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전투 (18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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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양 전투는 1894년 9월, 청일 전쟁 중 일본군이 평양을 공격하여 승리한 전투이다. 청나라는 성환 전투 패배 이후 평양에 주력을 배치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으나, 일본군은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감행하여 모란봉을 점령하고 청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로 청나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일본은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내정 간섭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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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전투 (1894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전투명 | 평양 전투 |
일부 | 청일 전쟁 |
![]() | |
날짜 | 1894년 9월 15일 |
장소 | 조선 평양 |
결과 | 일본의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및 지도자 | |
일본 제국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청나라 | 예지차오 |
병력 규모 | |
일본 제국 | 23,800명 |
청나라 | 20,000명 |
부대 | |
일본 제국 | 제1군 |
청나라 | 화이 군대 |
피해 규모 | |
일본 제국 | 사망: 162명 부상: 438명 실종: 33명 총합: 633명 |
청나라 | 사망: 2,000명 포로: 700명 (부상자 100명 포함) |
추가 정보 | |
참고 사항 | 전투 중 일본 군함 4척이 해군 포병 지원 제공 (쓰쿠시, 초카이, 마야, 반조) (Piotr Olender) |
2. 배경
청일전쟁 발발 이전부터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와 일본의 갈등은 심화되어 왔다. 1894년 당시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군은 대부분 평양에 있었으며, 대동강을 통해 바다로 이어지는 수송로를 확보하고 있었다.[2] 평양 주둔군은 현대적인 훈련을 받았고, 일부는 미국제 윈체스터 소총으로 무장했으나, 무기 표준화와 탄약 공급에 문제가 있었다.[2]
이홍장은 병력을 평양에 집결시키고, 성환 전투에서 패한 예치초에게 총지휘를 맡겼다. 그러나 예치초는 일본군 포위를 우려하여 철수를 제안했고, 좌보귀는 이에 반발하며 예치초를 감금하여 청군 사령관은 사실상 부재 상태가 되었다.[2]
한편, 성환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장군의 지휘 아래 서울과 인천 등 한반도 중남부를 장악했다.[1] 일본군은 겨울이 오기 전 청나라군을 몰아내기 위해 평양 공격을 서둘렀다.[1] 인천, 부산, 원산을 통한 병력 수송을 검토한 끝에 인천과 원산으로 병력을 수송하기로 결정했다.[1]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원수의 지휘 아래 일본 제국 육군 제1군은 평양 공격을 준비했고, 노즈 미치즈라(野津道貫) 중장이 평양 공격을 지휘했다. 일본군의 공격 계획은 남쪽과 남서쪽에서 협공하는 것이었다.
2. 1. 청나라의 평양 준비
청나라군은 성환에서 일본군에게 패했지만,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군의 대부분은 평양에 있었다.[2] 평양은 대동강을 끼고 있어 바다로 이어지는 수송로 역할을 했다.[2] 평양에 배치된 청나라 군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집결했는데, 바닷길로 8,000명, 만주에서 육로로 5,000명이 도착했다.[2] 예치초 휘하의 아산에서 후퇴한 청나라 군도 평양 주둔군에 합류했다.
평양 주둔군은 현대적인 훈련과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2] 일부 보병은 미제 윈체스터 소총을 사용했고, 야포 4문, 기관총 6문, 산포 28문을 보유했다. 그러나 무기는 표준화되지 않았고, 탄약 공급이 문제였다.[2]
1894년 8월 초부터 9월 중순 사이에 청나라군은 평양의 성벽 요새를 대규모 토치로 보강했다.[2] 평양은 북쪽에 언덕이 있고, 그중 가장 높은 묵탄대(Moktan-tei)에는 전체 지역을 내려다보는 요새가 있었다. 동쪽과 남쪽에는 넓은 대동강이 있었고, 강 건너편에는 적의 도하를 막기 위한 요새가 건설되었다. 지형은 남서쪽으로만 열려 있었고, 청나라군은 이곳에 견고한 엄호진지를 구축했다.[2]
이홍장은 7월 상순부터 순차적으로 병력 동원을 완료하고 각 부대에 평양 집결을 명령했다.
부대명 | 총병(總兵) | 병력 |
---|---|---|
승군(盛軍) | 위여귀 | 6,000명 |
의군(毅軍) | 마옥곤 | 2,000명 |
봉천군(奉天軍) | 좌보귀 | 3,500명 |
승군(봉천)(盛軍(奉天)) | 풍승아(豊陞阿) | 1,500명 |
이홍장은 평양에 집결한 청군의 총지휘를 성환 전투에서 패한 예치초에게 맡겼다. 9월 7일, 예치초는 광서제의 칙유와 이홍장의 독촉을 받아 7,000명의 영격 부대를 남진시켰으나, 같은 날 밤 “적습”이라는 소리에 아군끼리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 영격 작전은 실패했다. 더글라스 크리스티에 따르면, "(병사들) 대부분은 밭에서 바로 징집된 사람들이나, 거리에서 쓸어 모은 건장한 거지들이었고, 봉천에서 1~2주간 훈련을 받고는 전선으로 투입되었다."라고 한다.[2]
9월 13일, 예치초는 일본군이 사방에서 압박해오자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철수를 제안했다. 그러나 좌보귀는 일본군과의 전력 차이를 알고 있었기에[2] 분개하며 예치초를 감금했다. 이후 청군 사령관은 사실상 부재한 상태가 되었고, 각 장수는 자신의 판단으로 싸우게 되었다. 일설에는 총사령관이나 장령들이 싸우기도 전에 평양에서 철수했다고도 한다.[2]
2. 2. 일본군의 평양 진격
성환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장군의 지휘 아래 약 8,000명의 병력을 한국에 배치하여 서울과 인천을 비롯한 한반도 남부와 중부를 장악했다.[1] 그러나 주력 청군은 여전히 북한에 있었기에, 일본군은 신속한 증원 배치가 필요했다.[1]일본군의 주요 목표는 평양에 집결한 청나라군이었다. 일본군은 겨울이 오기 전 청나라군을 몰아내야 했기에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1] 이에 따라 일본군은 인천, 부산, 원산을 경유하거나 대동강 어귀에 상륙하는 네 가지 경로를 검토했다.[1] 부산 경로는 안전하지만 평양까지 거리가 멀어 기각되었다.[1] 원산 경로는 거리가 짧았지만, 한국 도로 사정이 열악하여 쉽지 않았다.[1] 대동강 어귀 상륙은 위험 부담이 커 최후의 수단으로 고려되었다.[1]
결국 일본군은 대부분의 병력을 인천으로, 일부 병력을 원산으로 수송하기로 결정했다.[1] 일본은 30척의 수송선을 동원하여 히로시마 항에 집결시켰다.[2] 이 수송선들은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한국 해안으로 향했다.[2] 일본은 한 번에 최대 1만~1만 5천 명의 병력을 한국에 재배치할 수 있었다.[1]

혼성 제9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소장은 청군이 평양에 집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기병 정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청군이 의주를 경유해 접근하자 정찰대는 중화, 황주로 후퇴했다. 1894년 8월 10일 황주에서 정찰 중 강력한 적과 조우하여 지휘관 마치나카 중위(町口中尉)와 다케우치 소위(竹内少尉) 등이 전사했다.
제9여단에는 성환 전투 패잔병이 춘천 주변에 있다는 정보와 일본에서 제5사단 잔여 병력이 원산과 부산에 상륙하여 한성부(서울)로 향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에 삭녕 방면에 삭녕 분견지대를 파견했다.
대본영은 청군을 조선반도 밖으로 격퇴하기 위해 8월 14일 제3사단 절반을 파병하기로 결정했고, 9월 1일에는 양 사단을 합쳐 제1군을 편성, 육군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를 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제5사단장 노즈 미치나리(野津道貫)는 8월 19일 한성부에 도착, 조선 정부를 동요시키지 않기 위해 조기 평양 공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제5사단의 북진을 개시했다. 혼성 제9여단에도 의주 가도를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8월 21일, 혼성 제9여단은 용산을 선발대로 출발했다. 원산에 있던 보병 제12연대(연대장: 토모야스 하루노부(友安治延) 중좌) 제1대대는 삭녕 방면으로 전진, 마전리에서 삭녕 분견지대와 8월 24일 만났다.
제3사단(사단장: 게이타로(桂太郎) 중장)은 8월 4일 동원되었으나 병참부 편성 변경으로 8월 30일에야 완료되었다. 8월 28일 우품에서 보병 제18연대(연대장: 사토 타다시(佐藤正) 중좌) 중심 선발대만 원산으로 향했다. 결국 제3사단 주력은 평양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고 선발대만 제5사단에 소속되어 싸우게 된다.
2. 3. 일본군의 전략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원수의 총지휘 아래 일본 제국 육군 제1군은 평양 공격을 준비했다. 제1군은 제5사단(히로시마)과 제3사단(나고야)으로 구성되었다.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한 후, 평양으로 진군하여 부산과 원산에서 상륙한 증원군과 합류했다.노즈 미치즈라(野津道貫) 중장이 평양 공격에 참여한 일본군을 지휘했다. 여기에는 사토 타다시(佐藤正) 대령이 이끄는 원산 부대, 다쓰미 나오부미(辰巳尚文) 소장이 이끄는 상룡 부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소장이 이끄는 혼성 여단, 그리고 노즈 자신이 이끄는 주력 사단이 포함되었다.
일본군의 공격 계획은 혼성 여단이 남쪽에서 정면 공격을 하고, 주력 사단이 남서쪽에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두 부대가 측면 공격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만약 청나라군이 후퇴하려고 하면, 원산 부대는 적군이 북동쪽으로 도망치는 것을 요격하고 방해하는 임무를 맡았다.
3. 전투 과정
9월 15일 아침, 일본군은 세 방향에서 평양성을 공격하여 북부와 남동쪽 지역을 돌파하고 모란봉을 점령했다. 후면에서의 기습으로 청군은 크게 패했고, 을밀대에서 항복했다. 9월 16일 일본군은 평양성에 입성했지만, 폭우로 인해 공격을 연기했다. 그 사이 생존한 청군 수비대 2,000명이 압록강 하류 의주로 탈출했다.
이홍장(李鴻章)은 평양에 집결한 청군의 총지휘를 성환 전투에서 패배한 엽지초(葉志超)에게 맡겼다. 9월 7일, 엽지초는 광서제의 칙유와 이홍장의 독촉을 받아 7000명의 영격 부대를 남진시켰다. 그러나 같은 날 밤 “적습(敵襲)”이라는 소리에 아군끼리 발포하여(동지간의 싸움) 사망자 20명, 부상자 100명 가량의 피해를 보았고, 영격 작전은 실패했다.[2]
9월 13일, 엽지초는 일본군에 포위될 것을 예상하고 철수를 제안했다. 그러나 봉천군 총병 좌보귀(左寶貴)는 일본군과의 전력 차이를 알고 있었기에[2] 분개하여 엽지초를 감금했다. 이후 청군 사령관 부재로 각 장수는 자신의 판단으로 싸우게 되었다.
노쓰는 포위망 완성을 확인하고 9월 15일 총공격을 결정했다. 그 전까지는 준비 사격으로 적의 동요를 유발하는 작전을 펼쳤고, 대동강 바깥 중비가의 보루를 혼성 제9여단에 공격시켜 적의 주의를 끌었다.
3. 1. 일본군의 공격 개시
9월 15일 아침, 일본군은 세 방향에서 평양성을 공격했다. 북부와 남동쪽 지역을 돌파해 모란봉을 점령했다. 후면에서의 예기치 않은 공격으로 청군은 크게 패했고, 을밀대에서 항복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폭우로 인해 공격을 연기했고, 그 사이 생존한 청군 수비대 2,000명이 압록강 하류 의주로 탈출했다.일본군은 9월 15일 총공격을 개시했다. 그때까지는 준비 사격으로 적의 동요를 유발하는 작전을 취했다. 또한 대동강 바깥 중비가의 보루를 혼성 제9여단에 공격시켜 적이 해위를 위해 출격하도록 유도했다.
북쪽에 있던 삭녕지대는 성곽 밖의 보루를 모두 점령하기 위해 제2·3보루를 공격하여 7시까지 적을 모란봉(牡丹台)의 현무문·칠성문 방면으로 패주시켰다. 원산지대도 전진하여 삭녕지대와 병행하여 기자릉 방면으로 전진했다.
3. 2. 대동강 방면
9월 15일, 일본군 혼성 제9여단은 대동강 건너편에 있는 청군의 교두보인 중비가를 공격했다. 오전 6시경 공격이 격렬해졌고, 오시마 여단장은 보병 제21연대에 각면보루를 돌격하라고 명령했지만 실패했다. 보병 제21연대는 의주가도 서쪽 마을에 집결하여 전투를 계속했다.오전 7시 30분, 청군은 군교(軍橋)를 건너 증원 부대가 도착하고 탄약을 보급했다. 중앙 부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오전 10시경 은폐호를 향해 돌격했지만, 십자포화에 격퇴당하고 장교 대부분을 잃었다. 오전 10시 30분경, 중앙 부대는 우익 부대가 있는 동방 각면보로 이동했다.
정오에 오시마 여단장은 견제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판단하고, 불리한 전장에서 이탈하기로 결정했다. 오후 2시 30분부터 후퇴를 시작하여 오후 3시까지 중산동 고지에 도착했다. 청군의 추격은 없었고, 대동강을 건넜던 좌익 부대도 후퇴했다. 그러나 혼성 제9여단은 이 전투에서 전사자 140명이라는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3. 3. 평양 북면 방면
立見尚文(타테미 나오부미) 보병 제10여단장이 이끄는 삭녕지대와 보병 제18연대를 주축으로 한 제3사단 선발대(원산지대)는 평양성 북면 성벽을 향해 진격했다. 모란봉의 청군 개틀링포에 고전했지만, 삭녕지대는 산포대를 제3보루 안까지 전진시켜 모란대를 포격했다.8시 10분, 모란대는 함락되었으나 을밀대의 청군은 계속 저항했다. 일부 일본군 부대는 현무문 돌파에 성공했지만, 을밀대의 청군은 흔들림 없이 버텼다. 원산지대는 기자릉으로 향했지만, 청군은 가파른 경사면에 있는 성벽을 의지하고 있어 지대장은 무리한 공격을 피하도록 명령했다.
11시경, 칠성문에서 청군 200명 가량이 출격했다. 이들은 기자릉 고지 남서쪽 소나무 숲에 이르러 원산지대 우익을 공격하려 했으나, 포병 제3대대의 포격과 보병 제18연대 3개 중대의 반격으로 칠성문으로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청군 지휘관 좌보귀(左寶貴)가 직접 선두에 섰다가 전사했다.
3. 4. 일본군 주력 부대 방면
사단 주력 방면에서는 청군 기병이 출격을 시도했다. 일본군 제22보병연대(연대장: 도미오카 산조 중좌)는 즉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7시 45분, 제방 수문 부근에서 청군 기병이 북서쪽으로 진격을 시작하여 보통강을 건너 두 부대로 나뉘었다. 주력 부대는 잡약동 방향으로 향했고, 일부는 증산, 강서 양 관도 중간의 옥수수밭 안으로 일렬종대로 질주해 왔다.일본군 주력 부대의 일제 사격으로 청군 기병은 곧바로 절반 이상을 잃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서쪽으로 궤주했다. 그중 약 40기는 삼광산 서쪽 산기슭으로 달아났으나, 독립 기병대가 습격하여 30기를 잃었고, 강촌 방향으로 도망친 것은 3~4기뿐이었다. 독립 기병대장 김무라 소좌는 청군 기병의 출격을 보고 삼광산 안부에 매복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서쪽으로 도망친 청군 기병도 제11보병연대(연대장: 니시지마 스케요시 중좌)와 제12연대 일부의 맹렬한 사격을 받아 거의 전멸했다.[1]
3. 5. 평양 함락
9월 15일 오후 4시 30분경, 평양성 성벽과 을밀대의 청군은 사격을 멈추고 백기를 흔들었다. 오후 5시경 갑작스러운 뇌우가 몰아쳤고, 청군은 이를 구실로 다음 날 아침 성문을 열겠다고 요청했다.[2]일본군 노즈 미치즈라 사단장은 청군의 백기 소식을 전달받았으나, 이를 청군의 야간 탈출을 위한 속임수로 의심하여 경계를 더욱 강화할 것을 명령했다.
오후 9시, 비가 잦아들 무렵, 다수의 청군 병사들이 증산 방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각 부대는 일제히 사격을 가했고, 이는 오후 9시까지 계속되었다. 다음 날 새벽 1시 10분, 일본군 보병 제12연대는 암문으로 성내에 돌입했다. 성 안에는 길을 잃은 소수의 청군 병사들만 있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삭녕지대 방면에서도 돌입 나팔 소리가 들렸고, 새벽 5시 30분 성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2]
청군 병사 대부분은 의주대로를 통해 도주했기 때문에, 원산지대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또한, 순안에 도착했을 때, 일본군 수비대(보병 제18연대 제7중대)와 충돌하여 150여 구의 시신을 남기고 패주했다. 청군은 백기를 들고 성을 넘겨주면 피해 없이 철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2]
4. 결과 및 영향
평양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고, 청나라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전투 후 일본은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고 내정에 간섭하며 물자와 노동력을 제공받았다. 이로 인해 농민 봉기가 발생하기도 했다.[1]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건강상의 이유로 부대 지휘권을 오쿠 야스카타 중위에게 넘겼고, 이후 일본군은 압록강 전투를 통해 한반도 내 청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만주로 진격했다.[1] 일본 제1군 사령관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에서 노즈 미치쓰네 장군으로, 제5사단 사령관은 오쿠 야스카타 중장으로 바뀌었다. 일본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며, 청나라는 압록강 북쪽에서 방어하기로 결정했다.
이홍장의 최정예 부대 회군(淮軍)은 큰 손실을 입고 궤멸되어 이홍장의 권력 기반이 약화되었다.[1] 산둥성 출신 청나라 회족 장군 좌보귀(좌보규)는 평양에서 전사했고,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건립되었다.[1]
4. 1. 일본군의 승리 요인
일본군은 우세한 화력과 잘 훈련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청군은 지휘 체계가 붕괴되고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ドゥガルド・クリスティー에 따르면, "(청군 병사들의) 대부분은 밭에서 바로 징집된 사람들이나, 거리에서 쓸어 모은 건장한 거지들이었고, 봉천(奉天)에서 1~2주간 훈련을 받고는 전선으로 투입되었다."[2]9월 13일, 엽지초는 사방에서 압박하는 일본군을 보고 포위될 것이라 판단하여 철수를 제안했다. 그러나 봉천군 총병 좌보귀(左寶貴)는 일본군과의 전력 차이를 알고 있었기에[2] 분개하여 엽지초를 감금했다. 이후 청군 사령관이 부재하여 각 장수들은 자신의 판단으로 싸우게 되었다. 총사령관이나 장령들이 싸우기 전에 평양에서 철수했다[2]는 설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의 포위 전략과 효과적인 공격으로 청군은 패배했다.
4. 2. 조선에 대한 영향
일본은 평양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로 인해 조선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었고, 조선의 물자와 노동력이 일본군에 제공되었다.[1] 일본의 영향력 확대로 인해 농민 봉기가 발생하기도 하였다.[1]4. 3. 청나라에 대한 영향
이홍장(李鴻章) 직속 최정예 부대였던 회군(淮軍)은 평양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고 궤멸되었으며, 이는 이홍장의 권력 기반에 타격을 주었다.[1]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압록강 북쪽으로 후퇴했다.4. 4. 국제 정세 변화
평양 전투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강화했고, 조선의 물자와 노동력이 일본군에 제공되면서 이에 반발한 농민 봉기가 발생했다.[1]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건강상의 이유로 부대 지휘권을 오쿠 야스카타 중위에게 넘겼고, 이후 일본군은 압록강 전투를 통해 한반도 내의 청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만주로 진격했다.[1]참조
[1]
서적
Muslims in Chin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Press
2010-06-28
[2]
서적
奉天三十年
岩波書店
1938-01-01 # 날짜 정보가 연도만 있으므로 1월 1일로 설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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