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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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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인은 후한 말,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군으로,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했다. 조조를 따라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관도 대전, 형주 공방전, 번성 전투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한 후에는 대장군, 대사마를 역임하며 위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223년에 사망했으며, 충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주요 인물로 등장하며, 용맹하고 지략 있는 장수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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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청나라 시대의 조인 삽화
청나라 시대의 조인 삽화
이름조인
본관패국초현
자효
시호충후
출생168년
사망223년 5월 6일 (56세)
사인병사
국적후한위나라
가족아버지: 조치
형제: 조순
친척: 조조 (육촌 형제)
자녀: 조태, 조개, 조범
관직 및 작위
최종 관직대사마
주요 경력별부사마 행 여봉교위
광양태수 겸 의랑
행 정남장군
행 안서장군
행 효기장군
행 정남장군
정남장군
거기장군
대장군
대사마
작위도정후
안평정후
진후
주요 활동
주요 전투조조의 서주 정벌
연주 공방전
장수 정벌전
관도 대전
호관 전투
남군 전투
동관 전투
번성 전투
조비의 남정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Cao Ren (Cáo Rén)

2. 생애

조인은 어려서부터 궁술, 마술, 수렵을 좋아했다. 190년(초평 원년), 호걸들이 봉기하자 천 명을 모아 조조를 따랐고, 별부사마(別部司馬)로서 여봉교위(厲鋒校尉) 직을 수행하였다.[9] 193년 원술군을 상대로 많은 사람을 베거나 사로잡았고, 서주의 도겸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도 기병을 이끌며 선봉에 섰다. 194년(흥평 원년) 조조가 재차 서주 정벌에 나설 때도 종군하였고, 195년 여포군과 연주를 놓고 벌인 전투에서도 공을 세웠다. 196년(건안 원년), 조조가 천자를 세우고 한나라의 도읍을 허도로 옮길 때 광양태수에 임명되었으나, 조조가 그의 용기와 지략을 높이 평가하여 의랑(議郞)으로서 기병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후 장수를 상대로 한 전투에도 참여하였다.[9]

208년 형주가 평정된 후 정남장군(征南將軍)직을 대행하여 남군 강릉현(江陵縣)을 서황과 같이 수비하였다. 오나라주유적벽 대전의 기세를 몰아 수만 명으로 침입해오자, 조인은 부장 우금과 300명의 병사를 출격시켰으나 도리어 궁지에 몰렸다. 장사 진교 등은 낯빛이 파래졌으나, 조인은 분연히 수십 명만으로 급히 달려나가 해자를 지나 포위망 속으로 뛰어들어 우금을 구하였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도 있었으므로 또다시 그 속으로 돌입해 구출하였다. 전군이 그 용기에 감복했으며 조조도 장하다며 안평정후(安平亭侯)로 올려 봉하였다.[45]

219년 가을, 한수가 범람하여 좌장군 우금이 인솔해온 원군은 궤멸되고, 성벽은 물을 먹어 쉽게 허물어졌다. 관우군은 를 타고 수 겹의 포위망으로 압박해오는데 번성은 남은 병사가 수천 명에, 양식마저 바닥나려 하였다. 그럼에도 조인은 결사항전의 의지를 내보이며 독려하니 장졸들이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10월, 재차 원군으로 파견된 서황에 힘입어 관우를 물리쳤다.

220년 조조가 세상을 떠나고 조비왕을 계승하였다. 조인은 거기장군에 임명되고 도독형양익주제군사(都督荊揚益州諸軍事)의 직책을 맡았으며 작위는 진후(陳侯)로 진봉되었다. 식읍은 2,000호를 더하여 모두 3,500호가 되었고, 아버지 조치(曹熾)에게는 진목후(陳穆侯)라는 시호와 묘지기 10호가 주어졌다.[48],[26]

223년 3월 19일[38], 향년 56세로 병사했다.[52] 시호는 '''충후'''이며, 아들 조태가 뒤를 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조조군 합류

조인은 어려서부터 궁술, 마술, 수렵을 좋아했다. 190년(초평 원년), 호걸들이 들고일어나자 천 명을 모아 조조를 따랐고, 별부사마(別部司馬)로서 여봉교위(厲鋒校尉) 직을 수행하였다.[9] 193년 원술군을 상대로 많은 이를 베거나 사로잡았고, 서주의 도겸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도 기병을 이끌며 선봉에 섰다. 별도로 도겸의 장수 여유(呂由)를 무찌르고, 팽성국에서 본대와 합류해 도겸군을 대파하였다. 194년(흥평 원년), 조조가 재차 서주 정벌에 나서 비현(費縣), 화현(華縣), 개양현(開陽縣), 즉구현(即丘縣)[40]을 공파하며 동해군으로 나아갈 때도 종군하였다. 195년 여포군과 연주를 놓고 벌인 전투에서도 따로 제음군 구양현(句陽縣)을 공략하며 유하(劉何)를 생포하였다. 196년(건안 원년), 조조가 천자를 세우고 한나라의 도읍을 허도로 옮겼을 때, 조인은 광양태수에 임명되었으나, 조조가 그의 용기와 지략을 높이 평가하여 으로 부임시키지 않고 의랑(議郞)으로서 기병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후 장수를 상대로 한 전투에도 참여하였다.[9]

조인은 조조의 사촌 동생이다.[6] 그의 할아버지 조포(曹襃)와 아버지 조치(曹熾)는 후한의 한나라 정부에서 벼슬을 지냈다.[7] 조인에게는 친동생 조순이 있었다. 그들의 아버지가 어릴 때 사망했기 때문에 조인과 조순은 다른 가족과 함께 살았다. 그들은 성장하면서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았으며, 부유하고 수백 명의 하인과 가신을 거느린 것으로 알려졌다.[8]

2. 2. 조조의 주요 전투 활약

190년(초평 원년), 호걸들이 봉기하자 조인은 천 명을 모아 조조를 따랐고, 별부사마(別部司馬)로서 여봉교위(厲鋒校尉)직을 수행하였다.[40] 193년 원술군을 상대로 많은 사람을 베거나 사로잡았고, 서주의 도겸군을 상대로도 기병을 이끌며 선봉에 섰다. 별도로 도겸의 장수 여유(呂由)를 무찌르고, 팽성국에서 본대와 합류해 도겸군을 대파하였다. 194년(흥평 원년) 조조가 재차 서주 정벌에 나서 비현(費縣), 화현(華縣), 개양현(開陽縣), 즉구현(即丘縣)을 공파하며 동해군으로 나아갈 때도 종군하였다. 195년 여포군과 연주를 놓고 겨룰 때도 따로 제음군 구양현(句陽縣)을 공략하며 유하(劉何)를 생포하였다. 196년(건안 원년) 조조가 천자를 세우고 한나라의 도읍을 허도로 옮기자, 조인은 광양태수에 임명되었는데 조조가 그 용기와 지략을 중히 여겨 으로 부임하지 않고 의랑(議郞)으로서 기병을 통솔하였다. 이후 장수 정벌전에도 참여하였다.

199년 수고(휴고)가 사견(射犬)에 있으면서 원소에 속하였다. 이를 치러 사환, 우금,[41] 서황,[42] 악진[43]과 함께 황하를 건넜다. 원소에게 구원을 청하려던 수고를 견성에서 만나 교전 끝에 참하였다. 200년 조조가 관도(官渡)에서 원소와 대치하였다. 이전에 투항했었던 여남군황건적 유벽이 원소에 호응하여 은강현(㶏彊縣) 등 허도 근방을 다시 교란하였다. 원소도 유비를 보내 이를 지원하길래 조인이 기병을 운용해 모두 쳐부수고 각 들을 안정시켰다. 서쪽 길의 차단을 시도하던 원소의 장수 한순(한맹)을 계락산(雞洛山)에서 격파했으며 사환과 같이 원소군의 보급선도 유린하였다.

205년 병주자사 고간이 조조에 대적하며 호관(壺關)을 틀어막았다. 206년 조조가 호관을 치면서 을 함락하면 깡그리 파묻으라 명했는데 여러 이 지나도록 무너트리지 못했다. 조인이 건의하기를, “성을 포위하면 반드시 살 방도를 보여주는 법입니다. 그런데 공께서는 필히 죽이라 하셨기에 사람들이 오히려 스스로를 지키고 있습니다. 더구나 성은 견고하고 식량도 많아 사졸들이 상하고 시일도 오래 걸립니다. 포로를 몰살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라 하였다. 조조가 이를 수용하니 성이 항복하였다. 그간의 공을 인정받아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208년 형주가 평정된 후 정남장군(征南將軍)직을 대행하여 남군 강릉현(江陵縣)을 서황과 같이 수비하였다. 오나라주유적벽 대전의 기세를 몰아 수만 명으로 침입해왔다. 먼저 도착한 선봉 수천 명을 향해 부장 우금[44]과 자원자 300명을 출격시켜 싸움을 걸었는데 되레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그 광경에 장사 진교 등 좌우의 낯이 파래졌다. 조인이 분연히 을 내오라 하였고, 좌우가 애타게 말리는 것도 뿌리치며 수십 명만으로 급히 달려나갔다. 진교 등은 조인이 출성하더라도 적들과 백여 보 떨어져서 우금을 돕는 형세를 취하리라 여겼지만 조인은 단숨에 해자도 지나 포위망 속으로 뛰어들어 우금을 구하였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도 있었으므로 또다시 그 속으로 돌입해 구출하였다. 전군이 그 용기에 감복했으며 조조도 장하다며 안평정후(安平亭侯)로 올려 봉하였다. 그러나 이릉(夷陵) 방어에 실패하면서 전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다. 결국 209년까지 이어진 격전 끝에 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45]

211년 마초관중십장이 조조에 대항하자 안서장군(安西―)을 대리하여 조조의 ‘관서의 군사들이 정예하니 기다리라’는 지령에 따라 동관(潼關)에서 대치하였다. 7월(음력) 조조가 비로소 친정에 나섰다. 9월, 위수의 남쪽에서 마초 등을 분쇄하였다. 이즈음 소백(蘇伯)과 전은(田銀)이 반기를 들었다. 효기장군(驍騎―)직을 대행하여 일곱 군을 지휘하였다.

2. 3. 형주 공방전과 번성 전투

208년 형주가 평정된 후 조인은 정남장군(征南將軍)직을 대행하여 남군 강릉현(江陵縣)을 서황과 같이 수비하였다. 오나라주유적벽 대전의 기세를 몰아 수만 명으로 침입해왔다. 조인은 부장 우금과 300명의 병사를 출격시켜 싸웠으나 도리어 궁지에 몰렸다. 장사 진교 등은 낯빛이 파래졌으나, 조인은 분연히 수십 명만으로 급히 달려나가 해자를 지나 포위망 속으로 뛰어들어 우금을 구하였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도 있었으므로 또다시 그 속으로 돌입해 구출하였다. 전군이 그 용기에 감복했으며 조조도 장하다며 안평정후(安平亭侯)로 올려 봉하였다. 그러나 이릉(夷陵) 방어에 실패하면서 전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고, 209년까지 이어진 격전 끝에 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45]

211년 마초관중십장이 조조에 대항하자 안서장군(安西―)을 대리하여 조조의 지령에 따라 동관에서 대치하였다. 7월(음력) 조조가 친정에 나섰고, 9월, 위수의 남쪽에서 마초 등을 분쇄하였다. 이즈음 소백(蘇伯)과 전은(田銀)이 반기를 들자, 조인은 효기장군(驍騎―)직을 대행하여 일곱 군을 지휘하였다.

218년 10월, 남양군 완현(宛縣)에서 후음(侯音)과 위개(衛開) 등이 반란을 일으켜 남군의 관우와 연계하려 하였다.[46] 조인은 정남장군을 대신해 가절(假節)을 받고 번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진압을 명받았다. 방덕, 남양태수 동리곤과 함께 이를 공격하여 219년(건안 24년) 정월, 완성을 수복하고 후음 등을 참했다.[47] 이 공으로 정남장군에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관우가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였다. 219년 가을, 한수가 범람하여 좌장군 우금이 인솔해온 원군은 궤멸되고, 성벽은 물을 먹어 쉽게 허물어졌다. 관우군은 를 타고 수 겹의 포위망으로 압박해오는데 번성은 남은 병사가 수천 명에, 양식마저 바닥나려 하였다. 그럼에도 조인은 결사항전의 의지를 내보이며 독려하니 장졸들이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10월, 재차 원군으로 파견된 서황에 힘입어 기어코 관우를 물리쳤다.

2. 4. 위나라 건국 이후

220년 조조가 세상을 떠나고 조비왕을 계승하였다. 조인은 거기장군에 임명되고 도독형양익주제군사(都督荊揚益州諸軍事)의 직책을 맡았으며 작위는 진후(陳侯)로 진봉되었다. 식읍은 2,000호를 더하여 모두 3,500호가 되었고, 아버지 조치(曹熾)에게는 진목후(陳穆侯)라는 시호와 묘지기 10호가 주어졌다.[48],[26]

손권이 형주 남부로 진출해오자, 양번(양양,번성)의 방어 능력은 아직 복구가 되지 않았기에 조비의 지시를 이행하여 시설들을 질러 철거하고 완으로 철수하였다.[48] 중앙에서는 "번성·샹양에는 식량이 없어 방어할 수 없다"는 의견이 나왔고, 조인은 꺼려하면서도 형주 북부를 버리고 완으로 철수했지만, 예상대로 샹양은 손권에게 점령당했다.

221년(황초 2년) 진소(陳邵)가 점거한 양양을 서황과 함께 탈환하고, 한수 이남으로 넘어간 주민들도 고천(高遷) 등을 시켜 되찾았기에 대장군으로 승진하였다. 5월, 재차 반항하는 풍익군의 산적 정감(鄭甘)을 토벌하였다. 11월, 관직이 대사마에 이르렀다.[49] 같은 해 4월, 문제(조비)는 조인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린잉으로 둔지를 이전시켜 대사마로 임명했다. 조인은 여러 군을 지휘하여 오강을 점령하고, 합비에 주둔했다.[27]

222년, 조비가 세 방향에서 오나라로 밀고 내려갔다. 조인은 보병기병 수만 명으로 유수(濡須) 방면을 맡았다. 일단 동쪽의 선계(羨溪)로 간다고 거짓 선전하여 오의 유수독 주환의 병력을 분산시키고는 곧바로 유수로 진군했다. 같은 해 가을 9월,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을 지휘하여, 유수에 진군했는데, 이 전역은 조휴 등이 동구, 조진 등이 강릉으로 동시기에 진격하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비록 행군에 지친 상태였지만 얼핏 유수엔 군세도 적고 방비도 허술해보였으므로 장제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들이쳤다. 아들 조태(曹泰)는 성을 직공하고, 상조가죽기름칠한 배[油船]에[50] 승선하여 제갈건(諸葛虔)·왕쌍 등 5,000명[45] 을 거느리고 주환군의 사병 가족들이 살고 있는 을 타격하였다. 조인은 10,000명으로 탁고(橐皋)에 머무르며 조태의 뒤를 받쳐주었다. 그러나 사실은 주환의 유인에 걸려든 것이었고 반격을 받아 모두 격퇴되었다. 상조는 효수당하고 왕쌍은 생포당했으며 본진은 합비로 물러나야했다.[51]

223년 3월[37], 부장 상조와 아들 조태에게 별동대의 지휘를 맡기고, 오의 유수독이었던 주환을 속여, 오군을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주환의 본대가 적은 병력으로 분전했기 때문에 공격하지 못했고, 상조의 별동대가 먼저 격파되었기 때문에, 군을 이끌고 철수했다 (유수구 전투). 같은 해 3월 19일[38], 병사했다. 향년 56세였다.[52] 시호는 '''충후'''이며, 아들 조태가 뒤를 이었다. 또한, 조개·조범에게도 읍이 분여되어, 함께 열후가 되었다. 조태는 진동장군·가절까지 승진했다. 조태의 뒤는 그의 아들 조초가 이었다.

3. 평가

어릴 적엔 품행을 닦지 않았으나 장성해 군을 이끌게 되면서는 엄정하게 법령을 준수하여 항상 조문을 옆에 두고 살피며 업무를 보았다. 218년, 태자 조비오환 정벌을 떠나는 언릉후(鄢陵侯) 조창에게 을 받드는 것은 조인처럼 해야 한다며 그 모범으로 언급할 정도였다.[53] 부현(傅玄)은 조인의 용맹이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과 필적하며 장료가 그 다음이라 평하였다.[53]

조인은 223년 5월 6일에 향년 56세(만 나이 기준)로 사망했다.[31] 사후 "충후(忠侯)"라는 시호가 내려졌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충성스러운 후작"을 의미한다.[32] 그는 용맹함과 용기로 가장 기억되었으며, 이는 장료를 포함한 조조 휘하의 모든 장수들 중에서도 그를 돋보이게 했다.[32]

조인은 젊은 시절에는 난폭한 면이 있었으나, 조조를 따르면서 과거의 행위를 경계하고 성장하여 엄격하게 법을 준수하며, 항상 법에 비추어 상벌을 행하는 등 여러 장수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조비오환 정벌에 나선 조창에게 조인을 본받아 군령을 적용하라고 편지로 충고했다.

『부자』는 조인의 무용이 맹분·하육에 필적하며, 장료는 그 다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와타나베 요시히로는 조인을 조위(曹魏)를 지탱한 명장이며, 하후씨(夏侯氏)·조씨(曹氏) 중에서 가장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한다. 명장이기 때문에 각지의 전투를 전전한 탓에, 연의에서는 완전히 들러리 역할이 되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39]

4. 가계


  • 할아버지 : 조등의 형 조포. 영천 태수를 지냈으며 166년(연희 9년)에 눈을 감았다.
  • 아버지 : 조치(曹熾) - 시중(侍中)과 장수교위(長水校尉)를 지냈다. 39살에 죽었고 177년(희평 6년)에 묘비를 세웠다.[54]
  • 본인 : '''조인'''
  • 이부동생 : 조순
  • 아들 : 조태(曹泰) - 후사를 이었다. 관직과 작위가 진동장군(鎭東―)과 영릉후(甯陵侯)까지 올랐다.
  • 손자 : 조초(曹初)
  • 아들 : 조해(曹楷)
  • 아들 : 조범(曹範)[34]

5.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삼국지연의》에서 조인은 조조가 거병할 때부터 등장하여 여러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조홍과 함께 조조군에 합류하여 전투에서 자주 등장한다.[1]

여포와의 싸움에서는 조조의 명령을 받아 별군으로 소패성을 공략하고 수비를 굳게 하여 여포를 하비성으로 몰아넣었다.[1]

유비 군과의 신야 전투에서는 이전의 조언을 무시하고 단복(서서)에게 "팔문금쇄의 진"을 깨뜨려 대패했다. 조조가 직접 형주를 공격했을 때 조홍과 함께 전진을 맡았지만, 텅 빈 신야성에 들어가 제갈량의 화계에 패배했다.[1]

남군에서는 주유와 격렬하게 싸웠고, 우금이 포위되었을 때 정사와 거의 같은 경위로 오군을 물리쳤다. 이릉을 빼앗겨 정세가 위태로워지자 조조의 문서에 적힌 작전을 실행하여 주유에게 화살 상처를 입혀 오군을 크게 이겼지만, 주유의 죽음 위장에 속아 남군을 잃었다.[1]

마초, 한수가 지휘하는 서량군과의 싸움에서는 조홍이 성급하게 동관 수비에 실패하자 조조에게 간언했고, 조홍이 패배하고 조조가 격노하여 동관으로 돌격을 시도하자 먼저 진영을 구축할 것을 건의했다.[1]

관우가 지휘하는 형주 군과의 싸움에서는 만총의 의견을 듣지 않고 고전했지만, 번성 함락 위기에 만총의 간언으로 분발하여 관우에게 화살 상처를 입혔다. 서황의 구원과 오가 형주를 빼앗은 것으로 전세를 회복하여 마침내 형주 군을 격퇴했다.[1]

조비 대에는 오에 대한 삼면군 중 유수를 담당했지만, 원정으로 인한 피로와 지형의 불리함으로 선봉 부대인 상조가 궤멸되어 철수한다. 그 후, 오와 이 다시 동맹을 맺을 무렵에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1]

조인은 이야기 속에서 조홍과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고, 함께 궁술과 마술에 능숙하며, 무예에 정통하다고 소개된다. 강한 자부심 때문에 부하의 조언을 듣지 않고 손해를 보는 장면이 많지만, 잘 버티어 서량군으로부터 필사적으로 진영을 지켜 피해를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형주군으로부터는 번성을 지켜냈다. 또한 허창과 남군을 비롯해 중요한 거점이나 본진의 수비를 대군과 함께 종종 맡았으며, 조조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았음을 엿볼 수 있다.[1]

조조의 장군들이 예형에게 비꼬임을 당했을 때, 조인은 "요전태수(돈을 밝히는 태수)"라고 폄하되지만, 정사에서 인색하다고 기록된 조홍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1]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9
[2] 서적 Sanguozhi vol. 2
[3] 서적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4] 서적 Sanguozhi vol. 9
[5] 서적 Sanguozhi vol. 56
[6] 서적 Sanguozhi vol. 9
[7] 서적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8] 서적 Yingxio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9] 서적 Sanguozhi vol. 9
[10] 서적 Sanguozhi vol. 9
[11] 서적 Sanguozhi vol. 9
[12] 서적 Sanguozhi vol. 9
[13] 서적 Sanguozhi vol. 9
[14] 서적 Leban, p. 364
[15] 서적 Sanguozhi vol. 9
[16] 서적 Sanguozhi vol. 9
[17] 서적 Sanguozhi vol. 9
[18] 서적 Sanguozhi vol. 9
[19] 서적 Zizhi Tongjian vol. 66
[20] 서적 Sanguozhi vol. 9
[21] 서적 Sanguozhi vol. 1
[22] 서적 Sanguozhi vol. 1
[23] 서적 Sanguozhi vol. 9
[24] 서적 Sanguozhi vol. 9
[25] 서적 Sanguozhi vol. 9
[26] 서적 Sanguozhi vol. 9
[27] 서적 Sanguozhi vol. 9
[28] 서적 Sanguozhi vol. 56
[29] 서적 Sanguozhi vol. 56
[30] 서적 Sanguozhi vol. 9
[31] 서적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32] 서적 Fu Z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33] 서적 Sanguozhi vol. 9
[34] 서적 Sanguozhi vol. 9
[35] 간행물 亳県曹操宗族墓葬 安徽省亳県博物館 1978
[36] 서적 水経注
[37] 서적 呉主伝
[38] 서적 文帝紀
[39] 서적 三国志武将34選
[40] 서적 삼국지집해
[41] 서적 삼국지
[42] 서적 삼국지
[43] 서적 삼국지
[44] 문서 오장군 우금과는 한자가 다르다.
[45] 서적 삼국지
[46] 서적 조만전
[47] 서적 삼국지
[48] 서적 진서
[49] 서적 삼국지
[50] 서적 자치통감
[51] 서적 삼국지
[52] 서적 위서
[53] 서적 부자
[54] 서적 수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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