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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스코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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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랭크 스코필드는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이자 수의학자로,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 그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강의하며 한국어를 배우고 '석호필'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었으며, 3.1 운동 당시 시위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또한,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며 민주주의를 옹호했고, 수의학 연구에도 기여하여 와파린 발견에 영향을 미쳤다. 스코필드는 대한민국에서 '34번째 민족대표', '영원한 한국인'으로 존경받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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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스코필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랭크 스코필드
출생일1889년 3월 15일
출생지잉글랜드 워릭셔주 럭비
사망일1970년 4월 16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직업수의사 및 선교사
연구 분야폐흡충, 뉴캐슬병
알려진 업적한국 독립운동 참여
활동 기간(정보 없음)
교육(정보 없음)
소속 기관온타리오 수의과대학, 서울대학교
수상(정보 없음)
배우자앨리스 스코필드
한국어 이름석호필(石虎弼)
로마자 표기Seok Ho-pil
본관영일 석씨(迎日石氏)
경력
미군정청고문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강사
장로회신학대학교전임교수
감리교신학대학교전임교수
서훈
대한민국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개인 정보
배우자앨리스 스코필드(Alice Schofield, 한국명 석애리수(石愛利粹))
자녀아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주니어(Frank William Schofield Junior, 한국명 석율령(石律令))
종교
종교캐나다 장로회
웹사이트
웹사이트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2. 생애

1889년 영국 워릭셔주에서 태어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1907년 캐나다로 이주하여 토론토 대학교에서 수의학을 공부했고, 1911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3년 앨리스 스코필드와 결혼했다.

1916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초청으로 한국에 온 스코필드는 세균학을 가르치며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3·1 운동 당시 일제의 만행을 사진과 글로 기록하여 국제사회에 알렸으며, 제암리 학살 사건 현장을 방문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일제의 압력을 받아 1920년 한국을 떠나야 했다.

캐나다로 돌아간 후에도 스코필드는 와파린 발견에 기여하는 등 수의학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쳤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교육과 사회 활동에 헌신했다.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의 독재를 비판하고 민주주의 발전을 촉구하는 등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1969년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1970년 사망할 때까지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간직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으로,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며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2. 1. 출생과 성장

1889년 3월 15일 영국 워릭셔주 럭비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재혼했다.[1] 스코필드 가족의 경제 상황은 중산층 이하였다.[2]

1905년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으나 성적이 좋지 못했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진학하지 못했다. 체셔주의 한 농장에서 식사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고용되었고,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과 그들의 앞날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7년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했던 캐나다로 이주하기 위해 농장 노동자로 일하며 돈을 모았다.[1][2]

1907년 혼자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하여 농장 노동자로 일했다.[1] 그 해 가을, 온타리오 수의과 대학에 입학했다.[3] 학업 기간 동안 재정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와 팔 한쪽이 마비되었다.[3][4] 1911년 세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3][1] 논문 제목은 "토론토에서 판매되는 우유의 세균학적 분석"이었다. 1912년 모교의 교수가 되었고,[3] 1913년 피아노 학생인 앨리스와 결혼했다.[1]

2. 2. 한국 생활

1916년 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 올리버 알 에비슨의 권유로 한국에 와서 세균학위생학을 가르쳤다.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강의했으며, 한국 이름은 '석호필(石虎弼)'이다.

1919년 3·1운동 때 이갑성의 부탁으로 탑골공원 만세 시위와 일본의 탄압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알렸다. 제암리 학살 사건 현장을 방문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고발했다.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하여 수감자 고문 여부를 확인하고, 하세가와 총독과 미즈노 정무 총감을 만나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 중지를 호소하였다. 영일동맹으로 영국계 캐나다인이었던 스코필드는 일본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지 않고 이러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2. 2. 1.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강의

1916년 11월, 스코필드는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자격으로 한국에 와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인 올리버 알 에비슨의 초청으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쳤다.[1][4] 그는 목원홍에게서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강의했다.[4] 스코필드는 한국 이름 석호필을 지었는데, '석'은 돌, '호'는 호랑이, '필'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1]

스코필드는 강의 시간에 "세상에 영원히 식민지를 유지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는 말을 종종 했으며,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신뢰를 얻었다고 전해진다.[4][5]

2. 2. 2. 한국이름을 짓다

1917년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조선 감리교회에서 ‘선교사 자격 획득 한국어 시험’에 합격하고, 한국식 이름 ‘석호필(石虎弼)’을 짓는다. ‘석(石)’은 그의 굳은 종교적 의지를, ‘호(虎)’는 호랑이를, ‘필(弼)’은 돕는다는 뜻으로, 한국인을 돕겠다는 그의 마음을 담은 이름이다.[1]

스코필드는 월남 이상재, 김정혜 등 한국의 여러 지명인사와 교류했다. 특히 YMCA 총무로 활동하던 이상재와 김정혜를 존경했으며, 김정혜는 훗날 그의 수양어머니이자 사모(師母)가 되었다.

그의 한국 이름 석호필에서, '석'은 돌, '호'는 호랑이, '필'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뜻을 나타낸다.[1]

2. 2. 3. 3.1운동에 참여하다

1919년 2월 5일 3·1운동 거사 준비를 위해 이갑성과 비밀리에 만났으며, 3.1운동을 위한 해외 정세 파악일을 맡게 되었다.[1][4]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하는 민중들과 일본의 시위자에 대한 탄압을 세브란스 제약부에 근무하던 이갑성의 의뢰에 따라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알렸다.[1][4]



1919년 초, 한국에서는 식민 통치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한국 독립 운동가들은 서울에서 비밀 회의를 열어 대한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고, 3월 1일에 일본에 대항하는 대규모 평화 시위를 계획했다. 이 시위는 몇 달 동안 지속되었으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한국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간주된다.[6]

2월 28일, 스코필드는 이러한 계획을 미리 알게 된 유일한 외국인 선교사 중 한 명이 되었다.[4][5] 그의 제자 중 한 명인 이갑성은 그에게 선언서 사본을 전달하고 의과대학 동료들과 외국 정부에 배포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카메라를 소유하고 있던 스코필드는 시위를 사진으로 촬영해 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스코필드는 이갑성에게 시위를 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이갑성은 "당신은 영국인이라 제국주의자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당신을 믿습니다"라고 답했고, 스코필드는 그들을 돕기로 했다.[4][5]

시위가 시작된 후, 스코필드는 비밀리에 사진을 찍었다. 그의 사진들은 국제 신문에 재게재되었고,[4] 외국 정부가 시위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때 참고되었으며,[1][5] 현재 한국 박물관과 교과서에 실려 있다.[4] 스코필드는 또한 병원에 시위로 부상을 입은 환자들이 도착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러한 상황을 기록했다.[5] 그는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했고, 유관순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1][7]

4월에는 수원군 제암리에 가서 일본군이 제암리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몰아넣고 학살한 제암리학살사건으로 잿더미가 된 현장을 자신의 표현대로 '(일본의 만행에 대한 분노로)떨리는 손'으로 촬영,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1] 4월 15일, 수백 채의 가옥이 불타고 수십 명이 사망한 수원과 안성 인근에 대한 일본군의 격렬한 습격 속에서 제암리 학살(Jeamni massacre)이 발생했다. 이 사건 동안 일본군은 20~30명의 한국인 기독교인들을 교회로 유인하여 총격을 가한 후, 시신을 훼손하기 위해 교회를 불태웠다.[6][5] 스코필드는 4월 17일에 이 학살 사건을 알게 되었고, 다음 날 그 현장을 방문했다. 그는 팔과 다리에 장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골길을 자전거로 이동했다.[1]

그는 불에 탄 교회의 잔해와 일본군에 의해 파괴된 여러 마을과 건물들을 사진으로 촬영했다.[1][5][6] 그는 여러 증인들과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현장에서 일본 당국에 대항했다.[1] 당시 스코필드는 사진을 찍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일과 함께,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위로하는 일도 했다.

2. 2. 4. 일제의 만행중지를 호소하다

스코필드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영자신문 ''The Seoul Press''에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글을 기고하고, 노순경, 유관순, 어윤희, 엄영애 등이 수감되었던 서대문 형무소(여자 감방 8호실)를 직접 방문했다.[1][4] 수감자에 대한 고문 여부를 확인한 뒤 하세가와 총독과 미즈노 정무 총감을 방문하여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 중지를 호소하였다.[1][4]

그해 여름, 스코필드는 사이토 마코토를 포함한 일본 정치인들과의 회동에서 직접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또한 그들의 발언에 대한 반박 기사를 써서, 시위를 은폐하거나 축소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비판하고 일본 당국이 자행한 폭력을 묘사했다.[5]

2. 2. 5. 캐나다로 돌아가다

1920년 4월, 일제의 감시와 살해 위협으로 스코필드 박사는 세브란스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못하고 한국을 떠났다.[5][4] 1958년 대한민국 정부는 광복 13주년 및 정부수립 10주년 경축 식전에 스코필드를 국빈으로 초청했고, 그는 서울대학교 수의과 대학에서 수의병리학을 가르쳤다.[1][4]

2. 3. 캐나다 생활과 대한민국으로의 귀환

1920년 4월, 일제의 감시와 살해 위협으로 스코필드 박사는 세브란스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못하고 한국을 떠났다.[5][4] 1921년, 스코필드는 OVC의 수의 위생 및 연구 책임자가 되었다.[3] 그는 그곳에서 35년 동안 가르치고 연구를 계속했다.[4][3] 이 기간 동안, 스코필드는 한국 독립 운동을 계속 옹호했으며, 한국 고아원과 교회에 기부하기도 했다.[2]

스코필드는 곰팡이 핀 클로버 중독의 병인론과 병리학에 관해 발표했는데, 이는 항응고제 와파린의 발견에 기여했다.[2][3] 1958년 스코필드가 심장 발작을 겪은 후 와파린을 투여받았고, 자신의 연구의 혜택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2003년 스코필드 기념 강연에서 연사 토니 헤이즈가 주장했다.[3]

1948년, 그는 미국 수의 병리학회(American College of Veterinary Pathologists)의 유일한 캐나다 창립 회원이 되었다.[3] 스코필드는 또한 가축, 세균학 및 바이러스학 관련 다양한 생물학적 문제에 대해 연구했다.[3]

1955년, 스코필드는 시력 문제로 인해 OVC에서 은퇴했다.[3] 그의 부인은 1957년에 사망했다. 1958년 8월, 그는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부터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초대를 받아들였다.[4][1] 그는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가르치면서 그는 두 개의 고아원과 직업학교를 지원했으며, 학생들의 등록금을 지원했다.[1][4] 그는 또한 청소년 성경 공부반을 이끌었다.[1]

스코필드는 이승만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이승만의 민주적 절차 개입과 언론의 자유 제한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는 공개적인 토론이 개선에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3.1 운동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언급했다.[1] 이로 인해 정부는 스코필드가 한국을 떠나도록 압력을 가하려 했다.[4] 한 번은 그가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하는 것을 막기도 했다.[1] 정부의 압박은 스코필드가 "폭정, 부패, 잔혹에 대한 의로움, 용기, 자유의 승리"라고 묘사하고 3.1 운동의 정신에 비유한, 이승만에 반대하는 4.19 혁명 시위가 일어난 1960년에 끝났다.[4][1] 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가 대한민국에 군사 독재 정권을 수립했을 때, 스코필드는 처음에는 정권이 국가의 부패에 맞설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표명했다. 그는 나중에 정권의 행동을 비판하는 여러 기사를 발표했다.[4] 스코필드는 또한 부패 문제 해결 노력, 한국 기독교 교회 개혁 등을 포함한 여러 개혁을 옹호했다.[1]

1969년 해외 여행 중 스코필드는 심장 천식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1][4] 그는 입원했지만, 계속 글을 쓰고 신문에 게재할 기사를 제출했다.[1]

1970년 4월 12일, 그는 81세의 나이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망했다.[4][1] 4월 16일, 그의 공개 장례식이 열렸다.[4]

2. 4. 사망과 추모

1970년 4월 12일 대한민국 국립 중앙의료원에서 81세로 별세하였으며,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업적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5] 프랭크 스코필드는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힌 유일한 외국인이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1]

> 우리 민족의 자립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복된 스코필드 박사, 여기 평화롭게 잠들다.

정일권 국무총리는 그를 "영원한 한국인"이라고 묘사했다.[4] 그는 3.1 운동의 중요한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3.1 독립 선언의 서명자 33명을 언급하여 "34번째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3]

1960년에는 대한민국의 문화훈장을 받았으며,[4][3] 서울 명예 시민증을 받았다.[3] 1968년 3월 1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훈장을 받았다.[3] 1970년 서울에서 열린 행사에서 미국 수의병리학회(American College of Veterinary Pathologists)로부터 최고 칭호인 특별 회원(Distinguished Member) 칭호를 받았다.[3]

2009년부터 2010년까지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를 지낸 정운찬은 스코필드가 자신의 학비를 지불하고 멘토 역할을 했다고 회상했다.

토론토 동물원에는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 기념 정원이 있으며, 2011년에 완성된 해당 정원에는 스코필드를 기리는 동상이 있다.[9][8] 대한민국은 정원 건설을 위해 80만달러를 기부했다. 정원의 일부는 한국식으로 조성되었다.[9]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특별시와 주한 캐나다 대사관은 서울시청에서 스코필드와 다른 캐나다 선교사들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스코필드의 손자 딘 스코필드가 이 자리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했다.[10]

3. 한국 독립운동 지원

스코필드는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한국에 온 뒤, 한국인들이 고통받는 현실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어를 배우고 '석호필'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1][4]

일제강점기 당시, 스코필드는 한국인들이 겪는 차별과 억압을 직접 목격하였다. 특히, 일본이 교육 및 문화 기관을 통제하고, 한국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현실에 분노하였다.[5] 그는 "세상에 영원히 식민지를 유지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라고 말하며,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신뢰를 얻었다.[4]

스코필드는 3·1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19년 2월 5일 이갑성과 비밀리에 만나 3·1 운동 거사 준비를 도왔고, 해외 정세 파악 임무를 맡았다.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와 일본의 탄압을 사진과 글로 기록하여 해외에 알렸다. 제암리 학살 사건 현장을 방문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생존자들을 위로하는 등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 앞장섰다.[1][4]

스코필드는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하여 유관순 등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 여부를 확인하고, 일본 총독에게 비인도적 만행 중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영일동맹으로 인해 영국계 캐나다인인 스코필드는 일본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지 않았기에 이러한 활동이 가능했다.[1][4]

스코필드는 한국의 독립을 강하게 옹호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영국의 식민주의를 비판하고, 한국의 상황을 아일랜드와 영국령 인도에 비유하며 일본의 부당함을 지적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일본 정부는 스코필드를 "극렬 선동가"이자 "가장 위험한 인물"로 규정하고 추방 압력을 가했다.[5]

결국 스코필드는 1920년 한국을 떠나야 했지만, 이후에도 한국 독립운동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한국, 일본, 국제 언론에 기고하며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했다.[1]

3. 1. 3.1 운동 참여와 기록

1919년 2월 5일 3·1운동 거사 준비를 위해 이갑성과 비밀리에 만났으며, 3.1운동을 위한 해외 정세 파악 임무를 맡았다.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하는 민중들과 일본의 시위자에 대한 탄압을 세브란스 제약부에 근무하던 이갑성의 의뢰에 따라 사진으로 찍고 글로 기록하여 해외에 알렸다.[1][4]

1919년 초, 한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식민 통치에 대한 사회적 불만을 심화시켰다. 2월 28일, 스코필드는 이러한 계획을 미리 알게 된 유일한 외국인 선교사 중 한 명이 되었다.[4][5] 그의 제자 중 한 명인 이갑성은 그에게 대한 독립 선언서 사본을 전달하고 의과대학 동료들과 외국 정부에 배포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카메라를 소유하고 있던 스코필드는 시위를 사진으로 촬영해 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스코필드는 이갑성에게 시위를 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이갑성은 "당신은 영국인이라 제국주의자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당신을 믿습니다"라고 답했고, 스코필드는 그들을 돕기로 했다.[4][5]

시위가 시작된 후, 스코필드는 비밀리에 사진을 찍었다. 그의 사진들은 현재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진들은 국제 신문에 재게재되었고,[4] 외국 정부가 시위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때 참고되었으며,[1][5] 현재 한국 박물관과 교과서에 실려 있다.[4] 스코필드는 또한 병원에 시위로 부상을 입은 환자들이 도착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러한 상황을 기록했다.[5]

4월에는 수원군 제암리에 가서 일본군이 제암리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몰아넣고 학살한 제암리학살사건으로 잿더미가 된 현장을 스코필드 자신의 표현대로 '(일본의 만행에 대한 분노로)떨리는 손'으로 촬영,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당시 스코필드는 사진을 찍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일과 함께,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위로하는 일도 했다.

4월 17일 제암리 학살사건을 알게 된 그는, 팔과 다리에 장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시골길을 자전거로 이동하여 현장을 방문했다.[1] 그는 불에 탄 교회의 잔해와 일본군에 의해 파괴된 여러 마을과 건물들을 사진으로 촬영했다.[1][5][6] 그는 여러 증인들과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현장에서 일본 당국에 대항했다.[1]

3. 2. 일제의 만행 고발

The Seoul Press영어지에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글을 올리고 유관순 등이 갇혀있던 서대문 형무소를 직접 방문하여 수감자에 대한 고문 여부를 확인한 뒤 하세가와 총독과 미즈노 정무 총감 등을 방문하여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의 중지를 호소하였다.[1][4]

스코필드는 "차이암니 학살"과 "수촌 만행 보고서"를 포함한 보고서를 국제 언론에 게재하고,[1] 식민 정부가 지원하는 영자 신문인 ''서울 프레스''에 실린 서대문 감옥을 휴양지로 묘사하는 기사를 조롱하며 감옥 내 고문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는 익명의 반박 기사를 게재했다.[4][5][1]

그해 여름, 스코필드는 일본 식민지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포함한 일본 정치인들과 회동하여 직접 이의를 제기하고, 그들의 발언에 대한 반박 기사를 써서 시위를 은폐하거나 축소하려는 노력을 조롱하며 일본 당국이 자행한 폭력을 묘사했다.[5]

8월, 스코필드는 한국 선교사들을 대신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하라 다카시 총리와 다른 저명한 일본 정치인들을 만나 한국의 더 많은 자치를 옹호하고, 시위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수백 명의 외국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공개 강연을 했고, 이 자리에서 일본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여러 개혁을 시행하자, 스코필드는 그러한 개혁을 표면적인 유화 노력이라고 묘사하는 비판 기사를 게재했다.[1]

4. 민주화 운동과 사회 참여

스코필드는 이승만 정부뿐만 아니라 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가 수립한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4] 처음에는 정권이 국가의 부패 문제에 맞설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표명하기도 했지만, 이후 정권의 행동을 비판하는 여러 기사를 발표했다.[4] 또한 부패 문제 해결, 한국 기독교 교회 개혁 등 여러 개혁을 옹호했다.[1]

4. 1. 이승만 정부 비판

스코필드는 이승만 정부가 민주적 절차에 개입하고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1] 그는 공개 토론이 개선에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3.1 운동 당시 자신의 경험을 언급했다.[1] 이로 인해 이승만 정부는 스코필드가 한국을 떠나도록 압력을 가하려 했고, 한번은 그가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하는 것을 막기도 했다.[1] [4] 이러한 정부의 압박은 4.19 혁명 시위가 일어난 1960년에 끝났는데, 스코필드는 이 시위를 "폭정, 부패, 잔혹에 대한 의로움, 용기, 자유의 승리"라고 묘사하며 3.1 운동 정신에 비유했다.[1] [4]

4. 2. 교육 및 사회 활동

1958년 8월,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한국으로 돌아왔다.[4][1] 그는 당시 1950-1953년 한국 전쟁에서 회복 중이던 한국의 상황에 놀라움과 실망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승만은 억압적인 군사 독재 정권을 운영했고, 많은 고아와 실업자가 있었다.[1]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가르치면서 두 개의 고아원과 직업학교를 지원했으며, 학생들의 등록금을 지원했다.[1][4] 또한 청소년 성경 공부반을 이끌었다.[1]

스코필드는 이승만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이승만의 민주적 절차 개입과 언론의 자유 제한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는 공개적인 토론이 개선에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3.1 운동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언급했다.[1] 이로 인해 정부는 스코필드가 한국을 떠나도록 압력을 가하려 했다.[4] 한번은 그가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하는 것을 막기도 했다.[1] 정부의 압박은 스코필드가 "폭정, 부패, 잔혹에 대한 의로움, 용기, 자유의 승리"라고 묘사하고 3.1 운동의 정신에 비유한, 이승만에 반대하는 4.19 혁명 시위가 일어난 1960년에 끝났다.[4][1] 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가 대한민국에 군사 독재 정권을 수립했을 때, 스코필드는 처음에는 정권이 국가의 부패에 맞설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표명했다. 그는 나중에 정권의 행동을 비판하는 여러 기사를 발표했다.[4] 스코필드는 또한 부패 문제 해결 노력, 한국 기독교 교회 개혁 등을 포함한 여러 개혁을 옹호했다.[1]

5. 수의학 연구 업적

1921년, 스코필드는 OVC의 수의 위생 및 연구 책임자가 되었고,[3] 35년 동안 가르치고 연구했다.[4][3] 이 기간 동안, 스코필드는 한국 독립 운동을 옹호하며 한국 고아원과 교회에 기부했다.[2]

1948년, 미국 수의 병리학회(American College of Veterinary Pathologists)의 유일한 캐나다 창립 회원이 되었다.[3]

1955년, 시력 문제로 OVC에서 은퇴했다.[3]

5. 1. 와파린 발견 기여

스코필드는 곰팡이가 핀 클로버 중독의 병인론과 병리학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으며, 이는 항응고제와파린 발견에 기여했다.[2][3] 2003년 스코필드 기념 강연에서 연사 토니 헤이즈는 구강 투여 물질이 응고를 유발할 수 있다는 스코필드의 발견이 수의학 분야에서 20세기의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주장했다.[3] 헤이즈는 1958년 스코필드가 심장 발작을 겪은 후 와파린을 투여받았으며, 자신의 연구 결과로 혜택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3]

5. 2. 기타 연구 업적

스코필드는 곰팡이 핀 클로버 중독의 병인론과 병리학에 관해 발표했는데, 이는 항응고제 와파린의 발견에 기여했다.[3] 2003년 스코필드 기념 강연에서 연사 토니 헤이즈는 구강 투여 물질이 응고를 유발할 수 있다는 스코필드의 발견이 수의학 분야에서 20세기의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주장했다. 헤이즈는 1958년 스코필드가 심장 발작을 겪은 후 와파린을 투여받았고, 자신의 연구의 혜택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3]

스코필드는 또한 가축, 세균학 및 바이러스학 관련 다양한 생물학적 문제에 대해 연구했다.[3]

6. 평가와 유산

프랭크 스코필드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이며,[5] 그의 묘비에는 "우리 민족의 자립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복된 스코필드 박사, 여기 평화롭게 잠들다."라고 적혀 있다.[1]

스코필드는 이타적인 삶을 살아 자신의 삶의 질에 영향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돈과 소유물 상당 부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기부했으며, 온타리오 수의과 대학(OVC)에 재직하는 동안 작은 임대 주택에 살았고 여행할 자금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3]

1970년, 그는 서울에서 열린 행사에서 미국 수의병리학회(American College of Veterinary Pathologists)로부터 최고 칭호인 특별 회원(Distinguished Member) 칭호를 받았다.[3] 2003년에는 OVC가 스코필드 강좌 시리즈를 주최했으며, 병리학 분야의 최고 학부생 상이 스코필드 상으로 불린다고 보도되었다.[3]

한국 주재 캐나다 대사관 본관은 스코필드를 기리기 위해 헌정된 것으로 알려졌다.[10]

6. 1. 한국 사회의 평가

프랭크 스코필드는 대한민국에서 '34번째 민족대표'[3], '영원한 한국인'[4] 등으로 널리 칭송받았다. 정일권 국무총리는 그를 "영원한 한국인"이라고 묘사했다.[4] 그는 3.1 운동의 중요한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3.1 독립 선언의 서명자 33명을 빗대어 "34번째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3]

1960년, 스코필드는 문화훈장과 서울 명예 시민증을 받았다.[4][3] 1968년 3월 1일에는 건국훈장을 받았다.[1][3]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스코필드가 자신의 학비를 지원하고 멘토 역할을 했다고 회상했다. 정운찬은 자신의 저서 ''나는 한국에 묻히고 싶다''에서 스코필드가 한국 사회의 빈부 격차를 우려하며 자신에게 경제학을 공부하고 빈부 격차 해소에 힘쓸 것을 권했다고 밝혔다.[4]

6. 2. 기념 사업

프랭크 스코필드는 2021년 현재까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이다.[5] 그의 묘비에는 "우리 민족의 자립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복된 스코필드 박사, 여기 평화롭게 잠들다."라고 적혀 있다.[1]

정일권 국무총리는 스코필드를 "영원한 한국인"이라고 칭송했다.[4] 그는 3.1 운동의 주요 인물로 묘사되며, 3.1 독립 선언 서명자 33인을 빗대어 "34번째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3]

1960년, 스코필드는 대한민국의 문화훈장[4][3] 서울 명예 시민증을 받았다.[3] 1968년 3월 1일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1][3] 1970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행사에서 미국 수의병리학회(American College of Veterinary Pathologists)로부터 특별 회원(Distinguished Member)이라는 최고 칭호를 받았다.[3]

스코필드는 자신의 삶의 질에 영향을 줄 정도로 이타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상당한 액수의 돈과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기부했으며, OVC 재직 시절에는 작은 임대 주택에 살면서 여행 경비가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3]

2009년부터 2010년까지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를 지낸 정운찬은 스코필드가 자신의 학비를 지원하고 멘토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정운찬은 스코필드의 전기인 ''나는 한국에 묻히고 싶다''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4]

토론토 동물원에는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 기념 정원이 있으며, 2011년에 완공된 이 정원에는 스코필드를 기리는 동상이 있다.[9][8] 대한민국은 정원 건설을 위해 80만달러를 기부했다. 정원의 일부는 한국식으로 조성되었다.[9]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특별시와 주한 캐나다 대사관은 서울시청에서 스코필드와 다른 캐나다 선교사들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스코필드의 손자 딘 스코필드가 이 기념식에 참석했다.[10]

7. 상훈

참조

[1] 웹사이트 이달의 독립운동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 Independence activist of the month: Frank William Schofield https://e-gonghun.mp[...] Ministry of Patriots and Veterans Affairs 2024-05-02
[2] 논문 Dr. Frank W. Schofield: Veterinarian Extraordinaire
[3] 웹사이트 Department History: Dr. Frank Schofield http://www.ovc.uogue[...] Ontario Veterinary College, University of Guelph 2017-11-12
[4] 뉴스 [Korea Encounters] Frank Schofield, 'a most dangerous man' and an 'eternal Korean' https://www.koreatim[...] 2024-05-02
[5] 논문 "The arch agitator:" Dr. Frank W. Schofield an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2009-08
[6] 웹사이트 3·1운동 (三一運動)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4-29
[7] 뉴스 Overlooked No More: Yu Gwan-sun,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Who Defied Japanese Rule https://www.nytimes.[...] 2018-03-29
[8] 웹사이트 Schofield Memorial https://www.studiojc[...] 2024-07-24
[9] 뉴스 Dr. Schofield statue unveiled in zoo's memorial garden https://www.toronto.[...] 2024-07-24
[10] 뉴스 5 Canadians honored for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https://www.koreatim[...] 2024-06-21
[11] 문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교수보다 2년 연상녀
[12] 뉴스 “독립만세” 3·1 운동의 조력자…푸른 눈의 이방인들 http://news.kbs.co.k[...] KBS 뉴스 2018-03-01
[13] 웹인용 스코필드 동상 제막식 '동물원이 최적지' - Oct 6, 2010 http://www.drschofie[...] 201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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