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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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공동으로 역사 연구를 진행하고 상호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구성된 조직이다. 2002년부터 2010년까지 1, 2차에 걸쳐 고대, 중근세, 근현대, 교과서 분과로 나누어 연구를 진행했으며, 임나일본부설 관련 논쟁에서 일부 합의를 도출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연구 결과가 양국 교과서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역사 인식 차이, 정치적 개입, 제도적 미비, 대립 해결 수단 부족 등으로 인해 한계를 보였다. 특히, 대한민국 점령과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역사 해석에서 이견이 지속되었으며, 일부 연구자들은 상대 측의 연구 태도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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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
---|---|
기본 정보 | |
명칭 |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
영문 명칭 | Japan–South Korea Joint History Research Project |
일본어 명칭 | 日韓歴史共同研究 |
약칭 | 역사공동연구위 |
종류 | 위원회 |
목표 | 한일 간의 역사 인식 차이 극복 및 상호 이해 증진 |
설립 및 운영 | |
설립 근거 | 2001년 한일 정상회담 합의 |
설립 시기 | 2005년 |
활동 기간 | 2005년 ~ 2010년 |
연구 범위 |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한일 관계사 |
조직 | 한국 측: 위원장 1명, 간사위원 1명, 연구위원 15명 내외 일본 측: 위원장 1명, 간사위원 1명, 연구위원 15명 내외 |
운영 방식 | 양국 위원회의 공동 연구 및 토론 |
주요 활동 및 결과 | |
주요 활동 | 공동 연구 보고서 발간 심포지엄 개최 역사 자료 교환 |
1기 연구 보고서 발표 | 2005년 6월 |
2기 연구 보고서 발표 | 2010년 3월 |
결과 | 한일 관계사 연구의 심화 및 상호 이해 증진에 기여 |
논란 및 비판 | |
논란 | 연구 결과의 객관성 및 공정성 문제 제기 역사 해석의 차이로 인한 갈등 일본 측의 역사 왜곡 시도 논란 |
비판 | 연구 결과가 양국 국민의 역사 인식에 미치는 영향 미미 정치적 목적에 이용될 가능성 |
관련 단체 | |
한국 측 | 동북아역사재단 |
일본 측 | 내각관방 |
2. 조직
위원회는 양국에서 각 한 명씩, 두 명의 공동위원장이 이끌고 있다. 한국 측 위원장은 조광 고려대학교 교수이고, 일본 측 위원장은 도리우미 야스시 도쿄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위원회 산하에는 고대, 중근세, 근현대사, 교과서 분과위원회가 설치되어 있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양국의 역사 인식 차이를 좁히고 상호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1차(2002~2005년)와 2차(2007~2010년)에 걸쳐 연구를 진행했다.
3. 연구 과정 및 내용
1차 공동 연구는 고대, 중근세, 근현대의 3개 분과로 나누어 진행되었으며, 각 분과별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연구 결과는 보고서 형태로 발표되었으나, 일본 정부가 연구 결과를 일본 교과서에 반영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2005년에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6][7]
2차 공동 연구는 1차 연구의 연장선에서 고대, 중근세, 근현대, 교과서 분과로 나누어 연구를 진행했으며, 양국 역사 교과서 문제에 대한 논의를 포함했다.[7][8]
3. 1. 1차 공동 연구 (2002년 ~ 2005년)
2002년부터 2005년까지 3년간 진행된 1차 공동 연구는 고대, 중근세, 근현대의 3개 분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6][7] 각 분과별 연구 주제는 다음과 같다.
이 연구 결과는 보고서 형태로 발표되었으나, 일본 정부가 연구 결과를 일본 교과서에 반영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2005년에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6][7]
3. 2. 2차 공동 연구 (2007년 ~ 2010년)
2차 공동 연구는 1차 연구의 연장선에서 고대, 중근세, 근현대, 교과서 분과로 나누어 연구를 진행했다.[7] 각 분과는 다음과 같다.
분과 | 주요 연구 주제 |
---|---|
제1분과 (고대) | |
제2분과 (중근세) | |
제3분과 (근현대) |
4. 연구 성과 및 한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양국 학자들이 공동으로 역사 연구를 진행하여 상호 이해를 증진하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역사 인식 차이를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2][3][4][5]
임나일본부설 논쟁에서 양측이 "임나일본부"라는 용어가 4세기에는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하는 등 일부 합의는 있었으나,[2][3][4][5] 이러한 합의가 역사 교과서에 정확한 정보를 반영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었다.[6] 조광 한국 측 위원장은 교과서 출판사에 임나일본부에 대한 부분을 삭제해 달라고 일본 정부에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역사학자들의 권고는 법적 구속력이 없었다.[6]
연구는 3개의 분과와 교과서 소그룹으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각 분과별 주요 연구 주제는 다음과 같다.
분과 | 주요 연구 주제 |
---|---|
제1분과 (고대) | |
제2분과 (중근세) | |
제3분과 (근현대) | |
교과서 소그룹 |
연구 결과가 양국 역사 교과서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일본 정부가 연구 결과를 자국 교과서에 반영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연구가 중단되기도 했다.[6][7] 이는 양국 간 역사 인식 차이, 특히 식민 지배와 관련된 역사 해석의 불일치가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준다.
일부 한국 측 연구자들은 일본 측 연구자들의 태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제기하기도 했다. 반면 일본 측 연구자들은 한국 측 연구자들이 민족 감정에 치우쳐 객관적인 자료 분석을 소홀히 한다고 비판했다. 제2회 연구에서는 한국 측의 요구로 교과서 문제가 연구 주제에 추가되었지만, 한국 측이 사전 통보 없이 교과서 문제를 고대사 연구 주제에 추가하려 하는 등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12]
기무라 간은 연구가 불성공으로 끝난 주요 원인으로 "한일 간의 정치적 의도의 개입", "공동 연구의 제도적 미비", "대립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 준비 부족(만장일치 또는 다수결과 같은 기본적인 규칙조차 존재하지 않았다)"을 꼽았다.
4. 1. 성과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양국 학자들이 공동으로 역사 연구를 진행하여 상호 이해를 증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2][3][4][5] 다양한 주제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학술적 성과를 축적했다. 특히, 임나일본부설 논쟁에서 양측이 "임나일본부"라는 용어가 4세기에는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하는 등 일부 합의를 도출했다.[2][3][4][5]그러나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역사 교과서에 정확한 정보를 반영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었다.[6] 한국 측 위원장인 조광은 교과서 출판사에 임나일본부에 대한 부분을 삭제해 달라고 일본 정부에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역사학자들의 권고는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6]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3개의 분과와 교과서 소그룹으로 나뉘어 연구를 진행했다. 각 분과별 주요 연구 주제는 다음과 같다.
분과 | 주요 연구 주제 |
---|---|
제1분과 (고대) | |
제2분과 (중근세) | |
제3분과 (근현대) | |
교과서 소그룹 |
4. 2. 한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양국 간 역사 인식 차이를 좁히기 위해 노력했지만, 몇 가지 한계를 드러냈다.연구 결과가 양국 역사 교과서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일본 정부가 연구 결과를 자국 교과서에 반영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연구가 중단되기도 했다.[6][7] 이는 양국 간 역사 인식 차이, 특히 식민 지배와 관련된 역사 해석의 불일치가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준다.
한국 측 연구자들은 일본 측 연구자들의 태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제기하기도 했다. 후루타 히로시(고[古田博司])는 한국 측 연구자들이 민족 감정에 치우쳐 객관적인 자료 분석을 소홀히 한다고 비판했다.[11]
일본 측 연구자들은 한국 측 연구자들이 민족 감정에 치우쳐 객관적인 자료 분석을 소홀히 한다고 비판했다. 제2회 연구에서는 한국 측의 요구로 교과서 문제가 연구 주제에 추가되었지만, 일본 측 위원이었던 나가시마 히로키([永島広紀])에 따르면, 한국 측이 사전 통보 없이 교과서 문제를 고대사 연구 주제에 추가하려 하는 등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12]
기무라 간(기무라 간)은 연구가 불성공으로 끝난 주요 원인으로 "한일 간의 정치적 의도의 개입", "공동 연구의 제도적 미비", "대립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 준비 부족(만장일치 또는 다수결과 같은 기본적인 규칙조차 존재하지 않았다)"을 꼽았다.
5. 평가 및 비판
이덕일은 그의 저서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한반도 고대사 연대를 이병도의 주장보다 더 후퇴시켜 놓았다고 주장했다.[14]
기무라 간은 연구가 불성공으로 끝난 주요 원인으로 다음 세 가지를 꼽았다.
- 한일 간의 정치적 의도 개입
- 공동 연구의 제도적 미비
- 대립 해결 수단 준비 부족 (만장일치 또는 다수결 같은 기본적인 규칙조차 없었다)
고[古田博司]에 따르면, 한일 양측의 의견이 대립했을 때, 일본 측이 "자료를 보십시오"라고 하면, 한국 측은 "한국에 대한 애정은 없는가!"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일본 측이 다시 "자료를 봐달라"고 하면, "자료는 그렇지만"이라고 중얼거리며, "연구자로서의 양심은 있는가!"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한국 측 연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평가했다.[11]
- 민족적 감정을 만족시키는 스토리가 먼저 있고, 거기에 유리한 자료를 갖다 붙이는 것뿐이므로, 다양한 자료를 검토하면 모순, 결락, 오독이 많이 나온다.
- '자신이 옳다'는 데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으며, 그 본질은 '자기 절대 정의'에 다름없고, 따라서 무엇을 하든 그들의 '정의'는 흔들리지 않는다.
제2회 연구에서는, 한국 측의 요구로 교과서가 연구 주제에 추가되었지만, 교과서 소그룹의 일본 측 위원 중 한 명이었던 永島広紀에 따르면, 한국 측에서는 일본 측에 사전 통보 없이 교과서 문제를 고대사 연구 주제에 추가하려 하는 등, 교과서 담당 이외의 그룹이 교과서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일본 측이 항의하자, 한국 측의 고대사 담당자 중 한 명이 "인격 공격을 받았다"고 말하며, 장기간 회합이 분규를 겪기도 했다고 한다. 永島広紀에 따르면, 한국 측 연구자는 후소샤(扶桑社)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 대한 공격에 종종 매달렸다.[12]
5. 1. 비판적 평가
이덕일은 그의 저서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한반도 고대사 연대를 (자신이 식민사학자라고 비판하는) 이병도 주장조차 무색케 할 정도로 더 후퇴시켜 놓았다고 주장했다.[14]기무라 간은 연구가 불성공으로 끝난 주요 원인으로 "한일 간의 정치적 의도의 개입", "공동 연구의 제도적 미비", "대립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 준비 부족(만장일치 또는 다수결과 같은 기본적인 규칙조차 존재하지 않았다)"의 세 가지를 꼽았다.
고[古田博司]에 따르면, 한일 양측의 의견이 대립했을 때, 일본 측이 "자료를 보십시오"라고 말하면, 한국 측은 벌떡 일어나 "한국에 대한 애정은 없는가!"라고 고함을 지르고, 일본 측이 다시 "자료를 봐달라"고 말하면, "자료는 그렇지만"이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연구자로서의 양심은 있는가!"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한국 측 연구자에 대해 "민족적 감정을 만족시키는 스토리가 먼저 있고, 거기에 유리한 자료를 갖다 붙이는 것뿐이므로, 그 외의 다양한 자료를 검토해나가면, 모순, 결락, 오독이 많이 나온다", "요컨대 '자신이 옳다'는 데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으며, 그 본질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 절대 정의'에 다름없고, 따라서 무엇을 하든 그들의 '정의'는 흔들리지 않는다" 등등, 비판적으로 평가했다.[11]
제2회 연구에서는, 한국 측의 요구에 의해 교과서가 연구 주제에 추가되었지만, 교과서 소그룹의 일본 측 위원 중 한 명이었던 [永島広紀]에 따르면, 한국 측에서는 일본 측에 사전 통보 없이 교과서 문제를 고대사 연구 주제에 추가하려 하는 등, 교과서 담당 이외의 그룹이 교과서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일본 측이 항의하자, 한국 측의 고대사 담당자 중 한 명이 "인격 공격을 받았다"고 말하며, 장기간 회합이 분규를 겪기도 했다고 한다. [永島広紀]에 따르면, 한국 측 연구자는 후소샤(扶桑社)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 대한 공격에 종종 매달렸다.[12]
참조
[1]
웹사이트
Disclosure of the Report by the Japan-ROK Joint History Research Committee
http://www.mofa.go.j[...]
MOFA
2012-09-03
[2]
웹사이트
日韓歴史研究報告書の要旨 - 47News(よんななニュース)
http://www.47news.jp[...]
2015-11-01
[3]
웹사이트
第1分科会(古代史)篇 | 公益財団法人 日韓文化交流基金 ウェブサイト
http://www.jkcf.or.j[...]
2015-11-01
[4]
문서
http://www.jkcf.or.j[...]
[5]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jkcf.or.j[...]
2015-11-01
[6]
웹사이트
Japan office never existed in 4th century-INSIDE Korea JoongAng Daily
http://koreajoongang[...]
Koreajoongangdaily.joinsmsn.com
2012-09-03
[7]
웹사이트
S.K.-Japan joint history project to be revived : International : Home
http://english.hani.[...]
The Hankyoreh
2012-09-03
[8]
웹사이트
Panel still bickers over history issues - English
http://www.asahi.com[...]
The Asahi Shimbun
2012-09-03
[9]
문서
財団法人日韓文化交流基金、第1回日韓歴史共同研究報告書
http://www.jkcf.or.j[...]
[10]
문서
財団法人日韓文化交流基金、第2回日韓歴史共同研究報告書
http://www.jkcf.or.j[...]
[11]
서적
韓流「自己絶対正義」の心理構造
[[文藝春秋]]
2006-04
[12]
간행물
中韓が歴史共同研究 確信犯で嘘の主張押し通そうとするつもり (1/2)
http://www.news-post[...]
[[NEWSポストセブン]]
2015-02-09
[13]
뉴스
한일역사공동위 산하 교과서 위원회 신설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14]
뉴스
식민사학 ‘만리장성’ 요동 밖으로 물렀거라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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