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 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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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어 누드는 음모를 가리키는 일본식 표현인 "언더헤어"와 누드를 결합하여 만들어진 용어로, 일본에서 사진 및 영상 표현의 규제와 자유화 과정을 거치며 사용되었다. 1970년대까지는 규제 속에서 다양한 표현 시도가 이루어졌고, 1980년대에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예술가들에 의해 헤어 표현이 점차 증가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헤어 누드는 사실상 해금되었고, 사진집, 잡지, 영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일반화되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청소년 보호를 이유로 새로운 규제가 생겨났지만, 헤어 누드는 일본의 문화적 표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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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 누드 | |
|---|---|
| '개요' | |
![]() | |
| 정의 | 머리카락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체 사진 |
| 특징 | |
| 역사적 배경 | 1990년대 일본에서 유행 사진집 형태로 출판되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킴 |
| 사회적 논란 | 여성의 성 상품화 논쟁 공공장소 전시의 적절성 문제 |
| 법적 규제 | 국가별로 규제 정도 상이 한국에서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규제될 수 있음 |
| 예술적 시도 | 에로티시즘과 예술의 경계 탐구 여성의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표현 |
| 대중문화 영향 | 영화, 드라마, 광고 등에서 모티브로 활용 성에 대한 담론 형성에 기여 |
| 관련 용어 | 세미 누드 |
2. 역사
"헤어 누드"라는 용어는 고단샤의 편집자 모토키 마사히코가 슈칸겐다이에서 누드에 음모를 의미하는 일본어식 영어 "언더 헤어"를 조합하여 만든 것이다.[43] 본래 영어에서 음모는 '''pubic hair'''
음란물의 정의나 관련 법규가 다른 서양에서는 음모의 유무가 크게 문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의어는 없지만, 영어 속어로는 "''full frontal''" 등이 유사하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부터 음란죄가 제정되어 사진 표현에 대한 규제가 있었다. 경찰 당국은 음모를 특정 신체 부위의 일부로 간주하여 규제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예술과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진작가들은 이러한 규제에 반발하며 음모를 가리거나 수정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1960년대부터는 누드 표현이 점차 증가하며 규제와 표현의 자유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970년대에는 표현가들이 경찰의 규제에 맞서 다양한 방식으로 누드 표현을 시도했다.
1980년대에는 표현하는 측이 우세해지며 헤어 표현이 점차 증가했다. 1981년에는 대형 주간지에 무수정 헤어 누드 사진이 게재되었지만, 경찰은 엄중 주의에 그쳤다. 그러나 같은 해 다른 잡지들은 적발되는 등 규제가 계속되었다.
1990년대에는 헤어 누드가 사실상 해금되었다. 1991년, 히구치 카나코의 사진집에서 음모가 명확하게 찍혔지만 경찰은 구두 경고에 그쳤고, 이는 사실상 헤어 해금으로 이어졌다. 미야자와 리에의 사진집 『Santa Fe』는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헤어 누드는 다양한 매체에서 일반화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인터넷의 발달로 무수정 해외 포르노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음모 노출 여부를 외설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무의미해졌다. 2000년대 이후에는 청소년 보호를 이유로 한 규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2. 1. 전사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쇼와 전쟁 전후에 이르기까지, 일본 경찰 당국은 사진 표현에서 국부가 찍혀 있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외설물 배포 등의 죄 해당 여부를 판단했다. 당국은 음모도 국부의 일부로 해석하여 규제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표현의 자유를 원하는 사진가들은 아오야기 요이치처럼 사과 등의 소품을 사용해 음모를 가리거나, 잡지 편집자가 출고 전 단계에서 수정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는 이미 메이지 시대부터 예술과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으로 비판받아 왔다[44].2. 2. 1960년대, 70년대: 규제의 안에서
전후 스트립쇼는 허용되었지만, 1940년대와 50년대까지 잡지나 영화에서 누드 표현은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사진 잡지와 핑크 영화를 중심으로 누드 표현이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 니혼테레비의 11PM, 와카마쓰 고지의 핑크 영화, 데라야마 슈지의 언더그라운드 연극 등이 적극적으로 누드를 다루었다.1970년대에는 경찰의 엄격한 규제 속에서 표현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누드 표현을 시도했다. 1973년 도에이 포르노 영화 '공포 여학교 · 애니멀 동급생' 주연 배우 오리베 유코(織部ゆう子)의 흰 속옷으로 음모를 투과한 스틸 사진이 잡지에 게재되었다. 같은 해, 만화에서도 여성의 음모를 제거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극화 '밑을 깎는 한지로(下苅り半次郎)'(고이케 가즈오 작, 가미에 사토미 그림)가 등장했다.
당시 일본에서 상영되는 서양 영화는 영화윤리위원회의 지도 감독에 따라 흐림 처리가 되었지만, 맬리시우스의 마지막 장면처럼 음모 노출이 수정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규제는 훗날 헤어 표현 해제의 큰 이유가 된다.
야마모토 신야 등은 가발을 음모로 착각하게 만드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와카마쓰 고지가 제작하고 오시마 나기사가 감독한 영화 '감각의 제국(1976)'에서는 실제 성행위를 묘사하여 권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도전을 했다.[43]
2. 3. 1980년대: 대항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바뀌어 표현하는 측의 헤어 표현이 우세해지기 시작했다.1981년 3월 19일, 『주간 신초 3월 26일호』에 스트리킹 여성의 무수정 헤어 누드 사진이 게재되었다. 이전의 비닐책 등 소규모 유통 잡지와는 다른 대형 주간지 게재는 처음이었으며, 버라이어티 쇼에서도 다루어진 이 호는 즉시 완판되었지만, 경찰의 대응은 엄중 주의에 그쳤다[47].
그러나 같은 해 타코 하치로가 출연했던, 음모가 그대로 드러난 『사GIRL(写GIRL)』, 『우타마로(歌磨呂)』가 통신 판매로 유통되다가 적발되었고, 1983년 2월에는 국회에서 소녀 잡지에서의 노골적인 성교 기사가 문제시된 여파로, 『갸루즈 라이프(ギャルズライフ)』가 폐간되는 등 엄격한 규제가 이어졌다[48]. 그 와중에 스에이 아키라가 편집한 잡지 『사진시대(뱌쿠야쇼보(白夜書房), 1981년-1988년)』에서는 아라키 노부요시 등에 의한 누드를 게재했는데, 이에는 가끔 음모가 찍혀 있었으며,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사진집 「Lady 리사 라이온」(다카라지마샤(宝島社), 1984년)이나 브루투스지 (매거진하우스)의 특집 「알몸의 절대 온도」(1985년 - )에도 음모가 찍힌 사진이 게재되어, 사진가나 출판사는 예술로서의 사진 표현을 주장했고, 무엇을 가지고 외설이라고 판단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예술 표현으로서 헤어 용인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1985년 도쿄 국제 영화제에서 예술 표현으로서의 특례로 『1984』 등에서 무수정 헤어 영상이 상영되었다. 이 해에, 물꼬가 트인 듯 『후쿠무스메(福娘)』, 『뉴 누드(ニューヌード)』, 『펜트하우스(ペントハウス)』, 『브루투스(ブルータス)』, 『엔마(エンマ)』 등에서 잇따라 헤어 누드가 게재되었지만, 그중 펜트하우스는 적발되어 전면 해금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같은 해 6월, 시노야마 기신은 그 상황에 항의하듯 『요쓰야 시몬 사진집(四谷シモン写真集)』에서 인형에 음모를 표현하는 등 도전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또한, 소년 만화에서도 『소년 챔피언(少年チャンピオン)』 연재의 『나는 윌리!(ぼくはウィリー!)』(타치하라 아유미 작)에서 음모가 묘사되는 등, 헤어 표현은 슬그머니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49]
2. 4. 1990년대 전반: 헤어 해금
1990년대는 헤어 누드가 사실상 해금된 시기였다. 1990년 5월, NHK 교육 텔레비전에서 시노야마 기신이 촬영한 『TOKYO NUDE』의 헤어 사진을 방영하고, 같은 해 온천 소개 비디오 『미녀기 · 여자의 비탕(美女紀・女の秘湯)』에서 헤어가 나오는 등, 본격적인 헤어 해금 시대가 시작되었다.[50]1991년 1월, 시노야마 기신이 촬영한 히구치 가나코의 사진집 『water fruit 불측의 사태(water fruit 不測の事態)』에서는 수영복 사진에 음모가 명확하게 찍혀 있었으나, 경찰은 적발 대신 구두 경고만 하였다. 이는 사실상 일본 출판 · 영상 업계의 '헤어 해금'으로 이어져, 이후 헤어 누드 붐을 이끌었다.[50]
같은 해 4월, 『ANAN』에서 남성 모델로 헤어 노출을 했던 모토키 마사히로가 7월에 헤어 누드 사진집 『화이트 룸(ホワイト・ルーム)』을 발매했다. 11월에는 당시 최고의 아이돌이었던 미야자와 리에의 『Santa Fe』가 발표되어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51] 미야자와 리에의 헤어 누드는 이전과 이후의 누드 표현을 완전히 바꿀 정도로 큰 충격을 주었고, 사회의 누드에 대한 인식도 크게 변화시켰다.[52][53] 페미니즘(여성 해방 · 여성 주체)의 관점에서 누드가 증가하고, 인기 연예인이 헤어 누드(전라)를 보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줄어들었다.[54] 가도마쓰 가노리, 미우라 아야네, 아소 히로미, EN DOLL 등, 아이돌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누드까지 선보이는 '누드 아이돌(누돌)'도 활동했다.[55][56] 한편, 이러한 붐 속에서 다카스 모토히토, 후타미 아키라 등 '벗기는 사람'이라 불리는 헤어 누드 기획자들이 암약하게 되었다.[57]
1991년 7월 10일, 도쿄 국제 영화제에서 『누드 모델』이 무수정으로 상영되었다. 이는 각국 영화제에서는 무수정 상영이 일반적인데 일본만 그렇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는 세관과 영화윤리위원회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고, 예술성이 높은 작품의 경우 헤어 표현이 허용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92년 4월 27일, 영화윤리위원회는 외설 기준 재검토를 발표하고, 10월부터 "원칙적으로 일상생활을 묘사하는 음모 표현은 문제 없음"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같은 해 6월, 도고 겐이 수입 포르노 세관 몰수 사건에 승소하여 개인이 즐기는 것은 문제 삼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음모보다 더욱 과격한 성기 노출 표현"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1991년 5월, 『주간 테미스(週刊テーミス)』의 AV 현장 촬영에서 남자 배우의 성기가 무수정으로 게재되어 편집장이 시말서를 제출하고 잡지가 폐간되었다. 같은 해 7월, 성기를 의도적으로 게재한 『스파이(スパイ)』지도 적발되어 폐간되었다. 1994년에는 가노 덴메이의 『더 덴메이(ザ・テンメイ)』에 대한 경고에 이어, 1995년 2월 『기쿠제2!(きくぜ2!)』를 적발, 가노와 다케쇼보 사장을 체포하고 『더 덴메이』를 휴간시켰다.[58]
또한, 1992년 4월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 광인 일기(写狂人日記)』를 적발하고, 『주간 포스트(週刊ポスト)』에 경고를 내는 등 음모 표현에 대한 단속도 이루어졌다. 1993년 1월 『주간 신초 1/14양호』의 헤어 누드에 대해서는 "발행 부수가 많고", "예술성은 인정되지만, 일부에서 헤어 해금을 받아들일 우려가 있다"(경시청)는 이유로 사정 청취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자와 리에 이후의 흐름은 멈추지 않아 헤어를 이유로 한 규제는 사라지고, 1990년대 동안 대량의 헤어 누드 사진집이 출판되었다.[54]
2. 5. 1990년대 후반: 일반화
1995년 이후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무수정 해외 포르노를 직접 볼 수 있게 되어 음모 노출 여부를 외설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무의미해졌다.[19] 그 결과, 그라비아나 사진집, 어덜트 비디오, 이미지 비디오 등 여러 매체에서 헤어 누드는 특별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잡지에 헤어 누드가 없으면 이상할 정도로 자주 등장했고, 그라비아 전체가 성인 모델의 헤어 누드인 일반 잡지도 있었다. 이처럼 성기만 노출되지 않으면 "누드 = 헤어 누드"라는 인식이 생겨났고, 많은 성인 모델이 헤어 누드를 공개하는 것은 AV 여배우로 데뷔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유명 연예인의 헤어 누드는 여전히 화제성을 가졌고, 관련 사진집이 꾸준히 출판되었다.[20]1990년대 후반에는 과열되었던 헤어 누드 유행이 점차 잦아들었지만,[22][23][24][25] 1997년에는 당시 톱 아이돌이었던 간노 미호의 『NUDITY』가 큰 화제를 모았다.[26][27] 2000년대에는 인터넷 이용이 더욱 확산되고 출판 불황이 심화되었지만, 2002년 마쓰자카 게이코의 『벚꽃 전설(さくら伝説)』이 높은 판매고를 기록하기도 했다.[28][29]
2. 6. 2000년대 이후: 새로운 규제
이렇게 헤어 누드 전체에 대한 탄압은 사라졌지만, 관헌의 규제는 청소년 보호를 이유로 이루어지게 되었다[5]。2004년(헤이세이 16년) 2월, 일본프랜차이즈체인협회(JFA)는 출판윤리협의회에 "모든 불건전 도서에 대해 미성년자가 열람할 수 없도록 포장, 띠지 등을 완전 실시한다"는 등의 자율 규제 강화 방침을 제시했다. 이를 받아들여 대형 주간지 『주간 포스트(週刊ポスト)』와 『슈칸겐다이』는 헤어 누드 그라비아 게재를 중단하고, 이후 봉함 등으로 게재 방식을 변경했다. 이후 헤어 누드는 주로 사진 주간지 「프라이데이(フライデー)」, 「포커스(フォーカス)」, 그리고 「실화지」라고 불리는 잡지에 게재되었다. 그러나 도쿄도청의 청소년·치안 대책 본부는 2007년 12월 하순, 주간지 3사의 편집장을 불러 "청소년 건전 육성 조례에 위반되는 그라비아 게재를 중단하지 않을 경우 유해 도서 지정을 한다"고 암시하며 규제를 시도했다[70]。
머리카락은 외설 기준에서 벗어났지만, 성기 표현은 에도 시대의 춘화에서도 "음란"으로 판정되는 경우가 있었다. 2015년에는 춘화와 누드를 동시에 게재한 잡지가 경시청으로부터 구두 지도를 받았다[71]。
인터넷의 일반화로 인해, 이러한 헤어를 포함한 포르노 규제는 국경을 가볍게 넘어, 연령 제한 논의도 공허해졌다. 일본에서의 헤어 해금은 마침내 이러한 흐름에 맞춰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3. 여성 시선의 누드
사진가인 更井真理|사라이 마리일본어는 여성 시선의 누드 사진집을 발표하여 화제가 되었다.[72] "아이들에게 불건전한 누드를 숨어서 보게 하는 것보다, 건전한 누드를 더 많이 접하게 할 기회를 늘려야 한다. 성에 대해 올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키모토 노리코)"라는 이유로, 학교 도서관에 미야자와 리에의 『Santa Fe』(시노야마 키신 촬영)를 들여놓자는 운동까지 일어났다.[72]
누드도 꺼리지 않는 배우 미우라 아야네는 "영락없이 남성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어정쩡한 포즈를 싫어하며 "그런 짓 할 바에는 차라리 전부 벗는 편이 기분 좋다"라고 발언했다.[73] 1999년 에스미 마키코의 『ESUMI』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호감을 얻었다.[74]
2009년, hitomi의 『LOVE LIFE2』는 임신 중에 촬영된 "마터니티 누드"로, 동년배 여성들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일부 임산부들 사이에서 누드 촬영을 하는 현상이 일어났다.[75][76]
4. 주요 사진집
푸른 레오나(碧きレオナ)
모리 미쓰히로
마이야마 히데카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