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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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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공동으로 역사 연구를 진행하고 상호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구성된 조직이다. 2002년부터 2010년까지 1, 2차에 걸쳐 고대, 중근세, 근현대, 교과서 분과로 나누어 연구를 진행했으며, 임나일본부설 관련 논쟁에서 일부 합의를 도출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연구 결과가 양국 교과서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역사 인식 차이, 정치적 개입, 제도적 미비, 대립 해결 수단 부족 등으로 인해 한계를 보였다. 특히, 대한민국 점령과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역사 해석에서 이견이 지속되었으며, 일부 연구자들은 상대 측의 연구 태도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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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기본 정보
명칭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영문 명칭Japan–South Korea Joint History Research Project
일본어 명칭日韓歴史共同研究
약칭역사공동연구위
종류위원회
목표한일 간의 역사 인식 차이 극복 및 상호 이해 증진
설립 및 운영
설립 근거2001년 한일 정상회담 합의
설립 시기2005년
활동 기간2005년 ~ 2010년
연구 범위고대부터 근대까지의 한일 관계사
조직한국 측: 위원장 1명, 간사위원 1명, 연구위원 15명 내외
일본 측: 위원장 1명, 간사위원 1명, 연구위원 15명 내외
운영 방식양국 위원회의 공동 연구 및 토론
주요 활동 및 결과
주요 활동공동 연구 보고서 발간
심포지엄 개최
역사 자료 교환
1기 연구 보고서 발표2005년 6월
2기 연구 보고서 발표2010년 3월
결과한일 관계사 연구의 심화 및 상호 이해 증진에 기여
논란 및 비판
논란연구 결과의 객관성 및 공정성 문제 제기
역사 해석의 차이로 인한 갈등
일본 측의 역사 왜곡 시도 논란
비판연구 결과가 양국 국민의 역사 인식에 미치는 영향 미미
정치적 목적에 이용될 가능성
관련 단체
한국 측동북아역사재단
일본 측내각관방

2. 조직

위원회는 양국에서 각 한 명씩, 두 명의 공동위원장이 이끌고 있다. 한국 측 위원장은 조광 고려대학교 교수이고, 일본 측 위원장은 도리우미 야스시 도쿄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위원회 산하에는 고대, 중근세, 근현대사, 교과서 분과위원회가 설치되어 있다.

3. 연구 과정 및 내용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양국의 역사 인식 차이를 좁히고 상호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1차(2002~2005년)와 2차(2007~2010년)에 걸쳐 연구를 진행했다.

1차 공동 연구는 고대, 중근세, 근현대의 3개 분과로 나누어 진행되었으며, 각 분과별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연구 결과는 보고서 형태로 발표되었으나, 일본 정부가 연구 결과를 일본 교과서에 반영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2005년에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6][7]

2차 공동 연구는 1차 연구의 연장선에서 고대, 중근세, 근현대, 교과서 분과로 나누어 연구를 진행했으며, 양국 역사 교과서 문제에 대한 논의를 포함했다.[7][8]

3. 1. 1차 공동 연구 (2002년 ~ 2005년)

2002년부터 2005년까지 3년간 진행된 1차 공동 연구는 고대, 중근세, 근현대의 3개 분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6][7] 각 분과별 연구 주제는 다음과 같다.

  • 제1분과 (고대)
  • 하마다 코사쿠 - 「4세기 한일 관계」
  • 김태식 - 「4세기 한일 관계사 - 광개토왕릉비문의 왜군 문제를 중심으로 -」
  • 이시이 마사토시 - 「5세기 한일 관계 - 왜(倭)의 오왕(五王)과 고구려·백제 -」
  • 노중국 - 「5세기 한일 관계사 - 『송서』 왜국전(倭國傳)의 검토 -」
  • 사토 신 - 「6세기의 왜와 한반도 제국」
  • 김현구 - 「6세기 한일 관계 - 교류 시스템을 중심으로 -」
  • 하마다 코사쿠 - 「고대 한일 관계의 성립 - 지역 간 교류에서 고대 국가의 관계로 -」
  • 조법종 - 「고대 한일 관계의 성립 - 야요이 문화의 주체 문제에 대한 검토 -」
  • 모리 마사아키・하마다 고사쿠 - 「고대 왕권의 성장과 한일 관계 - 4~6세기 -」
  • 김태식 - 「고대 왕권의 성장과 한일 관계 - 임나 문제를 포함하여 -」
  • 사카가미 야스토시・모리 마사아키 - 「고대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재편과 한일 관계 - 7~9세기 -」
  • 노태돈 - 「고대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재편과 한일 관계 - 7~9세기 -」

  • 제2분과 (중근세)
  • 다시로 가즈오 외 - 「위사(僞使)」
  • 롯폰다 토요 외 - 「문록·경장의 역(임진왜란)
  • 요시다 미츠오 외 - 「조선 통신사 (중세편) (근세편)」
  • 이토 코지 - 「일조(日朝) 관계에 있어서 위사의 시대」
  • 하시모토 유 - 「조선 국왕사(國王使)와 무로마치 막부
  • 미타니 히토시 - 「조선 침략 전야의 일본 정보」
  • 롯폰다 토요 - 「문록·경장의 역(임진왜란) 개전 초기의 조선 측 군량 조달과 그 수송」
  • 요시다 미츠오 - 「일본에 있어서 한국 중근세사 연구 교육 기반 - 대학·학계·연구 도구 -」
  • 다시로 가즈오 - 「조선 국서·서계의 원본 데이터」
  • 한문종 - 「위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 박석현 - 「임진왜란 연구의 현황과 과제」
  • 장순순 - 「통신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 한문종 - 「조선 전기의 왜인 통제책과 통교 위반자의 처리」
  • 정구복 - 「임진왜란의 역사적 의미 - 임진왜란에 대한 한·일 양국의 역사 인식 -」
  • 홍성덕 - 「조선 후기에 있어서 대일 외교 사행과 왜학 역관」
  • 손승철 - 「중·근세의 한일 관계사에 관한 인식의 공통점과 상이점」
  • 조광 - 「통신사에 관한 한국 학계의 연구 성과와 쟁점 사항」
  • 사 에키 히로시 - 「14-15세기 동아시아의 해역 세계와 한일 관계」
  • 손승철 - 「14-15세기 동아시아 해역 세계와 한일 관계 - 왜구의 구성 문제를 포함 -」
  • 쿠와노 에이지 - 「동아시아 세계와 임진왜란 - 조선, 류큐, 일본에서의 대명 외교 의례의 관점에서 -」
  • 이계황 - 「한국과 일본 학계의 임진왜란 원인론에 관하여」
  • 스가와 히데노리 - 「17-18세기의 동아시아 세계와 한일 관계 - 글로벌 히스토리와의 접속 -」
  • 한명기 - 「17-18세기의 동아시아 세계와 한일 관계 - 왜관 문제를 둘러싼 대일 인식을 중심으로 -」
  • 모리히라 마사히코 - 「10세기~13세기 전반의 한일 관계사 연구의 제 문제 - 일본어에 의한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
  • 이재범 - 「고려 전기 한일 관계사 연구 현황」
  • 나카다 미노루 - 「일본의 왜구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 김보한 - 「한국 내 왜구 연구의 학술사적 검토」
  • 아라키 카즈노리 - 「16세기 한일 교류사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 한문종 - 「조선 전기 한일 관계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 2000년~2007년의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
  • 나카노 히토시 - 「임진왜란 연구의 학설사적 검토」
  • 노영구 - 「임진왜란의 학설사적 검토 - 한국의 연구를 중심으로 -」
  • 야마구치 카요 - 「일본의 왜관 연구의 동향」
  • 사 에키 히로시・스가와 히데노리・쿠와노 에이지 편 - 「중세・근세 한일 관계사료 해제집」
  • 손승철・김강일・이상훈 - 「중・근세 한일 관계사료 해제집」

  • 제3분과 (근현대)
  • 사카모토 시게키 - 「한일 간의 제 조약의 문제 - 국제법학의 관점에서」
  • 정창렬 - 「을사조약·한일 병합 조약의 유·무효론과 역사 인식」
  • 이상찬 - 「(보론) 1900년대 초, 한일 간의 제 조약 불성립 재론」
  • 하라다 타마키 -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와 그 근대화 - 조선과 베트남 -」
  • 장인성 - 「근대 동아시아 국제 질서와 근대화」
  • 사사키 아게루 - 「노·조선 관계청일 전쟁
  • 조명철 - 「20세기 초 일본의 대륙 정책과 한국 문제」
  • 모리야마 시게노리 - 「식민지 통치와 조선인의 대응」
  • 서중석 - 「일제의 조선 강점과 한국의 독립운동
  • 기무라 겐지 - 「중일 전쟁 전후의 조선에 있어서 '과학적 경영법'의 도입」
  • 이노우에 카즈에 - 「한국 '신여성'과 '근대'의 만남」
  • 하야시 히로시게 - 「경성의 5대 백화점의 융성과, 그것을 지탱한 대중 소비 사회의 검증 - 주로 쇼와 초부터 동 15년 전후까지 -」
  • 전우용 - 「식민지 도시 이미지와 문화 현상 - 1920년대의 경성 -」
  • 호리 카즈오 - 「일본 자본주의와 식민지 경제 - 무역면에서 본 특질」
  • 허수열 - 「일제 하 조선 경제의 발전과 조선인 경제」
  • 기무라 간 - 「총력전 체제기의 조선 반도에 관한 고찰 - 인적 동원을 중심으로 -」
  • 정재정 - 「일제 하 조선에 있어서 국가 총력전 체제와 조선인의 생활 - '황국신민의 연성'을 중심으로 -」
  • 토베 료이치 - 「조선 주둔 일본군의 실상 : 치안·방위·제국」
  • 강창일 - 「조선 침략과 지배의 물리적 기반으로서의 조선군」
  • 쿠라타 히데야 - 「한미일 안보 협력의 기원 - '한국 조항' 전사의 해석적 재검토 -」
  • 츠카모토 타카시 - 「(보론) 한일기본조약을 둘러싼 논의」
  • 유병용 - 「한일 협정한일 관계 개선의 방향」
  • 야나기마치 이사오 - 「전후 한일 경제 관계의 형성에 있어서 양국 재계인의 역할」
  • 정진성 - 「1950년대의 한일 경제 관계 - 한일 무역을 중심으로 -」
  • 오코노기 마사오 - 「전후 북일 관계의 전개 - 해석적인 검토 -」
  • 도진순 -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탈냉전의 환(링), 조일 국교 정상화 교섭의 역사와 한계」
  • 김성보 - 「(보론) 전후의 동북아시아 질서와 조일 관계」
  • 나가시마 히로키 - 「일본에 있어서 근현대 한일 관계사 연구」
  • 이만열 - 「근현대 한일 관계 연구사 - 일본인의 한국사 연구를 중심으로 -」
  • 후루타 히로시 - 「'상호 인식' 동아시아·이데올로기와 일본의 아시아주의」
  • 김도형 - 「개항 후 근대 개혁론의 동향과 일본 인식」
  • 하라다 칸 - 「대한제국 국제와 제2차 한일 협약 반대 운동 - 대한제국의 국가의 모습 -」
  • 주진오 - 「19세기 말 조선의 자주와 독립」
  • 츠키아시 타츠히코 - 「근대 조선의 국민 국가 창출과 입헌군주제론」
  • 조성윤 - 「개항 초기 서울 지역 민중의 근대적 국민 의식 형성 과정과 반일 의식」
  • 오카모토 마키코 - 「조선총독부 관료의 민족 구성에 관한 기초적 연구 - 민족 문제와 민족 격차의 내포 -」
  • 유승렬 - 「일제하 조선 통치 세력의 지배 이데올로기 조작과 강제」
  • 야마다 히로토 - 「식민지 조선에서의 근대화와 일본어 교육」
  • 정태헌 - 「식민지 자본주의의 실체와 역사적 성격」
  • 아리마 마나부 - 「1930~40년대 일본에서의 문화 표상 속의 <조선인> - 영상 자료를 단서로 -」
  • 정혜경 - 「송출 과정을 중심으로 본 전시 체제기 조선인의 국외 노무 동원의 성격」
  • 요시오카 히데미 - 「한일 경제 관계의 새로운 전개 - 2000년대의 구조 변화를 중심으로 -」
  • 허영란 - 「해방 이후 식민지 법률의 정리와 탈식민지화 - "구 법령" 정리 사업과 시장 관계 법령의 개편을 중심으로 -」
  • 키미야 마사시 -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에서의 청구권 문제 재고」
  • 이석우 - 「연합군 최고사령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그리고 한일 외교 관계의 구축」
  • 야마나카 치에 - 「"고작 만화"를 통해 보이는 한일 사회란」
  • 이성환 - 「식민지의 기억과 일본 대중문화의 유입, 그리고 한일 관계
  • 오니시 유타카 - 「제국의 형성・해체와 주민 관리」
  • 하종문 - 「일본 본토 거주 조선인의 생활과 "동원"」
  • 하루키 이쿠미 - 「근대 일본과 조선의 현모양처주의」
  • 양현아 - 「식민지 시기 한국 가족법에서 본 가부장제의 국가 제도화와 "관습" 문제」

  • 교과서 소그룹
  • 야마우치 마사유키・후루타 히로시 - 「근대 일본에서의 동아시아 공통 문화론의 궤적 - 아시아주의와 세계사 교과서 -」
  • 정재정 - 「한국과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그려진 근대의 초상 - "15년 전쟁"과 "식민지 조선" -」
  • 정진성 - 「한일 근대사 서술의 젠더 편향성의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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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 결과는 보고서 형태로 발표되었으나, 일본 정부가 연구 결과를 일본 교과서에 반영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2005년에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6][7]

3. 2. 2차 공동 연구 (2007년 ~ 2010년)

2차 공동 연구는 1차 연구의 연장선에서 고대, 중근세, 근현대, 교과서 분과로 나누어 연구를 진행했다.[7] 각 분과는 다음과 같다.

분과주요 연구 주제
제1분과 (고대)
제2분과 (중근세)
제3분과 (근현대)



2차 연구는 양국 역사 교과서 문제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여 진행되었다.[8]

4. 연구 성과 및 한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양국 학자들이 공동으로 역사 연구를 진행하여 상호 이해를 증진하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역사 인식 차이를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2][3][4][5]

임나일본부설 논쟁에서 양측이 "임나일본부"라는 용어가 4세기에는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하는 등 일부 합의는 있었으나,[2][3][4][5] 이러한 합의가 역사 교과서에 정확한 정보를 반영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었다.[6] 조광 한국 측 위원장은 교과서 출판사에 임나일본부에 대한 부분을 삭제해 달라고 일본 정부에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역사학자들의 권고는 법적 구속력이 없었다.[6]

연구는 3개의 분과와 교과서 소그룹으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각 분과별 주요 연구 주제는 다음과 같다.

분과주요 연구 주제
제1분과 (고대)
제2분과 (중근세)
제3분과 (근현대)
교과서 소그룹



연구 결과가 양국 역사 교과서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일본 정부가 연구 결과를 자국 교과서에 반영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연구가 중단되기도 했다.[6][7] 이는 양국 간 역사 인식 차이, 특히 식민 지배와 관련된 역사 해석의 불일치가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준다.

일부 한국 측 연구자들은 일본 측 연구자들의 태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제기하기도 했다. 반면 일본 측 연구자들은 한국 측 연구자들이 민족 감정에 치우쳐 객관적인 자료 분석을 소홀히 한다고 비판했다. 제2회 연구에서는 한국 측의 요구로 교과서 문제가 연구 주제에 추가되었지만, 한국 측이 사전 통보 없이 교과서 문제를 고대사 연구 주제에 추가하려 하는 등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12]

기무라 간은 연구가 불성공으로 끝난 주요 원인으로 "한일 간의 정치적 의도의 개입", "공동 연구의 제도적 미비", "대립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 준비 부족(만장일치 또는 다수결과 같은 기본적인 규칙조차 존재하지 않았다)"을 꼽았다.

4. 1. 성과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양국 학자들이 공동으로 역사 연구를 진행하여 상호 이해를 증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2][3][4][5] 다양한 주제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학술적 성과를 축적했다. 특히, 임나일본부설 논쟁에서 양측이 "임나일본부"라는 용어가 4세기에는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하는 등 일부 합의를 도출했다.[2][3][4][5]

그러나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역사 교과서에 정확한 정보를 반영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었다.[6] 한국 측 위원장인 조광은 교과서 출판사에 임나일본부에 대한 부분을 삭제해 달라고 일본 정부에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역사학자들의 권고는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이다.[6]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3개의 분과와 교과서 소그룹으로 나뉘어 연구를 진행했다. 각 분과별 주요 연구 주제는 다음과 같다.

분과주요 연구 주제
제1분과 (고대)
제2분과 (중근세)
제3분과 (근현대)
교과서 소그룹


4. 2. 한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양국 간 역사 인식 차이를 좁히기 위해 노력했지만, 몇 가지 한계를 드러냈다.

연구 결과가 양국 역사 교과서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일본 정부가 연구 결과를 자국 교과서에 반영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연구가 중단되기도 했다.[6][7] 이는 양국 간 역사 인식 차이, 특히 식민 지배와 관련된 역사 해석의 불일치가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준다.

한국 측 연구자들은 일본 측 연구자들의 태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제기하기도 했다. 후루타 히로시(고[古田博司])는 한국 측 연구자들이 민족 감정에 치우쳐 객관적인 자료 분석을 소홀히 한다고 비판했다.[11]

일본 측 연구자들은 한국 측 연구자들이 민족 감정에 치우쳐 객관적인 자료 분석을 소홀히 한다고 비판했다. 제2회 연구에서는 한국 측의 요구로 교과서 문제가 연구 주제에 추가되었지만, 일본 측 위원이었던 나가시마 히로키([永島広紀])에 따르면, 한국 측이 사전 통보 없이 교과서 문제를 고대사 연구 주제에 추가하려 하는 등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12]

기무라 간(기무라 간)은 연구가 불성공으로 끝난 주요 원인으로 "한일 간의 정치적 의도의 개입", "공동 연구의 제도적 미비", "대립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 준비 부족(만장일치 또는 다수결과 같은 기본적인 규칙조차 존재하지 않았다)"을 꼽았다.

5. 평가 및 비판

이덕일은 그의 저서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한반도 고대사 연대를 이병도의 주장보다 더 후퇴시켜 놓았다고 주장했다.[14]

기무라 간은 연구가 불성공으로 끝난 주요 원인으로 다음 세 가지를 꼽았다.


  • 한일 간의 정치적 의도 개입
  • 공동 연구의 제도적 미비
  • 대립 해결 수단 준비 부족 (만장일치 또는 다수결 같은 기본적인 규칙조차 없었다)


고[古田博司]에 따르면, 한일 양측의 의견이 대립했을 때, 일본 측이 "자료를 보십시오"라고 하면, 한국 측은 "한국에 대한 애정은 없는가!"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일본 측이 다시 "자료를 봐달라"고 하면, "자료는 그렇지만"이라고 중얼거리며, "연구자로서의 양심은 있는가!"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한국 측 연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평가했다.[11]

  • 민족적 감정을 만족시키는 스토리가 먼저 있고, 거기에 유리한 자료를 갖다 붙이는 것뿐이므로, 다양한 자료를 검토하면 모순, 결락, 오독이 많이 나온다.
  • '자신이 옳다'는 데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으며, 그 본질은 '자기 절대 정의'에 다름없고, 따라서 무엇을 하든 그들의 '정의'는 흔들리지 않는다.


제2회 연구에서는, 한국 측의 요구로 교과서가 연구 주제에 추가되었지만, 교과서 소그룹의 일본 측 위원 중 한 명이었던 永島広紀에 따르면, 한국 측에서는 일본 측에 사전 통보 없이 교과서 문제를 고대사 연구 주제에 추가하려 하는 등, 교과서 담당 이외의 그룹이 교과서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일본 측이 항의하자, 한국 측의 고대사 담당자 중 한 명이 "인격 공격을 받았다"고 말하며, 장기간 회합이 분규를 겪기도 했다고 한다. 永島広紀에 따르면, 한국 측 연구자는 후소샤(扶桑社)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 대한 공격에 종종 매달렸다.[12]

5. 1. 비판적 평가

이덕일은 그의 저서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한반도 고대사 연대를 (자신이 식민사학자라고 비판하는) 이병도 주장조차 무색케 할 정도로 더 후퇴시켜 놓았다고 주장했다.[14]

기무라 간은 연구가 불성공으로 끝난 주요 원인으로 "한일 간의 정치적 의도의 개입", "공동 연구의 제도적 미비", "대립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 준비 부족(만장일치 또는 다수결과 같은 기본적인 규칙조차 존재하지 않았다)"의 세 가지를 꼽았다.

고[古田博司]에 따르면, 한일 양측의 의견이 대립했을 때, 일본 측이 "자료를 보십시오"라고 말하면, 한국 측은 벌떡 일어나 "한국에 대한 애정은 없는가!"라고 고함을 지르고, 일본 측이 다시 "자료를 봐달라"고 말하면, "자료는 그렇지만"이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연구자로서의 양심은 있는가!"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한국 측 연구자에 대해 "민족적 감정을 만족시키는 스토리가 먼저 있고, 거기에 유리한 자료를 갖다 붙이는 것뿐이므로, 그 외의 다양한 자료를 검토해나가면, 모순, 결락, 오독이 많이 나온다", "요컨대 '자신이 옳다'는 데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으며, 그 본질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 절대 정의'에 다름없고, 따라서 무엇을 하든 그들의 '정의'는 흔들리지 않는다" 등등, 비판적으로 평가했다.[11]

제2회 연구에서는, 한국 측의 요구에 의해 교과서가 연구 주제에 추가되었지만, 교과서 소그룹의 일본 측 위원 중 한 명이었던 [永島広紀]에 따르면, 한국 측에서는 일본 측에 사전 통보 없이 교과서 문제를 고대사 연구 주제에 추가하려 하는 등, 교과서 담당 이외의 그룹이 교과서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일본 측이 항의하자, 한국 측의 고대사 담당자 중 한 명이 "인격 공격을 받았다"고 말하며, 장기간 회합이 분규를 겪기도 했다고 한다. [永島広紀]에 따르면, 한국 측 연구자는 후소샤(扶桑社)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에 대한 공격에 종종 매달렸다.[12]

참조

[1] 웹사이트 Disclosure of the Report by the Japan-ROK Joint History Research Committee http://www.mofa.go.j[...] MOFA 2012-09-03
[2] 웹사이트 日韓歴史研究報告書の要旨 - 47News(よんななニュース) http://www.47news.jp[...] 2015-11-01
[3] 웹사이트 第1分科会(古代史)篇 | 公益財団法人 日韓文化交流基金 ウェブサイト http://www.jkcf.or.j[...] 2015-11-01
[4] 문서 http://www.jkcf.or.j[...]
[5]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jkcf.or.j[...] 2015-11-01
[6] 웹사이트 Japan office never existed in 4th century-INSIDE Korea JoongAng Daily http://koreajoongang[...] Koreajoongangdaily.joinsmsn.com 2012-09-03
[7] 웹사이트 S.K.-Japan joint history project to be revived : International : Home http://english.hani.[...] The Hankyoreh 2012-09-03
[8] 웹사이트 Panel still bickers over history issues - English http://www.asahi.com[...] The Asahi Shimbun 2012-09-03
[9] 문서 財団法人日韓文化交流基金、第1回日韓歴史共同研究報告書 http://www.jkcf.or.j[...]
[10] 문서 財団法人日韓文化交流基金、第2回日韓歴史共同研究報告書 http://www.jkcf.or.j[...]
[11] 서적 韓流「自己絶対正義」の心理構造 [[文藝春秋]] 2006-04
[12] 간행물 中韓が歴史共同研究 確信犯で嘘の主張押し通そうとするつもり (1/2) http://www.news-post[...] [[NEWSポストセブン]] 2015-02-09
[13] 뉴스 한일역사공동위 산하 교과서 위원회 신설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14] 뉴스 식민사학 ‘만리장성’ 요동 밖으로 물렀거라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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