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바롭스크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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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바롭스크 재판은 1949년 12월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재판으로, 일본 관동군 소속 12명이 생체 실험, 세균 무기 개발 및 사용 혐의로 기소되었다. 야마다 오토조 등 피고인 전원에게 유죄가 선고되었으며, 2년에서 25년의 강제 노동형이 내려졌다. 1956년 일소 국교 회복 이후 대부분 석방되어 귀국했으나, 재판의 공정성 및 증거 조작 의혹, 국제법적 근거 부족 등의 논란이 있다. 이 재판은 731 부대 등 일본군의 세균전 범죄를 국제 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지만, 냉전 시기 미국의 개입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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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롭스크 재판 | |
---|---|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 | |
위치 | 하바롭스크 |
날짜 | 1949년 12월 25일 ~ 1949년 12월 30일 |
관할 | 소련 군사 법정 |
혐의 | 세균전 |
판결 | 유죄 |
배경 | |
관련 사건 | 731 부대 |
재판 관련 정보 | |
기소 대상 | 일본 관동군 소속 군인 |
주요 인물 | 야마다 오토조 가와시마 기요시 가지쓰카 류지 다카하시 다카아키 |
결과 | |
판결 결과 | 피고인 모두 유죄 판결, 2년에서 25년의 노동 수용소 수감형 선고 |
논란 및 영향 | |
논란 | 미국의 면책 거래 의혹, 재판의 진실성 논란 |
영향 | 세균전 금지 협약 체결에 간접적 영향 |
2. 역사적 배경
1949년 12월 25일부터 30일까지 소련 극동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이 재판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이 주도한 일본군 전범 재판 중 하나이다. 이 재판은 일본 관동군이 중국과 소련 국경 지역에서 자행한 세균전 및 생체 실험 범죄를 다루었으며, 특히 731 부대와 같은 일본군 부대가 만주 지역에서 저지른 전쟁 범죄 혐의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2. 1. 재판의 진행
731 부대의 가와시마 기요시 소장을 포함한 피고인들은 1941년 초부터 약 40명의 대원들이 중일 전쟁 중 창더에 페스트에 오염된 벼룩을 공수하여 페스트 유행병을 일으켰다고 증언했다.[5]기소된 12명의 전범 모두에게 유죄가 선고되었으며, 2년에서 25년의 노동 수용소형이 선고되었다. 1956년, 형을 살고 있던 사람들은 석방되어 일본으로 송환되었다.[6]
1950년, 소련은 공식적인 재판 자료를 영어로 출판했는데, 그 제목은 ''세균 무기 제조 및 사용 혐의로 기소된 일본군 전직 군인의 재판 자료''였다.[7] 여기에는 예비 조사(기소, 일부 문서 증거 및 일부 심문 기록), 피고인과 증인의 증언, 피고인의 최종 변론, 일부 전문가 소견, 검사와 변호인의 연설이 원문 그대로 포함되어 있었다. 외국어 출판사 (소련)에서 출판된 이 소련 간행물은 오랫동안 절판되었다. 그러나 2015년 11월, 구글 도서는 이 자료가 현재 공개 도메인에 있다고 판단하고 온라인에 팩시밀리를 출판했으며, 전자책으로 판매하기도 했다.[7]
이 재판은 공산당 독재의 사회주의 법 제도에 따라 진행된 재판으로, 마지막 관동군 사령관이었던 야마다 오토조 대장을 포함한 12명의 일본인 '세균전' 전범을 재판한 것이다. 피고인들은 모두 유기형의 실형 판결을 받았고,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다[12][13]。
냉전이 심화되는 가운데, 일본 측에는 충분한 정보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되었고, 일본에서는 비밀 재판처럼 여겨지는 경우도 많았지만, 공개 재판으로 그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매번 현지 방청객이 쇄도했다고 한다.[14] 또한, 재판에 대해 처음에는 모스크바 방송, 프라우다, 타스 통신(모두 소련의 관영 언론)을 발신원으로 하는 정보로서 국제적인 통신사에서 보도되었다. 그 때문에, 731 부대 등의 인체 실험·세균전의 정보를 비밀리에 독점하려는 미국 측에서는, 일본에서 GHQ 관계자를 통해 "정말로 진행되고 있는가", "실제로 거기에 있다고 여겨지는 세균전 관계자가 재판을 받고 있는가",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보도"라는 비판적인 발표도 이루어졌다.[15]
오늘날 이 재판의 내용에 대해서는 국제적으로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고도 한다. 이에 대해, 당시 소련 측 사법 관계자 중에는, 재판을 도쿄 재판과 달리 소련만 단독으로 진행하고, 다른 국가를 참여시키지 않은 것이 최대의 실패였다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16]
일본 측에서는, 변호사와의 접견 등이 없는 상황에서 심문을 통해 만들어진 조서를 증거로 삼았고, 재판에서는 '변호인'이 있었지만 자백과 조서를 주로 신속하게 진행했으며, 피고인에게 발언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아, 전형적인 스탈린 시대의 '결과가 정해진' 재판이 아니었는가 하는 비판이 있다.[17][13] 또한, 피고인의 진술 조서는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남아있고,[18] 당시 소련의 국내법으로 재판을 진행한 것이 국제법상 근거가 희박하다는 주장도 있다.[13] 실제로, 재판의 모습을 기록했던 카메라맨이 훗날 고르바초프 정권 하의 개혁·개방의 글라스노스트 시대에 증언한 바에 따르면, 증거를 모아 예심을 진행하고, 공개로 진행된 본심에서는 재판관 앞에서 피고인이 증인·검찰관과 대결하는 형식이었다고 한다.[14] 이는 전전 일본의 형사 재판과 거의 동일한 스타일이다. 당시 소련 측 조사 그룹의 통역이 말한 바에 따르면, 피고인들은 예심에서 뒷받침 증거가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증거가 없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작전을 썼지만, 예심에서 인정한 것을 본심에서 뒤집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19] 최초의 죄상 인정에서, 카지츠카 류지가 일부 죄상을 부인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죄상 자체는 거의 인정하고 있다.
피고인들은 유기형이었기 때문에, 형기 중에 사망한 사람을 제외하면, 결국 석방되거나, 형기를 채우지 못한 사람도 1956년의 일소 국교 회복에 따라 사실상 석방되는 형태로 일본으로 귀국했다. 특히 이들 귀국자들 사이에서는, 취조 과정에서 고문이 있었다거나, 재판에서 죄 없는 죄를 인정했다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20][21]
러시아 측은 재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또한, 중국에서는, 세균전 범죄에 대한 사상 최초의 국제 재판이었고, 당시 일본이 세균 무기를 개발하여, 전시 중에 사용했던 사실을 폭로한 것을 평가하는 의견[22]도 있다. 러시아 측은 자료에 대해 "국익을 훼손하는 내용이 있다"면서 일부만 공개하고 있으며, 전면 공개는 하지 않고 있다.[13][23] 2021년 9월에는 '하바롭스크 재판'에 관한 학술 회의를 열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역사 왜곡''''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보냈으며, 이는 역사 문제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24] 2020년 7월에는 러시아에서 출판물이나 인터넷 게시물 등을 대상으로, 나치스와 소련을 동일시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도 시행되었다.[23]
3. 피고인과 판결
1949년 12월 25일부터 12월 30일까지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이 재판에는 12명의 피고인이 기소되었다. 이들은 모두 일본 관동군 소속으로, 731 부대와 100 부대 등 세균전 부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12] 피고인들은 세균 무기 제조 및 사용, 생체 실험 등 반인륜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12]
재판 결과, 피고인 전원은 유죄 판결을 받고 2년에서 25년 사이의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았다.[12] 형량은 각 피고인의 직책과 범죄 가담 정도에 따라 다르게 결정되었다.
(하위 섹션 "주요 피고인"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피고인 명단과 형량에 대한 추가적인 언급은 생략한다.)
이들은 이바노보주 레즈네보 지구 체르니 마을의 이바노보 장교 수용소에 수감되었다.[12] 1956년 일소 국교 회복에 따라 일부는 일본으로 귀국하였으나, 일부는 수용소에서 사망하기도 하였다.[12]
3. 1. 주요 피고인
이름 | 직책 | 형량 | 비고 |
---|---|---|---|
야마다 오토조 | 관동군 사령관, 대장 | 25년 강제노동형 | 1956년 석방 |
가지쓰카 류지 | 관동군 군의부장, 군의 중장 | 25년 강제노동형 | 1956년 석방 |
다카하시 다카아쓰 | 관동군 수의부장, 수의 중장 | 25년 강제노동형 | 1952년 옥사 |
가와시마 기요시 | 731 부대 제4부(세균제조부) 부장, 군의 소장 | 25년 강제노동형 | 1956년 석방 |
사토 슌지 | 관동군 제5군 군의부장, 군의 소장 | 20년 강제노동형 | 1956년 석방 |
가라사와 도미오 | 731 부대 제4부 세균제조과 과장, 군의 소좌 | 20년 강제노동형 | 1956년 옥사 |
니시 도시히데 | 731 부대 교육부장 겸 손오 지부장, 군의 중좌 | 18년 강제노동형 | 1956년 석방 |
오노우에 마사오 | 731 부대 하이린/무단장 지부장, 군의 소좌 | 12년 강제노동형 | 1956년 석방 |
히라자쿠라 젠사쿠 | 100 부대 연구원, 수의 중위 | 10년 강제노동형 | 1956년 석방 |
미토모 가즈오 | 100 부대 대원, 병장 | 15년 강제노동형 | 1956년 석방 |
기쿠치 노리미쓰 | 731 부대 하이린/무단장 지부 위생병, 상등병 | 2년 강제노동형 | 1951년 석방 |
구루시마 유지 | 731 부대 린커우 지부 위생병, 실험수 | 3년 강제노동형 | 1952년 석방 |
3. 2. 기타 피고인
이름 | 계급 | 소속 | 형량 | 비고 |
---|---|---|---|---|
니시 도시히데 | 군의 소좌 | 731 부대 제4부 세균제조과 과장 | 12년 강제노동형 | 西 俊英|にし としひで일본어 |
오노우에 마사오 | 군의 소좌 | 731 부대 하이린/무단장 지부장 | 20년 강제노동형 | 尾上 正男|おのうえ まさお일본어 |
히라자쿠라 젠사쿠 | 수의 중위 | 100 부대 연구원 | 10년 강제노동형 | 平桜 全作|ひらざくら ぜんさく일본어 |
미토모 가즈오 | 수의 중위 | 100 부대 연구원 | 15년 강제노동형 | 三友 一男|みとも かずお일본어 |
기쿠치 노리미쓰 | 위생병 | 731 부대 하이린/무단장 지부 | 2년 강제노동형 | 菊地 則光|きくち のりみつ일본어 |
구루시마 유지 | 위생병 | 731 부대 린커우 지부 | 3년 강제노동형 | 久留島 祐司|くるしま ゆうじ일본어 |
4. 재판에 대한 논란과 비판
냉전 시기에 진행된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은 서방 세계에서 공정성과 증거 신빙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받았다. 특히, 일본에서는 비밀 재판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실제로는 공개 재판으로 진행되어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현지 방청객이 쇄도했다.[14]
생명 윤리 전문가 징바오 니에는 재판이 강한 이념적 색채를 띠고 있으며, 국제적 참여 부족과 같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세균 무기를 준비하고 배치했으며, 일본 연구자들이 잔혹한 실험을 생체 인간에게 수행했다는 것을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 없이 확립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 재판은 공산주의 선전으로 치부되어 1980년대까지 서방 세계에서 완전히 무시되었다.[8]
역사학자 셸던 해리스는 재판에서 제시된 증거가 4년간의 조사에서 수집된 18권의 심문 및 문서 자료를 기반으로 했으며, 모스크바 재판과 달리 일본인들의 자백은 사실에 기반을 두었다고 평가했다.[9] 그러나 해리스는 비교적 가벼운 처벌에 의문을 제기하며, 소련이 미국과 유사하게 일본과 정보 교환 거래를 맺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10]
재판 당시 소련 검찰이 소환한 전문가 중 한 명인 N. N. 주코프-베레즈니코프는 나중에 조지프 니덤이 이끄는 과학자 패널에서 활동하며 한국 전쟁 중 미국의 생물학전 주장에 대한 중국과 북한의 주장을 조사하기도 했다.[11]
오늘날 이 재판의 내용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소련 측 사법 관계자 중에는 재판을 도쿄 재판과 달리 소련 단독으로 진행하고 다른 국가를 참여시키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실패였다는 의견도 있다.[16]
러시아 측은 재판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블라디미르 푸틴대통령은 ''''역사 왜곡''''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24] 이는 역사 문제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24] 2020년 7월에는 러시아에서 나치와 소련을 동일시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이 시행되기도 했다.[23]
4. 1. 소련의 이념적 편향성
생명 윤리 전문가 징바오 니에는 하바롭스크 재판이 강한 이념적 색채를 띠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8] 이는 재판이 공산주의 선전으로 치부되어 1980년대까지 서방 세계에서 완전히 무시된 원인 중 하나였다.[8]일본 측에서는 변호사 접견 등이 없는 상황에서 심문을 통해 만들어진 조서를 증거로 삼았고, '변호인'은 있었지만 자백과 조서를 중심으로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했으며, 피고인에게 충분한 발언 기회를 주지 않아 전형적인 스탈린 시대의 '결과가 정해진' 재판이라는 비판이 있다.[17][13] 또한, 피고인의 진술 조서가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18]과 당시 소련 국내법으로 재판을 진행한 것이 국제법상 근거가 희박하다는 주장도 있다.[13]
그러나 재판 기록 카메라맨은 훗날 글라스노스트 시대에 증언하기를, 증거를 모아 예심을 진행하고 공개로 진행된 본심에서는 재판관 앞에서 피고인이 증인·검찰관과 대결하는 형식이었다고 한다.[14] 당시 소련 측 조사 그룹 통역에 따르면, 피고인들은 예심에서 뒷받침 증거가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증거가 없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작전을 썼지만, 예심에서 인정한 것을 본심에서 뒤집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19]
4. 2. 증거 조작 및 강압 심문 의혹
일본 측에서는 변호사와의 접견 등이 제한된 상황에서 심문이 이루어져 만들어진 조서를 증거로 삼았고, 재판에서는 '변호인'이 있었지만 자백과 조서를 바탕으로 신속하게 진행되었으며, 피고인에게 발언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아, 스탈린 시대의 '결과가 정해진' 재판이 아니었는가 하는 비판이 있다.[17][13] 또한, 피고인의 진술 조서가 협박에 의해 작성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남아있고,[18] 당시 소련의 국내법으로 재판을 진행한 것이 국제법상 근거가 희박하다는 주장도 있다.[13]실제로 재판 모습을 기록했던 카메라맨은 훗날 고르바초프 정권 하의 개혁·개방(글라스노스트) 시대에 증언하기를, 증거를 모아 예심을 진행하고 공개로 진행된 본심에서는 재판관 앞에서 피고인이 증인·검찰관과 대결하는 형식이었다고 한다.[14] 이는 전쟁 전 일본의 형사 재판과 거의 동일한 스타일이다. 당시 소련 측 조사 그룹의 통역은 피고인들이 예심에서 뒷받침 증거가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증거가 없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작전을 썼지만, 예심에서 인정한 것을 본심에서 뒤집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19] 최초의 죄상 인정에서 카지츠카 류지가 일부 죄상을 부인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죄상 자체는 거의 인정했다.
피고인들은 유기형이었기 때문에 형기 중에 사망한 사람을 제외하면 결국 석방되거나, 형기를 채우지 못한 사람도 1956년 일소 국교 회복에 따라 사실상 석방되는 형태로 일본으로 귀국했다. 특히 이들 귀국자들 사이에서는 취조 과정에서 고문이 있었다거나, 재판에서 죄 없는 죄를 인정했다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20][21]
4. 3. 국제법적 근거 부족
이 재판은 당시 소련 국내법으로 진행되어 국제법상 근거가 희박하다는 비판이 있다.[13] 일본 측에서는 변호사 접견 등이 없는 상황에서 심문으로 작성된 조서를 증거로 사용했고, 피고인에게 충분한 발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결과가 정해진 재판'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17][13] 또한 피고인의 진술 조서가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남아있다.[18]엘레나 본다렌코는 1993년에 집필한 학술 논문에서 하바롭스크 재판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언급했다.[25]
5. 재판의 의의와 영향
하바롭스크 재판은 일본 제국의 731 부대를 포함한 세균전 부대의 전쟁범죄를 다룬 재판으로, 1949년 12월 25일부터 30일까지 소련 극동 하바롭스크에서 열렸다.
이 재판은 일본군의 세균전 및 생체 실험 범죄 사실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판사들은 기소된 12명의 전범 모두에게 유죄를 선고했으며, 2년에서 25년의 노동 수용소형을 선고했다. 1956년, 형을 살고 있던 사람들은 석방되어 일본으로 송환되었다.[6]
1950년, 소련은 ''세균 무기 제조 및 사용 혐의로 기소된 일본군 전직 군인의 재판 자료''라는 제목의 공식 재판 자료를 영어로 출판했다.[7] 여기에는 피고인과 증인의 증언, 피고인의 최종 변론, 검사와 변호인의 연설 등이 원문 그대로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재판은 이념적 색채가 강하고 국제적 참여가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일본군이 세균 무기를 준비하고 배치했으며, 일본 연구자들이 잔혹한 실험을 생체 인간에게 수행했다는 것을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 없이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8]
냉전 심화로 일본 측에는 충분한 정보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되었고, 일본에서는 비밀 재판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공개 재판으로 진행되어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매번 현지 방청객이 쇄도했다고 한다.[14]
일본 측에서는 변호사 접견 등이 없는 상황에서 심문을 통해 만들어진 조서를 증거로 삼았고, '변호인'이 있었지만 자백과 조서를 주로 신속하게 진행했으며, 피고인에게 발언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아 스탈린 시대의 '결과가 정해진' 재판이 아니었는가 하는 비판이 있다.[17][13] 또한, 피고인의 진술 조서가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18]과 당시 소련 국내법으로 재판을 진행한 것이 국제법상 근거가 희박하다는 주장도 있다.[13]
피고인들은 유기형이었기 때문에 형기 중 사망자를 제외하면 결국 석방되거나, 형기를 채우지 못한 사람도 1956년 일소 국교 회복에 따라 사실상 석방되는 형태로 일본으로 귀국했다.
러시아 측은 재판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중국에서는 세균전 범죄에 대한 사상 최초의 국제 재판이었고, 당시 일본이 세균 무기를 개발 및 사용하여 전시 중에 사용했던 사실을 폭로한 것을 평가한다.[22] 러시아 측은 자료에 대해 "국익을 훼손하는 내용이 있다"면서 일부만 공개하고 있으며, 전면 공개는 하지 않고 있다.[13][23]
5. 1. 731 부대 및 일본군 세균전 범죄 폭로
가와시마 기요시 소장 등 피고인들은 1941년 초부터 약 40명의 731 부대 대원들이 중일 전쟁 중 창더에 페스트균에 오염된 벼룩을 공수하여 페스트 유행병을 일으켰다고 증언했다.[5]생명 윤리 전문가 징바오 니에는 이 재판에 대해 "일본군이 세균 무기를 준비하고 배치했으며, 일본 연구자들이 잔혹한 실험을 생체 인간에게 수행했다는 것을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 없이 확립했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 재판은 공산주의 선전으로 치부되어 1980년대까지 서방 세계에서 완전히 무시되었다.[8]
역사학자 셸던 해리스는 731 부대 관련 저서에서 이 재판을 "심리에서 제시된 증거는 이전 4년 동안의 조사에서 수집된 18권의 심문 및 문서 자료를 기반으로 했다."라고 묘사하며, 자백이 사실에 기반을 두었다고 평가했다.[9]
하지만 방대한 재판 문서에도 불구하고, 피고인들은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고, 재판이 열린 지 7년 만인 1956년에 모두 석방되었다(옥중 사망자 1명과 자살자 1명 제외).[10] 해리스는 "소련은 미국이 완료한 것과 유사한 거래를 일본과 맺었다. 정보 [교환]에 대한... 극도로 가벼운 형벌"이라고 주장했다.[10]
중국에서는 이 재판이 세균전 범죄에 대한 사상 최초의 국제 재판이었고, 당시 일본이 세균 무기를 개발하여 전시 중에 사용했던 사실을 폭로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22]
5. 2. 전후 국제 질서 형성에 기여
하바롭스크 재판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범 처벌과 관련된 중요한 선례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특히 일본군이 세균 무기를 준비하고 배치했으며, 일본 연구자들이 잔혹한 실험을 생체 인간에게 수행했다는 것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전후 국제 질서 형성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8]이 재판은 이념적 색채가 강하고 국제적 참여가 부족하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전쟁 범죄를 밝혀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8] 그러나 공산주의 선전으로 치부되어 1980년대까지 서방 세계에서 완전히 무시되기도 했다.[8]
일본 측에서는 변호사 접견 제한, 자백 위주의 재판 진행, 피고인에게 충분한 발언 기회 미제공 등을 이유로 스탈린 시대의 '결과가 정해진' 재판이 아니었냐는 비판도 제기되었다.[17][13]
오늘날 이 재판의 내용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소련 측 사법 관계자 중에는 이 재판을 도쿄 재판과 달리 소련 단독으로 진행하고 다른 국가를 참여시키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실패였다는 의견도 있다.[16]
한편, 중국에서는 이 재판이 세균전 범죄에 대한 사상 최초의 국제 재판이었고, 당시 일본이 세균 무기를 개발하여 전시 중에 사용했던 사실을 폭로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22]
6. 현대적 관점과 재평가
냉전 시대의 이념 대립 속에서 진행된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은 그 공정성과 증거의 신빙성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존재한다.[17][13] 그러나 이 재판을 통해 일본군의 세균전 및 생체 실험 범죄 사실이 국제 사회에 알려졌으며, 이는 역사적 진실 규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다.[8][22]
생명 윤리 전문가 징바오 니에는 "이념적 색채가 강하고 국제적 참여가 부족했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재판은 일본군이 세균 무기를 준비하고 배치했으며, 일본 연구자들이 잔혹한 생체 실험을 수행했다는 것을 합리적인 의심 없이 확립했다"라고 평가했다.[8] 역사학자 셸던 해리스는 "하바롭스크 재판에서 일본인들의 자백은 그들을 조종하는 사람들의 허구가 아닌 사실에 기반을 두었다"라고 언급하며, 재판의 증거가 이전 4년 동안 수집된 18권의 심문 및 문서 자료를 기반으로 했다고 설명했다.[9]
일본 측에서는 변호사 접견 등이 없는 상황에서 심문으로 만들어진 조서를 증거로 삼았고, '변호인'이 있었지만 자백과 조서를 주로 신속하게 진행했으며, 피고인에게 발언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아 스탈린 시대의 '결과가 정해진' 재판이 아니었는가 하는 비판이 있다.[17][13] 또한 피고인의 진술 조서가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 당시 소련 국내법으로 재판을 진행한 것이 국제법상 근거가 희박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18][13]
러시아는 현재도 재판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재판 자료 일부를 공개하고 있지만, "국익을 훼손하는 내용이 있다"라며 자료 전면 공개는 하지 않고 있다.[13][23] 2021년에는 하바롭스크 재판 관련 학술 회의를 개최하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역사 왜곡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등, 역사 문제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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