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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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92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민주당의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공화당의 현직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을 꺾고 당선된 선거이다. 클리블랜드는 46.02%의 득표율과 277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고, 해리슨은 43.01%의 득표율과 145명의 선거인단을 얻었다. 인민당의 제임스 위버는 8.51%의 득표율과 22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며 선전했다. 이 선거는 관세, 금본위제, 노동 문제 등이 주요 쟁점이 되었으며, 클리블랜드의 승리로 민주당은 1856년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과 상하 양원을 모두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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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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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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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개요 | |
선거 이름 | 18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
국가 | 미국 |
국기 연도 | 1891년 |
선거 유형 | 대통령 선거 |
선거 진행 여부 | 아니오 |
이전 선거 | 18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888년 |
다음 선거 | 18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896년 |
선거일 | 1892년 11월 8일 |
선거인단 수 | 444명 |
당선에 필요한 선거인단 수 | 223명 |
투표율 | 75.8% |
투표율 변화 | 4.7% 감소 |
후보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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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소속 정당 | 민주당 |
출신 주 | 뉴욕주 |
러닝메이트 | 애들라이 스티븐슨 1세 |
획득 선거인단 수 | 277 |
승리 주 | 23 |
득표수 | 5,556,917 |
득표율 | 46.0% |
후보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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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벤자민 해리슨 |
소속 정당 | 공화당 |
출신 주 | 인디애나주 |
러닝메이트 | 화이트로 리드 |
획득 선거인단 수 | 145 |
승리 주 | 16 |
득표수 | 5,176,108 |
득표율 | 43.0% |
후보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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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제임스 B. 위버 |
소속 정당 | 인민당 |
출신 주 | 아이오와주 |
러닝메이트 | 제임스 G. 필드 |
획득 선거인단 수 | 22 |
승리 주 | 5 |
득표수 | 1,041,029 |
득표율 | 8.6% |
선거 결과 | |
대통령 당선자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소속 정당 | 민주당 |
선거 전 대통령 | 벤자민 해리슨 |
선거 전 소속 정당 | 공화당 |
선거 후 대통령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선거 후 소속 정당 | 민주당 |
2. 후보 선출
공화당에서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전당대회를 통해 현직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을 대통령 후보로 다시 지명했다. 해리슨은 과반수 표를 얻었으나, 전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G. 블레인과 오하이오주 주지사 윌리엄 매킨리도 상당한 표를 얻으며 경쟁했다. 부통령 후보로는 뉴욕 트리뷴의 편집자였던 화이트로 리드가 현직 부통령 리바이 모턴을 대신하여 만장일치로 지명되었다.
민주당은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전당대회를 열어 전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를 세 번째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클리블랜드는 뉴욕주 상원의원 데이비드 B. 힐과 아이오와주 주지사 호레이스 보이즈를 누르고 후보 자리를 확보했다. 부통령 후보로는 일리노이주 출신의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이 지명되었다.
이 외에도 세 개의 다른 정당이 후보를 내세웠다. 금지당은 존 비드웰을 대통령 후보로, 제임스 크랜필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인민당은 제임스 위버와 제임스 필드를, 사회노동당은 사이먼 윙과 찰스 매쳇을 각각 대통령 및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인민당과 사회노동당은 이 선거를 통해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다.
2. 1. 공화당
1892년 6월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현직 대통령 벤저민 해리슨을 대통령 후보로 다시 지명했다.해리슨 행정부는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로 인해 뉴욕의 정치 보스인 토머스 C. 플랫을 비롯한 일부 당 지도자들은 메인주 출신의 제임스 G. 블레인을 중심으로 해리슨을 교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블레인은 1884년 대선 후보였으나 그로버 클리블랜드에게 패배한 경험이 있었다.
블레인 본인은 건강 문제와 최근 세 자녀(워커, 앨리스, 에몬스)를 잃은 슬픔 등으로 인해 다시 출마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명확하게 불출마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해리슨은 블레인이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자신이 블레인의 지명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후보라고 생각했다. 결국 해리슨은 전당대회 3일 전에 블레인에게 국무장관직 사임을 압박했고, 블레인은 이를 받아들였다.[9]
1888년 전당대회에서 해리슨에게 밀렸던 오하이오주 상원의원 존 셔먼도 거론되었으나, 그는 또 다른 경쟁을 원치 않았다. 오하이오 주지사 윌리엄 매킨리는 해리슨에 대한 불만과 당내 인기에도 불구하고, 마크 한나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블레인과 해리슨 지지자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그는 해리슨과 블레인이 여러 차례 투표에도 지명되지 못할 경우 자신이 대안 후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다가오는 선거가 공화당에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했다.[10]
1892년 6월 7일부터 10일까지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해리슨 측은 이미 지명을 확보한 상태였다. 첫 번째 투표에서 해리슨은 535.17표를 얻어 재지명되었다. 윌리엄 매킨리는 공식 후보가 아니었음에도 182표를 얻었으며, 제임스 G. 블레인은 181.83표를 얻었다.[11] 오하이오 대표단이 매킨리의 이름으로 표를 던지자 그는 항의했으나, 대표단을 이끈 조셉 B. 포레이커에 의해 저지되었다. 많은 이들이 매킨리의 득표율이 블레인과 거의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부통령 후보로는 뉴욕 트리뷴의 편집장이자 최근까지 주 프랑스 미국 대사를 지낸 뉴욕 출신의 화이트로 레이드가 만장일치로 지명되었다. 현직 부통령 레비 P. 모턴은 레이드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1894년 뉴욕 주지사 선거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연임을 원치 않았다.[11] 또한 해리슨 대통령 역시 모턴을 러닝메이트로 원하지 않았다.
주요 공화당 후보




2. 2. 민주당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의 지지도가 하락하면서 그로버 클리블랜드 전 대통령에 대한 복귀 여론이 일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92년 초, 많은 미국인들은 클리블랜드의 정책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 경쟁에서 확실한 선두주자였지만, 당내 모든 지지자들의 만장일치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헨리 워터슨이나 찰스 앤더슨 데이나 같은 일부 언론인들은 그가 지명될 경우 11월 본선거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으나, 그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될 만한 경쟁자는 드물었다.클리블랜드는 금본위제와 은본위제 문제에 대해 비교적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종종 이금속본위제를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891년 1월, 상원의 민주당 의원들이 은화의 자유 주조에 찬성표를 던지자 그는 격분했다. 그는 뉴욕 개혁 클럽을 이끌던 엘러리 앤더슨에게 편지를 보내, 당이 인플레이션을 조장하고 농업 세력에 휘둘리는 듯한 움직임, 특히 "우리 조폐국에서 은화의 자유롭고 무제한적인 주조라는 위험하고 무모한 실험"을 강하게 비판했다. 측근들은 이러한 강경한 발언이 남부와 서부의 잠재적 지지자들을 멀어지게 하고 후보 지명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클리블랜드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것이 후보 지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한 후, 그는 관세 개혁 문제에 집중하며 은화 논쟁이 잦아들기를 기대했다.[4]
이러한 상황에서 전 뉴욕 주지사이자 현직 상원의원인 데이비드 B. 힐이 클리블랜드의 대항마로 부상했다. 힐은 이금속본위제와 관세 개혁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며 클리블랜드 지지자들에게 접근하는 한편, 클리블랜드의 3회 연속 지명에 부담을 느끼는 남부와 중서부 민주당원들에게도 호소하려 했다. 힐은 1890년 초부터 비공식적인 선거 운동을 시작했으며, 전 우정청장 도널드 M. 디킨슨에게 부통령 후보직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과거 태머니 홀과의 연관성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클리블랜드를 꺾고 후보 지명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지 못해 필요한 지지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전당대회가 임박했을 때 클리블랜드는 대부분의 주에서 민주당의 지지를 확보했지만, 그의 고향인 뉴욕주는 여전히 힐을 지지하고 있었다.[5]
1892년 민주당 후보 |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애들라이 스티븐슨 |
---|---|
'대통령 후보' | '부통령 후보' |
![]() | ![]() |
제22대 미국 대통령 (1885–1889) | 제1차관보 미국 우정청장 (1885–1889) |
선거 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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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린 189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1차 투표에서 617.33표(필요 과반수보다 10표 많음)를 얻어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세 번째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경쟁자였던 데이비드 B. 힐은 114표, 아이오와주 주지사 호레이스 보이스는 103표를 얻는 데 그쳤다.
부통령 후보로는 클리블랜드 지지자들이 선호했던 인디애나주의 아이작 P. 그레이 대신, 클리블랜드 본인이 직접 일리노이주의 애들라이 E. 스티븐슨 1세를 지지하여 그가 최종 후보로 선출되었다.[6] 스티븐슨은 화폐 가치를 부양하고 농촌 지역의 경제적 어려움을 완화하기 위해 그린백 지폐 발행과 자유 은 주조를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이는 금본위제와 긴축 재정을 선호하는 클리블랜드와 대조를 이루며 후보 조합의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였다. 동시에 스티븐슨의 지명은 당내 주류 세력을 무시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로 해석되어, 힐과 태머니 홀이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기대했다.[7][8] 스티븐슨은 전당대회에서 652표를 얻어 아이작 P. 그레이(343표), 존 L. 미첼(45표), 헨리 워터슨(26표) 등을 제치고 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그의 손자인 애들레이 스티븐슨 2세는 1950년대에 두 차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민주당 지명 후보자'''
2. 3. 인민당
1892년 7월, 인민당 전당대회는 전 하원의원이었던 제임스 위버(James Weaver|제임스 위버영어)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부통령 후보로는 제임스 필드(James G. Field|제임스 필드영어)를 지명했다. 인민당은 사회주의노동자당과 함께 이 선거에 처음으로 후보를 내세운 정당 중 하나였다.2. 4. 금지당
금지당은 전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 존 비드웰(John Bidwell)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제6차 금지당 전국 대회는 1892년 6월 29일부터 30일까지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뮤직홀(신시내티)(Music Hall (Cincinnati))에서 열렸다. 루이지애나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972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대회 개최 전 두 가지 주요 사안이 있었다. 첫째, 전국위원회 일부 위원들은 금지당과 인민당의 합당을 추진했지만, 대회 전까지 성사되지 못했다. 둘째, 남부 주에서 파견된 많은 흑인 대표들이 신시내티 호텔들로부터 인종 차별을 겪는 문제가 발생했다. 호텔들은 흑인과 백인에게 동시에 식사를 제공하는 것을 거부했고, 일부 호텔은 흑인 대표에게 아예 서비스 제공을 거부하기도 했다.
존 비드웰(John Bidwell), 기드온 T. 스튜어트(Gideon T. Stewart), 윌리엄 제닝스 디모레스트(William Jennings Demorest)가 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놓고 경쟁했다.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의 여론조사에서는 비드웰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1884년 금지당 후보였던 존 세인트 존(미국 정치인)(John St. John (American politician))은 비드웰을 지명했다. 비드웰은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어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당초 비드웰과 디모레스트의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었으나, 뉴욕주 대표단은 디모레스트에게 불만을 품고 73대 7로 비드웰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대통령 후보 투표 결과[15] | |
투표 | 1차 투표 |
---|---|
존 비드웰(John Bidwell) | 590 |
기드온 T. 스튜어트(Gideon T. Stewart) | 179 |
윌리엄 제닝스 디모레스트(William Jennings Demorest) | 139 |
H. 클레이 바스컴(H. Clay Bascom) | 3 |
부통령 후보로는 텍사스주 출신의 제임스 B. 크랜필(James B. Cranfill)이 1차 투표에서 417표를 얻어, 351표를 얻은 메릴랜드주 출신의 조슈아 레버링(Joshua Levering)을 누르고 지명되었다. 45표는 기타 후보에게 돌아갔다.[15]
2. 5. 사회노동당
사회노동당(Socialist Labor Party of America)은 1892년 8월 28일 뉴욕에서 전당대회를 열었다. 당의 강령은 대통령직과 부통령직의 폐지를 주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직책에 후보를 내기로 결정했다. 전당대회 결과 사이먼 윙이 대통령 후보로, 찰스 매쳇(Charles Matchett)이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16] 이들은 코네티컷, 매사추세츠, 뉴저지, 뉴욕, 펜실베이니아 5개 주의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렸다.[17]3. 선거 과정
이전 대선과 마찬가지로, 관세 문제가 주요 선거 쟁점으로 부상했다.
선거 운동 준비 과정에서 양당의 지도부 교체가 있었다. 공화당 전국위원회에서는 해리슨의 재지명에 반대했던 제임스 S. 클락슨이 위원장직에서 해임되고 윌리엄 제임스 캠벨이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했고, 최종적으로 토마스 H. 카터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민주당 전국위원회에서는 기존 위원장 캘빈 S. 브라이스가 재선을 거절함에 따라 윌리엄 F. 해리티가 만장일치로 선출되었고, 도널드 M. 디킨슨이 선거운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서부에서는 헨리 클레이 페인 등이 해리슨의 선거운동을 관리했고, 뉴욕에서는 윌리엄 브룩필드와 찰스 W. 해킷이 해리슨 캠프를 이끌었다. 한편, 뉴욕의 클리블랜드 선거운동은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머피와 윌리엄 F. 시핸이 맡게 되었는데, 이는 당의 단결을 위해 윌리엄 콜린스 휘트니가 주장한 결과였다.
공화당은 6월 21일 뉴욕시 카네기 홀에서, 민주당은 7월 4일(타마니 홀 주최)과 7월 20일(매디슨 스퀘어 가든) 두 차례 회의를 통해 전국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금주당은 8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선거운동을 개시했다.
이번 선거운동은 비교적 차분하게 진행되었으며,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았다.
- 관세: 해리슨은 자신의 임기 중 통과된 보호주의적 맥킨리 관세법을 옹호했다. 반면 클리블랜드는 절대적인 자유무역에는 반대하지만 관세 인하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 투표권: 클리블랜드는 남부 흑인 유권자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로지 법안을 비판했다.[22]
- 금본위제: 인민당은 은화 주조량 증가를 통한 통화 팽창을 주장하며, 특히 부채에 시달리는 남부와 서부 농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클리블랜드는 금본위제를 강력히 고수하며 동부 은행가와 재계의 지지를 받았다.
- 노동 문제: 카네기 스틸에서 발생한 대규모 파업이 노동자들과 무장 경비원 간의 유혈 충돌로 번지면서, 공화당 행정부에 대한 노동계의 반감이 커졌다.
해리슨은 당초 뉴욕 순회 연설을 계획했으나, 부인 캐롤라인 해리슨 여사의 병간호를 위해 계획을 변경했다. 대신 리드와 맥킨리가 각각 여러 주를 돌며 해리슨을 위한 지원 유세를 펼쳤다. 민주당 부통령 후보 스티븐슨은 고향인 일리노이주 블루밍턴에서 선거운동을 시작해 동부 여러 주를 순회했다. 인민당 후보 위버는 7월부터 서부와 남부를 중심으로 유세를 벌였다.
선거 운동 막바지인 10월, 캐롤라인 해리슨 여사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오랫동안 지병을 앓아왔던 그녀는 1891년 봄 캘리포니아 여행 중 걸린 감기가 결핵으로 발전했고, 애디론댁 산맥에서의 요양에도 불구하고 회복하지 못했다. 결국 선거일을 불과 2주 앞둔 1892년 10월 25일 백악관에서 사망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모든 후보는 선거운동을 중단했다.
여러 주에서는 정당 간의 복잡한 연합과 분열이 나타났다.
- 오리건에서는 민주당과 인민당이 부분적인 연합을 시도했으나, 민주당 선거인 1명이 사퇴하고 인민당 후보를 지지한 반면, 인민당은 상응하는 조치를 거부했다.
- 미네소타에서는 민주당이 처음에는 연합을 거부했으나, 나중에 4명의 선거인을 철회하고 인민당 선거인을 지지했다.
- 네바다에서는 민주당이 자유 은화(free silver)를 지지하지 않는 후보를 지지하지 않기로 결의하면서 분열되어 다수는 위버를, 소수는 클리블랜드를 지지하는 선거인을 내세웠다. 은당은 인민당 선거인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공화당 역시 은화 문제로 분열되어, 해리슨 지지파와 은화 지지파(은당 선거인 지지)로 나뉘었다.
- 와이오밍에서는 민주당이 인민당 선거인을 지지하는 대가로 인민당이 민주당 주 후보를 지지하는 연합이 이루어졌다.
- 노스다코타에서는 민주당이 위버를 지지하는 독립당(인민당 계열) 선거인을 지지하고, 독립당은 민주당 주 후보를 지지했다.
- 캔자스에서는 민주당과 인민당이 협정을 맺어 일부 직책은 민주당이, 대통령 선거인을 포함한 나머지는 인민당이 후보를 내기로 했다.
- 루이지애나 공화당은 선거인을 해리슨 5명, 위버 3명으로 나누어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 플로리다 공화당은 선거인을 지명하지 않았고, 당원들은 위버를 지지했다.
결과적으로 인민당이 서부 일부 주에서 승리했지만, 남부는 여전히 민주당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고, 산업화된 북동부 주들도 클리블랜드를 지지하면서 클리블랜드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 선거를 통해 민주당은 대통령직뿐만 아니라 미국 의회 상하원 모두를 장악하게 되었다.
4. 선거 결과
(출신 주)
득표수
(출신 주)
득표수
(뉴욕주)
(일리노이주)
(인디애나주)
(뉴욕주)
(아이오와주)
(버지니아주)
(캘리포니아주)
(텍사스주)
(매사추세츠주)
(뉴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