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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블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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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블린은 던지거나 투척하는 무기의 일종으로, 선사 시대부터 고대, 중세 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와 군사 조직에서 사용되었다. 구석기 시대부터 사용된 증거가 있으며,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에서 전투와 사냥에 널리 활용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노르드, 앵글로색슨, 이베리아, 웨일스, 아일랜드, 중국 등 다양한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아프리카에서도 주요 무기로 활용되었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오딘의 무기로 등장하며, 루시타니아 신화에서는 창의 신으로 숭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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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블린
개요
창던지기용 창의 다이어그램
창던지기용 창의 다이어그램
종류투척 무기
용도투창, 사냥, 스포츠
역사적 기간고대부터 현대까지
설명
어원고대 프랑스어 "javelot"
정의손으로 던지도록 설계된 가벼운 창
특징일반적으로 투창과 사냥에 사용됨
재료나무, 금속, 복합 재료
구조끝이 뾰족한 자루
안정적인 비행을 위한 깃털 또는 유사한 부착물
스포츠용 창
종목창던지기
규격길이, 무게, 무게 중심 등에 대한 특정 규정 존재
재질금속 또는 탄소 섬유
목표가능한 멀리 던지는 것
관련 단체세계 육상 연맹(World Athletics)
군사용 창
종류다양한 크기와 무게 존재
재질나무 또는 금속
용도기병
보병
특징갑옷을 관통하거나 멀리 있는 적을 공격하도록 설계됨
기타 용도
사냥작은 동물이나 새를 사냥하는 데 사용됨
의례일부 문화권에서 의식이나 스포츠 행사에서 사용됨
같이 보기
관련 항목앙곤
필룸
창 (무기)
투창기
삼지창

2. 선사 시대

구석기 시대 후기부터 투창과 던지는 막대가 사용되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독일 쇠닝겐에서는 약 400,000년 전 가문비나무 줄기로 만들어진, 1.83m~2.25m 길이의 투창이 발견되었다.[1] 영국 복스그로브에서는 500,000년 전 말의 어깨뼈 화석에서 투창에 의한 상처가 발견되었다.[2][3][4]

2. 1. 초기 형태와 발전

독일 쇠닝겐의 탄광에서 창과 같은 물체 7개가 발견되었다. 층서학적 연대 측정 결과 이 무기들은 약 40만 년 전의 것으로 나타났다.[1] 발굴된 물체들은 가문비나무(Picea) 줄기로 만들어졌으며 길이는 1.83m에서 2.25m 정도였다. 나무 막대의 앞쪽 끝에 최대 두께와 무게를 집중시켜 제작되었는데, 앞쪽 무게 중심으로 보아 이 무기들은 투창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복스그로브 마을의 자갈 채석장에서는 50만 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투사체에 의한 상처가 있는 말의 어깨뼈 화석이 발견되었다. 연구에 따르면 이 상처는 투창에 의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2][3][4]

2. 2. 투창과 사냥

구석기 시대 후기부터 투창과 던지는 막대가 사용되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독일 쇠닝겐의 탄광에서 창과 같은 물체 7개가 발견되었다. 층서학적 연대 측정 결과 이 무기들은 약 400,000년 전의 것으로 나타났다.[1] 발굴된 물체들은 가문비나무(Picea) 줄기로 만들어졌으며 길이는 1.83m에서 2.25m 정도였다. 나무 막대의 앞쪽 끝에 최대 두께와 무게가 집중되어 제작되었는데, 앞쪽 무게중심으로 보아 이 무기들은 투창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복스그로브 마을의 자갈 채석장에서는 500,0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투사체에 의한 상처가 있는 말의 어깨뼈 화석이 발견되었다. 연구에 따르면 이 상처는 투창에 의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2][3][4]

3. 고대

고대에는 창이 전투와 사냥에 모두 사용되는 중요한 도구였다.

고대 이집트에서 창은 군대의 공격용 무기로 사용되었다. 이집트의 창은 다른 나라의 창보다 가벼웠고, 뾰족하게 깎거나 잎 모양의 창촉이 달린 긴 자루로 구성되었으며, 아랫부분에는 끈이나 술이 달려 있어 던진 후 회수할 수 있었다.[5] 이집트 군인들은 군사 학교에서 창 던지기, 궁술, 전투용 도끼 등을 훈련받았고,[7] 창은 경보병의 주무기이자 전차에도 보관되는 등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9][10]

고대 그리스에서는 펠타스트라고 불리는 경보병들이 창을 사용하여 적의 호플리트 방진(phalanx formation)을 붕괴시키는 전술을 사용했다. 레케움 전투(battle of Lechaeum)에서 아테네(Athens) 장군 이피크라테스(Iphicrates)는 펠타스트 부대로 스파르타(Sparta) 호플리트 부대를 격파하기도 했다.[1] 창은 사냥과 고대 올림픽(Ancient Olympics)을 포함한 판헬레니크 경기(Panhellenic Games)에도 사용되었다.

고대 로마 로마 공화국 군대는 3열 전진 방진으로 변경되면서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 병사들이 필룸(복수형 ''필라'')이라는 무거운 투창을 사용했다. ''필룸''은 무게가 0.9kg에서 2.3kg 정도였고, 효과적인 사거리는 15m에서 20m였다.[12] 기원전 3세기부터는 경보병들이 베르투툼이라는 작은 투창을 사용했는데, 이들은 전쟁 코끼리를 격퇴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벨리테스''는 군단병으로 재편성되었고, 후기 로마 제국에서는 플룸바타라는 투창이 사용되었다.

갈리아 기병들은 정면 공격 전 창을 던지는 전술과 파르티아 사격과 유사한 전술을 사용했다.[1] 히스파니아 기병들은 칸타브리아 원형(Cantabrian circle)이라는 전술을 사용했는데, 이는 원을 그리며 창을 던져 적을 교란하는 전술이었다.[1] 누미디아 기병은 뛰어난 투창 투척술로 카르타고 군대의 용병으로 활약하며 제2차 포에니 전쟁(Second Punic War)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

3. 1. 고대 이집트

조지 로울린슨(George Rawlinson)의 저서 『고대 이집트 역사(History of Ancient Egypt)』 1권(1882년)에는 창이 고대 이집트 군대의 공격용 무기로 묘사되어 있다. 이 창은 다른 나라에서 사용된 창보다 가벼웠으며, 긴 얇은 자루로 구성되었다. 자루는 때로는 단순히 뾰족하게 깎여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잎 모양이거나 창촉과 비슷하거나, 네모난 머리가 달려 있고 각도의 돌출부로 자루에 부착되어 있었다.[5] 창의 아랫부분에는 끈이나 술이 달린 머리가 달려 있어서 창을 던진 후 회수할 수 있었다.[5]

이집트 군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특수 군사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6] 이들은 어린 시절 체조에 집중하여 힘, 강인함, 지구력을 길렀고, 특정 연대에 입대하기 전 나이가 들면 창 던지기와 함께 궁술과 전투용 도끼를 연습했다.[7]

창은 이집트 경보병이 주무기로 휴대했으며, 활과 화살 또는 창의 대안으로, 일반적으로 방패와 함께 사용되었다. 경보병들은 또한 곡선 검, 곤봉, 또는 작은 도끼를 보조 무기로 휴대했다.[8] 전투에서 창병들은 "그들의 무기가 모든 타격으로 죽음을 안겨주는 것 같다"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9]

여러 개의 창은 때때로 이집트 전차에 화살통이나 활집에 담겨 휴대되기도 했다.[10] 군사 목적 외에도 창은 식량과 스포츠를 위한 사냥 도구로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1]

3. 2. 고대 그리스

주로 경보병으로 활동하던 펠타스트들은 여러 개의 창을 가지고 있었는데, 종종 투척용 끈(amentum)을 사용하여 사거리를 늘렸다. 펠타스트들은 적의 중장보병인 호플리트 방진(phalanx formation)에 창을 던져 전열을 붕괴시키고, 자군 호플리트들이 약화된 적을 섬멸할 수 있도록 했다. 레케움 전투(battle of Lechaeum)에서 아테네(Athens) 장군 이피크라테스(Iphicrates)는 코린토스(Corinth) 근처에서 작전 중이던 스파르타(Sparta) 호플리트 방진이 투척 무기를 가진 병력의 보호 없이 야지에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했다. 그는 펠타스트 부대로 매복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이피크라테스와 그의 부대는 스파르타 방진에 반복적인 기습 공격을 가하여 스파르타군을 지치게 만들었고, 결국 스파르타군을 격파하여 절반 가까이를 사살했다. 이는 고대 그리스 군사 역사상 펠타스트로만 구성된 부대가 호플리트 부대를 격파한 최초의 기록으로 남았다.

투레오포로이(thureophoroi)와 토라키타이(thorakitai)는 점차 펠타스트를 대체했는데, 긴 단검 외에도 창을 휴대했다.

창은 효과적인 사냥 무기로도 자주 사용되었으며, 끈을 사용하면 큰 사냥감을 쓰러뜨릴 만큼 충분한 힘을 더할 수 있었다. 창은 고대 올림픽(Ancient Olympics)과 다른 판헬레니크 경기(Panhellenic Games)에서도 사용되었다. 창을 특정 방향으로 던졌고, 먼저 던진 사람이 가장 멀리 던져, 팁이 먼저 땅에 닿았을 경우 그 경기에서 승리했다.

3. 3. 고대 로마



기원전 387년, 갈리아인이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로마 공화국 군대에 큰 패배를 안겨주고 로마를 약탈했다. 이 패배 이후 로마인들은 군대를 전면적으로 개혁하고, 기본적인 전술 편제를 그리스식 파랑크스에서 보다 유연한 3열 전진 방진으로 변경했다. 하스타티가 첫 번째 열에, 프린키페스가 두 번째 열에, 트리아리이가 세 번째 열에 위치했다. ''트리아리이''는 여전히 하스타로 무장했지만,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는 짧은 검과 무거운 투창으로 재무장했다.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 열의 각 병사는 두 개의 투창을 휴대했다. 필룸(복수형 ''필라'')으로 알려진 이 무거운 투창은 전체 길이가 약 2미터였으며, 지름 약 7mm, 길이 60cm의 철제 촉과 피라미드형 머리를 가진 나무 자루로 구성되었다. 철제 촉은 소켓식이거나, 더 일반적으로는 평평한 텅으로 넓어졌다. ''필룸''의 무게는 일반적으로 0.9kg에서 2.3kg 정도였으며, 제국 시대에 생산된 버전은 약간 가벼웠다. 그림 자료에 따르면, 관통력을 높이기 위해 촉의 바닥에 납으로 된 공을 단 무기 버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고고학적 표본은 발견되지 않았다.[12] 최근 실험에 따르면 ''필라''의 사거리는 약 30m이지만, 효과적인 사거리는 15m에서 20m에 불과하다.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 군단은 전술 편제에 경보병 유형의 병사를 추가했다. ''벨리테스''는 짧은 검(''글라디우스'' 또는 ''푸지오''), 작은 원형 방패, 그리고 여러 개의 작은 투창(''베르투툼'')으로 무장했다. ''벨리테스''는 적에게 접근하여 투창을 던진 후 군단의 더 무거운 보병 뒤로 후퇴했다. ''벨리테스''는 전쟁 코끼리를 격퇴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으며,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의 전쟁 코끼리를 몰아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다른 로마 장군들이 기원전 2세기 후반과 1세기 초에 군대를 재편성하면서 ''벨리테스''는 점차 해산되거나 더 무장이 강화된 군단병으로 재편성되었을 것이다. ''베르투툼''은 ''필룸''보다 저렴한 단거리 무기였다.

군단병들은 후기 공화국과 초기 제국 시대에 종종 두 개의 ''필라''를 휴대했는데, 때로는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가벼웠다. 표준 전술은 로마 병사가 ''글라디우스''로 돌격하기 직전에 적에게 ''필룸''을 던지는 것이었다.

후기 로마 제국에서 로마 보병은 플룸바타라고 불리는 투창을 사용했다. 플룸바타는 비행 중 안정성과 회전을 제공하기 위해 가죽 날개가 달려 있었고, 무게 중심 바로 앞쪽 샤프트 주위에 타원형 납 중량이 장착되어 있었다. 플룸바타는 필룸보다 훨씬 가벼웠으며, 갑옷 관통력이나 방패 관통 능력은 없었다. 플룸바타는 일반적으로 두세 개가 방패 안쪽의 작은 나무 받침대에 고정되었다. 로마 군대는 적이 접근함에 따라 플룸바타를 던져 적의 움직임과 사기를 저하시키려고 했다. 플룸바타는 로마군에게 치명타로 여겨지기보다는 더 무겁고 사거리가 짧은 필룸보다 더 먼 거리에서 적을 지연시키는 수단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3. 4. 갈리아, 이베리아, 누미디아

갈리아 기병들은 정면 공격에 앞서 적을 약화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창을 던지는 전술을 사용했다. 갈리아 기병들은 마상궁의 파르티아 사격과 유사한 전술로 창을 사용했다. 갈리아인들은 후퇴하는 척하면서 말을 타고 돌아서서 뒤로 창을 던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1]

히스파니아 기병은 팔카타(falcata)와 여러 개의 가벼운 창으로 무장한 경기병이었다. 칸타브리아(Cantabri) 부족들은 말과 창의 조합을 최대한 활용하는 군사 전술을 고안했다. 이 전술에서 기병들은 적을 향해, 그리고 적에게서 멀어지도록 원을 그리며 계속해서 창을 던졌다. 이 전술은 일반적으로 중장보병에 대해 사용되었다. 기병들의 끊임없는 움직임은 느린 보병에 대해 유리한 고지를 제공했고, 표적이 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 기동은 적군을 교란하고 조롱하여 밀집 대형을 흩뜨리도록 설계되었다. 이것은 적 보병, 특히 중무장하고 이동 속도가 느린 로마군단에 대해 흔히 사용되었다. 이 전술은 칸타브리아 원형(Cantabrian circle)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공화정 말기에 다양한 보조 기병이 이탈리아 기병 부대를 완전히 대체했고, 히스파니아 보조 기병이 최고로 여겨졌다.[1]

누미디아인(Numidians)은 북서 아프리카(northwest Africa)의 토착 부족이었다. 누미디아 기병(Numidian cavalry)은 주로 스커미셔(skirmisher)로 활동하는 경기병이었다. 누미디아 기병은 작은 방패와 여러 개의 투창(javelin)으로 무장했다. 누미디아인들은 빠른 기수, 교활한 병사, 그리고 뛰어난 투창 투척수로 명성이 높았다.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Jugurtha)는 "...승마, 투창 투척(javelin throwing)이라는 민족적 활동에 참여했고, 달리기에서 다른 젊은이들과 경쟁했다."고 전해진다.Bellum Iugurthinum|살루스투스, 유구르타 전쟁: 6la 누미디아 기병은 카르타고 군대(Carthaginian Army)의 용병으로 복무했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Second Punic War)에서 한니발(Hannibal)과 스키피오(Scipio) 모두를 지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

4. 중세

중세 시대에는 여러 문화권에서 재블린, 즉 투창을 전투와 사냥에 사용했다.

노르웨이인들은 ''frakka''라 불리는 창을 투척과 찌르기 모두에 사용했다.[13] 앵글로색슨족은 ''france''라 불리는 투창을 사용했으며,[14] 앙곤이라는 갈고리 모양의 투창은 적의 방패를 무력화하거나 방패벽을 교란시키는 데 효과적이었다.[16]

아라곤 왕국의 알모가바르는 아즈코나(azcona)라 불리는 두 개의 무거운 투창을 사용했는데, 이는 로마 군단병의 무기와 유사했다.[17] 아랍 경기병 히네테스는 여러 개의 투창, 검, 방패를 사용하며 레콩키스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8]

웨일스인들은 창을 주요 무기 중 하나로 사용했으며, 창을 던지고 후퇴하는 전술로 잉글랜드 군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아일랜드의 케른들은 갈로글라스를 따라다니며 투창을 주 무기로 사용했다.

중국에서는 청나라의 철촉 투창과 같이 여러 왕조에서 투창을 사용했으며,[19] 치지광의 군대에는 방패와 투창을 함께 사용하는 병사들이 있었다.[20]

4. 1. 노르드, 앵글로색슨

노르웨이인들은 사냥과 전투에 창을 사용했으며, 이에 대한 문헌 및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그들은 투척과 찌르기에 모두 사용하도록 설계된 창을 사용했다. 고대 노르드어로 창은 ''frakka''였다.[13] 앵글로색슨어에서 투창은 ''france''였다.[14] 앵글로색슨 전쟁에서 병사들은 보통 방패벽을 형성하고 덴마크 도끼, 검, 과 같은 무거운 무기를 사용했다. 갈고리 모양의 앙곤을 포함한 투창은 방패벽 뒤에서 공격 무기로 사용되거나, 방어 진형을 이탈하여 적을 공격하는 척후병들이 사용했다.[15] 앵글로색슨 전사들이 사용한 앙곤 투창은 살이나 나무에서 제거하기 어렵도록 설계되어 적이나 적의 방패를 무력화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으며, 적의 방패벽을 교란시킬 가능성이 있었다.[16]

4. 2. 이베리아, 웨일스, 아일랜드

알모가바르(Almogavars)는 아라고네스 보병으로, 단검, 방패, 그리고 아즈코나(azcona)라 불리는 두 개의 무거운 투창을 사용했다.[17] 이들의 장비는 로마 군단병과 비슷했고, 무거운 투창 사용법도 거의 같았다.

히네테스(Jinetes)는 여러 개의 투창, 검, 방패를 사용하는 아랍 경기병이었다. 이들은 스커미싱(skirmishing)과 빠른 기동에 능숙했으며, 16세기까지 레콩키스타 전역에서 아랍 기병전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히네테스는 15세기 이탈리아 보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18]

웨일스인, 특히 북웨일스 사람들은 창을 주요 무기 중 하나로 사용했다. 노르망디 정복과 그 이후 잉글랜드의 웨일스 정복 시기 동안 웨일스인의 주요 전술은 지치고 배고픈 중무장한 잉글랜드 군대에 창을 퍼붓고 나서 잉글랜드 군대가 추격하여 공격하기 전에 산이나 숲으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이 전술은 매우 성공적이었는데, 웨일스군의 피해는 적은 반면 잉글랜드군의 사기를 꺾고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케른(soldier)들은 더 무장이 잘 된 갈로글라스(galloglass)를 따라다니면서 투창을 주된 무기로 사용했다.

4. 3. 중국

중국의 여러 왕조와 왕국들은 투창을 사용했는데, 그 예로 청나라의 철촉 투창이 있다.[19] 치지광의 해적 진압군에는 방패를 든 투창병이 포함되어 있었다.[20]

5. 근대

많은 아프리카 왕국들은 고대부터 투창을 주요 무기로 사용해 왔다. 전형적인 아프리카 전쟁은 근접전을 위한 돌격 없이 투창을 던지는 의식적인 대치 상황을 기반으로 했다.[2] 에스와티니 국기에는 방패와 두 개의 투창이 있는데, 이는 나라의 적들로부터의 보호를 상징한다.[2] --

줄루족 전사들은 아세가이 투창의 긴 버전을 주요 무기로 사용했다.[2]

5. 1. 아프리카

많은 아프리카 왕국들은 고대부터 투창을 주요 무기로 사용해 왔다. 전형적인 아프리카 전쟁은 근접전을 위한 돌격 없이 투창을 던지는 의식적인 대치 상황을 기반으로 했다.[2] 에스와티니 국기에는 방패와 두 개의 투창이 있는데, 이는 나라의 적들로부터의 보호를 상징한다.[2]

샤카의 유일하게 알려진 그림. 긴 투척 창을 주목하십시오


줄루족 전사들은 아세가이 투창의 긴 버전을 주요 무기로 사용했다.[2] 줄루족의 전설적인 지도자 샤카는 군사 개혁을 시작했는데, 이 개혁에서 긴 칼날 같은 촉을 가진 짧은 찌르는 창인 이클와가 줄루족 전사들의 주요 무기가 되었고 근접전 무기로 사용되었다.[2] 아세가이는 버려지지 않았지만 초기 미사일 공격에 사용되었다.[2] 샤카가 줄루 군대에 도입한 더 큰 방패, 찌르는 칼로 사용되는 짧은 창, 그리고 투창 공격의 개시 단계를 통해 줄루 연대는 스쿠툼, 글라디우스, 필룸의 전술적 조합을 사용한 로마 군단과 매우 유사했다.[2]

6. 신화 속 투창

노르드 신화에서 최고 신인 오딘궁니르(Gungnir)라는 작살 또는 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이발디의 아들들(Sons of Ivaldi)이라고 알려진 노르드 드워프(Norse dwarves)들이 만들었으며,[21] 궁니르는 항상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특징이 있었다.[22] 라그나로크 동안, 오딘은 궁니르를 사용하여 늑대 페닐(Fenrir)을 공격하지만 결국 그에게 삼켜진다.[23]

에시르-바니르 전쟁(Æsir-Vanir War) 동안, 오딘은 적진 너머로 작살을 던졌는데,[24] 이는 던지는 사람에게 행운이나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겨졌다.[25]

신 발두르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적인 꿈을 꾸자, 그의 어머니 프리그는 모든 자연의 것들에게 그를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았다. 그러나 겨우살이는 너무 어려서 서약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무시했다. 로키는 이 약점을 알고 겨우살이 가지로 작살이나 다트(dart)를 만들어 맹인 신인 호드를 속여 발두르에게 던져 죽게 만들었다.[27]

루시타니아 신화에서 룬소케시우스(Runesocesius) 신은 "창의 신"으로 여겨진다.

6. 1. 북유럽 신화

노르드 신화에서 최고 신인 오딘궁니르(Gungnir)라는 작살 또는 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이발디의 아들들(Sons of Ivaldi)이라고 알려진 노르드 드워프(Norse dwarves)들이 만들었는데, 그들은 또한 프레이의 배인 스키드블라드니르(Skidbladnir)와 시프의 금발을 만들었다.[21] 궁니르는 항상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특징이 있었다("그 창은 결코 찌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22] (Æsir)들과 거인(Jötunn)들 사이의 최후의 전투인 라그나로크 동안, 오딘은 궁니르를 사용하여 늑대 페닐(Fenrir)을 공격하지만 결국 그에게 삼켜진다.[23]

시간의 시작 무렵, 에시르(Aesir)와 바니르(Vanir) 사이의 에시르-바니르 전쟁(Æsir-Vanir War)(그리고 그 이후의 동맹) 동안, 오딘은 적진 너머로 작살을 던졌다.[24] 관습에 따르면, 이것은 던지는 사람에게 행운이나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겨졌다.[25] 오딘은 또한 지식을 얻기 위한 의식에서 세계수(World Tree)인 이그드라실에 매달려 있는 동안 창에 스스로 상처를 입었지만,[26] 두 경우 모두 그 무기가 궁니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신 발두르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적인 꿈을 꾸기 시작했을 때, 그의 어머니 프리그는 모든 자연의 것들에게 그를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너무 어려서 그러한 엄숙한 서약을 만들거나 존중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겨우살이는 무시했다. 로키가 이 약점을 알게 되자, 그는 겨우살이 가지 중 하나로 작살이나 다트(dart)를 만들어 맹인 신인 호드를 속여 발두르에게 던지게 하고 그를 죽게 만들었다.[27]

6. 2. 루시타니아 신화

룬소케시우스(Runesocesius) 신은 "창의 신"으로 여겨진다.

참조

[1] 논문 Electron microscopic characterization of cell wall degradation of the 400,000-year-old wooden Schöningen spears
[2] 웹사이트 Punctured Horse Shoulder Blade http://humanorigins.[...]
[3] 웹사이트 The Prehistoric Society – Past No. 26 http://www.ucl.ac.uk[...]
[4] 웹사이트 World's Oldest Spears http://www.archaeolo[...]
[5] 서적 History of Ancient Egypt https://play.google.[...] S. E. Cassino 1882
[6] 웹사이트 Ancient Egyptian History for Kids: Army and Soldiers https://www.duckster[...] 2024-02-22
[7] 서적 The Civilization of the Ancient Egyptians https://books.google[...] T.C. & E.C. Jack 1915
[8] 서적 History of Ancient Egypt https://play.google.[...] S. E. Cassino 1882
[9] 서적 History of Ancient Egypt https://play.google.[...] S. E. Cassino 1882
[10] 서적 History of Ancient Egypt https://play.google.[...] S. E. Cassino 1882
[11] 웹사이트 The Guide to the World of Ancient Egyptians http://www.egyptiand[...] 2017-02-07
[12] 서적 (추가 정보 필요) 1998
[13] 서적 Germania Clarendon Press 1999
[14] 서적 (추가 정보 필요) 1999
[15] 서적 Anglo-Saxon Weapons and Warfare Tempus Publishing 1999
[16] 웹사이트 The Thegns of Mercia: Weapons http://thethegns.blo[...]
[17] 서적 Los Almogávares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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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적 Edda Everyman's Library 1995
[22] 서적 (추가 정보 필요) 1995
[23] 서적 (추가 정보 필요) 1995
[24] 서적 Poetic Edda Oxford World's Classics 1999
[25] 서적 (추가 정보 필요) 1999
[26] 서적 (추가 정보 필요) 1999
[27] 서적 (추가 정보 필요)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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