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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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44년은 남송 순우 4년, 일본 간겐 2년, 쩐 왕조 티엔응찐빈 13년에 해당한다. 이 해에는 영평사가 건립되었고, 섭정 호조 쓰네토키에 의해 쇼군 후지와라노 요리쓰네가 쇼군직을 넘겨주고 그의 아들 후지와라노 요리쓰구가 쇼군에 취임했다. 유럽에서는 몽세귀르 공성전이 벌어졌으며, 알미스라 조약이 체결되었고, 프랑스의 루이 9세가 말라리아로 위독해지는 사건이 있었다. 레반트 지역에서는 칼리즘 군대의 침입으로 예루살렘이 약탈당하고 라 포르비 전투에서 십자군이 패배했다. 종교적으로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가 로마에서 쫓겨나 프랑스로 도피했으며, 리옹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해에는 헤센의 헨리 1세, 이븐 알푸와티 등이 태어났고, 그러퍼드 앱 릴웰린, 미나모토노 미쓰유키, 사이온지 긴쓰네 등이 사망했다.
2. 연호
3. 기년
4. 사건
- 3월 16일 – 몽세귀르 공성전: 9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프랑스군이 몽세귀르 성을 함락하고 파괴하였다. 성 아래에서 약 200명의 카타르파 이단자들이 화형되었다. 이는 카타르파의 최종 패배를 의미하며, 카타르파 추종자들은 숲과 산악 지대로 흩어져 도망치는 망명자가 되었다.[1]
- 3월 26일 – 알미스라 조약: 아라곤의 하메 1세와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무슬림 지역의 분할에 합의하였다. 비아르에서 부소트를 거쳐 비야호요사까지의 선 남쪽 모든 지역은 카스티야 왕관에 귀속되었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아라곤의 추가적인 확장은 종식되었다.[2]
- 6월 - 칼리즘 군대(약 1만 명)가 시리아 영토를 침입하여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마을을 불태웠다. 티베리아스를 지나 갈릴리를 공격하고 티베리아스를 함락시켰다. 칼리즘 군대는 나블루스를 지나 예루살렘을 향해 남쪽으로 더 진격했다.[4]
- 7월 15일 - 예루살렘 공방전: 칼리즘 기병들이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약탈했다. 칼리즘 군대는 아르메니아인 거리로 진입하여 기독교 인구를 학살하고 유대인들을 몰아냈다.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5]
- 8월 23일 - 다윗의 탑이 칼리즘 군대에 항복했고, 약 6,000명의 기독교 남녀노소가 예루살렘에서 행진했다. 그들이 자파를 향해 이동할 때, 예루살렘 성벽에서 십자군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약 2,000명이 학살되었다.[6]
- 10월 4일 - 예루살렘이 칼리즘 군대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십자군은 아크레 밖에서 기병 1,000명과 보병 6,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집결했다. 다마스쿠스와 호мс의 아유브 왕조 군대(약 4,000명)가 합류했고, 에미르 안-나시르 다우드가 케락에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왔다.[7]
- 10월 17일 - 라 포르비 전투: 발터 4세 지휘 아래 십자군(약 1만 명)과 아유브 왕조 동맹군이 히리비야(또는 '''라 포르비''') 근처에서 이집트와 칼리즘 군대에게 패배했다. 약 7,500명이 사망하고 군대는 궤멸되었다. 발터와 샤토뇌프의 윌리엄이 포로로 잡혔다.[8]
- 12월 –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심각한 말라리아 감염으로 위독해졌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는 회복하면 십자군 원정을 떠나겠다고 서원하였다. 루이 9세는 목숨을 구원받고, 건강이 허락되자마자 십자군 십자가를 받고 제7차 십자군을 위한 준비를 즉시 시작하였다.[3]
- 일본에서 영평사(永平寺)가 건립되었다.
- 섭정 호조 씨의 호조 쓰네토키에 의해 쇼군 후지와라노 요리쓰네가 쇼군직을 넘겨주고, 그의 아들인 6세의 후지와라노 요리쓰구가 쇼군에 취임하였다.
4. 1. 유럽
- 3월 16일 – 몽세귀르 공성전: 9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프랑스군이 몽세귀르 성을 함락하고 파괴하였다. 성 아래에서 약 200명의 카타르파 이단자들(완전한 카타르인과 신자들)이 화형되었다. 이는 카타르파의 최종 패배를 의미하며, 카타르파 추종자들은 숲과 산악 지대로 흩어져 도망치는 망명자가 되었다.[1]
- 3월 26일 – 알미스라 조약: 아라곤의 하메 1세와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무슬림 지역의 분할에 합의하였다. 비아르에서 부소트를 거쳐 비야호요사까지의 선 남쪽 모든 지역은 카스티야 왕관에 귀속되었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아라곤의 추가적인 확장은 종식되었다.[2]
- 12월 –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심각한 말라리아 감염으로 위독해졌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는 회복하면 십자군 원정을 떠나겠다고 서원하였다. 루이 9세는 목숨을 구원받고, 건강이 허락되자마자 십자군 십자가를 받고 제7차 십자군을 위한 준비를 즉시 시작하였다.[3]
4. 2. 레반트
- 6월 - 1231년에서 1246년 사이의 칼리즘 군대(약 1만 명)가 시리아 영토를 침입하여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마을을 불태웠다. 다마스쿠스가 포위 공격에는 너무 강력하여 티베리아스를 지나 갈릴리를 공격하고 티베리아스를 함락시켰다. 칼리즘 군대는 나블루스를 지나 예루살렘을 향해 남쪽으로 더 진격했다.[4]
- 7월 15일 - 예루살렘 공방전: 칼리즘 기병들이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약탈했다. 거리에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고, 칼리즘 군대는 아르메니아인 거리로 진입하여 기독교 인구를 학살하고 유대인들을 몰아냈다.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5]
- 8월 23일 - 다윗의 탑이 칼리즘 군대에 항복했고, 약 6,000명의 기독교 남녀노소가 예루살렘에서 행진했다. 그들이 자파를 향해 길을 따라 이동할 때, 예루살렘 성벽에서 십자군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약 2,000명이 학살되었다.[6]
- 10월 4일 - 예루살렘이 칼리즘 군대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십자군은 아크레 밖에서 기병 1,000명과 보병 6,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집결했다. 다마스쿠스와 호म्스의 아유브 왕조 군대(약 4,000명)가 합류했고, 에미르 안-나시르 다우드가 케락에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왔다.[7]
- 10월 17일 - 라 포르비 전투: 발터 4세 지휘 아래 십자군(약 1만 명)과 아유브 왕조 동맹군이 히리비야(또는 '''라 포르비''') 근처에서 이집트와 칼리즘 군대에게 패배했다. 약 7,500명이 사망하고 군대는 궤멸되었다. 발터와 샤토뇌프의 윌리엄이 포로로 잡혔다.[8]
4. 3. 동아시아
- 영평사(永平寺)가 건립되었다.
- 섭정 호조 씨의 호조 쓰네토키에 의해 쇼군 후지와라노 요리쓰네가 쇼군직을 넘겨주고, 그의 아들인 6세의 후지와라노 요리쓰구가 쇼군에 취임하였다.
4. 4. 종교
6월 7일 -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가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군대에 의해 로마에서 쫓겨나 변장하고 비밀리에 수트리로 이동했다. 그의 친척들이 준비한 제노바 갤리선이 치비타베키아 항구에서 그를 제노바로 데려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1]10월 5일 - 인노켄티우스 4세가 프랑스로 피신하여 리옹으로 이동했으며, 11월 29일에 도착했다. 이 도시는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인노켄티우스 4세는 루이 9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2]
12월 27일 - 인노켄티우스 4세는 리옹에서 공의회를 소집했으며, 이는 약 140명의 주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리옹 공의회로 이어졌다.[3]
5. 탄생
- 6월 24일 – 헤센의 헨리 1세, 독일 귀족 (1308년 사망)
- 6월 25일 – 이븐 알푸와티, 아랍 역사가이자 작가 (1323년 사망)
- 아그네스 블란베킨, 오스트리아 베기네 신비주의자 (1315년 사망)
- 다이 비아오위안, 중국 문인, 시인이자 작가 (1310년 사망)
- 쿠만의 엘리자베트, 헝가리 왕국(1000–1301)의 왕비 (1290년 사망)
- 폴케 드 뤼넬, 프랑스 트루바두르이자 작가 (1300년 사망)
- 기 드 몽포르, 잉글랜드 귀족이자 기사 (1291년 사망)
- 피르네부르크의 하인리히 2세, 쾰른 대교구 대주교 (1332년 사망)
- 앙리 1세('뚱뚱한 왕'), 나바라 왕국 왕 (블루아 가문) (1274년 사망)
- 홍다구 (또는 '''Charghu'''), 고려 무장 (1291년 사망)
- 인게보르그 에리크스도테르, 노르웨이 왕국(872–1397)의 왕비 (1287년 사망)
- 프라하의 요한 3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1268년 사망)
- 프랑스의 루이, 프랑스 귀족이자 섭정 (1260년 사망)
- 안티오크의 마가렛, 울트레메르 귀족 여성 (1308년 사망)
- 오토 3세 (또는 '''4세'''), 독일 귀족이자 기사 (1285년 사망)
- 홍차구, 고려, 원의 무장 (1291년 사망)
- 광교겸중, 가마쿠라 시대의 공경 (1308년 사망)
6. 사망
- 3월 1일 - 그러퍼드 앱 릴웰린(웨일스 귀족, 1196년 출생)
- 3월 19일 - 이스나르도 다 키암포(이탈리아 설교가이자 사제)
- 3월 27일 - 미나모토노 미쓰유키(가마쿠라 시대의 귀족, 문학가, 가인, 1163년 출생)
- 4월 2일 - 헨리크 하르페스트랭(덴마크 의사이자 작가)
- 5월 3일 - 미마사카 나가히라(가마쿠라 시대의 관료, 1168년 출생)
- 9월 3일 - 구알라 데 로니이스(브레시아의 로마 가톨릭 교구 주교, 1180년 출생)
- 10월 2일 - 사이온지 긴쓰네(가마쿠라 시대의 공경, 가인, 1171년 출생)
- 10월 24일 - 윌리엄 브리웨어(잉글랜드 주교이자 외교관)
- 10월 30일 - 오쓰키 스에쓰구(가마쿠라 시대의 관료, 1192년 출생)
- 11월 18일 - 이븐 아빌담(시리아 역사가, 1187년 출생)
- 12월 5일 - 플랑드르 백작 부인 조앤(플랑드르 백작령과 에노 백작령의 백작 부인)
- 알렉산더 드 스털링(스코틀랜드 귀족이자 기사)
- 기네 백작 보두앵 3세(플랑드르 귀족이자 기사, 1198년 출생)
- 부샤르 4세 드 아브네(프랑스 귀족이자 기사)
- 1244년 사망한 카스티야의 엘레오노르(아라곤 왕국의 왕비, 1200년 출생)
- 제임스 오브 페코라라(이탈리아 수도사, 추기경, 외교관)
- 요안니스 콤네노스 두카스(테살로니카 제국의 황제)
- 살루초의 만프레드 3세(이탈리아 귀족이자 기사)
- 메이르 아불라피아(카스티야 랍비이자 작가)
- 랄프 드 네빌(잉글랜드 대주교이자 정치가)
- 스트라시언 백작 로버트(스코틀랜드 귀족이자 기사)
- 엘류 추차이(몽골 제국의 중신, 1190년 출생)
참조
[1]
서적
Cassell's Chronology of World History
[2]
서적
Negotiating cultures: bilingual surrender treaties in Muslim-Crusader Spain under James the Conqueror
https://books.google[...]
Brill
[3]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 III: The Kingdom of Acre
[4]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 III: The Kingdom of Acre
[5]
서적
Jerusalem: Illustrated History Atlas
Macmillan Publishing
[6]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 III: The Kingdom of Acre
[7]
서적
Battles of the Crusades
[8]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 III: The Kingdom of Acre
[9]
간행물
中書令耶律公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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