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히르 토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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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히르 토후국은 9세기 초 호라산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이란계 왕조이다. 아바스 왕조의 지원을 받아 건국되었으며, 타히르 이븐 후세인이 초대 통치자가 되었다. 타히르 토후국은 호라산, 바그다드 등의 지역을 다스렸으며, 특히 호라산은 이슬람 제국의 동방 지배의 요충지였다. 타히르 토후국은 페르시아 문학에 적대적이었지만, 페르시아어를 페르시아-아랍 문자로 표기하는 등 페르시아 문화의 부흥에도 기여했다. 873년 사파르 왕조의 호라산 점령으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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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르 토후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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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토후국 명칭 | 타히르 토후국 |
로마자 표기 | Tâheriyân |
별칭 | 타히르 왕조 |
통치 형태 | 칼리파의 토후국 |
역사 | |
시작 | 821년 |
종료 | 873년 |
이전 | 아바스 왕조 |
계승 | 사파르 왕조 |
계승 2 | 이란 북부의 알리드 왕조 |
성립 | 821년 |
멸망 | 873년 |
지리 | |
수도 | 메르브, 이후 니샤푸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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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및 언어 | |
공용어 | 초기 신 페르시아어(궁정, 비공식), 아랍어(문학, 시, 과학) |
추정 인구 | 800년경, 1,000,000명 |
종교 | |
종교 | 수니파 이슬람교 |
통치자 | |
칭호 | 에미르 |
초대 통치자 | 타히르 이븐 후사인 (821년) |
마지막 통치자 | 무함마드 이븐 타히르 (862년-873년) |
기타 | |
통화 | (정보 없음) |
2. 역사
타히르 토후국은 9세기 아바스 왕조 시대에 호라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페르시아인 왕조이다. 왕조의 창시자인 타히르 이븐 후세인은 수니파 페르시아인 데흐칸 출신으로,[1]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계승 분쟁인 제4차 피트나에서 알-마문을 도와 군사적으로 큰 공을 세웠다.[1] 이 공로로 821년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망하였고, 이후 그의 아들 탈하와 압둘라가 차례로 총독직을 계승하며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었다. 특히 압둘라의 통치 시기에는 농업이 발전하고 아바스 왕조 동부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타히르 왕조는 호라산 통치와 더불어 약 70년간 바그다드의 군사 총독(아샤브 알-슈르타) 직책도 겸임하며 아바스 왕조 중앙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특히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는 사마라 무정부 상태 당시 바그다드를 방어하고 칼리프의 거취에 영향을 미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압둘라 사후 타히르 2세와 무함마드 이븐 타히르 시기를 거치며 왕조의 통치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타바리스탄과 같은 속주에서 반란이 일어나 독립했으며, 결국 873년 시스탄에서 발흥한 사파르 왕조에 의해 수도 니샤푸르가 함락되면서 호라산 지역의 지배권을 상실했다. 이후에도 타히르 가문은 바그다드 총독직을 유지했으나, 891년 이 자리마저 바드르 알-무타디디에게 넘어가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문화적으로 타히르 왕조는 페르시아계였음에도 아랍 문화에 상당히 동화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타히르 왕조는 페르시아 문학에 적대적이었으며 '압드 알라 빈 타히르'는 페르시아 소설과 조로아스터교 문헌 파괴를 명령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9세기 호라산에서 페르시아어 표기를 위해 팔라비 문자 대신 페르시아-아랍 문자를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는 이란 간주곡 시기 이란인들이 아랍-이슬람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페르시아 고유의 정체성을 재확립하려 했던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타히르 왕조는 스스로 신화 속 이란 영웅 로스탐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2. 1. 건국
타히르 왕조의 창시자는 타히르 이븐 후세인으로, 수니파 페르시아인이며 데흐칸 출신이었다.[1] 그의 조상들은 이전에 아바스 왕조에 대한 공로로 동부 호라산에서 작은 총독직을 수여받았다. 그는 우마이야 왕조를 타도한 아바스 혁명에 참여한 인물의 손자이기도 하다. 외눈의 무인이자 이도류의 달인으로 알려져 "두 개의 오른손을 가진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타히르는 경쟁 관계에 있던 칼리프 알-아민과 알-마문 사이의 내전에서 알-마문을 도와 중요한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다.[1] 809년 아바스 왕조 제5대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가 마와라안나흐르의 반란 진압 중 호라산에서 병사하자, 당시 메르브에 있던 알-마문에게 합류했다. 타히르는 알-마문이 거병했을 때 적극 협력하여 바그다드를 포위하고 아민의 항복을 받아내는 등, 알-마문이 제7대 칼리프로 즉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알-마문 즉위 후 타히르는 바그다드와 자지라의 총독직을 거쳐 821년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망했다. 그는 호라산에서 튀르크계와 이란계 마왈리 군단, 아랍 주둔군 등의 충성을 확보하며 행정 및 군사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강대한 군사력을 갖게 된 타히르는 칼리프 알-마문의 경계를 받게 되었고, 821년 모스크의 금요 예배에서 낭독되는 후트바에서 칼리프의 이름을 생략하며 사실상 독립을 선언했다.
타히르 사후에도 아바스 왕조는 타히르 가문의 호라산 동부 지역에서의 실력을 인정하여, 그의 아들 탈하(재위 822년-828년)를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후에도 타히르 가문은 총독직을 세습했다. 탈하는 시스탄에서 하와리즈파를 몰아내는 데 실패했고, 하와리즈 지도자 함자 b. 아다라크(828년 사망)가 사망한 후, 타히르 왕조는 자란을 점령했지만 주변 시골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탈하가 828년에 사망했을 때, 이전에 이집트와 아라비아 반도에서 왈리를 지냈던 타히르의 다른 아들 압둘라가 호라산의 총독직을 받았다. 압둘라는 타히르 왕조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호라산의 고향에서 농업이 번성하고, 아바스 칼리프국의 동부 지역에서 인기가 높아졌으며, 칼리프국의 서부 지역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영향력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시인이었던 그는 모든 아랍적인 것에 공감했다.[2]
페르시아어를 쓰기 위해 팔라비 문자를 페르시아-아랍 문자로 대체하는 작업은 9세기에 호라산에서 타히르 왕조에 의해 이루어졌다. 왕조의 최대 영역은 현재의 이란,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일부에 걸쳐 있었으며, 수도는 니샤푸르였다.
타히르 왕조는 호라산 총독직을 유지하면서 매년 바그다드에 공물이나 군사력으로 튀르크계 노예를 공급하는 등을 담당했고, 일족에서 바그다드의 경찰청장(술타) 직을 맡는 자도 배출했으며, 아바스 왕조와의 관계는 대체로 양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2. 2. 쇠퇴와 멸망
압둘라가 844년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타히르 2세가 뒤를 이었다. 타히르 2세의 통치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남아있지 않지만, 이 시기 시스탄 지역은 사실상 타히르 토후국의 행정적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타히르 토후국의 통치는 타히르 2세의 아들인 무함마드 이븐 타히르가 통치자가 되면서 심각하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국정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정치적 경험도 부족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내부적 혼란 속에서, 호라산의 속국이었던 타바리스탄에서는 타히르 토후국의 압제적인 정책에 대한 반발로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864년, 타바리스탄 주민들은 독립적인 자이디 통치자인 하산 이븐 자이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타히르 토후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호라산 본토에서도 무함마드의 통치력은 점점 약해져 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스탄 지역에서 새롭게 부상한 사파르 왕조가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873년, 사파르 왕조는 타히르 토후국의 수도인 니샤푸르를 함락시켰고, 호라산 지역은 사파르 왕조의 영토로 병합되었다. 이로써 타히르 토후국의 호라산 지배는 막을 내렸다.
비록 호라산 지배는 끝났지만, 타히르 가문은 바그다드의 총독직 등을 유지하며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891년에 바그다드의 총독직마저 폐지되면서 타히르 토후국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2. 3. 바그다드 총독
타히르 토후국은 호라산 지역 통치 외에도 바그다드의 군사 총독(''아샤브 알-슈르타'') 직책을 수행했다. 시조 타히르 이븐 후세인은 아바스 왕조 제7대 칼리프 마문이 809년 하룬 알 라시드 사후 거병했을 때 협력하여,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경쟁자 아민을 몰아내며 마문의 즉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마문은 즉위 후 타히르에게 바그다드와 자지라의 총독직을 맡겼으며, 820년에는 바그다드의 군사 총독직에도 임명했다. 이후 타히르는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떠났다.
타히르가 호라산으로 떠난 뒤, 바그다드 총독직은 방계 가문 인물인 이사크 이븐 이브라힘에게 넘어갔고, 그는 25년 이상 바그다드를 통치했다. 이사크는 총독 재임 기간 동안 바그다드에서 미흐나 (종교 재판) 시행을 책임졌으며, 이 시기 칼리프들은 새로 건설된 사마라를 수도로 삼아 바그다드를 떠났다.
849년 이사크가 사망하자 그의 두 아들이 차례로 총독직을 계승했고, 851년에는 타히르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가 총독이 되었다.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는 860년대의 혼란기인 "사마라 무정부 상태" 때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칼리프 알-무스타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으며, 865년 경쟁자인 알-무타즈의 군대가 바그다드를 포위했을 때(칼리프 내전) 도시 방어를 지휘했다. 다음 해, 그는 알-무스타인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알-무타즈를 칼리프로 인정하는 대가로 바그다드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의 통치 말년에는 바그다드에서 격렬한 폭동이 발생했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형제들인 우바이다라와 술라이만이 차례로 총독직을 이었지만, 도시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결국 바그다드의 질서는 회복되었고, 타히르 왕조는 이후 20년 동안 더 바그다드 총독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891년, 바드르 알-무타디디가 타히르 왕조를 대신하여 바그다드의 치안을 책임지게 되면서 타히르 가문은 바그다드 총독직을 상실했고, 칼리프 궁정에서의 영향력도 점차 잃게 되었다. 타히르 왕조 일족 중에서는 바그다드의 경찰청장(술타) 직책을 맡은 인물도 배출되는 등 아바스 왕조와의 관계는 대체로 양호하게 유지되었으나, 891년 바그다드 총독직 상실은 타히르 왕조의 쇠퇴에 영향을 미쳤다.
3. 문화
역사학자 클리포드 에드먼드 보스워스는 타히르 왕조가 페르시아인이었지만 문화적으로는 매우 아랍화되었다고 설명한다.[3] 타히르 왕조는 칼리프 세계에서 인정받기를 원했으며, 아랍어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이 사회적, 문화적 명성을 가져다준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타히르 왕조는 초기 신 페르시아어와 문화의 부흥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보스워스는 페르시아어가 타히르 왕조 내부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사파르 왕조가 페르시아 문학 부흥에 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덧붙인다.
수 세기 후, 무함마드 아우피와 다울라트샤 사마르칸디 같은 후대 역사가들은 타히르 왕조가 페르시아 문학에 적대적이었다고 기록했다. 다울라트샤에 따르면, 압드 알라 빈 타히르는 페르시아 소설 바미크 우 아드라("열렬한 연인과 처녀", 헬레니즘 소설에 기반한[4])와 다른 페르시아 및 조로아스터교 관련 작품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학자 시반 마헨드라라자흐는 타히르 왕조를 포함한 이란 간주곡 시기의 왕조들에 대해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그는 이 시기에 '페르시아어 (언어)와 이란 (정체성)이 다시 중요해지고 있었으며, 이란인들은 아랍-이슬람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조정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헨드라라자흐는 타히르 왕조가 페르시아어를 페르시아-아랍 문자로 쓰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를 '페르시아어의 유산과 매력을 보존하게 한 독창적인 이란식 적응'이라고 평가한다.
타히르 왕조는 자신들이 신화 속 이란 영웅인 로스탐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미술사학자 쉴라 블레어는 타히르 왕조가 현재는 남아있지 않은 건축물에 페르시아어 비문을 추가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5]
4. 역대 통치자
타히르 왕조의 주요 '''호라산 통치자'''는 다음과 같다.[1]
- 타히르 이븐 후세인 (821년–822년) … 시조
- 탈하 이븐 타히르 (822년–828년) … 타히르 1세의 아들
- 압둘라 이븐 타히르 (828년–845년) … 타히르 1세의 아들이자 탈하의 동생
- 타히르 2세 (845년–862년) … 압둘라의 아들
- 무함마드 이븐 타히르 (862년–873년) … 타히르 2세의 아들
타히르 왕조는 호라산 외에도 바그다드의 군사 총독직을 겸임했으며, 자세한 내용은 각 하위 문서를 참조할 수 있다.
4. 1. 호라산
타히르 왕조의 창시자 타히르 이븐 후세인은 수니파 페르시아인으로, 데흐칸 출신이었다. 그는 칼리프 계승을 둘러싼 알-아민과 알-마문 사이의 내전에서 알-마문 측의 주요 군사 지휘관으로 활약했다.[1] 이전부터 그와 그의 조상들은 아바스 왕조에 대한 공로로 동부 호라산에서 작은 총독직을 맡고 있었다. 809년 하룬 알 라시드 칼리프가 사망한 후, 타히르는 메르브에 있던 후계자 알-마문에게 종속되었고, 마문이 거병했을 때 협력하여 바그다드를 포위하고 알-아민을 몰아내는 등 마문의 칼리프 즉위에 크게 기여했다. 마문 즉위 후 타히르는 바그다드와 자지라 총독을 거쳐 821년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튀르크계 및 이란계 마왈리 군단과 아랍 주둔군으로 구성된 호라산 군대의 충성을 확보하고 지역의 행정 및 군사력을 장악했다.821년 타히르는 모스크에서의 금요 예배 후트바에서 칼리프 알-마문의 이름을 생략하며 사실상 독립을 선언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의 사후에도 아바스 왕조는 타히르 가문의 호라산 동부 지역 실력을 인정하여 총독직 세습을 허용했다. 타히르의 아들 탈하(재위 822년–828년)가 총독직을 이어받았다. 타히르 왕조는 매년 바그다드에 공물과 군사력(주로 튀르크계 노예)을 제공하고, 일족 중 일부는 바그다드의 경찰청장(술타) 직을 맡는 등 아바스 왕조와 대체로 양호한 관계를 유지했다. 탈하 통치 시기, 시스탄의 하와리즈파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으나, 하와리즈 지도자 함자 b. 아다라크가 828년 사망한 후 자란을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다.
탈하가 828년 사망하자 그의 형제인 압둘라 이븐 타히르(재위 828년–845년)가 호라산 총독직을 계승했다. 압둘라는 타히르 왕조의 가장 뛰어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치세 동안 호라산의 농업이 발전했으며, 아바스 칼리프국 동부 지역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고, 서부 지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넓혔다. 그는 유명한 시인이기도 했으며 아랍 문화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2] 9세기 호라산에서는 타히르 왕조의 영향 아래 페르시아어 표기법이 기존의 팔라비 문자에서 페르시아-아랍 문자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압둘라는 844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타히르 2세(재위 845년–862년)가 뒤를 이었다. 그의 통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적으나, 이 시기 시스탄 지역에 대한 행정적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타히르 토후국의 통치는 타히르 2세의 아들 무함마드 이븐 타히르(재위 862년–873년) 대에 이르러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그는 국정에 무관심하고 정치 경험이 부족했다. 호라산의 속국이었던 타바리스탄에서의 압제적인 정책은 864년 해당 지역 주민들의 반란을 야기했고, 이들은 독립적인 자이디 통치자 하산 이븐 자이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호라산 자체에서도 무함마드의 통치는 점점 약화되었고, 결국 873년 시스탄에서 발흥한 사파르 왕조에 의해 수도 니샤푸르가 함락되면서 타히르 왕조의 호라산 지배는 종식되었다. 사파르 왕조는 호라산을 자신들의 제국에 병합했다.
호라산은 우마이야 왕조 시대부터 이슬람 제국의 동방 지배에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타히르 왕조가 통치한 호라산은 마와라안나흐르, 시스탄, 아프가니스탄 중남부, 인도 방면 등 여러 세력과 접경하는 이슬람 세계의 동쪽 최전선이었다. 수니파였던 타히르 왕조는 호라산의 하와리즈파나 카스피해 남안 타바리스탄의 시아파 등 반 아바스 왕조 세력과 지속적으로 대립했다.
타히르 왕조의 최대 영역은 현재의 이란,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에 걸쳐 있었으며, 수도는 니샤푸르였다.
통치자 | 임기 |
---|---|
호라산 통치자 | |
타히르 이븐 후세인 | 821–822 |
탈하 이븐 타히르 | 822–828 |
압둘라 이븐 타히르 알-후라사니 | 828–845 |
타히르 이븐 압둘라 | 845–862 |
무함마드 이븐 타히르 | 862–873 |
4. 2. 바그다드
타히르 토후국은 호라산 지배 외에도 바그다드의 군사 총독(''아샤브 알-슈르타'') 직위를 맡았다. 시조 타히르 이븐 후세인은 아바스 왕조 제7대 칼리프 마문의 즉위를 도왔으며, 마문 즉위 후 바그다드와 자지라 총독을 거쳐 820년에는 바그다드의 군사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호라산으로 떠난 후, 바그다드 총독직은 방계 가문 출신인 이사크 이븐 이브라힘에게 넘어갔고, 그는 25년 이상 바그다드를 통치했다.
이사크 이븐 이브라힘이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바그다드에서 미흐나 (일종의 종교 재판)를 시행하는 책임을 맡았다. 또한 그의 통치 기간 중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들은 새로 건설된 사마라를 수도로 삼으면서 바그다드를 떠나기도 했다. 849년 이사크가 사망하자, 그의 두 아들이 차례로 총독직을 이었고, 851년에는 타히르 이븐 후세인의 손자인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가 총독이 되었다.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는 860년대에 발생한 혼란기인 "사마라 무정부 상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칼리프 알-무스타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으며, 865년 경쟁자인 알-무타즈의 군대가 바그다드를 포위했을 때 도시 방어를 지휘했다. 다음 해, 그는 알-무스타인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알-무타즈를 칼리프로 인정하는 대신, 바그다드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압둘라의 통치 말년에는 바그다드에서 격렬한 폭동이 발생했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형제들인 우바이다라와 술라이만이 차례로 총독직을 계승했지만, 도시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결국 바그다드에 질서가 회복된 후에도 타히르 왕조는 20년 더 그 도시의 총독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891년, 바드르 알-무타디디가 타히르 왕조를 대신하여 바그다드의 치안을 담당하게 되면서, 타히르 가문은 점차 칼리프 정치 무대에서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아래는 타히르 왕조 시대 바그다드의 주요 총독 목록이다.
통치자 | 임기 |
---|---|
타히르 이븐 후세인 | 820–822 |
이사크 이븐 이브라힘 알-무사비 | 822–850 |
무함마드 이븐 이샤크 이븐 이브라힘 | 850–851 |
압둘라 이븐 이샤크 이븐 이브라힘 | 851 |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 이븐 타히르 | 851–867 |
우바이다알라 이븐 압둘라 이븐 타히르 | 867–869 |
술라이만 이븐 압둘라 이븐 타히르 | 869–879 |
우바이다알라 이븐 압둘라 (재임) | 879–885 |
무함마드 2세 이븐 타히르 | 885–890 |
우바이다알라 이븐 압둘라 (재임) | 890–891 |
5. 가계도
타히르 왕조의 가계는 창시자인 타히르 이븐 후세인(타히르 1세)에서 시작된다. 그는 호라산 총독(821–822)과 바그다드 군사 총독(820–822)을 역임했다.
타히르 1세의 아들들은 다음과 같다.
- 탈하 이븐 타히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호라산 총독(822–828)을 지냈다.
- 압둘라 이븐 타히르 알-후라사니: 탈하의 뒤를 이어 호라산 총독(828–845)을 지냈다.
압둘라의 아들들은 다음과 같다.
- 타히르 2세: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호라산 총독(845–862)을 지냈다.
- 무함마드: 바그다드 총독(851–867)을 지냈다.
- 우바이다라: 바그다드 총독(867–869, 879–885, 890–891)을 지냈다.
- 술라이만: 바그다드 총독(869–879)을 지냈다.
타히르 2세의 아들은 다음과 같다.
- 무함마드 이븐 타히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호라산 총독(862–873)을 지냈으며, 나중에 바그다드 총독(885–890)도 역임했다.
한편, 타히르 1세의 형제인 이브라힘의 후손들도 바그다드 총독직을 맡았다.
- 이샤크: 이브라힘의 아들로, 바그다드 총독(822–850)을 지냈다.
- 무함마드: 이샤크의 아들로, 바그다드 총독(850–851)을 지냈다.
- 압둘라: 이샤크의 아들로, 바그다드 총독(851)을 지냈다.
(참고: 위 목록에서 굵게 표시된 인물은 호라산 총독을 역임한 인물이다.)
참조
[1]
서적
Lost Enlightenment: Central Asia's Golden Age from the Arab Conquest to Tamerlan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
백과사전
'Abd Allāh b. Țāhir
E.J. Brill
[3]
서적
[4]
서적
The Virgin and her Lover: Fragments of an Ancient Greek Novel and a Persian Epic Poem
https://books.google[...]
Brill
2023-10-09
[5]
서적
Islamic Inscriptions
Edinburgh University Press
1998
[6]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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