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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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숙보는 중국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다. 553년에 태어나 진욱과 유경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문학을 좋아했으나, 통치자로서 무능하여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수나라의 침공으로 진나라는 멸망했고, 진숙보는 포로로 잡혀 수나라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시인으로서의 재능은 인정받았으나, 무능한 군주로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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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숙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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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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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진숙보(陳叔寶) |
자 | 원수(元秀) |
아명 | 황노(黃奴) |
묘호 | 없음 |
시호 | 장성양공(長城煬公) (수나라 장성현공으로서) |
왕조 | |
왕조 | 진 |
재위 기간 | |
재위 기간 | 582년 2월 20일 ~ 589년 2월 10일 |
즉위 | 태건 14년 1월 13일 |
퇴위 | 정명 3년 음력 1월 20일 |
연호 | 지덕(至德): 583년 ~ 586년 정명(禎明): 587년 ~ 589년 |
출생 및 사망 | |
출생일 | 553년 12월 10일 |
출생 (간지) | 양 승성 2년 11월 20일 |
사망일 | 604년 12월 16일 (51세) |
사망 (간지) | 수 인수 4년 11월 20일 |
가족 관계 | |
부친 | 선제(宣帝) 진욱(陳頊) |
모친 | 유황후(柳皇后) |
배우자 | 심황후(沈皇后) |
2. 생애
553년 강릉에서 진욱(陳頊)과 유경언(柳敬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서위의 침공으로 아버지는 장안으로 끌려가고 어머니와 함께 양성(穰城)에 숨어 지내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562년 아버지 진욱이 진(陳)으로 귀국하면서 건강으로 돌아와 안성왕 세자가 되었고, 569년 아버지가 선제로 즉위하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황태자 시절에는 문학을 좋아하고 연회를 즐겼다고 알려져 있다.
582년, 선제가 병사하자 이복동생 진숙릉(陳叔陵)이 황위를 노리고 쿠데타를 일으켜 진숙보를 칼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진숙보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나 진숙견(陳叔堅)과 소마하(蕭摩訶) 등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그러나 즉위 후 목 부상과 사치스러운 성향으로 인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그는 장려화(張麗華), 공씨(龔氏) 귀빈 등 후궁들과 공범(孔範), 시문경(施文慶) 등 측근 문사들에게 둘러싸여 밤낮으로 연회를 즐기고 호화로운 궁궐 건축에 몰두했다. 이로 인해 국정은 문란해졌고, 측근과 환관들이 권력을 남용하며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충언을 하는 신하들은 처벌받거나 살해당했으며, 국방력은 약화되었다.
이러한 실정 속에서 북방의 수나라는 수 문제 양견의 주도 하에 착실히 남진 준비를 하고 있었다. 588년, 수나라가 대규모 침공을 시작했으나 진숙보와 조정은 현실을 외면하고 제대로 된 대비를 하지 않았다. 589년 수나라 군대가 장강을 건너 수도 건강을 함락하자, 진숙보는 장려화, 공씨 귀빈과 함께 우물에 숨었다가 발각되어 사로잡혔다. 이로써 진나라는 멸망했다.
진숙보는 진나라 황족들과 함께 수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망국의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술에 빠져 지냈으며, 수 문제는 그에게 별다른 관직을 주지 않았다. 604년 낙양에서 5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망산에 묻혔다. 사후 수 양제 양광에 의해 대장군·장성공으로 추증되었고, '여자를 좋아하고 예를 멀리한다'는 의미의 '''양'''(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1. 초기 생애와 황태자 시절
553년 11월, 강릉에서 진욱(陳頊)과 유경언(柳敬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 진욱은 양(梁) 원제 휘하의 중간급 관리였다. 554년, 서위가 강릉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원제를 처형하자, 아버지 진욱은 장안으로 끌려갔고, 진숙보는 어머니 유씨와 함께 양성(穰城, 현재 허난성 난양시)에 남겨졌다.557년, 진숙보의 종조부이자 진욱의 숙부인 진패선이 진(陳)을 건국하고 무제가 되었다. 무제는 북주(서위의 후신)에 진욱의 송환을 요청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559년 무제가 사망하고 진욱의 형인 문제가 즉위했다. 562년, 문제는 후베이성 우한시의 노산 지역을 북주에 넘기는 대가로 진욱을 돌려받았다. 진욱은 귀국하여 안성왕에 봉해졌고, 이후 문제의 추가 협상 끝에 진숙보와 어머니 유씨도 건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진숙보는 안성왕 세자가 되었고, 문제 재위 기간 동안 하급 관직을 지냈다. 566년에는 영원장군(寧遠將軍) 직위를 받았다. 568년에는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를 거쳐 시중이 되었다. 569년 정월, 아버지 진욱이 폐제 진백종을 폐위시키고 선제로 즉위하자, 진숙보는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어머니 유씨는 황후가 되었다.
569년 가을, 진숙보는 관료 심군리(沈君理)의 딸 심무화를 아내이자 황태자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점차 후궁인 장려화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황태자 시절 진숙보는 문학을 좋아하고 연회를 즐겼다. 그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관리 강총(江總)을 자신의 참모로 삼고 싶어 했으나, 문부상서 공환(孔奐)은 강총이 경솔하여 태자를 올바르게 보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진숙보가 아버지 선제에게 직접 요청하여 결국 강총을 등용했지만, 두 사람이 지나치게 연회를 자주 열고 진숙보가 몰래 궁을 빠져나가 강총의 집을 방문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자 선제는 강총을 파면했다.
582년 정월, 선제가 병석에 눕자 진숙보는 이복동생인 시흥왕 진숙릉(陳叔陵)과 장사왕 진숙견(陳叔堅)과 함께 입궁하여 선제를 간호했다. 선제가 붕어하자 황위를 노리던 진숙릉은 진숙보가 부친의 관 앞에서 슬퍼하는 틈을 타 미리 준비한 약칼로 진숙보의 목을 찔렀고, 진숙보는 쓰러졌다. 어머니 유황후가 그를 구하려다 칼에 맞았으나, 시녀 오씨가 진숙릉을 붙잡아 시간을 벌었고 진숙보는 간신히 일어나 도망칠 수 있었다. 한편, 진숙견은 진숙릉을 붙잡아 기둥에 묶었으나, 진숙릉은 힘으로 풀려나 도망쳤고 그의 사촌인 신안왕 진백고(陳伯固, 문제의 아들)와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진숙보는 우위장군(右衛將軍) 소마하에게 군사를 주어 진압하게 했고, 반란은 곧 진압되어 진숙릉과 진백고는 전투에서 사망했다. 진숙릉의 아들들은 자결을 강요받았고, 진백고의 아들들은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반란 시도 사흘 후, 진숙보는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어머니 유씨를 황태후로 높이고, 아내 심씨를 황후로 책봉했으며, 심 황후가 길렀던 장남 진윤을 황태자로 삼았다.
2. 2. 즉위와 실정
582년 정월, 아버지 진욱이 병석에 눕자 태자였던 진숙보와 그의 동생들인 차남 시흥왕 진숙릉, 4남 장사왕 진숙견이 함께 입궁하여 병수발을 들었다. 그러나 진욱이 세상을 떠나자, 진숙보가 슬픔에 잠겨 곡을 하던 중 동생 진숙릉이 갑자기 칼을 꺼내 그의 목을 내리쳤다. 진숙보는 깊은 상처를 입고 쓰러졌고, 이를 말리던 어머니 유황후 역시 부상을 입었다.[7] 4남 장사왕 진숙견이 진숙릉의 팔을 꺾어 칼을 빼앗으려 했으나, 힘이 센 진숙릉에게 제압당했다. 진숙릉은 감옥으로 가 죄수들을 풀어 무장시키려 했지만, 진숙보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우위장군(右衛將軍) 소마하에게 군사를 주어 진압하게 했다. 급조된 진숙릉의 군대는 소마하의 정예군에게 쉽게 격파되었고, 진숙릉은 자신의 처첩 7명을 우물에 던져 죽인 뒤 수나라 방면으로 도주했으나 결국 붙잡혀 멸족되었다.이렇듯 혼란 속에서 황위에 올랐으나, 목에 입은 상처 때문에 즉위 초기에는 직접 정사를 돌볼 수 없었다. 이 기간 동안 국정은 어머니 유태후가 섭정을 하고 동생 진숙견이 보좌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진숙보는 회복 기간 동안 총애하지 않던 신황후 대신 장귀비의 시중을 받았다. 몇 달 후 진숙보가 회복되자 유태후는 섭정을 그만두고 황제의 권한을 돌려주었다.
회복 후 진숙보는 동생 진숙견의 권세가 커지는 것을 점차 경계하게 되었다. 특히 그의 측근인 공범(孔範)과 시문경(施文慶)은 진숙견을 미워하여 밤낮으로 그의 흠을 찾아내 상소하며 진숙보를 부추겼다. 결국 583년 봄, 진숙보는 진숙견을 강주(江州, 현 장시성 구강시 부근)자사로 임명하여 중앙 권력에서 밀어냈고, 이후 명예직인 사공으로 임명했다. 584년 초, 진숙견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몰래 주술로 복권을 빌다가 발각되자 진숙보는 그를 처형하려 했으나, 진숙릉의 난 때 자신을 구했던 일을 떠올리고는 관직을 박탈하는 선에서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진숙보는 궁궐에서 안락하게 자라 백성들의 어려움이나 국가 운영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즉위 후 강대국인 수나라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584년, 진숙보는 임춘각(臨春閣), 결기각(結綺閣), 망선각(望仙閣)이라는 세 개의 호화로운 누각을 건설했다. 이 누각들은 복도로 연결되었고, 문과 창문, 난간 등은 값비싼 단향목으로 만들고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누각 아래에는 돌을 쌓아 산을 만들고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으며, 진귀한 꽃과 풀을 심었다. 진숙보는 임춘각에 머물렀고, 총애하는 장귀비는 결기각에, 공씨(龔氏)와 공씨(孔氏) 두 귀빈은 망선각을 함께 사용했다.
정무를 직접 처리하지 않고, 공범, 산기상시 왕차(王瑳) 등 문학적 재능을 가진 신하 십여 명과 후궁들을 뒤뜰에 불러모아 밤낮으로 연회를 열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노래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특히 장귀비와 공귀빈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와 《임춘악》(臨春樂) 같은 노래가 이때 만들어졌다. 중요한 국정 현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진숙보는 종종 총명하다고 여겨진 장귀비를 무릎에 앉히고 상소를 읽게 한 뒤 함께 처리 방안을 논의했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장귀비와 공귀빈, 그리고 환관과 측근 세력(공범, 시문경 등)이 서로 결탁하여 권력을 남용했다. 이들은 거리낌 없이 불법을 행하고 매관매직을 하며 뇌물을 수수했고,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거두었다. 상벌 결정마저 후궁들의 손에 좌우되었으며, 공범은 성씨가 같다는 이유로 공씨 귀빈(龔氏 貴嬪)과 의남매를 맺어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결국 장귀비와 공씨 귀빈 두 사람의 권력이 조정 내외를 장악하여 진숙보조차 그들의 말을 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비판하며 간언하는 신하들은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비서감 부재(傅縡)는 "폐하께서 과도하게 주색에 빠져 소인이 곁에 있게 되고 환관이 권력을 남용하여 충신을 원수처럼 미워하며 후궁들은 능라금수를 다투고 마굿간에는 콩여물이 남아돌지만 백성들은 살 곳을 찾아 헤매고 시체들이 들을 덮고 있습니다. 신은 동남의 왕기가 여기에서 끝을 보게될까 우려됩니다."라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가 옥에 갇혀 죽임을 당했다. 오흥 사람 장화(章華) 역시 "영토는 날로 줄어드는데 수나라의 침공이 두렵습니다."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살해당했다.
한편, 수나라 문제 양견은 진숙보의 아버지 진욱이 사망했을 때 애도를 표하고 외교적으로 겸손한 태도를 보였으나, 진숙보는 답신에서 "귀국이 국정을 잘 다스려 천하가 태평하기를 바란다"는 오만한 문구를 넣어 수 문제와 양소 등 수나라 조정의 불쾌감을 샀다. 이후 양국 간 사신 교환은 있었지만, 수나라는 점차 양자강 유역에 군사력을 증강하며 진나라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587년 가을, 서량의 황족 소엄(蕭巖, 경제 소찰의 숙부)과 소환(蕭瓛, 경제 소찰의 동생)이 수나라의 압박을 우려하여, 진숙보의 사촌인 진혜기(陳慧紀)에게 백성들을 이끌고 항복했다. 진숙보는 이들을 받아들여 지방 자사로 임명했다. 이 사건은 수 문제가 서량을 폐지하고 남은 영토를 병합하게 만들었으며, 진나라 공격 준비를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588년 봄, 진숙보는 장귀비와 공귀빈 등의 모함을 받아들였다. 이들은 진숙보가 총애하지 않는 신황후를 태자 진윤이 따른다고 참소했고, 이에 진숙보는 장남이자 태자였던 진윤을 폐위시켜 오흥왕으로 강등시켰다. 대신 장귀비가 낳은 아들 진심(陳深)을 새로운 태자로 책봉했다. 심지어 황후 심무화를 폐위시키고 장귀비를 황후로 삼으려 했으나, 수나라의 침공이 임박하여 실행하지는 못했다. 또한 공범의 건의에 따라 군 지휘권을 문관들에게 대거 넘기고 장수들을 함부로 교체하여 군 내부의 불만을 키웠다. 이러한 실정으로 진나라의 국력은 급격히 쇠퇴했다.
2. 3. 수나라의 침공과 멸망
진숙보는 즉위 후 강대한 수나라가 틈을 노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치를 부리고 방탕했으며, 날이 갈수록 정치가 부패해졌다. 그는 대규모로 궁실을 지었는데, 584년 겨울에는 높이 수십 장, 수십 칸 규모의 임춘각(臨春閣), 결기각(結綺閣), 망선각(望仙閣)을 세웠다. 이 누각들은 복도로 연결되었고, 문과 창문, 난간은 값비싼 단향목으로 만들고 황금, 구슬, 진주, 비취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누각 안에는 희귀한 물건들로 가득 채웠으며, 주변에는 인공 산과 연못을 만들고 진귀한 꽃과 풀을 심었다.진숙보는 정무를 직접 처리하지 않고 술과 놀이에 빠져 지냈다. 항상 공범(孔範), 산기상시 왕차(王瑳) 등 문사 십여 명과 후궁들과 함께 뒤뜰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았다. 우위장군 사마신(司馬申)은 기밀을 관리하며 권세를 부렸고, 총애받던 장려화(張麗華)는 진숙보가 정사를 결정할 때 무릎에 앉아 함께 상의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환관과 측근들이 서로 결탁하고 불법을 저지르며 매관매직과 뇌물 수수가 성행했고, 백성들은 과도한 세금에 시달렸다. 상벌 결정마저 후궁에서 이루어졌으며, 장귀비와 공귀빈(龔貴嬪)의 권력이 조정을 장악하여 진숙보조차 그들의 말을 따랐다. 충언을 하는 대신들은 죄를 뒤집어쓰고 처벌받았다.
비서감 부재(傅縡)는 "폐하께서 과도하게 주색에 빠져 소인이 곁에 있고 환관이 권력을 남용하며 충신을 미워하고, 후궁들은 사치하고 백성들은 굶주려 시체가 들을 덮고 있습니다. 동남의 왕기(王氣)가 여기서 끝날까 우려됩니다."라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으나, 진숙보는 그를 옥에 가두고 죽였다. 오흥 사람 장화(章華) 역시 수나라의 침공을 경고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살해당했다.
588년 10월, 수 문제 양견은 진숙보의 부패와 무능을 보고 아들 양광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51만 8천 명의 대군으로 진나라를 침공하게 했다. 장강을 지키던 장수가 여러 차례 위급함을 알리는 장계를 올렸으나, 시문경(施文慶)은 이를 묵살하고 보고하지 않았다. 진숙보는 상황을 알면서도 "왕기(王氣)가 여기에 있다. 북제 군대가 세 번, 북주 군대가 두 번 쳐들어왔으나 모두 패하고 돌아갔다. 천명(天命)이 여기 있는데 저들이 뭘 하겠는가?"라며 큰소리만 쳤고, 공범 역시 이에 동조하며 여전히 대비 없이 술과 시, 음악에 빠져 있었다.
589년 정월, 수나라 오주총관 하약필이 교묘하게 장강을 건너 경구(京口)를 점령하고 수도 건강 인근의 종산(鍾山)으로 진격했다. 건강에는 10만 명의 군대가 있었으나, 진숙보는 그제야 겁을 먹고 밤낮으로 울기만 했다. 장수들이 여러 차례 출전을 건의했지만 시문경이 이를 막았고, 결국 수나라 군대는 건강으로 입성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진숙보 즉위에 공을 세운 소마하가 수나라 군을 막으러 나간 사이, 진숙보는 그의 아내를 궁으로 불러들여 희롱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소마하는 분노하여 제대로 싸우지 못했고, 진나라 군대는 와해되었다고 전해진다. 진숙보는 측근 십여 명과 함께 경양전(景陽殿) 뒤뜰의 우물에 뛰어들려 했고, 후각사인 하후공운(夏侯公韻)이 말렸으나 기어이 장려화, 공귀빈과 함께 우물에 숨었다.
얼마 후 수나라 군사들이 우물을 발견하고 소리쳐 불렀으나 답이 없자 돌을 던지려 했다. 이에 놀란 진숙보가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수나라 군사들은 그를 새끼줄로 끌어올렸다. 진숙보는 하약필을 보자 두려움에 떨며 연거푸 절을 했다. 이로써 진나라는 허무하게 멸망했다.
같은 해 4월, 진숙보는 다른 진나라 황족들과 함께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장안에서도 여전히 술에 취해 지내는 날이 많았다. 진숙보와 함께 나라를 망친 간신으로 지목된 장려화, 공귀빈, 공범, 시문경 등은 장안에서 처형되었다.
진숙보는 604년 11월, 52세의 나이로 낙양에서 사망했으며 망산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역 근처에는 앞서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 손호가 묻혀 있었고, 훗날 백제의 의자왕도 이곳에 묻히게 된다. 수 문제 양견은 그에게 대장군·장성공의 작위를 추증하고, '여자를 좋아하고 예를 멀리한다'는 뜻의 '''양'''(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 시호는 훗날 수 양제 양광에게도 내려진다.
2. 4. 수나라에서의 삶과 죽음
589년 진나라가 수나라에 멸망한 후, 진숙보는 다른 진나라 황족들과 함께 4월 수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당시 망국의 군주는 반란을 우려하여 살해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진숙보는 나라를 잃고 장려화 등 총애하던 후궁들이 처형당한 상황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여전히 술에 빠져 지냈다. 그는 장안에서도 거의 매일 술에 취해 있었으며, 깨어 있는 날이 드물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의심 많던 수 문제 양견조차 경계심을 풀게 만들었다.수 문제는 진숙보를 후하게 대우하였으며, 신하로 삼고 싶지 않아 처음에는 관직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진숙보가 이러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관직을 요구하자 수 문제는 실망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수 문제는 처음에는 진숙보의 과도한 음주를 자제시키려 했으나, 나중에는 그가 시간을 보낼 다른 방도가 없다고 판단하여 내버려 두었다. 한편, 수 문제는 진나라 황족들이 결집하여 반란을 도모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그들을 각 지방으로 분산시켰다.
594년, 수 문제는 북제, 양, 진나라의 옛 황제들이 제사를 제대로 받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전 북제의 왕자 고인영(高仁英), 진숙보, 후량의 마지막 황제 소종에게 정기적으로 물품을 지급하여 조상의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조치했다.[6] 진숙보는 수 문제의 행차에 동행하거나 연회에 참석하는 등 비교적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
604년 11월, 진숙보는 낙양에서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망산에 안장되었는데, 그의 묘역 근처에는 앞서 멸망한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 손호가 묻혀 있었다. 공교롭게도 훗날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 역시 이곳에 묻히게 된다. 수 문제가 사망하고 수 양제 양광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숙보가 사망하자, 양제는 그에게 대장군의 관직과 장성공의 작위를 추증하고, 시호로 '''양'''(煬)을 내렸다. '양'이라는 시호는 시법에 따르면 '예(禮)를 버리고 무리를 멀리한다'(去禮遠衆)는 의미를 담고 있다.[9]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호를 내린 수 양제 양광 자신도 훗날 당나라에 의해 같은 '양'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진숙보와 함께 진나라의 멸망을 초래한 간신으로 지목된 장려화, 공귀빈, 공범, 시문경 등은 장안으로 압송된 후 처형되었다. 한편, 진숙보의 황후였던 심무화는 진나라 멸망 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진숙보에게는 22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폐태자였던 진윤이 618년에 사망했다는 기록[8] 외에는 대부분의 행적이 명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딸 중에서는 4녀 광덕공주와 6녀 진씨(진여주)가 수 양제의 후궁이 되었고, 5녀 임성공주는 수 양제의 동생인 양준의 부인이 되었다. 또한, 수 문제의 후궁이었으며 양광과의 일화로 알려진 선화부인(宣華夫人)은 본래 진숙보의 누이동생으로, 진나라 공주 시절에는 영원공주(寧遠公主)였다.
3. 가족 관계
- '''황후''': 심무화(沈婺華, ? ~ 628년) - 오흥군(吳興郡) 무강현(武康縣) 사람. 진숙보의 사촌 여동생이다.
- '''귀비''': 장려화(張麗華, 559년 ~ 589년)
- '''귀빈''': 공씨(龔氏)
- '''귀빈''': 공씨(孔氏)
- '''숙원''': 여씨(呂氏)
- '''숙화''': 장씨(張氏)
- '''숙의''': 서씨(徐氏)
- '''소의''': 고씨(高氏)
- '''소의''': 사씨(謝氏)
- '''부인''': 손씨(孫氏, ? ~ 573년)
구분 | 순서 | 봉호 | 이름 | 생모 | 비고 |
---|---|---|---|---|---|
아들 | 1 | 오흥왕(吳興王) | 진윤(陳胤) | 부인 손씨 | 573년 출생, 589년 이전 사망. 자는 승업(承業). |
2 | 남평왕(南平王) | 진의(陳嶷) | 소의 고씨 | 589년 사망. 자는 승악(承岳). | |
3 | 영가왕(永嘉王) | 진언(陳彥) | 숙원 여씨 | 자는 승의(承懿). | |
4 | 황태자(皇太子) | 진심(陳深) | 귀비 장씨 | 575년 출생. 원래 이름은 진원(陳淵). 자는 승원(承源). | |
5 | 남해왕(南海王) | 진건(陳虔) | 귀빈 공씨 | 자는 승각(承恪). | |
6 | 신의왕(信義王) | 진지(陳祗) | 숙화 장씨 | 자는 승경(承敬). | |
7 | 소릉왕(邵陵王) | 진경(陳兢) | 숙원 여씨 | 자는 승검(承檢). | |
8 | 회계왕(會稽王) | 진장(陳莊) | 귀비 장씨 | 자는 승숙(承肅). | |
9 | 동양왕(東陽王) | 진전(陳恮) | 숙의 서씨 | 자는 승후(承厚). | |
10 | 오왕(吳王) | 진번(陳蕃) | 귀빈 공씨 | 자는 승광(承廣). | |
11 | 전당왕(錢唐王) | 진념(陳恬) | 귀빈 공씨 | 589년 사망. 자는 승담(承惔). | |
12 | 진총(陳總) | 불명 | |||
13 | 진관(陳觀) | 불명 | |||
14 | 진명(陳明) | 불명 | |||
15 | 진강(陳綱) | 불명 | |||
16 | 진통(陳統) | 불명 | |||
17 | 진충(陳沖) | 불명 | |||
18 | 진흡(陳洽) | 불명 | |||
19 | 진조(陳絛) | 불명 | |||
20 | 진작(陳綽) | 불명 | |||
21 | 진위(陳威) | 불명 | |||
22 | 진변(陳辯) | 불명 | |||
딸 | 4 | 광덕공주(廣德公主) | 알 수 없음 | 소의 고씨 | 양광(楊廣)에게 시집감 (589년)[10] |
5 | 임성공주(臨成公主) | 알 수 없음 | 소의 사씨 | 진효왕(秦孝王) 양준(楊俊)에게 시집감 (589년) | |
6 | 공주(公主) | 진주(陳婤) | 불명 | 양광(楊廣)에게 시집감 (606년)[11] |
4. 평가 및 작품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진숙보는 국정을 소홀히 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나라를 수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만든 군주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는 즉위 후 호화로운 누각을 짓고 총애하는 후궁 장려화 등과 밤낮으로 연회를 즐겼으며, 이는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민심을 이반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1] 수 문제와의 외교 관계에서도 미숙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여 갈등을 자초했고, 결국 수나라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나라를 잃었다.[1]
그러나 정치적 무능함과 별개로, 진숙보는 문학, 특히 시(詩)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화려하고 기교적인 궁체시(宮體詩)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며, 다수의 악부(樂府) 시를 남겼다.[2]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는 후궁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로 알려져 있지만, 후대에는 망국(亡國)의 군주가 읊은 퇴폐적인 시의 대명사로 여겨져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2] 이처럼 군주로서의 실패와 시인으로서의 재능이라는 상반된 모습은 진숙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측면이다.
4. 1. 평가
진숙보는 즉위 초 부상에서 회복하는 동안 유태후가 섭정을 맡았으나, 회복 후에는 국정을 직접 운영했다. 그러나 선황제의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연회를 자주 열었으며, 충언을 하는 신하 모희(毛喜)를 강등시키는 등 국정 운영 초기부터 문제점을 드러냈다.[1] 그는 동생 진숙견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그를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강주 자사로 임명하고 권력을 빼앗았다.[1] 이후 진숙견이 두려움 속에서 기도를 올린 것이 발각되자 처형까지 고려했으나, 과거 자신을 구해준 일을 떠올리고 목숨만은 살려주었다.[1]진숙보는 국정보다는 사치와 향락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 584년에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린춘각(臨春閣), 결기각(結綺閣), 망선각(望仙閣)이라는 호화로운 누각 세 채를 지었다.[1] 그는 주로 린춘각에 머물렀고, 총애하는 장귀비는 결기각에, 공귀비 등 다른 후궁들은 망선각에 머물게 했다.[1] 진숙보는 이 누각들에서 장귀비를 비롯한 후궁들, 그리고 강총, 공범 등 문학적 재능이 있는 신하들과 함께 밤낮으로 연회를 열었다.[1] 이 자리에서는 후궁들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와 노래를 짓게 했는데, 특히 장귀비와 공귀비의 미모를 칭송한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와 《린춘악(臨春樂)》이 유명하다.[1]
국정 운영에 있어서 진숙보는 무능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중요한 국정 현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총명하다고 여겨진 장귀비를 무릎에 앉히고 대신 상소문을 읽고 처리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1] 장귀비와 혈연관계가 없는 공귀비, 그리고 공범은 서로 자매와 오라버니로 칭하며 결탁하여 권력을 남용했다.[1] 진숙보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대규모 건설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이 인상되었고, 이전에는 면세 대상이었던 군인과 관리들에게까지 세금이 부과되어 백성들의 불만이 커져갔다.[1] 또한 공범의 건의에 따라 군 지휘권을 문관들에게 넘기면서 군 장군들의 불만도 높아졌다.[1]
대외적으로는 수나라와의 관계 설정에서도 미숙함을 보였다. 수 문제는 진 선제의 죽음을 애도하며 사신을 보내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으나, 진숙보는 답신에서 오만한 태도를 보여 수 문제와 양소 등 핵심 신료들의 불쾌감을 샀다.[1] 이후에도 양국 간 교류는 있었지만, 수나라는 점차 진나라 정복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었다.[1] 587년, 서량의 관리들이 수나라의 공격을 우려하여 진나라에 투항하자 이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수 문제가 서량을 병합하고 진나라 침공을 본격화하는 빌미를 제공했다.[1]
588년, 진숙보는 장귀비 등의 모함에 넘어가 태자 진인을 폐위시키고 장귀비의 아들 진원을 새로운 태자로 책봉했다.[1] 같은 해 수나라의 대규모 침공이 시작되었으나, 시문경 등이 양자강 상류에서의 위급한 상황 보고를 막아 진숙보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1] 589년 봄, 수나라 군대가 수도 건강을 포위하자 진숙보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지만, 당황하여 제대로 된 저항을 지휘하지 못하고 실질적인 통제권을 시문경에게 맡겼다.[1] 장군 소마하가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전을 강행했으나 패배하고 사로잡혔으며, 진나라 군대는 와해되었다.[1] 수도가 함락되자 진숙보는 장귀비, 공귀비와 함께 우물에 숨었다가 발각되어 체포되는 굴욕을 겪었다.[1] 수나라 장군 하약필 앞에서 두려움에 떨어 땅에 엎드리는 모습을 보여 경멸을 사기도 했다.[1] 진나라 멸망의 원흉으로 지목된 장귀비는 고경에 의해 처형되었다.[1] 진숙보는 수나라의 요청에 따라 아직 저항 중이던 진나라 장군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서신을 보냈고, 이로써 진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1]
수나라로 압송된 후, 수 문제는 진숙보를 후하게 대우했으나, 진숙보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관직을 요구하자 실망했다고 전해진다.[1] 진숙보는 여전히 술을 즐겨 마셨는데, 수 문제는 처음에는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나중에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1] 594년에는 수 문제가 진숙보를 포함한 옛 왕조의 군주 후손들에게 조상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물품을 지급하기도 했다.[6]
604년, 수 문제가 사망하고 수 양제가 즉위한 지 몇 달 후 진숙보는 사망했다.[1] 양제는 그에게 창성공(長城公)이라는 작위와 함께 '양(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1] '양'은 일반적으로 행실이 좋지 않고 사치하며 예를 무시한 군주에게 내려지는 부정적인 의미의 시호로, 이는 후대의 진숙보에 대한 평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호는 훗날 양제 자신에게도 당나라에 의해 내려지게 된다.[1]
4. 2. 작품
황태자 시절부터 문학을 좋아하고 연회를 즐겼다. 그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관리 강총江總|강총중국어을 가까이 두고 싶어 했으나, 공환孔奐|공환중국어은 강총이 경솔하여 태자를 올바르게 보좌하기 어렵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진숙보는 아버지 선제에게 직접 요청하여 강총을 자신의 참모로 삼았다.[1][2] 하지만 두 사람이 지나치게 어울려 연회를 즐기고, 진숙보가 평민 복장을 하고 몰래 궁궐을 빠져나가 강총의 집을 방문하는 일이 잦아지자 선제는 결국 강총을 파면했다.[1][2]황제가 된 후에도 진숙보는 정사(政事)보다는 문학과 연회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수도 건강에 린춘각(臨春閣), 결기각(結綺閣), 망선각(望仙閣)이라는 호화로운 누각 세 채를 짓고, 자신이 총애하던 후궁 장려화(張麗華)나 공귀빈孔貴嬪|공귀빈중국어 등과 문학적 재능을 가진 신하, 시녀들과 함께 자주 연회를 열었다.[1][2] 이 자리에서 그는 신하들에게 후궁들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를 짓고 노래하게 했다. 이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노래가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와 《린춘악》(臨春樂)으로, 특히 《옥수후정화》는 장려화와 공귀빈의 미모를 찬양한 것으로 유명하다.[1][2]
진숙보는 군주로서는 국정을 소홀히 하여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시인으로서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특히 악부(樂府) 시를 많이 지었는데, 그 내용은 화려하고 기교적인 궁체시(宮體詩)가 대부분이다. 그의 대표작인 《옥수후정화》는 아름다운 표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망국의 상징처럼 여겨져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남조의 멸망을 다룬 시에서 자주 인용된다.
옥수후정화 (玉樹後庭花|옥수후정화중국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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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현토문 |
麗宇芳林對高閣 | 아름다운 하늘과 향기로운 숲은 높은 누각을 마주하고 |
新粧艶質本傾城 | 새 단장한 아름다운 자태는 본래부터 경성을 뒤흔들 만하다 |
映戸凝嬌乍不進 | 문(戸)에 비치는 아리따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잠시 나아가지 못하고 |
出帷含態笑相迎 | 휘장을 나와 자태를 머금고, 웃으며 서로 맞이하네 |
妖姫臉似花含露 | 요염한 여인의 얼굴은 꽃이 이슬을 머금은 듯하고 |
玉樹流光照後庭 | 옥수(玉樹)는 빛을 흘려 후원을 비추네 |
진나라가 멸망하고 수나라에 항복한 뒤에는 별다른 관직 없이 지냈는데, 이를 부끄럽게 여겨 수 문제에게 벼슬을 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당시 술에 몹시 취해 있었기에 수 문제는 자제하라고 충고했지만 듣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참조
[1]
문서
dingsi day of the 1st month of the 14th year of the Taijian era
[2]
문서
jiashen day of the 1st month of the 3rd year of the Zhenming era
[3]
문서
wuyin day of the 11th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Chengsheng era
[4]
서적
Book of Chen
https://zh.wikisourc[...]
[5]
문서
renzi day of the 11th month of the 4th year of the Renshou era
[6]
서적
隋書·高祖紀下
[7]
문서
황태자비(皇太子妃)/후주황후(後主皇后)
[8]
문서
영강공(永康公)/황태자(皇太子)
[9]
문서
시안왕(始安王)
[10]
문서
진 멸망 후 수 양제의 후궁으로 봉해짐.
[11]
문서
진 멸망 후 수 양제의 후궁으로 봉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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