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이토 내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1차 이토 내각은 1885년 12월 22일부터 1888년 4월 30일까지 861일 동안 존속했으며, 초대 내각총리대신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 내각은 헌법 제정을 위한 준비, 관료 제도 정비, 교육 개혁, 지방 제도 개혁, 불평등 조약 개정 시도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토 히로부미 주도로 만들어진 대일본제국 헌법은 천황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내각의 권한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내각은 천황의 대권을 집행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내각의 정책들은 이후 일본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이토 내각
기본 정보
초대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초대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내각 명칭제1차 이토 내각
일본어 표기第1次伊藤内閣
로마자 표기Daiichiji Itō Naikaku
존속 기간1885년 12월 22일 ~ 1888년 4월 30일
소속 정당메이지 올리가르히 (번벌 내각)
이전 직책산기
후임 내각구로다 내각
주요 인물
내각총리대신이토 히로부미
원로이토 히로부미
기타 정보
성립 사유내각제 창설
종료 사유수상의 사임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86년 일본 - 나가사키 사건
    나가사키 사건은 1886년 청나라 북양 함대의 나가사키 기항 중 발생한 청나라 수병과 일본 경찰 간의 충돌 사건으로, 반청 감정을 고조시키고 청일 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일본이 청나라 암호 해독에 성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 다니 다테키 - 도카이 산시
    도카이 산시는 본명은 시바 시로이며, 일본의 소설가이자 정치인으로, 민족주의 소설 《가인지기우》를 발표하고 중의원 의원과 농상무성 차관을 역임했으며,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다니 다테키 - 고슈·가시오 전투
    고슈·가시오 전투는 1868년 보신 전쟁 중 신정부군과 구 막부군이 혼슈 중부에서 벌인 전투로, 신정부군의 승리로 끝나 에도 막부 지지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에도성의 무혈 항복에 영향을 미쳤다.
  • 1888년 일본 - 구로다 내각
    구로다 내각은 1888년부터 1889년까지 자유민권 운동 단속 강화와 불평등 조약 개정을 추진했으나, 외국인 재판관 임용 문제로 오쿠마 시게노부가 피습당하면서 붕괴되었다.
  • 1888년 일본 - 시제 (일본)
    시제는 일본에서 시대에 따라 변화해 온 시 운영 제도로, 메이지 시대에 법률로 공포되어 시와 정촌에 자치권을 부여했으나 시대 변화를 거쳐 지방자치법 시행과 함께 폐지되었다.

2. 재직 기간

1885년(메이지 18년) 12월 22일 ~ 1888년(메이지 21년) 4월 30일
* 재직 일수: 861일

3. 내각의 구성 및 인사

1885년 12월 내각 제도가 수립되면서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내각총리대신으로 하는 제1차 이토 내각이 출범했다. 이토 내각은 사쓰마번조슈번 출신 인물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출신 번벌에 따라 인사가 이루어졌다.

👆
좌우로 밀어서 보기
출신 번벌국무대신기타
공가0
사쓰마번5
조슈번4법제국 장관
도사번2내각서기관장
구히젠번1
구막신1
구 히고번1
| 14 ||

3.1. 국무대신

👆
좌우로 밀어서 보기
직책대수성명출신취임일퇴임일비고
내각총리대신1이토 히로부미
조슈번
백작
1885년 12월 22일1888년 4월 30일
외무대신1이노우에 가오루
조슈번
백작
1885년 12월 22일1887년 9월 17일
-이토 히로부미
조슈번
백작
1887년 9월 17일1888년 2월 1일권한대행
2오쿠마 시게노부
사가번
백작
1888년 2월 1일1888년 4월 30일
내무대신1야마가타 아리토모
조슈번
백작
육군중장
1885년 12월 22일1888년 4월 30일
대장대신1마쓰카타 마사요시
사쓰마번
백작
1885년 12월 22일1888년 4월 30일
육군대신1오야마 이와오
사쓰마번
백작
육군중장
1885년 12월 22일1888년 4월 30일
해군대신1사이고 주도
사쓰마번
백작
육군중장
1885년 12월 22일1888년 4월 30일
사법대신1야마다 아키요시
조슈번
백작
육군중장
1885년 12월 22일1888년 4월 30일
문부대신1모리 아리노리
사쓰마번1885년 12월 22일1888년 4월 30일
농상무대신1타니 다테키
도사번
자작
육군중장
1885년 12월 22일1886년 3월 16일
-사이고 주도
사쓰마번
백작
육군중장
1886년 3월 16일1886년 7월 10일권한대행
-야마가타 아리토모
조슈번
백작
육군중장
1886년 7월 10일1887년 7월 26일권한대행
2히지카타 히사모토
도사번
자작
1887년 7월 26일1887년 9월 17일
3구로다 기요타카
사쓰마번
백작
육군중장
1887년 9월 17일1888년 4월 30일
체신대신1에노모토 다케아키
막신
해군중장
1885년 12월 22일1888년 4월 30일

3.2. 기타 관료

👆
좌우로 밀어서 보기
직책대수성명출신취임일퇴임일비고
내각서기관장1다나카 미쓰아키
도사번 출신
육군 소장
1885년 12월 22일1888년 4월 30일원로원 의관 겸임
법제국장관-미설치
1야마오 요조
조슈번 출신1885년 12월 23일1888년 2월 7일궁중고문관 겸임
2이노우에 고와시
히고 번 출신1888년 2월 7일1888년 4월 30일

4. 주요 정책 및 개혁

1885년 12월, 이토 히로부미입헌 체제에 대비한 국가 기구 확립을 목표로 내각 제도를 수립했다. 사쓰마번조슈번 출신 인사들을 균형 있게 등용하여 내각을 구성하고, 육군 조직을 독일식으로 개혁했다. 또한, 제국대학령, 소학교령 등 교육 관련 법령을 제정하고 시정촌제를 확립하는 등 적극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대신은 불평등 조약 개정을 위해 노력하며, 로쿠메이칸을 건설하여 서구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조약 개정안에 포함된 외국인 재판관 제도와 로쿠메이칸으로 대표되는 서구화 정책은 국내외의 반발을 샀다. 자유민권파는 3대 사건 건백 운동과 대동 단결 운동을 전개하며 정부를 비판했고, 다니 다테키 농상무대신도 이에 반대하며 사임했다. 결국 이노우에 가오루는 사임하고, 오쿠마 시게노부와 구로다 기요타카가 각각 외무대신과 농상무대신으로 입각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보안조례를 제정하여 자유민권 운동을 탄압하고, 헌법과 황실전범 제정에 전념하기 위해 내각총리대신에서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1차 이토 내각은 2년 반 만에 막을 내렸지만, 이후 일본의 발전에 중요한 기초를 다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4.1. 헌법 제정

1886년부터 독일의 법학자 헤르만 뢰슬러의 지도를 받아 이토 히로부미이노우에 고와시, 가네코 겐타로, 이토 미요지 등과 함께 헌법 초안을 기초하여 1888년 4월에 완성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1882년 2월에 '국헌'(헌법) 제정을 위해 여러 나라를 시찰하여 조사해야 할 '조사 사항 31개 항목'을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과 결정하고, 산조 사네토미 태정대신에게 주청하여 여러 나라 시찰 계획을 세워 1882년 3월 14일부터 출국했다.

이토 히로부미 주도의 대일본제국 헌법은 '내각'이나 '내각총리대신'에 대한 명문 규정을 전혀 두지 않아 '내각'이나 '내각총리대신'은 천황의 통치권 안에 100% 포함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대일본제국 헌법 1조, 4조, 초연주의)

따라서, 제1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부터 일본국 헌법 시행 직전의 제1차 요시다 시게루 내각까지의 수상 내각제(1885년 12월 22일 ~ 1947년 05월 03일)의 성격은, 내각(행정부)은 천황 대권을 집행하기 위한 존재이며, 일반 국민이나 입법부, 사법부로부터 제약받지 않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오사카 회의 (1875년) 결과에 의한 원로원, 대심원, 지방관 회의를 설치하고 점차 입헌 정체 수립의 조칙 (1875년)등에 의해, 스스로 근대적인 삼권분립·의회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실천해 왔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이 수상 내각제(1885년 12월 22일 ~ 1947년 05월 03일)는 그 이전의 참의 내각제보다 전근대적이며, 왕정 복고적이기는 하지만 문명 개화와는 크게 역행하고 있으며, 근본적인 '국시'인 오개조의 서약에도 크게 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솔선하여 비스마르크 헌법을 지향한 데 따른 폐해이며, 역분사·역코스이다.

이 제1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 당시에는 문명 개화나 식산흥업, 부국강병, 파약양이(불평등 조약 개정)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었고, '자유 민권 운동'이라는 명목의 앙갚음적인 방해 활동이나 사회주의 세력에 의한 정부 전복 활동으로부터 메이지 정부 자체를 방어할 필요가 있었던 점 등, 단숨에 문명 개화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는 변혁기 특유의 다양한 어려움이 있었다.

4.2. 관료 제도 정비

1885년 내각 제도와 함께 내각법제국을 설치하여 법률 조사 및 심사 기능을 강화했다. 1886년에는 각 성청의 조직 체계와 효율화를 목표로 하는 '관기 5장'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각 성에 국·과 설치", "관료는 연고가 아닌 시험으로 채용", "법안에 설명문을 부속, 문서 구별" 등이었다.

1887년 문관 시험 제도를 도입하여 고등 시험과 보통 시험을 통해 관료를 채용했다. 고등 시험 합격자는 주임관으로, 보통 시험 합격자는 판임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제국대학 출신은 시험 없이 면접만으로 채용되어 특혜를 받았다. 이러한 제도는 학벌 중심의 관료 사회를 형성하고, 능력 있는 인재 등용을 제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4.3. 교육 개혁

모리 아리노리 문부대신은 서양 학문을 바탕으로 한 실용적인 교육을 강조하며, 제국대학령, 사범학교령, 소학교령, 중학교령 등을 공포하여 근대적인 교육 체계를 확립했다. 소학교, 심상중학교, 고등중학교, 제국대학(또는 소학교, 심상사범학교, 고등사범학교)으로 이어지는 진학 체계를 구축했다.

모리는 1885년 7월에 기존 교육을 비판하고 개선책을 발표했으며, 1886년 3월 2일 제국대학령을 시작으로 4월 10일 사범학교령, 소학교령, 중학교령을 공포했다. 모리는 실업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지방 연설에 나섰지만, 1889년 국수주의자에게 암살당하여 교육 정책은 미완으로 끝났다.

모리와 이토는 서양 학문 속에서 실학을 배우고 기술을 습득하여 경제력을 높이는 기술자를 양성하고, 한학·서양 학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기초 능력을 발달시켜 자립심을 길러 국가의 일원으로서의 자각을 갖고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유교에 의한 천황에 대한 충성심만 높여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 개혁은 유교, 한학 등 도덕론을 중시하고 서양화에 저항감이 있던 모토다 나가자네 등 궁중에 몸담고 있는 자들의 불만을 샀다.

4.4. 지방 제도 개혁

야마가타 아리토모 내무대신은 1888년 4월 25일 시정촌제를 공포하고(다음 해인 1889년 시행), 메이지의 대합병이라 불리는 지방 행정 구역 통합을 추진했다. 이를 통해 1888년부터 1889년까지 촌락 수를 약 7만 개에서 1만 5천여 개로 대폭 감소시켰다. 이는 재정 취약 구획 통합을 통해 지방 부담 증가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으나, 구 촌락과의 구별이 남는 등 불완전한 합병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야마가타는 촌락회 등 지방 정치를 통해 행정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이를 통해 중앙에 진출할 인재를 등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민이 정치를 이해하지 못한 채 보통 선거가 도입될 경우 혼란이 초래될 수 있고, 지방 의회가 민권파의 근거지가 되어 과격 사상으로 치닫는 것을 우려하여 점진적인 국민의 정치 성숙을 목표로 했다.

야마가타의 지방 제도 개혁은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지방 자치의 발전을 저해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4.5. 외교 정책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대신은 불평등 조약 개정을 위해 노력했으며, 록메이칸을 건설하여 서구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1887년 4월, 조약 개정 협상을 통해 외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여 개정의 골격이 완성되는 듯 보였으나, 외국인 재판관 임용과 치외법권 철폐를 맞바꾸는 내용에 보아소나드와 이노우에 고와시를 비롯한 정부 내외의 반발이 거셌다. 7월에는 타니 다테키 농상무대신도 반대를 표명하며 사임했고, 여론 또한 반대 운동을 부추겨 대동 단결 운동으로 발전했다. 결국 이노우에는 외국에 개정 회의의 무기한 연기를 통고하고, 9월 17일 책임을 지고 사임하여 조약 개정은 실패로 끝났다.

5. 평가 및 영향

제1차 이토 내각은 일본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내각으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여러 한계와 문제점을 드러냈다.

긍정적 평가

* 입헌 체제 정비: 1885년 내각 제도를 수립하여 사쓰마번조슈번의 균형 위에 일원적인 행정기관을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헤르만 뢰슬러의 지도 아래 이토 히로부미이노우에 고와시, 가네코 겐타로, 이토 미요지 등과 함께 헌법 초안을 기초하여 1888년 4월에 완성하였다.
* 관료 제도 확립: 관료 제도의 구축을 시작하여 인재 등용 방법과 각 성청의 규칙을 만들었다. 내각법제국을 창설하여 법률 조사·심사를 담당하는 내각의 보좌 조직으로 정했다. 1886년 2월에는 각 성청에 '관기 5장'을 지시하여 조직 체제와 효율화를 목표로 했다.
* 교육 개혁: 제국대학령, 소학교령 등의 제정으로 대표되는 교육 개혁과 시정촌제의 확립이 이루어졌다. 모리 아리노리 문부대신은 1886년 3월 2일 제국대학령을 시작으로 4월 10일 사범학교령, 소학교령, 중학교령을 공포하여, 소학교·심상중학교·고등중학교·제국대학(또는 소학교·심상사범학교·고등사범학교)으로 진학하는 루트를 개척했다.
* 지방 제도 개혁: 야마가타 아리토모 내무대신은 메이지의 대합병을 추진했다. 1888년 4월 25일 시정촌제를 공포하여 촌락 합병을 추진, 1888년부터 1889년에 걸쳐 약 7만 개에서 1만 5000여 개로 촌락의 수를 줄였다.

부정적 평가

* 외국인 재판관 제도: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대신이 추진한 조약 개정안에 포함된 외국인 재판관 제도와 로쿠메이칸으로 대표되는 서구화 정책이 내외의 반감을 일으켰다.
* 정부 비판: 자유민권파에 의한 3대 사건 건백 운동과 대동 단결 운동, 다니 다테키 농상무대신의 사퇴를 초래하는 등 정부에 대한 비판이 높아졌다.
* 자유민권파 탄압: 보안조례를 제정하여 자유민권파에 대한 탄압에 나섰다.
* 전근대적 헌법: 이토 히로부미 주도의 대일본제국 헌법은 '내각'이나 '내각총리대신'에 대한 명문 규정을 두지 않아, 내각과 내각총리대신이 천황의 통치권 안에 100% 포함되어 있다고 해석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는 오개조의 서약에도 크게 반하는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과 황실전범의 제정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내각총리대신에서 사임하고 신설된 추밀원 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각은 2년 반 만에 끝났지만, 추진한 정책은 그 후의 일본에 계승되어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