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희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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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희황후 등수는 후한 시대의 인물로, 난양에서 태어났으며 광무제의 태부 등위의 손녀이다. 15세에 입궁하여 화제의 총애를 받아 귀인이 되었고, 음황후 폐위 후 황후로 책봉되었다. 화제 사후에는 상제와 안제의 섭정을 맡아 선정을 펼쳤으나, 권력욕으로 인해 안제의 친정을 늦추고 결국 사후 일족이 숙청되었다. 등수는 학문에도 능하여 반소에게 경서를 배우고, 섭정 기간 동안 재해 구호와 형법 개혁 등 유능한 면모를 보였으며, 흉노와 강족과의 전쟁을 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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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희황후 | |
---|---|
기본 정보 | |
이름 | 덩수이 (鄧綏) |
휘 | 덩수이 (鄧綏) |
시호 | 화희황후 (和熹皇后) |
출생 | 81년 |
출생지 | 허난성 난양 시 |
사망 | 121년 4월 5일 |
사망지 | 뤄양 시 |
매장지 | 동한 황제 능묘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덩쉰 (鄧訓) |
어머니 | 음씨 부인 (陰氏) |
배우자 | 화제 (和帝) |
경력 | |
황후 책봉 | 102년 11월 21일 |
황후 폐위 | 106년 2월 13일 |
황태후 및 섭정 | 106년 - 121년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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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등수(鄧綏)는 후한의 개국 공신 등우(鄧禹)의 손녀이자 호강교위 등훈(鄧訓)의 딸로, 어머니는 광무제의 황후 음려화의 가문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에 능통했다고 전해진다.
영원 7년(95년), 15세에 화제의 후궁으로 입궁하여 총애를 받았고, 102년 음황후가 폐위된 후 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로서 검소함을 실천하고 학자 반소에게 가르침을 받는 등 덕망을 보였다.
106년 화제가 사망하자 황태후가 되어 섭정을 시작했다. 생후 100일 된 상제를 황제로 옹립했으나 곧 요절하자, 13세의 안제를 다시 황제로 세우고 섭정을 이어갔다. 오빠 등질(鄧騭) 등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며 초기에는 안정적인 통치를 펼쳤으나, 점차 권력 유지에 집중하며 안제가 성인이 된 후에도 친정을 허락하지 않아 갈등을 빚었다.
121년 3월, 등태후가 4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안제는 친정을 시작하며 등씨 일족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등씨 가문은 몰락하였고, 오빠 등질은 자결하였다. 등수는 화제의 순릉(順陵)에 합장되었다.
2. 1. 가문 배경 및 초기 생애
등수(鄧綏)는 81년 난양 신야(新野)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무제 시절 태부(太傅)를 지낸 등우(鄧禹)의 손자이자 호강교위(護羌校尉)를 역임한 등훈(鄧訓)이며, 어머니 음씨(陰氏)는 광무제의 황후인 음려화의 5촌 조카딸(사촌의 딸)이었다. 이처럼 등수는 후한 건국의 공신 가문과 외척 가문의 혈통을 모두 이어받았다.어려서부터 효심이 깊었다고 전해지는데, 할머니가 실수로 머리를 손질하다 목에 상처를 냈을 때에도 할머니의 마음이 상할 것을 염려하여 아픔을 참았다는 일화가 《후한서》 10권에 기록되어 있다. 92년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는 크게 슬퍼하며 3년 동안 소금 간을 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학문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 여섯 살 때 사서(전서체)를 읽기 시작했고, 열두 살에는 시경과 논어, 상서를 이해하고 암송할 수 있었다.[4] 이 때문에 가족들은 그녀를 '제생(諸生)'이라 부르기도 했다. 어머니는 딸이 바느질과 같은 당시 여성들이 해야 할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는 것을 보고 "여자 박사라도 되려느냐"며 꾸짖었지만, 아버지 등훈은 딸의 비범한 자질을 일찍부터 알아보았다고 한다.
영원 7년(95년), 15세의 나이로 궁에 들어가 당시 17세였던 화제의 후궁이 되었다. 그는 키가 7척 2촌(약 165cm)으로 당시 남성 평균 신장보다 컸으며[5], 용모가 매우 뛰어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진다. 입궁 이듬해인 96년에는 화제의 깊은 총애를 받아 귀인(貴人)으로 책봉되었다. 그는 음황후를 정중하게 섬겼으나, 키가 작았던 음황후는 등수를 질투하고 좋지 않게 대우했다고 한다. 음황후는 젊고 총명하며 서예에 능하여 등수가 입궁하기 전까지 화제의 총애를 받았었다.
2. 2. 입궁과 황후 책봉
95년 부친상을 마친 등수는 15세의 나이로 후궁으로 입궁했다. 그녀는 키가 7척 2촌(약 165cm)에 달했으며, 뛰어난 미모와 더불어 총명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진다. 입궁 이듬해, 후한 화제의 깊은 총애를 받아 귀인(貴人)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화제의 황후는 효화음후였는데, 등수와는 동갑이었으며 등수의 내외종 사촌오빠의 딸, 즉 조카뻘이었다. 음황후는 아름다웠으나 키가 작고 질투심이 강했다고 묘사된다. 그녀는 등수가 화제의 총애를 받는 것을 매우 질투했다. 등수는 겸손하게 행동하며 음황후를 정중히 섬기고 그녀의 실수를 덮어주려 노력했지만, 이는 오히려 음황후의 질투심을 더욱 자극했다. 또한 등수는 화제가 아들을 계속 잃는 것을 걱정하여 다른 후궁들과의 관계를 권했는데, 이 역시 음황후의 불만을 샀다.
한번은 화제가 병석에 눕자, 음황후는 자신이 태후가 되면 등씨 가문을 몰살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 말을 들은 등수는 자살까지 생각했으나, 한 시녀가 화제가 회복되었다고 거짓으로 알려 목숨을 구했다. 실제로 화제는 곧 병석에서 일어났고, 등수와 그 가족은 위기를 넘겼다.
102년 (영원 14년), 음황후와 그녀의 할머니 등주(鄧朱)가 마법으로 후궁들을 저주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었다. 결국 음황후는 폐위되었고, 같은 해에 슬픔 속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제는 등수를 새로운 황후로 삼으려 했으나, 등수는 처음에는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그러나 화제의 뜻이 확고하여 결국 같은 해 10월(음력, 양력 11월 21일[6]) 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가 된 등수는 근면하고 겸손했으며, 화제가 그녀의 친척들을 등용하려는 제안도 거절했다. 그녀는 당시 저명한 학자였던 반자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반자를 궁중의 스승으로 예우했다.[7] 또한, 황후에게 바치는 지방의 공물(조공) 관례를 폐지하고, 대신 매년 종이와 먹만을 받겠다고 하여 검소함을 보였다.[8]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6세에 사서(史書)를 익히고 『논어』와 『시경』을 암송하여 집안에서 "제생(諸生, 여러 학자)"이라 불렸던 그녀의 학식과 덕망이 황후로서의 행실에서도 드러난 것이다.
2. 3. 두 차례의 섭정
106년 화제가 사망하자 황태후가 된 등수는 어린 황제들을 대신하여 섭정을 시작했다. 먼저 생후 100일 된 유륭(상제)을 황제로 세웠으나, 상제가 곧 요절하자 106년 말 13세의 유호(안제)를 다시 옹립하고 섭정을 이어갔다.등태후는 오빠 등질(鄧騭) 등 일족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고 약 15년간 통치했다. 초기에는 외척의 정치 간섭을 막고 지방 공물을 폐지하는 등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를 펼쳤으나, 점차 권력 유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제가 성인이 된 후에도 친정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이는 안제와의 갈등을 유발했다. 특히 안제의 유모 왕성(王聖) 등 측근들은 등태후가 다른 황족(하간효왕의 아들 유익(劉翼))을 총애하는 것을 빌미로 그녀가 황위를 넘본다고 모함했다.[19]
121년 등태후가 사망하자 안제는 친정을 시작하며,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바탕으로 등씨 일족을 숙청했다.
2. 3. 1. 상제(殤帝) 섭정
106년 2월(원흥 원년 12월), 화제가 사망하면서 후한은 황위 계승 문제에 직면했다.[9] 당시 화제에게는 궁궐 밖에서 수양 부모에게 맡겨져 자라던 두 아들, 유승(劉勝)과 유륭(劉隆)이 있었다. 이는 당시 형제들이 요절하는 경우가 많아 궁 밖에서 기르면 더 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미신 때문이었다.화제가 사망하자 두 아들은 궁으로 돌아왔다. 형 유승은 나이가 어리고 병약하다고 여겨졌으며, 동생 유륭은 태어난 지 100일밖에 되지 않았다. 황태후가 된 등수(鄧綏)는 유륭이 더 건강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그를 황제로 옹립했다. 이가 바로 상제(殤帝)로, 정사에 기록된 황제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즉위한 황제였다.
상제가 즉위하자 나이가 매우 어렸기 때문에, 등태후가 섭정으로서 임조(臨朝)하여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그녀의 오빠인 차기장군(車騎將軍) 등질(鄧騭) 역시 조정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여 정무를 함께 처리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등태후는 섭정 기간 동안 여성 학자 반소(班昭)에게 자문을 구하며 정사를 돌보았고, 과거 화제 초기에 권세를 누렸으나 정치적 사건으로 몰락했던 두씨 가문과 연루되어 권리를 박탈당했던 이들을 사면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제는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06년(연평 원년) 말에 2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면서, 후한은 다시 황위 계승의 혼란을 겪게 되었다.
2. 3. 2. 안제(安帝) 섭정
106년, 상제가 2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등수는 청하효왕 유경의 아들인 13세의 유호를 황제로 옹립했다. 안제가 어렸기 때문에 등수는 황태후로서 계속해서 섭정을 맡았다. 안제가 즉위할 당시 아버지 청하효왕 유경과 적모 경(耿) 부인은 수도 낙양에 머물고 있었으나, 등수는 어린 황제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경 부인을 남편이 있는 청하국으로 보냈다. 안제의 생모인 좌소아는 일찍 사망했다.섭정을 시작한 등수는 유능한 통치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부패를 엄격히 단속했으며, 이는 자신의 가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107년에는 사형수의 항소 기간을 연장하는 등 형법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궁정의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기 위해 옥이나 상아 같은 사치품 제작을 금지하고, 필요 없는 궁중 시종들을 해고했으며,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의 양도 줄였다.[10]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황실 창고를 열고, 지주들에게 토지 임대료를 낮추도록 했으며, 수리 시설을 정비하고 궁중 연회를 줄이는 등 민생 안정에도 힘썼다.[11] 그녀는 반소에게 경서 강의를 받으며 학문적 소양을 쌓기도 했다.
그러나 107년부터 국경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서역의 여러 나라들이 후한의 통치에 저항하자 등수는 결국 서역을 일시적으로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 해, 오랫동안 한나라 관리들의 압제를 받아왔던 강족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현재의 산시 성, 간쑤 성, 쓰촨 성 북부까지 확산되었고, 한때 수도 낙양을 위협할 정도였다. 상황이 악화되자 등수의 오빠인 등질은 양주(현재의 간쑤 성 일대)를 포기할 것을 건의했으나, 등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족의 반란은 118년까지 이어지며 서부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107년부터 109년 사이에는 홍수, 가뭄 등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했으나, 등수는 효과적인 구호 활동을 펼쳐 피해를 최소화하려 노력했다. 109년에는 남흉노가 강족의 반란으로 후한이 약해졌다고 판단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후한 군대의 반격으로 곧 다시 복속되었다.
110년 등수의 어머니 음(陰) 부인이 사망하자, 오빠 등질 등 형제들은 관례에 따라 관직에서 물러나 3년 상을 치르려 했다. 등수는 처음에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나, 반소의 건의를 받아들여 결국 승인했다.[12] 비록 공식적인 직위는 없었지만, 등씨 형제들은 여전히 막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등수는 권력을 놓으려 하지 않았고, 일부 측근들이나 두근(杜根)과 같은 신하들이 안제가 성인이 되었으니 친정을 맡겨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등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분노하며 탄압했다. 안제가 성장한 후에도 정사보다는 여색에 빠지는 모습을 보이자, 등수는 하간효왕의 아들 유익(劉翼)을 총애하여 평원왕(平原王)으로 봉했다. 이를 본 안제의 유모 왕성(王聖)과 환관 이윤(李閏) 등은 등수가 유익을 황제로 세우려 한다고 안제에게 모함했다.[19]
121년 3월, 등수는 41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화제의 순릉(順陵)에 합장되었다. 등수가 사망하자 안제는 친정을 시작했고, 왕성과 이윤 등의 참소를 받아들여 등씨 일족을 숙청했다. 등질과 등홍(鄧弘) 등은 관작이 박탈되고 봉지로 쫓겨났으며, 등질은 결국 자살했다.
2. 4. 권력욕과 몰락
106년 화제가 사망하고 어린 상제와 안제가 연이어 즉위하자, 등수는 황태후로서 섭정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외척의 정치 간섭을 막고 지방 공물 제도를 폐지하는 등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를 펼쳤으나, 점차 자신의 형제들을 주요 관직에 임명하며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안제는 성장한 후에도 정사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여색을 가까이했다. 이에 등수는 하간왕의 아들 유익(劉翼)을 총애하여 평원왕으로 봉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안제의 유모 왕성(王聖)과 신임하는 환관 이윤(李閏), 강경(江京) 등의 의심을 샀다. 그들은 등수가 안제를 폐위하고 유익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려 한다고 거짓으로 비난하며 안제에게 등수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었다.[19]
등수의 권력욕은 두근이 성인이 된 안제의 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 드러났다. 등수는 이에 크게 분노하여 두근을 수감하고 자루에 넣어 때려 죽이려 하는 등[19] 권력 유지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영녕 2년(121년) 3월, 등수가 41세의 나이로 사망하여[13] 4월 30일에 남편 화제와 합장되었다.[13] 28세가 된 안제는 비로소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안제는 유모 왕성(王聖), 환관 이윤(李閏), 강경(江京) 등의 거짓 모함[19]을 명분 삼아 등씨 일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등수의 친척들은 관직에서 쫓겨났고, 많은 이들이 자결을 강요당했다. 등수의 오빠 등질(鄧騭) 역시 안제의 명령에 의해 단식 끝에 사망했다. 그 해 말, 안제가 일부 조치를 완화하여 일부 친척들의 복귀를 허용했지만, 화희황후 등씨의 가문은 이미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한 상태였다.
3. 평가
덩씨는 "눈에 띄는 능력"으로 통치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4] 그녀는 유능하고 근면한 행정가로 여겨지며, 세계 최초로 종이를 공식 채택하도록 한 인물로 평가받고, 예술 후원자이기도 했다.[15] 섭정 기간 동안 궁정 지출을 줄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으며, 제국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홍수, 가뭄, 우박과 같은 자연 재해의 어려움을 해결했다. 또한 흉노와 강족과의 전쟁을 대부분 진압했다. 형사 사법에 대한 관심으로도 칭찬을 받았다. 교육을 잘 받은 덩 황후는 학자들을 위한 새로운 직책을 만들고 독창적인 사고를 장려했으며, 오경의 표준화에 기여했다.[16] 황족 70명을 불러 고전을 공부하게 하고 직접 시험을 감독하기도 했다.[17] 그녀는 한 제국의 마지막 실질적인 통치자로 여겨지는데, 이후의 황제와 황후들은 내부 권력 투쟁과 부패에 휩쓸려 결국 제국의 멸망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4. 한국과의 관계
후한서 동이전에 따르면, 섭정을 하던 화희황후 등씨는 영초 원년(107년) 안제와 함께 왜국 왕 수승 등이 바친 조공을 받았다. 이때 왜국 왕 수승 등은 생구 160명을 바쳤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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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mpress Deng Sui - A Beautiful Female Politician of the Han Dynasty | ChinaFetching
https://www.chinaf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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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ilblazers — the Age of Girls: Deng Sui
https://www.girlm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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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紀』には皇太后鄧氏が永寧2年3月辛巳日に、『[[後漢書]]』には癸巳日に死亡したと記録されている。
[19]
서적
온가족이 함께 읽는 중국 역사 이야기
일송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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