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윈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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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윈throp은 1587년 또는 1588년 영국에서 태어난 청교도 변호사로,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의 초대 총독이었다. 그는 1630년 뉴잉글랜드로 이주하여, '언덕 위의 도시'라는 비전을 제시하며 청교도 사회 건설에 힘썼다. 윈throp은 정치적, 종교적 갈등 속에서 식민지를 이끌었으며, 앤 허친슨 등과의 논쟁을 통해 청교도 신앙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원주민과의 관계 및 노예 제도와 관련된 문제에도 관여했다. 윈throp은 1649년까지 총독을 역임했으며, 그의 저술과 연설은 미국 정치 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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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윈스럽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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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존 윈스럽 |
원어 이름 | John Winthrop |
출생일 | 1587년/1588년 1월 12일 |
출생지 | 잉글랜드 서퍽주 에드워드스톤 |
사망일 | 1649년 3월 26일 |
사망지 |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보스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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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
직업 | 변호사, 총독 |
종교 | 청교도 |
정치 경력 | |
직위 |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총독 |
재임 횟수 | 2대, 6대, 9대, 12대 총독 |
1번째 임기 시작 | 1630년 |
1번째 임기 종료 | 1634년 |
1번째 임기 이전 총독 | 존 엔데콧 |
1번째 임기 다음 총독 | 토머스 더들리 |
2번째 임기 시작 | 1637년 |
2번째 임기 종료 | 1640년 |
2번째 임기 이전 총독 | 헨리 베인 |
2번째 임기 다음 총독 | 토머스 더들리 |
3번째 임기 시작 | 1642년 |
3번째 임기 종료 | 1644년 |
3번째 임기 이전 총독 | 리처드 벨링햄 |
3번째 임기 다음 총독 | 존 엔데콧 |
4번째 임기 시작 | 1646년 |
4번째 임기 종료 | 1649년 |
4번째 임기 이전 총독 | 토머스 더들리 |
4번째 임기 다음 총독 | 존 엔데콧 |
뉴잉글랜드 연합 커미셔너 |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대표 |
1번째 커미셔너 임기 시작 | 1643년 |
1번째 커미셔너 임기 종료 | 1643년 |
1번째 커미셔너 이전 | 직책 신설 |
1번째 커미셔너 다음 | 사이먼 브래드스트리트 윌리엄 호손 |
1번째 커미셔너 동반 | 토머스 더들리 |
2번째 커미셔너 임기 시작 | 1645년 |
2번째 커미셔너 임기 종료 | 1645년 |
2번째 커미셔너 이전 | 사이먼 브래드스트리트 윌리엄 호손 |
2번째 커미셔너 다음 | 허버트 펠햄 |
2번째 커미셔너 동반 | 허버트 펠햄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메리 포스, (1605년 4월 16일 결혼, 1615년 사망) 토마신 클롭턴, (1615년 12월 6일 결혼, 1616년 12월 8일 사망) 마거릿 틴달, (1618년 4월 29일 결혼, 1647년 6월 14일 사망) 마사 레인즈버러, (1648년 결혼) |
자녀 | 16명 |
학력 | |
교육 |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
2. 생애
존 윈스럽은 1587년 또는 1588년[161][162][2] 1월 12일 잉글랜드 서퍽주의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법률을 공부했다.[153][164] 독실한 청교도로서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을 추구했으며, 찰스 1세의 통치 하에서 종교적, 정치적 위기를 느끼고 신대륙 이주를 결심했다.[164][43]
1629년 매사추세츠 만 회사의 총독으로 선출되어[47] 1630년 대규모 이주민을 이끌고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65][56] 그는 여러 차례 총독을 역임하며 식민지의 초기 기틀을 다졌고, "산 위의 도시"라는 이상을 통해 매사추세츠를 모범적인 청교도 공동체로 만들고자 했다.[58]
윈스럽의 통치는 식민지 질서 유지와 종교적 순수성 확보에 중점을 두었으나, 앤 허친슨과 같은 종교적 비판자들을 추방하고[158]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를 경시하며 페코트 전쟁을 지지하는 등 권위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97][100] 그는 민주주의보다는 경험 많은 엘리트의 통치를 선호했으며, 성문법 제정에도 소극적이었다.[75][77]
윈스럽은 네 번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아들 존 윈스럽 2세는 훗날 코네티컷 식민지(Connecticut Colony)의 주지사가 되었다.[18]
윈스럽은 1649년 3월 26일 보스턴에서 사망했다. 그의 지도력은 초기 미국사에 깊은 영향을 남겼으며, 가문의 문장은 그의 상징으로 남아있다.[54]
2. 1. 잉글랜드에서의 삶 (1588년 ~ 1630년)
존 윈스럽은 1587년/1588년[161][162][2] 1월 12일 잉글랜드 서퍽주 에드워드스톤에서 아담 윈스럽(Adam Winthrop, 1548-1623)과 그의 아내 앤 브라운(Anne Browne)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기록은 그로턴 교구 등록부에 남아 있다.[3] 그의 할아버지는 직물 사업으로 성공하여 그로턴 영지를 구입하고 가문의 문장까지 얻은 지역 유지였으며,[153] 아버지 아담 윈스럽 역시 성공한 변호사이자 서퍽주에 여러 부동산을 소유한 지주였다.[163][4] 어머니 가문 또한 서퍽주와 에식스(Essex)에 부동산을 가진 유복한 집안이었다.[5] 윈스럽이 어릴 때 아버지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의 이사가 되기도 했으며,[163][6] 삼촌 존(John)이 아일랜드로 이주한 후, 윈스럽 가족은 그로턴 매너(Groton Manor)에서 살게 되었다.[163][7]윈스럽은 처음에 존 채플린(John Chaplin)이라는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고,[59] 이후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Bury St. Edmunds)의 그래머 스쿨에 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59] 그는 아버지와 성직자들 간의 종교 토론에 자주 참여하며 어린 나이부터 신학에 대한 이해를 쌓았다.[163][59] 1602년 12월, 15세가 되기 전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164][8] 약 2년간 수학했다.[153] 대학 시절 그는 훗날 뉴잉글랜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존 코튼 및 존 휠라이트(John Wheelwright)와 교류했다.[164][10] 그는 청소년기에 겪는 내적 갈등을 일기에 기록하기도 했는데,[12] 이 때문에 학업을 일찍 중단하고 비교적 어린 나이에 결혼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3]
1604년, 윈스럽은 친구와 함께 에식스주 그레이트 스탬브리지(Great Stambridge)를 방문했다가[14] 친구 가족의 딸인 메리 포스(Mary Forth)와 가까워졌다.[15] 그는 트리니티 칼리지를 떠나 1605년 4월 16일 그녀와 결혼했다.[16] 메리와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를 두었으나 세 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17] 장남은 훗날 코네티컷 식민지(Connecticut Colony)의 주지사가 되는 존 윈스럽 2세(John Winthrop the Younger)이다.[18][19] 메리는 1615년 마지막 출산의 합병증으로 사망했다.[17]

윈스럽은 1613년 아버지로부터 그로턴의 가족 소유지를 물려받아 영주(Lord of the Manor)가 되었다.[21] 그는 영지 관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농업 활동과 저택 운영을 감독했다.[22] 또한 아버지를 따라 런던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23] 1613년경 그레이스 인(Gray's Inn)에 등록했지만 변호사가 되지는 않았다.[32] 1620년에는 런던 지방법원 변호사가 되었다.[164] 그는 지역 치안 판사 위원회(commission of the peace)에도 임명되어 법률가 및 지주들과의 관계를 넓히고 사회적 영향력을 키웠다.[24]
첫 아내 메리가 사망한 후, 윈스럽은 1615년 12월 6일 토마신 클롭톤(Thomasine Clopton)과 재혼했다. 그녀는 메리보다 더 독실했으나,[31] 1616년 12월 8일 출산 중 아이와 함께 사망했다.[31]
법조계 인맥을 통해 에식스주 그레이트 맵플스테드(Great Maplestead)의 틴달(Tyndal) 가문을 알게 되었고, 1617년 상속법원(Court of Chancery) 판사 존 틴달 경(Sir John Tyndal)의 딸인 마가렛 틴달 윈스롭(Margaret Tyndal Winthrop)과 교제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결혼 반대에 부딪혔으나, 윈스럽은 자신의 경건함을 내세워 이를 극복하고 1618년 4월 29일 그녀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33][34] 이후 윈스럽은 그로턴과 런던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런던에서는 왕실 재산 관리국(Court of Wards and Liveries)에서 일하며 경력을 쌓았다.[35]
윈스럽은 매우 독실한 청교도 신자였다. 그는 영국 성공회가 가톨릭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으며,[164] 1605년부터 자신의 종교적 경험과 감정을 기록하는 일기를 썼다.[20][27] 그는 자신의 신앙적 부족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며 종교적 삶에 매진했다.[28]
1620년대 중후반, 잉글랜드의 정치 및 종교적 상황은 청교도들에게 점점 더 불리하게 돌아갔다. 1625년 즉위한 찰스 1세는 가톨릭 신자와 결혼했으며, 잉글랜드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고 청교도를 포함한 비국교도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43] 이러한 종교적 불관용과 박해의 분위기 속에서 많은 청교도 지도자들과 사업가들은 신대륙 이주를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36] 이미 1620년 플리머스 식민지가 성공적으로 건설된 사례가 있었다.[37]

1628년, 일단의 투자자들이 찰스 강과 메리맥 강 사이 지역에 대한 토지 특허권을 얻어 '뉴잉글랜드 회사'를 설립했고, 이 회사는 1629년 왕실 헌장을 받아 매사추세츠 만 회사로 개편되었다.[39] 회사는 1628년 존 엔드콧이 이끄는 소규모 정착민 그룹을 먼저 파견하여 이주를 준비했다.[40] 윈스럽은 초기 활동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나, 1629년 초에는 회사의 계획을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41]
1629년 3월, 찰스 1세가 의회를 해산하고 개인 통치 시대를 열자 청교도들의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었다.[43] 이 시기 윈스럽 역시 청교도 탄압의 여파로 왕실 재산 관리국에서의 직위를 잃었다.[43] 그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보시면, 주님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와 은신처를 마련하실 것"이라며 이주의 필요성을 절감했다.[43] 7월, 매슈 크래독(Matthew Cradock) 총독은 회사 자체와 헌장, 통치권을 식민지로 이전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왕의 직접적인 간섭에서 벗어나 청교도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44][157] 윈스럽은 이주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주요 인물로 부상했고, 8월 12일에는 이주를 지지하는 논거를 담은 문서를 배포했다.[45] 8월 26일, 그는 다른 부유한 청교도들과 함께 캠브리지 계약에 서명하여, 회사와 통치권을 가지고 뉴잉글랜드로 이주하여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할 것을 서약했다.[46][155]
1629년 10월 20일, 회사 주주 총회에서 이주하지 않을 크래독 총독을 대신할 새로운 총독을 선출하게 되었다. 윈스럽은 다른 후보들보다 매사추세츠 정착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다는 평가를 받아 총독으로 선출되었다.[47] 이후 그는 이주를 위한 함대와 물자를 준비하고, 식민지에 필요한 기술자들과 특히 목사들을 모집하는 데 힘썼다.[49]
이주 준비 과정에서 아내 마가렛은 1630년 4월 출산 예정이었기에 동행하지 못하고 1631년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50] 윈스럽은 성인이 된 아들들에게도 이주를 설득하여 존 주니어와 헨리가 동참하기로 했으나, 헨리만 1630년 함대에 함께했다.[52] 그는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고 그로턴 매너 매각 절차를 진행했으며, 이는 출항 후 아내 마가렛에 의해 마무리되었다.[53]
1630년 4월 8일, 윈스럽은 아들 사무엘(Samuel)과 스티븐(Stephen)을 데리고 아벨라 호에 승선하여 와이트 섬을 떠나 뉴잉글랜드로 향했다.[165] 아벨라 호는 아이작 존슨(Isaac Johnson)의 아내이자 제3대 링컨 백작 토마스 클린턴의 딸인 레이디 아벨라(Lady Arbella)의 이름을 딴 배였다.[157] 항해 중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비의 한 모델(A Model of Christian Charity)'이라는 유명한 설교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이상을 제시했다.[165]
2. 2.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총독 (1630년 ~ 1649년)
1629년 3월, 찰스 1세 국왕이 의회를 해산하고 11년간의 의회 없는 통치를 시작하자, 매사추세츠 만 회사의 주요 인물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우려가 제기되었다.[43] 같은 해 7월 회의에서 매슈 크래독 총독은 회사의 헌장과 통치권을 식민지로 이전할 것을 제안했다.[44] 이러한 상황은 의회 해산 후 청교도에 대한 단속으로 워즈 앤 리버리 법정에서 직위를 잃었던 윈스럽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보시면, 주님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와 은신처를 마련하실 것"이라고 쓰며 이주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43] 이후 몇 달간 그는 링컨셔의 동료들과 교류하며 회사 활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8월에는 이주를 지지하는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45] 8월 26일, 그는 이주하는 주주들이 남는 주주들을 매수할 수 있도록 한 캠브리지 계약에 서명하며 회사와 공식적인 관계를 맺었다.[46]10월 20일, 회사 주주 총회에서 이주하지 않을 크래독 총독을 대신할 새로운 총독을 선출해야 했다. 윈스럽은 리처드 설턴스톨, 존 험프리와 함께 후보로 올랐으나, 매사추세츠 정착에 대한 가장 확고한 의지를 보인 인물로 평가받아 총독으로 선출되었다.[47] 존 험프리는 부총독으로 선출되었으나 이주를 연기하면서 다음 해 사임했다.[48] 윈스럽과 다른 관리들은 즉시 이주를 위한 함대와 물자 준비에 착수했으며, 식민지에 필요한 기술자들, 특히 목사들을 모집하는 데 힘썼다.[49]
윈스럽의 아내 마가렛은 함대 출발 시기인 1630년 4월 출산을 앞두고 있어 동행하지 못하고, 1631년에야 신대륙에서 재회했다.[50] 떨어져 있는 동안 부부는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 저녁 특정 시간에 서로를 생각하기로 약속하며 애틋함을 유지했다.[51] 윈스럽은 성인 자녀들의 이주도 설득하여 존 주니어와 헨리가 동의했지만, 1630년 함대에는 헨리만 승선했다.[52] 윈스럽은 오랜 소유권 분쟁 중이던 그로톤 영지 매각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 1630년 4월 8일, 두 아들 사무엘과 스티븐과 함께 함대의 기함격인 ''아벨라호''를 타고 와이트섬을 출발했다.[55] 이 함대는 총 11척으로 구성되어 약 700명의 이주민을 태우고 있었다.[56] 헨리 윈스럽은 ''아벨라호''를 놓쳐 다른 배인 ''탈봇호''를 탔다.[18][19]
항해 중 혹은 직전에 행해진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도교 자선의 모범(A Modell of Christian Charitie)" 설교는 전통적으로 윈스럽의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 저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57] 이 설교는 청교도 사회의 이상과 신념을 강조하며, 신세계에서의 어려움을 출애굽에 비유했다. 특히 "우리는 산 위의 도시가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의 눈이 우리에게 향하고 있다"는 구절은 유명하며, 공동체의 모범적 역할을 강조했다.[58] 또한 사회에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높은 자와 낮은 자가 공존하며 각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설파했다.[59]
1630년 6월, 함대는 세일럼에 도착하여 존 엔드콧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윈스럽과 부총독 토마스 더들리는 세일럼이 모든 이주민을 수용하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정착지를 물색했다. 처음에는 찰스타운을 고려했으나 물 부족 문제로 쇼무트 반도로 옮겨 보스턴을 건설했다.[60] 늦은 계절 도착으로 인해 이주민들은 보스턴을 중심으로 케임브리지, 록스베리, 도체스터, 워터타운, 메드퍼드, 찰스타운 등지에 분산 정착했다.
초기 식민지는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1630년에만 질병 등으로 윈스럽의 아들 헨리를 포함하여 약 200명이 사망했고, 약 80명은 이듬해 봄 영국으로 돌아갔다.[59][31]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윈스럽은 직접 노동에 참여하며 다른 이들에게 모범을 보였고, 그의 솔선수범은 공동체 전체에 근면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61] 윈스럽은 보스턴에 집을 짓고 상당한 토지를 소유했으며,[62] 1631년에는 미스틱강변에 텐힐즈 농장이라는 더 큰 토지를 받았다.[63] 그는 또한 조선업에도 관여하여 자신의 배 ''베이의 축복''을 건조하고 무역에 활용했다.[64]

식민지 운영 과정에서 윈스럽은 부총독 토마스 더들리와 여러 차례 갈등을 겪었다. 수도 위치 선정 문제(보스턴 vs 뉴타운)와 더들리 자택의 장식에 대한 윈스럽의 비판 등이 원인이었다.[65] 하지만 두 사람의 자녀가 결혼하면서 관계는 회복되었고, 함께 토지를 하사받아 경계를 정하며 형제애를 다졌다는 일화도 전해진다.[66]
식민지 헌장은 총독, 부총독, 18명의 보좌관(총독 자문회의 전신)으로 구성된 정부를 규정했으며, 이들은 자유민에 의해 매년 선출되도록 되어 있었다.[68] 그러나 초기에 소수의 보좌관들은 헌장을 어기고 자신들이 총독과 부총독을 선출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러한 방식으로 윈스럽은 초기에 세 번 총독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자유민의 자격은 지역 교회 회원으로 제한되었다.[69] 윌리엄 로드가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된 후 영국의 종교적 탄압이 심해지자 1633년과 1634년에는 많은 이민자들이 식민지로 유입되었다.[70]
1634년 선거를 앞두고 자유민 대표들은 헌장 열람을 요구했고, 입법권과 총독 및 부총독 선거권이 보좌관이 아닌 자유민 전체에게 있음을 확인했다. 윈스럽은 선거권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다수의 자유민이 직접 입법에 참여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각 마을에서 2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주 의회에 파견하는 타협안이 마련되었다.[71] 아이러니하게도 인민 선거에 비판적이었던 토마스 더들리가 1634년 총독 선거에서 승리했다.[72]
1630년대 후반, 사법 결정의 자의성에 대한 우려로 성문법 제정 요구가 높아졌다. 윈스럽은 관습법 전통을 중시하고 판사의 재량권을 지키려 했으며, 영국법과의 충돌 가능성을 이유로 성문법 제정에 반대하며 이를 지연시켰다.[75][74] 결국 매사추세츠 자유의 헌장은 윈스럽이 총독이 아니던 1641년에 리처드 벨링험 총독 하에서 채택되었다.[75]
1640년대에는 보좌관과 주 의회 간의 권한 다툼이 심화되었다. 도망친 돼지 소유권 분쟁 사건에서 보좌관들은 주 의회의 판결에 거부권을 행사하려 했다. 윈스럽은 경험 많은 엘리트인 보좌관들이 민주적인 주 의회를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민주주의는 대부분의 문명 국가에서 가장 평범하고 최악의 정부 형태"라고 언급하기도 했다.[77]
1645년, 윈스럽은 힝엄 민병대 지휘관 임명 분쟁에 개입하여 관련자들을 투옥시킨 일로 공식적인 비판에 직면했다.[78] 힝엄의 목사 피터 호바트는 윈스럽의 행동을 독단적이고 폭정적이라고 비난했다. 윈스럽은 피고로서 법정에 서서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음을 주장하며 성공적으로 변호했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79][80]
종교적 통제 역시 윈스럽 통치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는 1638년 앤 허친슨을 "미국의 이세벨"이라 부르며 이단 심문을 통해 식민지에서 추방했다.[158] 또한 1647년에는 교회 회원인 자유민에게만 투표권을 제한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청원을 거부하고, 주요 서명자들에게 벌금과 징역형을 선고하는 등 비타협적인 모습을 보였다.[81]
윈스럽은 원주민 부족들에 대해 초기에는 외교적이고 예의 바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치카타보트 추장과의 만남을 기록하며 상호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95] 그러나 토지 문제에 있어서는 무주지(Terra nullius) 개념을 적용하여 원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땅은 식민지 주민들이 차지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97][98] 그는 원주민들이 땅을 "지배"하지 않고 "시민권"도 없으므로,[156] "더 진보된" 문명인 영국인들이 그 땅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했다.[99] 이러한 인식과 문화적 차이, 무역 갈등은 결국 페코트 전쟁(1636-1637)으로 이어졌다. 윈스럽은 존 엔드콧이 이끄는 원정대의 블록 섬 공격 결정을 지지했으며,[100] 로저 윌리엄스를 통해 나라간셋족을 설득하여 페코트족에 맞서도록 했다.[101] 전쟁은 페코트족의 사실상 멸족으로 끝났다.[102]
윈스럽은 총독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선출되었으며, 청교도 공동체 건설이라는 목표를 추구했다. 그는 때때로 과격한 청교도들의 주장을 견제하고 온건한 노선을 취하려 노력하기도 했지만,[158] 전반적으로는 위계질서와 종교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권위적인 통치를 펼쳤다.
윈스럽은 가문의 문장(은색 바탕에 3개의 붉은색 가로줄과 그 위에 검은색 으르렁거리는 사자)을 사용했으며, 이 문장은 그의 묘비와 하버드 대학교 윈스롭관, 딘 윈스롭 하우스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54]
3. 정치 및 종교적 갈등
존 윈스럽은 매우 독실한 신앙심을 가졌으며, 영국 국교회가 카톨릭 의례를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는 청교도 신념을 강하게 따랐다. 그는 신이 이단적인 영국을 심판할 것이라 확신했고,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의 진노를 피해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1629년 초, 윈스럽 가문과 가까운 청교도 상인들이 뉴잉글랜드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뉴잉글랜드 회사"를 설립했다.[154] 이 회사는 같은 해 3월 4일, 찰스 1세로부터 칙허를 받아 "매사추세츠 만 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155] 당시 찰스 1세는 이 식민 사업이 단순한 상업적 투자를 넘어선 종교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윈스럽은 1629년 3월 4일, 부유한 청교도 동료들과 함께 케임브리지 동의서에 서명하며 다음 항해에 직접 참여하여 뉴잉글랜드에 새로운 청교도 식민지를 건설할 것을 약속했다. 이때 그는 식민지의 토지를 아메리카 원주민으로부터 "빼앗는 것"으로 인식했으며, 원주민들이 그 땅을 제대로 "지배"하지 않고 "시민권"도 없다는 논리를 가졌다.[156]
한편, 1624년 제임스 1세가 체서피크 만의 버지니아 회사 특허를 무효화하고 식민지 의회를 해산시킨 사건은 윈스럽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왕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서는 청교도 공동체 건설 계획이 의미 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1629년 7월, 매사추세츠 만 회사의 칙허에는 회사의 소재지에 대한 규정이 없다는 점을 발견했다. 일반적으로 식민 회사의 임원들은 본국에 남아 왕의 감시를 받았지만, 윈스럽은 회사 전체를 신대륙으로 옮기면 청교도 공동체의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157]
윈스럽은 1629년 영국을 떠나기 전에 식민지 총독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연임했다. 총독으로서 그는 청교도 내에서도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하여, 이단에 대한 처형을 최소화하려 노력했으며, 일부 청교도들이 주장했던 여성의 베일 착용과 같은 보수적인 관습을 강요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청교도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통일된 원칙에 기반한 신앙 공동체를 만드는 데 전념했다. 이러한 목표는 앤 허친슨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1638년, 윈스럽은 이단 심문을 주도하여 앤 허친슨을 식민지에서 추방했다. 그는 심문 과정에서 허친슨을 "미국의 이세벨"이라고 부르며 강하게 비판했다.[158] 또한 그는 식민지 주변 원주민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신이 그들에게 질병을 보내 땅을 비우고 자신들에게 권리를 주었다고 믿었다.[159] 이는 윈스럽이 추구했던 종교적 통일성이 때로는 개인의 신앙 해석의 자유와 충돌하고, 나아가 원주민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았음을 보여준다.
3. 1. 원주민과의 관계
윈스롭은 초기 원주민 부족들과의 관계에서 일반적으로 예의 바르고 외교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한 지역 추장인 치카타보트와의 만남을 기록하며, 선물을 교환하고 식사를 함께하는 등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95] 초기 식민지 주민들은 정착한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려 노력하기도 했다.[96]그러나 동시에 식민지 개척자들은 원주민의 토지 소유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무주지terra nullius|테라 눌리우스lat(주인 없는 땅) 개념에 기반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는 원주민들이 특정 시기에만 사냥이나 낚시를 위해 사용하고 영구적인 거주지나 경작지로 삼지 않은 땅을 주인이 없는 땅으로 간주하여 점유하는 방식이었다.[97][98] 역사가 알프레드 A. 케이브에 따르면, 윈스롭은 "더 진보된" 문명인 자신들의 권리가 원주민의 권리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토지 점유를 정당화했다.[99] 윈스럽은 1629년 케임브리지 계약에 서명할 당시부터 식민지의 토지를 원주민에게서 "빼앗는 것"으로 인식했으며, 원주민들이 그 땅을 제대로 "지배"하지 않고 "시민권"도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156] 더 나아가 그는 원주민들 사이에 퍼진 천연두와 같은 질병을 신이 개척자들에게 땅을 주기 위해 내린 심판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는 "신이 이 지역의 원주민을 찾으셨다. 약 482.80km 공간 대부분이 천연두로 일소되었고... 신은 이를 통해 우리에게 이 땅의 권리를 주셨다"고 기록했다.[159]
이러한 인식과 토지 점유 방식의 차이는 결국 충돌로 이어졌다. 페코트 전쟁(1636-1637)은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가 원주민과 벌인 첫 번째 대규모 전쟁이었다. 윈스롭은 존 엔드콧이 이끄는 원정대가 블록 섬의 원주민 마을을 공격하도록 결정한 위원회에 참여했다.[100] 또한 그는 로저 윌리엄스와의 연락을 통해, 페코트족의 오랜 적이었던 나라간셋 부족이 식민지 편에 서도록 설득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101] 전쟁은 1637년 페코트족의 사실상 멸족으로 끝났으며, 생존자들은 다른 부족에 흡수되거나 서인도 제도 등지로 팔려나갔다.[102]
4. 노예 제도
(작성할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 관련 정보가 부재함)
5. 유산
존 윈스롭은 1592년 런던의 문장원에서 그의 아버지의 형제에게 확인된 것으로 알려진 문장을 사용했다. 그의 아들들 또한 이 문장을 사용했으며, 이 문양은 킹스 채플 매장지에 있는 그의 묘비와 하버드 대학교의 윈스롭 하우스, 그리고 그의 막내아들 딘 윈스롭의 1675년 주택인 딘 윈스롭 하우스에도 남아있다. 문장의 공식 설명(Blazon)은 '은색 바탕에 3개의 붉은색 가로줄과 그 위에 검은색 으르렁거리는 사자'이다.[54]
윈스롭은 초기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예의 바르고 외교적인 태도를 취하려 했다. 그는 한 부족장과의 초기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치카타보트가 그의 부하들과 부인들과 함께 와서 총독에게 옥수수 한 통을 선물했습니다. 그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각자 작은 잔으로 포도주와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운 후, 그는 모든 남녀들을 돌려보냈습니다(비와 천둥 때문에 총독은 그들을 머물게 하려 했습니다). 그 자신과 한 여인, 한 부하만 밤새도록 머물렀습니다. 영국식 옷을 입고 있었기에 총독은 그를 자신의 식탁에 앉혔고, 그는 … 영국인처럼 침착하게 행동했습니다. 다음 날 점심 식사 후 그는 집으로 돌아갔고, 총독은 그에게 치즈와 완두콩과 컵, 그리고 다른 작은 물건들을 주었습니다.[95]
초기 식민지 주민들은 점유한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려 했으나,[96] 동시에 '무주지(無主地)'라는 개념을 적용하기도 했다. 이는 특정 용도로 적극적으로 사용되지 않거나, 고정된 거주지, 구조물, 울타리가 없는 땅은 임자 없는 땅으로 간주하여 차지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97][98] 이로 인해 원주민들이 계절적으로만 이용하는(예: 낚시, 사냥) 땅까지 식민지 주민들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가 알프레드 케이브에 따르면, 윈스롭은 "더 진보된" 문명을 가진 사람들의 권리가 원주민들의 권리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했다.[99] 이러한 문화적 차이와 무역 갈등은 결국 충돌로 이어졌고, 페쿼트 전쟁은 식민지가 참여한 첫 주요 분쟁이 되었다. 윈스롭은 존 엔데콧이 이끄는 원정대가 블록 섬의 원주민 마을을 습격하도록 결정한 회의에 참여했으며,[100] 로저 윌리엄스와의 소통을 통해 나라간셋족이 페쿼트족에 맞서 식민지 편에 서도록 설득하는 데 기여했다.[101] 전쟁은 1637년 페쿼트족의 사실상 해체로 끝났고, 생존자들은 다른 부족에 흡수되거나 서인도 제도로 보내졌다.[102]
식민지 정부에서의 역할 외에도 윈스롭은 상당한 부동산을 소유했다. 그는 텐 힐스 농장, 빌리카 마을이 된 땅, 보스턴 항구의 거버너스 아일랜드 (매사추세츠주)(현재 로건 국제공항 부지의 일부), 나라간셋 만의 프루던스 섬 등을 소유했다.[112] 또한 윌리엄 핀촌과 협력하여 '블레싱 오브 더 베이(Blessing of the Bay)'호를 이용한 모피 무역에도 관여했다.[113] 거버너스 아일랜드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1808년 윈스럽 요새 건설을 위해 정부에 매각될 때까지 윈스럽 가문의 소유였다.[114] 하지만 텐 힐스 농장은 관리인의 재정적 문제와 윈스롭 자신의 부실 관리로 어려움을 겪었고, 이로 인해 윈스롭은 재정 위기에 처했다. 식민지 정부는 과거 그가 거절했던 봉급과 공무 수행 경비를 지급하기로 결정했고, 약 500GBP의 사적인 기부금이 모금되었으며, 그의 아내에게는 3000acre의 토지가 부여되기도 했다.[115]
윈스롭의 아내 마거릿은 1631년 '라이온(Lyon)'호의 두 번째 항해로 매사추세츠에 도착했으나, 그들의 딸 앤은 항해 중 사망했다. 마거릿과의 사이에서 뉴잉글랜드에서 두 명의 자녀를 더 두었으며, 그녀는 1647년 6월 14일에 사망했다.[116][117] 윈스롭은 1647년 12월 20일 이후, 네 번째 아내인 마사 레인즈버러와 결혼했다. 그녀는 토머스 코이트모어의 미망인이자 토머스 레인즈버러와 윌리엄 레인즈버러의 여동생이었다.[118] 윈스롭은 1649년 3월 26일 사망하여 보스턴의 킹스 채플 매장지에 묻혔다.[119] 그는 아내 마사와 다섯 명의 아들을 남겼다.[120]
윈스롭은 "기독교 자선 모형"이라는 설교와 그 안에 담긴 "산 위의 도시"라는 비유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 이미지는 미국 정치 담론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133] 이 설교는 청교도 이주민들이 신과 특별한 계약을 맺고 신성한 사회를 건설할 의무가 있음을 선언했으며, 미국 예외주의 개념의 선구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를 돌봐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설교는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19세기까지 인쇄되지 않고 원고 형태로만 전해졌다. 당시 청교도들의 일반적인 믿음을 반복한 것일 뿐, 새로운 사상을 제시한 것은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 윈스롭은 또한 이주민들이 영국 왕실과 교회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하고 물리적 거리감을 변호하기 위해 "뉴잉글랜드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과 질서 선언(A Declaration of the Faith and Order, observed in the Churches of Christ, in New England)" (1630년, 런던)을 출판했다.
윈스롭의 사상은 후대 정치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존 F. 케네디, 로널드 레이건, 마이클 두카키스, 사라 페일린 등 많은 현대 정치인들이 그의 글을 인용했다.[137][138] 특히 레이건은 윈스롭을 "초기의 '자유인(Freedom Man)'"으로 묘사하며 그가 "자유로운 고향"을 찾아 미국에 왔다고 언급했다.[139] 그러나 윈스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조차 그의 강한 반민주주의적 성향에는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는 "만약 우리가 혼합된 귀족 정치에서 단순한 민주주의로 바꾼다면, 성서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민주주의는 문명국 중에서 가장 통제하기 어렵고 최악의 정부 형태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60]
윈스롭은 1645년 연설에서 두 종류의 자유, 즉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연적 자유(악 포함)와 선을 행할 수 있는 시민적 자유를 구분했다. 그는 자연적 자유는 억제되어야 하며, 시민적 자유야말로 "권위의 적절한 목적과 대상"이라고 믿었다. 이는 정부의 역할이 일반 복지 증진보다는 국민을 위해 희생하고 정의를 증진하는 데 있다고 본 것이다.[135] 그는 가장이 자녀와 하인의 교육을 책임지도록 하고 공적 자금으로 교사를 지원하는 법률 제정 등을 통해 이러한 신념을 실천했다.[59] 그의 행동은 식민지의 통합을 최우선으로 여겼으며, 앤 허친슨의 경우처럼 분열을 초래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59] 그럼에도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지도자였으며, 그의 조치로 무장 해제되었던 리처드 더머조차 그에게 100GBP를 기부하기도 했다.[136]
윈스롭은 캐서린 세드윅의 1827년 소설 희망 레슬리와 내서니얼 호손의 주홍 글씨("목사의 철야" 장)에도 등장한다.[140][141]
그의 후손은 오늘날 수천 명에 이르며, 여기에는 전 국무장관 존 케리, 교육자 찰스 윌리엄 엘리엇, 다운튼 애비 제작자 줄리안 펠로우스, 전 대통령 조지 W. 부시 등이 포함된다.[142] 매사추세츠주 윈스럽과 메인주 윈스럽 마을,[143][144] 하버드 대학교의 윈스롭 하우스, 보든 칼리지의 윈스롭 홀[145] 등은 그와 그의 후손인 존 윈스럽 (교육자)(하버드 총장 역임)[146]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보스턴(도심, 찰스타운), 케임브리지, 브루클라인의 광장 이름에도 그의 이름이 사용되었다. 보스턴 워터 스트리트의 윈스롭 빌딩은 그의 집터 중 한 곳에 세워졌으며, 도시 최초의 고층 건물 중 하나이다.[147] 뉴욕 미네올라의 NYU 랭곤 병원은 1986년부터 윈스롭의 후손이자 병원의 오랜 후원자인 로버트 윈스롭의 이름을 따 윈스롭 병원으로 불렸다.[148]
리처드 살톤스톨 그리누가 제작한 윈스롭의 동상은 매사추세츠주를 대표하는 두 개의 동상 중 하나로 워싱턴 D.C. 미국 국회의사당의 국립 조각상 홀에 있다.[149] 초기 미국 시인 벤저민 톰프슨은 윈스롭의 사망 직후 그를 기리는 장례 애가를 썼으며, 이는 1676년 그의 작품 ''뉴잉글랜드의 눈물(New-Englands Tears)''에 실렸다.[150]
6. 저서
존 윈스럽은 평생 역사적 사건과 종교적 경험에 대한 기록을 꾸준히 남겼으나, 그의 저작 대부분은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고 문학적 기여는 당대에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128] 전기 작가 프랜시스 브레머에 따르면, 윈스롭의 글쓰기는 다른 청교도 저술가들처럼 "사건 속에서 신성한 패턴을 찾아내고,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스스로 맡아야 한다고 믿었던 역할을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128]
윈스롭의 가장 잘 알려진 저작은 "언덕 위의 도시(A City upon a Hill)"라는 구절로 유명한 설교 "그리스도교 사랑의 모형(A Model of Christian Charity)"이다. 이 설교는 1630년경 신세계로 향하는 배 위에서 행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청교도 이주민들이 신과 특별한 계약을 맺어 신성한 공동체를 건설할 사명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미국 예외주의 사상의 중요한 뿌리로 여겨진다. 또한,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를 돌봐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음을 역설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설교는 당시 청교도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생각을 반복한 것일 뿐, 특별히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아 당대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글은 19세기까지 인쇄되지 않고 필사본 형태로만 전해졌다. 현대 미국의 정치인 로널드 레이건 등이 윈스롭의 이 설교를 인용하며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지만, 윈스롭의 강력한 반민주주의적 성향은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그는 "만약 우리가 혼합된 귀족 정치에서 단순한 민주주의로 바꾼다면, 그것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 민주주의는 문명국 중에서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최악의 정부 형태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60]
윈스롭의 가장 중요한 역사 기록물은 "뉴잉글랜드의 역사(The History of New England from 1630 to 1649)"로, 이는 "존 윈스롭의 일기(John Winthrop's Journal)"로도 알려져 있다. 이 기록은 1630년 대서양 횡단 항해에서 시작하여 1649년까지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에서의 삶과 경험을 담고 있으며, 세 권의 노트에 작성되었다. 초기에는 항해 일지처럼 거의 매일 기록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록 빈도는 줄어들고 내용은 더 상세해져 점차 역사서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124] 일기에는 영국에서의 여정, 가족의 도착, 아들의 출생과 같은 개인적인 사건뿐만 아니라,[125] 식민지의 정치, 종교, 사회 전반에 걸친 중요한 사건들과 그에 대한 윈스롭의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이는 "1630년대와 1640년대 매사추세츠 역사의 중심 자료"로 평가받는다.[121] 첫 두 권은 1790년 노아 웹스터에 의해 처음 출판되었고, 오랫동안 분실되었던 세 번째 권이 1816년에 발견되어 1825년과 1826년에 제임스 세이비지가 전체 내용을 편집하여 출판했다. 현재 원본 두 권은 매사추세츠 역사협회에 보관되어 있다.[122]
윈스롭이 처음으로 출판한 글은 "그의 전하의 충성스러운 신민들의 겸손한 요청(The Humble Request of His Majesties Loyall Subjects)"(런던, 1630)으로 추정된다. 이 글은 청교도 이주민들이 물리적으로 영국을 떠나는 것을 변호하면서도 영국 왕실과 영국 국교회에 대한 충성심을 재확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글은 1696년 조슈아 스코토가 편집한 책 ''매사추세츠: 또는 뉴잉글랜드의 최초 정착민들, 그들이 거기에 온 목적과 방식, 그리고 거기에 머문 기간: 여러 편지들''에 다시 실렸다.[127]
1636년에서 1637년 사이에 벌어진 앤티노미안 논쟁을 다룬 "앤티노미아니즘, 가족주의자, 그리고 뉴잉글랜드 교회들을 감염시킨 자유주의자들의 부상, 통치, 그리고 몰락에 관한 단편 이야기(A Short Story of the Rise, Reign, and Ruin of the Antinomians, Familists and Libertines)"는 1644년 런던에서 출판되었다.[130] 이 책은 앤 허치슨을 비롯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논쟁의 경과를 서술했다. 출판 당시 영국에서는 교회 통치 방식에 대한 논쟁이 활발했고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회의가 진행 중이었는데, 이 책은 회중주의 지지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반대자들에게는 그 결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되었다.[131] 일부 판본에서는 논쟁 당시 주요 인물이었으나 이후 독립파 정치 지도자가 된 헨리 베인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내용이 각색되기도 했다.[132]
이 외에도 윈스롭은 "Experiencia"로 알려진 사적인 종교 일기를 남겼다. 1607년부터 1637년까지 간헐적으로 기록된 이 일기는 그의 개인적인 신앙 경험과 성찰을 담고 있으며, 공적인 기록인 "일기"와는 다른 고백적인 성격을 띤다.[128][129]
존 윈스럽의 편지들 또한 그의 사상과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페리 밀러의 저서 <청교도들> 465쪽 참조)
7. 같이 보기
- 잉글랜드 내전
- 아카디아 내전
-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 아카디아
- 청교도
- 샤를 드 생테티엔 드 라 투르
- 샤를 드 메누 도르뇌
- 존 엔드코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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