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지카타 히사모토
1. 개요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도사 번 출신의 사무라이로, 존왕양이 운동에 참여하고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정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그는 농상무대신, 궁내대신, 추밀원 고문관을 역임했으며, 메이지 천황의 신임을 받아 자작,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는 1885년 1차 이토 내각의 농상무대신을 시작으로 궁내대신, 추밀원 고문관 등을 역임하며 헌법 심의에 참여했다. 1918년 사망했으며, 저서로는 『구미유초』, 『회천실기』, 『메이지 천황 성덕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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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일 | 1833년 11월 23일 (덴포 4년 10월 12일(음력)) |
|---|---|
| 사망일 | 1918년 11월 4일 |
| 출생지 | 일본, 도사국도사군 하타센데라 마을 |
| 직업 | 정치인, 각료 |
| 국적 | 일본 |
| 존칭 접두사 | 백작 |
| 이전 직업 | 무사(도사번사) |
|---|---|
| 작위 및 훈장 | 정2위 백작 |
| 친족 (정치인) | 히지카타 히사요시(아버지) 히지카타 히사코(조카) 히지카타 요시(손자) |
| 직책 | 제2대 궁내대신 |
|---|---|
| 취임일 | 1887년 9월 6일 |
| 퇴임일 | 1898년 2월 9일 |
| 직책 | 제2대 농상무대신 |
| 내각 | 제1차 이토 내각 |
| 취임일 | 1887년 7월 26일 |
| 퇴임일 | 1887년 9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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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 근왕당원 -
나카오카 신타로
나카오카 신타로는 도사 번 출신 지사이자 존왕양이 운동가로, 삿초 동맹 체결에 기여하고 사카모토 료마와 막부 타도 활동을 펼쳤으나 암살당했으며, 그의 삶은 메이지 유신에 중요한 의미를 지녀 여러 작품에서 다루어진다. -
도사 근왕당원 -
사카모토 료마
사카모토 료마는 막말 시대에 삿초 동맹을 성사시키고 대정봉환에 기여하는 등 메이지 유신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일본의 사무라이이자 혁명가이며, 그의 혁신적인 사상과 행동은 일본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태국 왕관장 수훈자 -
아오키 슈조
아오키 슈조는 메이지 유신 이후 외무대신을 지내며 불평등 조약 개정에 힘쓰고 주미국 일본 대사로서 일본인 이민 문제에 대응했으며 독일 유학을 통해 일본 근대화에 기여한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며, 추밀원 고문관을 지냈다. -
태국 왕관장 수훈자 -
오쿠 야스카타
오쿠 야스카타는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특히 러일 전쟁 남산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으로, 다이쇼 천황의 신임을 받아 사쓰마 번과 조슈 번 출신이 아님에도 원수에 올랐다. -
일본 제국의 관료 -
마쓰다이라 야스마사 (후작)
마쓰다이라 야스마사는 일본 제국의 후작이자 정치인으로, 귀족원 의원, 내대신 비서관장, 식부두 등을 역임하며 교토 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후 영국과 프랑스 유학, 귀족원 연구회 활동, 쇼와 천황 측근 활동과 저서 집필 등의 행적을 남겼다. -
일본 제국의 관료 -
엔도 류사쿠
엔도 류사쿠는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조선총독부 관료, 지바현, 아오모리현, 미에현 지사, 만주국 총무청장, 아베 노부유키 내각의 내각서기관장,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등을 지낸 일본의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해방 후에는 무사시노 은행 창립 기여 및 참의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친일 행적 비판과 더불어 여운형과의 교섭을 통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발족을 지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생애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도사 번(현재의 고치현) 출신 사무라이였다. 학문을 위해 번의 지원으로 에도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존왕양이 운동에 참여했다. 도사로 돌아온 후에는 다케치 한페이타가 이끄는 土佐勤王党일본어에 가담했다. 1863년, 다케치와 함께 교토로 상경하여 조슈 번의 반(反) 도쿠가와 막부 세력과 연대하였으며, 특히 산조 사네토미를 비롯한 쿠게 귀족들과 긴밀히 교류하였다.
그해 말, 막부에 대한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자, 히지카타는 산조와 함께 조슈로 피신해야 했다. 제1차 조슈 정벌 이후에는 산조를 따라 후쿠오카 번으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 나카오카 신타로, 사카모토 료마 등 도사 출신 인사들을 만나 삿초 동맹 체결에 대한 산조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기여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히지카타는 메이지 정부에 등용되어 도쿄의 검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궁내성, 내무성, 다이조칸 내각의 서기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메이지 천황의 가정교사를 맡기도 했으며, 이후 추밀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메이지 천황은 그를 매우 신뢰하여, 1884년에는 화족 자작(시샤쿠) 작위를 내렸다.
1885년 내각 제도가 신설되자, 히지카타는 1887년 제1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농상무대신으로 발탁되었고, 1887년부터 1898년까지는 궁내대신을 역임했다. 1888년부터는 추밀원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1895년에는 백작(하쿠샤쿠)으로 작위가 승격되었다. 궁내대신 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고쿠가쿠인 대학 총장을 지냈다. 1918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소는 도쿄의 소메이 묘지에 있다.
2.1. 지사로서의 활약 (1833-1868)
1833년(덴포 4년), 도사 번 향사(鄕士) 히지카타 히사모치(200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세이 4년(1857년), 에도로 유학하여 유학자 오하시 돗안의 문하에서 배우며 존왕양이 사상에 경도되었다.
또한 쿠보타 세이온의 고제자인 병학자 와카야마 봇도에게 야마가류군학을 배웠다. 귀국 후, 다케치 즈이잔 등이 결성한 도사 근왕당에 참가했다. 분큐 3년(1863년) 이후에는 번의 명령에 따라 교토로 올라가, 존양파의 거점이었던 조슈 번을 비롯한 여러 번의 근왕파 지사들과 교류했다. 이윽고 과격파 공가 산조 사네토미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징사 학습원 출사를 명받았지만, 같은 해의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조슈 번과 산조 등은 실각하여 교토에서 추방되었다. 히사모토는 "칠경의 낙향"에 따라 산조와 사와 노부요시 등과 함께 조슈로 내려갔다.
막부에 의한 제1차 조슈 정벌 때에는, 산조 등과 함께 규슈 (후쿠오카 번)로 도피하여 다자이후로 도망쳤다. 같은 도사 출신 낭사 나카오카 신타로, 다나카 미츠아키, 사카모토 료마 등과도 연계하여 삿초 동맹의 중재에 진력했다. 바칸에서의 키도 타카요시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회담을 주선했으나, 연락 착오로 무산되었다.
히지카타 히사모토가 칠경의 낙향으로부터 메이지 원년(1868년)에 이르기까지의 활동은 자신의 일기 『회천실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2.2. 유신 이후 (1868-1918)
메이지 유신 이후,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신정부에 참여하여 도쿄부 판사, 진장부 변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궁내성, 내무성, 태정관 등에서 근무하며 메이지 천황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모토다 나가자네, 사사키 다카유키 등과 함께 천황 친정을 주장하며 궁중 보수파로 여겨졌다. 1884년에는 자작 작위를 받았다.
1885년, 제1차 이토 내각의 농상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1887년에는 궁내대신으로 전임하여 11년간 재직했다. 1888년, 추밀원 고문관으로 임명되어 대일본제국 헌법 심의에 참여, 이토 히로부미 등과 군권(君權) 제한 문제를 놓고 대립했다. 1895년, 백작 작위로 승작되었다.
궁내대신 퇴임 후, 제실 제도 조사국 총재, 황전 강구소장, 고쿠가쿠인 대학 총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 및 황실 관련 업무에 종사했다. 1918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3. 가족
| 인물 | 관계 | 설명 |
|---|---|---|
| 히지카타 히사모토(土方久本) (1809-1890) | 아버지 | 야마우치 가즈토요의 가신 |
| 타마코(玉子) | 여동생 | 히가시쿠제 미치토미의 둘째 아들과 결혼했으나, 가정교사와의 불륜으로 이혼 |
| 히지카타 히사아키(土方久明) (1862-1898) | 장남 | 독일 육군 중위 출신, 일본 육군 대위 복무 중 권총 자살 |
| 아야코(綾子) (1882-1959) | 손녀 | 히사아키의 장녀, 마쓰모토 고시로 (7대)와의 염문으로 이혼 |
| 히지카타 요시(土方与志) (1898-?) | 손자 | 히사아키의 장남, 작위 계승, 연출가, 사회주의 경도로 작위 박탈 |
| 하루코(春子) (1856-1908) | 양녀 | 시조 다카우타의 후처 |
4. 저택
* 생가는 고치현 고치시 기타하타센지 692번지에 있었다.
* 고이시카와구 하야시초(현 분쿄구 센고쿠 2초메)에는 양관과 화관이 있는 저택이 있었다. 히사모토가 궁내대신 시절에 지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서양관은 일본 최초의 양관이라고 불리며, 지하 창고는 연극을 하던 손자 요시의 관계[模型舞台研究所]로 개조되어 연극 관계자들의 은밀한 사교장이기도 했다. 그 터에는 메이지 26년 천황의 히지카타 저택 방문을 기념한 「메이지 천황 행행 기념비 구 히지카타 히사모토 저택」 비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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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훈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다음과 같은 훈장을 받았다.
| 수여 날짜 | 훈장 종류 | 비고 |
|---|---|---|
| 1890년 1월 21일 | 은제 황수포장 | |
| 1886년 10월 18일 | 성 마우리치오에라차로 훈장 그랜드 오피셜 | 이탈리아 왕국 |
| Order of Franz Joseph영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
| Order of the Polar Star영어 |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 |
| 다코로그 훈장 코만들・프르미에르 클래스 | 덴마크 왕국 | |
| 1891년 5월 7일 6월 1일 | 왕관 제1등 훈장 | 샴 왕국 |
| 미치자혜 제1등 훈장 | 오스만 제국 | |
| 1892년 7월 26일 | Royal Order of Kalākaua영어 | 하와이 왕국 |
| 1895년 10월 14일 | Order of the Cross of Takovo영어 | 세르비아 왕국 |
5.1. 위계
* 1885년 (메이지 18년) 10월 1일 - 정4위
* 1886년 (메이지 19년) 10월 20일 - 종3위
* 1896년 (메이지 29년) 10월 10일 - 정2위
* 1918년 (다이쇼 7년) 11월 4일 - 종1위
5.3. 훈장 등
* 1887년 10월 25일 - 勲一等旭日大綬章일본어
* 1889년 11월 25일 -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기념장
* 1903년 7월 16일 - 旭日桐花大綬章일본어
* 1915년 11월 10일 - 대례 기념장
6. 저서
* 欧米遊草일본어 (1888년)
* 回天実記일본어 (상하권) (도쿄통신사, 1900년 5월)
* 明治天皇聖徳録일본어 (실업지일본사, 1913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