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메 2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차이메 2세는 1286년 시칠리아 왕이 되었고, 형의 죽음으로 아라곤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시칠리아를 포기하고 동생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대신 교황으로부터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에 대한 칭호를 받았으나, 무관심으로 아라곤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라곤으로 돌아와 카스티야의 적과 동맹을 맺어 무르시아를 점령했으며, 아란 계곡에 자치를 부여했다. 또한 나병 환자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등 나병 공포에 연루되었다. 그는 오크어 시를 썼으며, 네 번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267년 출생 - 방신우
방신우는 고려 말 원나라에서 몽골식 이름 망쿠다이로 활동하며 평장정사까지 오른 관리로서, 충선왕 옹호와 고려의 국익을 위한 활동을 펼치다 원나라에서 사망 후 고려에 안장되었다. - 1267년 출생 - 조토 디 본도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조토 디 본도네는 서양 미술사에서 최초의 거장으로 여겨지며, 비잔틴 양식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인물 묘사와 공간감 표현으로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 13세기 스페인 사람 - 페르난도 3세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와 레온을 통합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데 기여했으며, 레콩키스타를 추진하여 코르도바와 세비야를 함락하고 1671년 시성되었다. - 13세기 스페인 사람 - 베렝겔라 나바라 왕녀
베렝겔라 나바라 왕녀는 나바라 왕국의 공주이자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의 왕비로, 정략결혼 후 리처드 1세의 사망을 깊이 슬퍼했으며, 잉글랜드 땅을 밟지 못했지만 말년에 수도원을 후원하며 신앙생활에 전념했고, 경건함의 모범으로 여겨진다. - 시칠리아 바르셀로나가 - 마리아 (시칠리아)
마리아 (시칠리아)는 1377년 시칠리아 여왕이 되었으나, 어린 나이와 귀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1390년 마르티노 1세와 결혼 후 1392년부터 공동 통치했으나 1401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시칠리아는 아라곤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 시칠리아 바르셀로나가 - 페로 3세
페로 3세는 13세기 후반 아라곤, 발렌시아,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자 카탈루냐 백작으로, 즉위 초 반란을 진압하고 시칠리아 왕위를 차지한 후 프랑스의 침공을 격퇴했으며 예술과 문학을 후원했다.
차이메 2세 | |
---|---|
기본 정보 | |
![]() | |
군주 칭호 | 아라곤과 발렌시아의 왕, 바르셀로나 백작, 시칠리아 왕 |
출생일 | 1267년 4월 10일 |
출생지 | 발렌시아 |
사망일 | 1327년 11월 2일/5일 |
사망지 | 바르셀로나 |
매장지 | 산테스 크레우스 |
별칭 | 정의왕 (El Justo, el Just, il Giusto) |
통치 | |
시칠리아 왕 즉위 | 1285년 11월 2일 |
시칠리아 왕 퇴위 | 1295년 6월 20일 |
이전 통치자 | 콘스탄차 2세와 페드로 1세 |
다음 통치자 | 페데리코 3세 |
아라곤 및 발렌시아 왕, 바르셀로나 백작 즉위 | 1291년 6월 18일 |
아라곤 및 발렌시아 왕, 바르셀로나 백작 퇴위 | 1327년 11월 2일 또는 5일 |
이전 통치자 | 알폰소 3세 |
다음 통치자 | 알폰소 4세 |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왕 즉위 | 1297년 4월 4일 |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왕 퇴위 | 1327년 11월 2일 또는 5일 |
다음 통치자 | 알폰소 4세 |
가문 | |
왕가 | 바르셀로나 가문 |
아버지 | 페드로 3세 데 아라곤 |
어머니 | 콘스탄차 디 시칠리아 |
결혼, 첩, 자녀 | |
배우자 | 이사벨 데 카스티야 (1295년 결혼, 1295년 혼인 취소) 블랑슈 당주 (1295년 결혼, 1310년 사망) 마리 드 뤼지냥 (1315년 결혼, 1319년 사망) 엘리센다 데 몬카다 (1322년 결혼) |
자녀 | 하이메 알폰소 4세 데 아라곤 마리아, 카메로스 여인 후안 이사벨, 독일 왕비 페드로 4세, 리바고르사 백작 |
2. 생애
1285년 부왕이 사망했을 때, 형 알폰소 3세는 아라곤 왕위를, 하이메는 시칠리아 왕위를 계승했다. 1291년 알폰소 3세가 독신으로 사망하자 하이메는 아라곤 왕위도 계승했다. 이후 나폴리 왕 카를로 2세와 시칠리아 탈환을 두고 다투었으며, 1296년 강화 조약에서 시칠리아 왕위를 포기했다. 그러나 시칠리아인들은 하이메의 동생 페데리코 2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카를로 2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 1. 초기 생애와 시칠리아 통치 (1285년–1298년)
1286년 차이메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시칠리아의 왕이 되었고, 팔레르모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이에 교황 호노리우스 4세는 차이메 2세를 파문했다. 1291년 형 알폰소 3세가 사망하자 그는 또한 아라곤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그 해 5월을 카타니아에서 보냈으며, 현지 수도사인 아타나시우 디 이아치가 그곳에서의 그의 시간을 주제로 하여 ''Vinuta di re Iapicu''를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 1296년 앙주의 샤를 2세와의 평화 조약에 따라 그는 시칠리아를 포기하기로 동의했지만, 시칠리아인들은 대신 그의 동생 페데리코를 왕위에 앉혔다.페데리코가 섬에서 물러나지 않자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차이메 2세와 나폴리의 샤를 2세에게 그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를 유도하기 위해 교황은 차이메 2세에게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에 대한 칭호를 부여하고 그를 교황군 기수로 임명했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무관심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아라곤으로 돌아갔다. 페데리코는 1337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통치했다.
1295년 아냐니 조약을 통해 그는 발레아레스 제도를 그의 삼촌 자메 2세에게 돌려주었다. 1298년 아르질레르 조약에 따라 마요르카의 자메는 아라곤의 차이메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2. 2. 아라곤 통치와 무르시아 정복 (1298년–1327년)
알폰소 3세가 1291년에 사망하자 아라곤 왕관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 해 5월을 카타니아에서 보냈으며, 현지 수도사인 아타나시우 디 이아치가 그곳에서의 그의 시간을 주제로 하여 ''Vinuta di re Iapicu''를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 1296년 앙주의 샤를 2세와의 평화 조약에 따라 그는 시칠리아를 포기하기로 동의했지만, 시칠리아인들은 대신 그의 동생 페데리코를 왕위에 앉혔다.페데리코가 섬에서 물러나지 않자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자메 2세와 나폴리의 샤를 2세에게 그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를 유도하기 위해 교황은 자메 2세에게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에 대한 칭호를 부여하고 그를 교황군 기수(旗手)로 임명했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무관심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아라곤으로 돌아갔다.
1295년 아냐니 조약을 통해 그는 발레아레스 제도를 그의 삼촌 자메 2세에게 돌려주었다. 1298년 아르질레르 조약에 따라 마요르카의 자메는 아라곤의 자메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아라곤으로 돌아온 후 하이메 2세는 카스티야가 아라곤을 제한하는 남쪽의 무슬림 세계에 접근하고자 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제독 돈 베르나트 데 사리아, 폴로프 남작의 도움을 받아 카스티야의 어린 국왕 페르난도 4세의 적들과 동맹을 맺었다. 하이메 2세는 무르시아 왕국을 원하여 자신의 왕국이 그라나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려 했다. 동맹군은 1296년 사방에서 진입하여 하이메 2세는 무르시아를 점령하여 1304년까지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1313년 하이메 2세는 아란 계곡에 행정적, 정치적 자치를 부여했는데, 그 법적 세부 사항은 라틴어 필사본인 퀘리모니아에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권력 이양은 아란인들이 계곡의 지배권을 놓고 프랑스 왕국 및 마요르카 왕국과 벌어진 분쟁에서 하이메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하이메는 1321년 나병 공포에 연루되었다. 그는 자신의 왕국에서 피난처를 찾던 프랑스 나병 환자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라고 명령했으며, 자국 나병 환자들에게 더 가혹한 정책을 채택했다.
2. 3. 나병 공포와 말년 (1321년–1327년)
하이메는 1321년 나병 공포에 연루되었다. 그는 자신의 왕국에서 피난처를 찾던 프랑스 나병 환자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라고 명령했으며, 자국 나병 환자들에게 더 가혹한 정책을 채택했다.3. 문화적 기여
차이메 2세는 시칠리아 통치 기간(1285–1291) 동안 오크어로 쓰인 유일하게 현존하는 종교적인 ''단사''(dansa, 춤곡) "마이르 데 데우"(Mayre de Deu)를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는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되었다. 그의 동시대인 아르나우 데 빌라노바는 1305년에 이 ''단사''에 대한 구절별 라틴어 해설을 썼다. 차이메가 사용한 은유는 알프레드 장로이에 의해 분석되었으며, 그는 ''로망 드 포벨''(Roman de Fauvel)과 유사성을 발견했다.
차이메는 교회를 폭풍우 속에서 조종사(nauchier, 즉 교황)에게 제대로 인도받지 못하는 배에 비유하며 시작한다.
Mayre de Deu e fylha,|마이르 데 데우 에 필랴,|하느님의 어머니이자 딸이시여,pro
verge humil e vera,|베르제 우밀 에 베라,|겸손하고 진실한 처녀시여,pro
vostra nau vos apela|보스트라 나우 보스 아펠라,|당신의 배가 당신께 부르짖으니,pro
que l'aydetz, quar perylha.|케 라이데츠, 콰르 페릴랴.|도와주소서, 위태로우니.pro
이 시는 문학적으로 놀랍거나 실망스럽지는 않지만, 차이메가 교황청과 갈등을 겪던 시기에 쓰여진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교황청이 아닌 교회에 대한 그의 경건함과 충실함을 증명하려는 선전적 목적을 가졌을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마리아에게 왕인 그를 죄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다.
Mayre, tu·m dona forsa|마이르, 투 둠 도나 포르사,|어머니, 제게 힘을 주소서pro
contra ma leugeria,|콘트라 마 레우제리아,|제 나약함에 맞서,pro
e·m garda de la via|에 엠 가르다 데 라 비아,|그리고 죄의 길에서 저를 지켜주소서pro
de peccat, que.ns exylha.|데 페캇, 켄스 엑실랴.|멸망케 하는.pro
4. 가족 관계
차이메 2세는 네 번 결혼했다.
- 1295년 나폴리 왕 카를로 2세의 딸 블랑카와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낳았다.
- 알폰소 (1299년 - 1336년) - 아라곤 왕
- 하이메 (1296년 - 1334년) - 성 하이메 기사단장
- 마리아 (1299년 - 1316년) - 1310년에 카스티야 왕자 페드로 (산초 4세의 아들)와 결혼
- 후안 (1304년 - 1334년) - 타라고나 대주교
- 페드로 (1305년 - 1362년) - 리바고르사 백작. 잔 드 푸아(푸아 백작 가스통 1세의 딸)와 결혼하여, 간디아 공작 알폰소 (1412년 사망) 및 엘레오노라 (키프로스 왕 피에르 1세 비)를 낳았다.
- 이사벨 (1305년 - 1330년) - 1315년에 로마 왕 프리드리히 3세와 결혼
- 라몬 베렝게르 (1308년 - 1366년) - 엠푸리아스 백작
- 첫 번째 왕비는 카스티야 왕 산초 4세의 딸 이사벨이었으나, 산초 4세의 죽음 이후 차이메 2세가 대 카스티야 정책을 동맹에서 간섭으로 바꾸면서 이혼했다.
- 1315년에는 키프로스 왕 위그 3세의 딸 마리(1322년 사망)와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 1322년에는 카탈루냐 귀족 알리센다 데 문카다와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 차이메 2세는 시칠리아 여성에게서 세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4. 1. 첫 번째 결혼: 카스티야의 이사벨
차이메 2세는 1291년 12월 1일 소리아에서 카스티야의 산초 4세와 그의 아내 마리아 데 몰리나의 딸인 카스티야의 이사벨과 첫 번째 결혼을 했다. 당시 이사벨은 8세에 불과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이 결혼을 승인하지 않아 무효가 되었다.4. 2. 두 번째 결혼: 앙주의 블랑슈
앙주의 블랑슈는 나폴리의 샤를 2세와 헝가리의 마리아의 딸이다. 1295년 10월 29일 또는 11월 1일 빌라베르트란에서 차이메 2세와 결혼했다. 슬하에 여러 자녀를 두었다.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하이메 | 1296년 9월 29일 | 1334년 7월 타라고나 | 1319년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수도사가 됨. 카스티야의 엘레오노르와 결혼을 거부. |
아라곤의 알폰소 4세 | 1299년 | 1336년 1월 24일 | 1327년 아라곤 왕위에 올라 죽을 때까지 통치. 테레사 데 엔텐사와 결혼, 첫 번째 아내 사망 후 카스티야의 엘레오노르와 결혼. |
마리아 | 1299년 | 1347년 | 시제나에서 수녀로 사망, 카스티야의 산초 4세의 아들 페드로의 아내. |
콘스탄스 | 발렌시아 1300년 4월 1일 | 1327년 9월 19일 카스티요 데 가르시아 무뇨스 |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의 조카인 비예나 공작 후안 마누엘의 아내. |
후안 | 1304년 | 1334년 8월 19일 포보, 사라고사 | 1318년 톨레도 대주교이자 타라고나 대주교, 1328년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가 됨. |
아라곤의 이사벨 | 1305년 | 1330년 7월 12일 슈타이어마르크 |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1세의 아내. |
페드로 | 1305년 | 1381년 11월 4일 피사 | 리바고르사 백작, 암푸리아스와 프라데스 백작. 푸아의 가스통 1세의 딸 호안과 결혼. |
알폰소 | 1332년 | 1412년 3월 5/7일 | 초대 간디아 공작, 초대 카스티야 비예나 후작, 제2대 리바고르사와 암푸리아스 백작 등, 카스티야 사령관, 1355년 비올란테 히메네스 데 아레노스와 결혼. |
후안 | 1335년 | 1414년 | 제2대 프라데스 백작, 카탈루냐 셰네샬, 처제인 산차 히메네스 데 아레노스와 결혼. |
키프로스의 엘레오노르 | |||
블랑슈 | 1307년 | 1348년 바르셀로나 | 시제나 수녀원장. |
라몬 베렝게르 | 1308년 8월 | 1366년 바르셀로나 | 사제, 암푸리아스 백작이자 에헤리카 남작. 타란토의 필리프 1세의 딸 블랑슈와 결혼 후 아라곤의 하이메의 딸 마리아와 결혼. 딸 후안은 비예나 공작 후안 마누엘의 아들 페르난도 마누엘과 결혼. |
비올란테 | 바르셀로나, 1310년 10월 | 1353년 7월 19일 페드로라 | 로마니아의 필리프 전제공(타란토의 필리프 1세의 아들)과 결혼. 세고르베 영주 로페 데 루나와 결혼. |
4. 3. 세 번째 결혼: 마리 드 루지냥
키프로스 왕 위그 3세의 딸 마리 드 루지냥과 1315년 6월 15일 니코시아의 성 소피아에서 대리 결혼을 했고, 1315년 11월 27일 지로나에서 직접 결혼했다. 이 결혼에서는 아이가 없었다.4. 4. 네 번째 결혼: 엘리센다 데 몬카다
1322년 차이메 2세는 카탈루냐 귀족 알리센다 데 문카다와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알리센다 데 몬카다는 알토나와 소세스의 영주인 페드로 1세 데 몬카다와 그의 아내 기셀라 다바르카의 딸이었다. 차이메 2세와 알리센다 데 몬카다는 1322년 12월 25일 타라고나에서 결혼했다. 이 결혼 또한 아이가 없었고, 차이메 2세 사후 알리센다 데 몬카다는 가난한 클라라회의 페드랄베스 수도원에 수녀로 들어가 1364년 6월 19일 사망했다.4. 5. 사생아
차이메 2세는 시칠리아 여성에게서 세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제롤다와의 관계:
- * 산초 (1287년 시칠리아 출생 – 요절)
- * 나폴레온 (1288년 시칠리아 출생 – 1338년 결혼), 조요사 과르다와 아쿠아프레다의 영주; 마요르카 출신 기예르모 로베르의 딸과 결혼했다.
- 루크레시아와의 관계:
- * 하이메 (1291년 마차라 출생 – 1350년 사망), 칼리아리의 비카리오 (1317년–1341년); 먼저 마요르카 출신 자우메타 게라우와 결혼하고, 두 번째로 사르데냐 여성 푸치아와 결혼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