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다이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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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다이라 사건은 1945년 5월부터 1946년 8월까지 일본 도치기현과 도쿄도에서 발생한 연쇄 강간 살인 사건이다. 고다이라 요시오는 식량난을 틈타 여성들에게 접근하여 최소 7명을 살해했으며, 1946년 체포되어 7건의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1949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은 전후 일본 사회의 불안정성과 전쟁 범죄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영화와 소설 등 다양한 매체로 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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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이라 사건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코다이라 요시오 |
출생 | 1905년 1월 28일 |
출생지 | 도치기현 도치기현, 일본 제국 |
사망 | 1949년 10월 5일 |
사망 장소 | 센다이, 미야기 형무소, 점령하 일본 |
사인 | 교수형 |
별칭 | "코다이라 사건" (小平事件, 코다이라지켄) |
범죄 정보 | |
희생자 수 | 8명 이상 |
국가 | 일본 및 아마도 중국 |
지역 | 도치기현, 도쿄도 |
범죄 시작 시기 | 1932년 7월 2일 |
범죄 종료 시기 | 1946년 8월 6일 (1920년대 중국에서 추가 살인 자백) |
체포 일자 | 1946년 8월 20일 |
형벌 | 사형 |
유죄 인정 | 살인 (8건) |
범죄 상태 | 사형 집행 |
2. 사건 개요
1945년 5월 25일부터 1946년 8월 6일 사이, 도치기현과 도쿄도에서 발생한 연쇄 강간 살인 사건이다. 일본의 항복 직후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고다이라 요시오는 여성들에게 식량 제공이나 취업 알선을 미끼로 접근하여 범행을 저질렀다.[4]
당시 일본은 태평양 전쟁 말기부터 패전 직후까지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었다. 라디오 방송에서 "무엇을 먹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거나, 아이에게 최근 기뻤던 일을 묻자 "쌀이나 빵이 배급되었다"고 답할 정도였다.[4] 이러한 상황에서 식량 제공이나 취업 알선은 여성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제안이었고, 이는 고다이라가 범행 대상을 물색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고다이라는 1년여 동안 최소 7명의 여성을 살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5] 피해자들은 대부분 젊은 여성들이었으며, 고다이라는 교묘한 말솜씨로 이들을 유인하여 강간하고 살해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1946년 8월, 7번째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고다이라의 범행이 드러났다.[5] 고다이라는 체포 후 다른 사건에도 연루되었음을 자백했고, 총 10건의 사건으로 기소되었다. 이 중 7건은 유죄, 3건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6] 고다이라는 1948년 사형 판결을 받고, 1949년 미야기 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의 식량난을 상징하는 "범죄 사상 가장 흉악"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4] 또한, 마지막 피해자는 스모 교사였던 키무라 쇼노스케 (24대)의 친딸이었다.
이후 1947년에는 "제2 고다이라 사건"이, 1971년에는 오쿠보 키요시에 의한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군마의 고다이라"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7]
2. 1. 유죄로 판결된 사건
코다이라는 1945년 5월부터 1946년 8월까지 다음과 같은 범행을 저질러 유죄 판결을 받았다.발생 일자 | 범행 내용 | 피해자 | 비고 |
---|---|---|---|
1945년 5월 25일 | 해군 의류 공장 여자 기숙사에 침입하여 강간 후 살해 | 21세 여성 | 헌병대 수사 중 다른 남자에게 혐의가 쏠린 틈을 타 퇴직 |
1945년 6월 | 도부 철도 신토치기역에서 농가 안내를 핑계로 산림으로 유인, 3차례 강간 후 교살 | 31세 여성 | 70JPY 및 손목시계 강탈, 시신은 9월 10일 발견 |
1945년 7월 12일 | 시부야역에서 농가 안내를 핑계로 산림으로 유인, 칼로 저항하는 피해자를 교살 | 22세 여성 | 40JPY이 든 지갑과 손목시계 강탈 |
1945년 7월 15일 | 이케부쿠로역에서 농가 안내를 핑계로 잡목림으로 유인, 강간 후 교살 | 21세 여성 | 60JPY 및 나막신 강탈, 시신은 11월 5일 백골 시체로 발견 |
1945년 9월 28일 | 도쿄역에서 농가 안내를 핑계로 산촌으로 유인, 강간 후 교살 | 21세 여성 | 300JPY 및 명주 옷 강탈, 시신은 11월 1일 발견 |
1945년 12월 29일 | 도부 철도 아사쿠사 가미나리몬 역에서 농가 안내를 핑계로 토치기현 산촌으로 유인, 강간 후 교살 | 21세 여성 | 130JPY이 든 지갑과 배낭 강탈 |
1946년 8월 6일 | 취업 알선을 핑계로 공원 뒤편으로 유인, 폭행 후 살해 | 17세 여성 | 6월 18일 피해자에게 접근, 8월 4일 피해자 자택 방문, 8월 6일 범행으로 체포 |
2. 2. 무죄로 판결된 사건
- 1945년 11월 1일, 시부야구의 옛 도요코 백화점 별관 지하에서 17세 여성이 살해되었다. 코다이라는 이케부쿠로역에서 알게 된 피해자를 "추우니 모닥불을 쬐자"며 그 장소로 데려가 강간 후 교살했다고 자백하여 기소되었으나, 공판에서 관여를 부인했고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었다.[8][9]
- 1946년 6월 9일, 시바구의 운송 회사 폐차 처리장에서 국민학교 고등과 2학년 여학생(15세)이 살해되었다. 코다이라는 근처 미군 병영에서 잡역부로 일하며, 남은 음식을 얻기 위해 드나들던 피해자를 "빵을 주겠다"고 유인하여 강간하려다 저항하자 교살했다고 자백하여 기소되었으나, 공판에서 관여를 부인했고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었다.[8][9]
- 1946년 7월 22일, 유죄가 확정된 7번째 사건 현장 부근에서 17, 8번째 신원불명의 여성 교살 시체가 발견되었다. 코다이라는 자백에서 피해자의 복장이 발견된 시체와 일치했고, 시나가와역에서 알게 되어 자주 음식을 주었던 피해자를 그 장소로 데려가 강간 후 교살했다고 진술하여 기소되었으나, 공판에서 관여를 부인했고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었다.[8][9]
2. 3. 기타 사건 (입건 없음, 관련성 불명)
- 1945년 6월 13일 - 주젠지 호에서 알몸 여성 변사체가 발견되었다. 검시 결과, 연령은 30세 정도로, 처음에는 익사로 여겨졌으나, 물을 마시지 않은 것이 밝혀졌다. 6월경, 고다이라 요시오가 여자를 데리고 닛코로 놀러 갔다는 고다이라 숙모의 진술이 있어 관련이 의심되었다[10]。
- 1945년 12월 2일 - 고등 여학생(17세)이 "친구 집을 방문한다"며 외출 후, 이듬해 1월 3일, 도치기현 닛코시의 도쿄 대학 식물원 옆 샛길에서 목 부위에 단도 모양의 흉기로 찔려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고다이라 요시오는 친형이 병사했기 때문에 1946년 1월 중순에 귀향했으며, 범행 현장이 고향으로 가는 길에 있었기 때문에 관련이 의심되었다.
- 1946년 1월 4일 - 지바현 마쓰도시 가네가사쿠의 산림에서 32~3세 신원 불명의 여성 타살체가 발견되었다. 피해자가 자신이 졸랐던 가는 끈으로 교살되었다는 수법이 일련의 범행과 유사하여 관련이 의심되었다[11]。
3. 고다이라 요시오
고다이라 요시오는 1905년 1월 28일 도치기현 도치기시에서 태어났으며, 1949년 10월 5일 미야기현 센다이시 미야기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사망했다. 살인죄 및 강간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판결된 살인 피해자는 7명이다.[1] 1945년 5월 25일부터 1946년 8월 6일까지 범행을 저질렀고, 1946년 8월 20일 체포되었다.
3. 1. 인물 배경
고다이라 요시오는 1905년 1월 28일 도치기현 도치기시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말더듬으로 고통받았다.[1] 1923년 일본 제국 해군에 입대하여 해병 연대에 배속, 요코스카에 주둔했다. 1928년 제남 사건에 참여하여 중국 군인 6명을 살해하고, 부녀자 강간과 임산부 살해 등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1]1932년 하사관으로 제대 후 결혼했으나,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져 아내에게 버림받았다. 1932년 7월 2일, 격분한 고다이라는 아내 가족을 공격, 쇠막대기로 장인을 살해하고 6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40년 가석방되었다.
3. 2. 재판
코다이라는 1946년 8월 20일에 체포되었고, 법정에서 3건의 살인 혐의를 부인했다.[2] 1947년 6월 18일, 지방 법원은 그가 저지른 것으로 의심되는 10건의 살인 중 7건에 대해 유죄를 판결했다. 피해자 중 한 명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으며, 다섯 번째 살인 이후 코다이라는 시체와 시체성애를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2] 최고 재판소는 1948년 11월 16일 코다이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2]1심부터 상고심까지 변호인은 코다이라 본인의 희망에 따라 전 사법차관이자 전 대심원 부장인 미야케 쇼타로 박사가 맡았다. 공판 당시에는 법정 내 사진 촬영 및 신문 기자의 인터뷰가 폭넓게 허용되었으나, 코다이라는 이에 일절 응하지 않고 항상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렸다. 1심 판결 공판 시에는 본인 및 미야케 쇼타로 변호인에 의해 '법정 내에서의 사진 촬영 및 취재 활동 일체의 금지'를 요구하는 신청이 재판장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이 신청이 받아들여진 것이 그 후의 재판소 내에서의 촬영, 녹음 금지, 취재 활동 제한으로 이어진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3. 3. 사형 집행
1949년 10월 5일, 센다이의 미야기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2] 사형 집행 전, 교화사에게 "이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날에 죽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라고 말했다.[15]사형 판결 직후에는 거친 태도를 보였지만, 면회를 온 아내가 자책하는 마음을 울면서 고백하고, 교화사와의 교류를 통해 점차 태도를 고쳐나갔다. 그는 "저는 장엄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청산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죽어 가겠습니다. 오랫동안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가족들도 부디 천명을 다하십시오"라는 유서와 "죽은 영혼이여, 용서하소서 과거의 죄, 오늘을 마지막으로 깊이 죽으리라"라는 사세를 남겼다.
4. 사건의 사회적 영향 및 의의
코다이라 사건은 태평양 전쟁 말기부터 패전 직후 도쿄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으로, 당시 사회의 혼란과 식량난을 배경으로 한다. 범인 코다이라 요시오는 교묘한 말로 젊은 여성들을 유인하여 강간하고 살해하는 수법을 사용했다.[4]
이 사건은 1946년 8월에 7번째 피해자의 유해가 발견되면서 코다이라 요시오가 체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5] 코다이라는 10건의 사건에 대해 기소되었고, 그중 7건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40명의 여성에게 관계를 강요했으며, 살해하지 않은 30명은 "순순히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6] 1948년 11월 16일, 코다이라에게 사형이 확정되었고, 다음 해 10월 5일 미야기 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사건 피해자는 스모의 막내 교사였던 시키모리 이사부로(후의 립교사·제24대 키무라 쇼노스케)의 친딸이었다.
4. 1. 전후 일본 사회의 불안정성
태평양 전쟁 말기부터 패전 직후 도쿄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당시 사회는 식량난이 매우 심각하여, 라디오 방송에서 "무엇을 먹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하거나, 아이에게 최근 기뻤던 일을 물으면 "쌀이나 빵이 배급되었다"고 답할 정도였다.[4] 이러한 상황에서 식량 제공이나 취업 알선은 매우 매력적인 제안이었고, 이는 코다이라 요시오가 범행을 저지르는 데 이용되었다.코다이라 사건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으로, 전후 일본 사회의 불안정성과 경제적 어려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식량난과 사회적 불안은 취약 계층, 그중에서도 여성들을 범죄의 표적으로 만들었다. 스즈키 아츠시는 이 사건을 "범죄 사상 가장 흉악"한 사건이자 "당시의 식량난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평가했다.[4]
4. 2. 전쟁 범죄의 그림자
고다이라 요시오는 1928년 일본 제국 해군 해병으로 중국에 주둔하며 제남 사건에 참여, 중국군 6명을 살해했다.[1] 또한, 중국에서 여러 여성들을 강간하고, 다구 포대에서 임신한 여성의 배에 칼을 꽂는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1]1929년 5월, 고다이라는 상사에 대한 불만을 이유로 해군에서 퇴역했지만, 같은 해 전시의 공로로 훈8등 욱일장을 받았다.[13] 이러한 전쟁 범죄 경험은 전후 고다이라가 저지른 연쇄 강간 살인 사건의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견해가 있다.[14] 체포 후 조사 과정에서 고다이라는 "전쟁 때 나보다 더 끔찍한 짓을 한 놈들을 많이 알고 있지만, 평화로운 때에 나만 심한 짓을 한 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인간이 할 짓이 아닙니다"라고 진술했다.
4. 3. 미디어와 문화적 재현
이시이 테루오 감독의 1969년 옴니버스 영화 사랑과 범죄의 세 번째 에피소드는 코다이라 사건을 다루었다. 데이비드 피스는 2007년 소설 ''도쿄 연도 제로''에서 코다이라 사건을 소재로 다루었다.[3]1967년 12월 와카마츠 코지 감독의 영화 『속 일본 폭행 암흑사 폭학마』에서 야마시타 오사무가 범인 역을 맡았고, 1969년 8월 27일 이시이 테루오 감독의 영화 『메이지·다이쇼·쇼와 엽기녀 범죄사』에서는 코이케 아사오가 범인 역을 연기했다.
이 사건과 비슷한 수법으로 여성을 유인해 살해한 사건은 "제2 고다이라 사건"이라고 불렸으며, 1971년에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 오쿠보 키요시는 "군마의 고다이라"라고도 불렸다.[7]
5. 유사 사건
1947년(쇼와 22년)에 여성을 유인하여 산림으로 데려가 살해하는 비슷한 사건이 발각되었는데, 이는 "제2 고다이라 사건"이라고 불렸다.[7] 1971년(쇼와 46년)에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 오쿠보 키요시는 "군마의 고다이라"라고도 불렸다.[7]
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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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回廊
2007-11-1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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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画「男はつらいよ」には渥美清演じる車寅次郎が、「助平の始まりは小平の義雄」と語る場面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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