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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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르트 마이어(Kurt Meyer, 1910년 12월 23일 ~ 1961년 12월 23일)는 독일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무장친위대에서 복무하며 기갑부대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1930년 나치당에 가입하고 친위대에 입대하여, 동부 전선, 발칸 전역, 노르망디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특히 하리코프 전투에서 공을 세워 백엽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받았으며, 33세의 나이로 독일군 최연소 사단장이 되었다. 노르망디 전투 중 캐나다군 포로 학살 사건으로 전후 재판에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5년간 복역 후 석방되었으며, 무장친위대 퇴역 군인 상호부조협회(HIAG)에서 활동했다. 그는 자신의 전쟁범죄 혐의를 부인하고 무장친위대 대원들의 권리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며, 1961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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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마이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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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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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Panzermeyer" (전차 마이어) |
출생일 | 1910년 12월 23일 |
출생지 | 니더작센주 예르크스하임 |
사망일 | 1961년 12월 23일 |
사망지 |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하겐 |
알려진 이유 | 아르덴 수도원 학살 HIAG 대변인 |
범죄 정보 | |
유죄 판결 | 전쟁 범죄 (3건) |
형량 | 사형 (감형) 종신형 (감형) 14년형 (추가 감형) |
유죄 판결 상태 | 사망 |
군사 경력 | |
소속 | 나치 독일 |
군종 | [[파일:Flag Schutzstaffel.svg|23px]] 무장친위대 |
복무 기간 | 1934년 – 1944년 |
군번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316,714 친위대: #17,559 |
최종 계급 | 친위대 여단지도자 |
지휘 | 제12 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 |
참전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공방전 발칸 전역 바르바로사 작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오버로드 작전 |
2. 어린 시절과 초기 경력
쿠르트 아돌프 빌헬름 마이어는 1910년 12월 23일 브라운슈바이크 주 예륵스하임에서 가난한 노동자 집안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1914년 마이어의 아버지는 독일군에 입대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부사관으로 복무했으며,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퇴역하기 전에 본부원사(Stabsfeldwebel)까지 진급했다.[4][5][6][7]
마이어는 예륵스하임에서 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에는 아버지처럼 공장 노동자, 광부로 일했다. 이후 메클렌부르크 주 경찰에 지원하여 1929년 10월 1일 합격했다.[4][6][5] 슈베린 경찰 대학 훈련 시절, 마이어는 동료에게 장난을 치려다 2층 건물 지붕에서 떨어져 발 뼈가 20조각 이상 나는 중상을 입었으나 완전히 회복했다. 이후 동료들은 마이어를 전차처럼 튼튼하다는 의미로 'Panzer'(전차)라는 별명으로 불렀다.[5]
마이어는 15세에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하고, 1930년 9월 1일 나치당 정식 당원이 되었으며, 1931년 10월 15일 친위대에 입대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열렬한 나치즘 지지자였다.[7] 같은 해 12월 요제프 괴벨스 결혼식에 초대받기도 했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 메클렌부르크 주 경찰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했으며, 상급 순경(Oberwachtmeister)까지 승진했다.[4][6][5]
2. 1. 어린 시절
쿠르트 아돌프 빌헬름 마이어는 1910년 12월 23일 브라운슈바이크 주 예륵스하임에서 가난한 노동자 집안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1914년 마이어의 아버지는 독일군에 입대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부사관으로 복무했으며,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퇴역하기 전에 본부원사(Stabsfeldwebel)까지 진급했다.[4][5][6][7]마이어는 예륵스하임에서 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아버지처럼 공장 노동자가 되었고, 얼마 후에는 광부가 되었다. 그 후 노동자의 삶을 벗어나고 싶어 메클렌부르크 주 경찰에 지원했고, 1929년 10월 1일 합격했다.[4][6][5]
마이어의 별명인 'Panzer'(전차)는 기갑전의 달인이라서 붙여진 별명이 아니다. 슈베린 경찰 대학 훈련 시절, 마이어는 동료에게 장난을 치려다 2층 건물 지붕에서 떨어져 발 뼈가 20조각 이상 나는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마이어는 놀랍게도 완전히 회복했고, 이후 동료들은 마이어를 전차처럼 튼튼하다는 의미로 'Panzer'라는 별명으로 불렀다.[5]
어린 시절부터 정치 활동을 했던 마이어는 열렬한 나치즘 지지자로, 15세에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했고, 1930년 9월 1일 나치당 정식 당원이 되었으며, 1931년 10월 15일 친위대에 입대했다.[7] 같은 해 12월 요제프 괴벨스 결혼식에 초대받기도 했다.
2. 2. 경찰 경력
1929년부터 1934년까지 메클렌부르크 주 경찰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했다.[4][6][5] 경찰에서는 상급 순경(Oberwachtmeister)까지 승진했다.[5]3. 나치당과 친위대 경력
마이어는 1930년 9월 1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가입했고(당원 번호 316,714)[7], 얼마 후 하인리히 힘러가 이끄는 SS에 지원했다. 1931년 10월 15일 SS에 입대하여(대원 번호 17,559)[7] 슈베린에 주둔하는 제22 SS연대에 배속되었다. 1932년에는 SS하급돌격지도자(소위)로 임관했다.
1934년 5월, 라이프슈탄다르테로 전속되었고, 1936년 9월에는 SS상급돌격지도자(중위)로 승진하여 라이프슈탄다르테의 제14 대전차중대장이 되었다.[5] 이후 마이어는 오스트리아 병합과 하인츠 구데리안 지휘 아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등 무혈 임무에 참가했다.
3. 1. 나치즘 경도와 초기 활동
1910년 예르크하임(Jerxheim)에서 태어난 마이어는 하층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광부(miner)였으며, 1914년에 독일군(German Army)(German Empire)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마이어는 초등학교 졸업 후 상업 수습을 시작했지만, 1928년 실업자가 되어 잡역부(handyman)로 일해야 했다. 그러다 이듬해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경찰이 되었다.[4][5][7][8]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25년 5월에 나치당의 청소년 단체(1926년에 히틀러 유겐트(Hitler Youth)로 개칭됨)에 참여했다.[4][5] 1928년 4월에는 유겐트에서 돌격대(Sturmabteilung)로 이적했다.[8][5] 1930년 9월 1일 공식적으로 나치당에 입당했다(당원 번호 316,714).[7] 1931년 10월 15일에는 친위대(Schutzstaffel, SS)에 입대했다(대원 번호 17,559).[7][8][4] 그는 같은 해 12월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의 결혼식에 초대 손님으로 참석했다.[4] 1934년 5월 15일 히틀러의 경호 부대인 라이프슈탄달테 SS 아돌프 히틀러(LSSAH)의 자동차 부대에 전속되었다.[5] 이 부대는 같은 해 친위대 특무부대(무장 친위대의 전신)의 연대 중 하나가 되었다. 1936년 9월에는 제14 대전차 중대장이 되었다.[5] 1938년 1월에는 클라우스도르프에서 엔지니어로서의 강습을 받았고, 이어 뮐하우젠에서 참모 강습을 받았다.[5]
3. 2. 라이프슈탄다르테 전속과 승진
마이어는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이 되기 3년 전인 1930년 9월 1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가입했다(당원 번호 316,714).[7] 얼마 후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지휘되는 정예 조직인 SS에 입대를 지원했다. 1931년 10월 15일 입대가 허락되었고(SS 번호 17,559),[7] 슈베린 시에 거점을 둔 제22 SS연대에 배속되었다. 1932년 SS하급돌격지도자(소위급)로 임관했다. 1934년 5월 SS에서 가장 선망받는 조직인 라이프슈탄다르테로 전속되었다. 1936년 9월 SS상급돌격지도자(중위급)로 승진하고, 라이프슈탄다르테의 제14 대전차중대장이 되었다.[5] 마이어와 라이프슈탄다르테는 제16 군단에 배속되어 오스트리아 병합, 하인츠 구데리안 지휘 아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등 무혈 임무에 참가했다.4.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쿠르트 마이어는 초기부터 참전하여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발칸 작전 등에서 빠른 기동력과 과감한 지휘로 주목받았다.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이후, 마이어는 흑해 연안의 헤르손 점령에 기여하는 등 동부 전선에서도 활약했다.[12] 그러나 로스토프 공세 중 건강 악화로 전선에서 물러나 사단 사령부 근무를 하다가 1942년 1월 아돌프 히틀러를 처음 만났다.[13] 이후 복귀했으나, 제1SS기갑사단 자체가 큰 피해를 입어 1942년 6월 프랑스로 이동했다.
1943년 1월, 마이어는 다시 동부 전선에 복귀하여 제3차 하리코프 전투에 참가, 정찰 대대를 이끌고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여러 차례 위기를 극복했다. 6월에는 제12SS기갑사단 창설과 함께 제25장갑척탄병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사단은 히틀러 유겐트 청소년들을 병사로, 제1SS기갑사단 출신 장교들을 주축으로 편성되었으며, 마이어도 그 일원이었다.
1944년 노르망디 전투에서 마이어는 친위대 대령으로 제25장갑척탄병연대를 지휘했다. 프리츠 비트 사단장 전사 후 지휘권을 이어받아 33세의 나이로 친위대 준장으로 진급, 독일군 최연소 장군이 되었다. 캉 근교에서 캐나다군에 큰 피해를 입히는 등 분전했으나, 팔레즈 포위전에서 병력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도 포위망 돌파에 성공했다. 이 공로로 8월 27일 떡갈잎 검 장식 기사철십자훈장을 받았다.[18]
9월 7일, 리에주에서 레지스탕스에 체포되어 미군에 인계된 후, 콩피에뉴와 런던 근교 트렌트 파크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13]
4. 1. 초기 참전과 활약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쿠르트 마이어는 SS 아돌프 히틀러 근위대(LSSAH) 소속 대전차 중대(14. Panzerabwehrkompanie) 지휘관으로 참전했다.[8][5] 9월 20일 2급 철십자훈장을 받았지만, 대전차 중대의 활약은 적었고, 마이어는 이에 불만을 가졌다. LSSAH 연대장 요제프 디트리히의 허락을 얻어 10월 말 오토바이 저격 중대장으로 전속되었다.[8][5]이듬해 서부 전격전에 참전, 오토바이 중대 중대장으로 LSSAH의 선봉에서 진격했다.[9] 하지만 이때 마이어는 오토바이를 너무 빨리 몰다가 전화선을 피하지 못하고 넘어져 뇌진탕을 당했다.[9] 이 전투 이후 1940년 6월 8일 1급 철십자훈장을 수훈했고, 마이어의 오토바이 중대는 장갑 정찰 대대로 개편되었다.[9]
1941년 4월부터 시작된 발칸 작전에도 LSSAH의 장갑 정찰 대대 대대장으로 참가했다. 4월 10일 마이어의 대대는 크리슬라(Klissura) 고개에서 그리스군과 싸워 전사 6명, 부상 9명의 손실만으로 1000명 이상의 그리스 병사를 포로로 잡았다.[10] 그 다음날에는 카스토리아 시가지를 점령하고 1만 1000명을 포로로 잡았다.[11] 마이어의 부대는 4월 26일 코나노스 만에 도착하여 어선으로 오토바이와 대전차포를 해상 수송하여 반대편 영국군 기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9] 이 전투 이후 1941년 5월 18일 기사철십자훈장을 수훈했다.
4. 2. 발칸 전역과 기사십자 철십자장
무솔리니의 발칸 침공 실패로 인해 독일은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했다.[9] 마이어의 대대는 그리스군이 클리수라 고개를 방어하면서 포격을 받았다. 마이어는 휘하 수색대대를 3개 공격 부대로 나누었고, 그 중 하나를 자신이 지휘하고 나머지 둘은 각각 후고 크라스와 막스 뷘셰에게 지휘를 맡겼다. 새벽에 이루어진 마이어 대대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오전 11시 경 그리스군의 외곽 수비선이 돌파되었지만, 여전히 진격은 어려웠고 주저하는 병사들을 재촉하기 위해 마이어는 수류탄을 뽑아들어 병사들 뒤에 던졌다. 남은 길은 전진뿐이었다. 오후 중반 도시와 고지가 확보되었고, 카스토리아로 통하는 도로가 개통되었다.[1]치열한 전투 끝에 마이어의 부대는 방어선을 돌파했고, 도로가 열리자 독일군은 후퇴하는 그리스군과 영국 연방군을 차단하기 위해 카스토리아 지역으로 진격했다. 이 고지 전투에서 그리스군 600명이 항복했다. 마이어 대대의 피해는 사망 장교 1명, 병사 6명 그리고 부상 장교 1명, 병사 17명뿐이었다. 4월 16일 마이어의 대대는 그리스군 수비선 후방으로 침투, 남쪽에서 카스토리아 시를 공격해 1,100명 이상의 포로를 포획했다.[1] 4월 10일 마이어의 대대는 크리수라(Klissura) 고개에서 그리스군과 싸워 전사 6명, 부상 9명의 손실만으로 1000명 이상의 그리스 병사를 포로로 잡았다.[10] 그 다음날에는 카스토리아(Kastoria) 시가지를 점령하고 1만 1000명을 포로로 잡았다.[11] 마이어의 부대는 4월 26일 코나노스 만(Konon Bay)에 도착하여 어선으로 오토바이와 대전차포를 해상 수송하여 반대편 영국군 기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9]
이 공적으로 마이어는 1941년 5월 18일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훈했다.[1][9]
4. 3. 동부 전선과 독일 황금십자장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에 남부 집단군 소속으로 참전한 마이어는 빠른 기동력으로 "슈넬레 마이어"(번개 마이어)라는 별명을 얻었다. 흑해 연안의 마리우폴 점령 과정에서 마이어가 '탄환을 장전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도시뿐만 아니라 소련군 사단 전체가 항복하는 상황이 벌어졌다.[1] 이는 과감하고 용감하면서도 무모한 마이어 특유의 지휘 스타일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는 항상 최전선에서 부하들을 지휘했다.1941년 10월, 마이어는 병을 얻어 베를린에서 아내의 간호를 받으며 건강 회복에 힘썼다. 1942년 1월 건강을 회복한 후 부대로 복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독일 황금십자장을 수훈했다.
4. 4. 하리코프 전투와 백엽 기사십자 철십자장
1943년 1월, 마이어는 라이프슈탄다르테와 함께 동부 전선에 복귀하여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 마이어의 재편성된 제1 SS기갑수색대대는 항상 최전선에서 싸웠다.[1] 이들은 뷘셰의 제1 SS기갑연대 1대대, 테오도어 "테디" 비슈의 제2 SS기갑척탄병연대 휘하 후고 크라스의 1대대 및 요아힘 파이퍼의 3대대와 협력했다. 이 소규모 전투단들은 위기에 빠진 전선을 수복하고 소련군 전선을 돌파해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고 소련군 장교들을 포획했다. 마이어의 대대는 Jeremejewka와 Aleksandrowka 근방에서 소련군 사단 지휘부 전체를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하리코프 탈환전 종장, 라이프슈탄다르테는 도시 중앙에 위치한 붉은 광장을 점령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마이어, 뷘셰, 파이퍼는 각자의 전투단을 이끌고 도시 전체를 점령해야 했다. 마이어는 자신의 대대를 이끌고 붉은 광장으로 돌진하여 소련 수비군에 의해 분단되기 전까지 광장 일부를 확보했다. 마이어와 휘하 척탄병들은 3월 13일 파이퍼 전투단에 구출될 때까지 압도적인 소련군을 상대로 광장을 사수했다. 파이퍼 전투단과 테디 비슈의 연대 본대는 마이어의 대대와 함께 악전고투 끝에 도심 중앙부를 장악했다. 이 공적으로 붉은 광장은 라이프슈탄다르테 광장으로 개칭되었다.
라이프슈탄다르테,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 등 정예 3개 SS사단과 국방군 정예인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활약으로 니콜라이 바투딘의 공세는 기세를 잃었고, 소련군은 보로네시를 내주고 남서부 전선에서 막대한 전력을 상실했다.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은 대전 중 독일군이 거둔 마지막 주요 승리 중 하나였다. 당시의 활약으로 마이어는 백엽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훈한 195번째 인물이 되었다.

마이어는 하르키우 전투 중 한 마을의 파괴와 모든 주민의 살해를 명령했다고 전해진다.[1] 1943년 2월 20일 예프레모프카(예프레모프카) 마을에 대한 성공적인 공격으로 떡갈잎이 달린 기사십자장을 받았는데, 그의 부대는 포로를 전혀 잡지 않고 소련군 약 1500명을 사살했다. 전후, 한 전직 SS 대원은 1943년 3월 예프레모프카 점령 후 마이어의 명령에 따라 마을 주민들을 모두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질렀다고 증언했다.
1944년 프랑스에서 체포된 후 서방 연합군 심문관에게 한 전직 SS 대원의 별도 증언은 다음과 같다.
> LSSAH의 정찰 대대는 2월 말 [1943년] 동쪽으로 진격하여 예프레모프카 마을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들은 러시아군에 포위되었다. 연료와 탄약이 바닥나서 공중으로 보급받다가 서쪽으로 돌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렇게 하기 전에 모든 민간인을 사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당시 대대는 쿠르트 마이어가 지휘했다.
두 명의 생존자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자료에 따르면, 살인은 2월 17일 발생했다. 2월 12일, LSSAH 부대는 예프레모프카와 세묘노프카 두 마을을 점령했다. 후퇴하는 소련군은 SS 장교 두 명을 부상시켰다. 보복으로 LSSAH 부대는 5일 후에 남녀노소 872명을 살해했고, 약 240명은 예프레모프카 교회에서 불에 타 죽었다. 러시아 자료에 따르면, 이 학살은 요헨 파이퍼가 이끄는 "화염방사기 대대"가 자행했다.
4. 5. 히틀러유겐트 사단
마이어가 복귀한 후, 차량화보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는 "SS기갑척탄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로 개편되었다. 제2 SS기갑군단이 하리코프에서 퇴각한 후 파울 하우서 SS대장은 도시 탈환을 명령했다. 정예 무장SS 병사들은 하리코프 탈환에 돌입했고, 마이어의 재편성된 제1 SS기갑수색대대는 최전선에서 전투를 벌였다. 마이어의 대대는 뷘셰의 제1 SS기갑연대 1대대, 테오도어 "테디" 비슈의 제2 SS기갑척탄병연대 휘하 후고 크라스의 1대대 및 요아힘 파이퍼의 3대대와 협력했다. 이들은 위기에 빠진 전선을 수복하고 소련군 전선을 돌파해 아군을 구출하고 소련군 장교들을 포획했다. 마이어의 대대는 Jeremejewka와 Aleksandrowka 근방에서 소련군 사단 지휘부 전체를 사로잡았다.[13]하리코프 탈환전 종장, 라이프슈탄다르테는 도시 중앙의 붉은 광장을 점령하는 임무를 받았다. 마이어, 뷘셰, 파이퍼는 전투단을 이끌고 도시 전체를 점령해야 했다. 마이어는 대대를 이끌고 붉은 광장으로 돌진해 소련 수비군에 의해 분단되기 전 광장 일부를 확보했다. 마이어와 척탄병들은 3월 13일 파이퍼 전투단에 구출될 때까지 소련군을 상대로 광장을 사수했다. 파이퍼 전투단과 테디 비슈의 연대 본대는 마이어의 대대와 악전고투 후 도심 중앙부를 장악했다. 붉은 광장은 라이프슈탄다르테 광장으로 개칭되었다.[13]
라이프슈탄다르테,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와 국방군 정예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활약으로 니콜라이 바투딘의 공세는 기세를 잃었고, 소련군은 보로네시를 내주고 남서부 전선에서 막대한 전력을 상실했다.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은 대전 중 독일군 거둔 마지막 주요 승리 중 하나였다. 마이어는 백엽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훈한 195번째 인물이 되었다.[13]
1943년 여름, 히틀러는 신생 SS사단의 편성을 공표했다. 제12 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는 1926년생 17세 히틀러유겐트 출신들로 편성되었다. 사단 기간 장교는 라이프슈탄다르테에서 차출되었다. 사단장은 마이어의 오랜 전우인 프리츠 비트 SS상급대령이 임명되었고, 마이어 또한 뷘셰의 권유로 히틀러유겐트에 합류했다. 마이어는 히틀러유겐트 기갑연대를 지휘하고 싶었지만, 제25 SS기갑척탄병연대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 6월 21일 마이어는 SS대령으로 승진했다. 마이어는 벨기에 베베를로에서 부대 훈련을 감독했다. 1944년 초 사단은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벨기에 아셀(Hasselt)로 이동했다.[13]
4. 6. 노르망디 전투와 최연소 사단장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오버로드 작전이 개시되면서 독일은 서부 전선까지 떠안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혼란 속에서 히틀러유겐트 사단은 오후 2시 30분경부터 전선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이어가 이끄는 제25 SS 기갑척탄병 연대와 제12 SS 기갑 연대 2대대 소속 2개 4호 전차 중대로 구성된 히틀러유겐트 사단 선발대는 격렬한 함포 및 대전차 포격, 공습을 받으며 영연방군이 상륙한 소드 해변 근방으로 진격했다. 마이어의 연대는 6월 6일 밤 10시에 집결지에 도착하여 전투 준비를 마쳤고, 마이어는 아르덴 수도원에 지휘 본부를 설치했다.[16]사단과의 첫 교전에서 마이어 연대의 "꼬마 전사들"은 뛰어난 군인임을 증명했다. 제25 SS기갑척탄병연대는 캐나다군 전차 28대를 파괴하면서 단 6명만을 손실했다. 마이어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16]
이 시기에 캐나다군 포로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마이어는 이로 인해 재판에 기소되었고, 포로를 잡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이유와 18명의 전쟁 포로를 학살했다는 죄목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다.[3]
2주 동안 마이어 연대는 카르피케 비행장과 콩테스, 뷔롱, 오티 마을을 수비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44년 6월 14일, 사단장 프리츠 비트 SS소장이 사령부를 덮친 영국군의 함포 사격에 전사했다. 사단 최고참 장교였던 마이어가 사단장직을 계승했고, 33세의 나이로 독일군 최연소 사단장이 되었다.

마이어는 영국군 및 캐나다군의 대규모 공세에도 불구하고 캉 북부 전선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7월 4일, 사단은 약 4,000명의 병력을 상실하여 전력이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이었다. 그럼에도 마이어는 카르피케 비행장을 사수했다. 7월 10일, 히틀러의 "사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마이어는 캉을 방기하고 오르느 강 동안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사단에 내렸다.
4. 7. 팔레즈 포위망과 탈출
캐나다군은 노르망디에 있는 대부분의 독일군을 포위하고 섬멸하기 위해 미국군과 합류할 계획을 세우고 팔레즈에 대한 진격을 시작했다. 히틀러 유겐트 사단은 이후 팔레즈 포켓으로 알려지게 된 지역의 북쪽 지점을 방어하고 있었다. 며칠간의 전투 후 마이어의 부대는 약 1,500명으로 감소했고, 그는 이들을 이끌고 포켓에서 탈출하려고 했다. 마이어는 캐나다 제3사단과의 전투 중 부상을 입었지만, 사단 후위부대와 함께 팔레즈 포켓에서 탈출했다. 사단의 잔여 병력은 센강을 건너 벨기에로 후퇴했다. 8월 27일 마이어는 백엽 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받았고,[18] 9월 1일에는 SS여단지도자(소장급)로 승진했다.[19]
4. 8. 벨기에에서의 포로 생활
항복 후 마이어는 미군 경비병과의 싸움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처음에는 병원에 입원했다. 8월에 콩피에뉴 근처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자신의 친위대(SS) 소속을 숨기려 했지만, 11월에 고위 SS 장교임이 밝혀졌다.[13] 그 후 마이어는 영국 트렌트 파크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다른 고위 포로들과 나눈 대화가 영국 군사 정보부에 의해 은밀히 녹음되었다. 그는 이러한 대화에서 자신의 나치 성향의 정치적 신념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마이어는 이 이데올로기에 헌신하며, "한 사람은 일생에 한 번만 마음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심문관은 그를 "나치즘의 화신"이라고 묘사했다. 녹음 내내 마이어와 다른 SS 대원들은 독일 국방군 장교들의 견해를 확인했는데, 그들은 나치즘, 제3제국,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의 메시아적 개성숭배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믿음을 가진 이념적 광신자로 여겨졌다.1945년 1월 녹음된 대화에서 마이어는 히틀러가 "독일 국민에게 엄청난 각성을 불러일으켰고" 자존감을 되살렸다고 칭찬했다. 다음 달 녹음된 대화에서 그는 사기가 저하된 베어마흐트 장군을 비난하며, "여기 있는 많은 장교들이 내 사단을 지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자기 희생과 광신에 대한 감각을 배울 수 있을 테니까"라고 말했다. 녹음에 따르면, 마이어는 군 경력을 위해 나치 이데올로기에 입술 서비스만 제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이념적 인종 전사로 여기며, 자신의 부하들에게 국민 사회주의 신조를 주입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영국 당국의 엄격한 심문에도 불구하고, 마이어는 어떠한 전쟁 범죄도 인정하지 않았다.[13] 아르덴 압바이 학살에 대한 그의 연루는 결국 투옥된 SS 탈영병들에 의해 밝혀졌다.
4. 9. 전쟁범죄 재판과 수감 생활
1945년 12월, 마이어는 독일 아우리히에서 캐나다 군사 법정에 의해 전쟁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혐의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1944년 6월 7일 이전, 부하들에게 항복하는 연합군 병사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고 선동했다는 것이다. 둘째, 1944년 6월 8일경, 아르덴 수도원에 있는 본부에서 부하들이 7명의 캐나다군 포로를 살해하도록 명령하고, 그 결과 18명의 포로가 사망하는 데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3]마이어는 5가지 혐의 모두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다.[3] 그는 부대원들에게 적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라고 선동하고 아르덴 수도원에서 18명의 포로를 살해한 책임은 인정되었으나, 부롱과 오티에서 23명을 살해한 책임은 없다고 판결받았다. 아르덴 수도원에서의 사망에 대해서는 책임이 인정되었지만, 살해를 직접 명령한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다.[3]
재판 과정에서 마이어는 자신의 부대 기록과 병사들의 결백을 옹호하며, 캐나다 군이 자신을 군인으로 대우했고 절차가 공정하게 진행되었다고 진술했다.[3]
재판부는 마이어에게 총살형을 선고했지만, 많은 이들은 그가 살인을 묵인했을 뿐 직접 명령하지 않았다고 여겨 장기 투옥을 예상했다. 마이어는 처음에는 사형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아내와 변호사의 설득으로 항소했다. 항소는 기각되었지만, 사형 집행 직전 재판 규정에 따라 최종 검토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져 집행이 연기되었다.
최고 지휘관이자 유럽 주둔 캐나다군 사령관이었던 크리스토퍼 보크스는 지휘관이 부하의 행동에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끝에, "범죄가 지휘관의 직접적인 행위 또는 행동하지 않음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명확하게 입증된 경우"에만 사형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마이어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3]
마이어는 1946년부터 캐나다 뉴브런즈윅주 도체스터 교도소에서 5년간 복역했고, 1951년 서독 베를의 영국군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그는 1954년 9월 7일, 캐나다 정부의 형량 감형으로 석방되었다.[3]
thumb 촬영. 중앙에 모자를 쓰지 않고 서 있는 인물).]]
4. 10. 석방과 HIAG 활동
1954년 9월 7일 마이어는 9년간의 감옥 생활 후 자유의 몸이 되었고, 무장SS 퇴역군인 상조회(HIAG)에서 공식대변인으로 활동하며 무장SS 퇴역군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가결시키기 위해 투쟁했다.[14]1957년 자서전 《GRENADIERE》를 출간했다. 이 책은 현장감과 전쟁의 공포감이 느껴지는 마이어 특유의 문체로 쓰여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이어는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전쟁범죄 사실을 부인하고 부하들을 변호했으며, 마지막 장을 무장SS 퇴역군인들의 권리 회복을 위한 투쟁에 할애했다.
1957년 HIAG 집회에서 마이어는 히틀러가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자신은 예전 지휘관들을 지지하며, 과거보다는 미래를 향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바이에른주 카를스베르크에서 열린 HIAG 집회에서 약 8,000명의 전 SS 대원들에게 "SS 부대는 오라두르 대학살을 제외하고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그것은 한 사람의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마이어는 Waffen-SS가 "베르마흐트의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정규군이었다"라고 주장했다.
1958년 7월 HIAG 회의에서 마이어는 SPD 정치인 울리히 로마와 악수했다. 이 사건은 HIAG에게 좋은 홍보로 여겨져 널리 논의되었다.
1959년 마이어는 HIAG의 대변인으로 임명되어 실용적이고 서독 국가에 충성하는 인물이자 HIAG를 비정치적인 단체로 제시했다. 1960년 1월 캐나다 방송 협회(Canadian Broadcasting Corporation)와의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그는 Waffen-SS 참전 용사들에게 유대교 회당과 묘지를 보호하라고 명령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마이어는 저명한 SPD 정치인이자 전 강제 수용소 수감자였던 프리츠 에를러(Fritz Erler)와 회의를 가졌으나, 에를러를 완전히 설득하지는 못했다.
4. 11. 회고록 《척탄병》과 죽음
1957년 자서전 《Grenadierede》(척탄병)을 출간했다. 현장감과 전쟁의 공포감이 물씬 풍겨 나오는 마이어 특유의 문체와 필법으로 쓰여진 《척탄병》은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14] 마이어는 자서전을 자신의 전쟁범죄 사실을 부인하고 부하들을 변호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자서전 마지막 장을 친애해 마지않는 자신의 척탄병들(동료들), 무장SS 퇴역군인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투쟁의 장으로 할애했다.역사가 찰스 W. 시드너(Charles W. Sydnor)는 《Grenadierede》를 "아마도 가장 대담하고 가장 공격적인 변호 작품"이라고 불렀다. 이 책은 대중문화 속의 무장친위대(Waffen-SS)를 나치 정권의 전쟁 범죄에 연루되지 않은 비정치적인, 무모하게 용감한 전투원으로 인식시키려는 구 무장친위대원 상호부조협회(HIAG) 캠페인의 일환이었는데, 이러한 인식은 이후 역사가들에 의해 반박되었다.
악화된 건강으로 고통받던 마이어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하겐 시에서 1961년 12월 23일, 자신의 51번째 생일에 3번의 가벼운 발작 후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하겐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1만 5천 명이 참석했고, 관례대로 메달을 든 조객이 그의 관을 따라갔다.

5. 진급 내역
날짜 | 계급 | 비고 |
---|---|---|
1930년 10월 1일 | 순경(Unterwachtmeister)[5] | |
1932년 2월 15일 | 친위대 하사(SS-Mann)[5] | |
1932년 7월 10일 | 친위대 소위(SS-Sturmführer)[5][7] | |
1934년 4월 20일 | 상경(Oberwachtmeister)[5] | |
1935년 3월 10일 | 친위대 중위(SS-Obersturmführer)[5][7] | |
1937년 9월 12일 | 친위대 대위(SS-Hauptsturmführer)[5][7] | |
1940년 9월 1일 | 친위대 소령(SS-Sturmbannführer)[5][15] | |
1942년 11월 9일 | 친위대 중령(SS-Obersturmbannführer)[5][15] | |
1943년 6월 21일 | 친위대 대령(SS-Standartenführer)[15] | |
1944년 8월 1일 | 친위대 상급대령(SS-Oberführer)[15] | |
1944년 9월 1일 | 친위대 소장(SS-Brigadeführer)[15] |
6. 서훈 내역
수여 날짜 | 훈장 | 계급 | 비고 |
---|---|---|---|
1939년 9월 20일 | 2급 철십자장[7] | ||
1940년 6월 8일 | 1급 철십자장[7] | ||
1941년 5월 18일 | 기사철십자훈장[7][6] | SS-슈투르반휘러(SS-Sturmbannführer) | SS정찰대대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 대대장 |
1942년 2월 8일 | 독일십자훈장 금장[7] | SS-슈투르반휘러(SS-Sturmbannführer) | SS사단 아돌프 히틀러 소속 |
1943년 2월 23일 | 기사철십자훈장 참엽[7][6] | SS-오버슈투르반휘러(SS-Obersturmbannführer) | SS정찰대대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 대대장 (195번째) |
1944년 8월 27일 | 기사철십자훈장 검[7][6] | SS-슈탄다르텐휘러(SS-Standartenführer) | 히틀러 유겐트 SS 사단 사단장 (91번째) |
1938년 3월 13일 기념 메달[7] | |||
1938년 10월 1일 기념 메달[7] | |||
친위대 전국 지도자 명예 장검[7] | |||
친위대 명예 반지[7] | |||
용기훈장 1등 4급장 (불가리아 훈장)[7]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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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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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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