19명 | 28명 | 0명 | 0명 | 47명 |
중공군 | 105명 | 규모 미상 | 규모 미상 | 27명 | 132명 이상 |
3. 1. 주요 전투
1951년 1월 29일부터 이틀간 이천 381고지에서 벌어진 381고지 전투는 중공군의 제3차 공세에 대한 반격으로 미 제9군단이 실행한 '썬더볼트(Thunderbolt) 작전'의 일환이었다. 그리스의 스파르타 대대는 이 작전에서 중공군 제38군 예하 제112사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21][22]미국 제1기병사단에 배속된 스파르타 대대는 1월 25일, 이천-곤지암-경안리 도로축선을 따라 진격하며 도로 양측 고지들을 공략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작전 당일 이천을 점령하고 북쪽 정개산까지 진출했으며, 26일에는 맹개산(407고지) 부근에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4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당하는 첫 인명피해를 입었다. 이후 전투지경선 조정에 따라 관리로 이동, 곤지암 공략을 위해 양각산 북쪽 381고지와 307고지, 258고지를 점령했다.[21][22]
381고지는 적이 완만한 능선을 따라 공격하기 쉬운 반면, 아군은 병력 및 보급품 지원이 어려운 지형이었다. 대대 정면에는 중공군 제112사단 제334연대가 307고지 북쪽과 서북쪽의 344고지, 441고지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다른 2개 연대는 후방에서 증원 대기 중이었다. 이에 스파르타 대대는 제1중대를 307고지에, 제3중대를 381고지에, 제2중대를 258고지에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21][22]
1월 29일 0시 20분경, 중공군 제334연대가 공격준비사격 없이 기습 공격을 개시했다. 약 500~600명의 중공군이 제3중대 진지 좌측으로 우회 접근했고, 400~500명은 441고지에서 제3중대를 향해 정면 공격을 가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아군 포병의 지원사격으로 중공군의 공세는 중단되었다.[21][22]
1월 30일 01시경, 증원된 중공군이 양측에서 진지를 공격하며 백병전이 벌어졌다. 제3중대는 통신이 두절된 채 고립되었으나, 아르부지 중령이 제2중대 1개 분대를 지원하여 총검으로 포위망을 돌파, 제3중대와 합류했다. 증원군의 도움으로 중대는 적의 2차 공세를 막아냈다.[21][22]
02시 20분경, 중공군은 다시 3차 공세를 개시했다. 제3중대는 고지 정상에서 백병전을 치렀고, 아군기의 조명탄 투하와 폭격, 기총소사 지원에 힘입어 중공군을 격퇴했다. 아군기는 적의 퇴로를 차단했고, 중대는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04시 30분에 전투를 종료했다.[21][22]
약 3천 명의 중공군이 381고지를 점령하려 했으나, 스파르타 대대 제3중대의 용맹한 방어로 실패했다. 스파르타 대대는 11명 전사, 14명 부상, 1명 실종의 인명피해를 입었지만, 최소 2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을 격퇴하고 8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21][22]
1951년 10월 3일부터 5일까지 미 제1군단의 코만도 작전의 일환으로, 스파르타 대대는 연천 북방의 313고지(스코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중공군 제47군 예하 제139사단 및 제141사단과 3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23] 이 작전은 철의 삼각지대 좌측 지역에 대한 방호와 임진강 서안을 감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1951년 8월, 아르부지 중령으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은 스필리오풀로스 중령은 10월 1일, 313고지와 334고지를 점령하고 일대를 사수하라는 제7연대의 명령을 받았다.[23] 10월 3일, 제1중대가 공격을 개시했지만,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과 역습으로 고지 기슭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소대장 스테파노스 마브로마타티스 중위를 비롯한 14명이 전사했다.[23]
당시 중공군은 아군의 진격로에 야포와 박격포 전력을 집중하고, 10~12정의 기관총과 많은 수의 수류탄을 운용하여 아군의 접근을 어렵게 했다.[23]
10월 4일, 제2중대가 다시 공격을 개시했으나, 중공군의 증원과 화력 지원으로 공격이 중단되었다. 제2중대는 재돌격하여 적 진지에 돌입했지만, 적의 역습으로 철수해야 했고, 이날 14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24]
10월 5일, 대대는 재정비 후 제2중대를 선봉에 세워 공격을 재개했다. 중공군은 누적된 피해로 418고지에서 후퇴했고, 스파르타 대대는 14시경 저항 없이 313고지를 점령했다.[24][25] 이 전투로 대대는 105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24][25]
1953년 6월 16일부터 18일까지 '마의 고지'라고 불렸던 420고지(해리 초소)에서 그리스 대대가 중공군 제24군 제74사단 예하 제221연대의 공격을 방어한 전투이다. 당시 420고지에는 스파르타 대대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미군이 아닌 그리스군이 이 고지를 방어하고 있어 중공군은 420고지에 전투력을 집중하기로 결정하였다.[26]
17일 자정, 중공군의 첫 공격이 시작되었다. 대대는 조명탄을 발사하여 시계를 확보하였다. 2개 대대규모의 적이 좌우측 측면으로 포위접근하였고, 게오르기오스 쿠마나코스 중령은 강력한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철수를 이끌어내었다.[26]
그러나 적은 비가 그치자 마자 연대규모로 증강된 병력으로 02시 40분, 고지에 대해 다시 포위공격을 실시하였다. 고지에 배치되었던 제3중대는 맹렬히 적을 공격하였으나, 전장 일부에서 전투력이 1:10의 비율로 차이가 났을 정도로 열세였고, 인명피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격하는 중공군으로 인해 03시 13분 경 백병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중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쿠마나코스 중령은 제15연대에 전차를 요청하여 1개 전차소대와 함께 1개 소대의 병력을 증원하여 적의 측후방을 공격, 중공군의 공격을 돈좌시키고 고지를 사수할 수 있었다.[26]
18일 새벽에는 중공군이 3차 공격을 실시하였다. 제3중대는 저돌적인 돌격을 감행하며 고지를 향해 접근해오는 중공군을 최대한 막아내고자 하였으나 누적된 피해와 피로로 인하여 고지를 사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쿠마나코스 중령은 즉각 예비대였던 제1중대를 고지로 증원하였고, 제3중대가 위태로운 순간에 고지에 도착하여 고지를 지켜낼 수 있었다. 중공군은 날이 밝아오자 더 이상의 공격이 무용함을 깨닫고 철수하였다.[26]
대대는 약 5시간 동안의 전투로 전사 5명, 부상 20명의 손실을 입었으나 중공군에 500여 명의 전사상자를 강요하는 뛰어난 전과를 거두었다. 중공군이 22,000발에 달하는 화력지원을 받았음에도 중대규모로 연대규모의 공격을 막아낸 그리스 대대는 이 전투로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26]
|섬네일|251x251픽셀|김화지역 북정령 전투 상황도]]
북정령 전투는 1953년 7월 16일부터 7월 26일까지 중공군 제68군 제203사단 제608연대 및 제54군 제130사단 제390연대에 맞서 북정령(364고지) 남쪽 구릉지대에서 스파르타 대대가 방어전을 수행한 전투이다. 중공군은 7차 공세(7월공세)를 개시하여 금성 돌출부를 제거하고 화천까지 진격하고자 하였고, 미군 제9군단은 제3사단을 국군 수도사단 증원을 위해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이에 그리스 대대가 배속되었던 제15보병연대는 금성 서남쪽에 배치되었고, 그리스 대대는 북정령 남쪽 구릉지대에 배치되었다.
7월 15일 밤, 미군의 제3보병사단 전진진지를 정찰하던 중공군 제608연대는 16일 밤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제15연대 제1대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자정에 이르러서는 제15연대가 관할하는 전 지역에 포격이 확산되었고, 진지가 완전히 구축되지 못하였던 그리스 대대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제1대대가 492고지와 532고지를 잘 방어해내자 중공군은 1개 대대에 그리스 대대가 주둔해있던 495고지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렸다. 대대는 진내전까지 치른 후 새벽 무렵 겨우 중공군을 밀어냈다. 포격으로 손상된 진지를 보수하던 대대는 15시경 중공군 2개 중대의 공격을 받았고 495고지를 방어하던 제3중대는 아군의 화력지원을 받아 약 2시간 30분 간 전투를 벌여 적을 격퇴하였다.
7월 20일 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대대는 국군 제1기갑연대 제1대대에 작전 지역을 인계하고 북정령 남쪽 532고지와 492고지를 인수하였다. 492고지에는 제3중대를, 532고지에는 제2중대를 배치하였고 제1중대를 595고지 능선에 배치하여 중공군 제390연대와 마주하게 되었다. 제15보병연대장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으로 철수할 것을 그리스 대대 대대장이었던 엘리아스 프로코스(Elias Prokos) 중령에게 지시하였으나 프로코스 중령은 진지사수의 의지를 밝혔다. 21일 밤 중공군이 공격해왔으나 이는 예상된 공격이었고, 23일 새벽 공격을 격퇴하였다. 24일 저녁에는 2개 연대를 투입, 전선 돌파를 시도하였고 제2중대가 위치하였던 532고지를 목표로 강력하게 공격해왔지만 제2중대가 잘 방어해내어 중공군의 돌파시도는 좌절되었다.
휴전까지 3일을 앞둔 7월 25일 22시 30분 중공군은 증강된 대대병력을 앞세워 포병화력을 집중한 후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공군은 도로 개활지를 횡단하여 492고지와 532고지 사이를 돌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2개 중대를 각각 492고지 정면, 532고지 좌측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프로코스 중령은 포병화력을 집중하여 도로를 횡단하던 적을 집중 공격하였고, 파상공격을 해오던 중공군은 26일 01시 일시적으로 철수하였으나, 02시경 재공격을 개시하였다. 2개 중대가 492고지를, 1개 중대가 532고지를 향해 돌격해왔으나 30분 만에 이를 격퇴하였고, 적의 전선돌파는 무위로 돌아갔다.
대대는 19명이 전사하고 28명이 부상하였으나 중공군 105명을 사살, 27명을 포로로 획득하는 전과를 얻었다. 스파르타 대대가 진지를 고수하고 중공군을 막아낸 덕분에 승암고개가 휴전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영토로 남을 수 있었고, 휴전 직전 7월 공세를 통해 입지를 강화하려던 중공군을 잠시 멈추게 만들었다.
구분 | 사망/전사 | 부상 | 실종 | 포로 | 계 |
---|---|---|---|---|---|
그리스 대대 | 19명 | 28명 | 0명 | 0명 | 47명 |
중공군 | 105명 | 규모 미상 | 규모 미상 | 27명 | 132명 이상 |
3. 1. 1. 이천 381고지 전투
1951년 1월 29일부터 이틀간 이천 381고지에서 벌어진 381고지 전투는 중공군의 제3차 공세에 대한 반격으로 미 제9군단이 실행한 '썬더볼트(Thunderbolt) 작전'의 일환이었다. 그리스의 스파르타 대대는 이 작전에서 중공군 제38군 예하 제112사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21][22]미국 제1기병사단에 배속된 스파르타 대대는 1월 25일, 이천-곤지암-경안리 도로축선을 따라 진격하며 도로 양측 고지들을 공략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작전 당일 이천을 점령하고 북쪽 정개산까지 진출했으며, 26일에는 맹개산(407고지) 부근에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4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당하는 첫 인명피해를 입었다. 이후 전투지경선 조정에 따라 관리로 이동, 곤지암 공략을 위해 양각산 북쪽 381고지와 307고지, 258고지를 점령했다.[21][22]
381고지는 적이 완만한 능선을 따라 공격하기 쉬운 반면, 아군은 병력 및 보급품 지원이 어려운 지형이었다. 대대 정면에는 중공군 제112사단 제334연대가 307고지 북쪽과 서북쪽의 344고지, 441고지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다른 2개 연대는 후방에서 증원 대기 중이었다. 이에 스파르타 대대는 제1중대를 307고지에, 제3중대를 381고지에, 제2중대를 258고지에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21][22]
1월 29일 0시 20분경, 중공군 제334연대가 공격준비사격 없이 기습 공격을 개시했다. 약 500~600명의 중공군이 제3중대 진지 좌측으로 우회 접근했고, 400~500명은 441고지에서 제3중대를 향해 정면 공격을 가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아군 포병의 지원사격으로 중공군의 공세는 중단되었다.[21][22]
1월 30일 01시경, 증원된 중공군이 양측에서 진지를 공격하며 백병전이 벌어졌다. 제3중대는 통신이 두절된 채 고립되었으나, 아르부지 중령이 제2중대 1개 분대를 지원하여 총검으로 포위망을 돌파, 제3중대와 합류했다. 증원군의 도움으로 중대는 적의 2차 공세를 막아냈다.[21][22]
02시 20분경, 중공군은 다시 3차 공세를 개시했다. 제3중대는 고지 정상에서 백병전을 치렀고, 아군기의 조명탄 투하와 폭격, 기총소사 지원에 힘입어 중공군을 격퇴했다. 아군기는 적의 퇴로를 차단했고, 중대는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04시 30분에 전투를 종료했다.[21][22]
약 3천 명의 중공군이 381고지를 점령하려 했으나, 스파르타 대대 제3중대의 용맹한 방어로 실패했다. 스파르타 대대는 11명 전사, 14명 부상, 1명 실종의 인명피해를 입었지만, 최소 2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을 격퇴하고 8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21][22]
3. 1. 2. 연천 313고지 전투
1951년 10월 3일부터 5일까지 미 제1군단의 코만도 작전의 일환으로, 스파르타 대대는 연천 북방의 313고지(스코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중공군 제47군 예하 제139사단 및 제141사단과 3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23] 이 작전은 철의 삼각지대 좌측 지역에 대한 방호와 임진강 서안을 감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1951년 8월, 아르부지 중령으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은 스필리오풀로스 중령은 10월 1일, 313고지와 334고지를 점령하고 일대를 사수하라는 제7연대의 명령을 받았다.[23] 10월 3일, 제1중대가 공격을 개시했지만,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과 역습으로 고지 기슭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소대장 스테파노스 마브로마타티스 중위를 비롯한 14명이 전사했다.[23]
당시 중공군은 아군의 진격로에 야포와 박격포 전력을 집중하고, 10~12정의 기관총과 많은 수의 수류탄을 운용하여 아군의 접근을 어렵게 했다.[23]
10월 4일, 제2중대가 다시 공격을 개시했으나, 중공군의 증원과 화력 지원으로 공격이 중단되었다. 제2중대는 재돌격하여 적 진지에 돌입했지만, 적의 역습으로 철수해야 했고, 이날 14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24]
10월 5일, 대대는 재정비 후 제2중대를 선봉에 세워 공격을 재개했다. 중공군은 누적된 피해로 418고지에서 후퇴했고, 스파르타 대대는 14시경 저항 없이 313고지를 점령했다.[24][25] 이 전투로 대대는 105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24][25]
3. 1. 3. 철원 420고지 전투
1953년 6월 16일부터 18일까지 '마의 고지'라고 불렸던 420고지(해리 초소)에서 그리스 대대가 중공군 제24군 제74사단 예하 제221연대의 공격을 방어한 전투이다. 당시 420고지에는 스파르타 대대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미군이 아닌 그리스군이 이 고지를 방어하고 있어 중공군은 420고지에 전투력을 집중하기로 결정하였다.[26]17일 자정, 중공군의 첫 공격이 시작되었다. 대대는 조명탄을 발사하여 시계를 확보하였다. 2개 대대규모의 적이 좌우측 측면으로 포위접근하였고, 게오르기오스 쿠마나코스 중령은 강력한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철수를 이끌어내었다.[26]
그러나 적은 비가 그치자 마자 연대규모로 증강된 병력으로 02시 40분, 고지에 대해 다시 포위공격을 실시하였다. 고지에 배치되었던 제3중대는 맹렬히 적을 공격하였으나, 전장 일부에서 전투력이 1:10의 비율로 차이가 났을 정도로 열세였고, 인명피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격하는 중공군으로 인해 03시 13분 경 백병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중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쿠마나코스 중령은 제15연대에 전차를 요청하여 1개 전차소대와 함께 1개 소대의 병력을 증원하여 적의 측후방을 공격, 중공군의 공격을 돈좌시키고 고지를 사수할 수 있었다.[26]
18일 새벽에는 중공군이 3차 공격을 실시하였다. 제3중대는 저돌적인 돌격을 감행하며 고지를 향해 접근해오는 중공군을 최대한 막아내고자 하였으나 누적된 피해와 피로로 인하여 고지를 사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쿠마나코스 중령은 즉각 예비대였던 제1중대를 고지로 증원하였고, 제3중대가 위태로운 순간에 고지에 도착하여 고지를 지켜낼 수 있었다. 중공군은 날이 밝아오자 더 이상의 공격이 무용함을 깨닫고 철수하였다.[26]
대대는 약 5시간 동안의 전투로 전사 5명, 부상 20명의 손실을 입었으나 중공군에 500여 명의 전사상자를 강요하는 뛰어난 전과를 거두었다. 중공군이 22,000발에 달하는 화력지원을 받았음에도 중대규모로 연대규모의 공격을 막아낸 그리스 대대는 이 전투로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26]
3. 1. 4. 북정령 전투
|섬네일|251x251픽셀|김화지역 북정령 전투 상황도]]북정령 전투는 1953년 7월 16일부터 7월 26일까지 중공군 제68군 제203사단 제608연대 및 제54군 제130사단 제390연대에 맞서 북정령(364고지) 남쪽 구릉지대에서 스파르타 대대가 방어전을 수행한 전투이다. 중공군은 7차 공세(7월공세)를 개시하여 금성 돌출부를 제거하고 화천까지 진격하고자 하였고, 미군 제9군단은 제3사단을 국군 수도사단 증원을 위해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이에 그리스 대대가 배속되었던 제15보병연대는 금성 서남쪽에 배치되었고, 그리스 대대는 북정령 남쪽 구릉지대에 배치되었다.
7월 15일 밤, 미군의 제3보병사단 전진진지를 정찰하던 중공군 제608연대는 16일 밤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제15연대 제1대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자정에 이르러서는 제15연대가 관할하는 전 지역에 포격이 확산되었고, 진지가 완전히 구축되지 못하였던 그리스 대대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제1대대가 492고지와 532고지를 잘 방어해내자 중공군은 1개 대대에 그리스 대대가 주둔해있던 495고지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렸다. 대대는 진내전까지 치른 후 새벽 무렵 겨우 중공군을 밀어냈다. 포격으로 손상된 진지를 보수하던 대대는 15시경 중공군 2개 중대의 공격을 받았고 495고지를 방어하던 제3중대는 아군의 화력지원을 받아 약 2시간 30분 간 전투를 벌여 적을 격퇴하였다.
7월 20일 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대대는 국군 제1기갑연대 제1대대에 작전 지역을 인계하고 북정령 남쪽 532고지와 492고지를 인수하였다. 492고지에는 제3중대를, 532고지에는 제2중대를 배치하였고 제1중대를 595고지 능선에 배치하여 중공군 제390연대와 마주하게 되었다. 제15보병연대장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으로 철수할 것을 그리스 대대 대대장이었던 엘리아스 프로코스(Elias Prokos) 중령에게 지시하였으나 프로코스 중령은 진지사수의 의지를 밝혔다. 21일 밤 중공군이 공격해왔으나 이는 예상된 공격이었고, 23일 새벽 공격을 격퇴하였다. 24일 저녁에는 2개 연대를 투입, 전선 돌파를 시도하였고 제2중대가 위치하였던 532고지를 목표로 강력하게 공격해왔지만 제2중대가 잘 방어해내어 중공군의 돌파시도는 좌절되었다.
휴전까지 3일을 앞둔 7월 25일 22시 30분 중공군은 증강된 대대병력을 앞세워 포병화력을 집중한 후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공군은 도로 개활지를 횡단하여 492고지와 532고지 사이를 돌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2개 중대를 각각 492고지 정면, 532고지 좌측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프로코스 중령은 포병화력을 집중하여 도로를 횡단하던 적을 집중 공격하였고, 파상공격을 해오던 중공군은 26일 01시 일시적으로 철수하였으나, 02시경 재공격을 개시하였다. 2개 중대가 492고지를, 1개 중대가 532고지를 향해 돌격해왔으나 30분 만에 이를 격퇴하였고, 적의 전선돌파는 무위로 돌아갔다.
대대는 19명이 전사하고 28명이 부상하였으나 중공군 105명을 사살, 27명을 포로로 획득하는 전과를 얻었다. 스파르타 대대가 진지를 고수하고 중공군을 막아낸 덕분에 승암고개가 휴전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영토로 남을 수 있었고, 휴전 직전 7월 공세를 통해 입지를 강화하려던 중공군을 잠시 멈추게 만들었다.
구분 | 사망/전사 | 부상 | 실종 | 포로 | 계 |
---|---|---|---|---|---|
그리스 대대 | 19명 | 28명 | 0명 | 0명 | 47명 |
중공군 | 105명 | 규모 미상 | 규모 미상 | 27명 | 132명 이상 |
4. 제13 수송 편대
1950년 10월 13일, 그리스 공군은 제3355수송 비행대대에서 C-47 수송기 7대를 차출하여 아테네 서쪽 엘레프시스(Elefsis) 기지에서 제13수송기편대(Royal Hellenic Air Force Flight No.13)를 창설하였다. 이 부대는 그리스 내전 참전 용사 중 조종 요원 27명을 포함한 67명으로 구성되었으며, 편대장으로 Ioannis Chatzakis 소령이 임명되었다.[27]
1950년 11월 11일, 제13수송기편대는 엘레프시스 기지를 출발하여 키프로스, 이란, 파키스탄, 인도, 미얀마, 태국, 베트남, 필리핀, 일본을 거쳐 12월 1일 유엔 공군 기지인 이타츠케 기지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즉시 미국 공군 제374 비행단 예하 제21 수송 비행대대(이후 제6461 수송 비행대대로 개칭)에 배속되어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27]
제13수송기편대는 1950년 12월부터 1955년 5월까지 한국 전쟁에서 병력, 장비 및 물자 수송, 전사상자 후송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주요 활동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전반기 작전 상황 (1951년)'''
1950년 12월 1일 이타츠케 기지에 도착하여 미군 제315전투수송비행사단 제21수송비행대대에 배속되었고, 4일 아침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메이어(Streatemeyer) 중장이 제315비행사단에 제10군단 지원임무를 부여함에 따라 제13수송편대는 제21수송비행대대의 일부로 함흥 남쪽 연포비행장(K-27)기지로 이동, 참전하게 되었다.[28] 제13편대는 장진호 전투 당시 위기에 처한 미 제1해병사단 및 제7보병사단 제31연대에 보급품을 수송하고 전사상자를 후송하였다.[28] 한국 특유의 강풍, 눈보라 등의 악천후와 공산군의 대공사격을 뚫고 미끄러운 빙판같은 활주로에서 이착륙을 하며 임무를 수행했던 제13편대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제21수송비행대대와 함께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28] 또한 장교 9명, 하사관 6명 및 병사 4명이 미국항공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28]
편대는 유엔군의 흥남 철수 작전을 지원하였으며, 적의 공격으로 인해 연포 기지가 위험해지자 수영비행장(K-9)기지로 이동하였다.[28] 4대의 작전제대가 수영기지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나머지 본부제대는 이타츠케 기지로 향하였다.[28] 1951년초, 본부제대는 타키차와 기지로 이동, 크로포드(Troy W. Crawford) 대령이 이끄는 미 제374전투비행단의 작전지휘를 받아 7월 말까지 공수임무를 수행하였다.[28] 작전제대는 항공수송부대가 신속하고 효율적인 지원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전방으로 추진되면서 수영(K-9)기지에서 대구국제공항(K-2)기지로 이동하였다.[28] 대구기지에서 보급품과 장비를 지원하고 전사상자를 후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5월 14일에는 김포국제공항(K-14)으로 전진, 미 제21수송비행대대의 작전지휘를 받았다.[28]
2월 중순, 대구(K-2)기지에서 여주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발한 편대는 좁은 활주로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임무를 강행하였고, 대부분의 경우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2차례의 비행사고가 발생하였다.[28] 첫 번째 사고는 인명피해 없이 기체만을 손실하였으나 두 번째 사고에서 조종사 아나스타시오스 밤부카스(Anastasios Vamvoukas) 대위와 부조종사 니콜라오스 마말리스(Nicolaos Mamalis) 중위, 정비사 안드레아스 아르치타스(Andreas Artsitas) 소위 및 스피리돈 에코노모풀로스(Spiridon Economopoulos) 중사와 대한민국 육군 중위 1명이 사망하였다.[28] 2대의 항공기를 손실하였으나 미군으로부터 보충을 받을 수 있었고, 39명이 편대에 합류하고 17명이 귀국하였으며 4월 9일 데미리스(Panagiotis Demiris) 소령이 제2대 편대장으로 부임하였다.[28]
7월에는 작전제대와 본부제대가 다시 하나의 편대로 부젠시 근처의 아시야 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으나 일본 남부지방에 닥쳐온 태풍으로 인해 코마키 기지에서 작전임무를 수행하였다.[29][30] 7월 중 서해 백령도 지원작전을 실시하였을 때에는 활주로가 없어 해변을 이용하였으며, 9월에는 82회의 지상군 공수지원을 실시하였다.[29][30]
실적 | 손실 | ||||
---|---|---|---|---|---|
작전출격회수 | 741회 | 인원(전사) | 장교 | 4명 | |
작전비행 | 4,048시간 | 사병 | 5명 | ||
공수실적 | 전사상자 | 3,846명 | 합계 | 9명 | |
기타병력 | 13,866명 | 장비 | C-47수송기 | 2대 | |
장비 및 보급품 | 2,344,213kg |
'''후반기 작전 상황 (1952-1955년)'''
1952년 1월 15일, 제13 수송 편대는 아시야 기지에서 여의도공항(K-16) 기지로 이동하여 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1952년 한 해 동안 899회의 출격 횟수를 기록하며 제21 수송 비행대대와 비슷한 수준의 뛰어난 작전 능력을 보여주었다.[31]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두 차례의 사고가 발생했다.
12월 22일, 편대장 파나요티스 프랑고야니스/Panagiotis Fragoyannisel 소령이 직접 조종하던 2-616호기가 수원 기지에서 부상병 6명을 싣고 이륙하던 중, 미 공군 F-80 제트전폭기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기체가 완파되고, 파나요티스 프랑고야니스/Panagiotis Fragoyannisel 소령, 부조종사 앙겔로스 페라카키스/Angelos Perrakakisel 대위, 기관사 알렉산드로스 엘레프테리우/Alexandros Eleftheriouel 상사, 그리고리오스 치나코스/Grigorios Tzinakosel 중사, 간호원 1명, 미군 부상병 6명 등 총 11명이 전사하였다.[31]
12월 27일에는 2-632호기가 진해구(K-10) 기지에서 연락병을 태우고 이륙하던 중 산정에 부딪혀 기체가 파손되고 150m 아래 협곡으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편대장 대리 겸 부조종사 파파다키스/Papadakisel 소령, 조종사 바실리오스 카타산토니스/Vassilios Katasantonisel 중위, 선임하사관 아나기오티스 람브루/Anagiotis Lambrouel 상사, 게오르기오스 빌야스/Georgios Bilyasel 중사, 미군 기술병 1명, 연락병 9명 (미군 8명, 필리핀군 1명) 등 총 14명이 사망하였다.[32][33]
1953년 1월 4일, 야오메스 코스타코스/Jaomes Kostakosel 중령이 사고로 사망한 파나요티스 프랑고야니스/Panagiotis Fragoyannisel 중령(사후 중령 추서)의 뒤를 이어 신임 편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2월 1일, 해체된 제21 수송 비행대대를 기반으로 새로 편성된 제6461 수송 비행대대와 함께 2월 1일부터 수송 임무를 수행하였다. 현지 훈련과 기상 호전으로 실적이 향상되자, 편대의 활약상은 제315 전투 수송 비행 사단이 발행하는 'Ashiya Breeze'지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휴전 직전 공산군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휴전 이후에도 5대의 C-47기가 수송 작전을 계속 수행하였다. 휴전 후에도 여의도공항(K-16) 기지와 김포국제공항(K-14) 기지에서 수송 임무를 수행하였고, 1955년 3월 하순 본국으로부터 귀국 명령을 받았다. 4월 1일, 수송기로 구성된 제1제대가 김포 기지를 이륙하여 일본에 기착, 그리스군 연락장교단장에게 귀국 신고를 한 후, 5월 8일 일본을 출발하여 55시간의 비행 끝에 5월 23일 엘레프시스/Elefsisel 공군 기지에 도착하였다. 행정 및 지상 근무 요원으로 구성된 제2제대 또한 4월 28일, 그리스 연대 제1대대와 함께 인천을 떠나 본국으로 귀환하였다.[34][35]
제13수송기편대는 한국 전쟁에서 세운 전공을 인정받아 한국으로부터 2회, 미국으로부터 3회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27]
4. 1. 주요 활동
'''전반기 작전 상황 (1951년)'''1950년 12월 1일 이타츠케 기지에 도착하여 미군 제315전투수송비행사단 제21수송비행대대에 배속되었고, 4일 아침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메이어(Streatemeyer) 중장이 제315비행사단에 제10군단 지원임무를 부여함에 따라 제13수송편대는 제21수송비행대대의 일부로 함흥 남쪽 연포비행장(K-27)기지로 이동, 참전하게 되었다.[28] 제13편대는 장진호 전투 당시 위기에 처한 미 제1해병사단 및 제7보병사단 제31연대에 보급품을 수송하고 전사상자를 후송하였다.[28] 한국 특유의 강풍, 눈보라 등의 악천후와 공산군의 대공사격을 뚫고 미끄러운 빙판같은 활주로에서 이착륙을 하며 임무를 수행했던 제13편대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제21수송비행대대와 함께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28] 또한 장교 9명, 하사관 6명 및 병사 4명이 미국항공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28]
편대는 유엔군의 흥남 철수 작전을 지원하였으며, 적의 공격으로 인해 연포 기지가 위험해지자 수영비행장(K-9)기지로 이동하였다.[28] 4대의 작전제대가 수영기지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나머지 본부제대는 이타츠케 기지로 향하였다.[28] 1951년초, 본부제대는 타키차와 기지로 이동, 크로포드(Troy W. Crawford) 대령이 이끄는 미 제374전투비행단의 작전지휘를 받아 7월 말까지 공수임무를 수행하였다.[28] 작전제대는 항공수송부대가 신속하고 효율적인 지원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전방으로 추진되면서 수영(K-9)기지에서 대구국제공항(K-2)기지로 이동하였다.[28] 대구기지에서 보급품과 장비를 지원하고 전사상자를 후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5월 14일에는 김포국제공항(K-14)으로 전진, 미 제21수송비행대대의 작전지휘를 받았다.[28]
2월 중순, 대구(K-2)기지에서 여주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발한 편대는 좁은 활주로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임무를 강행하였고, 대부분의 경우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2차례의 비행사고가 발생하였다.[28] 첫 번째 사고는 인명피해 없이 기체만을 손실하였으나 두 번째 사고에서 조종사 아나스타시오스 밤부카스(Anastasios Vamvoukas) 대위와 부조종사 니콜라오스 마말리스(Nicolaos Mamalis) 중위, 정비사 안드레아스 아르치타스(Andreas Artsitas) 소위 및 스피리돈 에코노모풀로스(Spiridon Economopoulos) 중사와 대한민국 육군 중위 1명이 사망하였다.[28] 2대의 항공기를 손실하였으나 미군으로부터 보충을 받을 수 있었고, 39명이 편대에 합류하고 17명이 귀국하였으며 4월 9일 데미리스(Panagiotis Demiris) 소령이 제2대 편대장으로 부임하였다.[28]
7월에는 작전제대와 본부제대가 다시 하나의 편대로 부젠시 근처의 아시야 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으나 일본 남부지방에 닥쳐온 태풍으로 인해 코마키 기지에서 작전임무를 수행하였다.[29][30] 7월 중 서해 백령도 지원작전을 실시하였을 때에는 활주로가 없어 해변을 이용하였으며, 9월에는 82회의 지상군 공수지원을 실시하였다.[29][30]
실적 | 손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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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출격회수 | 741회 | 인원(전사) | 장교 | 4명 | |
작전비행 | 4,048시간 | 사병 | 5명 | ||
공수실적 | 전사상자 | 3,846명 | 합계 | 9명 | |
기타병력 | 13,866명 | 장비 | C-47수송기 | 2대 | |
장비 및 보급품 | 2,344,213kg |
'''후반기 작전 상황 (1952-1955년)'''
1952년 1월 15일, 제13 수송 편대는 아시야 기지에서 여의도공항(K-16) 기지로 이동하여 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1952년 한 해 동안 899회의 출격 횟수를 기록하며 제21 수송 비행대대와 비슷한 수준의 뛰어난 작전 능력을 보여주었다.[31]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두 차례의 사고가 발생했다.
12월 22일, 편대장 파나요티스 프랑고야니스/Panagiotis Fragoyannisel 소령이 직접 조종하던 2-616호기가 수원 기지에서 부상병 6명을 싣고 이륙하던 중, 미 공군 F-80 제트전폭기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기체가 완파되고, 파나요티스 프랑고야니스/Panagiotis Fragoyannisel 소령, 부조종사 앙겔로스 페라카키스/Angelos Perrakakisel 대위, 기관사 알렉산드로스 엘레프테리우/Alexandros Eleftheriouel 상사, 그리고리오스 치나코스/Grigorios Tzinakosel 중사, 간호원 1명, 미군 부상병 6명 등 총 11명이 전사하였다.[31]
12월 27일에는 2-632호기가 진해구(K-10) 기지에서 연락병을 태우고 이륙하던 중 산정에 부딪혀 기체가 파손되고 150m 아래 협곡으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편대장 대리 겸 부조종사 파파다키스/Papadakisel 소령, 조종사 바실리오스 카타산토니스/Vassilios Katasantonisel 중위, 선임하사관 아나기오티스 람브루/Anagiotis Lambrouel 상사, 게오르기오스 빌야스/Georgios Bilyasel 중사, 미군 기술병 1명, 연락병 9명 (미군 8명, 필리핀군 1명) 등 총 14명이 사망하였다.[32][33]
1953년 1월 4일, 야오메스 코스타코스/Jaomes Kostakosel 중령이 사고로 사망한 파나요티스 프랑고야니스/Panagiotis Fragoyannisel 중령(사후 중령 추서)의 뒤를 이어 신임 편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2월 1일, 해체된 제21 수송 비행대대를 기반으로 새로 편성된 제6461 수송 비행대대와 함께 2월 1일부터 수송 임무를 수행하였다. 현지 훈련과 기상 호전으로 실적이 향상되자, 편대의 활약상은 제315 전투 수송 비행 사단이 발행하는 'Ashiya Breeze'지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휴전 직전 공산군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휴전 이후에도 5대의 C-47기가 수송 작전을 계속 수행하였다. 휴전 후에도 여의도공항(K-16) 기지와 김포국제공항(K-14) 기지에서 수송 임무를 수행하였고, 1955년 3월 하순 본국으로부터 귀국 명령을 받았다. 4월 1일, 수송기로 구성된 제1제대가 김포 기지를 이륙하여 일본에 기착, 그리스군 연락장교단장에게 귀국 신고를 한 후, 5월 8일 일본을 출발하여 55시간의 비행 끝에 5월 23일 엘레프시스/Elefsisel 공군 기지에 도착하였다. 행정 및 지상 근무 요원으로 구성된 제2제대 또한 4월 28일, 그리스 연대 제1대대와 함께 인천을 떠나 본국으로 귀환하였다.[34][35]
4. 1. 1. 전반기 작전 상황 (1951년)
1950년 12월 1일 이타츠케 기지에 도착하여 미군 제315전투수송비행사단 제21수송비행대대에 배속되었고, 4일 아침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메이어(Streatemeyer) 중장이 제315비행사단에 제10군단 지원임무를 부여함에 따라 제13수송편대는 제21수송비행대대의 일부로 함흥 남쪽 연포비행장(K-27)기지로 이동, 참전하게 되었다.[28] 제13편대는 장진호 전투 당시 위기에 처한 미 제1해병사단 및 제7보병사단 제31연대에 보급품을 수송하고 전사상자를 후송하였다.[28] 한국 특유의 강풍, 눈보라 등의 악천후와 공산군의 대공사격을 뚫고 미끄러운 빙판같은 활주로에서 이착륙을 하며 임무를 수행했던 제13편대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제21수송비행대대와 함께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28] 또한 장교 9명, 하사관 6명 및 병사 4명이 미국항공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28]편대는 유엔군의 흥남 철수 작전을 지원하였으며, 적의 공격으로 인해 연포 기지가 위험해지자 수영비행장(K-9)기지로 이동하였다.[28] 4대의 작전제대가 수영기지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나머지 본부제대는 이타츠케 기지로 향하였다.[28] 1951년초, 본부제대는 타키차와 기지로 이동, 크로포드(Troy W. Crawford) 대령이 이끄는 미 제374전투비행단의 작전지휘를 받아 7월 말까지 공수임무를 수행하였다.[28] 작전제대는 항공수송부대가 신속하고 효율적인 지원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전방으로 추진되면서 수영(K-9)기지에서 대구국제공항(K-2)기지로 이동하였다.[28] 대구기지에서 보급품과 장비를 지원하고 전사상자를 후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5월 14일에는 김포국제공항(K-14)으로 전진, 미 제21수송비행대대의 작전지휘를 받았다.[28]
2월 중순, 대구(K-2)기지에서 여주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발한 편대는 좁은 활주로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임무를 강행하였고, 대부분의 경우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2차례의 비행사고가 발생하였다.[28] 첫 번째 사고는 인명피해 없이 기체만을 손실하였으나 두 번째 사고에서 조종사 아나스타시오스 밤부카스(Anastasios Vamvoukas) 대위와 부조종사 니콜라오스 마말리스(Nicolaos Mamalis) 중위, 정비사 안드레아스 아르치타스(Andreas Artsitas) 소위 및 스피리돈 에코노모풀로스(Spiridon Economopoulos) 중사와 대한민국 육군 중위 1명이 사망하였다.[28] 2대의 항공기를 손실하였으나 미군으로부터 보충을 받을 수 있었고, 39명이 편대에 합류하고 17명이 귀국하였으며 4월 9일 데미리스(Panagiotis Demiris) 소령이 제2대 편대장으로 부임하였다.[28]
7월에는 작전제대와 본부제대가 다시 하나의 편대로 부젠시 근처의 아시야 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으나 일본 남부지방에 닥쳐온 태풍으로 인해 코마키 기지에서 작전임무를 수행하였다.[29][30] 7월 중 서해 백령도 지원작전을 실시하였을 때에는 활주로가 없어 해변을 이용하였으며, 9월에는 82회의 지상군 공수지원을 실시하였다.[29][30]
실적 | 손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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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출격회수 | 741회 | 인원(전사) | 장교 | 4명 | |
작전비행 | 4,048시간 | 사병 | 5명 | ||
공수실적 | 전사상자 | 3,846명 | 합계 | 9명 | |
기타병력 | 13,866명 | 장비 | C-47수송기 | 2대 | |
장비 및 보급품 | 2,344,213kg |
4. 1. 2. 후반기 작전 상황 (1952-1955년)
1952년 1월 15일, 제13 수송 편대는 아시야 기지에서 여의도(K-16) 기지로 이동하여 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1952년 한 해 동안 899회의 출격 횟수를 기록하며 제21 수송 비행대대와 비슷한 수준의 뛰어난 작전 능력을 보여주었다.[31]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두 차례의 사고가 발생했다.12월 22일, 편대장 파나요티스 프랑고야니스/Panagiotis Fragoyannisel 소령이 직접 조종하던 2-616호기가 수원 기지에서 부상병 6명을 싣고 이륙하던 중, 미 공군 F-80 제트전폭기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기체가 완파되고, 파나요티스 프랑고야니스/Panagiotis Fragoyannisel 소령, 부조종사 앙겔로스 페라카키스/Angelos Perrakakisel 대위, 기관사 알렉산드로스 엘레프테리우/Alexandros Eleftheriouel 상사, 그리고리오스 치나코스/Grigorios Tzinakosel 중사, 간호원 1명, 미군 부상병 6명 등 총 11명이 전사하였다.[31]
12월 27일에는 2-632호기가 진해(K-10) 기지에서 연락병을 태우고 이륙하던 중 산정에 부딪혀 기체가 파손되고 150m 아래 협곡으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편대장 대리 겸 부조종사 파파다키스/Papadakisel 소령, 조종사 바실리오스 카타산토니스/Vassilios Katasantonisel 중위, 선임하사관 아나기오티스 람브루/Anagiotis Lambrouel 상사, 게오르기오스 빌야스/Georgios Bilyasel 중사, 미군 기술병 1명, 연락병 9명 (미군 8명, 필리핀군 1명) 등 총 14명이 사망하였다.[32][33]
1953년 1월 4일, 야오메스 코스타코스/Jaomes Kostakosel 중령이 사고로 사망한 파나요티스 프랑고야니스/Panagiotis Fragoyannisel 중령(사후 중령 추서)의 뒤를 이어 신임 편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2월 1일, 해체된 제21 수송 비행대대를 기반으로 새로 편성된 제6461 수송 비행대대와 함께 2월 1일부터 수송 임무를 수행하였다. 현지 훈련과 기상 호전으로 실적이 향상되자, 편대의 활약상은 제315 전투 수송 비행 사단이 발행하는 'Ashiya Breeze'지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휴전 직전 공산군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휴전 이후에도 5대의 C-47기가 수송 작전을 계속 수행하였다. 휴전 후에도 여의도(K-16) 기지와 김포(K-14) 기지에서 수송 임무를 수행하였고, 1955년 3월 하순 본국으로부터 귀국 명령을 받았다. 4월 1일, 수송기로 구성된 제1제대가 김포 기지를 이륙하여 일본에 기착, 그리스군 연락장교단장에게 귀국 신고를 한 후, 5월 8일 일본을 출발하여 55시간의 비행 끝에 5월 23일 엘레프시스/Elefsisel 공군 기지에 도착하였다. 행정 및 지상 근무 요원으로 구성된 제2제대 또한 4월 28일, 그리스 연대 제1대대와 함께 인천을 떠나 본국으로 귀환하였다.[34][35]
5. 그리스군 편제
그리스 정부는 원래 한국에 여단을 파견할 계획이었으나, 1950년 가을 유엔군의 빠른 승리로 인해 파견 부대는 강화된 보병대대로 축소되었다.[8] 이후 그리스는 추가 병력 파견을 제안했지만, 더글러스 맥아더는 유엔군이 승리하고 있으며 곧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판단하여 제안을 거절했다.[6] 스파르타 출신 게오르기오스 쿠마나코스 중령의 지휘하에 스파르타 대대는 1950년 12월 9일 부산에 도착했다.[9] 이 부대는 사령부 중대, 3개의 소총 중대, 각 중대당 1개의 기관총/박격포 소대와 3개의 소총 소대로 구성되었으며 총 849명의 병력과 6대의 차량을 보유했다. 병사들은 제1, 제8, 제9 보병사단에서 차출된 지원병이었다.[9] 부대 장교는 영어 구사 능력을 기준으로 선발되었다.[5]
1951년 8월 23일부터 병력은 1,063명으로 증강되었고, 1953년 12월 휴전까지 이 규모를 유지했다. 이후 1955년 4월까지 2,163명 수준으로 증강되었다. 1955년 9월 그리스에 반대하는 이스탄불 포그롬 이후, 그리스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동맹국인 튀르키예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아테네는 한국에 주둔한 자국 부대를 소환하기로 결정했다.[10] 그 결과 1955년 12월까지 191명만이 한국에 남아있었다. 장교 1명과 병사 9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은 1958년 5월까지 남아 있었다.
5. 1. 1950년 11월 ~ 1954년 1월: 스파르타 대대
초기 스파르타 대대는 대대 본부, 본부 중대, 3개의 소총 중대(Nan, Oboe, Peter), 화기 중대(Queen), 그리고 보충대로 구성되었다.[9] 각 소총 중대는 본부소대, 3개의 소총소대, 그리고 화기소대(박격포소대, 기관총반)로 편성되었다.[9] 화기 중대는 기관총 소대, 81mm 박격포 소대, 7581mm 소총 소대로 구성되었다. 대대 본부는 지휘반, 참모반, 대대 구호소, 군악대로 구성되었고, 본부 중대는 본부소대, 81mm 박격포 소대, 중기관총 소대, 통신소대, 공병소대, 의무소대, 수송소대, 정비반으로 구성되었다.그리스 정부는 원래 여단급 부대를 한국에 파견하려 했으나, 1950년 가을 유엔군의 빠른 승리로 인해 강화된 보병대대로 축소되었다.[8] 더글러스 맥아더는 유엔군이 승리하고 있으며 곧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판단하여 그리스의 추가 병력 파견 제안을 거절했다.[6] 스파르타 출신 게오르기오스 쿠마나코스 중령의 지휘하에 스파르타 대대는 1950년 12월 9일 부산에 도착했다.[9] 이 부대는 총 849명의 병력과 6대의 차량을 보유했으며, 병사들은 제1, 제8, 제9 보병사단에서 차출된 지원병이었다.[9] 부대 장교는 영어 구사 능력을 기준으로 선발되었다.[5]
1951년 8월 23일부터 병력은 1,063명으로 증강되었고, 1953년 12월 휴전까지 이 규모를 유지했다.[10]
5. 2. 1954년 1월 ~ 1955년 3월: 그리스 연대
그리스 정부는 원래 한국에 여단을 파견할 계획이었으나, 1950년 가을 유엔군의 빠른 승리로 인해 파견 부대는 강화된 보병대대로 축소되었다.[8] 이후 그리스는 추가 병력 파견을 제안했지만, 더글러스 맥아더는 유엔군이 승리하고 있으며 곧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판단하여 제안을 거절했다.[6] 1954년 1월, 그리스군은 연대 규모로 증강되었다. 연대 구성은 다음과 같다.그리스 연대 | ||||||||
---|---|---|---|---|---|---|---|---|
연대지휘 및 참모반 | 본부중대 | 4.2인치 중박격포중대 | 수송중대 | 보충대 (2개 중대 규모) | 혼성통신소대 | 정비영선대 | 제1대대 | 제2대대 |
1951년 8월 23일부터 병력은 1,063명으로 증강되었고, 1953년 12월 휴전까지 이 규모를 유지했다. 이후 1955년 4월까지 2,163명 수준으로 증강되었다.[10]
5. 3. 1955년 3월 ~ 1955년 12월: 그리스 대대 및 증강된 중대
1955년 3월, 그리스군은 다시 대대 규모로 축소되었다. 1955년 9월 그리스에 반대하는 이스탄불 포그롬 이후, 그리스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동맹국인 튀르키예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아테네는 한국에 주둔한 자국 부대를 소환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1955년 12월까지 191명만이 한국에 남아있었다.그리스 대대 | |||||
---|---|---|---|---|---|
지휘반 | 본부중대 | 소총중대 | 소총중대 | 소총중대 | 중화기중대 |
이후 철수 시점까지 증강된 중대 형태로 유지되었다.
6. 그리스군 참전 부대 및 지휘관
그리스군은 한국 전쟁에 유엔군사령부 연락장교단, 스파르타 대대(이후 그리스 연대로 증편), 공군 제13 수송 편대 등을 파견하였다.[36]
유엔군사령부 연락장교단은 1951년 1월부터 1956년 1월까지 소장 아타나시오스 다스카롤리스/Athanasios Daskarolisel를 시작으로 여러 지휘관들이 교체되며 임무를 수행했다.[36]
스파르타 대대는 1950년 11월부터 1954년 1월까지 아르부지스 디오니시오스/Arbouzis Dionysiosel 중령 외 여러 지휘관들이 이끌었다.[36] 1950년 12월 9일, 스파르타 출신 게오르기오스 쿠마나코스 중령의 지휘 하에 부산에 도착한 스파르타 대대는 사령부 중대, 3개의 소총 중대, 기관총/박격포 소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849명의 병력과 6대의 차량을 보유했다.[9] 병사들은 제1, 제8, 제9 보병사단에서 차출된 지원병이었고, 부대 장교는 영어 구사 능력을 기준으로 선발되었다.[9][5]
그리스 연대는 1954년 1월부터 1955년 5월까지 운영되었으며, 대령 요안니스 겐니마타스/Ioannis Gennimatasel 등이 지휘를 맡았다.[36]
공군 제13 수송 편대는 1950년 11월부터 1955년 5월까지 소령 차자키스 요안니스/Chatzakis Ioannisel를 시작으로 여러 지휘관들이 교체되며 임무를 수행했다.[36]
1951년 8월 23일부터 그리스군 병력은 1,063명으로 증강되었고, 1953년 12월 휴전까지 이 규모를 유지했다. 이후 1955년 4월까지 2,163명 수준으로 증강되었다.[10] 그러나 1955년 9월 이스탄불 포그롬 이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동맹국인 튀르키예와의 관계 악화로 1955년 12월까지 대부분의 병력이 철수했고, 1958년 5월까지 소수의 인원만 남았다.[10]
6. 1. 주요 참전 부대
그리스군은 한국 전쟁에 유엔군사령부 연락장교단, 스파르타 대대(이후 그리스 연대로 증편), 공군 제13 수송 편대 등을 파견하였다.[36]유엔군사령부 연락장교단은 1951년 1월부터 1956년 1월까지 소장 아타나시오스 다스카롤리스(Athanasios Daskarolis)를 시작으로 여러 지휘관들이 교체되며 임무를 수행했다.[36]
스파르타 대대는 1950년 11월부터 1954년 1월까지 아르부지스 디오니시오스(Arbouzis Dionysios) 중령 외 여러 지휘관들이 이끌었다.[36] 1950년 12월 9일, 스파르타 출신 게오르기오스 쿠마나코스 중령의 지휘 하에 부산에 도착한 스파르타 대대는 사령부 중대, 3개의 소총 중대, 기관총/박격포 소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849명의 병력과 6대의 차량을 보유했다.[9] 병사들은 제1, 제8, 제9 보병사단에서 차출된 지원병이었고, 부대 장교는 영어 구사 능력을 기준으로 선발되었다.[9][5]
그리스 연대는 1954년 1월부터 1955년 5월까지 운영되었으며, 대령 요안니스 겐니마타스(Ioannis Gennimatas) 등이 지휘를 맡았다.[36]
공군 제13 수송 편대는 1950년 11월부터 1955년 5월까지 소령 차자키스 요안니스(Chatzakis Ioannis)를 시작으로 여러 지휘관들이 교체되며 임무를 수행했다.[36]
1951년 8월 23일부터 그리스군 병력은 1,063명으로 증강되었고, 1953년 12월 휴전까지 이 규모를 유지했다. 이후 1955년 4월까지 2,163명 수준으로 증강되었다.[10] 그러나 1955년 9월 이스탄불 포그롬 이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동맹국인 튀르키예와의 관계 악화로 1955년 12월까지 대부분의 병력이 철수했고, 1958년 5월까지 소수의 인원만 남았다.[10]
6. 2. 주요 지휘관
스파르타 대대의 초대 지휘관은 아르부지스 중령이었다.[36][37] 이후 스필리오풀로스 중령, 쿠마나코스 중령 등이 대대를 지휘했다.[36] 공군 제13 수송 편대의 초대 지휘관은 차차키스 소령이었다.[36]7. 그리스군 운용 장비
그리스 한국 원정군은 81mm 박격포 6문, 60mm 박격포 9문, 57mm 무반동총 4문, 3.5인치 로켓포 9문, 2.36인치 로켓포 9문, 50mm 기관포 2문을 화포로 사용했다. 공용화기로는 30mm 중기관총 13정과 30mm 경기관총 화염발사기 2정을 사용했다. 개인화기로는 M1 소총, M3 기관단총, 45mm 권총을 사용했다.
7. 1. 주요 장비
그리스 한국 원정군은 81mm 박격포 6문, 60mm 박격포 9문, 57mm 무반동총 4문, 3.5인치 로켓포 9문, 2.36인치 로켓포 9문, 50mm 기관포 2문을 화포로 사용했다. 공용화기로는 30mm 중기관총 13정과 30mm 경기관총 화염발사기 2정을 사용했다. 개인화기로는 M1 소총, M3 기관단총, 45mm 권총을 사용했다.8. 참전 결과
그리스 한국 원정군의 육군은 1,656명의 적군을 사살하고, 5,5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208명을 포로로 잡았다.[38] 노획물자로는 대전차포 4문, 박격포 22문, 자동화기 52정, 기관총 70정 등이 있다.[38] 공군은 2,364회의 작전 출격과 11,008시간의 작전 비행을 기록했으며, 전사상자 8,743명, 기타병력 56,520명, 장비보급품 4,414,875kg을 수송했다.[39]
그리스군은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제13 비행대는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대원들을 철수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8] 그리스 스파르탄 대대는 스코치힐을 점령한 공로로 1952년 2월 첫 번째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1953년 6월 17일부터 6월 18일까지 수랑니 부근 해리 초소 방어에 참여한 그리스 보병대 P중대는 격렬한 백병전과 반격을 통해 적의 공격을 격퇴하고 초소를 사수하는 데 성공, 두 번째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개별 그리스인들은 6개의 미국 수훈 십자 훈장, 32개의 은성 훈장, 110개의 동성 훈장을 받았으며, 제13 비행대의 19명의 대원은 1950년 12월 장진호 철수 작전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공군 항공 훈장을 받았다. 또한 그리스 대대의 군기는 1954년 그리스 최고 군사 훈장인 용감 십자 훈장 지휘관 십자 훈장을 받았다.
한국전쟁 기간동안 그리스군 육군 참전인원은 장교 343명,사병 4,353명 이며, 공군 참전인원은 장교 78명,사병 218명 이었다. 총 192명이 전사 및 사망 하였으며, 543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3명은 포로로 송환되었다.[40]
8. 1. 전과
그리스 한국 원정군의 육군은 1,656명의 적군을 사살하고, 5,5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208명을 포로로 잡았다.[38] 노획물자로는 대전차포 4문, 박격포 22문, 자동화기 52정, 기관총 70정 등이 있다.[38] 공군은 2,364회의 작전 출격과 11,008시간의 작전 비행을 기록했으며, 전사상자 8,743명, 기타병력 56,520명, 장비보급품 4,414,875kg을 수송했다.[39]
그리스군은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제13 비행대는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대원들을 철수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8] 그리스 스파르탄 대대는 스코치힐을 점령한 공로로 1952년 2월 첫 번째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1953년 6월 17일부터 6월 18일까지 수랑니 부근 해리 초소 방어에 참여한 그리스 보병대 P중대는 격렬한 백병전과 반격을 통해 적의 공격을 격퇴하고 초소를 사수하는 데 성공, 두 번째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40]
개별 그리스인들은 6개의 미국 수훈 십자 훈장, 32개의 은성 훈장, 110개의 동성 훈장을 받았으며, 제13 비행대의 19명의 대원은 1950년 12월 장진호 철수 작전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공군 항공 훈장을 받았다. 또한 그리스 대대의 군기는 1954년 그리스 최고 군사 훈장인 용감 십자 훈장 지휘관 십자 훈장을 받았다.
한국전쟁 기간동안 그리스군 육군 참전인원은 장교 343명,사병 4,353명 이며, 공군 참전인원은 장교 78명,사병 218명 이었다. 총 192명이 전사 및 사망 하였으며, 543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3명은 포로로 송환되었다.[40]
8. 2. 피해
그리스 한국 원정군의 총 피해는 전사 및 사망 192명, 부상 543명, 포로 3명(송환)이다.[40]개별 그리스인들은 6개의 미국 수훈 십자 훈장, 32개의 은성 훈장, 110개의 동성 훈장을 받았다. 제13 비행대의 19명의 대원은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 철수 작전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공군 항공 훈장을 받았다.[8] 또한 그리스 대대의 군기는 1954년 그리스 최고 군사 훈장인 용감 십자 훈장 지휘관 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리스 스파르탄 대대는 스코치힐을 점령한 공로로 1952년 2월 첫 번째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39] 제13 비행대는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대원들을 철수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해리 초소 방어에 참여한 그리스 보병대는 "1953년 6월 17일부터 6월 18일까지 한국 수랑니 부근에서 무장한 적과의 전투에서 뛰어난 용맹함과 뛰어난 임무 수행"으로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두 번째 표창)을 받았다.[39]
9. 기념사업
아테네에 위치한 무명 용사의 묘에는 고대 전사 한 명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으며, 대통령 근위대인 에브조니들이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시기에 게릴라들이었던 클레프테스의 전통 복장을 착용하여 무명용사들의 묘를 지킨다. 부조 옆에는 "용감한 전사에게는 어디든 무덤이 될 수 있다."는 구절이 적혀 있으며 그리스가 치뤘던 전쟁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중 가장 오른쪽에 한국을 의미하는 Kopea가 새겨져 있어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던 그리스 참전용사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41][42]
그리스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오랜 건립 희망에 따라 대한민국이 공사비용을 부담하고 그리스의 파파고스 시가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여 그리스 국방부가 설계 및 시공을 하여 건립한 그리스군 한국전 참전 기념비가 2003년 6월 25일 착공하여 2004년 6월 25일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매년 6월 25일 주그리스 대한민국 대사관이 주도하여 그리스 국방부, 한국전 참전용사협회와 공동으로 한국전 참전 기념비에서 참전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한국전 참전비는 고대 그리스 신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4개의 도리아식 기둥과 제단, 투구, 창, 월계관 문양이 새겨진 청동방패로 장식되어 있으며 흰색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이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제단 아래에는 대노리고지 전투지역에서 가져온 흙을 담아둔 단지가 있으며, 기념비 양끝에는 전사한 그리스군 186명의 이름을 새겨넣은 4개의 대리석 판이 있다. 비석에는 "이 기념비를 1950-1953년 한국전에서 전사한 그리스의 영웅에게 바친다. 용사에게는 어느 곳이든 무덤이 될 수 있다. 이 기념비는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2003년에 제작되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43]
대한민국 경기도 여주시에는 한국 전쟁 당시 그리스 대대가 처음 승리한 이천 381고지 전투를 기념하는 그리스군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44] 1974년 10월 국방부 건립추진위원회가 추진하고 3군 사령부가 현재 부지에 터를 마련하고 그리스에서 가져온 석재로 건립되었다.[44][45] 당시에는 야산이었으나, 영동고속도로 개통 및 확장, 휴게소 개장으로 주변이 복잡해졌다. 2010년 대한민국을 방문한 그리스참전용사협회장이 주한 그리스 대사관을 통해 환경정화를 건의하여, 2018년 이전 계획이 추진되었다.[44] 2018년 10월 18일 여주시에서 평화공원 조성 및 기념비 이전을 검토하였고, 초기에는 강천보 한강문화관 인근 공원이 계획되었으나 하천점용허가의 문제로 영월공원이 확정되었다.[44][45]
https://koreanwarlegacy.org/ 에서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여러 그리스 참전용사들의 인터뷰를 볼 수 있으며, 그들의 경험담을 통해 한국 전쟁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국가보훈처와 한국국제교류재단, [http://www.kwvdm.org/ 한국전참전용사디지털기념관]에서 후원하고 있는 프로젝트이며, 잊혀진 전쟁이 되어가고 있는 한국 전쟁을 모두가 기억할 수 있도록 교사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기도 하다.
연천 313고지 전투에서 형제인 George Matshoukas 중위를 잃었던 Dimitrios Matsoukas가 협회장으로 있는 그리스 한국전쟁 참전용사협회 (Panhellenic Association of the Korean War Veterans)에서는 참전용사들의 권익을 증진하고 한국전쟁에 대한 교육을 세계적으로 실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9. 1. 한국 내 기념 시설
대한민국 경기도 여주시에는 6.25전쟁 당시 그리스 대대가 처음 승리한 이천 381고지 전투를 기념하는 그리스군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44] 1974년 10월 국방부 건립추진위원회가 추진하고 3군 사령부가 현재 부지에 터를 마련하고 그리스에서 가져온 석재로 건립되었다.[44][45] 당시에는 야산이었으나, 영동고속도로 개통 및 확장, 휴게소 개장으로 주변이 복잡해졌다. 2010년 대한민국을 방문한 그리스참전용사협회장이 주한 그리스 대사관을 통해 환경정화를 건의하여, 2018년 이전 계획이 추진되었다.[44] 2018년 10월 18일 여주시에서 평화공원 조성 및 기념비 이전을 검토하였고, 초기에는 강천보 한강문화관 인근 공원이 계획되었으나 하천점용허가의 문제로 영월공원이 확정되었다.[44][45]
1961년 그리스는 부산에 있는 유엔기념공원에 기념비를 설치했다. 기념비에는 "그리스에서 감사를 담아 전사한 아들들에게"라고 적혀 있다.[14] 또한 전사한 그리스 군인들의 이름이 추모의 벽에 새겨져 있으며, 유엔군 기념비에도 그리스를 위한 현판이 있다. 부산 유엔군 참전 기념관에는 한국을 도운 다른 유엔 국가들의 국기와 군인들 옆에 그리스 국기와 그리스 군인 조각상이 있다.
서울의 한국 전쟁 기념관에는 그리스를 위한 기념비가 있다. 또한, 전쟁 중 전사한 그리스 군인들의 이름이 명예의 전당에 있으며, "참전 기념비" 구역에는 그리스를 위한 기념 비석도 있다.[14] 형제의 상 안에는 그리스를 위한 현판이 있다.
9. 2. 그리스 내 기념 시설
아테네에 위치한 무명 용사의 묘에는 고대 전사 한 명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으며, 대통령 근위대인 에브조니들이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시기에 게릴라들이었던 클레프테스의 전통 복장을 착용하여 무명용사들의 묘를 지킨다. 부조 옆에는 "용감한 전사에게는 어디든 무덤이 될 수 있다."는 구절이 적혀 있으며 그리스가 치뤘던 전쟁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중 가장 오른쪽에 한국을 의미하는 Kopea가 새겨져 있어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던 그리스 참전용사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41][42]
그리스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오랜 건립 희망에 따라 대한민국이 공사비용을 부담하고 그리스의 파파고스 시가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여 그리스 국방부가 설계 및 시공을 하여 건립한 그리스군 한국전 참전 기념비가 2003년 6월 25일 착공하여 2004년 6월 25일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매년 6월 25일 주그리스 대한민국 대사관이 주도하여 그리스 국방부, 한국전 참전용사협회와 공동으로 한국전 참전 기념비에서 참전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한국전 참전비는 고대 그리스 신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4개의 도리아식 기둥과 제단, 투구, 창, 월계관 문양이 새겨진 청동방패로 장식되어 있으며 흰색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이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제단 아래에는 대노리고지 전투지역에서 가져온 흙을 담아둔 단지가 있으며, 기념비 양끝에는 전사한 그리스군 186명의 이름을 새겨넣은 4개의 대리석 판이 있다. 비석에는 "이 기념비를 1950-1953년 한국전에서 전사한 그리스의 영웅에게 바친다. 용사에게는 어느 곳이든 무덤이 될 수 있다. 이 기념비는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2003년에 제작되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43]
아테네 전쟁 박물관과 테살로니키 해안가에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대한민국 경기도 여주시에도 그리스군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있는데, 한국 전쟁 당시 그리스 대대가 처음 승리를 거머쥔 이천 381고지 전투를 기념하여 여주시에 위치해있다. 1974년 10월 국방부 건립추진위원회가 추진, 3군 사령부가 현재 부지에 터를 마련하고 그리스에서 가져온 석재로 참전비를 세웠다. 당시에는 야산이었으나, 영동고속도로가 개통 및 확장되고 휴게소가 개장하면서 주변이 복잡해져 2010년 대한민국을 방문한 그리스참전용사협회장이 주한 그리스 대사관을 통해 환경정화를 건의하면서 2018년 이전 계획이 추진되었고, 2018년 10월 18일 여주시에서 평화공원 조성 및 기념비 이전을 검토하였고, 초기에는 강천보 한강문화관 인근 공원이 계획되었으나 하천점용허가의 문제로 영월공원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2021년 12월 말까지 영월공원으로 이전될 예정이다.[44][45]
9. 3. 기타 기념 활동
아테네에 위치한 무명용사의 벽에는 고대 전사 한 명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으며, 대통령 근위대인 에브조니들이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시기에 게릴라들이었던 클레프테스의 전통 복장을 착용하여 무명용사들의 묘를 지킨다. 부조 옆에는 "용감한 전사에게는 어디든 무덤이 될 수 있다."는 구절이 적혀 있으며 그리스가 치뤘던 전쟁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중 가장 오른쪽에 한국을 의미하는 Kopea가 새겨져 있어 625전쟁에 참전하였던 그리스 참전용사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41][42]그리스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오랜 건립 희망에 따라 대한민국이 공사비용을 부담하고 그리스의 파파고스 시가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여 그리스 국방부가 설계 및 시공을 하여 건립한 그리스군 한국전 참전 기념비가 2003년 6월 25일 착공하여 2004년 6월 25일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매년 6월 25일 주그리스 대한민국 대사관이 주도하여 그리스 국방부, 한국전 참전용사협회와 공동으로 한국전 참전 기념비에서 참전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한국전 참전비는 고대 그리스 신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4개의 도리아식 기둥과 제단, 투구, 창, 월계관 문양이 새겨진 청동방패로 장식되어 있으며 흰색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이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제단 아래에는 대노리고지 전투지역에서 가져온 흙을 담아둔 단지가 있으며, 기념비 양끝에는 전사한 그리스군 186명의 이름을 새겨넣은 4개의 대리석 판이 있다. 비석에는 "이 기념비를 1950-1953년 한국전에서 전사한 그리스의 영웅에게 바친다. 용사에게는 어느 곳이든 무덤이 될 수 있다. 이 기념비는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2003년에 제작되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43]
대한민국 경기도 여주시에도 그리스군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있는데, 625전쟁 당시 그리스 대대가 처음 승리를 거머쥔 이천 381고지 전투를 기념하여 여주시에 위치해있다. 1974년 10월 국방부 건립추진위원회가 추진, 3군 사령부가 현재 부지에 터를 마련하고 그리스에서 가져온 석재로 참전비를 세웠다. 당시에는 야산이었으나, 영동고속도로가 개통 및 확장되고 휴게소가 개장하면서 주변이 복잡해져 2010년 대한민국을 방문한 그리스참전용사협회장이 주한 그리스 대사관을 통해 환경정화를 건의하면서 2018년 이전 계획이 추진되었고, 2018년 10월 18일 여주시에서 평화공원 조성 및 기념비 이전을 검토하였고, 초기에는 강천보 한강문화관 인근 공원이 계획되었으나 하천점용허가의 문제로 영월공원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2021년 12월 말까지 영월공원으로 이전될 예정이다.[44][45]
https://koreanwarlegacy.org/ 에서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여러 그리스 참전용사들의 인터뷰를 볼 수 있으며, 그들의 경험담을 통해 6.25전쟁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국가보훈처와 한국국제교류재단, [http://www.kwvdm.org/ 한국전참전용사디지털기념관]에서 후원하고 있는 프로젝트이며, 잊혀진 전쟁이 되어가고 있는 6.25전쟁을 모두가 기억할 수 있도록 교사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기도 하다.
연천 313고지 전투에서 형제인 George Matshoukas 중위를 잃었던 Dimitrios Matsoukas가 협회장으로 있는 그리스 한국전쟁 참전용사협회 (Panhellenic Association of the Korean War Veterans)에서는 참전용사들의 권익을 증진하고 한국전쟁에 대한 교육을 세계적으로 실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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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유럽의 정치 변동 - 근대화 전환 과정의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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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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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봉에 선 그리스 제2중대, 불굴의 투혼으로 고지 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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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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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스파르타의 420고지 전투기★순삭밀톡 6·25 70주년 스페셜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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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군 참전기념비가 여주에 세워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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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시사 - 문화유산: 그리스군 참전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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