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서
1. 개요
조화서는 1815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으며, 한국 천주교 박해 시기에 순교한 인물이다. 기해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한 후 충청도 신창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이어갔으며,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봉사하고 전라도 전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는 1866년 전주 숲정이에서 체포되어 순교했는데, 52세의 나이로 참수되었으며, 그의 아들 조윤호도 열흘 뒤 순교하여 3대가 순교자가 되었다. 1968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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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기독교 성인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나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19세기 기독교 성인 -
다미앵 신부
벨기에 출신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예수 성심 성모 수도회 소속 선교사인 다미앵 신부는 하와이 몰로카이섬에서 한센인들을 16년간 헌신적으로 돌보며 사목 활동을 펼치다 자신도 한센병에 감염되었으나 봉사를 이어갔고, 사후 시성되어 소외된 이들을 위한 봉사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나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 -
김대건
김대건 안드레아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이자 순교자로, 천주교 신앙을 가진 가문에서 태어나 사제의 길을 걸으며 마카오와 필리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26세에 순교하였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1815년 출생 -
오토 폰 비스마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9세기 후반 독일 통일의 주역인 프로이센 왕국 출신 정치가로, 철혈 정책을 통해 독일 제국을 건설하고 초대 총리가 되어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지만, 국내 정책과 외교는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1815년 출생 -
에이다 러브레이스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영국의 귀족이자 수학자로, 찰스 배비지의 해석기관 연구를 통해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여겨지는 베르누이 수 계산 알고리즘을 고안하고 해석기관의 다양한 활용 가능성을 제시한 선구자이다.
2. 생애
조화서는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천주교 신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독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해 주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조화서는 외지의 소식을 접하기 어려운 외진 산지에 살고 있었다. 1866년 12월 5일 아들 조윤호와 함께 이웃집을 방문하였을 때, 한 무리의 포졸들이 급습하여 체포하였다. 그는 포졸들에게 자신은 천주교 신자이며 아버지로부터 교리를 배웠다고 자백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을 제외한 다른 신자들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아들 조윤호가 그 집으로 들어오자, 조화서는 아들에게 도망치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조윤호는 도망치지 않았고,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그때 이명서 베드로와 정원지 베드로도 함께 체포되었다. 조화서, 조윤호 부자는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는데, 그 길에 부자는 서로를 격려하며 신앙을 지키기를 다짐하였다. 이 이야기는 비천주교인들에게도 감동을 주었다.
조화서와 조윤호 부자는 감옥에서 여러 교우를 만났다. 조화서는 동료 수감자들이 순교를 각오토록 격려하였다. 그러함은 다른 죄수들 보다 더 가혹한 고문을 받도록 만들었다. 조화서는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에게도 배교하지 않도록 격려하며 "우리는 천국에서 풍부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아들에게도 천국에서 함께 만날 것을 다짐하였다.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며 배교를 권유하는 관장의 유혹을 물리쳤고, 교우들을 배신할 것과 읽은 서양 서적들을 부정할 것을 강요받으며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았지만, 모두 거부하며 이겨내었다.
전주 숲정이 사형장에서 경건한 자세로 천천히 십자성호를 그으며 망나니에게 하느님을 믿으라고 말한 뒤, 1866년 12월 13일 52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열흘 뒤인 23일에 같은 장소에서, 아들 조윤호도 순교하여, 그의 가문은 3대가 순교자가 되었다.
2.1. 출생과 가정
1815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1939년 기해박해 때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충청도 신창으로 이사하였다. 교우 한 막달레나와 결혼하여 아들 조윤호 요셉을 두었다. 그 무렵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로 봉사하였다. 1864년 전라도 전주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었다. 아내가 죽은 후, 교우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2.2. 신앙 활동과 체포
조화서는 1815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1839년 기해박해 때 그의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조화서는 충청도 신창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교우 한 막달레나와 결혼했고, 둘 사이에 아들 조윤호 요셉을 두었다. 그 무렵 그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로 봉사하였다. 1864년에 그는 전라도 전주의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농사일을 했다. 그는 아내가 죽자, 교우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조화서는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천주교 신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독실한 천주교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해 주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조화서는 외지의 소식을 접하기 어려운 외진 산지에 살고 있었다. 1866년 12월 5일 조화서가 아들 조윤호와 함께 이웃집을 방문하였을 때, 한 무리의 포졸들이 급습하여 그를 체포하였다. 그는 포졸들에게 자신은 천주교 신자이며 아버지로부터 교리를 배웠다고 자백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들을 제외한 다른 신자들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의 아들 조윤호가 그 집으로 들어오자, 조화서는 아들에게 도망치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조윤호는 도망치지 않았고,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그때 이명서 베드로와 정원지 베드로도 함께 체포되었다. 조화서, 조윤호 부자는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는데, 그 길에 부자는 서로를 격려하며 신앙을 지키기를 다짐하였다. 그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비천주교인들도 그들의 강인한 신앙에 감복하였다.
그 부자는 감옥에서 여러 교우를 만났다. 조화서는 동료 수감자들이 순교를 각오토록 그들을 격려하였다. 그러함은 그가 다른 죄수들 보다 더 가혹한 고문을 받도록 만들었다. 조화서는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에게도 그가 배교치 않도록 격려하였다. 조화서는 "우리는 천국에서 풍부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도 천국에서 함께 만날 것을 다짐하였다. 그는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는 체하며 배교를 권유하는 관장의 유혹을 물리쳤고, 교우들을 배신할 것과 그가 읽은 서양 서적들을 부정할 것을 강요받으며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았지만, 모두 거부하며 이겨내었다.
그가 전주 숲정이에 있는 사형장에 다다랐을 때, 그는 경건한 자세로 천천히 십자성호를 그으며 망나니에게 하느님을 믿으라고 말했다. 1866년 12월 13일, 그곳에서 그는 52세의 나이로 참수되므로 순교하였다. 열흘 뒤인 23일에 같은 장소에서, 그의 아들 조윤호도 순교하므로, 그의 가문은 3대가 순교자가 되었다.
2.3. 투옥과 순교
1815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충청도 신창으로 이사하였다. 한 막달레나와 결혼하여 아들 조윤호 요셉을 두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로 봉사하였고, 1864년 전라도 전주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었다. 아내가 죽은 후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조화서는 낙천적이며, 천주교 신자로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866년 12월 5일 아들 조윤호와 이웃집을 방문했을 때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천주교 신자이며 아버지로부터 교리를 배웠다고 자백했지만, 아들을 제외한 다른 신자들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조윤호가 자진 체포되고, 이명서 베드로와 정원지 베드로도 함께 체포되었다. 조화서와 조윤호 부자는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는 길에 서로 격려하며 신앙을 지켰고, 이 이야기는 비천주교인들에게도 감동을 주었다.
감옥에서 조화서는 동료 수감자들에게 순교를 각오하도록 격려했고,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에게도 배교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우리는 천국에서 풍부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아들에게도 천국에서 만날 것을 다짐했다.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며 배교를 권유하는 관장의 유혹을 물리치고, 교우들을 배신할 것과 서양 서적을 부정할 것을 강요받으며 고문을 받았지만 모두 거부했다.
전주 숲정이 사형장에서 경건하게 십자성호를 긋고 망나니에게 하느님을 믿으라고 말한 뒤, 1866년 12월 13일 52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열흘 뒤, 아들 조윤호도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여 3대가 순교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