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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방가르드 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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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AG)는 1960년대 후반 한국 현대 미술의 전환기에 등장한 단체로, 1969년 결성되어 197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다. AG는 한국 미술계의 새로운 조형 질서를 탐구하고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으며, 그룹 전시회, 저널 《AG》 발간, 서울 비엔날레 참여 등을 통해 아방가르드 미술을 소개했다. 비평가들은 AG의 아방가르드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지만, 조직적인 글쓰기와 출판을 통해 예술적 실천을 뒷받침하고, 젊은 예술가들에게 국제적인 플랫폼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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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방가르드 협회
단체 정보
이름한국 아방가르드 협회 (AG 그룹)
로마자 표기Hangugabanggareudeuhyeopoe
결성1969년 9월
해산1975년

2. 역사적 배경

AG 그룹은 1960년대 후반 대한민국 현대 미술사의 전환기에 등장했다.[2] 이 시기는 미술사 연구에서는 1950년대 중반의 한국 앵포르멜 운동과 1970년대 중반의 단색화 및 민중미술 운동 사이의 공백기로 여겨져 왔으며, 오랫동안 주요 미술 운동의 부재로 간과되기도 했다.[1][2]

앵포르멜 운동이 점차 주류 미술계에 편입되고 박정희 정부(대한민국 제3공화국) 하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면서,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은 기존의 미술 형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실험적 시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2] 이들은 기하학적 추상, 설치 미술, 퍼포먼스 아트 등 당시 서구에서 주목받던 새로운 미술 경향을 적극적으로 탐구했다.[2]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67년 개최된 한국청년작가연합전은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젊은 작가들은 이 전시를 통해 기존의 국전 중심 미술계와 앵포르멜 운동에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며 "추상 이후의 예술, 일상생활 속의 예술, 대중 친화적인 예술"을 지향점으로 내세웠다.[3] 전시에서는 옵 아트, 기하학적 추상, 조각뿐만 아니라 반예술(Anti-art)과 탈물질주의(Dematerialization)적 경향을 보이는 퍼포먼스 아트 등이 선보여지며 한국 실험 미술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3]

이처럼 기존의 미술 질서에 도전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역동적인 분위기 속에서, 보다 조직적이고 이론적인 기반을 갖춘 전위 미술 운동을 추구하며 1969년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AG)가 결성되었다.[1][5] AG 그룹은 청년작가연합전의 문제의식을 계승하면서도, 자체적인 비평 활동과 담론 형성을 통해 한국 미술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1][5]

2. 1.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태동

아방가르드(전위예술)라는 용어는 20세기 초 한국이 서양 미술과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국내에 소개되었다. 1920년대에는 '신흥(新興)'과 '전위(前衛)'라는 말이 가장 새로운 형태의 표현, 특히 추상회화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고, 이후에는 특정 사회적 가치, 예를 들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지지하는 작품을 의미하기도 했다.[2]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르러 전쟁을 겪은 세대의 예술가들은 앵포르멜추상표현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는 당시 미술계를 주도하던 사실주의적 아카데미즘과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 중심의 구시대적 시스템에 대한 비판 의식의 발로였다.[2] 이 시기에는 현대미술가협회, 1960년미술협회와 같은 새로운 예술가 단체들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나중에 악튜엘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기도 했다.[2]

그러나 이들 앵포르멜 운동의 주도적인 예술가들이 점차 대학 등 교육 기관으로 흡수되고, 박정희 정부(대한민국 제3공화국) 하에서 앵포르멜 운동 자체가 힘을 잃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젊은 세대의 예술가들이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2] 오리진, 제로그룹/무동인, 신전동인과 같은 소규모 그룹들은 당시 서구에서 유행하던 기하학적 추상, 설치 미술, 퍼포먼스 아트 등 다양한 장르를 실험했다.

1967년, 이들 젊은 예술가들은 기존의 국전과 앵포르멜 중심의 미술계에 도전하며 한국청년작가연합전(청년작가연립전)을 개최했다. 이들은 선언문을 통해 "앵포르멜은 지난 10년간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했다. 우리는 추상 이후의 예술, 일상생활 속의 예술, 대중 친화적인 예술을 창조하는 활동가로서의 예술가이다"라고 밝히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3] 이 전시회에서는 옵 아트, 기하학적 추상, 조각, 반(反)예술, 그리고 물질성을 벗어난 퍼포먼스 아트 등이 선보여졌으며, 이는 한국 실험 미술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3]

특히 퍼포먼스 아트는 이 시기에 상당한 주목을 받았는데, 예술가들은 해프닝과 같은 형식을 통해 한국의 전통적인 사회 가치나 문화를 풍자하며 일상과 공공장소에 개입하고자 했다.[4] 그러나 대한민국 제4공화국으로 접어들며 강화된 군사 정권 하에서 이러한 표현 방식은 점차 억압받게 되었다.[4] 1967년에 결성된 제4집단은 공공장소에서 벌이는 해프닝으로 미술계 안팎에서 큰 논란과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2] 이러한 한국 실험 미술의 역동적인 흐름 속에서 1969년,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AG)가 창립되기에 이른다.

2. 2. 청년작가연합전과 실험미술의 등장

1950년대 중반 한국 앵포르멜 운동과 1970년대 중반 단색화 및 민중미술 운동 사이의 시기는 오랫동안 뚜렷한 주류 미술 운동이 부재했던 것으로 여겨졌다.[1][2]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전후 예술가들은 앵포르멜추상표현주의를 받아들여 사실주의 중심의 아카데미즘과 기존 국전의 권위주의적 시스템에 반대했다.[2] 이 시기에는 현대미술가협회와 1960년미술협회 같은 단체들이 활동했으며, 이들은 후에 악튜엘로 통합되었다.[2]

그러나 이들 앵포르멜 세대의 주요 작가들이 대학 등에 자리를 잡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끄는 대한민국 제3공화국 아래에서 앵포르멜 운동이 점차 힘을 잃으면서,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이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2] 오리진, 제로그룹/무동인, 신전동인과 같은 소규모 예술가 그룹들은 당시 서구에서 유행하던 기하학적 추상, 설치 미술, 퍼포먼스 아트 등 새로운 장르를 실험했다.[2]

1967년, 이 젊은 예술가들은 기존의 국전앵포르멜 중심의 미술계에 도전하기 위해 한국청년작가연합전(청년작가연립전)을 개최했다.[3] 이들은 선언문을 통해 "앵포르멜은 지난 10년 동안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했다. 우리는 추상 이후의 예술, 일상생활 속의 예술, 대중 친화적인 예술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활동가로서의 예술가이다"라고 밝히며 새로운 미술 운동의 방향을 제시했다.[3] 전시회에서는 옵 아트, 기하학적 추상, 조각, 반(反)예술, 그리고 물질성을 벗어난 퍼포먼스 등 다양한 실험적 작품들이 선보여졌으며, 이는 한국 실험 미술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3]

특히 이 시기에는 퍼포먼스 아트가 주목받았는데, 제4공화국으로 이행하며 박정희 정권의 통제가 강화되자 점차 억압받기도 했다. 예술가들은 해프닝과 같은 퍼포먼스 형식을 통해 일상과 공공장소에 개입하며 기존의 사회적 가치와 문화를 풍자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4] 1967년에 결성된 제4집단은 공공 해프닝을 통해 당시 미술계 안팎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2] 이러한 실험적 시도들은 이후 AG 그룹 결성의 배경이 되었다.

2. 3. 제4집단과 해프닝

1960년대 후반, 기존의 앵포르멜 미술 운동이 힘을 잃어가면서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이 등장했다.[2]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끄는 대한민국 제3공화국 아래에서 설치 미술, 퍼포먼스 아트 등 서구의 새로운 미술 경향을 실험하기 시작했다.[2] 특히 이 시기에는 퍼포먼스 아트가 상당한 주목을 받았는데, 예술가들은 해프닝이라는 형식을 통해 일상과 공공장소에 직접 개입하며 한국의 전통적인 사회 가치와 문화를 풍자하고자 했다.[4] 이러한 활동은 이후 대한민국 제4공화국으로 이어지는 박정희의 강화된 군사 정권 아래에서 점차 억압받게 된다.[4]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67년 제4집단이 결성되었다.[2] 제4집단은 공공장소에서 벌이는 해프닝을 통해 기존 미술계에 도전하고 사회적 관습에 의문을 제기하며 한국 현대 미술계 안팎에서 큰 논쟁과 파장을 일으켰다.[2] 이들의 활동은 1967년 한국청년작가연합전에서 나타난 반(反)예술, 탈(脫)물질주의적 경향과 맥을 같이하며, 한국 실험 미술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다.[3]

3.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AG)의 결성과 활동

AG 그룹의 창립은 새로운 실험적 표현 방식을 시도하는 예술가들의 다양한 시도를 따라 대한민국 현대 미술사 안에서 맥락화되어 왔다.[2] 구체적으로 AG 그룹은 1950년대 중반의 한국 앵포르멜 운동과 1970년대 중반의 단색화 회화 및 민중미술 운동 사이의 시기에 활동했는데, 학자들은 이 시기를 오랫동안 일관성 있는 주요 미술 운동이 부재했다는 이유로 간과해 왔다.[1][2]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20세기 초 한국이 서양 미술과 문화를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도입되었다. 1920년대에는 '신흥(新興)'과 '전위(前衛)'라는 용어가 가장 새로운 형태의 표현, 특히 추상회화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고, 이후에는 프롤레타리아 등 특정 사회적 가치를 옹호하는 작업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2]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전후 예술가들은 앵포르멜추상표현주의를 받아들여, 기존의 사실주의적 아카데미즘과 국전의 보수적인 시스템에 반대했다.[2] 이 시기에는 현대미술가협회와 1960년미술협회 같은 단체들이 창립되었고, 이들은 나중에 악튜엘로 통합되었다.[2] 그러나 이들 주도적인 예술가들이 교육 기관에 흡수되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끄는 대한민국 제3공화국 아래에서 앵포르멜 운동이 쇠퇴하면서,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이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2]

오리진, 제로그룹/무동인, 신전동인과 같은 소규모 예술가 단체들은 당시 서구에서 유행하던 기하학적 추상, 설치 미술, 퍼포먼스 아트 등을 실험했다. 1967년, 이 예술가들은 지배적인 국전과 앵포르멜 미술 운동에 맞서기 위해 한국청년작가연합전을 개최했다. 이들은 선언문을 통해 "앵포르멜은 지난 10년 동안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했다. 우리는 추상 이후의 예술, 일상생활 속의 예술, 대중 친화적인 예술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활동가로서의 예술가이다"라고 밝혔다.[3] 옵 아트, 기하학적 추상, 조각, 반(反)예술, 탈(脫)물질주의 퍼포먼스 등이 이 전시회에서 선보이며 한국 실험 미술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3] 이 시기 퍼포먼스 아트는 상당한 인기를 얻었으나, 제4공화국과 박정희의 강화된 군사 정권 하에서 점차 억압받게 되었다. 예술가들은 해프닝과 같은 퍼포먼스 형식을 통해 일상과 공공장소에 개입하며 한국의 전통적인 사회 가치와 문화를 풍자했다.[4] 1967년에 결성된 제4집단은 공공 해프닝을 통해 한국 현대 미술계 안팎에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2]

이러한 한국 실험 미술 발전의 흐름 속에서 1969년, 일단의 예술가들이 AG 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한국청년작가연합전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더욱 조직적인 활동을 지향했으며, 비평 이론과 담론을 통해 자신들의 예술 활동을 뒷받침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AG 그룹의 활동은 1969년 9월 자체 저널인 《AG》를 발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예술 관련 정기 간행물이나 잡지가 거의 없던 당시에 중요한 성과였다.[1] 이들의 목표는 다음 선언문에 잘 나타나 있다: "AG는 아방가르드 미술에 대한 강한 의식을 바탕으로, 비전 없는 한국 미술계에서 새로운 조형 질서를 탐구하고 창조함으로써 한국 미술과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5]

3. 1. 전시회

AG 그룹은 단일 주제로 전시회를 개최했는데, 이는 한국에서 최초의 시도 중 하나로 여겨진다.[1] AG 그룹은 창립부터 해체까지 총 4회의 그룹 전시회와 1회의 격년 전시회(비엔날레)를 개최했다.[5]

3. 1. 1. 제1회 AG 그룹전: 확장과 환원의 역학 (1970)

1970년 5월 1일부터 7일까지 중앙공보관에서 개최된 제1회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 그룹전은 미술 평론가 이일의 기념비적인 에세이 제목인 "확장과 환원의 역학"을 주제로 삼았다.[6] 1970년에 발간된 《AG 저널》에는 이 그룹전을 위한 특별 섹션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전시회 카탈로그 역할을 했다.[6] 다만, 전시 작품 설치 전에 작가들이 출품작 정보를 미리 제출해야 했기 때문에, 저널에 실린 내용과 실제 전시된 작품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6] 출품된 작품 대부분은 급격하게 현대화되는 도시 환경의 모습에 대한 작가들의 반응을 담고 있었으며, 많은 작품들이 설치 미술의 성격을 띠며 일시적이고 변하기 쉬운 재료를 사용하는 경향을 보였다.[1][6]

참여 작가 12명과 주요 출품작은 다음과 같다.

작가작품명연도설명
최명영《변질 70-B》1970콘크리트 파이프와 천을 사용한 설치 작품.[6]
하종현《작품》1970엑스레이 이미지, 거울, 캔버스, 합판, 조명으로 구성되었다. 도시화 과정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건물의 건설과 철거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설치 작품이다.[6]
김한《역행》1970팝 아트 스타일의 영향을 받아 사무실, 가로등, 도로의 이미지를 원색과 직선을 사용하여 표현했다.[1]
김구림《현상에서 흔적으로》1970《AG 저널》에는 《흔적》이라는 다른 작품이 기재되었으나, 학자들은 실제로는 《현상에서 흔적으로》가 전시되었음을 확인했다. 이 작품은 각기 다른 상자에 담긴 세 개의 얼음 덩어리와 그 위에 놓인 트레이싱 용지로 구성되어, 작품의 물질적 요소(얼음, 물)와 비물질적 요소(시간)를 포착하고자 한 설치 작품이다.[6]
김차섭《이다》1970흙바닥 위에 건설 현장에서 버려진 듯한 도구와 폐기물을 연상시키는 물체들이 모여 인간 형상을 이루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1]
이승조《핵 G-111A》1970작가의 대표적인 《핵》 연작 중 하나인 기하학적 추상화 작품이다. 다양한 음영의 반복되는 무채색 선들을 통해 3차원 원통이 쌓인 듯한 시각적 환영을 만들어내며 2차원 평면과 3차원 공간감 사이의 독특한 관계를 탐구했다. 이 작품은 이승조의 소위 "파이프" 작품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7]
이승택《무제》1970[1]
박종배《무제》1970[5]
박석원《손잡이 707》1970[5]
신학철《너와 나》1970[1]
심문섭《점 70-1》1970[5]
서승원《동시성 70-6》1970[5]


3. 1. 2. 제2회 AG 그룹전: 현실과 실현 (1971)

1971년 국립현대미술관 경복궁 분관에서 '현실과 실현'이라는 주제로 두 번째 단체전이 열렸다.[6] 이 전시는 끝난 뒤 카탈로그를 제작했는데, 이는 모든 작품의 설치 사진을 시간과 장소의 맥락 속에서 기록한 드문 사례로 평가받는다.[6] 이강소는 이 전시가 당시 시대 상황을 반영한 작품들로 구성되었다고 설명했다.[8] 전시 포스터와 입장권은 송번수가 디자인했다.[6]

참여 작가 17명과 출품작은 다음과 같다:[6]

작가작품명연도
조 Sungmook《적(赤) 과 백(白)》1971
최명영《변질–극》 연작1971
하종현《반위상》1971
김창중《무제》1971
김동규《존속 7117*7118*7119》1971
김한《(전(轉), 전개(展開))》1971
김구림《매개항 2》1971[9]
이강소《여백》1971[1][10]
이건용《체 71-12》1971
이승조《핵G 999-1》
이승택《바람》1971
박종배《무제》1971
박석원《71–적, A》1971
심문섭《관계–합》 연작 중 한 작품1971
신학철《10:1》1971
송번수《작품–71》
서승원《동시성》 연작 14점[1]


3. 1. 3. 제3회 AG 그룹전: 탈관념의 세계 (1972)

세 번째 전시인 ''탈관념의 세계''는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 경복궁 분관에서 열렸다.[11][12] 미술평론가 이일이 전시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설치 기반, 개념적, 과정 중심의 작품들이 전면에 내세워졌다.[6] 나무, 흙, 물, 돌과 같은 자연 재료들이 설치 작품에 자주 사용되었다.[1]

참여 작가는 총 13명이었다.[6]

작가비고
최명영
하종현무제 73-1, 1972[13]
김동규
김한
김구림
이건용
이강소
이승조
박종배
박석원
신학철
심문섭
서승원


3. 1. 4. 1974 서울 비엔날레

1974년 서울 비엔날레는 대한민국에서 조직된 최초의 비엔날레였다.[6] 이 행사는 젊은 세대의 한국 현대 미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14] 특히 35세 미만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작품 발표 기회를 제공했던 파리 비엔날레를 모델로 삼았는데,[15] 1973년에 열린 제8회 파리 비엔날레는 당시 한국 미술계에서 주목받으며 논의되었다.[14]

AG(아방가르드) 그룹은 서울 비엔날레가 이름처럼 2년마다 열려 한국 작가와 외국 작가들이 교류하는 장기적인 플랫폼이 되기를 기대했다.[6] 그러나 첫 행사 이후 추가적인 비엔날레는 열리지 못했다.[6] 당시 비엔날레의 커미셔너는 미술평론가 이일이 맡았다.[6]

비엔날레에는 AG 그룹 회원들 외에도 아방가르드 미술계에서 활동하던 작가 63명이 초청되어 참여했다.[14][16] 당시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계는 다양한 매체를 실험하고 있었지만, 비엔날레에 출품된 작품 대부분은 벽에 거는 "평면" 작업이었다.[14] 이러한 경향을 이후 나타나는 단색화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14]

3. 1. 5. 제4회 AG 그룹전 (1975)

하종현, 김한, 신학철, 이건용은 협회 마지막 전시에 참여한 유일한 4명의 작가였으며, 이는 그룹의 최종 해체를 알리는 신호였다.[6]

3. 2. 전시 도록

AG 그룹은 각 전시회마다 도록을 발간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는 당시 한국 미술계에 출판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상황을 고려할 때 주목할 만한 시도로 평가받는다.[6]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네 차례 전시회에 나온 개별 작품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했다.[6] 예를 들어, 첫 번째와 세 번째 전시회 도록은 작품 설치가 끝나기 전에 정보가 수집된 경우가 많아 정확한 출품 목록을 제공하지 못했다.[6]

이런 점에서 1971년에 열린 그룹의 두 번째 전시회 도록은 특히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여겨진다.[6] 이 도록은 한국 최초로 전시회가 끝난 뒤에 발간된 도록이며, 작품이 최종 형태로 설치된 모습을 담은 사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6]

3. 3. 저널 《AG》

AG 그룹의 활동은 1969년 9월 자체 저널인 《AG》를 발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예술 관련 정기 간행물이나 잡지가 거의 없던 시대에 이는 중요한 성과였다.[1] AG 그룹은 비평 이론과 담론으로 활동을 뒷받침하고자 했으며, 저널 형식으로 이론적 담론에 집중하여 실천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오리진회, 제로 그룹, 신전(新展)과 같은 미술 단체들과 차별성을 보였다.[1] 《AG》는 주로 평론가 이일, 오광수, 김인환이 주도했다.[1]

총 4권이 발행되었다. 제1호는 1969년, 제2호와 제3호는 1970년, 제4호이자 마지막 호는 1971년에 발행되었다.[1] 각 호는 평론가와 작가가 쓴 글의 양을 균형 있게 유지했으며, 당시의 미술 경향과 프랑스, 미국의 주요 비평 이론을 소개했다. 여기에는 랜드 아트, 개념 미술, 그리고 영국의 건축 그룹인 아키그램(Archigram)이 실천한 실험적인 건축에 대한 논의가 포함되었다.[1] 각 호의 첫 페이지에는 AG 그룹의 선언문이 실렸다: “AG는 전위 예술에 대한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전 빈곤의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 질서를 모색, 창조함으로써 한국 미술 문화 발전에 기여한다.”[5]

1969년에 발행된 제1호는 그룹의 첫 전시회 이전에 나왔다. 이 호에는 작가 최명영, 하종현, 김구림, 김한, 김차섭, 곽훈, 이승조,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평론가 이일, 오광수, 그리고 언론인 이일화의 이름이 멤버로 실렸다. 하종현이 발행인, 오광수가 편집인을 맡았다.[1] 이 호에는 이일의 에세이 “아방가르드 예술 이론”이 실렸는데, 이 글에서 이일은 프랑스 평론가 피에르 레스태니의 말을 인용하며 아방가르드 예술의 개념과 역할을 탐구했다: “오늘날의 아방가르드는 저항의 예술이 아니라 참여의 예술이다.”[1]

4. 주요 참여 작가 및 작품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AG)는 1960년대 말 한국 미술계에서 활동한 중요한 전위 예술 그룹이다. 이 그룹은 실험적인 예술 활동과 함께 이론적인 논의를 활발히 전개했으며, 특히 1969년에 창간된 저널 《AG》를 통해 그들의 예술적 지향점을 분명히 했다.[1]

AG 그룹에는 당대의 주요 작가들이 다수 참여했다. 김구림, 이승조, 하종현 등은 창립 멤버로서 그룹의 활동을 주도했으며, 이 외에도 많은 작가와 평론가들이 함께했다.[1] 《AG》 제1호에는 작가 멤버로 최명영, 하종현, 김구림, 김한, 김차섭, 곽훈, 이승조,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등이 이름을 올렸으며, 평론가 이일, 오광수와 언론인 이일화도 참여자로 기록되어 있다.[1] 특히 하종현은 이 창간호의 발행인을 맡았고, 오광수가 편집인을 맡아 저널 발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각 참여 작가들의 구체적인 활동과 기여는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4. 1. 김구림

김구림은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AG)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다.[1] 1969년에 발행된 AG 그룹의 저널 《AG》 제1호에는 작가로서 최명영, 하종현, 김한, 김차섭, 곽훈, 이승조,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등과 함께 그의 이름이 실렸다.[1]

4. 2. 이건용

(내용 없음)

4. 3. 이승조

이승조는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AG)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다.[1] 1969년에 발행된 AG 그룹의 저널 《AG》 제1호에는 작가 멤버로 최명영, 하종현, 김구림, 김한, 김차섭, 곽훈, 이승조,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의 이름이 실렸다.[1]

4. 4. 하종현

하종현은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을 추구한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AG)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다.[1] AG 그룹은 이론적 담론에 중점을 둔 저널 《AG》를 통해 활동했는데, 1969년 발행된 제1호에 하종현의 이름이 작가 멤버로 포함되었다.[1] 당시 함께 이름이 오른 멤버로는 작가 최명영, 김구림, 김한, 김차섭, 곽훈, 이승조,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등이 있었고, 평론가 이일, 오광수, 언론인 이일화도 참여했다.[1]

특히 하종현은 《AG》 제1호의 발행인을 맡아 그룹의 이론적 활동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 당시 편집인은 오광수였다.[1]

4. 5. 기타 참여 작가

AG 그룹의 저널인 《AG》는 주로 평론가 이일, 오광수, 김인환이 주도했다.[1] 1969년 발행된 《AG》 제1호에는 다음과 같은 멤버들의 이름이 실렸다.[1]

구분이름
작가최명영, 하종현, 김구림, 김한, 김차섭, 곽훈, 이승조,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평론가이일, 오광수
언론인이일화



이 호에는 하종현이 발행인, 오광수가 편집인으로 기재되었다.[1]

5. 비판적 수용과 학술적 평가

AG 그룹은 1950년대 중반의 한국 앵포르멜 운동과 1970년대 중반의 단색화 회화 및 민중미술 운동 사이, 주요 미술 운동이 부재했던 것으로 평가받던 시기에 활동하며 한국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1][2] 그러나 AG 그룹의 성격과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동시대 비평가들과 후대 학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평가와 논쟁이 존재한다.

주요 쟁점은 AG 그룹이 진정한 '아방가르드'로서 기존 미술계나 사회 체제에 대해 명확한 비판과 저항 정신을 가졌는지 여부,[1][2] 당시 박정희 군사 정권 하에서의 정치적 태도 문제,[4] 그리고 예술 이론 구축과 국제 교류 등에서의 기여도[2] 등이다. 이러한 다양한 시각은 AG 그룹 활동의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그룹에 대한 학술적 평가는 계속 진행 중이다.

5. 1. 아방가르드 정체성에 대한 논란

동시대 비평가들과 이후 많은 학자들은 AG 그룹과 그 활동이 특정 제도나 기성 예술 시스템에 대한 명확한 저항 목표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 단체의 아방가르드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했다.[1][2] 최근 연구에서는 이 단체가 사회 정치적 문제에 직접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 이유에 대해 다양한 설명을 제시한다. 엘리트주의적 경향, 즉 예술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론적 탐구에 치중했다는 점 등이 거론된다.[1]

그러나 학자 최수란은 이러한 비정치적 특성에 대해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그는 이러한 비정치성이 사실상 단체가 "서구 아방가르드 예술과의 암묵적인 연관성을 통해 검열과 박해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일종의 술책"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한다.[4] 당시 반공주의적, 친미적, 권위주의적 군사 정권이었던 박정희 정부가 급속한 산업화를 목표로 하고 세계 무대에서 더 발전된 국가들을 따라잡으려 했던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4] 이는 당시 정권의 검열과 억압 속에서 직접적인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던 상황을 반영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5. 2. 엘리트주의적 경향 비판

동시대 비평가들과 이후의 많은 학자들은 AG 그룹의 활동이 특정 제도나 기성 예술 시스템에 대한 명확한 저항 목표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 단체의 아방가르드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했다.[1][2] 최근 연구에서는 이 단체가 사회 정치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제시하는데, 그중 하나로 예술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고 이론적인 탐구에 치중한 나머지 엘리트주의적인 경향을 보였다는 점이 꼽힌다.[1]

그러나 학자 최수란은 이러한 비정치적 성격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AG 그룹이 표면적으로 비정치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 실제로는 당시 박정희 정권의 반공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군사 정권 하에서 검열과 박해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정권은 급속한 산업화를 추구하며 서구 사회를 따라잡으려 했기에, AG 그룹이 서구 아방가르드 예술과의 연관성을 암시함으로써 정권의 탄압을 피하려 했다는 것이다.[4]

5. 3. 재평가

동시대 비평가들과 이후 많은 학자들은 이 단체와 그 활동이 특정 제도나 기성 예술 시스템에 대한 명확한 저항 목표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 단체의 아방가르드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했다.[1] 최근 연구에서는 이 단체가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 이유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제시하는데, 여기에는 예술적 문제에 대한 지적, 이론적 탐구에 대한 관심으로 기울어진 엘리트주의적 경향이 포함된다.[1] 그러나 학자 최수란은 이러한 비정치적 특성에 대한 재고를 주장하며, 이는 사실상 단체가 "서구 아방가르드 예술과의 암묵적인 연관성을 통해 검열박해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일종의 술책"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반공주의적, 친미적,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이 급속한 산업화를 목표로 하고 세계 무대에서 더 발전된 국가들을 따라잡으려 했기 때문이다.[4]

5. 4. 긍정적 평가

AG 그룹의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중요성은 예술적 실천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직적인 글쓰기와 출판 노력에 있다.[2] 이는 단체 구성원인 예술가와 평론가 사이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가능했으며, 전람회 도록과 저널 형태의 이론적 텍스트 출판으로 구체화되었다. 1961년부터 한국 예술가들이 참여하기 시작한 파리 비엔날레에서 영감을 받아, AG 그룹은 젊은 아방가르드 및 실험 예술가들을 위한 국제적인 규모의 플랫폼을 만들고자 하는 목표를 설정하며 다른 단체들과 차별화되었다.[2] 이러한 노력은 한국 현대 미술계가 새로운 예술 매체 개념에 기반한 다양한 실천을 포용하고, 구상 미술과 추상 미술이라는 기존의 제한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나는 데 기여했다.[2]

6. 한국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

AG 그룹의 창립은 새로운 실험적 표현 방식을 시도하는 예술가들의 다양한 시도를 따라 대한민국 현대 미술사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 왔다.[2] 구체적으로 AG 그룹은 1950년대 중반의 한국 앵포르멜 운동과 1970년대 중반의 단색화 회화 및 민중미술 운동 사이에 활동했는데, 이 시기는 학자들이 뚜렷한 주류 미술 운동이 없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때이다.[1][2]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20세기 초 한국이 서양 미술과 문화를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에 도입되었다. 1920년대에는 '신흥'과 '전위'라는 용어가 가장 새로운 형태의 표현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으며, 이는 일반적으로 추상 회화로 이해되었고 이후에는 특정 사회적 가치, 특히 프롤레타리아를 옹호하는 작업에 사용되었다.[2] 이후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전후 예술가들은 앵포르멜추상표현주의를 받아들여, 사실주의적 아카데미즘과 국전의 보수성에 반대했다.[2] 이 시기에 창립된 예술가 단체로는 현대미술가협회와 1960년미술협회가 있었으며, 이들은 나중에 통합되어 악튜엘이 되었다.[2]

이들 앵포르멜 세대의 주도적인 예술가들이 점차 교육 기관에 자리를 잡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끄는 대한민국 제3공화국 아래에서 앵포르멜 운동이 제도권에 편입되며 점차 활력을 잃자, 또 다른 세대의 예술가들이 새로운 전환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2] 오리진, 제로그룹/무동인, 신전동인과 같은 소규모 예술가 단체들은 서구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기하학적 추상, 설치 미술, 퍼포먼스 아트와 같은 새로운 장르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1967년, 이 예술가들은 기성 미술계, 특히 국전과 기존 앵포르멜 운동에 도전하기 위해 한국청년작가연합전을 개최했다. 그들의 선언문은 "앵포르멜은 지난 10년 동안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했다. 우리는 추상 이후의 예술, 일상생활 속의 예술, 대중 친화적인 예술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활동가로서의 예술가이다"라고 밝히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3] 옵 아트, 기하학적 추상, 조각, 반예술(Anti-Art), 그리고 탈물질(Dematerialization)적 경향의 퍼포먼스 아트가 이 전시회에서 선보였으며, 이는 한국 실험미술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3] 이 시기에 퍼포먼스 아트, 특히 해프닝은 상당한 인기를 얻었으며, 예술가들은 이를 통해 한국의 전통적인 사회적 가치와 문화를 풍자하고 일상생활과 공공장소에 개입하고자 했다.[4] 그러나 대한민국 제4공화국으로 접어들며 강화된 박정희 군사 정권 하에서 이러한 표현 방식은 점차 억압받게 되었다.[4] 1967년에 결성된 제4집단은 공공 해프닝을 통해 한국 현대 미술계 안팎에서 논쟁과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2]

한국 실험 미술을 발전시키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69년 일단의 예술가들이 AG(아방가르드 협회) 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한국청년작가연합전의 정신을 따르면서도 더욱 조직적이고 이론적인 기반을 갖춘 활동을 목표로 했다. AG 그룹은 비평 이론과 담론을 통해 활동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으며, 그 일환으로 1969년 9월 자체 저널인 《AG》를 발행했다. 이는 예술 관련 정기 간행물이나 잡지가 거의 없던 시대에 중요한 성과였다.[1] 그들의 창립 선언문은 "AG는 아방가르드 미술에 대한 강한 의식을 바탕으로, 침체된 한국 미술계에 새로운 조형 질서를 탐구하고 창조함으로써 한국 미술과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고 밝히며 그룹의 지향점을 명확히 했다.[5]

참조

[1] 논문 Arts of Conversion from the 1960s to the 1970s: Focusing on the Group, "AG" 2015
[2] 논문 Korean Avant-garde Movements: Issues and Debates 2010
[3] 웹사이트 Korean Art Multilingual Terms, "Young Artists Coalition Exhibition." https://www.gokams.o[...]
[4] 논문 Manifestations of a Zombie Avant-garde: South Korean Performance and Conceptual Art in the 1970s 2020
[5] 서적 Historicizing the Avant-Garde Contexts in Post-War Korea: From Experimental Arts to Collective Groups in the 1960s and 1970s Phaidon 2020
[6] 논문 "Experimental Art Exhibitions of Korea’s AG(Avant-Garde) Group." 2022-06
[7] 웹사이트 Nucleus: The Origins and Explosive Potential of Art (2) https://www.theartro[...] 2020
[8] 서적 Hangugui silheommisul [한국의 실험미술 Korean Experimental Art] Sigongsa
[9] 웹사이트 Talk02: Kim Ku-lim Like You Know It All https://www.theartro[...] The Artro 2013
[10] 웹사이트 Lee Kang-So's Sensual Semiotics http://hyperallergic[...] 2023-03-28
[11] 웹사이트 Kim Kulim, Kim Youngsung http://english.ocimu[...] OCI Museum 2015
[12] 간행물 Korean Contemporary Art from mid-1960s to mid-1970s: A Decade of Transition and Dynamics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Korea 2001
[13] 서적 Ha Chong Hyun Gana Art Gallery 2008
[14] 논문 "The Defining Scene of Korean Art in the 1970s, ''Seoul Biennale'' (1974) and 'The New Flat'." 2022-06
[15] 웹사이트 Paris Biennale Ends Its Run https://www.artforum[...] 2023-03-28
[16] 웹사이트 Seoul Biennale, 1974 http://korica.org/su[...]
[17] 논문 "Jeonhwanui Misul Geurup AG (전환의 미술, 그룹 'AG' [Art of Transition, Group AG])" 2016-12
[18] 백과사전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 《글로벌 세계 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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