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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문화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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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국의 문화명령은 1939년부터 1942년까지 피분송크람 정권 하에서 시행된 일련의 정책으로, 국가 정체성 확립과 국민 통합을 목표로 했다. 총 12개의 명령으로 구성되었으며, 국명 변경, 국가에 대한 충성, 태국 제품 사용, 국민의 생활 방식 규제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문화명령은 태국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를 시도했으나, 긍정적, 부정적 측면 모두에서 논란을 야기했다. 21세기에도 유사한 가치를 강조하는 캠페인이 등장하여 문화명령의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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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문화명령
개요
명칭랏타니욤 (รัฐนิยม)
종류근대화 칙령
시행 기간1939년 – 1942년
배경
주도 인물쁠랙 피분송크람
정치적 상황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일본의 영향력 확대 시기
내용
목표태국 사회의 근대화 및 국가 정체성 강화
주요 조치"태국인 되기 12가지 방법" 제시
복장 규제 강화 (서구식 복장 장려, 전통 의상 착용 제한)
언어 사용 장려 (태국어 사용 의무화)
공공장소 예절 강조 (국가 존중, 공공질서 유지)
경제 활동 장려 (근면, 절약 강조)
관련 법률국가문화법 (พระราชบัญญัติวัฒนธรรมแห่งชาติ)
영향
사회 문화적 영향태국 사회의 근대화 가속화
국가주의적 분위기 강화
서구 문화 수용 및 전통 문화 변화
정치적 영향쁠랙 피분송크람 정부의 권력 강화
군부 통치 체제 강화
평가
긍정적 평가국가 통합 및 정체성 강화 기여
사회 질서 확립 및 근대화 추진
부정적 평가개인의 자유 침해 및 획일주의 강요
전통 문화 훼손 및 서구 문화 강제 주입
관련 정보
참고 자료Numnonda, Thamsook. "Pibulsongkram's Thai Nation-Building Programme during the Japanese Military Presence, 1941-1945". Journal of Southeast Asian Studies 9, no. 2 (1978): 234–247. JSTOR

2. 문화명령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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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화명령의 내용

쁠랙 피분송크람 정부는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총 12개의 문화명령을 발표하여 태국 사회 전반에 걸쳐 국민 생활과 정체성을 규정하고자 했다. 각 명령은 국가 명칭 변경, 국가 안보, 국민 통합, 국가 상징물 존중, 경제적 민족주의, 언어 및 복장 규제, 근대적 생활 방식 확립 등 다양한 영역을 다루었다.

각 문화명령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호''' (1939년 6월 24일): 국가 명칭을 '시암'에서 '태국'(Thailand)으로 변경.[21][2]
  • '''제2호''' (1939년 7월 3일): 국가 안보 저해 행위를 반역으로 규정하고 금지.[24][5]
  • '''제3호''' (1939년 8월 2일): 지역, 종교 등에 따른 구분 없이 모든 태국 국민을 '타이'(Thai)로 통칭하도록 규정.[25][6]
  • '''제4호''' (1939년 9월 8일): 국기, 국가, 왕실 국가에 대한 존경 표명 의무화.[26][7]
  • '''제5호''' (1939년 11월 1일): 태국산 제품 소비 장려.[27]
  • '''제6호''' (1939년 12월 10일): 태국의 국가 음악과 가사 공식 제정.[10][29]
  • '''제7호''' (1940년 3월 21일): 모든 국민의 국가 건설 참여 및 노동 의무 강조.[30][11]
  • '''제8호''' (1940년 4월 26일): 태국의 왕실 국가 가사 수정 ('시암'을 '태국'으로 변경 등).[31][12]
  • '''제9호''' (1940년 6월 24일): 태국어 사용 존중, 문해율 향상, 표준어 사용 장려 및 시민 의무 강조.[32][13]
  • '''제10호''' (1941년 1월 15일): 공공장소에서의 복장 규정 (서구식 또는 정중한 전통 복장 권장).[33][14]
  • '''제11호''' (1941년 9월 8일): 근대적 생활 습관(시간 관리, 식사, 수면, 노동, 여가 등) 규정.[34][15]
  • '''제12호''' (1942년 1월 28일): 어린이, 노인,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 보호 의무 명시.[35][16]


각 문화명령의 상세한 내용과 배경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문화명령 제1호: 국가, 국민, 국적의 명칭

1939년 6월 24일에 발표된 첫 번째 문화명령인 《국가, 국민, 국적의 이름에 관한 문화명령 제1호》는 국가 명칭 변경에 대한 "대중의 선호"를 이유로 들었다. 이 명령은 "국가, 국민, 국적을 '태국'(Thailand) 또는 '타이'(Thai)라고 부른다."는 단 하나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다.[21][2]

이 명령의 결과로 기존에 '시암'(Siam)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여러 단체와 기업들은 이름을 변경해야 했다.[22][23] 대표적인 예로는 시암 학회가 '태국 연구회'로,[3] 시암 상업 은행이 '태국 상업 은행'으로,[4] 시암 시멘트가 '타이 시멘트'로 이름을 변경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1944년 피분송크람 총리가 권좌에서 물러난 후, 시암 학회는 태국어영어 이름을 모두 원래대로 되돌렸고, 시암 상업 은행과 시암 시멘트는 영어 이름만 원래대로 복구했다.

3. 2. 문화명령 제2호: 국가에 대한 위험 예방

1939년 7월 3일에 공표된 《국가에 대한 위험 예방에 관한 문화명령 제2호》는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국민의 행동을 통제하고, 특정 행위를 반역으로 규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24][5]

  • 태국 국민은 국가의 이익과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어떠한 사업도 해서는 안 된다.
  • 태국 국민은 국가를 해칠 가능성이 있는 어떠한 정보도 외국인에게 누설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행위는 국가에 대한 반역 행위로 간주된다.
  • 태국 국민은 태국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외국의 대리인이나 대변인 역할을 하거나, 국제 분쟁에서 외국의 입장을 표명하거나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행위 역시 국가에 대한 반역 행위에 해당한다.
  • 태국 국민은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방식으로 외국인을 대신하여 비밀리에 토지를 매입해서는 안 되며, 이는 국가에 대한 반역 행위로 규정된다.
  • 만약 누군가가 국가를 배신하는 행위를 할 경우, 이를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중단시키는 것이 태국 국민의 의무이다.

3. 3. 문화명령 제3호: 태국 국민 호칭

1939년 8월 2일에 《태국 국민에 관한 문화명령 제3호》가 공표되었다.[25][6] 이는 앞서 발표된 문화명령 제1호를 더욱 강화하는 조치로, 태국 내 다양한 집단을 '타이'(Thai)라는 단일한 명칭 아래 통합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 명령은 국민들에게 '북부 태국인', '남부 태국인', '무슬림 태국인' 등 지역이나 종교, 민족적 배경에 따라 특정 집단을 구분하여 부르는 명칭 사용을 금지했다.[25] 대신 모든 태국 국민은 오직 '타이'라는 이름으로만 불려야 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국민 통합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소수 집단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타이' 중심의 획일적인 국가 정체성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았다.

명령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항: 국적의 호칭과 모순되거나 집단의 선호도에 따라 다른 태국 국민을 가리키는 표현의 사용을 중단한다.[25]
  • 제2항: 모든 태국인들은 자신들을 지칭할 때에 '타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25]

3. 4. 문화명령 제4호: 국기, 국가, 왕실 국가에 대한 존중

1939년 9월 8일에 공개된 《국기, 국가, 왕실 국가에 관한 문화명령 제4호》는 국가 상징물에 대한 존경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26][7]

  • '''제1항:''' "관례에 따라 국기가 게양되거나 내려지는 것을 목격하거나 경례 나팔 소리나 휘파람 소리를 듣거나 국기를 게양하거나 내리라는 신호가 있을 때에는 규정이나 관례에 따라 국기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 좋다."
  • '''제2항:''' "현장에서 군기, 군함기, 청소년 군단기, 보이스카우트기를 목격하거나 군대, 청소년 군단, 보이스카우트의 공식적인 행진을 목격했을 때에는 규정이나 관례에 따라 기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 '''제3항:''' "공식적인 목적으로 연주되거나 어떠한 종류의 의식의 일환에 따라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에는 참석자나 관객은 규정이나 관례에 따라 국가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 '''제4항:''' "공식적인 목적으로 연주되거나 극장이나 어떠한 모임에서 왕실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에는 참석자나 관객은 규정이나 관례에 따라 국가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 '''제5항:''' "제1·2·3·4항에 명시된 대로 적절한 예우를 하지 않는 사람을 목격할 때에는 국기, 국가, 왕실 국가를 배우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 있도록 훈계해야 한다."


국기를 존중하고 국가와 왕실의 찬가를 부르는 태국 선전물

3. 5. 문화명령 제5호: 태국 제품 사용

1939년 11월 1일에 공개된 《태국 제품에 관한 문화명령 제5호》는 태국 국민들에게 자국 상품 소비를 장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당시의 경제민족주의 정책을 반영한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27]

  • 제1항: "태국 국민은 태국 제품으로 만든 음식만을 소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 제2항: "태국 국민은 태국 제품으로 만든 옷만 입도록 노력해야 한다."
  • 제3항: "태국 국민은 동료 태국인들의 농업, 상업, 산업, 그 외의 직업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
  • 제4항: "태국 국민은 정부나 태국 국민이 설립한 공공 사업을 활용하고 지원해야 한다."
  • 제5항: "이 포고령에 따라 지원을 받는 농업, 상업, 산업 또는 그 외의 직업을 수행하는 태국 국민들은 표준을 유지하고 품질을 향상시키며 사업을 정직하게 운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후 1940년 2월 2일에는 《문화명령 제5호에 따라 협력하고 적절하게 따르는 태국 국민에 대한 초대》가 추가로 공개되었다.[28]

3. 6. 문화명령 제6호: 태국의 국가

1939년 12월 10일에 공개된 《태국의 국가의 음악과 가사에 관한 문화명령 제6호》는 국가의 음악과 가사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 "국가의 음악은 프라 첸두리양이 작곡하고, 태국 문화부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한다."

# "국가의 가사는 육군이 제출한 것으로 한다."[10][29]

이 명령에 따라 제정된 태국의 국가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3. 7. 문화명령 제7호: 국가 건설 참여 촉구

1940년 3월 21일, 《태국 국민이 국가를 건설하는데 도움을 줄 것을 촉구하기 위한 문화명령 제7호》가 발표되었다.[30] 이 명령은 모든 태국 국민이 국가 건설에 기여해야 하며, 신체 건강한 사람은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직업이 없는 사람은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태국 국민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명시되었다.[11][30]

3. 8. 문화명령 제8호: 태국의 왕실 국가

1940년 4월 26일에 공개된 《태국의 왕실 국가에 관한 문화명령 제8호》는 왕실 국가(산쎈 프라 바라미)의 가사를 축소하고, '시암'이라는 단어를 '태국'으로 바꾸는 내용을 담고 있다.[31][12] 변경된 가사는 다음과 같다.

태국어 원문한국어 번역
ข้าวรพุทธเจ้า เอามโนและศิระกราน|카 워라 푿타차오 아오 마노래 시라끄란tha폐하의 신하인 우리는 통치자이신 태국의 위대한 왕에게
นบพระภูมิบาล บรมกษัตริย์ไทย|놉 프라 품미반 보롬 까삿 타이tha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심장과 머리를 숙이리라.
ขอบรรดาล ธประสงค์ใด|커 반단 타 쁘라송 다이tha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จงสิทธิดั่ง หวังวรหฤทัย|총 싯티 당 왕 워라 하르타이tha위대한 마음의 희망대로 이루어지리라.
ดุจถวายชัย ชโย|둣차 타와이 차이 차요tha승리를 기원하리라, 만세!


3. 9. 문화명령 제9호: 언어와 글쓰기, 시민의 의무

1940년 6월 24일에 공개된 《언어와 글쓰기, 선량한 시민의 의무에 관한 문화명령 제9호》는 태국 국민의 언어 생활과 시민으로서의 자세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32][13]

  • 제1항: 태국 국민은 태국어를 찬양하고 존중하며, 태국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영광으로 여겨야 한다.
  • 제2항: 모든 태국 국민은 국어인 태국어를 배우는 것을 선량한 시민의 의무로 여기고, 최소한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태국어를 구사하지 못하거나 읽지 못하는 다른 시민들을 가르치고 지원하는 것을 중요한 의무로 삼아야 한다.
  • 제3항: 출생지나 거주지, 또는 사용하는 지역 방언(억양)을 이유로 국민 간의 분열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 모든 태국인은 같은 혈통을 가진 국민이며 동일한 태국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하며, 출신지나 방언은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명시했다. 이는 표준어 사용을 장려하고 지역적 차이를 넘어 국가적 통합을 이루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 제4항: 태국 국민은 스스로 선량한 시민으로서 행동해야 하며, 아직 시민의 의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를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독려하는 것을 중요한 의무로 여겨야 한다.

3. 10. 문화명령 제10호: 태국의 복장

1941년 1월 15일에 공포된 《태국의 옷에 관한 문화명령 제10호》는 태국 국민의 복장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담고 있다.[33][14] 이 명령은 크게 두 가지 조항으로 구성된다.

첫째, 태국 국민은 공공장소나 도시 경계 내에서 부적절한 복장을 착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여기서 '부적절한 복장'이란 속옷만 입거나, 상의를 입지 않거나, 몸을 감싸는 형태의 천(파눈)을 두르는 것을 포함했다.[33][14]

둘째, 태국 국민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복장은 다음과 같이 세 종류로 규정되었다.[33][14]

  • 지위와 상황에 맞는 제복
  • 정중한 국제 스타일(서구식) 복장
  • 정중한 전통 의상


이 명령은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서구화 및 근대화 정책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정중한 국제 스타일' 복장을 권장한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동시에 '정중한 전통 의상'도 허용되었지만, 과거의 모든 전통 복장이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1900년대 초반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일부 전통적인 복장 방식은 이 명령 이후 공공장소에서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3. 11. 문화명령 제11호: 일상 활동

1941년 9월 8일에 공개된 《일상 활동에 관한 문화명령 제11호》는 태국 국민의 생활 방식과 시간 사용을 규제하여 근대적인 생활 습관을 확립하고자 했으며, 다음과 같은 5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 '''제1항:''' 태국 국민은 하루 시간을 업무, 개인 활동, 휴식 및 수면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야 하며, 이것이 습관이 될 때까지 계획에 따라 질서 있게 생활해야 한다.
  • '''제2항:''' 다음과 같이 일상적인 개인 활동을 수행해야 한다.
  • *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며, 하루에 네 번을 넘지 않도록 한다.
  • * 약 6~8시간 동안 수면을 취한다.
  • '''제3항:''' 낙담하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점심시간 및 휴식 시간은 한 시간을 넘지 않아야 한다. 근무일이 끝나면 최소 한 시간 동안 스포츠를 하거나, 정원 가꾸기, 애완동물 돌보기, 나무 심기와 같은 다른 활동을 통해 운동해야 한다. 이후 샤워를 한 뒤 저녁 식사를 한다.
  • '''제4항:''' 밤의 여가 시간을 활용하여 필요한 일을 마치고, 가족 및 친구와 대화하며, 라디오 뉴스를 듣거나 독서를 통해 지식을 쌓거나, 그 외 오락이나 예술 활동을 통해 견문을 넓혀야 한다.
  • '''제5항:''' 휴일에는 종교 활동에 참여하거나 설교를 듣고 공덕을 쌓으며, 지식을 습득하거나 여행, 스포츠 활동, 또는 휴식을 통해 몸과 마음에 유익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34][15]

3. 12. 문화명령 제12호: 어린이, 노인, 장애인 보호

1942년 1월 28일에 발표된 《어린이, 노인 및 장애인 보호에 관한 문화명령 제12호》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 의무를 명시하고 있으며, 이를 실천하는 사람을 교양 있는 시민으로 규정하여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명령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항목으로 구성된다.

# "공공 장소나 도로에서 사람들은 어린이, 노인 또는 장애인을 돕고 보호해야 한다."

# "제1항을 따르는 사람은 태국 국민의 존경을 받을 만한 교양 있는 사람으로 간주된다."[35][16]

4. 21세기 문화명령

2018년 태국 정부는 태국 예외주의 개념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타이니욤"(ไทยนิยม|타이니욤th, 태국주의)이라는 소프트 파워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에는 과거 태국의 문화명령을 연상시키는 "12가지 핵심 가치"가 포함되었으며, 일부 학자들로부터 "단순한 국가 선전"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36]

4. 1. 12가지 핵심 가치

2014년 태국 쿠데타 이후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인 국가 평화 질서 위원회는 2014년에 태국 청소년들의 도덕적 지침을 목적으로 하는 "태국의 12가지 핵심 가치"(ค่านิยม 12 ประการth) 캠페인을 발표했다. 이는 과거 쁠랙 피분송크람 시대의 문화명령을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는다.[17] 12가지 가치는 다음과 같다.[17]

# "국가, 종교, 군주제라는 국가의 세 기둥을 옹호한다."

# "정직, 희생, 인내, 그리고 공익을 위한 긍정적인 태도를 실천한다."

# "부모, 보호자, 스승에게 효를 다한다."

# "직간접적인 지식과 교육을 추구한다."

# "태국 전통과 문화를 보존한다."

# "도덕성, 청렴, 사려 깊음, 관대함, 나눔을 실천한다."

# "국가 원수로서 국왕 폐하를 모시고 진정한 민주주의 이상을 이해하고 배운다."

# "규율을 유지하고, 법과 어른을 존경한다."

# "국왕 폐하의 말씀에 따라 행동을 의식하고 마음을 챙긴다."

# "국왕 폐하의 충분 경제 철학을 적용하여 어려운 시기를 대비해 저축하고, 공유 또는 사업 확장을 위한 적절한 잉여를 확보하며, 좋은 면역력을 기른다."

# "신체적, 정신적으로 강하게 유지하고, 악한 세력이나 욕망에 굴하지 않으며, 종교적 원칙에 따라 죄책감과 죄에 대한 수치심을 갖는다."

# "자신의 이익보다 공공 및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이 캠페인의 일환으로 학생들은 국기 게양식이나 수업 시간에 매일 핵심 가치를 암송해야 했으며,[19] 핵심 가치를 담은 노래와 라인 메신저 앱용 스티커도 제작되었다.[17]

한편, 태국 정부는 2018년에 태국 예외주의 개념을 강화하기 위한 소프트 파워 캠페인인 "타이니욤"(ไทยนิยมth, 태국주의)을 추진했는데, 여기에도 '12가지 핵심 가치'가 포함되었다. 이러한 캠페인들은 일부 학자들로부터 "단순한 국가 선전"이라는 비판을 받았다.[36][18]

5. 문화명령의 영향과 평가

플랙 피분송크람 총리 시기에 시행된 문화명령은 태국 사회를 국가주의 이념에 따라 재편하고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광범위한 시도였다. 국명을 '시암'에서 '태국'으로 변경하고[21] 국가 상징에 대한 존중을 의무화하며[26], 태국어 사용을 강조하는[32] 등 민족 정체성 강화를 위한 조치들이 포함되었다. 또한 자국 상품 애용[27], 복장 규정[33], 심지어 일상생활 방식[34]까지 규제하며 국가가 지향하는 국민상을 강요했다.

이러한 문화명령은 태국 국민으로서의 일체감을 형성하고 국가 주도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제약하고, 다양한 지역 및 종교적 정체성을 억압하며[25] 획일적인 국가주의를 강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반대 의견을 억압하고[24] 사회 통제를 강화하는 등 권위주의적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지적은 중요한 부정적 측면이다.

문화명령의 유산은 현대 태국 사회에도 논쟁거리가 되고 있으며, 2018년의 "타이니욤"(ไทยนิยม|타이니욤th) 캠페인처럼 과거의 국가주의적 정책을 연상시키는 시도들은 여전히 비판적인 시각에 직면하고 있다.[36] 문화명령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에 따른 긍정적, 부정적 영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5. 1. 긍정적 영향

태국의 문화명령은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다.

우선, 《국가, 국민, 국적의 이름에 관한 문화명령 제1호》(1939년 6월 24일)는 국명을 기존의 '시암'(Siam)에서 '태국'(Thailand)으로 변경하도록 규정했다.[21] 이는 국가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고, '태국인'이라는 국민적 일체감을 형성하려는 의도였다. 이 명령의 영향으로 '시암'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여러 단체와 기업들이 '태국' 또는 '타이'(Thai)를 포함하는 이름으로 변경해야 했다. 대표적으로 시암 학회는 태국 연구회로, 시암 상업 은행은 태국 상업 은행으로, 시암 페인트는 타이 시멘트로 이름을 바꾸었다.[22][23]

또한, 국가 상징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여 국민 통합과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했다. 《국기, 국가, 왕실 국가에 관한 문화명령 제4호》(1939년 9월 8일)는 국기 게양 및 하강 시, 그리고 국가나 왕실 국가가 연주될 때 경의를 표하도록 의무화했다.[26]

태국의 국가의 음악과 가사에 관한 문화명령 제6호》(1939년 12월 10일)는 현재까지 사용되는 국가의 음악과 가사를 공식적으로 제정했으며,[29]태국의 왕실 국가에 관한 문화명령 제8호》(1940년 4월 26일)는 왕실 국가 가사 중 '시암'을 '태국'으로 변경하여 국명 변경에 따른 통일성을 확보했다.[31] 변경된 왕실 국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ข้าวรพุทธเจ้า เอามโนและศิระกรานtha
폐하의 신하인 우리는 통치자이신 태국의 위대한 왕에게
นบพระภูมิบาล บรมกษัตริย์ไทยtha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심장과 머리를 숙이리라.
ขอบรรดาล ธประสงค์ใดtha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จงสิทธิดั่ง หวังวรหฤทัยtha
위대한 마음의 희망대로 이루어지리라.
ดุจถวายชัย ชโยtha
승리를 기원하리라, 만세!



언어 정책을 통해서도 국민 통합을 추구했다. 《언어와 글쓰기, 선량한 시민의 의무에 관한 문화명령 제9호》(1940년 6월 24일)는 태국어 사용을 장려하고 존중할 것을 강조하며, 모든 국민이 태국어를 읽고 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특히 출생지나 지역 방언에 따른 차이를 분열의 요소로 보지 말고, 같은 태국인으로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강조하여 언어적 통일성을 통한 민족적 동질감 형성을 도모했다.[32]

경제 및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국가 발전을 독려했다. 《태국 제품에 관한 문화명령 제5호》(1939년 11월 1일)는 태국 국민이 자국 제품을 우선적으로 소비하고, 동료 태국인의 경제 활동을 지원하도록 권장했다.[27] 《태국 국민이 국가를 건설하는데 도움을 줄 것을 촉구하기 위한 문화명령 제7호》(1940년 3월 21일)는 모든 국민이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국가 건설에 기여해야 함을 강조했다.[30] 이 외에도 복장 규정(제10호)[33], 규칙적인 일상생활 강조(제11호)[34], 어린이·노인·장애인 보호 의무화(제12호)[35] 등은 근대적인 국민으로서의 규범을 제시하고 사회 통합을 이루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5. 2. 부정적 영향

문화명령은 국가 통합과 근대화라는 명분 아래 시행되었으나, 여러 측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소수 집단의 정체성을 억압하며,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문화명령 제1호는 국명을 '시암'에서 '태국'으로 변경하고 관련 명칭 사용을 강제했는데, 이는 오랜 역사를 가진 '시암'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시암 학회, 시암 상업 은행 등 여러 단체와 기업에 명칭 변경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았다.[21][22][23] 이는 국가주의적 정체성을 강요하고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한 조치로 평가받는다.

문화명령 제2호는 "국가의 이익과 안전"이라는 명목으로 국민의 활동을 광범위하게 제약했다.[24] 국가에 비판적이거나 정부의 정책 방향과 다른 의견을 표명하는 행위, 심지어 외국과의 교류까지도 잠재적인 '반역 행위'로 규정될 수 있었다. 또한, 국민들에게 서로를 감시하고 '반역 행위'를 신고할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고 불신을 조장했다.

소수 집단에 대한 억압 역시 주요 비판점이다. 문화명령 제3호는 '북부 태국인', '남부 태국인', '무슬림 태국인' 등 지역적, 종교적 배경에 따른 정체성 표현을 금지하고 오직 '타이'라는 단일한 국민 정체성만을 강요했다.[25] 이는 태국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민족주의를 강요하여 소수 집단의 문화와 정체성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언어 정책 또한 비판을 받았다. 문화명령 제9호는 태국어 사용을 '선량한 시민의 의무'로 규정하고, 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교육하도록 강제했다.[32] 이는 태국어를 중심으로 한 언어적 동질성을 강요하고 다른 언어 사용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국가가 규정한 틀에 국민의 사상과 행동을 맞추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문화명령의 기조는 현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2018년 태국 정부가 추진한 "타이니욤"(ไทยนิยม|타이니욤th) 소프트 파워 캠페인은 과거 문화명령의 "12가지 핵심 가치"를 연상시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일부 학자들로부터 국가 예외주의를 강화하려는 "단순한 국가 선전"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36]

참조

[1] 논문 Pibulsongkram's Thai Nation-Building Programme during the Japanese Military Presence, 1941-1945 1978-09
[2] 간행물 "The Royal Gazette, Vol. 56, Page 810." https://web.archive.[...] 1939-06-24
[3] 웹사이트 Memory of the World Register: The Minute Books of the Council of the Siam Society http://www.unesco.or[...] UNESCO 2023-06-24
[4] 웹사이트 The Siam Commercial Bank Company Limited https://www.thaibank[...] 2019-06-05
[5] 간행물 "The Royal Gazette, Vol. 56, Page 1010." https://web.archive.[...] 1939-07-10
[6] 간행물 "The Royal Gazette, Vol. 56, Page 1281." https://web.archive.[...] 1939-08-07
[7] 간행물 "The Royal Gazette, Vol. 56, Page 2653." https://web.archive.[...] 1939-09-09
[8] 간행물 "The Royal Gazette, Vol. 56, Page 2359." https://web.archive.[...] 1939-11-06
[9] 간행물 "The Royal Gazette, Vol. 56, Page 3434." https://web.archive.[...] 1940-02-19
[10] 간행물 "The Royal Gazette, Vol. 56, Page 2653." https://web.archive.[...] 1939-12-10
[11] 간행물 "The Royal Gazette, Vol. 56, Page 3641." https://web.archive.[...] 1940-03-25
[12] 간행물 "The Royal Gazette, Vol. 57, Page 78." https://web.archive.[...] 1940-04-30
[13] 간행물 "The Royal Gazette, Vol. 57, Page 151." https://web.archive.[...] 1940-06-24
[14] 간행물 "The Royal Gazette, Vol. 58, Page 113." https://web.archive.[...] 1941-01-21
[15] 간행물 "The Royal Gazette, Vol. 58, Page 1132." https://web.archive.[...] 1941-09-09
[16] 간행물 "The Royal Gazette, Vol. 59, Page 331." https://web.archive.[...] 1942-02-03
[17] 뉴스 12 Thai values stickers unveiled https://www.bangkokp[...] 2021-12-06
[18] 뉴스 SPECIAL REPORT: How the junta misused culture to boost 'Thai-ism' https://web.archive.[...] 2018-05-28
[19] 웹사이트 Students to recite '12 core values' of the nation daily https://www.nationth[...] 2021-12-06
[20] 저널
[21] 간행물 "《태국 정부 관보》 제56권 제810호" http://www.ratchakit[...] 1939-06-24
[22] 웹인용 http://www.unesco.or[...]
[23] 웹인용 https://www.thaibank[...] 2019-06-05
[24] 간행물 "《태국 정부 관보》 제56권 1010쪽" http://www.ratchakit[...] 1939-07-10
[25] 간행물 "《태국 정부 관보》 제56권 1281쪽" http://www.ratchakit[...] 1939-08-07
[26] 간행물 "《태국 정부 관보》 제56권 2653쪽" http://www.ratchakit[...] 1939-09-09
[27] 간행물 "《태국 정부 관보》 제56권 2359쪽" http://www.ratchakit[...] 1939-11-06
[28] 간행물 "《태국 정부 관보》 제56권 3434쪽" http://www.ratchakit[...] 1940-02-19
[29] 간행물 "《태국 정부 관보》 제56권 2653쪽" http://www.ratchakit[...] 1939-12-10
[30] 간행물 "《태국 정부 관보》 제56권 3641쪽" http://www.ratchakit[...] 1940-03-25
[31] 간행물 "《태국 정부 관보》 제57권 78쪽" http://www.ratchakit[...] 1940-04-30
[32] 간행물 "《태국 정부 관보》 제57권 151쪽" http://www.ratchakit[...] 1940-06-24
[33] 간행물 "《태국 정부 관보》 제58권 113쪽" http://www.ratchakit[...] 1941-01-21
[34] 간행물 "《태국 정부 관보》 제58권 1132쪽" http://www.ratchakit[...] 1941-09-09
[35] 간행물 "《태국 정부 관보》 제59권 331쪽" http://www.ratchakit[...] 1942-02-03
[36] 뉴스 SPECIAL REPORT: How the junta misused culture to boost 'Thai-ism' http://www.nationmul[...] 2018-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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