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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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철가면은 17세기 프랑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죄수로, 검은 벨벳 가면을 쓰고 여러 감옥을 전전하다가 사망한 인물이다. 1669년 피네롤 감옥에 처음 수감되었으며, 이후 엑실, 생트마르그리트 섬을 거쳐 바스티유 감옥에서 사망했다. 철가면의 정체에 대해서는 루이 14세의 사생아, 이복 형제, 이탈리아 외교관 에르콜레 안토니오 마티올리, 프랑스 장군 비비앙 드 뷜롱드, 찰스 2세의 아들 제임스 드 라 클로슈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브라줄론 자작》을 비롯하여 여러 문학 작품, 영화, 드라마, 만화 등 대중문화에서 소재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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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가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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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개요 | |
이름 | 철가면 (L'Homme au Masque de Fer) |
다른 이름 | 외스타슈 도제 (Eustache Dauger) 라 투르 (La Tour) 이전 죄수 (L'ancien prisonnier) 마르키올리 (Marchioly) |
직업 | 알 수 없음 |
알려진 이유 | 정체에 대한 미스터리 |
유죄 판결 상태 | 감옥에서 사망 |
수감 기간 | 종신형 |
추적 대상 | 루이 14세를 대신한 루보아 (Louvois) |
수감 장소 | 피네롤 (Pignerol) 던전 (1669–1681) 엑실 (Exilles) 요새 (1681–1687) 생마르그리트 섬 (Île Sainte-Marguerite) 요새 (1687–1698) 바스티유 (Bastille) 베르토디에르 탑 (1698–1703) |
체포 시기 | 1669년 7월 28일 – 8월 24일 |
기본 정보 | |
출생일 | 알 수 없음 |
출생지 | 알 수 없음 |
사망일 | 1703년 11월 19일 |
사망지 | 바스티유, 파리, 프랑스 |
안장 장소 | 생폴 묘지, 파리 |
배경 | |
철가면 | 프랑스어: L'Homme au Masque de Fer |
생마르 (Saint-Mars) | 프랑스어: Bénigne Dauvergne de Saint-Mars |
2. 수감 과정
1669년, 루이 14세의 명령에 따라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죄수가 피네롤로 감옥의 책임자 생 마르스에게 맡겨졌다. 생 마르스는 이 죄수를 직접 관리하며 여러 감옥으로 이송했는데, 죄수는 생트마르그리트 섬을 거쳐 1698년 바스티유에 최종 수감되었다.
수감 기간 동안 죄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얼굴을 가리는 가면 착용을 강요받았으며, 그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삼엄한 감시가 이루어졌다. 만약 가면을 벗거나 자신의 신원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면 즉시 살해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기에, 생 마르스는 항상 무장한 상태로 죄수를 대면했다고 전해진다.
이 죄수는 1703년 11월 19일 바스티유에서 사망했다. 사망 후 '마르쇼와리'라는 가명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그의 신원을 추정할 수 있는 모든 소지품과 기록은 철저히 폐기되었다.
2. 1. 체포 및 투옥

가면을 쓴 죄수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669년 7월 19일이다. 이날 프랑스의 루이 14세 재상인 루부아 후작은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피네롤 감옥의 간수 베니그 도베르뉴 드 생마르에게 편지를 보내, '유스타슈 도제'라는 이름의 죄수가 다음 달쯤 도착할 것이라고 알렸다.
루부아는 생마르에게 외부에서 아무도 엿들을 수 없도록 여러 개의 문이 달린 감방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생마르는 도제에게 하루 한 번 식사와 필요한 물품만 제공해야 했으며, 도제가 자신의 기본적인 필요 외에 다른 말을 하면 즉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라는 지시도 받았다. 루부아는 도제가 "단지 하인"에 불과하므로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역사가들은 이 편지에서 '유스타슈 도제'라는 이름이 나머지 내용과 다른 필체로 쓰여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는 편지 본문은 서기가 작성하고, 죄수의 이름은 루부아 후작이 직접 나중에 추가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유스타슈 도제는 1669년 7월 28일 됭케르크 수비대 사령관 알렉상드르 드 보로이 대위에게 체포되었고, 같은 해 8월 24일 피네롤 감옥에 도착했다. 실제 체포는 칼레에서 이루어졌으며, 지역 총독조차 이 사실을 몰랐다는 증거가 있다. 당시 보로이 대위는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통해 프랑스로 들어온 스페인 군인들을 추적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무렵부터 죄수의 정체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피네롤 감옥은 국가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인물들을 소수 수용하는 곳이었다. 당시 이곳에는 외교관 에르콜레 안토니오 마티올리 백작, 전 재무장관 니콜라 푸케, 로장 후작 등 다른 중요 인물들도 수감되어 있었다. 생마르는 루부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제가 다른 수감자들과 달리 불평하거나 탈출을 시도하지 않고 조용하며, "신의 뜻과 왕의 뜻에 순종하는" 인물이라고 보고했다.
2. 2. 푸케의 하인
피네롤 감옥에는 '가면을 쓴 죄수'(나중에 철가면으로 알려짐) 외에도 루이 14세 시절의 고위 관리였던 니콜라 푸케와 로장 공작 같은 중요한 인물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푸케에게는 하인이 있었는데, 그가 병에 걸려 더 이상 푸케를 돌볼 수 없게 되었다.이에 감옥 책임자였던 생마르는 루부아 후작에게 편지를 보내, 수감자 중 한 명인 '유스타슈 도제'(가면을 쓴 죄수)가 푸케의 하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다. 루부아는 이를 승인하면서, 도제가 푸케와 로장이 함께 있을 때는 그 자리에 있지 못하도록 조건을 달았다. 즉, 도제는 푸케가 로장을 만날 때는 자리를 피해야 했다.
도제는 이 지시에 따라 푸케의 시중을 들었으나, 1680년 푸케가 감옥에서 사망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푸케가 죽은 후, 도제와 또 다른 수감자였던 라 리비에르(La Rivière프랑스어)는 함께 비밀 감방으로 옮겨졌다.
2. 3. 이후의 감옥
1681년, 피네롤로 감옥의 책임자였던 생마르는 엑실 요새(Exilles)로 전근하면서 '유스타슈 도제'로 알려진 죄수를 데리고 갔다. 이때 '라 리비에르'라는 다른 죄수도 함께 이송되었다. 1687년, 라 리비에르가 사망한 후, 생마르는 레랭 제도에 있는 생트마르그리트 섬(Île Sainte-Marguerite)의 요새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죄수 역시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 시기부터 죄수가 항상 가면을 쓰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1698년, 생마르는 파리의 바스티유 책임자가 되었고, 죄수도 함께 바스티유로 이송되었다. 당시 바스티유의 기록에는 이 죄수가 검은 벨벳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세간에는 철로 된 가면을 썼다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지만, 실제로는 천(벨벳)으로 만든 가면이었으며, 사람을 만날 때만 착용했고 평소에는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죄수에 대한 보안은 매우 엄격했다. 생마르는 "만약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벗으려 하거나, 자신의 정체에 대해 말하려 하면 그 자리에서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 때문에 죄수를 만날 때는 항상 장전된 권총을 소지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철저한 감시 때문에 감옥에서 죄수를 돌봤던 사람들조차 그의 맨얼굴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 죄수는 1703년 11월 19일 바스티유에서 사망했다. 사망 후에는 "마르쇼와리"라는 가명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그가 사용했던 가구나 소지품 등 신원을 추정할 수 있는 모든 물건은 즉시 폐기되었다고 한다.
3. 정체에 대한 여러 가지 설
프랑스 역사가 장-크리스티앙 프티필스(Jean-Christian Petitfils프랑스어)는 그의 저서 3판(2004)에서 1669년부터 1992년 사이에 당대 문서에 소문으로 언급되거나 인쇄물에 제안된 실존 또는 가상의 52명에 달하는 후보 목록을 수집했다. 철가면의 정체에 대해서는 당대부터 수많은 소문과 추측이 난무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다양한 가설들이 등장했다.
주요 후보군으로는 루이 14세의 친족(이복형, 쌍둥이 형제 등), 외국 귀족이나 외교관, 프랑스 장군, 심지어는 평범한 하인까지 매우 다양하게 거론되었다. 예를 들어 볼테르는 죄수가 루이 14세의 이복형이라고 주장했고[1], 알렉상드르 뒤마는 이를 바탕으로 쌍둥이 형제 설을 소설화했다. 또한 찰스 2세의 서자 제임스 드 라 클로슈[2], 루이 14세의 이복형 유스타슈 도제(Eustache Dauger프랑스어)[4], 이탈리아 외교관 마티올리, 프랑스 장군 비비앙 드 뷜롱 등 다양한 인물들이 후보로 제시되었다. 각 가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3. 1. 당대의 소문
철가면의 정체에 대한 소문은 그가 수감된 직후부터 돌기 시작했다. 죄수가 피네롤에 도착한 지 일주일 후인 1669년 8월 31일, 감옥 책임자 생마르스는 루부아 후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죄수가 '프랑스 원수' 또는 '파르망의 의장'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8개월 뒤인 1670년 4월 12일, 생마르스는 루부아에게 죄수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이 호기심을 잠재우기 위해 과장된 이야기를 퍼뜨렸다고 밝혔다. "나는 그들을 놀리기 위해 과장된 이야기를 합니다."1687년 1월, 죄수가 생마르그리트 섬 요새의 새 감방으로 옮겨진 지 몇 달 후, 생마르스는 다시 루부아에게 편지를 써서(1687년 5월 3일) 퍼지는 소문에 대해 언급했다. "모두가 내 죄수가 누구인지 추측하려고 합니다." 같은 해 9월 4일, ''누벨 에클레시아스티크''(Nouvelles Écclésiastiques)라는 간행물은 니콜라 푸케의 형제 루이가 생마르스의 말을 인용한 편지를 실었는데, "죽었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이 죽은 것은 아니다"라는 내용과 함께 죄수가 보포르 공작일 수 있다는 암시를 담고 있었다. 4개월 후인 1688년 1월 8일, 생마르스는 루부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소문을 다시 언급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가 고 크롬웰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라고 덧붙였다.
1711년 10월 10일, 루이 14세의 처제인 팔라틴의 엘리자베스 샤를로트 공주는 고모 하노버의 조피아 선제후비에게 보낸 편지에서, 죄수는 "가면을 벗으면 죽이도록 두 명의 머스킷병이 곁에 있다"고 전했다. 그녀는 죄수가 매우 독실하며 좋은 대우를 받고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다고 묘사했다. 약 2주 후인 10월 22일에 보낸 또 다른 편지에서는, 그가 "버윅 공작과 윌리엄 3세 국왕에 대항하는 음모와 관련된 영국 귀족"이라는 소문을 궁정에서 들었다고 덧붙였다. 이는 당시 궁정 내에서 돌던 소문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3. 2. 왕의 친족
수감자의 신원에 대한 가장 지속적인 이론 중 일부는 그가 루이 14세의 친척이라고 가정한다. 이는 수감 기간 동안 비밀 유지가 중요하게 여겨졌고, 이로 인해 가면을 쓴 사람은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임에 틀림없다는 추측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론은 역사가들이 수감자가 "단순한 하인"이었으며, "그가 하도록 고용된 일"과 "그가 알고 있던 것" 때문에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기록 보관소를 통해 밝히기 훨씬 전인 1700년대에 등장했다. 이 초기 이론들은 저자의 상상력에 기반하여 수수께끼에 대한 선정적인 해명을 낭만적으로 부각시킨 경향이 있다.그러나 몽그레디앙(1952)과 눈(1988)과 같은 역사가들은 루이 14세에게 사생아가 있었다는 설(그가 형이든, 쌍둥이든, 동생이든 간에)은 왕비가 어떻게 임신 사실을 숨기고 비밀리에 출산할 수 있었는지 등에 대한 신뢰할 만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몽그레디앙은 "역사가들은 그것을 조금도 믿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친족 관련 가설들이 제기되었다.
- 볼테르는 죄수가 재상 쥘 마자랭과 루이 13세의 왕비 안 도트리슈 사이에서 태어난 루이 14세의 이복형이라고 주장했다.[1]
- 알렉상드르 뒤마는 이 설을 바탕으로 죄수가 루이 14세의 쌍둥이 형제라는 설정의 소설 『철가면』을 썼다. 일부 각색된 작품에서는 루이 14세와 철가면의 남자가 뒤바뀌는 내용도 등장한다.
- 1801년 나폴레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죄수가 실제 루이 14세이며, 마자랭에 의해 다루기 쉬운 대역으로 교체되었다는 설이 퍼졌다. 이 이야기에는 죄수가 옥중에서 아이를 낳았고, 그 후손이 코르시카 섬으로 건너가 나폴레옹의 조상이 되었다는 내용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 아서 반스(Arthur Barnes)는 1908년 저서 『가면의 남자』(''The Man of the Mask'')에서 죄수가 찰스 2세의 서자 제임스 드 라 클로슈(James de la Cloche)라고 주장했다.[2] 그는 프랑스와의 연락 역할을 맡았으나, 영국과의 관계가 드러날 것을 우려한 루이 14세에 의해 감금되었다는 것이다.
- 마르셀 파뇰(Marcel Pagnol)은 1965년 저서 『철가면의 비밀』(''Le Secret du masque de fer'')에서 제임스 드 라 클로슈가 실제로는 루이 14세의 쌍둥이 형제이며, 이 인물이 철가면이라고 주장했다.[3]
- 해리 톰슨(Harry Thompson)은 1987년 저서 『철가면 - 역사에 봉인된 남자』(''The Man in the Iron Mask: A Historical Detective Investigation'')에서 가면의 남자가 루이 14세의 이복 형인 유스타슈 도제(Eustache Dauger)라고 주장했다.[4] 이는 현재 유력한 설 중 하나로 여겨진다.
- 기류 미사오는 1991년 저서에서 유스타슈 도제를 철가면으로 지목하며,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드 도제 카보와(François de Dauger Cavoye)가 루이 14세의 친부라고 주장했다. 이는 니콜라 푸케에 대한 처분과 루이 15세의 발언 등을 근거로 제시되었다.
3. 3. 이탈리아 외교관
1800년대에 널리 지지받았던 또 다른 유력한 후보는 푸케의 동료 죄수였던 에르콜레 안토니오 마티올리 백작(Count Ercole Antonio Mattioli)이다. 그는 이탈리아 외교관으로, 1678년 빚에 시달리던 만토바 공작 카를로 4세를 대신하여 프랑스 국경 근처의 전략적 요충지인 카살레 요새 도시를 프랑스에 매각하는 협상을 진행했다. 프랑스 점령은 인기가 없을 것이므로 비밀 유지가 중요했지만, 마티올리는 매각이 완료되기도 전에 수수료를 챙기고 프랑스의 적인 스페인에게 협상 내용을 유출했다. 스페인은 프랑스군이 도시를 점령하기 전에 자체적으로 매입을 시도했다. 이 배신 행위로 마티올리는 프랑스에 납치되어 1679년 4월 피네롤 감옥에 수감되었다. 프랑스는 결국 2년 뒤 카살레를 점령했다.조지 아가-엘리스는 1820년대 프랑스 문서 보관소의 자료를 검토한 후 마티올리가 철가면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의 책은 1826년 영어로 출판되었고, 1830년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졌다. 70년 후 독일 역사가 빌헬름 브뢰킹도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로버트 챔버스의 ''데이북'' 역시 이 주장을 뒷받침하며, 마티올리가 생애 마지막 13년을 바스티유에서 보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 발견된 생-마르(Saint-Mars, 당시 감옥 책임자)의 편지들은 마티올리가 피네롤과 생트마르그리트 섬에만 수감되었고, 엑실(Exilles) 요새나 바스티유에는 수감된 적이 없음을 시사한다. 이 때문에 현재는 마티올리가 철가면이라는 설은 설득력이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3. 4. 프랑스 장군
1890년 프랑스 군사 역사가인 루이 장드롱(Louis Gendron)은 몇몇 암호화된 편지를 발견하여 프랑스 육군 암호 부서의 에티엔 바제리에게 전달했다. 3년 후, 바제리는 루이 14세의 대암호로 작성된 일부 메시지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그중 하나는 죄수를 언급하며 그를 비비앙 드 뷜롱드(Vivien de Bulonde) 장군으로 지목했다. 루부아 후작이 보낸 편지 중 하나는 뷜롱드의 구체적인 죄목을 언급하고 있었다.1691년 쿠네오 공방전 당시, 뷜롱드는 오스트리아에서 오는 적군을 우려하여 서둘러 철수를 명령했고, 이 과정에서 탄약과 부상병들을 버려두었다. 이에 분노한 루이 14세는 다른 편지에서 그를 "피네롤 요새로 이송하여 밤에는 감옥에 가두고 경비를 서게 하며, 낮에는 330 309와 함께 성벽을 걷도록 허용하라"고 구체적으로 명령했다. 여기서 숫자 '330'은 '가면'(masque)을, '309'는 마침표를 의미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7세기 프랑스어에서 'avec un masque'는 단순히 "가면을 쓰고"라는 의미였을 가능성도 있다.
일부에서는 이 암호 편지들이 철가면의 정체에 대한 다른 설명이 거의 필요 없을 정도의 강력한 증거라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자료에 따르면, 뷜롱드의 체포는 비밀이 아니었으며 당시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또한 그는 1691년 12월 11일 국왕의 명령으로 석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결정적으로, 뷜롱드는 1709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철가면을 쓴 죄수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시점보다 6년이나 뒤의 일이다. 이러한 연대기적 모순 등으로 인해 뷜롱드 장군 설은 현재 거의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
3. 5. 찰스 2세의 아들
찰스 2세의 아들들이 철가면의 정체라는 설도 제기되었다.1908년, 몬시뇰 아서 반스는 철가면이 제임스 드 라 클로슈라고 주장했다. 그는 찰스 2세의 사생아로 추정되는 인물로, 아버지 찰스 2세와 프랑스 가톨릭 궁정 사이의 비밀 연락책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았다. 반스는 루이 14세가 영국과의 관계가 드러나는 것을 우려하여 그를 감금했다고 설명했다.[2] 마르셀 파뇰은 1965년 저서 『철가면의 비밀』에서[3] 제임스 드 라 클로슈가 실제로는 루이 14세의 쌍둥이 형제이며, 저지 섬에서 자신이 찰스 2세의 사생아라고 믿으며 자랐다고 추측했다.
찰스 2세의 또 다른 사생아인 몬머스 공작 역시 철가면 후보로 거론된다. 프로테스탄트였던 몬머스 공작은 가톨릭 신자였던 삼촌 제임스 2세에 맞서 몬머스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1685년에 처형되었다. 하지만 1768년, 생-푸아라는 작가는 몬머스 공작 대신 다른 사람이 처형되었으며, 실제 몬머스 공작이 철가면을 쓴 죄수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루이 14세가 동맹 관계인 제임스 2세를 돕는 한편, 자신의 조카이기도 한 몬머스 공작을 죽이지 않기 위해 이런 조치를 취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생-푸아의 주장은 몬머스 공작의 처형이 조작되었다는 당시의 근거 없는 소문과 의혹에 기반한 것이었다.
3. 6. 유스타슈 도제 드 카보예
루이 14세 시대의 전쟁장관이었던 루부아 후작은 감옥 관리자 생마르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철가면을 쓴 죄수의 이름을 Eustache Dauger|외스타슈 도제프랑스어라고 언급했다. 오랫동안 이 이름은 감옥에서 사용된 가명으로 여겨졌으나, 역사가 모리스 뒤비비에(Maurice Duvivier)는 1932년 저서에서 이 이름이 실존 인물 '외스타슈 도제 드 카보예'(Eustache Dauger de Cavoye프랑스어)의 진짜 이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뒤비비에는 기록 보관소를 조사하여 추기경 리슐리외의 머스킷티어 경비대 대위였던 프랑수아 도제 드 카보예의 가문을 찾아냈다. 프랑수아는 루이 14세의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안 여왕의 시녀 마리 드 세리냥과 결혼하여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들의 셋째 아들인 외스타슈 도제 드 카보예는 1637년 8월 30일에 태어나 1639년 2월 18일에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와 두 형이 전투에서 사망하자 외스타슈가 명목상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뒤비비에는 외스타슈 도제 드 카보예가 젊은 시절 여러 스캔들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 1659년 부활절 주말, 비본 공작의 초대로 로와시앙브리 성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는데,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이 검은 미사를 거행하고 돼지를 "잉어"로 세례하는 등 신성 모독적인 행위를 저질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사건으로 여러 가담자가 처벌받았지만, 카보예의 처분에 대한 기록은 없다.
- 1665년, 생제르맹앙레 성 근처에서 술에 취해 시종과 싸우다 그를 죽였다고 한다. 당시 루이 14세가 근처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국왕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되었고, 카보예는 육군에서 사임해야 했다.
- 어머니는 사망 1년 전 작성한 유언장에서 장남인 유스타슈 대신 막내아들 루이에게 대부분의 재산을 물려주었다. 상당한 빚을 지고 있던 유스타슈는 "음식과 유지비"를 겨우 감당할 정도의 돈만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뒤비비에는 더 나아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카보예가 1677년에서 1682년 사이에 발생한 독극물 사건에 연루되었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 이 사건은 고위층 인사들이 흑마술과 독살에 연루된 스캔들이었는데, 루이 14세의 정부였던 몽테스팡 부인이 연루된 정황이 드러나자 왕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조사 과정에서 '오제'라는 이름의 외과 의사가 흑마술에 사용될 독극물을 공급했다는 정보가 나왔는데, 뒤비비에는 돈이 필요했던 도제 드 카보예가 바로 이 '오제'이며, 이후 '외스타슈 도제'라는 이름으로 수감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1680년 루부아가 생마르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외스타슈 도제'가 푸케의 하인으로 일했으며, 푸케가 감옥에서 사망한 후 그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특정 물건들을 만들 수 있었던 방법과 필요한 약품을 어떻게 구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었다. 뒤비비에는 이를 근거로 도제 드 카보예가 루부아와 그의 정적 콜베르 사이의 권력 다툼 속에서 푸케를 독살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1953년 프랑스 역사학자 조르주 몽그레디앵(Georges Mongrédien)은 외스타슈 도제 드 카보예가 1668년부터 파리의 생라자르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는 문서를 발견했다. 생라자르 감옥은 수도사들이 운영하는 일종의 정신병원으로, 많은 귀족 가문이 골칫거리 자녀를 가두는 데 이용했다. 카보예는 1680년 이후에도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철가면 죄수 '외스타슈 도제'가 수백 마일 떨어진 남부 피네롤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시기와 명백히 일치하지 않는다.
몽그레디앵이 발견한 문서에는 카보예가 1678년 6월 20일 여동생 파브르그 후작부인에게 보낸 편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편지에서 카보예는 감옥에서의 부당한 처우에 불만을 토로하며, 10년 넘게 갇혀 있었고 형제 루이와 매형에게 속았다고 호소했다. 그는 루이 14세에게도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 자유를 요청했지만, 왕은 1678년 8월 17일 생라자르 원장에게 "M. 드 카보예가 당신 또는 선교사 사제의 입회 하에서만, 그리고 여동생을 포함한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뿐이다. 당시 생라자르에 함께 수감되었던 루이-앙리 드 로메니 드 브리엔이 쓴 시에 따르면, 외스타슈 도제 드 카보예는 1680년대 후반 과음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증거들로 인해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외스타슈 도제 드 카보예가 철가면을 쓴 죄수와는 다른 인물이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해리 톰슨(Harry Thompson)은 저서 『철가면 - 역사에 봉인된 남자』[4](1987)에서 도제를 루이 14세의 이복 형제라고 주장하며 여전히 유력한 후보로 보았고, 기류 미사오 역시 그를 철가면으로 지목하며 더 나아가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카보예가 루이 14세의 친부일 수 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3. 7. 하인
1890년 프랑스 역사가 쥘 레르는 니콜라 푸케에 대한 전기에서 유스타슈 도제를 푸케의 집사로 언급했다. 레르는 '유스타슈 도제'가 죄수의 본명이며, 특정 비밀 임무를 수행한 전문 집사였을 것으로 보았다. 그는 도제가 서류 제거, 납치 등 민감한 임무를 맡았고, 임무 완료 후 비밀 유지를 위해 투옥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한, 레르는 루부아가 도제와 다른 죄수 라줴를 격리하려 한 이유를 도버 비밀 조약 협상과 연관 지어 추측했다. 도제가 협상 중 됭케르크 근처에서 체포되었고, 라줴 역시 협상에 관여했기 때문에 서로 아는 사이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2016년 미국 역사가 폴 소니노는 유스타슈 도제가 마자랭 추기경의 재무 담당자였던 앙투안-에르큘 피콩의 집사였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소니노에 따르면, 마자랭은 정치가이자 고리대금업자로서 이중생활을 했으며, 잉글랜드의 찰스 1세의 미망인 헨리에타 마리아의 재산을 횡령했다. 루이 14세는 이를 알고 있었고, 잉글랜드의 찰스 2세가 부모의 재산 반환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669년, 루이 14세는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전쟁에 찰스 2세를 끌어들이려 했고, 이 과정에서 마자랭의 재산 문제가 불거질 것을 우려했다. 소니노는 피콩의 집사였을 수 있는 도제가 마자랭의 재산 처리에 대해 무언가를 폭로하려 했기 때문에 체포되었고, 과거에 대해 발설하면 살해될 것이라는 위협 속에 투옥되었다고 결론지었다.
2021년 영국 역사가 조세핀 윌킨슨은 프랑스 역사가 베르나르 케어가 1987년에 제시한 이론을 다시 조명했다. 케어는 '유스타슈'가 죄수의 성이며, '도제'는 '당제(Dangers)'의 오기로, 죄수가 앙제 출신임을 나타내는 표식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윌킨슨은 또한 쥘 레르와 장-크리스티앙 프티필스가 제기한 가설을 지지하며, 집사였던 도제가 잉글랜드의 헨리에타를 위해 일하던 중 도버 비밀 조약 협상이라는 민감한 시기에 루이 14세와 찰스 2세 사이의 관계를 해칠 수 있는 경솔한 행동을 했을 수 있다고 보았다. 1669년 7월, 루이 14세가 갑자기 헨리에타와 소원해진 사건과 그달 말 도제가 칼레에서 체포된 사건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고 윌킨슨은 주장했다.
4. 역사적 문서 및 기록 보관소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 당시, 폭도들은 1659년부터 꼼꼼하게 정리된 방대한 양의 문서 기록 보관소를 발견했다. 이 기록 보관소에는 바스티유에 수감된 모든 죄수뿐만 아니라, ''앙프랑트''(lettre de cachet프랑스어)에 의해 파리 내에서 투옥, 추방 또는 재판을 받은 모든 사람의 기록이 보관되어 있었다. 프랑스 혁명 직전에는 수십만 건의 문서가 쌓여 있었다.
요새가 약탈당하는 이틀 동안 많은 문서가 불태워지고, 찢어지고, 해자에 던져지거나 도난당했다. 일부 문서는 수집가, 작가, 변호사 등에게 넘어갔고, 러시아 대사관 무관이었던 피에르 루보프스키는 획득한 문서를 1805년 알렉산드르 1세에게 팔아 예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많은 문서가 프랑스와 유럽 전역으로 흩어졌다. 7월 15일에는 병사들이 요새에 배치되어 기록 보관소의 추가 약탈을 막았고, 16일에는 선거 위원회가 기록 보관소 구출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7월 24일, 위원회는 시민들에게 문서를 오텔 드 빌로 반환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회수된 문서와 남은 기록들은 결국 생 루이 드 라 퀼튀르 수도원에 위치한 시립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1797년 4월 22일, 위베르 파스칼 아메이용이 아르세날 도서관의 수석 사서로 임명되면서 바스티유 기록 보관소는 그의 관리하에 놓였다. 그러나 방대한 양의 문서(약 60만 건)에 압도된 사서들은 이를 뒷방에 보관했고, 40년 이상 방치되었다. 1840년, 프랑수아 라바이송이 아르세날 도서관 부엌 바닥 아래에서 이 문서 뭉치를 재발견했으며, 이후 50년에 걸친 고된 복원 작업을 거쳤다. 문서에 번호가 매겨지고 목록이 작성되어 20세기 초에 출판되었고, 마침내 바스티유 기록 보관소는 아르세날 도서관 방문객 누구나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아르세날 도서관 외에도 "철가면"의 수수께끼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참고한 다른 여러 기록 보관소가 있다.
기록 보관소 | 원어명 |
---|---|
외무부 문서 보관소 | Archives des Affaires étrangères프랑스어 |
국립 문서 보관소 | Archives Nationales프랑스어 |
프랑스 국립 도서관 |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프랑스어 |
생트-주느비에브 도서관 | Bibliothèque Sainte-Geneviève프랑스어 |
국방 역사 기록 서비스 | Service Historique de la Défense프랑스어 (Anciennes Archives de la Guerre) |
마르셀 파뇰은 그의 역사 에세이에서 기록 보관소를 참조하여 철가면의 정체를 밝히려 노력한 많은 역사가들을 언급했다. 조셉 들로르(1789–1847), 마리우스 토팽(1838–1895), 테오도르 융(1833–1896), 모리스 뒤비비에(18??–1936), 조르주 몽그레디앙(1901–1980)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과 더불어 피에르 루-파질락(1746–1833), 프랑수아 라베이송(1811–1884), 쥘 루아즐뢰르(1816–1900), 쥘 레어 (1836–1907), 프란츠 펑크-브렌타노 (1862–1947) 등은 관련 역사적 문서를 발굴하고 출판하여 연구 목표 달성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몽그레디앙은 1952년, 이전 연구자들이 선택적으로 인용했던 역사적 문서 전체를 참조한 연구를 최초로 출판했다. 그는 특정 후보를 지지하기보다는 모든 문서에 나타난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분석하고자 했다. 쥘 레어가 1890년에 처음 제안한 "외스타슈 도제" 후보에 주목하며, 몽그레디앙은 생마르스의 관리하에 있던 죄수들 중 1669년 '도제'라는 가명으로 체포되어 1703년 바스티유에서 사망한 인물만이 철가면의 유일한 후보가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비록 이 죄수의 실제 신원이나 장기 수감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몽그레디앙의 연구는 생년월일이나 생활 환경이 알려진 다른 많은 후보들을 배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5년 10월, 몽그레디앙은 저널 ''La Revue des Deux Mondes프랑스어''에 파뇰의 에세이 초판에 대한 서평을 게재했다. 이 서평의 마지막 부분에서 몽그레디앙은 빈센스 성에 위치한 국방부 기록 보관소에 여전히 분류되지 않고 목록화되지 않은 루부아의 서신 묶음이 보관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언급했다. 그는 만약 그렇다면, 이 묶음에는 1669년 7월에 "외스타슈 도제"가 덩케르크 근처에서 체포된 이유를 밝히는 편지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
5. 대중문화
철가면 이야기는 그 미스터리함과 극적인 요소, 특히 죄수가 루이 14세의 쌍둥이 형제라는 설 등으로 인해 오랫동안 대중문화의 인기 있는 소재가 되어 왔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브라줄론 자작》과 이를 바탕으로 한 여러 영화가 대표적이다.
기록상 죄수가 실제 쓴 가면은 벨벳 같은 천으로 추정되지만, 대중적인 상상 속에서는 종종 강철 가면으로 그려졌다. 이 강렬하고 그로테스크한 '철가면' 이미지는 이야기 자체의 매력을 넘어, 원래 전설과 동떨어진 다양한 파생 작품을 낳는 독립적인 모티브가 되었다.
일본의 구로이와 루이코 번안 소설처럼 해외 작품을 각색한 경우 외에도, 오구리 무시타로의 『20세기 철가면』,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만화 『철면 탐정 겐』, 스케반 형사 시리즈, 기동전사 건담 F91의 카롯조 로나, 우주의 기사 테카맨, 코미디 프로그램(LIFE! ~인생에 바치는 코미디~), 라이트 노벨(C3 -시 큐브-) 등 다양한 장르와 매체에서 철가면 모티브를 찾아볼 수 있다.
철가면을 소재로 한 구체적인 문학 작품이나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관련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5. 1. 문학
철가면 이야기는 역사 연구의 대상일 뿐 아니라 수많은 문학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특히 죄수가 루이 14세의 쌍둥이 형제라는 전설은 여러 허구 작품에서 다루어졌는데,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브라줄론 자작》(1848–1850)이 대표적이다. 뒤마는 이를 바탕으로 1861년 희곡 《바스티유의 죄수》를 발표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구로이와 루이코가 포르튀네 뒤 부아고베의 소설 ''Les deux merles de m. de Saint-Mars''(생마르 씨의 두 마리 개똥지빠귀, 1878)를 번안하여 《철가면》이라는 제목으로 1892년 12월부터 1893년 6월까지 신문 "만초보"에 연재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원작은 해외에서 거의 잊혔지만, 루이코의 번안 소설은 일본에서 여러 차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에도가와 란포가 이를 아동용으로 다시 쓴 책(1938년) 역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이 외에도 다양한 매체로 소개되며 일본에 '철가면' 이야기를 널리 알렸다. 큐쇼 주란 역시 1954년 번안 소설 《진설 철가면》을 발표했다.
모리스 르블랑의 《기암성》(1908-1909)에서는 철가면을 쓴 인물이 '기암성의 비밀'이라는 문서를 작성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후지모토 히토미의 역사 소설 《부르봉의 봉인》 역시 루이 14세와 철가면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다.
이 외에도 철가면을 소재로 한 다양한 문학 작품들이 있다.
구분 | 저자 | 작품명 | 연도 | 비고 |
---|---|---|---|---|
소설 | 샤를 드 피유 무이, 슈발리에 드 | 철가면, 또는 아버지와 아들의 놀라운 모험 | 1747 | |
장-조제프 레뇨-와랭 | 철가면을 쓴 남자 | 1804 | 4권 | |
엘리자베스 귈나르 브로생 드 뫼레 | 철가면을 쓴 남자, 또는 유명한 쌍둥이의 이야기 | 1821 | 4권 | |
알렉상드르 뒤마 | 브라줄론 자작, 또는 20년 후 | 1848–1850 | 19권, 다르타냥 이야기 제3부 | |
L. 르투르네르 | 철가면을 쓴 남자의 이야기 | 1849 | ||
카미유 레니에 | 철가면 | 1857 | ||
조아킴 메이노 | 철가면, 생트-마르그리트에서의 그의 포로 생활 일기 | 1858 (초판) | ||
T. 로브빌 드 | 철가면을 쓴 남자, 또는 두 쌍둥이 | 1865 | ||
E. A. 쾨니히 | 철가면을 쓴 남자, 또는 파리의 몽유병자 | 1873 | ||
옥타브 페레 | 철가면을 쓴 남자 | 1876 | ||
포르튀네 뒤 부아고베 | 생-마르 씨의 두 검은새 (Les deux merles de m. de Saint-Mars) | 1878 | 구로이와 루이코 번안 《철가면》의 원작 | |
에드몽 라두세트 | 철가면 | 1910 | ||
폴 페발, 피스 & 미셸 라세 | 철가면의 탈출 | 1928 | ||
르네 뒤낭 | 철가면 또는 감옥에 갇힌 사랑 | 1929 | ||
아르튀르 베르네드 | 철가면을 쓴 남자 | 1930 | ||
장 케르레크 드 | 철가면의 연인 | 1927 (초판) | ||
클레망 마시니 드 | 18세기의 가장 극적인 수수께끼: 철가면을 쓴 남자의 진실한 이야기 | 1964 | ||
장-폴 데스프라 | 부르봉 왕가의 비밀 | 1991 | ||
줄리에트 벤조니 | 국가 기밀, 제3권, 가면을 쓴 죄수 | 1998 | ||
희곡 | 아르놀 | 철가면을 쓴 남자 또는 지하 벙커 | 1790 | 4막 판토마임, Ambigu-Comique 극장 공연 |
제롬 르 그랑 | 루이 14세와 철가면 또는 쌍둥이 왕자 | 1791 | 5막 운문 비극, 몰리에르 극장 초연 | |
아르놀 & 푸르니에 | 철가면을 쓴 남자 | 1831 | 5막 드라마, 오데옹 극장 공연 | |
토마스 제임스 설 | 철가면을 쓴 남자: 5막의 역사극 | 1832 | 로열 코버그 극장 초연 | |
빅토르 위고 | 쌍둥이 (Les Jumeaux) | 1839 | 미완성 드라마 | |
알렉상드르 뒤마 | 바스티유의 죄수 | 1861 | 5막 드라마, 시르크 임페리얼 극장 초연 | |
조르주 모르베르 | 철가면 | 1884 | 1막 판타지 | |
맥스 골드버그 | 철가면을 쓴 남자 | 1899 | 런던 아델피 극장 공연 | |
빌리아 | 철가면을 쓴 남자 | 1909 | 3막 드라마 | |
모리스 로스탕 | 철가면 | 1923 | 4막 운문 연극, 코라 라파르세리 극장 초연 | |
시 | 알프레드 드 비니 | La Prison | 1821 | 시집 Poèmes antiques et modernes (1826) 수록 |
브누아 퀴네 | 'Derniers moments de lHomme au masque de fer'' | 1837 | 극시 | |
세바스티앙-샤를 르콩트 | Le Masque de fer | 1911 |
원래 죄수가 썼던 가면은 벨벳 등 천으로 만들어졌다고 추정되지만, 문학 작품 속에서는 종종 철가면으로 묘사되었다. 이 강렬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이후 다양한 영화나 파생 작품에도 영향을 미쳐, 원래의 전설과는 별개로 '철가면을 쓴 죄수'라는 모티브 자체가 독립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5. 2. 영화 및 텔레비전

철가면의 미스터리는 여러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영화
- ''철가면'' (1929년): 더글러스 페어뱅스 주연의 무성 영화. 휴고 리젠펠드가 사운드트랙을 맡았다.
- ''철가면'' (1939년): 루이 헤이워드 주연. 루트 글루스킨과 루시앙 모라벡이 사운드트랙을 담당했다.
- ''철가면'' (1977년): 리처드 체임벌린 주연의 영국 텔레비전 영화. 앨린 퍼거슨이 사운드트랙을 맡았다.
- ''아이언 마스크'' (1998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루이 14세와 그의 쌍둥이 형제 필립 역을 맡은 미국 영화. 랜들 월러스가 감독했으며, 닉 글레니-스미스가 사운드트랙을 작곡했다.
이 영화들은 모두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브라줄론 자작》을 바탕으로 각색되었으며, 죄수가 루이 14세의 쌍둥이 형제이고 볼테르가 퍼뜨린 전설처럼 철가면을 썼다는 설정을 따른다.
텔레비전 드라마
- ''베르사유'' (2018년): 시즌 3의 첫 두 에피소드에서 철가면은 Duc de Sullun|둑 드 쉴런la('아무도 아닌 자'를 뜻하는 라틴어 'nullus'를 거꾸로 쓴 이름)으로 등장한다.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가 바스티유 감옥에서 그를 만나며, 그가 사실은 루이 13세가 후계자를 낳지 못하자 비밀리에 관계를 맺어 루이 14세와 필리프 1세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되었다는 설정으로 그려진다.
- ''더 플래시'' (2016년): 시즌 2에서 악당 헌터 졸로몬(줌)에게 인질로 잡힌 철가면이 등장한다. 그는 나중에 지구-3의 제이 개릭이자 주인공 배리 앨런의 아버지인 헨리 앨런의 도플갱어임이 밝혀진다.
-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디즈니+ 시리즈 ''왓 이프...?'' (2023년): 시즌 2 8화 "만약... 어벤져스가 1602년에 모였다면?"에서 철가면은 브루스 배너의 1602년 변종으로 등장하며, 캡틴 카터에 의해 풀려나 헐크로 변신하면서 가면을 부순다.
애니메이션 및 만화
참조
[1]
서적
ルイ十四世の世紀
岩波文庫
1974
[2]
서적
The man of the mask : a study in the by-ways of history
https://archive.org/[...]
1908
[3]
서적
「鉄仮面」の秘密
評論社
1976
[4]
서적
鉄・仮・面―歴史に封印された男
宝島社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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