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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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병주는 한국 천주교의 인물로, 홍영주와 형제이다. 한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홍낙민이 순교한 후 충청도 여사울로 이주하여 천주교 신앙을 이어받았다. 교리 교사로 활동하며 예비 신자 교육, 병자 간호, 자선 사업에 헌신했고, 기해박해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1925년 복자 품에 올랐고, 1984년 시성되었다.

홍병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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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순교자
이름홍병주 베드로
출생1798년
사망1840년 1월 31일
축일9월 20일
교파로마 가톨릭교회
출생지서울
사망지서울 당고개
직업순교자
시복일1925년 7월 5일
시복자교황 비오 11세
시성일1984년 5월 6일
시성자교황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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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와 신앙 활동

1839년 기해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홍병주 형제는 위험을 무릅쓰고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이 일로 인해 배교자 김여상이 작성한 체포 대상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결국 그해 9월, 홍병주 형제는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형리들은 동료 교우들의 행방을 대고 배교할 것을 강요하며 고문했지만, 형제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이후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당시 형조 판서는 그들의 친척이었다. 판서는 직접 고문하지 않았으나 부하들에게 형제가 배교하도록 혹독한 고문을 가하게 했으며, 심지어 다른 죄수들까지 동원되어 형제를 구타하였다. 이러한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홍병주 형제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홍병주는 1840년 1월 31일, 당고개 사형장에서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동생 홍영주 역시 다음 날인 2월 1일에 같은 장소에서 두 명의 교우와 함께 순교하였다.

2.1. 출생과 가문

홍병주는 한양의 명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인 홍낙민이 천주교 신앙 때문에 순교하자,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 서산의 여사울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집안 대대로 이어져 온 천주교 신앙을 물려받아 독실한 신자로 성장하였다.

2.2. 교리 교사 활동

홍병주와 홍영주 형제는 모두 교리 교사로 임명되어, 예비 신자들을 가르치는 데 열의와 충실함을 보였다. 그들은 예비 신자 교육뿐만 아니라 병자들을 돌보는 것과 자선 사업에도 힘썼다. 이러한 헌신적인 모습에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형제의 재능과 열정을 높이 평가하여 여러 중요한 책임을 맡겼다.

3. 기해박해와 순교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홍병주는 위험을 무릅쓰고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활동 때문에 배교자 김여상이 작성한 체포 대상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결국 홍병주는 동생 홍영주와 함께 1839년 9월에 체포되었다. 포도청에서 형리들은 동료 교우들의 위치를 밝히고 배교할 것을 강요하며 고문하였으나, 홍병주 형제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이후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당시 형조 판서는 그의 친척이었다. 판서는 직접 고문하지 않았으나, 부하들에게 형제가 배교하도록 매우 혹독하게 고문하라고 지시하였다. 심지어 절도범이나 살인범 등 다른 수감자들까지 형리들을 따라 홍병주 형제를 구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극심한 고문 속에서도 홍병주 형제의 신앙은 꺾이지 않았다.

결국 홍병주와 홍영주는 당고개에 있는 사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았다. 홍병주는 1840년 1월 31일에 다른 교우 다섯 명과 함께 순교하였으며, 이때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동생 홍영주는 다음 날인 2월 1일에 다른 교우 두 명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4. 시복 및 시성

(내용 없음)

4.1. 시복

1925년 7월 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홍영주 바오로와 함께 복자 품에 올랐다.

4.2. 시성

홍병주 베드로는 동생 홍영주 바오로와 함께 1925년 7월 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가 되었다. 이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특별시 여의도 광장에서 집전한 미사 및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