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쿠알 요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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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스쿠알 요르단은 독일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정치인이다. 양자역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막스 보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양자역학의 기반을 다지는 논문을 발표했다. 초기 양자장론을 개척하고, 요르단 대수를 고안하기도 했다. 나치당에 가입하고, 독일 국방군에서 복무하는 등 논란이 있는 정치적 행보를 보였으며, 전후에는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 소속으로 연방 하원 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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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쿠알 요르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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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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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이름 | 에른스트 파스쿠알 요르단 |
출생일 | 1902년 10월 18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하노버 |
사망일 | 1980년 7월 31일 |
사망지 | 서독 함부르크 |
국적 | 독일 |
분야 | 이론 물리학 |
모교 | 하노버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 |
직장 | 로스토크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함부르크 대학교 |
박사 지도 교수 | 막스 보른 |
박사 제자 | 위르겐 엘러스, 엥겔베르트 쉬킹, 볼프강 쿤트 |
알려진 업적 | 양자 역학, 양자장론, 정준 교환 관계, 행렬 역학, 중성미자 이론, 영 에너지 우주, 비대칭 격자, 요르단 대수, 요르단-브란스-딕 이론, 요르단 및 아인슈타인 틀, 요르단 사상, 요르단-위그너 변환, 파울리-요르단 함수 |
수상 | 아커만-토이너 기념상(1937), 막스 플랑크 메달(1942), 콘라트 아데나워 상(19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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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소속 정당 | 나치 당 |
2. 생애
요르단은 에스파냐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2년 독일 제국 하노버에서 태어났다. 하노버 대학교에서 동물학, 수학, 물리학을 공부하다 괴팅겐 대학교로 옮겨 막스 보른의 조교가 되었다.
막스 보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양자역학에 관한 중요한 논문들을 발표했고, 초기 양자장론을 개척했다.[8] 양자역학과 양자장론을 위한 관측 가능량의 대수를 만들려는 시도에서 현재 요르단 대수라고 불리는 비결합 대수를 고안했으나, 이 대수는 그 목적에는 유용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9]
1933년 나치당에 입당하고 돌격대에 가입했다.[13][14] 1939년 독일 국방군 공군(Luftwaffe|루프트바페de)에 입대하여 페네뮌데 로켓 센터에서 기상 분석가로 일했다. 전쟁 중 나치당에 여러 첨단 무기 계획을 제안했으나, 과거 유대인 과학자들과의 관계 때문에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시당했다.[13][14]
전쟁 후, 볼프강 파울리의 도움으로 복권되어 1953년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종신 교수직을 얻었다. 1957년 기독교 민주연합(CDU) 소속으로 연방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콘라트 아데나워 정부의 연방군 전술 핵무기 무장을 지지하여 괴팅겐 선언으로 항의한 막스 보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 괴팅겐 18인과 관계가 악화되었다.[3]
2. 1. 가계와 교육
요르단의 가족은 에스파냐 귀족 출신이었고, 원래 이름은 Jorda|호르다es였다.[2] 1902년 독일 제국 하노버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 파스쿠알 요르단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와 그 이후로 영국군에서 복무한 기병 장교였다.[2] 요르단 가문은 한노버 왕가가 영국을 통치하던 시기 하노버에 정착했으며, 가문의 성은 독일식 발음으로 요르단()으로 바뀌었다. 가족 전통에 따라 각 세대의 장남은 파스쿠알(Pascual)이라는 이름을 받았다.[3]1921년 한노버 공과대학교에 입학하여 동물학, 수학, 물리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독일 대학생들의 관행처럼, 학위를 받기 전에 다른 대학교로 전학했다. 1923년 그가 진학한 괴팅겐 대학교는 당시 수학과 물리 과학 분야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괴팅겐에서 막스 보른의 조교로 일했다.[4] 요르단은 평생 말더듬으로 고생했으며,[5] 즉흥적인 발언을 할 때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6][7]
2. 2. 과학적 업적
요르단은 막스 보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양자역학의 기반을 이루는 일련의 논문들을 발표하였고, 양자장론에 대해서도 여러 논문을 집필하였다.[17][18][19][20]1966년부터는 우주론으로 관심을 돌렸다. 같은 해 우주의 중력이 점점 더 약해져서 지구가 시간에 따라 점점 더 커져서 지금의 크기에 이르게 되었다는 이론을 발표하였다.[21]
요르단은 양자역학과 양자장론을 위한 관측 가능량의 대수를 만들려는 시도에서 현재 요르단 대수라고 불리는 일종의 비결합 대수를 고안했다. 이 대수는 그 목적에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 판명되었지만, 그 이후로 수학 내에서 수많은 응용 분야를 찾았다.[9] 요르단 대수는 사영기하학, 정수론, 복소해석, 최적화 및 기타 많은 순수 및 응용 수학 분야에 적용되었다.
1966년, 요르단은 182페이지 분량의 저서 "Die Expansion der Erde. Folgerungen aus der Diracschen Gravitationshypothese"(지구의 팽창: 디랙의 중력 가설로부터의 결론)[10]를 출판했는데, 여기서 그는 폴 디랙의 가설에 따르면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중력이 꾸준히 약해짐에 따라 지구가 초기 직경 약 7000km의 초기 구체에서 현재 크기로 부풀어 올랐을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은 지구 지각의 연성이 있는 하부 시마(sima)층이 비교적 균일한 두께를 가지고 있는 반면, 지각의 취성이 있는 상부 사알(sial)층이 주요 판구조론적 대륙판으로 분열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대륙이 성장하는 구체의 점점 더 평평해지는 표면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지구 표면의 산맥은 그 과정에서 수축된 주름으로 생성되었을 것이다.[11] 요르단이 지구 팽창 이론에 투자한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질학적 연구는 물리학자나 지질학자들로부터 결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2]
2. 3. 정치 활동
요르단은 1933년 나치당에 가입하고, 돌격대(SA) 대원이 되었다. 1939년 독일 국방군의 공군(Luftwaffe|루프트바페de)에 입대하여, 페너뮌데(Peenemünde) 미사일 기지에서 기상학자로 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나치 독일 정부에 다양한 무기들을 제안하였지만, 막스 보른과 볼프강 파울리 등의 유대인들과 공동 연구한 개인적인 경력 때문에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간주되어 묵살당했다.[13][14]전후 볼프강 파울리의 도움으로 나치 당 관련 전범 신세를 면했고, 1953년 교수직을 얻었다. 냉전이 시작되자, 요르단은 우익 정당인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에 가입하여 독일 연방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57년 핵무기 도입을 지지하였다. 이 때문에 전 동료들과 관계가 악화되었다.[3]
2. 4. 말년
1933년 나치당(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가입하여 돌격대 대원이 되었다. 1942년 막스 플랑크 메달을 수상했고, 1944년 막스 폰 라우에의 뒤를 이어 베를린 대학교(훔볼트 대학교 베를린) 교수가 되었다. 종전 후에는 전쟁 중 정치적 입장 때문에 공직에서 물러났으며, 1947년부터 함부르크 대학교 객원 교수가 되어 1953년 함부르크 대학교 정교수가 되었다. 종전 후에도 반동적인 입장에서 정치적 발언을 했다.3. 주요 연구 분야
요르단은 막스 보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양자역학의 기반을 다지는 여러 논문을 발표하고, 양자장론 분야에서도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17][18][19][20] 그는 양자역학과 양자장론 연구를 위해 '요르단 대수'라는 비결합 대수를 고안하기도 했다. 비록 이 대수는 처음 목표에는 부합하지 않았지만, 이후 수학의 여러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다.[9]
1966년, 요르단은 우주론으로 연구 방향을 전환하여, "Die Expansion der Erde. Folgerungen aus der Diracschen Gravitationshypothese"(지구의 팽창: 디랙의 중력 가설로부터의 결론)라는 저서를 출간하였다.[10] 그는 폴 디랙의 가설에 따라 우주의 중력이 약해지면서 지구가 팽창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1] 그러나 이 이론은 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12]
3. 1. 양자역학
요르단은 막스 보른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양자역학의 기반을 이루는 일련의 논문들을 발표하였고, 양자장론에 대해서도 여러 논문을 집필하였다.[8][17][18][19][20]요르단은 양자역학과 양자장론을 위한 관측 가능량의 대수를 만들려는 시도에서 현재 요르단 대수라고 불리는 일종의 비결합 대수를 고안했다. 이 대수는 그 목적에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 판명되었지만, 그 이후로 수학 내에서 수많은 응용 분야를 찾았다.[9] 요르단 대수는 사영기하학, 정수론, 복소해석, 최적화 및 기타 많은 순수 및 응용 수학 분야에 적용되었다.
3. 2. 양자장론
요르단은 막스 보른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양자역학의 기반을 이루는 일련의 논문들을 발표하였고, 양자장론에 대해서도 여러 논문을 집필하였다.[17][18][19][20]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주로 우주론으로 관심을 돌리기 전에 초기 양자장론을 개척했다.[8]
요르단은 양자역학과 양자장론을 위한 관측 가능량의 대수를 만들려는 시도에서 현재 요르단 대수라고 불리는 일종의 비결합 대수를 고안했다. 이 대수는 그 목적에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 판명되었지만, 그 이후로 수학 내에서 수많은 응용 분야를 찾았다.[9] 요르단 대수는 사영기하학, 정수론, 복소해석, 최적화 및 기타 많은 순수 및 응용 수학 분야에 적용되었다.
3. 3. 우주론
1966년부터 요르단은 우주론으로 관심을 돌렸다.[21] 같은 해 "Die Expansion der Erde. Folgerungen aus der Diracschen Gravitationshypothese"(지구의 팽창: 디랙의 중력 가설로부터의 결론)라는 저서를 출판했다.[10] 이 책에서 그는 폴 디랙의 가설에 따르면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중력이 꾸준히 약해짐에 따라 지구가 초기 직경 약 7000km의 구체에서 현재 크기로 부풀어 올랐을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11]이 이론은 지구 지각의 연성이 있는 하부 시마(sima)층이 비교적 균일한 두께를 가지고 있는 반면, 지각의 취성이 있는 상부 사알(sial)층이 주요 판구조론적 대륙판으로 분열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륙이 성장하는 구체의 점점 더 평평해지는 표면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지구 표면의 산맥은 그 과정에서 수축된 주름으로 생성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11] 그러나 요르단이 지구 팽창 이론에 투자한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질학적 연구는 물리학자나 지질학자들로부터 결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2]
4. 비판과 논란
요르단은 나치당에 가입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 국방군의 공군(Luftwaffe|루프트바페de)에서 복무하며 나치 독일에 협력했다. 막스 보른을 비롯한 유대인 과학자들과의 공동 연구 경력 때문에 그의 제안은 대부분 묵살되었다.[3]
전후 볼프강 파울리의 도움으로 교수직을 얻었으나,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에 가입하여 독일 연방하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핵무기 도입을 지지하는 등 우익적 행보를 보였다.[3] 그는 제1차 세계 대전과 베르사유 조약의 패배에 영향을 받아 국수주의적이고 극우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반공주의를 주장하며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를 비판했다. '에른스트 도마이어'라는 필명으로 극우 언론에 기고하기도 했다.[3][9]
4. 1. 나치 협력 논란
요르단은 1933년에 필립 레나르트와 요하네스 슈타르크처럼 나치당에 입당했고, 돌격대(Sturmabteilung, SA unit)에 가입했다. 그는 나치의 국수주의와 반공주의를 지지했지만 동시에 "아인슈타인"과 다른 유대인 과학자들의 수호자로 남았다. 요르단은 새로운 정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의 프로젝트 중 하나는 아인슈타인이 대표하는 현대 물리학, 특히 새로운 코펜하겐 양자 이론이 "볼셰비키의 유물론"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나치에게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치는 그의 지지를 높이 평가했지만, 그가 유대인 과학자들과 그들의 이론을 계속 지지한 것은 그를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 만들었다.[13][14]요르단은 1939년 독일 국방군의 공군(Luftwaffe|루프트바페de)에 입대하여 한동안 페네뮌데 로켓 센터에서 기상 분석가로 일했다. 전쟁 중 그는 나치당에 다양한 첨단 무기 계획을 제안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제안은 그가 유대인들(특히 막스 보른, 리하르트 쿠랑트, 볼프강 파울리)과 소위 "유대인 물리학"과의 과거 연관성 때문에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에 무시되었다.[3]
볼프강 파울리는 전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독 당국에 요르단이 "복권되었다"고 선언하여 그가 2년간의 기간 후 학문적 직업을 되찾을 수 있도록 했다.
요르단은 볼프강 파울리의 조언에 반하여 탈나치화 기간이 끝난 후 냉전의 압력 아래 정계에 재진출했다. 1957년 그는 보수적인 기독교 민주연합(CDU) 소속으로 연방의회(Bundestag)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7년 요르단은 콘라트 아데나워 정부가 연방군(Bundeswehr)을 전술 핵무기로 무장하는 것을 지지했지만, 막스 보른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포함한 독일 물리학자 그룹인 괴팅겐 18인은 괴팅겐 선언을 발표하여 항의했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그의 전 친구들과 동료들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3]
4. 2. 정치적 입장
제1차 세계 대전과 베르사유 조약의 패배는 요르단의 정치적 신념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많은 동료들이 조약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한 반면, 요르단은 더 나아가 국수주의적이고 극우적인 성향을 보였다. 그는 1920년대 후반에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입장을 주장하는 수많은 기사를 썼으며, 반공주의자로서 특히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의 득세를 우려했다.[3] 그는 1990년대에 밝혀진 바와 같이 "에른스트 도마이어(Ernst Domeier)"라는 필명으로 여러 극우 언론에 기사를 기고했다.[9]1933년 요르단은 필립 레나르트, 요하네스 슈타르크처럼 나치당에 입당했고, 돌격대에도 가입했다. 그는 나치의 국수주의와 반공주의를 지지했지만, 동시에 "아인슈타인"과 다른 유대인 과학자들을 옹호했다. 요르단은 새로운 정권에 영향을 미치고자 했으며, 그의 프로젝트 중 하나는 아인슈타인이 대표하는 현대 물리학, 특히 새로운 코펜하겐 양자 이론이 "볼셰비키의 유물론"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나치에게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치는 그의 지지를 높이 평가했지만, 그가 유대인 과학자들과 그들의 이론을 계속 지지한 것은 그를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 만들었다.[13][14]
요르단은 1939년 독일 국방군의 공군(Luftwaffe|루프트바페de)에 입대하여 한동안 페너뮌데 로켓 센터에서 기상 분석가로 일했다. 전쟁 중 그는 나치당에 다양한 첨단 무기 계획을 제안하려고 시도했으나, 유대인(막스 보른, 리하르트 쿠랑트, 볼프강 파울리)과 소위 "유대인 물리학"과의 과거 연관성 때문에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간주되어 무시되었다. 루트비히 비에베르바흐에 대한 답변으로 요르단은 "독일 수학과 프랑스 수학의 차이는 독일 기관총과 프랑스 기관총의 차이만큼 중요하지 않다."라고 썼다.[3]
요르단이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았더라면 막스 보른과 함께 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을 가능성이 있다. 막스 보른은 발터 보테와 함께 1954년 물리학상을 수상했다.[15][16]
볼프강 파울리는 전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독 당국에 요르단이 "복권되었다"고 선언하여 그가 2년 후 학문적 직업을 되찾을 수 있도록 했다. 그는 1953년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종신 교수 지위를 회복했고, 1971년 명예 교수가 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요르단은 볼프강 파울리의 조언에 반하여 탈나치화 기간이 끝난 후 냉전의 압력 아래 정계에 재진출했다. 1957년 그는 보수적인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 소속으로 독일 연방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요르단은 콘라트 아데나워 정부가 독일 연방군을 전술 핵무기로 무장하는 것을 지지했지만, 막스 보른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포함한 독일 물리학자 그룹인 괴팅겐 18인은 괴팅겐 선언을 발표하여 항의했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그는 전 친구들 및 동료들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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