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폰세 데 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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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안 폰세 데 레온은 15세기 스페인에서 태어나 신세계로 건너가 히스파니올라에서 활동했으며, 푸에르토리코를 탐험하고 통치했다. 그는 1513년 플로리다를 발견했지만, 플로리다 원주민과의 교전으로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는 미국을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 중 한 명으로, 푸에르토리코의 초대 총독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의 탐험은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탐험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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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폰세 데 레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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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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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탐험가 |
출생 | 약 1474년 |
출생지 | 카스티야 연합왕국 산테르바스 데 캄포스 |
사망 | 1521년 7월경 |
사망지 | 누에바에스파냐 아바나 |
안장지 | 산후안 바티스타 대성당 (산후안) |
배우자 | 이름 미상, 레오노르 폰세 데 레온 |
자녀 | 후아나, 이사벨, 마리아 |
친척 | 후안 폰세 데 레온 2세 (손자), 후안 폰세 데 레온 이 로아이사 (증손자) |
통치 | |
직위 | 푸에르토리코 총독 |
임기 | 1508년 ~ 1509년 |
전임 | 직책 신설 |
후임 | 후안 세론 |
임기 | 1510년 ~ 1511년 |
전임 | 후안 세론 |
후임 | 후안 세론 |
임기 | 1515년 ~ 1519년 |
전임 | 크리스토발 데 멘도사 |
후임 | 산체스 벨라스케스/안토니오 데 라 가마 |
본명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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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린 시절 및 스페인에서의 삶
후안 폰세 데 레온은 젊은 시절 왕실 기사사령관 페드로 누녜스 데 구스만의 기사 종자로 일하며 사회적 예절, 사냥, 그리고 군사 훈련을 받았다. 그는 1487년부터 1492년까지 그라나다 전쟁에 참여하여 무슬림 무어인들과 싸우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1493년 9월, 폰세 데 레온은 약 1,200명의 선원, 식민주의자, 군인들과 함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세계로의 두 번째 항해에 "신사 자원봉사자" 중 한 명으로 합류했다. 이 항해를 통해 그는 이스파니올라(오늘날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에 도착하여 정착하게 된다. 항해 도중 그는 훗날 푸에르토리코로 알려질 보리켄 섬의 해안을 처음 목격했다.
2. 1. 가문
후안 폰세 데 레온은 현재 스페인 바야돌리드 지방 북부에 있는 산테르바스 데 캄포스 마을에서 태어났다. 초기 역사가들은 그의 출생 연도를 1460년으로 추정하여 이 날짜가 전통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최근 증거에 따르면 1474년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더 높다.폰세 데 레온이라는 성씨는 13세기에 유래했다. 폰세 데 레온 가문은 폰세 벨라 데 카브레라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베르무도 누녜스 백작의 후손이자 폰세 히랄도 데 카브레라의 딸인 산차 폰세 데 카브레라의 후손이었다. 1235년 10월 이전에 폰세 벨라 데 카브레라와 그의 아내 테레사 로드리게스 기론의 아들 페드로 폰세 데 카브레라는 레온의 알폰소 9세 왕의 사생아 딸인 알돈사 알폰소와 결혼했다. 이 결혼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부계 혈통에 "데 레온"을 추가하여 이후 폰세 데 레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후안 폰세 데 레온의 부모에 대한 신원은 여전히 확실하지 않지만, 푸에르토리코의 역사학자 아우렐리오 티오는 페드로 폰세 데 레온과 레오노르 데 피게로아가 그의 부모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폰세 데 레온은 명망 있고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우렐리오 티오에 따르면, 후안 폰세의 아버지는 비야가르시아의 네 번째 영주인 페드로 폰세 데 레온이고, 어머니는 살바레온의 영주 로렌조 수아레스 데 피게로아와 마리아 마누엘의 딸인 레오노르 데 피게로아였다. 이를 통해 후안 폰세의 아버지 쪽 할머니인 테레사 데 구스만(테레사 폰세 데 레온 이 구스만)은 라 세뇨라 데 라 카사 토랄이었으며, 후안 폰세는 양쪽 가문 모두에서 폰세 데 레온 가문에 속하게 된다.
그의 친척 중에는 무어인과의 전쟁에서 "새로운 엘 시드"로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던 카디스의 로드리고 폰세 데 레온 공작이 있었다. 그는 후안 폰세 데 레온의 사촌이었다. 할머니 테레사 데 구스만을 통해 폰세 데 레온은 또 다른 유명 가문인 누녜스 데 구스만과도 관련이 있었다. 동시대의 연대기 작가인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오비에도 이 발데스는 젊은 시절 그가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페드로 누녜스 데 구스만의 시종으로 일했다고 기록했다.
폰세 데 레온이 1492년 가톨릭 군주가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무슬림 정권인 그라나다 토후국을 정복한 그라나다 전쟁에서 싸웠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푸에르토리코의 역사학자 비센테 무르가 산스는 그가 페드로 누녜스 데 구스만의 시종으로서 로드리고 폰세 데 레온의 편에서 싸웠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페르난데스 데 오비에도는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라나다 전쟁 경험이 있는 군인이었다고 기록했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가 그라나다 원정에서 페드로 누녜스 데 구스만을 수행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3. 신세계로의 도착과 초기 활동
1493년 9월, 후안 폰세 데 레온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두 번째 신세계 항해에 참여하여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는 히스파니올라섬(오늘날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에 정착하여 군인으로서 활동하며 원주민 타이노족을 정복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원주민들이 유럽인들과의 전투에서 희생되거나 노예가 되었다.
히스파니올라 동부 지방에서 활동하며 농장을 경영하여 부를 축적했지만, 폰세 데 레온은 금을 찾으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항해자들과 원주민들로부터 인근 섬인 보리켄(푸에르토리코의 타이노족 이름)에 금이 풍부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1506년, 폰세 데 레온은 이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스페인 당국의 공식적인 허가 없이 비밀리에 보리켄 섬으로 탐험을 떠났다. 탐사 결과, 그는 섬에 실제로 금을 비롯한 귀중한 자원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히스파니올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푸에르토리코를 본격적으로 정복하고 식민화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3. 1. 히스파니올라에서의 활동
1502년, 새로 임명된 총독 니콜라스 데 오반도가 히스파니올라에 도착했다. 스페인 왕실은 오반도가 혼란스러운 식민지에 질서를 가져오기를 기대했고, 그는 원주민 타이노족(Taíno people)을 굴복시키는 방향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이는 1503년 11월 하라구아 학살로 이어졌다.1504년, 타이노족이 섬 동쪽 이구에이(Higüey)의 스페인 수비대를 공격하자, 오반도는 폰세 데 레온에게 반란 진압을 지시했다. 폰세 데 레온은 이 진압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는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수사가 스페인 당국에 알리려 했던 사실이다. 오반도는 이 공로를 인정하여 폰세 데 레온을 새롭게 정복한 이구에이 주의 변경 총독으로 임명했다. 폰세 데 레온은 상당한 토지와 함께 엔코미엔다 제도를 통해 농장 경작에 필요한 타이노족 노동력을 확보했다. 그는 이 제도를 이용하여 원주민 노동력을 착취하고 농산물과 가축을 판매하며 부를 축적했다. 그는 인근 보카 데 유마(Boca de Yuma)에서 스페인 배들에 물품을 공급하며 시장을 확보했다.
1505년 오반도는 폰세 데 레온에게 이구에이에 새로운 도시 건설을 허가했고, 폰세 데 레온은 이 도시를 살바레온(Salvaleón)이라고 명명했다. 1508년, 이사벨 여왕 사후 원주민 착취에 대한 제약이 줄어들자, 페르디난드 2세는 폰세 데 레온에게 남은 타이노족을 정복하고 금을 채굴하도록 강제하는 등, 원주민 착취를 공식적으로 허가했다.
이 시기에 폰세 데 레온은 여관 주인의 딸인 레오노라와 결혼했다. 그들은 세 딸, 후아나, 이사벨, 마리아와 아들 루이스를 두었다. 폰세 데 레온이 가족이 늘어나자 짓도록 명령한 큰 석조 주택은 오늘날에도 산 라파엘 델 유마 근처에 서 있으며, 그는 카스티야에 있는 할머니의 영지를 따서 살바레온이라고 명명했다.
4. 푸에르토리코 탐험 및 통치
히스파니올라 섬 동부 이구에이 지역의 지사로 재직하던 중, 후안 폰세 데 레온은 인근 섬 보린켄(현 푸에르토리코)의 부유함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1] 1508년,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 국왕은 폰세 데 레온에게 푸에르토리코를 탐험하고 정복하며, 금을 채굴하도록 허가했다.
같은 해, 폰세 데 레온은 푸에르토리코 원정을 시작하여 현재의 산후안 만 근처에 첫 스페인 정착지인 카파라를 건설했다.[3] 당시 타이노족 추장 아궤이바나는 스페인인들을 우호적으로 맞이했다.[4] 폰세 데 레온은 빠르게 섬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고, 1509년 스페인 왕실로부터 푸에르토리코의 첫 총독으로 공식 임명되었다.[5]
총독 재임 기간 동안 폰세 데 레온과 다른 스페인 정복자들은 엔코미엔다 제도를 통해 타이노족 원주민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하여 요새 건설과 금 채굴 등에 투입했다.[6] 이 과정에서 과중한 노동과 스페인인들이 옮긴 질병으로 인해 수많은 타이노족이 목숨을 잃었다.[7] 폰세 데 레온은 이러한 식민 통치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8]
그러나 1506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사망 이후 그의 아들 디에고 콜론이 아버지의 권리를 주장하며 법적 다툼을 벌였고, 결국 법원에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이 판결의 영향으로 폰세 데 레온은 1511년 푸에르토리코 총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4. 1. 푸에르토리코 원정 (1508년)
히스파니올라 섬 동부 이구에이 지역의 지사로 재직하는 동안, 후안 폰세 데 레온은 인근 보린켄(Borinquen영어, 현 푸에르토리코) 섬의 부유함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는 타이노 족 정복과 엔코미엔다 운영을 통해 이미 상당한 부를 축적한 상태였으며, 새로운 기회를 찾아 보린켄으로 원정을 떠날 허가를 얻었다.[1]1508년, 폰세 데 레온은 푸에르토리코로의 첫 공식 원정을 시작하여[2] 현재의 산후안 만 인근에 상륙했다. 그는 그곳에 섬 최초의 스페인 정착지인 카파라(Caparra)를 건설했다.[3] 당시 푸에르토리코의 유력한 타이노 족 추장(카시케) 아게이바나(Agüeybaná)는 스페인인들을 초자연적인 존재로 여기고 폰세 데 레온과 그의 일행을 환대했다.[4]
폰세 데 레온은 아게이바나의 협조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섬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해 나갔다. 그의 성공적인 정복 활동 결과, 1509년 스페인 왕실은 그를 푸에르토리코의 첫 총독으로 공식 임명했다.[5] 총독이 된 폰세 데 레온과 다른 스페인 정복자들은 섬의 금을 채굴하고 요새를 건설하는 등 식민지 경영에 박차를 가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타이노 원주민들이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6] 더욱이 타이노 족은 스페인인들이 옮겨온 천연두와 같은 유럽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노동 착취와 질병의 확산으로 인해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 비극을 겪었다.[7] 이러한 상황 속에서 폰세 데 레온은 푸에르토리코 통치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8]
4. 2. 푸에르토리코 총독 (1509년 ~ 1511년)
히스파니올라 섬 동부 이구에이 지역의 지사로 있던 후안 폰세 데 레온은 인근의 보린켄(푸에르토리코) 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곳으로 갈 허가를 얻었다. 1508년, 그는 산후안 항구 인근 카파라에 첫 스페인 정착지를 건설했다. 당시 타이노족의 주요 추장(카시크) 중 한 명인 아궤이바나는 스페인인들을 신으로 믿고 폰세 데 레온을 환대했다.폰세 데 레온은 섬에 대한 통제력을 빠르게 확보했고, 그 결과 1509년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에 의해 푸에르토리코의 첫 총독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총독으로서 그는 엔코미엔다 제도를 활용하여 원주민 타이노족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 타이노족은 요새 건설과 금 채굴 등에 투입되었으며, 과중한 노동과 스페인인들이 가져온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어 많은 수가 사망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폰세 데 레온은 총독 재임 기간 동안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그의 총독 임기는 1511년까지 지속되었다.
4. 3. 디에고 콜론과의 갈등
1506년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종신 제독 지위를 가졌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사망하자, 스페인 왕실은 그의 아들 디에고 콜론에게 아버지와 동등한 특권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당시 스페인 왕실은 푸에르토리코를 식민지화하고 통치할 인물로 폰세 데 레온을 선임했고, 그는 1509년 푸에르토리코의 통치자가 되었다.그러나 디에고 콜론은 마드리드의 법원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여 결국 승소했다. 이 판결에 따라 폰세 데 레온은 1511년 푸에르토리코 총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하고 디에고 콜론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폰세 데 레온은 이후 쿠바 북쪽 지역을 탐험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5. 플로리다 탐험
1506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디에고 콜럼버스는 아버지와 동등한 특권을 스페인 왕실에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16] 당시 스페인 군주는 푸에르토리코를 식민지화하고 통치할 인물로 폰세 데 레온을 지명했다. 그러나 디에고 콜럼버스는 마드리드 법원에서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16]
결국 폰세 데 레온은 1511년 푸에르토리코 총독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자신의 명성에 흠집이 가고 디에고 콜럼버스 밑에서 일하기를 원치 않았던 그는 새로운 탐험 기회를 모색했고, 스페인 왕실로부터 쿠바 북쪽 지역을 탐험할 권리를 얻게 되었다.[16] 이는 그가 이후 플로리다를 탐험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5. 1. 1차 플로리다 항해 (1513년)

후안 폰세 데 레온은 푸에르토리코 총독직에서 물러난 후, 새로운 탐험에 대한 허가를 스페인 왕실로부터 얻었다. 그는 바하마의 비미니라는 섬에 젊음의 샘과 많은 금이 있다는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찾기로 결심했다.
1513년 3월 3일, 폰세 데 레온은 사비를 들여 마련한 세 척의 함선 – 산티아고(Santiago)호, 산타 마리아 데 라 콘솔라시온(Santa Maria de la Consolacion)호, 산 크리스토발(San Cristobal)호 – 를 이끌고 푸에르토리코의 산헤르만에서 항해를 시작했다. 같은 해 4월 2일, 그의 원정대는 현재 플로리다주 북동부 해안 어딘가로 추정되는 육지에 상륙했다. 그는 그곳이 비미니가 아니며, 무성한 초목으로 뒤덮인 것을 보고 섬이 아닌 육지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 땅을 스페인어로 "꽃이 만발한 곳"이라는 의미의 "La Florida"(라 플로리다)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당시 현지에서 만개한 식물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설과, 상륙 시기가 스페인의 부활절 축제 기간("Pascua Florida", 꽃의 축제)이었기 때문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플로리다에서는 이 사건을 기념하여 4월 2일을 파스쿠아 플로리다 데이 공휴일로 지정했다.)
폰세 데 레온은 플로리다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하며 발견한 강을 해도에 기록하고 일부 내륙 지역과 입구들을 탐험했다. 항해 도중 여러 원주민 부족과 마주쳤으며, 한 지점에서는 칼루사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기도 했다. 그는 남쪽으로 계속 나아가 플로리다키스를 지나 키웨스트에 도달했으며, 플로리다 서해안의 샬럿 하버 근처까지 탐험 범위를 넓혔다. 이후 남쪽의 아바나(쿠바)를 잠시 방문한 뒤, 다시 북쪽 플로리다의 체케스타(비스케인만)에 들렀다가 푸에르토리코로 귀환했다.
1513년 플로리다 탐험 당시 폰세 데 레온이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원주민을 최소 한 명 이상 만났다는 기록이 있어, 그가 플로리다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흔히 폰세 데 레온이 젊음의 샘을 찾아 플로리다를 발견했다는 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는 그가 사망한 후에야 그와 결부된 이야기이다. 젊음을 되찾게 해주는 샘에 대한 이야기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모두에 이전부터 존재했으나,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오비에도나 에르난도 데 에스칼란테 폰타네다와 같은 후대의 역사가들이 그의 항해와 샘 이야기를 연결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실제 폰세 데 레온의 탐험 목적은 새로운 영토를 발견하고 금과 같은 자원을 확보하는 데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5. 2. 이후의 항해와 플로리다 재탐험 (1521년)
1514년 스페인으로 돌아간 폰세 데 레온은 플로리다와 비미니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플로리다에 식민지를 건설할 권한도 받았다. 다음 해인 1515년에는 과달루페의 카리브족을 정복하려 했으나 원정에 실패하였고, 이후 푸에르토리코로 돌아가 1521년까지 머물렀다.1521년, 폰세 데 레온은 플로리다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2척의 배로 원정대를 조직했다. 이 원정대는 사제, 농부, 장인을 포함한 200명의 인원과 50마리의 말, 다른 가축들, 그리고 농기구로 구성되었다. 원정대는 플로리다 남서 해안, 칼루사해치 강 또는 샬롯 만 부근에 상륙했다. 그러나 식민지 개척자들은 도착하자마자 아메리카 원주민인 칼루사족에게 습격을 당했고, 이 과정에서 폰세 데 레온은 어깨에 만치닐 수액에서 얻은 독이 묻은 화살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 이 습격 이후 폰세 데 레온과 식민지 개척자들은 쿠바 아바나로 향했지만, 그는 결국 그곳에서 부상으로 인해 사망했다[16]. 그의 묘는 푸에르토리코의 올드 산후안에 있는 산후안 대성당에 위치해 있다.
6. 죽음과 유산
1521년, 폰세 데 레온은 2척의 배로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한 원정대를 조직했다. 이 원정대는 사제, 농부, 장인을 포함한 200명의 승무원, 50마리의 말과 다른 가축들, 그리고 농기구로 구성되었다. 원정대는 플로리다 남서 해안의 칼루사해치 강(Caloosahatchee River영어) 또는 샬럿 하버 근처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개척자들은 도착 직후 아메리카 원주민인 칼루사족에게 습격을 당했고, 이 과정에서 폰세 데 레온은 어깨에 독화살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 이 독화살에는 만치닐 나무 수액에서 얻은 독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6]
습격 이후 폰세 데 레온과 식민지 개척자들은 쿠바의 아바나로 후퇴하였다. 그해 7월, 폰세 데 레온은 아바나에서 결국 부상으로 사망하였다.[16] 그의 유해는 처음에 쿠바에 안장되었으나, 후에 푸에르토리코 올드 산후안에 있는 산후안 바우티스타 대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16]
6. 1. 유산
후안 폰세 데 레온은 오늘날 미국 본토를 방문한 첫 유럽인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푸에르토리코의 초대 총독이기도 했다. 비록 그가 플로리다에 식민지를 세우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의 탐험 활동은 이후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탐험을 지속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후에도 많은 스페인 탐험가들이 플로리다 탐험에 나섰다. 푸에르토리코에 세운 그의 식민지들은 그가 사망한 후에도 오랫동안 유지되었으며,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해당 지역에 남아 있다. 푸에르토리코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폰세는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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