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주
1. 개요
홍영주는 한양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할아버지 홍낙민의 순교 이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교리 교사로 임명되어 신자들을 가르치고 선교사들을 돕다가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순교하였다. 홍영주는 1840년 2월 1일에 참수되었으며,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되었다.
| 이름 | 홍영주 바오로 |
|---|---|
| 출생일 | 1801년 |
| 사망일 | 1840년 2월 1일 |
| 축일 | 9월 20일 |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 출생지 | 서울 |
| 사망지 | 서울 당고개 |
| 직업 | 순교자 |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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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수된 사람 -
악비
남송 시대 장군 악비는 금나라에 맞선 애국 영웅으로, 진회의 모함으로 처형되었으나 사후 충절을 인정받아 무목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만강홍이라는 시와 함께 현대 중국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지만, 최근 그의 군사 행위에 대한 재평가 논의가 있다. -
참수된 사람 -
주문모
청나라 출신 가톨릭 신부 주문모는 1794년 조선에 잠입하여 선교 활동을 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으며, 초기 조선 천주교회 성장에 기여하여 2014년 시복되었다. -
19세기 기독교 성인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나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19세기 기독교 성인 -
다미앵 신부
벨기에 출신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예수 성심 성모 수도회 소속 선교사인 다미앵 신부는 하와이 몰로카이섬에서 한센인들을 16년간 헌신적으로 돌보며 사목 활동을 펼치다 자신도 한센병에 감염되었으나 봉사를 이어갔고, 사후 시성되어 소외된 이들을 위한 봉사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나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 -
김대건
김대건 안드레아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이자 순교자로, 천주교 신앙을 가진 가문에서 태어나 사제의 길을 걸으며 마카오와 필리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26세에 순교하였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2. 생애
홍영주는 한양의 명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홍낙민이 순교하자,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 서산의 여사울로 이사하여 천주교 신앙을 물려받았다.
홍병주와 홍영주는 교리 교사로 예비 신자들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돌보며 자선사업에 힘썼다.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이들의 열정에 감복하여 여러 중요한 책임을 맡겼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여, 배교자 김여상이 체포 명단에 이들의 이름을 올렸다.
홍병주, 홍영주 형제는 9월에 체포되었다. 포도청에서 동료 교우들의 위치를 밝히고 배교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형조 판서가 이들의 친척이라 직접 고문하지 않고 부하들을 시켜 배교를 강요하며 심하게 고문했다. 절도범, 살인범 등 다른 수감자들도 형리들을 따라 이들을 구타했으나 신앙은 꺾이지 않았다.
홍병주와 홍영주는 당고개 사형장으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홍병주는 1840년 1월 31일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홍영주는 다음 날인 2월 1일 두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었다. 홍병주는 43세, 홍영주는 40세였다.
2.1. 출생과 가문
홍영주는 한양의 명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홍낙민이 순교하자,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 서산의 여사울로 이사하여 대대로 이어온 천주교 신앙을 물려받아 독실한 신자로 살았다.
2.2. 천주교 활동
홍영주는 한양의 한 명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홍낙민이 순교하자, 그는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 서산의 여사울로 이사하였고, 대대로 이어온 천주교 신앙을 물려받아 독실한 신자로서 살았다.
홍병주와 그의 동생 홍영주는 모두 교리 교사로 임명되었고, 예비 신자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열의와 충실함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예비신자를 가르치며 병자들을 돌보는 것과 자선사업에 매진하였다. 그러므로,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그들의 재능과 열정에 감복하였고, 그들에게 여러 중요한 책임을 맡겼다.
1839년 기해박해 동안에,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다. 따라서, 배교자 김여상이 체포되어야 할 명단에 그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았다.
2.3. 기해박해와 체포
홍영주는 한양의 한 명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홍낙민이 순교하자, 그는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 서산의 여사울로 이사하였고, 대대로 이어온 천주교 신앙을 물려받아 독실한 신자로서 살았다.
홍병주와 그의 동생 홍영주는 모두 교리 교사로 임명되었고, 예비 신자들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열의와 충실함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예비신자를 가르치며 병자들을 돌보는 것과 자선사업에 매진하였다. 그러므로,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그들의 재능과 열정에 감복하였고, 그들에게 여러 중요한 책임을 맡겼다.
1839년 기해박해 동안에,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다. 따라서, 배교자 김여상이 체포되어야 할 명단에 그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았다.
홍병주 홍영주 형제는 9월에 체포되었다. 포도청에서 형리들은 그 형제에게 동료 교우들의 위치를 발설할 것과 배교할 것을 강요했지만, 형제는 결코 그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형조 판서가 그들의 친척이었다. 그는 그들을 직접 고문하지 않았고, 그의 부하들을 시켜 형제가 배교하도록 극심히 고문케 하였다. 절도범과 살인범 등의 다른 수감자들도 형리들을 따라 홍병주와 홍영주 형제를 구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절대 꺾이지 않았다.
2.4. 고문과 순교
홍영주는 한양의 한 명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홍낙민이 순교하자, 그는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 서산의 여사울로 이사하였고, 대대로 이어온 천주교 신앙을 물려받아 독실한 신자로서 살았다.
홍영주는 교리 교사로 임명되어 예비 신자들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돌보는 것과 자선사업에 매진하였다.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그의 재능과 열정에 감복하여 그에게 여러 중요한 책임을 맡겼다.
1839년 기해박해 때,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였다. 그래서 배교자 김여상은 체포되어야 할 명단에 그의 이름을 기록해 놓았다.
9월에 체포된 홍영주는 포도청에서 형리들에게 동료 교우들의 위치를 발설하고 배교할 것을 강요받았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형조 판서는 그의 친척이었다. 판서는 홍영주를 직접 고문하지 않고 부하들을 시켜 배교하도록 극심히 고문하게 하였다. 절도범과 살인범 등 다른 수감자들도 형리들을 따라 홍영주를 구타하였으나, 그의 신앙은 꺾이지 않았다.
홍영주는 당고개 사형장으로 압송되어 1840년 2월 1일 두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었다. 홍영주가 순교할 당시 나이는 40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