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조선무속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선무속고』는 이능화가 1927년 잡지 『계명』에 발표한 글로, 한국 무속에 대한 연구를 담고 있다. 이능화는 무속을 한국 고유의 문화 전통으로 인식하고 그 기원을 추적하며, 고대 사회에서 무당의 높은 지위와 유교, 불교, 도교의 영향으로 인한 사회적 지위 변화를 설명한다. 또한, 무속의 혼합적인 성격을 지적하며, 당대 자료를 활용하여 무속의 구성, 연구 방법, 특징 등을 분석했다. 그러나 자료 인용의 오류와 사료 검토 미흡, 한국 무속의 보편성 강조 등의 비판도 존재한다.

2. 『조선무속고』의 배경 및 개요

『조선무속고』는 1927년에 잡지 『계명』(鷄鳴) 19호에 발표된 글이다.[1] 이능화는 1915년에 발표한 「조선인과 각 종교」(『불교진흥회월보』I-9)와 1918년에 저술한 『조선불교통사』하(下)에서 무속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때까지도 무속은 조선조 이래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영향으로 사회적으로 천시와 배척의 대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능화는 "조선의 공교는 다만 상류사회의 자기 이익을 꾀하는 자를 위한 것이요, 하급 인민을 위하여 널리 알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조선인과 각 종교」)라고 할 정도로 유교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가했고, 불교 전통(한국의 무속과 습합한 상태의)에 대한 관심을 보이며 기존의 애국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의되던 민족의 고유종교에 대한 관심과 재발견에 편승하여, 1922년부터 신교(神敎)에 대한 일련의 연구성과를 발표하였다.

『조선무속고』는 1929년에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조센』(朝鮮) 135호부터 146호까지 연재되었으며, 1933년에 저술한 『조선종교사』에서도 무속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면서도 그 이후의 저술은 『조선무속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능화는 "춤으로 신을 내리게 하고 노래로 신을 흥겹게 하여 재앙을 피하고 복을 부르는 것을 비는 자"라고 무당을 정의한다. 이능화 이전에 한국 무속의 기원에 대해서는 중국의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오면서 데리고 왔던 의무(醫巫)와 복서(卜筮)에게서 기원을 찾는 중국기원설이나, 북아시아샤머니즘과 연관짓는 견해 등이 있었는데, 이능화는 이에 대해서 한민족이 과거 북아시아 지역에 거주한 적이 있어서 한국의 무속과 북방 샤머니즘에 유사성이 있을 뿐이라고 일축하고, 한국 고유종교의 상징인 환웅이나 단군이라는 이름 자체가 무당이라는 뜻이 있으며 그 이름이 마한천군(天君)과 신라의 차차웅(次次雄)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아 무속을 외래 기원이 아닌 한국의 자생적이고 독자적인 문화 전통으로 인식하였다.

그에 따르면 고대에는 왕이 곧 무당일 정도로 무당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고 그 사회적 영향력도 컸지만, 유교와 불교, 도교가 수용되면서 점차 무당의 사회적 지위도 추락하고 무속의 영향력도 축소되어갔다.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교법(敎法)을 갖고 있던 외래 종교들과는 달리 무속은 문화의 발달에 짝하지 못하고 변화 없이 원시상태에 머물러 유치함을 면하지 못했기에 마침내 사회에서까지 천시당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능화의 주장이다. 이러한 외래 종교의 영향은 신에 대한 관념이나 의례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고, 불교와 도교가 함께 무속에 영향을 미쳤지만 혼입 시기나 정도를 볼 때 도교가 불교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보았다. 불교와 도교뿐 아니라 여진족이나 몽골족 등 북방 민족과, 중국 강남 지역의 소수민족과도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능화에게 신교 즉 단군에 기원을 두는 한국의 고대 종교와는 달리 무속은 그 고유의 순수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여러 종교와 여러 문화요소가 혼입된 혼합종교였으며, 이것은 같은 한민족의 고유종교로 보면서도 신교와 무속을 동일시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한편 무속에 대해서도 이능화 자신은 결코 긍정적인 입장은 아니어서, 무속에서 신봉되는 대감신(大監神) 과 다양한 신들의 이름을 나열한 뒤 "이 대감들이란 모두 무당들이 말하는 바로 부인네들을 유혹해서 굿을 하여 재물을 취하는 것이다."[2] "조선 사람의 신앙이 이와 같이 초매(草昧)로다"[3]라고 하는가 하면, 고려 인종 때 일관(日官)이 왕에게 무당을 몰아내자고 건의한 사실을 두고 "고려 시대에는 이미 민지가 깨어 조정에서는 일관을 쓰고 무당을 천하게 여겼다."[4]고 하여, 무속을 신앙하는 것은 무지의 산물이고 배척하는 것은 사람들의 지혜가 깬 결과라고까지 정의한다. 다만 무속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속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문제가 되는 점을 고증하면서 무속 현상의 전체적 모습을 드러내려는 학문적 연구의 결과물이라는 점에는 부정할 여지가 없다.

2. 1. 집필 배경

1927년에 잡지 『계명』(鷄鳴) 19호에 발표된 글이다.[1] 이능화는 1915년에 발표한 「조선인과 각 종교」(『불교진흥회월보』I-9)와 1918년에 저술한 『조선불교통사』하(下)에서 무속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때까지도 무속은 조선조 이래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영향으로 사회적으로 천시와 배척의 대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1] 이능화는 유교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가했고, 불교 전통(한국의 무속과 습합한 상태의)에 대한 관심을 보이며 기존의 애국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의되던 민족의 고유종교에 대한 관심과 재발견에[1] 편승하여, 1922년부터 신교(神敎)에 대한 일련의 연구성과를 발표하였다.[1]

『조선무속고』는 1929년에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조센』(朝鮮) 135호부터 146호까지 연재되었으며, 1933년에 저술한 『조선종교사』에서도 무속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였다.[1]

2. 2. 이능화의 무속관

이능화는 무당을 "춤으로 신을 내리게 하고 노래로 신을 흥겹게 하여 재앙을 피하고 복을 부르는 것을 비는 자"라고 정의한다.[2] 한국 무속의 기원에 대해서는 중국의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오면서 데리고 왔던 의무(醫巫)와 복서(卜筮)에게서 기원을 찾는 중국기원설이나, 북아시아샤머니즘과 연관짓는 견해 등이 있었으나, 이능화는 한민족이 과거 북아시아 지역에 거주한 적이 있어서 한국의 무속과 북방 샤머니즘에 유사성이 있을 뿐이라고 일축하였다.[2] 그는 한국 고유종교의 상징인 환웅이나 단군이라는 이름 자체가 무당이라는 뜻이 있으며 그 이름이 마한천군(天君)과 신라의 차차웅(次次雄)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아 무속을 외래 기원이 아닌 한국의 자생적이고 독자적인 문화 전통으로 인식하였다.[2]

이능화에 따르면 고대에는 왕이 곧 무당일 정도로 무당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고 그 사회적 영향력도 컸지만, 유교불교, 도교가 수용되면서 점차 무당의 사회적 지위도 추락하고 무속의 영향력도 축소되어갔다.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교법(敎法)을 갖고 있던 외래 종교들과는 달리 무속은 문화의 발달에 짝하지 못하고 변화 없이 원시상태에 머물러 유치함을 면하지 못했기에 마침내 사회에서까지 천시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2] 이러한 외래 종교의 영향은 신에 대한 관념이나 의례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고, 불교와 도교가 함께 무속에 영향을 미쳤지만 혼입 시기나 정도를 볼 때 도교가 불교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보았다. 불교와 도교뿐 아니라 여진족이나 몽골족 등 북방 민족과, 중국 강남 지역의 소수민족과도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능화에게 신교 즉 단군에 기원을 두는 한국의 고대 종교와는 달리 무속은 그 고유의 순수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여러 종교와 여러 문화요소가 혼입된 혼합종교였으며, 이것은 같은 한민족의 고유종교로 보면서도 신교와 무속을 동일시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2]

한편 무속에 대해서도 이능화 자신은 결코 긍정적인 입장은 아니어서, 무속에서 신봉되는 대감신(大監神) 과 다양한 신들의 이름을 나열한 뒤 "이 대감들이란 모두 무당들이 말하는 바로 부인네들을 유혹해서 굿을 하여 재물을 취하는 것이다."[2] "조선 사람의 신앙이 이와 같이 초매(草昧)로다"[3]라고 하는가 하면, 고려 인종 때 일관(日官)이 왕에게 무당을 몰아내자고 건의한 사실을 두고 "고려 시대에는 이미 민지가 깨어 조정에서는 일관을 쓰고 무당을 천하게 여겼다."[4]고 하여, 무속을 신앙하는 것은 무지의 산물이고 배척하는 것은 사람들의 지혜가 깬 결과라고까지 정의한다. 다만 무속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속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문제가 되는 점을 고증하면서 무속 현상의 전체적 모습을 드러내려는 학문적 연구의 결과물이라는 점에는 부정할 여지가 없다.[2]

3. 『조선무속고』의 구성 및 연구 방법

wikitext

『조선무속고』는 총 2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에는 서문이 있다(7장, 11장, 13장 제외). 6장 이하에서는 주로 조선 시대 무속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13장에서는 무당의 다양한 술법들을 12절로 나누어 소개한다. 특히 13장에서는 문헌 자료뿐만 아니라 저자가 직접 보고 들은 당시 무속 자료도 언급하고 있어, 다른 종교 관련 저술과 달리 '고(考)'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각 장은 여러 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절에는 관련 문헌 자료와 출전이 제시되어 있다. 필요한 경우 저자의 견해를 담은 안설(按說)을 덧붙였으며, 용어 해설 등은 세주(細註)로 처리하여 독자가 자료를 통해 스스로 이해하도록 하였다.

조선 시대 무속과 관련해서는 궁중의 무속 신앙, 무격의 관서 소속, 무업세와 신포세, 무병 재도, 요무(妖巫) 및 음사(淫祀) 금지, 무당의 도성 밖 축출 등의 내용이 6장 이하에서 다루어진다. 무격의 술법, 무고(巫蠱), 무축(巫祝)의 용어와 의식, 무당이 행하는 신사의 명칭, 성황, 서울과 지방의 무풍 및 신사 등에 대한 내용은 13장 이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능화는 조선 신교의 연원, 조선 민족의 신앙과 사상 및 조선 사회의 변천 상태를 연구하기 위해 무속에 대한 관찰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5] 『조선무속고』를 저술하면서 총 125종(한국 문헌 90종, 중국 문헌 34종, 일본 문헌 1종[5])의 문헌을 참조했다. 그는 역사서, 지리서, 문집, 세시기, 일기, 유서, 전기, 필기, 일기, 문장, 사전, 운서, 유교 경전, 제자백가, 불교 의례집, 무서(巫書) 등 다양한 종류의 문헌을 참고하여 기본적인 문헌 연구 방법을 따르면서도, 문헌의 성격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료를 활용했다.[5]

조선의 무속은 고려 중기 이래로 천시와 배척의 대상이었고, 무속에 대한 논의는 주로 탄압과 배격을 위한 것이었다.[5] 조선 후기에 이르러 무속의 역사와 실상을 파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이다.[5] 이 책은 백과사전 형식으로 여러 주제를 검토하면서 「무격변증설」(권26), 「화동음사변증설」(권43), 「김부대왕변증설」(권60) 등의 항목을 통해 한국 무속의 역사와 실상을 언급했다. 이규경은 무격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지만, 이능화의 『조선무속고』는 이규경의 논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내용이 21회나 인용되고 있는 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5]

이능화는 문헌 자료에만 의존하지 않고, 당대에 직접 보고 들은 자료를 수집했다.[5] 무당을 직접 인터뷰하고, 《성신말법》(聖神語法)과 같은 무속 관련 서적을 참고하는 등 현장 연구를 병행했다.[5] 또한 한자의 뜻이나 한국어에 기초하여 무속 용어를 해석하고, 다른 민족의 무속에도 주목하여 한국 무속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했다.[5]

3. 1. 구성

『조선무속고』는 총 2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에는 서문이 있다(7장, 11장, 13장 제외). 6장 이하에서는 주로 조선 시대 무속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13장에서는 무당의 다양한 술법들을 12절로 나누어 소개한다. 특히 13장에서는 문헌 자료뿐만 아니라 저자가 직접 보고 들은 당시 무속 자료도 언급하고 있어, 다른 종교 관련 저술과 달리 '고(考)'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각 장은 여러 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절에는 관련 문헌 자료와 출전이 제시되어 있다. 필요한 경우 저자의 견해를 담은 안설(按說)을 덧붙였으며, 용어 해설 등은 세주(細註)로 처리하여 독자가 자료를 통해 스스로 이해하도록 하였다.

조선 시대 무속과 관련해서는 궁중의 무속 신앙, 무격의 관서 소속, 무업세와 신포세, 무병 재도, 요무(妖巫) 및 음사(淫祀) 금지, 무당의 도성 밖 축출 등의 내용이 6장 이하에서 다루어진다. 무격의 술법, 무고(巫蠱), 무축(巫祝)의 용어와 의식, 무당이 행하는 신사의 명칭, 성황, 서울과 지방의 무풍 및 신사 등에 대한 내용은 13장 이하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2. 연구 방법

이능화는 조선 신교의 연원, 조선 민족의 신앙과 사상 및 조선 사회의 변천 상태를 연구하기 위해 무속에 대한 관찰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5] 『조선무속고』를 저술하면서 총 125종(한국 문헌 90종, 중국 문헌 34종, 일본 문헌 1종[5])의 문헌을 참조했다. 그는 역사서, 지리서, 문집, 세시기, 일기, 유서, 전기, 필기, 일기, 문장, 사전, 운서, 유교 경전, 제자백가, 불교 의례집, 무서(巫書) 등 다양한 종류의 문헌을 참고하여 기본적인 문헌 연구 방법을 따르면서도, 문헌의 성격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료를 활용했다.[5]

조선의 무속은 고려 중기 이래로 천시와 배척의 대상이었고, 무속에 대한 논의는 주로 탄압과 배격을 위한 것이었다.[5] 조선 후기에 이르러 무속의 역사와 실상을 파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이다.[5] 이 책은 백과사전 형식으로 여러 주제를 검토하면서 「무격변증설」(권26), 「화동음사변증설」(권43), 「김부대왕변증설」(권60) 등의 항목을 통해 한국 무속의 역사와 실상을 언급했다. 이규경은 무격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지만, 이능화의 『조선무속고』는 이규경의 논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내용이 21회나 인용되고 있는 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5]

이능화는 문헌 자료에만 의존하지 않고, 당대에 직접 보고 들은 자료를 수집했다.[5] 무당을 직접 인터뷰하고, 《성신말법》(聖神語法)과 같은 무속 관련 서적을 참고하는 등 현장 연구를 병행했다.[5] 또한 한자의 뜻이나 한국어에 기초하여 무속 용어를 해석하고, 다른 민족의 무속에도 주목하여 한국 무속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했다.[5]

4. 한국 무속의 역사

4. 1. 고대 사회의 무속

4. 2. 고려 시대의 무속

4. 3. 조선 시대의 무속

5. 한국 무속의 특징 및 의례

5. 1. 한국 무속의 특징

5. 2. 무속 의례

5. 3. 지역별 무속

6. 『조선무속고』에 대한 비판

『조선무속고』는 자료 인용에서 몇 가지 오류를 보인다. 우선 오자(誤字) 및 인용 서적 제목의 오류가 발견된다. 예를 들어, 《포박자》(抱朴子)를 인용하면서 "만신을 동이 민족의 고대 신사의 기록이라 단정"하고 "무당을 만신이라 한 것도 포박자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포박자》의 해당 부분은 "만신을 부렸다"로 기록되어 있어[6] 이능화의 주장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이능화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원전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일본 학자들의 왜곡된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또한 성종 때 무녀 배척 사건을 《용재총화》에서 인용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차천로의 《오산설림초고》에 나오는 내용이며,[7] 강릉단오제(영동 산신제) 관련 기록을 남효온의 《추강냉화》에서 인용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추강집》 권5 「유금강산기」에 나오는 내용이다.[8]

관련 자료가 아닌 것을 제시한 경우도 있다. 황해도 무풍을 소개하면서 김상헌의 「장산도천비제문」(《청음집》 권9)을 제시했지만, 이는 요동반도 인근의 장산도를 황해도의 장산곶으로 오인한 것이다. 해당 기록은 김상헌이 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요동반도의 장산도에서 천비(天妃, 마조)에게 제사를 지낸 내용으로, 조선의 무속과는 관련이 없다. 경기도 무풍을 소개하면서 언급한 풍덕군 망덕령사(望德嶺祠)는 실제로는 황해도 풍천군(豊川郡)에 있다. 이는 이능화가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역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피상적인 정보만을 취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료 검토 미흡'''

국조보감》에서 조선 태종이 승려와 무당을 불러 기우제를 지내는 것을 없애겠다고 한 것에 대해, 이능화는 태종대에도 무당을 모아 기우제를 지내게 한 사실이 여러 번 있음을 들어 "유신사관의 찬술로서 사실을 은닉하고 왕의 미덕을 꾸며 지어내서 천하의 후세 사람들을 속이려 한 것"[9]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태종이 무격 기우제를 지내지 않겠다고 한 기사는 《태종실록》권25 태종 13년 7월 임오조에서 확인되며, 해당 기사를 가지고 《국조보감》을 비난하는 주장은 성립되기 어렵다.[10] 이는 이능화가 유교적 사관에 대한 반발심으로 인해 객관적인 사료 분석을 소홀히 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능화는 한국 무속의 고유성을 주장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그 특수성을 지적하고 있지는 않은데, 이 점은 한국문화의 특수성을 부각시키고자 했던 신채호 등의 민족사학자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다만 한국의 무당과 일본의 신관(神官), 만주의 살만이 모두 의례에서 방울을 사용하는 것을 들어 이들의 근원을 같은 것으로 본 것이나 일본의 고대 무축은 신관으로서 한국의 천군(天君)이나 차차웅과 서로 유사한 것이라고 보는 등, 한국의 무속을 언급하면서 주변 민족의 무속과의 공통성을 더욱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11] 이는 이능화가 한국 무속을 독자적인 문화 현상으로 보기보다는 동아시아 문화권 내에서 보편성을 가진 종교 현상의 하나로 파악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6. 1. 자료 인용의 오류

『조선무속고』는 자료 인용에서 몇 가지 오류를 보인다. 우선 오자(誤字) 및 인용 서적 제목의 오류가 발견된다. 예를 들어, 《포박자》(抱朴子)를 인용하면서 "만신을 동이 민족의 고대 신사의 기록이라 단정"하고 "무당을 만신이라 한 것도 포박자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포박자》의 해당 부분은 "만신을 부렸다"로 기록되어 있어[6] 이능화의 주장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성종 때 무녀 배척 사건을 《용재총화》에서 인용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차천로의 《오산설림초고》에 나오는 내용이며,[7] 강릉단오제(영동 산신제) 관련 기록을 남효온의 《추강냉화》에서 인용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추강집》 권5 「유금강산기」에 나오는 내용이다.[8]

관련 자료가 아닌 것을 제시한 경우도 있다. 황해도 무풍을 소개하면서 김상헌의 「장산도천비제문」(《청음집》 권9)을 제시했지만, 이는 요동반도 인근의 장산도를 황해도의 장산곶으로 오인한 것이다. 해당 기록은 김상헌이 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요동반도의 장산도에서 천비(天妃, 마조)에게 제사를 지낸 내용이다. 경기도 무풍을 소개하면서 언급한 풍덕군 망덕령사(望德嶺祠)는 실제로는 황해도 풍천군(豊川郡)에 있다.

6. 2. 사료 검토 미흡

조선무속고》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지적된다.

'''사료 검토 미흡'''

국조보감》에서 조선 태종이 승려와 무당을 불러 기우제를 지내는 것을 없애겠다고 한 것에 대해, 이능화는 태종대에도 무당을 모아 기우제를 지내게 한 사실이 여러 번 있음을 들어 "유신사관의 찬술로서 사실을 은닉하고 왕의 미덕을 꾸며 지어내서 천하의 후세 사람들을 속이려 한 것"[9]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태종이 무격 기우제를 지내지 않겠다고 한 기사는 《태종실록》권25 태종 13년 7월 임오조에서 확인되며, 해당 기사를 가지고 《국조보감》을 비난하는 주장은 성립되기 어렵다.[10]

6. 3. 보편성 강조의 문제점

이능화는 한국 무속의 고유성을 주장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그 특수성을 지적하고 있지는 않은데, 이 점은 한국문화의 특수성을 부각시키고자 했던 신채호 등의 민족사학자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다만 한국의 무당과 일본의 신관(神官), 만주의 살만이 모두 의례에서 방울을 사용하는 것을 들어 이들의 근원을 같은 것으로 본 것이나 일본의 고대 무축은 신관으로서 한국의 천군(天君)이나 차차웅과 서로 유사한 것이라고 보는 등, 한국의 무속을 언급하면서 주변 민족의 무속과의 공통성을 더욱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11]

참조

[1] 논문 한국원시종교연구사 소고 일지사 1983
[2] 서적 같은 책
[3] 간행물 조선인과 각 종교 1916
[4] 간행물 같은 기사 1916
[5] 서적 화한삼재도회
[6] 서적 포박자
[7] 서적 같은 책
[8] 서적 같은 책
[9] 서적 같은 책
[10] 역사기록 조선왕조실록
[11] 간행물 불교진흥회월보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