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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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영중은 일본 오사카 출신의 사업가로, 부동산 및 주식 투자로 일본 지하 경제의 거물로 성장했다. 그는 1990년 이토만 사건을 일으켜 회사 자금을 횡령하고 뇌물을 공여한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2012년 한국으로 이송되어 복역 후 가석방되었으며, 저서 『해협에 서다: 진흙과 피로 얼룩진 나의 반생』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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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영중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인물 정보 | |
| 이름 | 허영중 |
| 원어 이름 | 許永中 |
| 다른 이름 | 노무라 에이추 (野村 永中), 후지타 에이추 (藤田 永中) |
| 출생일 | 1947년 2월 24일 |
| 출생지 | 일본 오사카시 주오구 나카자키 |
| 국적 | 대한민국 |
| 직업 | 실업가, 전 오요도 건설 사장 |
| 경력 | |
| 전직 | 오요도 건설 사장 |
2. 생애
일본 오사카시 출신으로 부동산과 주식투자를 통해 일본 지하경제의 거물로 성장하였다. 1990년에는 중견상사 이토만과 관련된 대규모 경제 사건인 이토만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이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3]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오사카시 오요도구 (현 기타구) 나카쓰의 동화 지구와 재일 한국인 지역이 혼재된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왔으며, 통칭으로 湖山|코야마일본어를 사용했다.[2]1959년 (쇼와 34년) 오사카 시립 오요도 중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오사카부립 기타노 고등학교 진학을 목표로 했으나, 교사로부터 합격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목표를 변경하여 1962년 4월 오사카부립 히가시요도가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국립 오사카 대학 진학을 목표로 했지만, 교사로부터 어렵다는 말을 듣고 오사카부립대학으로 목표를 바꾸었으나 입학 시험에 실패했다. 1965년 4월 오사카 공업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대학 졸업자의 초임 월급이 2만 엔이던 시절, 오사카 공업대학의 연간 학비는 20만 엔에 달했으나, 어머니와 누나의 도움으로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3]
오사카 공업대학 재학 중에는 유도부에서 활동했지만, 마작과 파칭코에 빠져 학업을 소홀히 하여 입학 3년 만에 대학을 중퇴했다.
대학 중퇴 후에는 부동산 광고 업체의 비서 겸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실무를 통해 경영학을 익혔다. 이 시기에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 아버지 때부터 사용하던 통칭 '코야마(湖山)'가 재일 한국인임을 드러내 사업상 불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교제 중이던 일본인 아내의 성인 藤田|후지타일본어를 통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2]
2. 2. 사업 활동과 '픽서'로서의 성장
부락해방동맹 간부와 친분을 쌓고 오사카부의 동화대책사업에 관여하였다.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최대의 픽서(fixer)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오타니 타카요시 밑에서 보디가드 겸 운전사로 일하며 픽서로서의 경험을 쌓았다. 1975년에는 휴면 회사였던 오요도 건설을 인수하여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폭력단 야마구치구미의 간부 타쿠미 마사루 등과도 관계를 맺었다.
1984년에는 일본 레이스 주식 매입 사건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의 친동생과 교류하며 한국 정계에도 인맥을 넓혔다.
1989년에는 오사카 한국 청년 상공회를 설립하였다.
2. 3. 이토만 사건
오사카시 출신으로 부동산과 주식투자를 통해 일본 지하경제의 거물로 성장했다. 1990년에는 중견상사 이토만의 임원과 공모하여 회사 자금을 횡령하는, 이른바 이토만 사건을 일으켰다.[13] 이 사건은 헤이세이 초기 버블 경제 시기에 발각된 일본 전후 최대 규모의 경제 부정 경리 사건으로 불린다. 허영중은 이토만을 이용하여 회화 (그림 211점 구매 등)나 골프장 개발 등의 명목으로 부정 경리를 행하여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13] 또한 일본 정관계 인사들에게 뇌물을 공여했다는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기도 했다.[13]결국 1991년 7월 23일, 상법상 특별 배임 및 법인세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기소된 후에는 6억엔의 보석금을 내고 보석되었는데, 이 금액 중 3억엔은 허영중 본인이, 나머지 3억엔은 변호사단이 부담했다.
2. 4. 한국 도피와 체포
1997년 아내 친가의 법요를 이유로 법원의 여행 허가를 받아, 9월 27일부터 10월 1일까지 일정으로 대한민국으로 출국했다. 숙박 예정이었던 서울 신라 호텔에서 쓰러져, 같은 시내의 연세대 부속 세브란스병원 심장내과에 입원한 후 도주했다.[10]이 도주로 인해 보석이 취소되었고, 6억엔의 보석금은 몰수되었다. 이는 당시 사상 최고 몰수액이었다.[4] (이후 카를로스 곤이 2019년 12월 31일에 총 15억엔을 몰수당하며 기록이 갱신되었다.)
2년 후인 1999년 11월 5일에 도쿄도 미나토구의 호텔 그랑퍼시픽 메르디앙에서 신병이 구속되기까지 국내외에서 잠적을 계속했다. 도주 중에 한국에 건너갔다는 증언도 있다.
잠적 중에도 일본 국내에서 가메이 시즈카나 다나카 모리카즈, 마쓰이 쇼케이와 만났다고 전해진다. 가메이는 이를 부정했지만, 다나카는 자서전에서, 마쓰이는 주간지 인터뷰에서 만남을 인정했다. (다나카는 이토만 전무 이토 스에미쓰의 변호인이었으나, 허영중의 변호인은 아니었다.)
2. 5. 수감 생활 및 가석방
2001년 이토만 사건으로 지방 법원에서 징역 7년 6개월과 벌금 5억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와 상고를 했으나, 2005년 10월 일본 최고 재판소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고, 구로바 형무소에 수감되었다.또한, 이시바시 산업으로부터 약 179억엔 상당의 약속 어음을 편취한 사기 사건(이시바시 산업 사건)으로 징역 6년의 실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이 판결에 대해서도 상고했으나, 2008년 2월 12일 상고가 기각되어 형기가 가산되었다.
2012년 12월, 허영중 본인이 대한민국에서의 복역을 희망함에 따라 국제 수형자 이송 조약에 근거하여 한국으로 이송되었다.[5] 이 조치로 인해 일본에서의 특별 영주자 지위를 상실했다.[6] 그의 형기 만료일은 2014년 9월이었으나[7], 2013년 9월 30일 서울남부교도소에서 가석방되었다.
2017년 12월에는 일본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닛케이 스페셜 가이아의 새벽)에 출연하기도 했다.[8][9]
3. 인물 및 평가
신장 180cm, 체중 100kg의 거구에 스킨헤드가 트레이드마크였다. 많은 정치인이나 폭력단, 대기업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주식 매집이나 회사 인수 등 대형 경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그 배후 인물로 거론되었다.[10] 특히 카메이 시즈카와는 서로를 "형제"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암흑 세계의 해결사", "지하 금맥의 거물"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10]
허영중은 상대방의 예상을 뛰어넘는 거액을 제시하여 사람을 움직이는 수법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백만으로는 거절해도 천만이면 받아들인다"는 식의 접근 방식을 취했으며, 일설에는 10억엔을 그 자리에서 제시하며 상대를 압박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스포츠계와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 전 극진 가라테 선수인 마츠이 아키요시와 친분이 깊었으며, 오야마 마스타츠 사후 극진 가라테 대회의 스폰서를 맡기도 했다. 또한 스모계의 요코즈나 면허 이에모토였던 요시다 쓰카사 가문과도 관련이 있었는데, 과거 이 가문의 금융 문제에 개입하여 삼종신기를 넘겨받았다고 한다.[11] 이를 계기로 일본 스모 협회에 접근하여 당시 사카이가와 이사장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며[12], 두 사람은 오사카에 국기관을 건설하자는 구상을 함께하며 JR 오사카역 부근 후보지를 답사하기도 했다고 한다.[12]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안경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 적대 폭력단과의 항쟁 중 실명 직전의 큰 부상을 입어 시력이 저하되었기 때문에 착용하게 된 것이다.
재일 한국·조선인 사회 일각에서는 허영중을 "재일의 수치"로 여기는 시각도 존재했다. 허영중 본인도 이러한 평가를 인지하고 있었으며, "제 부족함으로, 결국 재일의 이미지를 훼손한 것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까, 죄송하다는 마음은 틀림없이 있다"고 말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의 뜻을 내비쳤다.[2]
4. 저서
- 『해협에 서다: 진흙과 피로 얼룩진 나의 반생』(쇼가쿠칸, 2019년)
5. 관련 서적
참조
[1]
뉴스
あの許永中氏が激白 イトマン事件から日韓関係まで
https://special.sank[...]
2019-10-16
[2]
웹사이트
許永中氏、在日韓国人2世の人生から見る「戦後の日本社会と"在日"」
https://m.huffington[...]
2019-11-27
[3]
서적
海峡に立つ 泥と血の我が半生
小学館
2019
[4]
뉴스
ゴーン被告の保証金15億円没取、過去最高額か
https://www.sankeibi[...]
産経新聞
2020-04-05
[5]
웹사이트
許永中受刑者、母国で服役希望…韓国に移送
https://web.archive.[...]
読売新聞
2012-12-15
[6]
뉴스
イトマン事件の主役・許永中受刑者が日本を脱出! 人に弱みを見せない「闇の帝王」が韓国での服役を望んだ背景とは
https://gendai.media[...]
週刊現代
2012-12-20
[7]
간행물
週刊新潮
2012-11-15
[8]
웹사이트
テレ東“財界のフィクサー”許永中氏TV初取材「ガイアの夜明け」P語る極秘舞台裏 局内隠語も
https://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18-01-06
[9]
웹사이트
ガイアの夜明け スペシャル【スクープ取材!マネーの「魔力」】(2017年12月26日放送分)
https://tvtopic.goo.[...]
goo tv
2018-08-01
[10]
서적
関西に蠢く懲りない面々 暴力とカネの地下水脈
講談社+α文庫
2004
[11]
서적
日本の闇と怪物たち 黒幕、政商、フィクサー
平凡社
2023
[12]
서적
「文藝春秋」で読む戦後70年 第四巻 「9・11」後の世界と日本
文藝春秋
2015
[13]
뉴스
1990년대 日 최대 경제스캔들 ‘이토만 사건’ 허영중씨 가석방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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