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W. 맥코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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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W. 맥코맥은 1891년 보스턴에서 태어나 1980년 사망한 미국의 정치인이다. 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 상원의원을 거쳐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1928년부터 1971년까지 미국 하원 의원으로 재임했다. 그는 1962년부터 1971년까지 하원 의장을 역임했으며, 뉴딜 정책 지지, 베트남 전쟁 관련 논쟁 등 다양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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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W. 맥코맥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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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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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91년 12월 21일 |
출생지 |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
사망일 | 1980년 11월 22일 |
사망지 | 미국 매사추세츠주 데덤 |
안장지 | 웨스트록스베리 성 요셉 묘지 |
정당 | 미국 민주당 |
배우자 | 해리엇 조이스 (1920년 결혼, 1971년 사별) |
친척 | 에드워드 J. 맥코맥 주니어 (조카) |
정치 경력 | |
매사추세츠 주 하원 의원 | 선거구: 매사추세츠주 하원 제11 서퍽 선거구 임기 시작: 1920년 임기 종료: 1922년 |
매사추세츠 주 상원 의원 | 선거구: 서퍽 제3 선거구 임기 시작: 1923년 임기 종료: 1928년 |
미국 하원 의원 | 선거구: 매사추세츠주 제12 하원 선거구(1928–1963), 매사추세츠주 제9 하원 선거구(1963–1971) 임기 시작: 1928년 11월 6일 임기 종료: 1971년 1월 3일 |
미국 하원 원내총무 | 소수당 원내총무: 1947년 1월 3일 ~ 1949년 1월 3일, 1953년 1월 3일 ~ 1955년 1월 3일 다수당 원내총무: 1940년 9월 16일 ~ 1947년 1월 3일, 1949년 1월 3일 ~ 1953년 1월 3일, 1955년 1월 3일 ~ 1962년 1월 10일 |
하원 민주당 코커스 대표 | 임기 시작: 1962년 1월 10일 임기 종료: 1971년 1월 3일 |
미국 하원 의장 | 임기 시작: 1962년 1월 10일 임기 종료: 1971년 1월 3일 |
군 복무 | |
소속 | 미국 육군 |
복무 년도 | 1918년 |
계급 | 원사 |
부대 | 제151군수여단 제14중대, 캠프 리, 버지니아 보병 대체 센터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2. 생애
존 W. 맥코맥은 1891년 12월 21일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벽돌 운반공이자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출신인 조셉 H. 맥코맥이고, 어머니는 보스턴 출신인 메리 엘렌(née O'Brien) 맥코맥(1861–1913)이다. 그는 12명의 자녀 중 한 명이었으며, 그 중 몇 명은 어린 시절 또는 청년기에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맥코맥은 8학년까지 존 앨비언 앤드루 문법 학교에 다녔다. 그는 그 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처음에는 증권 회사에서 심부름꾼으로 주 3USD(2021년 약 95USD)를 받으며 일했다. 맥코맥과 그의 형제들은 또한 주 11USD(2021년 약 347USD)를 받으며 대규모 신문 배달 노선을 관리했다. 그는 나중에 증권 회사를 떠나 변호사 윌리엄 T. 웨이의 사무실로 옮겨 주 50센트의 임금 인상을 받았다. 그는 웨이와 함께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21세에 매사추세츠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으며,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그는 또한 엘크 자선 및 보호 기구의 활발한 회원이었다.[1]
어린 시절 맥코맥은 지역 민주당 후보를 위한 선거 연설을 하면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17년 5월, 맥코맥은 매사추세츠 헌법 회의의 구성원으로 선출되어 매사추세츠 하원의 제11 서퍽 지역구를 대표하게 되었다.
1918년 6월, 맥코맥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미국 육군에 입대했고, 처음에는 매사추세츠주 캠프 데번스의 제151 보충 여단 제14 중대원으로 배치되었다. 초기 훈련을 마친 후 맥코맥은 장교 훈련을 받기 위해 버지니아주 캠프 리의 보병 보충 센터에 배정되었다. 맥코맥은 사병에서 원사까지 진급했으며, 장교 훈련 학교에서 훈련을 받던 중 휴전이 발발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11월 말에 제대했다.
전쟁 후 맥코맥은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치 경력을 재개했다. 그는 곧 주 의회에 진출하여 1920년부터 1922년까지 매사추세츠 하원에서 제11 서퍽 선거구를 대표했고, 1923년부터 1926년까지 매사추세츠 상원에서 활동했으며, 1925년과 1926년에는 민주당 원내대표를 역임했다. 1926년에는 당시 현직 하원의원인 제임스 A. 갤리번을 상대로 예비 선거에 출마했지만 실패했다. 맥코맥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인상을 남겨, 이후 선거에서 유리한 입지를 다졌다. 그는 변호사 활동을 재개하여 성공적인 소송 변호사 경력을 쌓았고, 연간 30000USD(2016년 기준 약 40만달러)에 달하는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맥코맥은 은퇴할 때까지 1920년부터 모든 매사추세츠 민주당 전당대회 대표로 선출되었다. 또한 그는 1932년 민주당 전당대회, 1940년 민주당 전당대회, 1944년 민주당 전당대회, 1948년 민주당 전당대회 대표이기도 했다.
맥코맥이 다시 하원 의원에 출마할 기회는 1928년 갤리번이 사망한 후 찾아왔다. 그해 11월 맥코맥은 갤리번의 임기를 채우기 위한 특별 선거와 정규 임기를 위한 일반 선거에서 모두 승리했다.
2. 1. 어린 시절
존 맥코맥은 1891년 12월 21일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태어났다.[6] 아버지는 캐나다 프린스에드워드섬 출신 벽돌운반공인 조셉 H. 맥코맥이고, 어머니는 보스턴 출신인 매리 엘런 맥코맥(결혼 전 성씨 오브라이언, 1861-1913)이다. 맥코맥은 12명의 자식 중 하나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8명의 아이를 임신했고 이 중 6명이 인구 조사 기록이나 기타 행정기록에 남을 만큼 충분히 오래 살았다.맥코맥의 형제자매들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 패트릭 (1911년, 24세 사망)
- 캐서린 (1906년, 19세 사망)
- 제임스 (1906년, 17세 사망)
- 에드워드 ('녹코', 1963년, 67세 사망)
- 도널드 (1966년, 65세 사망)
- 해리 (이복형제, 1902년, 18세 사망)
맥코맥은 자신의 아버지가 13세였던 시절 죽었다고 말했지만, 다른 자료들에 따르면 아버지는 가족과 별거해 메인주의 왈도버로의 마을 화강암 채석장에서 근무했다고 나와 있다. 조셉 맥코맥은 1929년 사망했고 왈도버로 외곽 집단묘지에 있는 극빈자 묘지에 묻혔다.
존 맥코맥은 8학년까지 존 앨비언 앤드류 중등학교를 다녔다.[6] 이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학교를 자퇴하고 처음에는 주급 3USD(2021년 기준 약 95USD 가치)를 받는 중개회사의 심부름꾼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맥코맥과 형제들은 주급 11USD(2021년 기준 약 347USD 가치)를 받고 신문사에서 신문 배달 일도 했다. 이후 맥코맥은 중개회사를 나와 윌리엄 T. 웨이 변호사실에 취업해 주급 50센트를 더 받았다. 맥코맥은 웨이와 함께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21세의 나이에 매사추세츠주 변호사 시험을 합격하여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나오지 않았음에도 변호사가 되는데 성공했다.[6] 맥코맥은 엘크 공제보호조합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1]
2. 2. 정계 입문
젊은 시절 존 맥코맥은 지역 민주당 후보를 대표하여 선거 찬조연설을 하기 시작하며 정계에 발을 딛기 시작했다.[1] 1917년 5월, 맥코맥은 매사추세츠주 하원 서퍽 제11하원구를 대표해 1917-1918년 매사추세츠주 헌법개정단의 구성원으로 선출되었다.[2][3]2. 3. 제1차 세계 대전
1918년 6월 존 맥코맥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미국 육군에 입대해 매사추세츠주 포트데번즈에 있는 제152군수연대 제14중대에 편입했다.[1] 입대 훈련을 마친 맥코맥은 버지니아주 포트 리의 보병 보충대로 넘어가 장교 훈련을 받았다.[2] 맥코맥은 이등병에서 원사로 진급했고 1차 대전 휴전 전까지 포트 리에 있는 장교후보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다.[2] 맥코맥은 종전 후인 1918년 11월 말 제대했다.[1][2]2. 4. 정계 복귀
전후 존 맥코맥은 법조인 경력을 쌓으며 정계에 복귀했다.[1] 1920년부터 1922년까지 매사추세츠주 하원 제11 서퍽 하원구 지역구 의원을,[2] 1923년부터 1926년까지 매사추세츠주 상원 의원을 지냈으며, 1925년부터 1926년까지는 매사추세츠주 민주당 원내총무직을 겸임했다.[1] 1926년 제임스 A. 걸리번을 상대로 경선에 도전했으나 패배했다.[1] 하지만 이 경선 과정에서 좋은 인상을 남겨 이후 경선에서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1] 이후 변호사로 복귀, 소송 변호사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 연간 30000USD(2016년 기준 약 400000USD)의 수입을 올렸다.[1]
맥코맥은 1920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매사추세츠주 민주당 전당대회 대의원을 지냈다.[3] 또한 1932년, 1940년, 1944년, 194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대의원으로 참여했다.[3]
2. 5. 의회 경력
1928년 매사추세츠주 출신 하원의원 제임스 앤드루 갤리번이 사망하자, 맥코맥은 미국 하원 선거에 출마할 기회를 얻었다. 그해 11월, 맥코맥은 갤리번의 잔여 임기를 채우기 위한 특별선거와 정규 임기를 위한 총선거에서 모두 승리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 제12하원구에서 처음 하원 의원 생활을 시작했고, 1963년 선거구 재조정 이후에는 매사추세츠주 제9하원구에서 활동하며 총 20번이나 재선에 성공했다. 맥코맥은 1928년 11월 6일 제70대 미국 의회부터 1971년 1월 3일 제91대 미국 의회까지 하원의원으로 재직했으며, 1970년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고 정계에서 은퇴했다.[3]맥코맥은 의회 경력 초기에는 영토 위원회에서, 두 번째 임기에는 하원의장 존 낸스 가너의 지지로 세입 위원회에 합류하여 1941년까지 활동했다. 그는 뉴딜 정책을 지지하는 등 진보적인 투표 성향을 보였으며, 1934년에는 맥코맥-딕스타인 위원회 의장을 맡아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공산주의 및 나치즘 선전 활동을 조사했다.[2][3]
1940년 샘 레이번이 하원의장이 되면서 맥코맥을 원내대표로 지지했고, 맥코맥은 클리프턴 A. 우드럼을 꺾고 원내대표가 되었다. 이후 21년 동안 맥코맥은 하원 민주당 서열 2위로서, 민주당이 다수당일 때는 원내대표, 공화당이 다수당일 때는 원내부총무를 역임했다.
그는 진주만 공격 직전 군 징병제 연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1][6] 제85대 미국 의회(1957~1959년)에서는 우주 항공 및 우주 탐사 특별 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미국 항공우주국(NASA) 설립 법안을 발의하고 통과시켰다.
맥코맥은 1957년 시민권법과 1960년 시민권법에 찬성표를 던졌으나, 1960년 4월 21일에 열린 법안에 대한 상원 수정안 표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4][5]

1961년 11월 레이번이 사망한 후, 맥코맥은 1962년 초 하원의장으로 선출되어 1971년 은퇴할 때까지 재임했다. 맥코맥의 하원의장 임기 동안 린든 B. 존슨 행정부의 그레이트 소사이어티 입법안(시민권, 공공 교육 접근성 확대, 노인 의료 관련 법안 등)이 하원을 통과했다.[2]
맥코맥은 하원의장으로 선출된 최초의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의 종교가 리더십에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도 있었다. 1961년 학교 연방 지원 논쟁에서 교회 학교 포함을 주장하여 법안이 부결되었으나, 1963년 입장을 바꿔 공립 학교 지원 법안 통과를 이끌었다.[2]
맥코맥 임기 후반부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논쟁이 심화되었다. 하원 의원들은 맥코맥의 강점으로 개인적인 배려를, 약점으로 연공서열 제도를 꼽았다. 그는 "내 지역구 전체에 꽃 화분이 다섯 개 이상 없다"고 말하는 등 지역구보다는 국가적 의제를 추구했다.[2]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1963년 11월 22일)과 휴버트 험프리의 미국의 부통령 취임(1965년 1월 20일) 사이, 맥코맥은 미국 대통령 승계 순위 1위로 미국 비밀경호국의 보호를 받았다.[3]
1969년 모리스 유달 하원의원이 맥코맥을 하원의장에서 물러나게 하려 했고, 1970년에는 여러 하원 의원들이 맥코맥의 나이를 이유로 사임을 촉구했다. 제롬 R. 왈디 하원의원은 당 회의에 불신임 선언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맥코맥은 1970년 초 재선 포기를 결정하고 5월에 발표했다. 1971년 루이스 데이 힉스가 하원의원직을, 칼 앨버트가 하원의장직을 승계했다.[4][5][6]
2. 5. 1. 하원의원 초기
맥코맥은 처음으로 하원의원에 재임했을 때 국토위원회 소속으로 일했으며,[1] 2선 시절에는 당시 하원 의장이었던 존 낸스 가너의 지원으로 강력한 권한을 가진 세입위원회 소속으로 들어가 1941년까지 세입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했다.[2]맥코맥은 하원의원 재임 기간 뉴딜 정책을 지지하는 등 지속적으로 진보 정책을 지지했다.[2] 1934년에는 맥코맥-딕슈타인 위원회로도 알려진 비미 활동 특별위원회의 의장직으로 활동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미국 내 공산주의와 나치즘 선전 및 이념활동을 조사했다.[2][3]
2. 5. 2. 하원 지도부
1940년 샘 레이번이 하원 의장이 되자 레이번은 맥코맥을 다수당 원내대표로 적극 지원했고, 맥코맥은 클리프턴 A. 우드럼을 꺾고 다수당 지도부에 올랐다. 이후 21년간 맥코맥은 하원에서 미국 민주당 서열 2위로, 민주당이 다수당이었던 1939-1947년, 1951-1953년, 1955-1961년에는 레이번 하원 의장과 함께 다수당 원내대표를 지냈고, 민주당이 소수당이었던 1947-1949년, 1953-1955년에는 레이번 소수당 원내대표와 함께 소수당 원내총무를 지냈다.공산주의와 나치즘에 확고하게 반대했던 맥코맥은 진주만 공격 직전 미국 고립주의 정서가 강했고 제2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에 대한 반대 여론이 많았던 시기에 미국 징병법 연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6]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제85대 미국 의회에서 "우주비행 및 우주 탐험에 관한 특별위원회" 의장을 지낸 맥코맥은 미국 항공 우주국(NASA) 설립 법률을 제정하고 통과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맥코맥은 1957년 시민권법에 찬성표를 던졌고,[2][3] 1960년 3월 24일 1960년 시민권법에 대한 최초의 하원 결의안에는 찬성했지만,[4] 1960년 4월 21일 법안에 대한 상원 수정안 표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5]
2. 5. 3. 하원 의장 시절
1961년 1월 샘 레이번 의장이 사망하자 맥코맥은 1962년 초 하원의원 선거 전까지 하원 의장 대행직을 맡았으며, 이후 1962년 1월부터 정식으로 미국 하원 의장에 취임해 1971년 하원에서 은퇴할 때까지 하원 의장직을 지냈다.[1] 맥코맥의 9년간 하원 의장 재임 기간 동안 의회의 주요 의제는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정책으로, 민권 확대 법안, 공교육 확대 법안, 노인 대상 의료관리법 등이 있었다.[2]맥코맥은 하원 의장으로 선출된 최초의 로마 가톨릭 신자였고, 일부 정치 비평가들은 그의 종교가 때때로 정치 지도력에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2] 예를 들어 1961년 연방정부의 학교 지원에 관한 토론에서 맥코맥은 교회 산하 학교도 지원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로 인해 종교학교 지원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로 법안이 불발되기도 했다.[2] 1963년 맥코맥은 자신의 입장을 바꿔 공립학교 지원에 집중하는 학교원조법 통과를 이끌었다.[2]

맥코맥의 하원 의장 임기 후반부는 그가 지지했던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논쟁이 주를 이루었다.[2] 맥코맥의 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고, 주변 사람들은 그를 마치 제멋대로인 젊은 가족에게 지혜와 통찰을 주려는 친절한 어른처럼 묘사하기도 했다.[2] 하원 의원들은 맥코맥의 장점으로 의원 개개인에 대한 배려심을 꼽았으며, 이러한 배려심이 의원들로 하여금 그의 애정에 보답하고 그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고 말했다.[2] 반면, 맥코맥의 약점으로는 연공서열제로 인해 의회 내에서 큰 권력을 가진 각 위원회 의장들이 생겨났지만, 의장의 리더십으로 이들을 통제하기 어려웠다는 점이 지적되었다.[2] 맥코맥은 하원 의장으로서 전국가적 의제를 다루는 것을 추구했으며, 농장법 통과를 위해 노력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내 지역구 전체에 화분이 5개가 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등 지역구 의제와는 거리가 있었다.[2]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1963년 11월 22일 암살당하고 휴버트 험프리가 미국의 부통령으로 취임한 1965년 1월 20일 사이, 맥코맥은 미국 대통령 계승순위 1위였기 때문에 미국 비밀임무국의 엄중한 경호를 받았다.[3]

1969년 1월, 애리조나주 하원 의원이었던 모 유돌이 맥코맥을 하원 의장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시도했다.[2] 1970년에는 맥코맥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 거세졌고, 일부 의원들은 78세라는 나이를 이유로 맥코맥에게 하원 의장직 사임을 촉구했다.[4] 캘리포니아주 하원 의원 제롬 R. 왈디는 민주당 코커스에서 맥코맥 지도부에 대한 불신임을 선언할 것을 요구했지만, 당 지도부는 이를 거부했다.[4] 맥코맥은 1970년 초 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나, 이 결정을 비밀로 유지하다가 5월에 이르러서야 공개했다.[4] 이후 맥코맥의 지역구 하원 의원직은 루이스 데이 힉스가,[5] 하원 의장직은 카를 알버트가 승계했다.[6]
2. 6. 은퇴와 노년
은퇴 이후 맥코맥은 보스턴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1980년 11월 22일, 맥코맥은 데드햄의 한 요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 웨스트 록스버리에 있는 세인트 조셉 묘지에 묻혔다.[1]
3. 유산
1983년 매사추세츠 대학교 보스턴에 존 W. 맥코맥 공공문제연구소가 설립되었다.[1] 1985년에는 이 대학교에 맥코맥을 기리는 의미에서 "존 W. 맥코맥 홀"이 지어졌다.[2] 2003년에는 맥코맥 공공문제연구소가 대학원으로 확대되었다.[3] 2010년에는 대학교의 목표가 다시 확대되면서 맥코맥 정책 및 글로벌 연구 대학원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3] 맥코맥 대학원의 현재 목표는 사회 정의, 정부의 책임과 투명성 강화, 민주주의 제도의 강화 연구를 포함하고 있다.[3]
1930년대 초 보스턴에 지어진 존 W. 맥코맥 우체국 및 법원은 맥코맥을 기리는 의미에서 맥코맥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4] 1998년 보스턴 랜드마크 위원회는 맥코맥 우체국 및 법원 건물을 보스턴 랜드마크로 지정했고, 2011년에는 미국 국립사적지로 지정되었다.[5]
매사추세츠주 도체스터에 있는 "존 W. 맥코맥 중학교"도 맥코맥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4]
보스턴에 있는 매사추세츠주 주청사 역시 맥코맥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6]
4. 가족
1920년, 맥코맥은 마거릿 해리엇 조이스와 결혼했다. 해리엇 조이스는 맥코맥보다 7살 연상이었고 오페라 가수로 활동했으나 결혼 이후 이 꿈을 접었다.[2] 맥코맥 부부는 자녀가 없었다.[2] 의회가 개회되는 동안에는 워싱턴 호텔에서 거주했다.[2] 맥코맥의 친구와 동료들은 맥코맥이 아무리 늦게까지 일해도 저녁을 부부가 같이 먹었으며, 하룻밤을 언제나 따로 보낸 적이 없었다며 부부 사이가 매우 돈독했다고 말했다.[2] 맥코맥 부부는 둘 모두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며, 맥코맥은 콜럼버스 기사단에 속해 있었다.[3] 부부 모두 교회를 대표해 큰 영예와 업적을 남긴 공로로 바티칸에게 수훈도 받았다.[4] 1971년 12월 아내 해리엇 맥코맥은 87세의 나이로 병상에서 사망했다.[4][2] 맥코맥은 1년 넘게 매일 밤 병상 옆에서 같이 지냈다고 한다.[4]
맥코맥의 형 에드워드의 아들인 에드워드 J. 맥코맥 주니어는 1958년부터 1963년까지 매사추세츠주 검찰총장직을 지냈다.[5] 에드워드 맥코맥 주니어는 1962년 미국 상원 매사추세츠주 특별선거에서 민주당 경선에 출마했으나 테드 케네디에 밀려 떨어졌고, 1966년에는 매사추세츠주 주지사 선거에 나섰으나 매사추세츠 주지사에 낙선되었다.[5]
5. 역대 선거 결과
참조
[1]
웹사이트
Congressional Record
https://books.google[...]
2022-08-30
[2]
간행물
House – June 18, 1957
https://www.govinfo.[...]
United States Government Publishing Office
2022-02-27
[3]
간행물
House – August 27, 1957
https://www.govinfo.[...]
United States Government Publishing Office
2022-02-27
[4]
간행물
House – March 24, 1960
https://www.govinfo.[...]
United States Government Publishing Office
2022-02-27
[5]
간행물
House – April 21,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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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States Government Publishing Office
202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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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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