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헤카타이오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헤카타이오스는 페르시아 지배 하의 밀레투스 출신으로,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이다. 그는 이오니아 반란을 만류하고 아르타페르네스를 설득하여 이오니아 도시들의 헌법을 복원하는 데 기여했다. 헤카타이오스는 지리서 《세계 일주》와 역사서 《계보》를 저술했으며, 특히 《세계 일주》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포함한 당시 알려진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신화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으며, 호메로스를 신뢰할 만한 권위자로 인정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지도를 개선하여 세계를 오케아노스로 둘러싸인 원반으로 묘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550년대 출생 - 빔비사라
    빔비사라는 하리얀카 왕조를 세우고 앙가를 정복하여 세력을 확장했으며 불교 발전에 기여했으나 아들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옥사한 마가다의 왕이다.
  • 아케메네스 제국의 역사가 - 헤로도토스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5세기 소아시아 출신으로, 페르시아 전쟁을 중심으로 그리스 및 주변 지역의 역사, 문화, 풍습을 다룬 서양 최초의 역사서인 『역사』를 저술하여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대 그리스 역사가이자 지리학자이다.
  • 아케메네스 제국의 역사가 - 크테시아스
    크테시아스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출신 의사이자 역사가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시의로 쿠낙사 전투에 참전했으며,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역사를 다룬 《페르시카》와 《인디카》 등의 저서를 남겼으나 《페르시카》의 역사적 신뢰성은 논쟁 중이다.
헤카타이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헤카타이오스
로마자 표기Hekataios
다른 이름Ἑκαταῖος ὁ Μιλήσιος
국적고대 그리스
출생밀레투스 (현재 발라트, 아이딘, 튀르키예)
사망(74세)
분야역사, 지리학

2. 생애

헤카타이오스는 페르시아 지배 하의 리디아 사트라피에 속한 밀레투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2] 그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여신헤카테에서 유래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시기에 활동했으며, 광범위한 여행을 마친 후 고향 밀레투스에 정착하여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지리 및 역사 저술에 전념했다. 밀레투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가 페르시아 지배에 대항하는 반란을 조직하기 위해 밀레투스에서 주요 이오니아인들의 회의를 열었을 때, 헤카타이오스는 이를 만류하려 했지만 실패했다.[3] 기원전 494년, 패배한 이오니아인들이 강화를 요청했을 때, 페르시아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에게 파견된 사절 중 한 명이었으며, 아르타페르네스를 설득하여 이오니아 도시들의 헌법을 복원하도록 했다.[4] 헤카타이오스는 최초의 알려진 그리스 역사가로,[5] 켈트족과 일리리아인을 언급한 최초의 고전 작가 중 한 명이었다.

3. 주요 저작

헤카타이오스는 지리서 《페리오도스 게스》와 역사서 《게네알로기아이》를 저술했으나, 현재는 단편들만 남아있다.[6]

《페리오도스 게스》는 유럽아시아 지역을 다루는 지리서로, 페리플루스 형식을 따르고 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세계 지도를 수정·확대하여 첨부하였으며, 비잔티움의 스테파누스의 지리 용어집 《Ethnika》에 다수 인용되었다.

《게네알로기아이》는 그리스 신화와 전설을 합리적으로 체계화한 역사서이다. 서사시적 신화 창작 전통에서 벗어나, 신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가문의 전승에 회의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밀레토스의 헤카타이오스가 이와 같이 말한다. 나는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쓴다. 왜냐하면 그리스인들의 이야기는 다양하며 나에게는 우스꽝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라는 문구가 현존하는 단편에 남아있다.

3. 1. 《페리오도스 게스》(Periodos ges, 세계 일주)

《게스 주기(Periodos ges)》는 유럽에 관한 내용의 첫 번째 책과 아시아아프리카를 포함하는 두 번째 책, 총 두 권으로 구성된 지리서이다.[7] 이 책은 지브롤터 해협에서 시작하여 시계 방향으로 모로코대서양 연안까지, 지중해흑해의 해안선을 따라가며 각 지역의 사람들과 장소, 지중해 섬 주민, 스키타이인, 페르시아, 인도, 이집트, 누비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300개 이상의 단편이 보존되어 있으며, 대부분 스테파누스 비잔티누스의 저작에서 지명에 대한 인용구로 남아 있다.[7]

헤카타이오스의 세계 지도


헤카타이오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지도를 개선하여 오케아노스로 둘러싸인 원반 형태의 세계 지도를 제시했다.[10]

《게스 페리오도스 (지구를 도는 여정, 세계 개관)》는 헤카타이오스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2권의 책이다. 두 권 모두 페리플루스 형식으로 해안선을 따라 묘사되어 있다. 1권은 유럽에 관한 것으로 지중해 항해 기록이며, 스키타이 북쪽까지 각 지역을 순서대로 기술한다. 2권은 아시아에 관한 것으로, 1세기의 항해기 《에리트라 해 안내기》와 유사한 구성을 가진다. 헤카타이오스는 알려진 세계의 국가와 주민들을 기술하며, 특히 이집트에 대해 광범위하게 다룬다. 해설에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세계 지도를 수정·확대한 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이 책은 374개의 단편이 현존하며, 비잔티움의 스테파누스가 편찬한 지리 용어집 《Ethnika》에 다수 인용되어 있다.

3. 2. 《게네알로기아이》(Genealogiai, 계보)

헤카타이오스의 저작 중 하나인 《게네알로기아이》는 4권으로 구성된 신화에 관한 책으로, 40개 미만의 단편만이 남아 있다.[8] 그는 신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가문의 전승에 대해 회의적인 접근 방식을 적용했다.[8]

현존하는 단편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시작 구절을 담고 있다. "밀레토스의 헤카타이오스가 이와 같이 말한다. 나는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쓴다. 왜냐하면 그리스인들의 이야기는 다양하며 나에게는 우스꽝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II, 143)는 헤카타이오스가 고대 이집트의 테베에 있는 사원을 방문한 이야기를 전한다. 사제들은 헤카타이오스에게 사원 내부 성소에 있는 일련의 조각상들을 보여주었는데, 각 조각상은 각 세대의 대제사장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헤카타이오스가 16대에 걸쳐 신의 후손이라고 밝힌 후 똑같은 광경을 보았다고 전한다.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조상 계보를 조각상에 기록된 그들의 계보와 비교했다. 그들의 대제사장 세대가 345명이나 되었고 모두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헤카타이오스가 신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역사가 제임스 쇼트웰은 이집트의 고대와의 만남이 헤카타이오스의 회의론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며, 그는 구전 역사가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고 평가했다.[9]

헤카타이오스는 호메로스 등 시인들의 신뢰성은 인정하지만, 신화와 역사적 사실을 구별하여 산문으로 역사를 쓰려고 한 최초의 로고그래포스로 여겨진다.

헤로도토스는 고대 이집트테베 신전을 방문했을 때, 이집트 사제들로부터 신전 내 광장에 있던 역대 사제장의 목상을 보여졌다. 헤로도토스는 헤카타이오스가 자신의 계보를 조사했더니 16대째에서 신에 도달했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며, 이집트 사제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하자, 이집트인들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부정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신으로부터 345대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5] 이 이야기는 헤카타이오스의 회의주의와는 관계없지만, 그리스인의 신화화된 역사가 미케네 탄생 전(기원전 2000년경)부터 있던 문명의 역사를 터무니없이 짧게 축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6]

4. 회의주의

헤카타이오스는 자신의 저작, 특히 『계보(Genealogiai)』에서 뚜렷한 회의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그는 "밀레토스의 헤카타이오스는 말한다. 나는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쓴다. 그리스인의 이야기는 다종다양하며, 나에게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생각된다."[14]라고 말하며, 신화의 여러 모순에 의문을 제기했다.[8]

헤로도토스(II, 143)에 따르면, 헤카타이오스는 고대 이집트의 테베 사원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가계가 16대 만에 신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집트 사제들은 345세대에 이르는 인간 대제사장들의 기록을 보여주며 그의 주장을 반박했다.[15] 이러한 경험은 헤카타이오스가 구전 역사의 신뢰성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9]

5. 평가 및 영향

헤카타이오스는 진지한 산문 역사를 시도하고 신화와 역사적 사실을 구별하기 위해 비판적인 방법을 사용하려 한 최초의 로고그래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호메로스와 다른 시인들을 신뢰할 수 있는 권위자로 받아들였다. 헤로도토스는 적어도 한 번은 그의 진술에 모순되지만, 산문 역사라는 개념에 대해 헤카타이오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다.[1] 헤카타이오스는 그리스 최초의 역사가로 불리며, 켈트족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작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6. 지도



헤카타이오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세계 지도를 개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세계를 오케아노스로 둘러싸인 원반으로 묘사했다.[10]

참조

[1] 서적 Histories
[2] 서적 A Political History of the Achaemenid Empire BRILL 1989
[3] 서적 Histories
[4]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5] 서적 Ancient Civilizations: The Near East and Mesoamerica https://books.google[...] Benjamin/Cummings
[6] 간행물 Hecataeus Oxford Classical Dictionary
[7] 간행물 OCD
[8] 간행물 OCD
[9] 서적 The Ancient Greek Historians Dover Publications
[10] 간행물 OCD
[11] 서적 歴史
[12] 서적 歴史叢書
[13] 서적 Ancient Civilizations: The Near East and Mesoamerica Benjamin/Cummings Publishing
[14] 서적 The History of History Columbia University Press
[15] 서적 歴史
[16] 기타 Ibid.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