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장수
1. 개요
하장수는 사천 조동을 대표하는 유학자 가문 출신으로, 당대의 다른 유학자들과 달리 국제 정세에 밝아 '군병체제'를 갖춰 국가의 위기를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러 차례 조정에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일제강점기에 대한제국이 강제 병합되자 비분강개하여 4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하장수는 서예에도 능했으나 문집은 전해지지 않으며, 장남의 혼인을 위해 보낸 서신을 통해 그의 필력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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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유학자 -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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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유학자 -
여운홍
여운홍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고 해방 후 과도입법의원과 국회의원을 지냈으나, 친일 행적 의혹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정치인이다. -
1864년 출생 -
막스 베버
막스 베버는 독일 출신의 사회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법학자로서, 종교사회학, 정치 체제 등을 연구하고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 발전에 미친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을 분석했으며, 권위의 유형을 구분하고 사회과학 연구의 객관성과 가치 중립성을 강조했다. -
1864년 출생 -
이승훈 (1864년)
이승훈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교육자, 기업인으로,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신민회 활동, 3·1 운동 참여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
유교인 -
김기진
김기진은 팔봉이라는 호를 사용한 한국의 문학평론가, 소설가, 시인으로, KAPF에서 활동하며 경향파 문학 이론을 이끌었으나 친일 행적을 보였고 광복 후에는 반공주의 문인으로 활동했다. -
유교인 -
이상화 (시인)
이상화는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작품을 통해 민족의 저항 의지를 표현했으며, 민족 시인으로서의 고뇌와 헌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작품과 정신은 현재에도 재평가되고 있다.
2. 생애
하장수는 평소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출사에 뜻을 두지 말고 농사와 더불어 학문에만 정진하라'는 유훈을 실천한 유학자였다. 학문이 뛰어나고 식견이 넓었음에도 향시나 대과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이는 세도정치의 폭정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대 조상의 의지를 따른 것이었다. 하연이 계유정난 이전에 '세월이 심상치 않으니 관직에 연연하지 말고 고향으로 내려와 세파에 휩쓸리지 말 것'을 당부한 가문의 전통과도 관련이 있다.
하연의 직계 후손 중 일부는 당상관 이상 관직에 올랐으나, 대부분은 사대부임에도 농사와 학문에 정진했다. 사천에 부임한 수령들이 하장수의 집에 자주 방문하거나 초청받아 시국을 논하고 자문을 구했다는 점에서 그의 학문과 식견을 엿볼 수 있다.
1912년 경술국치를 당한 그 달 8월,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풍에 따라 명예와 재물을 경계했으며, 뛰어난 필력을 가진 서예가였음에도 문집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1909년 장남 하재세의 혼인을 위해 밀양 박씨 문중에 보낸 서신이 115년 만에 사천조동 문중 본가에서 발견되어 그의 필력이 확인되었다.
2.1. 군병체제 주창과 좌절
하장수는 사천조동을 대표하는 명망 있는 유학자 가문 출신으로, 당시 다른 유학자들과는 달리 국제 정세에 밝아 청나라와 서구 열강, 왜국(일본)에 관한 동향 등을 알고 있었다. 그는 "조선이 하루속히 군관민이 일체화된 ‘군병체제’를 갖추어 앞날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개화파 이론가들과 개화사상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이었다.
진양 하씨 사천조동 문중의 구전에 의하면 하장수는 '군병체제'에 대해 여러 차례 조정에 상소하였으나 번번이 무시되자, "조선의 앞날이 심히 걱정된다"는 말을 일상에서 늘 되뇌었다고 한다. 그는 지역 유림의 회합 때마다 이를 전파하였으나 큰 호응이 없자, 거시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한정된 전파에 그쳤다. 그러나 당시 그의 명망은 사천을 중심으로 경상도 전역의 유림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하장수는 1876년 일제와의 불평등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1905년 11월에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박제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하여 피를 토하기까지 했다. 연이어 1907년 7월에 대한제국군이 해산되고 1910년 8월에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강제로 병합되자, 분을 참지 못하여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평소에 "왜국(일본)을 경계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예견했다고 한다.
2.2. 유학자로서의 삶과 시대 인식
하장수는 사천 조동을 대표하는 명망 있는 유학자 가문 출신으로, 당시 다른 유학자들과는 달리 국제 정세에 밝았다. 청나라, 서구 열강, 왜국(일본)의 동향을 알고 있었으며, 조선이 하루속히 군관민이 일체화된 ‘군병체제’를 갖추어 앞날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개화파 이론가나 개화사상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주장이었다.
진양 하씨 사천조동 문중 구전에 따르면, 하장수는 '군병체제'에 대해 여러 차례 조정에 상소했으나 번번이 무시당했다. 이에 '조선의 앞날이 심히 걱정된다'는 말을 자주 되뇌었다고 한다. 지역 유림 모임 때마다 이를 알렸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해, 거시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제한적인 전파에 그쳤다. 그러나 그의 명망은 사천을 중심으로 경상도 전역의 유림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하장수는 평소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출세에 뜻을 두지 말고 농사와 학문에만 정진하라'는 유훈을 실천한 유학자였다. 학문적 능력과 넓은 식견을 갖췄음에도 향시나 대과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이는 세도정치의 폭정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대 조상의 의지를 따른 것이었다. 진양 하씨 사직공파 파조인 문효공 하연이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이전에 '세월이 심상치 않으니 관직에 연연하지 말고 고향으로 내려와 세파에 휩쓸리지 말 것'을 당부한 가문의 전통과도 관련이 있다.
하연의 직계 후손 중 일부는 당상관 이상 관직에 올랐으나, 대부분은 사대부임에도 농사와 학문에 정진했다. 하장수의 경우, 사천에 부임한 수령들이 그의 집에 자주 방문하거나 초청받아 시국을 논하고 자문을 구했다는 점에서 그의 학문과 식견을 엿볼 수 있다.
1876년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1905년 11월 을사오적 중 한 명인 박제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하장수는 매우 비통해하며 피를 토하기까지 했다. 1907년 7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강제 병합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후 병을 얻어 1912년 경술국치를 당한 그 달 8월,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소 '왜국(일본)을 경계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가풍에 따라 명예와 재물을 경계했으며, 뛰어난 필력을 가진 서예가였음에도 문집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1909년 장남 하재세의 혼인을 위해 밀양 박씨 문중에 보낸 서신이 115년 만에 사천조동 문중 본가에서 발견되어 그의 뛰어난 필력이 확인되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격동의 시대를 겪은 하장수는, 제한된 환경 속에서도 당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 없이 독자적이고 실제적인 국가 위기 타개책인 ‘군병체제’를 제시했다.
2.3. 일제 침략에 대한 비분강개와 죽음
하장수는 1876년 일제와 맺은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 체결과, 1905년 11월에 을사오적 중 한 명인 박제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비분강개하여 피를 토하기까지 했다. 1907년 7월 대한제국군이 해산되고,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강제로 병합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후 병을 얻은 그는 1912년 경술국치가 일어난 같은 해 8월, 48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소 "왜국을 경계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예견했다고 한다.
3. 가계
하장수는 증조부 하덕량(河德良, 유학자), 조부 하용우(河龍佑, 유학자), 부친 하재흥(河再興), 모친 강진민씨(江津旻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배우자는 김해김씨백림(金海金氏伯林)이다. 슬하에 4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하재세(河在世), 며느리는 밀양박씨연순(密陽朴氏連順), 장손은 하치호(河致鎬), 손자며느리는 강숙순(姜淑順)이다. 증손은 하홍술(河洪述), 하홍순(河洪舜), 하미숙(河美淑)이며, 증삼손은 하승무(河承武)이다. 차남, 삼남, 사남은 각각 하재겸(河在兼), 하재상(河在尙), 하재근(河在根)이다.
3.1. 직계
* 증조부: 하덕량(河德良, 유학자)
* 조부: 하용우(河龍佑, 유학자)
* 아버지: 하재흥(河再興)
* 어머니: 강진민씨(江津旻氏)
* 배우자: 김해김씨백림(金海金氏伯林)
* 장자: 하재세(河在世)
* 장자부: 밀양박씨연순(密陽朴氏連順)
* 장손: 하치호(河致鎬)
* 장손부: 강숙순(姜淑順)
* 증손: 하홍술(河洪述)
* 증차손: 하홍순(河洪舜)
* 증차손녀: 하미숙(河美淑)
* 증삼손: 하승무(河承武)
* 차남: 하재겸(河在兼)
* 삼남: 하재상(河在尙)
* 사남: 하재근(河在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