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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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안제는 106년에 13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125년에 사망한 후한의 황제이다. 즉위 후 모후 등태후의 수렴청정을 받았으며, 등태후 사후 환관과 결탁하여 권력을 장악했지만, 환관의 전횡으로 국정이 혼란해졌다. 안제는 등씨 일가를 숙청하고 황후의 가문과 환관의 영향력 아래에서 정치를 펼쳤으며, 말년에는 태자를 폐위시키는 등 실정을 거듭하다가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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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년 사망 - 후한 소제 (7대)
후한 소제는 125년 안제 사후 황후 염씨와 그 일족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염씨 일족의 전횡과 환관들의 쿠데타로 인해 재위 1년도 못 채우고 사망했다. - 125년 사망 - 유숙 (동해경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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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안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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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적
안제는 13세에 즉위하여 초기에는 모후 등태후와 외척 등씨 일족의 수렴청정 아래 있었다.[5] 121년 등태후 사후 친정을 시작했으나, 곧 환관 및 새로운 외척 염씨 세력과 결탁하여 기존의 등씨 세력을 숙청하였다. 이후 환관, 염씨 일족, 유모 왕성 등이 득세하여 국정을 농단하며 혼란을 야기했다.
안제 치세에는 강족과 선비족 등 북방 및 서방 민족의 침입이 잦았다. 영초 4년(111년)에는 강족의 침입에 맞서 우후가 활약했으며, 같은 해 반웅이 해적을 토벌했다. 원초 4년(118년) 이후로는 선비족의 침입이 격화되었다. 동북방에서는 고구려의 팽창에 대응하기 위해 부여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영녕 원년(120년)에는 부여 왕자 위구태가 내방했고, 이듬해에는 위구태가 한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현도군을 공격한 고구려-마한-예맥 연합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한편, 반초의 아들 반용을 파견하여 서역 경영을 일부 재개하였다. 원초 원년(114년)에는 「알자경군묘표(謁者景君墓表)」가 세워졌다.
그러나 안제는 측근 세력의 전횡을 막지 못했다. 연광 3년(124년)에는 명망 높은 태위 양진이 환관들의 모함으로 파면되어 자결하였고, 같은 해 황태자 유보(훗날 순제)마저 폐위되어 제음왕(濟陰王)으로 강등되었다.
연광 4년(125년), 안제는 순행 중 갑자기 병사하였다. 그의 사후 염황후가 잠시 권력을 잡았으나 곧 환관들의 쿠데타로 순제가 복위되었다.
2. 1. 즉위 과정
94년, 안제는 청하왕 유경과 그의 후궁 좌소아 부인( 左小娥중국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유경은 화제의 형으로, 원래 아버지 장제 치세에 태자였으나 두 황후의 계략으로 폐위되고 청하왕으로 강등되었다. 유경의 어머니인 송 부인 역시 이때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유경은 동생 화제의 신임을 받아 92년 두 황후의 오빠 두헌을 제거하는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안제의 생모 좌소아와 그녀의 언니 좌대아(左大娥중국어)는 어릴 적 삼촌 좌성(左聖중국어)이 황실을 비방했다는 죄로 처형되면서 몰수되어 궁녀가 되었다. 자매는 아름다움과 재능으로 알려져 화제의 시녀가 되었는데, 특히 좌소아는 역사와 시에 능통했다. 화제는 유경의 요청으로 자매를 그에게 하사했다. 그러나 두 자매는 106년 화제가 죽기 전에 사망하여 수도 낙양에 묻혔다. 좌소아가 죽은 후 어린 안제는 유경의 아내 경희 부인(耿姬중국어)에게 길러졌다. 안제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화제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106년(연평 원년), 화제가 사망하자 어린 아들 상제가 황위에 올랐다. 화제의 황후였던 등수(등태후)가 섭정을 시작했고, 그녀의 오빠인 거기장군 등질과 함께 조정을 운영했다. 화제의 형제들은 대부분 수도 낙양에 머물고 있었으나 영지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 등태후는 유경의 아내 경희 부인과 당시 12세였던 안제를 인질처럼 낙양에 남겨두었다.
같은 해, 상제가 불과 2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후계자 문제가 불거졌다. 조정 관리 대부분은 상제의 형제인 평원왕 유성()을 지지했다. 그러나 등태후는 유성이 병약하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반대했다. 실제로는 유성이 장성하여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권력을 빼앗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결국 등태후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13세였던 안제를 황제로 옹립했다. 등태후는 계속 섭정하며 오빠 등질과 함께 실권을 행사했다.
안제가 즉위한 해인 106년 9월에는 서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12월에는 생부인 청하왕 유경이 사망했다. 이듬해인 107년(영초 원년) 2월에는 청하국이 분할되었고, 9월에는 등태후의 모친 음씨에게 신야군(新野郡) 땅이 주어졌다. 같은 달, 서역 경영을 포기하고 서역도호가 폐지되었다. 또한 가을 9월, 태위 서방과 사공 윤근이 면직되고 장우와 주장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1월, 주장이 황제 폐위를 음모했다는 혐의로 처형되는 등 조정 내 불안이 계속되었다. 한편 10월에는 왜 국왕 수승 등이 생구 160명을 바치고 안제를 알현하기를 요청했다. 12월, 사공의 후임으로 장민이 임명되었다.
2. 2. 등태후의 섭정 (106년 ~ 121년)
화제 사후 상제가 즉위했으나 연평 원년(106년)에 불과 2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화제의 황후였던 등수(등태후)는 당시 13세였던 유호(안제)를 황제로 옹립하고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등태후의 오빠인 등즐은 대장군에 올라 군권을 장악하며 등씨 일족이 조정을 운영하게 되었다.[5] 안제의 생부인 청하효왕 유경은 106년 12월에 사망했다. 안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실권은 등태후와 등씨 일족에게 있었다. 등태후는 안제가 국정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안제의 생모 경귀인을 청하국으로 보냈다.등태후는 비교적 유능한 통치자로 평가받는다. 재위 기간 동안 강족과 남흉노의 침입, 잦은 자연재해가 있었으나 비교적 잘 대처했으며, 형법 개혁도 단행했다. 등씨 형제는 다른 외척에 비해 훌륭했다는 평가도 있는데, 등수는 반소에게 학문을 배웠고, 등즐은 식읍을 사양하기도 했다. 그러나 등태후가 관료와의 연락책으로 환관을 중용한 것은 훗날 환관 세력이 발호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섭정 기간 동안 안제는 국정에 거의 관여하지 못했으며, 점차 환관 강경, 이윤, 유모 왕성, 그리고 총애하는 후궁 염희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다. 115년, 염희가 그 해 초 안제의 유일한 아들 유보를 낳은 이귀인을 독살했다는 의혹에도 불구하고 안제는 염희를 황후로 책봉했다. 이들은 등태후 생전에는 실권을 잡지 못했지만, 등태후 사후를 대비하며 세력을 키웠다. 등태후는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불쾌하게 여겼으며, 총명했던 안제가 학문을 게을리하고 주색에 빠지는 모습에 실망하여 한때 안제의 사촌인 평원왕 유익으로 황제를 교체할 생각까지 했으나 실행하지는 않았다.
=== 주요 사건 (연도별) ===
연도 | 주요 사건 |
---|---|
106년 (연평 원년) | 안제 즉위, 등태후 섭정 시작. 9월 서역 반란 발발. 12월 안제 생부 청하효왕 사망. |
107년 (영초 원년) | 2월 청하국 분할. 9월 등태후 모친 음씨에게 신야군 봉토 하사. 서역도호 폐지. 9월 태위 서방, 사공 윤근 면직. 후임으로 장우, 주장이 임명되었으나 11월 주장이 황제 폐위를 도모했다는 혐의로 처형됨. 10월 왜 국왕 수승 등이 생구 160명을 바치고 알현 요청. 12월 사공 후임으로 장민 임명. |
108년 (영초 2년) | 정월 등즐이 기서에서 종강에게 패배. 10월 정서교위 임상이 평양에서 선령강에게 패배. 11월 등즐이 대장군에 임명됨. 선령강의 반란 지속. |
109년 (영초 3년) | 정월 안제 원복(성인식). 선령강 토벌 위해 기도위 임인 파견했으나 실패. 고구려 사자 방문. 3월 수도 낙양까지 기근 확산. 4월 사도 노공 면직, 하근 후임 임명. 5월 안제 외가 청하왕가 후사 단절로 낙안왕가에서 후계자 맞이. 7월 해적 피해 발생, 시어사 방웅 파견 토벌. 9월 오환, 선비 반란. 10월 흉노 남선우 반란, 중랑장 경종 파견. 11월 거기장군 하희 추가 파견. 12월 천재지변과 기근 심화. |
110년 (영초 4년) | 정월 해적 피해 확산, 어사중승 왕종, 청주자사 법웅 파견 격파. 도료장군 양근, 요동태수 경기가 남선우 공격. 2월 장안에 처음으로 옹이영도위 설치. 3월 남선우 항복. 선령강 세력 여전. 가을 7월 기도위 임인 옥사. 유진과 오경박사에게 명하여 동관의 경전 교정. 겨울 10월 등태후 모친 음씨 사망. |
111년 (영초 5년) | 정월 일식 발생. 태위 장우 면직, 이수 후임 임명. 선령강 세력 지속, 한인 동조자 발생. 우후가 조가현 도적 평정 후 강족 격퇴 주장. 반웅이 해적 격퇴. |
112년 (영초 6년) | 기후 불순 지속. 4월 사공 장민 면직, 유개 후임 임명. 반란 지속. 11월 호오환교위 오지 투옥 사망. 선령강 수장 사망 등 약화 조짐. |
113년 (영초 7년) | 가을 호강교위 후패, 기도위 마현이 선령강 격파. |
114년 (원초 원년) | 연호 개정. 기후 불순 지속. 선령강 세력 회복, 농도 차단. 9월 태위 이수 면직, 사마포 후임 임명. 「알자경군묘표(謁者景君墓表)」 건립. |
115년 (원초 2년) | 3월 선령강 익주 침공, 중랑장 윤취 파견 토벌. 4월 염귀인을 황후로 책봉. 6월 태위 사마포 사망. 7월 마영 후임 임명. 황충, 지진 피해 발생. 10월 중랑장 임상 삼보 주둔. 우부풍 중광 등이 선령강과 싸우다 대패. 12월 무릉만 반란. 사도 하근 사직, 사공 유개가 사도 승진, 원창이 사공 임명. |
116년 (원초 3년) | 정월 창오 등 남방 만이 반란, 2월 시어사 임척 파견 토벌. 5월 무릉만 재반란. 도료장군 등준이 남흉노 이끌고 선령강 격파. 6월 중랑장 임상이 선령강 격파. 7월 무릉만 평정. 11월 창오 등 만이 항복. 12월 임상이 선령강 격파. |
117년 (원초 4년) | 2월 일식 발생. 4월 사공 원창 사망. 선비족 요서 침공, 격퇴. 호강교위 임상이 자객 보내 선령강 수장 암살. 12월 기도위 마현과 함께 선령강 대파, 농우 평정. |
118년 (원초 5년) | 정월 월수이 등 서남방 이족 반란. 6월 고구려와 예맥이 현토군 공격. 천재지변 지속, 검약 조칙 반포. 선비족이 상곡 침입. |
119년 (원초 6년) | 2월 인재 구하는 조칙 반포. 가을 7월 선비족이 마성 침략, 도료장군 등준이 남선우 이끌고 격파. |
120년 (영녕 원년) | 3월 저족 강족이 장액 침공. 4월 유보를 황태자로 책봉. 6월 호강교위 마현이 저족 강족 격파. 10월 사공 이합 면직, 진포 후임 임명. 일식, 장마 피해 지속. 12월 사도 유개 파면, 양진 후임 임명. 부여 왕자 위구태가 사신으로 와 한나라로부터 인수(印綬)와 금색 비단 등을 받음. |
섭정 말기인 121년, 고구려가 마한, 예맥 병사를 동원하여 현토군을 포위하자, 부여 왕자 위구태가 2만 병력을 이끌고 한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이를 격파했다. 같은 해 등태후가 사망하면서 15년간의 섭정이 막을 내렸다. 이 시기 빈번한 외침과 재해는 후한의 국력을 소모시켰고, 등태후 사후 환관과 외척 염씨 세력의 발호는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2. 3. 친정과 혼란 (121년 ~ 125년)
건광 원년(121년) 3월, 오랫동안 섭정을 해 온 등수 태후가 사망하자, 27세의 안제는 친정을 시작했다. 그는 즉시 계모 경귀인의 오빠인 경보를 중용하여 조정의 주요 인물로 삼았다. 이후 아버지 청하효왕을 효덕황제(孝德皇帝)로, 어머니 좌소아를 효덕황후(孝德皇后)로 추존했으며, 할머니 송귀인은 경은황후(敬隱皇后)로, 계모 경귀인에게는 감릉대귀인(甘陵大貴人, 감릉은 청하효왕의 묘)이라는 특별한 칭호를 부여했다.초기에는 등 태후의 정책을 따르는 듯 보였으나, 염황후와 환관 강경, 이윤 등 안제의 측근들은 등씨 세력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21년 말, 안제는 이들과 결탁하여 등씨 일족의 관직과 봉토를 박탈하고 숙청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등즐, 등준을 비롯한 많은 등씨 일족이 자살하였다. 등씨 세력은 몰락했고, 이후 일부 생존자들이 복권되기도 했으나 가문은 이미 와해된 상태였다.
등씨 세력이 제거된 자리는 안제의 외척인 염황후의 오빠 염현, 염경, 염요 등 염씨 일족과, 환관 강경, 이윤, 번풍, 그리고 유모 왕성과 그녀의 딸 박영 등이 차지했다. 이들은 시중(侍中) 주광 등과 결탁하여 권력을 휘두르며 부패를 일삼았으나, 안제는 이들에 대한 비판을 묵살하고 처벌하지 않아 정치 기강이 해이해지고 부패가 만연했다. 안제는 종종 핵심 관리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안제 치세 동안 강족과 선비족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 골칫거리가 되었다. 121년에도 예맥이 선비와 연합하여 요동을 침공했고, 요동태수 채풍이 전사하는 등 변경의 불안은 계속되었다. 또한 고구려와 마한, 예맥이 현도성을 습격했으나, 부여의 도움을 받은 한나라 군대에 격파되기도 했다. 다만 서북쪽 변방인 서역(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및 구 소련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는 반초의 아들 반용이 여러 왕국에 대한 한나라의 지배력을 일부 회복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연광 3년(124년), 안제와 측근들의 전횡에 비판적이던 명망 높은 태위 양진은 직위에서 해임된 후, 항의의 표시로 자살하였다. 같은 해, 유모 왕성, 환관 강경, 번풍 등은 황태자 유보(훗날 순제)의 유모 왕남과 요리사 병길을 거짓으로 고발하여 처형시켰다. 황태자가 슬퍼하자, 왕성 등은 보복을 두려워하여 평소 황태자를 미워했던 염황후와 공모하여 황태자와 측근들을 무고하였다. 안제는 이를 믿고 9월에 황태자 유보를 폐위시켜 제음왕(濟陰王)으로 강등시켰다. 8월에는 경기를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연광 4년(125년) 3월, 안제는 남양군 완성(宛城)으로 순행하던 중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낙양으로 돌아가던 길에 32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염황후는 제음왕 유보가 황제가 되는 것을 막고, 장제의 손자이자 안제의 사촌인 어린 북향후 유의를 황제로 옹립했다. 염황후는 태후로서 임조청정하고 오빠 염현이 거기장군으로서 보좌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4월에는 태부 풍석, 태위 유희, 사도 이합 등이 임명되었으나, 직후 대장군 경기, 중상시 번풍, 시중 사윤, 주광 등은 죄를 추궁당해 번풍, 사윤, 주광은 옥사하고 경기는 자살했다. 6월 11일,[6] 안제는 공릉(恭陵)에 안장되었고 묘호 '''공종'''(恭宗)을 받았다.
그러나 유의는 그해 12월에 사망했고, 손정 등 제음왕 유보에게 충성하던 환관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유보를 황제로 즉위시켰으니 이가 순제이다. 이 과정에서 염 태후를 제외한 염씨 일족은 모두 주살되었다. 훗날 헌제 때인 190년, 안제의 묘호 '공종'은 폐지되었다.[7]
3. 죽음과 후계 다툼
124년, 환관 강경(江京)과 범풍(樊豐) 등은 태자 유보(劉保)의 유모 왕남(王男)과 요리사 병길(邴吉, 한나라 선제의 유명한 재상과 동명이인)을 거짓으로 고발하여 처형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태자 유보는 매우 슬퍼했다.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한 강경과 범풍은 평소 태자를 미워했던 안황후 염씨(閻氏)와 손을 잡았다. 그들은 태자 유보와 그의 시종들이 죄를 지었다고 거짓으로 고발했고, 안제는 이를 그대로 믿어 태자를 폐위시키고 제음왕(濟陰王)으로 강등시켰다. 이는 안제 주변의 환관과 외척 세력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25년 4월, 안제는 완성(宛城)으로 순행을 나섰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수도 낙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도중에 사망했다. 안제가 죽자 안황후 염씨는 폐위된 제음왕 유보가 황제가 되는 것을 막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나라 장제의 손자이자 안제의 사촌인 어린 북향후 유의(劉懿)를 황제로 내세웠다. 유의의 정확한 나이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당시 10세였던 제음왕 유보보다 훨씬 어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125년 6월 11일, 안제는 장례를 치르고 '공종'(恭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6]
그러나 그해 12월, 어린 황제 유의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를 기회로 손정(孫程) 등 평소 폐태자 유보에게 충성하던 환관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안씨 세력을 몰아내고 제음왕 유보를 황제로 옹립하니, 이가 바로 후한 순제이다. 쿠데타 성공 후 안씨 일족은 안태후(안황후 염씨)를 제외하고 모두 처형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훗날 후한 헌제 때인 190년, 안제의 묘호 '공종'은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폐지되었다.[7] 이는 안제 치세에 대한 후대의 부정적인 평가를 반영한다.
4. 연호
안제 |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8년 | 9년 | 10년 |
---|---|---|---|---|---|---|---|---|---|---|
서력 | 107년 | 108년 | 109년 | 110년 | 111년 | 112년 | 113년 | 114년 | 115년 | 116년 |
간지 | 정미(丁未) | 무신(戊申) | 기유(己酉) | 경술(庚戌) | 신해(辛亥) | 임자(壬子) | 계축(癸丑) | 갑인(甲寅) | 을묘(乙卯) | 병진(丙辰) |
연호 | 영초(永初) 원년 | 2년 | 3년 | 4년 | 5년 | 6년 | 7년 | 원초(元初) 원년 | 2년 | 3년 |
안제 | 11년 | 12년 | 13년 | 14년 | 15년 | 16년 | 17년 | 18년 | 19년 | |
서력 | 117년 | 118년 | 119년 | 120년 | 121년 | 122년 | 123년 | 124년 | 125년 | |
간지 | 정사(丁巳) | 무오(戊午) | 기미(己米) | 경신(庚申) | 신유(辛酉) | 임술(壬戌) | 계해(癸亥) | 갑자(甲子) | 을축(乙丑) | |
연호 | 4년 | 5년 | 6년 | 7년 영녕(永寧) 원년 | 2년 건광(建光) 원년 | 2년 연광(延光) 원년 | 2년 | 3년 | 4년 |
5. 가족 관계
- '''아버지''': 청하효왕 유경( 劉慶중국어 )
- '''어머니''' : 좌소아 부인( 左小娥중국어 ) - 유경의 후궁
- '''양모''' : 경희 부인( 耿姬중국어 ) - 유경의 정실 부인
안제의 아버지 유경은 화제의 형으로, 장제 치세 때 잠시 태자였으나 두 황후의 모함으로 폐위되었다. 안제의 친할머니인 송 부인 역시 이때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 좌소아 부인은 언니 좌대아( 左大娥중국어 )와 함께 집안이 몰락하여 어릴 때 궁녀가 되었고, 나중에 유경의 후궁이 되었다. 좌소아 부인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안제는 아버지 유경의 정실 부인인 경희 부인의 손에서 자랐다.
- '''황후'''
- * 안사황후 염씨 - 안제 사후 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폐위되었고 사망했다.
- * 공민황후 이씨 - 궁녀 출신으로 순제를 낳았으나, 염황후의 질투로 독살당했다. 사후 황후로 추존되었다.
- '''자녀'''
- * 장남 : 효순황제 유보( 孝順皇帝 劉保중국어 ) - 어머니는 공민황후 이씨이다. 제8대 황제로 즉위했다.
참조
[1]
문서
Xiao'e
Book of the Later Han
[2]
문서
guichou day of the 8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Yan'ping era
Book of the Later Han
[3]
서적
Fraser (2014)
[4]
서적
East-Asian Archaeoastronomy: Historical Records of Astronomical Observations of China, Japan and Korea
https://books.google[...]
CRC Press
2000
[5]
문서
bingyin day of the 4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Yong'ning era
Book of the Later Han
[6]
문서
jiyou day of the 4th month of the 4th year of the Yan'guang era
Book of the Later Han
[7]
문서
'[初平元年]是岁,有司奏,和、安、顺、桓四帝无功德,不宜称宗,...皆请除尊号。制曰:‘可。’'
Book of the Later Han
[8]
문서
『後漢書』巻5、孝安帝 劉祜 紀第五
[9]
서적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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