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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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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측우기는 1441년(세종 23년) 장영실 등에 의해 제작된 세계 최초의 강수량 측정 도구이다. 조선 시대 농업에 활용하기 위해 개발되었으며, 웅덩이의 빗물 깊이를 측정하는 방식의 문제점을 개선하여 쇠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사용했다. 1442년에는 측우기가 규격화되고 전국적으로 강수량 측정 제도가 시행되었으며, 측우기는 1척 5촌(약 32cm), 지름 7촌(약 15cm) 크기로 제작되었다. 세종 시대에는 수령이 직접 강수량을 측정하고 기록하는 것이 중요한 직무였으며, 측우기는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기우제의 일환으로 정치적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현재는 금영 측우기를 비롯한 측우대 유물들이 남아 있으며, 측우기는 한국 과학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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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
개요
측우기
측우기
종류기상 관측 장비
발명조선
발명 시기세종 23년 (1441년)
용도강우량 측정
상세 정보
재질돌 또는
형태원통형
측정 단위척, 촌
역사적 의의
특징세계 최초의 표준화된 강우량계
중요성농업 생산량 예측 및 세금 부과 기준 마련
관련 유물대구 선화당 측우대
보존 상태일부 유물만 현존
관련 정보
관련 용어측우대
참고 문헌이재수, 《수문학》, 구미서관, 2018
篠原武次, 《日本大百科全書》, 小学館, 1994
Youngsin Chun, Sang-woon Jeon, 《History of Meteorology》, 2005

2. 역사

조선 초기에는 농업 등에 참고하기 위해 각 지방의 강우량을 측정하여 보고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비온 후에 고여 있는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흙에 스며드는 정도가 서로 달라 1441년(세종 23년) 음력 8월 장영실을 시켜 서운관(書雲觀)에서 빗물을 측정할 수 있는 그릇을 처음 제작하게 하였고, 한양을 중심으로 관측에 활용하였다.[46]

아산시, 천안아산역 앞에 세워진 장영실의 동상. 측우기 곁에서 주척 (자)을 다루고 있다.


측우기는 흔히 장영실이 만들었다고 알려졌는데, 세종실록 23년 4월 을미(양력 1441년 5월 19일) '근년 이래로 세자(훗날 문종)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비가 온 뒤에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었으나 정확하게 푼수를 알 수 없었으므로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했다'는 기록은 문종이 발명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측우기는 문종, 장영실, 세종대왕, 호조(戶曹)의 관료 등이 뜻을 모아 세계 최초로 제작한 규격품임을 잘 알 수 있다.

당시 강수량을 측정하는 방식은 원시적이어서, 웅덩이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법은 토양의 특성에 따라 땅에 흡수되는 빗물의 양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정확한 강수량을 알 수 없었다. 이러한 종류의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세종대왕은 1441년(음력) 8월, 훗날 조선 문종이 되는 왕세자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관상감(관상감, 觀象監)(조선 왕국의 천문, 지리, 역법 및 기상 연구 기관)에게 철로 만든 강수량 측정기인 측우기를 제작하도록 명했다. 측우기 초창기에는 주로 수도권 지역에서만 사용되었다.[6][12]

원래 철로 만들어졌지만, 나중에는 구리와 도자기로 만들어진 것도 있었다.

1442년(세종 24년) 6월 15일(음력 5월 8일) 이전, 호조의 보고에 따라 측우기가 규격화되고 제도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조선왕조실록》에 측우기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로 제작된 측우기는 길이 1척 5촌(약 32cm), 지름 7촌(약 15cm)이며, 비가 그친 후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푼(分) 단위까지 재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간과 그친 시간을 기록하도록 하였으며, 전국적으로 강우량을 측정하도록 했다.[47][48] 1442년(세종 24년)에는 측우에 관한 제도를 정하여 서운관에서 빗물의 깊이를 측량·기록하게 했으며, 지방에서는 각 관가의 뜰에 설치하여 수령 자신이 측량·기록하게 했다.[46] 표준화된 측우기에 의한 강수량 측정은 1442년 5월 8일(음력)부터 제도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수량은 자를 담가 측정하며, 푼(分) 단위(약 0.303cm)로 기록한다. 또한, 전국적으로 비가 시작되고 멈춘 시각의 정보가 매번 기록된다.[3]

세종 시대에는 도, 군, 현의 수령이 직접 우량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직무였다.[13][16] 비가 그칠 때마다 측정자는 주척()을 사용하여 수심을 , 분 단위까지 기록했다(1치는 10분, 1분은 약 2mm).[10] 강우 시작·종료 시각을 기록하고, 강우의 정도를 "미우"에서 "폭우"까지 8단계로 나누어 평가했다.[13][16] 각 지방의 관측 결과는 도감사가 집계하여 서운관으로 보냈다.[15][17] 각지의 관측 데이터는 조세 징수를 결정하는 데 사용되었다.[21]

2. 1. 제작 및 제도 시행 (조선 초기)

조선 초기에는 농업 등에 참조하기 위해 각 지방의 강우량을 측정하여 보고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비온 후에 고여 있는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흙에 스며드는 정도가 서로 달라 1441년(세종 23년) 음력 8월 장영실을 시켜 서운관(書雲觀)에서 빗물을 측정할 수 있는 그릇을 처음 제작하게 하였고, 한양을 중심으로 관측에 활용하였다.[46]

측우기는 흔히 장영실이 만들었다고 알려졌는데, 세종실록 23년 4월 을미(양력 1441년 5월 19일) '근년 이래로 세자(훗날 문종)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비가 온 뒤에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었으나 정확하게 푼수를 알 수 없었으므로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했다'는 기록은 문종이 발명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측우기는 문종, 장영실, 세종대왕, 호조(戶曹)의 관료 등이 뜻을 모아 세계 최초로 제작한 규격품임을 잘 알 수 있다.

당시 강수량을 측정하는 방식은 원시적이어서, 웅덩이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법은 토양의 특성에 따라 땅에 흡수되는 빗물의 양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정확한 강수량을 알 수 없었다. 이러한 종류의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세종대왕은 1441년(음력) 8월, 훗날 조선 문종이 되는 왕세자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관상감(관상감, 觀象監)(조선 왕국의 천문, 지리, 역법 및 기상 연구 기관)에게 철로 만든 강수량 측정기인 측우기를 제작하도록 명했다. 측우기 초창기에는 주로 수도권 지역에서만 사용되었다.[6][12]

원래 철로 만들어졌지만, 나중에는 구리와 도자기로 만들어진 것도 있었다.[46]

=== 제도의 시행 ===

1442년(세종 24년) 6월 15일(음력 5월 8일) 이전, 호조의 보고에 따라 측우기가 규격화되고 제도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조선왕조실록》에 측우기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로 제작된 측우기는 길이 1척 5촌(약 32cm), 지름 7촌(약 15cm)이며, 비가 그친 후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푼(分) 단위까지 재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간과 그친 시간을 기록하도록 하였으며, 전국적으로 강우량을 측정하도록 했다.[47][48] 1442년(세종 24년)에는 측우에 관한 제도를 정하여 서운관에서 빗물의 깊이를 측량·기록하게 했으며, 지방에서는 각 관가의 뜰에 설치하여 수령 자신이 측량·기록하게 했다.[46] 표준화된 측우기에 의한 강수량 측정은 1442년 5월 8일(음력)부터 제도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수량은 자를 담가 측정하며, 푼(分) 단위(약 0.303cm)로 기록한다. 또한, 전국적으로 비가 시작되고 멈춘 시각의 정보가 매번 기록된다.[3]

세종 시대에는 도, 군, 현의 수령이 직접 우량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직무였다.[13][16] 비가 그칠 때마다 측정자는 주척()을 사용하여 수심을 , 분 단위까지 기록했다(1치는 10분, 1분은 약 2mm).[10] 강우 시작·종료 시각을 기록하고, 강우의 정도를 "미우"에서 "폭우"까지 8단계로 나누어 평가했다.[13][16] 각 지방의 관측 결과는 도감사가 집계하여 서운관으로 보냈다.[15][17] 각지의 관측 데이터는 조세 징수를 결정하는 데 사용되었다.[21]

2. 1. 1. 제작

조선 초기에는 농업 등에 참조하기 위해 각 지방의 강우량을 측정하여 보고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비온 후에 고여 있는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흙에 스며드는 정도가 서로 달라 1441년(세종 23년) 음력 8월 장영실을 시켜 서운관(書雲觀)에서 빗물을 측정할 수 있는 그릇을 처음 제작하게 하였고, 한양을 중심으로 관측에 활용하였다.[46] 1442년(세종 24년)에는 측우에 관한 제도를 정하여 서운관에서 빗물의 깊이를 측량·기록하게 했으며, 지방에서는 각 관가의 뜰에 설치하여 수령 자신이 측량·기록하게 했다.[46] 처음에는 쇠로 만들었으나 뒤에는 구리로 만들기도 하였고, 이외에 자기·도기로 대용하기도 하였다.[46] 이는 이탈리아의 가스텔리보다 약 200년 앞선 것이다.[46]

측우기는 흔히 장영실이 만들었다고 알려졌는데, 세종실록 23년 4월 을미(양력 1441년 5월 19일) '근년 이래로 세자(훗날 문종)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비가 온 뒤에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었으나 정확하게 푼수를 알 수 없었으므로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했다'는 기록은 문종이 발명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측우기는 문종, 장영실, 세종대왕, 호조(戶曹)의 관료 등이 뜻을 모아 세계 최초로 제작한 규격품임을 잘 알 수 있다.

조선 왕조 초기에 농업을 위해 지역의 강수량을 측정하고 보고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강수량을 측정하는 방식은 원시적이어서, 웅덩이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법은 토양의 특성에 따라 땅에 흡수되는 빗물의 양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정확한 강수량을 알 수 없었다. 이러한 종류의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세종대왕은 1441년(음력) 8월, 훗날 조선 문종이 되는 왕세자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관상감(관상감, 觀象監)(조선 왕국의 천문, 지리, 역법 및 기상 연구 기관)에게 철로 만든 강수량 측정기인 측우기를 제작하도록 명했다. 측우기 초창기에는 주로 수도권 지역에서만 사용되었다.

1442년, 국왕은 관상감에 다시 강수량을 측정하고 기록하기 위한 표준화된 시스템을 설계하도록 명했다. 또한 왕이 임명한 지방관들에게 각 지방 관청의 뜰에 동일한 측우기를 설치하여 강수량을 측정하고 기록하도록 명했다.

원래 철로 만들어졌지만, 나중에는 구리와 도자기로 만들어진 것도 있었다.

2. 1. 2. 제도의 시행

1442년(세종 24년) 6월 15일(음력 5월 8일) 이전, 호조의 보고에 따라 측우기가 규격화되고 제도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조선왕조실록》에 측우기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로 제작된 측우기는 길이 1척 5촌(약 32cm), 지름 7촌(약 15cm)이며, 비가 그친 후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푼(分) 단위까지 재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간과 그친 시간을 기록하도록 하였으며, 전국적으로 강우량을 측정하도록 했다.[47][48] 표준화된 측우기에 의한 강수량 측정은 1442년 5월 8일(음력)부터 제도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수량은 자를 담가 측정하며, 푼(分) 단위(약 0.303cm)로 기록한다. 또한, 전국적으로 비가 시작되고 멈춘 시각의 정보가 매번 기록된다.[3]

세종 시대에는 도, 군, 현의 수령이 직접 우량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직무였다.[13][16] 비가 그칠 때마다 측정자는 주척()을 사용하여 수심을 , 분 단위까지 기록했다(1치는 10분, 1분은 약 2mm).[10] 강우 시작·종료 시각을 기록하고, 강우의 정도를 "미우"에서 "폭우"까지 8단계로 나누어 평가했다.[13][16] 각 지방의 관측 결과는 도감사가 집계하여 서운관으로 보냈다.[15][17] 각지의 관측 데이터는 조세 징수를 결정하는 데 사용되었다.[21]

영조 시대 이후의 관측 제도에 대해서는, 천문학자 성주덕의 『서운관지』(1818년)에 상세한 기록이 있다. 우량 관측은 정신을 집중하여 엄숙하게 수행해야 할 직무이며, 소홀히 한 자에게는 형벌이 내려졌다. 관측 결과는 『풍운기』라고 불리는 원부에 기입되었고, 반년에 한 번, 월계 등을 정리한 『천변초출등록』이 실록 편찬을 관할하는 춘추관에 제출되었다.[9] 『풍운기』의 기상 관측 기록에는 결락도 있지만, 1740년부터 1862년까지의 데이터가 남아 있다.[18]

2. 2.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2. 3. 조선 후기 (제도 부활)

2. 3. 1. 영조 대의 부활

측우기 제도는 이미 세종 대에 처음 만들어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쇠퇴하여 유명무실해졌다. 조선 영조 대에 이르러, 왕명에 따라 측우기 제도가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2. 3. 2. 정조 대의 발전

측우기 관련 원본 자료가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요약문에 '정조 대에 측우기 제도가 더욱 발전하게 된 배경과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라고 되어 있지만, 원본 자료 없이는 내용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2. 4. 근대

3. 구조 및 원리

전국적으로 일관된 강우량 측량도구인 측우기와 측우대 그리고 빗물의 량을 측량하는 주척


측우기는 주로 쇠로 만들어졌으며, 일반적으로 육면체 돌 받침대인 측우대에 고정된 원통형 모양이 특징이다.[1] 측우대의 적절한 높이는 튄 물이 측우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2]

보존된 측우기의 깊이는 약 32cm이고, 지름은 약 15cm이다. 『세종실록』의 기술에 따르면, 1441년에 처음 제작된 측우기는 주철로 만들어졌으며, 길이는 2척(周尺), 지름 8촌의 원통형이었다. 이는 아마도 필요 이상으로 컸던 것으로 보이며, 이듬해 정식으로 제정된 규격에서는 길이 1척 5촌, 지름 7촌으로 수정되었다.[9][16] 주척 1척은 시대에 따라 20.6 cm에서 22cm이다.[15] 군 이하 지방에서는 중앙에서 보내온 철제 측우기를 자기나 질그릇으로 복제하여 사용했다.[9][16] 주척도 마찬가지로 철제 기준기를 바탕으로 대나무나 나무로 복제되었다.[19][20]

영조실록 46년 5월조에 따르면, 1770년에 영조가 복원시킨 측우기의 치수는, 포백척(『경국대전』에 따르면 1 포백척은 대략 0.45주척에 해당한다.[19])을 사용하여 길이 1척, 지름 8촌으로 규정되었다.[19] 한일 병합 전후에 확인된 영조대 이후의 측우기, 총 4점의 내경은 14.5 - 14.7 cm로 거의 같지만, 깊이는 21.7 - 30.6 cm로 일정하지 않았다.[19] 이 내경은 현재 사용되는 우량계의 구경과 유사하며, 오차를 줄이기 위해 최적화된 결과가 아닌가 추측된다.[12][21] 그 한편, 측우기에 특유의 오차 요인으로, 자를 꽂으면 물의 부피가 증가하는 것과, 복제 정밀도의 문제, 질그릇의 흡수성 등이 지적되고 있다.[19][38]

3. 1. 측우기



전국적으로 일관된 강우량 측량도구인 측우기와 측우대 그리고 빗물의 량을 측량하는 주척

측우기는 주로 쇠로 만들어졌으며, 일반적으로 육면체 돌 받침대인 측우대에 고정된 원통형 모양이 특징이다.[1] 측우대의 적절한 높이는 튄 물이 측우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2]

보존된 측우기의 깊이는 약 32cm이고, 지름은 약 15cm이다. 『세종실록』의 기술에 따르면, 1441년에 처음 제작된 측우기는 주철로 만들어졌으며, 길이는 2척(周尺), 지름 8촌의 원통형이었다. 이는 아마도 필요 이상으로 컸던 것으로 보이며, 이듬해 정식으로 제정된 규격에서는 길이 1척 5촌, 지름 7촌으로 수정되었다.[9][16] 주척 1척은 시대에 따라 20.6 cm에서 22cm이다.[15] 군 이하 지방에서는 중앙에서 보내온 철제 측우기를 자기나 질그릇으로 복제하여 사용했다.[9][16] 주척도 마찬가지로 철제 기준기를 바탕으로 대나무나 나무로 복제되었다.[19][20]

영조실록 46년 5월조에 따르면, 1770년에 영조가 복원시킨 측우기의 치수는, 포백척(『경국대전』에 따르면 1 포백척은 대략 0.45주척에 해당한다.[19])을 사용하여 길이 1척, 지름 8촌으로 규정되었다.[19] 한일 병합 전후에 확인된 영조대 이후의 측우기, 총 4점의 내경은 14.5 - 14.7 cm로 거의 같지만, 깊이는 21.7 - 30.6 cm로 일정하지 않았다.[19] 이 내경은 현재 사용되는 우량계의 구경과 유사하며, 오차를 줄이기 위해 최적화된 결과가 아닌가 추측된다.[12][21] 그 한편, 측우기에 특유의 오차 요인으로, 자를 꽂으면 물의 부피가 증가하는 것과, 복제 정밀도의 문제, 질그릇의 흡수성 등이 지적되고 있다.[19][38]

3. 2. 측우대

측우기는 대(臺) 위에 올려놓고 측정하였는데, 적절한 높이의 대는 주변의 빗물이 튀어 측우기에 유입되는 것을 방지하고 측우기를 고정하는 안정 효과가 있다.[49][50][51] 측우대는 주로 돌로 만들어졌으며, 육면체 모양이 일반적이다.[1]

현존하는 조선 시대의 측우대는 다음과 같다.

  • 관상감 측우대 (보물 제843호):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크기는 61×92×58cm이다. 세종 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며, 비문이 없고 중앙이 좁아진 형태가 특징이다. 1960년 초등학교 교정에서 전상운에 의해 발견되었다.[12] 현재 대한민국 기상청에 소장되어 있다.
  • 대구 선화당 측우대 (보물 제842호): 대구 경상감영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크기는 46×37×37cm이며, 2면에 비문이 있다. 측우기를 놓기 위한 지름 16cm의 오목한 부분이 있다. 영조가 1770년 5월 1일에 재현시킨 것 중 하나로,「측우기」「건륭경인오월조」라고 새겨져 있다.[12] 현재 대한민국 기상청에 소장되어 있다.
  • 창덕궁 측우대 (보물 제844호): 대리석으로 제작되었으며, 크기는 30.3×45.3×45.5cm이다. 4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정조가 재위 6년에 가뭄을 걱정하여 기우제와 사면을 행한 뒤, 세종영조의 치적을 본받아 기우제의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 궁궐에 측우기를 설치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13]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45]
  • 통영 측우대 (보물 제1652호):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크기는 44×43.8×43.8cm이다. 정면에 비문이 있으며, 순조 시대의 가뭄 때 제작된 것이다.[9] 현재 국립중앙과학관에 소장되어 있다.
  • 연경당 측우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크기는 60.5×28.5cm이다. 창덕궁의 비원에 있는 왕족의 주택인 연경당에 설치되어 있었다.


4. 과학사적 의의

세종 시대의 조선은 과학 기술, 특히 천문학, 의학, 농업 기술 분야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11][22] 기상 관측 분야에서도 수표(하천 수위 측정), 풍기(풍향계) 등 새로운 기구가 도입되었다.[10] 과학사학자 전상운은 이 시기를 "한국 전통 과학의 황금 시대"라 칭하며, 중국의 모방을 넘어선 창조적 과학 기술이 있었다고 평가했다.[10] 그 대표적인 업적이 바로 측우기이다.

장영실 과학공원에 설치된 측우기・측우대 유물의 레플리카


측우기 설치는 기우제의 일환이기도 했다. 가뭄 때 비를 바라는 마음을 하늘에 호소하고, 농민들에게 안도감을 주며, 제사 후 내린 비를 측정하여 왕의 위엄을 나타냈다.[15][42] 정조 시대 측우대에는 이러한 정치적 의도가 담긴 명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세종・영조 시대와 달리 정조 시대에는 기상 관측의 과학적 가치보다 "동양적 제정における 왕도 정신의 주술적 발양"에 더 중점을 두었다고 여겨진다.[15]

1910년, 조선총독부 관측소 초대 소장 와다 유지는 "[https://dl.ndl.go.jp/info:ndljp/pid/1152243 한국 관측소 학술 보고]"에서 측우기를 소개하며, 카스텔리보다 200년 앞섰음을 알렸다.[25][26] 한국과 북한에서는 측우기를 세계 최초의 과학적 기상 관측 사례로 언급한다.[11][9][17][28][29] 5월 19일은 "발명의 날"로 제정되었고,[21][29] 2018년 5월 19일에는 측우기가 구글 두들에 게재되었다.[30]

측우기는 최초의 우량계로 알려져 있지만,[5] 이견도 있다. 기원전 4세기 인도 『실리론』에는 그릇에 빗물을 모아 강우량을 측정하고 작물 종류를 선택한 기록이 있다.[33] 중국에서는 남송 시대 『수서구장』의 "천지측우" 절에서 '''천지분'''이라는 용기에 모인 빗물 양을 계산하는 문제를 다루었다.[20] 명대에는 각지 강우량 기록을 황제에게 상주하는 제도가 있었다.[10]

측우기 성립에 중국의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이 논의되어 왔다. 1954년 주가정은 측우대 유물에 청의 연호 "건륭 경인"이 새겨진 것을 이유로 "조선의 측우기는 청대 중국에서 제조된 것"이라 주장했으나, 이씨 조선에서도 청 연호를 사용했기에 근거가 희박하다.[20] 『수서구장』의 계측법이 한국으로 이입되어 측우기가 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으나, 김성삼은 『수서구장』은 수학 연습 문제일 뿐이며, 당시 중국인에게 강우량 정량 측정 발상이 없었다고 반론한다.[20]

조선의 측우기가 중국에 기원을 두었다 해도, 표준 계기를 제정하고 과학적 관측을 수행했다는 독자성이 있다.[6][9] 『수서구장』에 따르면 천지분 형태는 일정하지 않았고,[20] 명대까지 중국 문헌에도 우량계 형태에 대한 기술이 거의 없다. 따라서 표준 규격 제정, 원통형 용기 사용 등의 창의는 세종대 조선에 귀속된다.[10]

근대 이전 장기간 강우량 기록은 드물기에,[34] 측우기 기록은 기후 변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9][21][35] 와다는 측우기 관측 데이터를 1917년에 공표했고, 1990년대 연구로 신뢰성이 확인되었다. 2001년에는 1777년부터 1907년까지의 강우량 일변화가 밝혀졌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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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현대의 측우기



현존하는 측우기는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가 유일하며,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있다.[41] 1837년 충청남도 광주에 설치된 충청감영의 별칭인 "금영"에서 제작되었으며, 명문에는 "금영측우기 고 일 척 오 촌, 경 칠 촌, 도광 정유제, 중 십일 근"이라고 적혀 있다.[41] 3단으로 분할 가능한 구조로, 각 단은 약간 부풀어 오른 술통 모양이며 최하단 그릇에만 바닥이 있다.[19] 1915년 일본의 기상학자 와다 유지에 의해 반출되었다가 1971년에 반환되었다.[40][41]

와다 유지는 근대 이전 조선의 과학적인 강수량 관측 제도에 감명받아 측우기 조사를 진행했으며[39], 대한제국 말기에는 이미 측우 제도가 기능하지 않았고 기물 대부분이 유실되었다고 전한다.[38] 그는 조선 부임 중 유물과 문헌 사료를 찾아 함흥과 대구에 설치되었던 측우기를 인천 총독부 관측소에 남겨두었지만, 한국 전쟁 중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해 유실되었다.[12]

금영 측우기 외에 현존하는 유물은 측우대 5기뿐이다.[6] 1960년경 전상운에 의해 서울 매동초등학교 교정에서 세종 시대의 측우대 유물이 발견되었다.[42] 관상감 터에 세워진 보통학교 교정에 관측기대 석물로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경성부사』의 기록(1937년)에 근거하여 발견된 이 유물은 현존하는 유일한 세종대 유물이다.[15]

현존하는 측우대 유물은 다음과 같다.

width=5%|제작 시기외관[6]설치 장소소속 (2005년 현재) [6]
#115세기화강암제, 61×92×58 cm.서울, 관상감대한민국 기상청
보물 제843호[44]. 매우 희귀한 세종 시대의 유물이다[12]。후대의 것과 달리 비문이 없고, 단순한 6면체가 아니라 중앙이 좁아져 있다. 1960년, 초등학교 교정에서 전상운에 의해 발견되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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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70년화강암제, 46×37×37 cm.
2면에 비문. 측우기를 놓기 위한 지름 16 cm의 오목한 부분이 있다.
대구 감영[13]대한민국 기상청
영조가 1770년 5월 1일에 재현시킨 것 중 하나[12]。「측우기」「건륭경인오월조」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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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82년대리석제, 30.3×45.3×45.5 cm. 4면에 비문.서울, 창덕궁규장각[12]국립고궁박물관
보물 844호. 비문에는 제작의 경위가 자세히 쓰여 있다. 그것에 따르면, 정조는 재위 6년에 일어난 가뭄을 걱정하여 기우제와 사면을 행한 뒤, 세종영조의 치적을 본받아 기우제의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 궁궐에 측우기를 설치했다고 한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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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11년화강암제, 44×43.8×43.8 cm. 정면에 비문.통영시국립중앙과학관
순조 시대의 가뭄에 때라 제작된 것[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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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28년화강암제, 60.5×28.5 cm.서울, 창덕궁 연경당창덕궁 연경당
창덕궁의 비원에 있는 왕족의 주택, 연경당에 설치되어 있었다.



영국 과학 박물관에는 측우기의 복제품이 소장되어 있으며[43], 1923년에 일본에서 제작되어 영국에 기증된 것이다.[41]

청계천 마전교에는 세종대왕 재위 기간(재위 2년)에 설치된 수표가 세워져 비의 양을 쟀다. 수표석의 의미와 기능은 비에 의해 하천의 수위가 얼마나 상승하는지를 알려주는 청계천의 "수위 측정기"이다.[4] 1958년 한국 정부가 청계천을 도로로 덮으면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고,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다리를 원래 위치로 옮기는 계획이 있었으나, 복원된 청계천의 폭과 다리의 길이가 달라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4]

6. 관련 유물 및 유적

청계천(조선 시대 서울 도심, 경복궁 근처의 서울 성곽 내부를 흐르는 하천)에는 마전교(다리)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수표교로 알려져 있다. 다리 교각에 부착된 수표석은 비에 의해 하천의 수위가 얼마나 상승하는지를 알려주는 청계천의 "수위 측정기" 역할을 했다. 이는 세종대왕 재위 기간(재위 2년)에 설치되었으며 현재까지 존재한다.[4] 1958년 한국 정부가 청계천을 도로로 덮으면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으나,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다리의 길이가 달라 원래 위치로 복원되지 못하고 장충단공원에 남아있다.[4]

6. 1. 수표

청계천(조선 시대 서울 도심, 경복궁 근처의 서울 성곽 내부를 흐르는 하천)에는 마전교(다리)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수표교로 알려져 있다. 다리 교각에 부착된 수표석은 비에 의해 하천의 수위가 얼마나 상승하는지를 알려주는 청계천의 "수위 측정기" 역할을 했다. 이는 세종대왕 재위 기간(재위 2년)에 설치되었으며 현재까지 존재한다.[4] 1958년 한국 정부가 청계천을 도로로 덮으면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으나,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다리의 길이가 달라 원래 위치로 복원되지 못하고 장충단공원에 남아있다.[4]

6. 2. 풍기대

7. 대중문화 속 측우기

참조

[1] 문서
[2] 논문 18세기 한국의 기후변동 -강수량을 중심으로-
[3] 서적 세종실록 96권, 5월 8일자 기사
[4] 문서
[5] 서적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小学館
[6] 학술지 Chugugi, Supyo, and Punggi: Meteorological instruments of the 15th century in Korea http://www.meteohist[...] 2016-12-04
[7] 학술지 「東闕図」にみられる朝鮮時代の宮殿造園における構成要素の特徴
[8] 학술지 朝鮮の気象学(1)
[9] 서적 朝鮮の科学と技術 明石書店
[10] 서적 韓国科学史【技術的伝統の再照明】 日本評論社
[11] 서적 朝鮮王朝史〈上〉 日本評論社
[12] 학술지 朝鮮科学史の隆盛 測雨器と気象学 2009-12
[13] 서적 韓国科学技術史 高麗書林
[14] 웹사이트 측우기 진짜 발명가 장영실 아닌 文宗 http://news.joins.co[...] 중앙일보 2006-06-17
[15] 학술지 李朝時代における降雨量測定法について
[16] 서적 Sourcebook of Korean Civilization: Volume One: From Early Times to the 16th Century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6-11-29
[17] 서적 朝鮮科学技術史研究―李朝時代の諸問題― 皓星社
[18] 학술지 朝鮮半島における歴史時代の気候変化
[19] 학술지 朝鮮の気象学(7)
[20] 학술지 Comments on the Chinese Claim for the Invention of Rain Gauges https://www.ekoreajo[...] 2017-01-14
[21] 서적 A Bridge between Conceptual Frameworks: Sciences, Society and Technology Studies https://books.google[...] Springer 2017-01-13
[22] 서적 東洋人の科学と技術 淡路書房新社
[23] 학술지 世宗英祖兩朝ノ測雨器
[24] 학술지 韓国における科学史研究の動向と問題点
[25] 학술지 RAIN GAUGE INVENTED BY KING OF KOREA https://cdnc.ucr.edu[...] San Francisco Call 1911-05-28
[25] 학술지 An early Korean rain-gauge
[26] 서적 中国の科学と文明 第5巻 思索社
[27] 웹사이트 【コラム】漢江の奇跡…その裏の歴史を知らせよう(2) https://japanese.joi[...] 중앙일보 2014-07-14
[28] 웹사이트 【時論】韓国の気象領土を広げよう https://japanese.joi[...] 중앙일보 2012-06-19
[29] 웹사이트 測雨器・ハングル作った「発明DNA」...ギャラクシーで世界に号令 http://japan.mk.co.k[...] MK News 2015-05-18
[30] 웹사이트 Celebrating Jang Yeong-sil https://www.google.c[...] 2018-06-05
[31] 서적 科学大博物館―装置・器具の歴史辞典 朝倉書店
[32] 서적 雨の自然誌 河出書房新社
[33] 학술지 A history of rain gauges
[34] 서적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小学館 2018-08-21
[35] 웹사이트 92/156 Rain gauge, cast iron, designed by Jang Yeong-sil 1442, made in Korea, 1990 - Powerhouse Museum Collection http://www.powerhous[...] Powerhouse Museum 2016-11-29
[36] 논문 Interpretation of the Transient Variations in the Time Series of Precipitation Amounts in Seoul, Korea. Part I: Diurnal Variation
[37] 웹사이트 気象庁|地点別データ・グラフ(世界の天候データツール) https://www.data.jma[...] 気象庁 2016-12-10
[38] 논문 朝鮮古代の觀測
[39] 논문 朝鮮に於ける科學的斷片
[40] 뉴스 56年ぶり「お返しします」 李朝の測雨器 気象庁から韓国へ 1971-06-17
[41] 서적 韓国の失われた文化財:増補日帝期文化財被害資料 三一書房
[42] 서적 エピソードと遺跡をめぐる 朝鮮科学史 皓星社
[43] 웹사이트 Reproduction of early Korean rain gauge, 1821 : Science Museum Group Collection http://collection.sc[...] Science Museum 2017-03-14
[44] 웹사이트 朝鮮時代への特別な旅行~国立中央博物館 http://www.mcst.go.k[...] 문화체육관광부 2016-11-29
[45] 웹사이트 名品ギャラリー(50選) : 測雨台 http://www.gogung.go[...] 한국국립고궁박물관 2016-11-29
[46] 서적 수문학 구미서관 2018
[47] 기사 《세종실록》 96권, 5월 8일자 기사
[48] 기타 "(위키문헌-세종 24년5月 8日 호조에서 우량을 측정하는 일에 관해 아뢰다○丁卯/戶曹啓: “測雨事件, 曾已受敎。 然有未盡處, 更具條列。 一, 京中則鑄鐵爲器, 名曰測雨器, 長一尺五寸、(經)〔徑〕七寸, 用周尺。 作臺於書雲觀, 置器於臺上, 每當雨水後, 本觀官員親視下雨之狀, 以周尺量水深淺, 具書下雨及雨晴日時、水深寸分數, 隨卽啓聞置簿。) https://ko.wikisource.org/wiki/%EC%84%B8%EC%A2%85%EC%9E%A5%ED%97%8C%EB%8C%80%EC%99%95%EC%8B%A4%EB%A1%9D/24%EB%85%84#%ED%98%B8%EC%A1%B0%EC%97%90%EC%84%9C_%EC%9A%B0%EB%9F%89%EC%9D%84_%EC%B8%A1%EC%A0%95%ED%95%98%EB%8A%94_%EC%9D%BC%EC%97%90_%EA%B4%80%ED%95%B4_%EC%95%84%EB%A2%B0%EB%8B%A4" https://ko.wikisourc[...]
[49] 기타 조희구·나일성, 〈18세기 한국의 기후변동 -강수량을 중심으로- 〉, 《동방학지》, 22
[50] 참고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지정…보물 지정 35년만에 http://news.imaeil.c[...] 매일신문
[51] 참고 유럽보다 200년 빨랐던 조선의 측우기, 국보로 지정된다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52] 각주 https://imnews.i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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