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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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동은 해주 최씨이며 한성부 출신으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과 교수를 역임한 의학자이다.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수학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과 캐나다에서 연구를 이어갔다. 1929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일제강점기 말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을 지냈다. 광복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1948년에는 미 군정청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친일 행적과 역사관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최동
기본 정보
출판사: 조선일보
제목전연세대 의대학장 崔棟박사 어제 별세
날짜1973-07-31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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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최동은 해주 최씨로 한성부 출신이다. 아버지는 전라남도 순천군 군수를 지낸 최정익이다. 최동은 순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는 관직을 내놓고 일본 망명 중인 박영효를 만나러 일본으로 갔다. 최동은 가톨릭 계열인 도쿄 교세이학교(曉星學校)에서 수학했다. 이때 아버지는 미국으로 가 안창호와 함께 활동하고 있어, 고학하며 공부했다. 중등 과정을 마친 뒤 미국으로 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약 1년간 수학했다.

귀국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졸업했다. 모교 해부학 교실 조교로 일하다 중국 북경협화의과 대학과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에서 연구했다. 1929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용, 1931년부터 3년간 학교 재단이사를 겸직했다. 강의 과목은 기생충학병리학이었으며, 일본 도호쿠 제국대학 법의학 교실에서 1936년 법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8년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을 지냈고,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을 맡았다. 같은 해 동양지광 주최 '미영타도좌담회'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자격으로 참석, 황인종 시각에서 미국영국을 비난하는 강연을 했다.

1945년 광복 직후 제4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 1947년 12월 4일 Severance 의과대학으로 승격시켜 6년제를 만들었고,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교분이 있던 개화파 박영효, 서재필, 계몽운동 계열 안창호 등의 영향을 받았다. 성장해서는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 지도를 받았다. 신채호 민족주의 사관에 영향받아 의학 연구 외 역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8년 3월 미 군정청 군정장관 딘 소장으로부터 5·10 총선거 관리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2.1. 유년 시절과 해외 유학

최동은 해주 최씨이며 한성부 출신이다. 전라남도 순천군 군수를 지낸 아버지 최정익을 따라 순천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는 관직을 내놓고 일본에 망명 중인 박영효를 만나러 갔다. 최동은 가톨릭 계열인 도쿄의 교세이학교(曉星學校)에서 공부했다. 이때 아버지는 이미 미국으로 떠나 안창호와 함께 활동하던 시기라 고학을 하며 공부했다. 중등 과정을 마친 뒤 미국으로 가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약 1년간 공부했다.

2.2. 의학자의 길

최동은 해주 한성부 출신으로, 전라남도 순천군 군수를 지낸 아버지 최정익을 따라 순천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는 관직을 내려놓고 일본에 망명 중인 박영효를 만나러 도일했다. 최동은 가톨릭 계열인 도쿄의 교세이학교(曉星學校)에서 수학했다. 이때 아버지는 이미 미국으로 떠나 안창호와 함께 활동하던 시기라 고학을 하며 공부했다. 중등 과정을 마친 뒤 미국으로 가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약 1년간 수학했다.

귀국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에 졸업했다. 모교의 해부학 교실 조교로 일하다가 중국 북경협화의과 대학과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1929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931년부터 3년 동안은 학교 재단이사를 겸직하기도 했다. 강의 과목은 기생충학병리학이었으며, 다시 일본 도호쿠 제국대학 법의학 교실에서 1936년법의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2.3. 일제강점기 활동과 친일 논란

1938년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을 지냈고,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을 맡았다. 같은 해 동양지광이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자격으로 참석, 황인종의 시각에서 미국영국을 비난하는 강연을 했다.

2.4. 광복 이후 활동

1945년 광복 직후 최동은 제4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1947년 12월 4일 Severance 의과대학으로 승격시켜 6년제를 만들었고,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최동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교분이 있던 개화파 인사 박영효, 서재필과 계몽운동 계열의 안창호 등의 영향을 받았다. 성장해서는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특히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에 크게 영향을 받아, 본업인 의학 연구 외에 역사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48년 3월 미 군정청 군정장관 딘 소장으로부터 5·10 총선거를 관리하기 위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3. 사상과 역사 연구

최동은 황인종의 우수성을 주장하고 한민족의 시원을 먼 곳에서 찾는 논리를 펼쳤다. 이러한 주장은 《조선문제를 통하여 본 만몽(滿蒙) 문제》(1932)에서처럼 일제의 만주 침략이나 대동아공영권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오랜 집필 작업 끝에 은퇴 후인 1966년에 《조선상고민족사》를 완성했고, 이 업적으로 1968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4. 비판 및 논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4.1. 친일 행적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4.2. 역사관 비판

최동은 황인종의 우수성을 주장하고 한민족의 기원을 멀리서 찾는 방식으로 자신의 역사관을 전개했는데, 이는 《조선문제를 통하여 본 만몽(滿蒙) 문제》(1932)에서처럼 일제의 만주 침략이나 대동아공영권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그는 오랜 연구 끝에 은퇴 후인 1966년에 《조선상고민족사》를 완성했고, 이 공로로 1968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