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냐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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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냐롤은 1891년 센트랄 우루과이 철도 회사 직원들에 의해 CURCC라는 이름으로 창단된 우루과이의 축구 클럽이다. 1913년 현재의 클럽 아틀레티코 페냐롤(Club Atlético Peñarol)로 재창단되었으며,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52회 우승으로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5회, 인터컨티넨탈컵 3회 우승 등 국제 대회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20세기 남미 최고의 클럽으로 선정되었다. 풋살, 농구, 럭비 등 다양한 스포츠 팀을 운영하고 있으며, 특히 농구와 럭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페냐롤과 CURCC의 역사적 연속성을 두고 논쟁이 존재하지만, 현재는 CURCC의 역사를 페냐롤이 계승한 것으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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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냐롤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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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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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 | 클럽 아틀레티코 페냐롤 |
별칭 | 데카노 (The Dean) 마냐스 아우리네그로스 (황색과 흑색) 카르보네로스 (탄광 노동자) 미라솔레스 (해바라기) 캄페온 델 시글로 XX (20세기 챔피언) |
창단 | 1891년 9월 28일 (센트럴 우루과이 철도 크리켓 클럽으로 창단) |
경기장 | 에스타디오 캄페온 델 시글로 |
수용 인원 | 40,000명 |
회장 | 후안 이그나시오 룰리오 |
감독 | 디에고 아기레 |
리그 | 프리메라 디비시온 |
웹사이트 | peñarol.org |
활성 스포츠 부문 | |
축구 | 페냐롤 |
여자 축구 | 페냐롤 (여자) |
농구 | 클럽 아틀레티코 페냐롤 (농구) |
럭비 유니온 | 페냐롤 럭비 |
e스포츠 | e스포츠 |
유니폼 정보 | |
홈 유니폼 | pattern_la1: _penarol23h pattern_b1: _penarol23h pattern_ra1: _penarol23h pattern_sh1: pattern_so1: _penarol22h leftarm1: FFFFFF body1: FFFFFF rightarm1: FFFFFF shorts1: 000000 socks1: 000000 |
원정 유니폼 | pattern_la2: _penarol23a pattern_b2: _penarol23a pattern_ra2: _penarol23a pattern_sh2: pattern_so2: _penarol22h leftarm2: 000000 body2: 000000 rightarm2: 000000 shorts2: 000000 socks2: 000000 |
세 번째 유니폼 | pattern_la3: _penarol23t pattern_b3: _penarol23t pattern_ra3: _penarol23t pattern_sh3: pattern_so3: _penarol22t leftarm3: 989898 body3: 989898 rightarm3: 989898 shorts3: 989898 socks3: 989898 |
최근 시즌 | |
시즌 | 2024 |
순위 | 프리메라 디비시온, 16개 팀 중 1위 (챔피언) |
2. 역사
페냐롤은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북동부 카라스코 지구를 연고지로 하는 축구 클럽이다. 2016년 에스타디오 캄페온 델 시글로가 개장하기 전까지는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를 임시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페냐롤은 국내 리그에서 50회 이상 우승하여 우루과이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는 5회 우승(역대 3위)을, 인터컨티넨탈컵에서는 3회 우승(최다 타이)을 기록했다.[131][132] 국제 축구 역사 & 통계 연맹(IFFHS)은 페냐롤을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우루과이 클럽" 및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남미 클럽"으로 선정했으며, 남미 축구 연맹(CONMEBOL)은 "중남미에서 가장 성공한 축구 클럽"으로 인정했다.
클럽 이름 '페냐롤(peñarol)'은 라틴어 명사 "pinarolium"에서 유래한 스페인어 표현으로, "소나무 숲"을 의미한다. 이는 이탈리아 피에몬테주토리노현에 있는 산 세콘도 디 피네롤로라는 코무네와 관련이 있다.
2. 1. CURCC 시대 (1891-1913)
센트럴 우루과이 철도 회사(Central Uruguay Railway Company) 직원들이 중심이 되어 1891년 9월 28일 몬테비데오에서 센트럴 우루과이 철도 크리켓 클럽(Central Uruguay Railway Cricket Club, CURCC)을 창단했다.[133] 이 클럽은 크리켓, 럭비, 그리고 "기타 남성 스포츠"를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졌다.센트럴 우루과이 철도 회사는 1878년부터 우루과이에서 운영되었으며, 당시 118명의 직원이 있었다. 이 중 72명은 영국인, 45명은 우루과이인, 1명은 독일인이었다. 클럽은 페냐롤 지역에서 CURCC로 알려졌는데, 이 지역은 몬테비데오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으로, 피네롤로라는 이탈리아 도시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133] 초대 회장은 프랭크 헨더슨이었으며, 그는 1899년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133]
1892년, CURCC는 크리켓과 럭비에서 축구로 주 종목을 변경했다. 첫 경기는 영국 고등학교 학생팀과의 경기였으며, CURCC는 이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했다. 1895년, 우루과이 축구 선수 훌리오 네그론이 팀 최초의 비 영국인 주장으로 선출되었다.

1900년, CURCC는 우루과이 축구 협회 리그의 창립 멤버 중 하나가 되었으며,[15] 6월 10일 알비온과의 공식 경기에서 2-1로 승리하며 데뷔했다.[16] 그 해에 클럽은 첫 번째 우루과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1901년, 1905년, 1907년에도 우승을 차지했다.
1906년, 찰스 W. 베인이 철도를 인수했고, 재정 및 업무 문제로 축구팀 후원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회사와 축구 클럽 간의 갈등이 발생했고, 결국 1913년에 두 관계는 단절되었다.[17]
1908년, CURCC는 F.C. 더블린과의 재경기를 요청했으나 리그에서 거절당한 후 우루과이 리그를 떠났다. CURCC는 원정 경기에서 2-3으로 패했는데, 이는 홈 팬들의 압력으로 인한 심판의 실수 때문이라고 믿었다. 나시오날 또한 신의의 표시로 리그에서 은퇴했는데, 이는 두 팀 모두 "경기는 경기장에서 이긴다"는 데 동의했기 때문이다.[15]
1909년, 라이벌 팀들이 사용한 기차 차량을 팬들이 불태운 사건 이후, CURCC와 클럽 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911년 우루과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후, 클럽은 정책을 개혁하려 했다. 비 CURCC 선수들의 더 많은 참여와 "CURCC 페냐롤"로의 명칭 변경이 제안되었으나, 1913년 6월에 이 제안은 거부되었다. 철도 회사는 클럽의 지역 평판으로부터 거리를 두기를 원했다.
결국 철도 회사는 1913년 12월 13일에 팀의 "축구" 부서를 회사에서 분리하기로 결정했고, 이때 페냐롤이 창단되었다. 다음 날은 나시오날과 페냐롤 간의 "클라시코"가 공식적으로 처음 열린 날이었다.[18]
CURCC는 1915년 1월 22일 해체될 때까지 아마추어 축구를 계속했으며, 모든 트로피는 페냐롤이 아닌 몬테비데오의 영국 병원에 기증했다.

2. 2. 클럽 아틀레티코 페냐롤 시대 (1913-현재)
1913년 12월 13일, 센트럴 우루과이 철도 회사는 팀의 축구 부서를 분리하기로 결정했고, 이로써 페냐롤이 공식적으로 창단되었다.[18] 1914년 3월 12일, 페냐롤은 우루과이 축구 리그에서 CURCC를 대체했고, 이틀 후 우루과이 축구 리그에 제출된 요청은 승인되었다.[12]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1916년 5월 19일 새 경기장 ''라스 아카시아스''를 개장하며 반등의 계기를 마련했다.[19] 이후 1918년과 1920년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강팀으로 발돋움했다.
1922년 11월, 우루과이 축구 협회(AUF)는 페냐롤이 아르헨티나 반체제 축구 협회 소속 라싱과 친선 경기를 치렀다는 이유로 실격시켰다.[20] 이에 페냐롤은 다른 클럽들과 함께 새로운 리그인 우루과이 축구 연맹(FUF)을 창설하고, 1924년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20] 그러나 이 리그는 오래가지 못했고, 1926년 코파 델 콘세호 프로비소리오 우승을 통해 AUF와 FUF의 통합을 이끌어냈다.[21]
AUF 복귀 후 첫 시즌인 1927년에는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1928년과 1929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1929년에는 훌리오 마리아 소사가 초대 명예 회장으로 취임했다.
1928년, 페냐롤은 코파 알다오에서 우승하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의 초석을 다졌다. 이 시기 페냐롤의 주요 국제 대회 라이벌은 리베르 플라테, 인데펜디엔테, 라싱 클럽 등이었다.
1932년 4월 29일, AUF는 프로 리그를 도입했고, 페냐롤과 CA 리베르 플라테의 경기가 우루과이 프로 리그 첫 경기가 되었다. 페냐롤은 1932년 프로 리그 원년 우승을 차지했고, 프로 리그 첫 수페르클라시코에서도 2-0으로 승리했다. 1933년에는 페드로 양이 33골로 클럽 최초의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1935년부터 1938년까지 4년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38년에는 프란시스코 토체티가 2대 명예 회장에 취임했다.
1939년, 프로 선수들의 파업이 발생했고, 페냐롤은 나시오날과 승점 동률을 이뤘으나 플레이오프에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후 1944년과 1945년에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48년에는 선수 조합의 파업으로 시즌이 중단되기도 했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루과이는 마라카나소를 연출하며 우승을 차지했는데, 로케 마스폴리,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 알시데스 기지아 등 페냐롤 소속 선수들이 주역으로 활약했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페냐롤은 나시오날에 이어 두 번째로 리그 5연패를 달성했다. 이 기간 동안 알베르토 스펜서는 1961년과 1962년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1960년대는 페냐롤의 황금기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세 번,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두 번 우승했다. 1960년 제1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호르헤 윌스테르만과의 개막전을 7-1 대승으로 장식하고, 결승에서 올림피아를 꺾고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 그러나 첫 인터컨티넨탈컵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에 패했다.
1961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2연패를 달성하고,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벤피카를 꺾고 첫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1962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서는 펠레의 산투스에 패해 3연패에 실패했다. 1963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조별 리그에서는 알베르토 스펜서의 친정팀 CD 에베레스트es를 2경기 합계 14-1로 대파했다.
1965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우승 후, 1966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리베르 플라테를 꺾고 세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해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6년 전 패배를 설욕했다.
1969년, 페냐롤은 CONMEBOL이 공식 인정한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스 슈퍼컵영어에서 우승했다.
국내 리그에서는 1966년 9월부터 1969년 9월까지 56경기 무패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남미 프로 축구 리그 역사상 최장 기록이다. 이 시기에는 알베르토 스펜서, 후안 호야es, 페드로 로샤, 루이스 쿠비야, 라디슬라오 마즈르키에비치, 엘리아스 피게로아 등 뛰어난 선수들이 활약했다.
2. 3. 아마추어 리그 시대 (1914년-1931년)
1913년 창설된 후, 1914년 3월 12일 페냐롤은 우루과이 축구 리그에서 CURCC의 자리를 대체했다. 이틀 후 우루과이 축구 리그에 제출된 요청은 다음 날 승인되었다.[12] 초기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1916년 5월 19일 새로운 경기장인 ''라스 아카시아스''를 개장했다.[19] 개장 기념 경기는 나시오날과의 친선 경기(Copa Transatlántica)였으며, 페냐롤이 3-1로 승리했다.
페냐롤은 1918년과 1920년에 처음 두 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22년 11월, 우루과이 축구 협회(AUF)는 페냐롤이 아소시아시온 아마추어 데 푸트볼(1919년에 설립된 반체제 협회로, 공식 단체인 AFA와 경쟁했다) 소속 라싱과 친선 경기를 치렀다는 이유로 페냐롤을 실격시켰다.[20] 이후 페냐롤과 다른 클럽들은 새로운 리그인 우루과이 축구 연맹(FUF)을 조직했고, 페냐롤은 1924년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20] 이 리그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페냐롤은 1926년 코파 델 콘세호 프로비소리오에서 우승하며 AUF와 FUF 간의 합병을 이끌어냈다.[21]
AUF 재가입 후 첫 해인 1927 시즌에는 2위로 마쳤지만, 이듬해 1928 시즌과 1929 시즌에는 2연패를 달성했다. 1929년에는 1921년부터 1928년까지 회장직을 역임한 Julio María Sosa|훌리오 마리아 소사es가 초대 명예 회장에 취임했다.
이 시기 페냐롤은 국제 대회에서도 활약했다.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AFA)와 우루과이 축구 협회(AUF)는 양국 컵 대회 우승팀 간의 대결인 타이 컵(Tie Cup)[135]과 코파 데 오노르 쿠세니에르(Copa de Honor Cusenier)[136]를 공동 주최했다. 페냐롤(전신 CURCC 포함)은 이 대회에 여러 번 출전하여 타이 컵 1회(1916), 코파 데 오노르 쿠세니에르 3회(1909, 1911, 1918) 우승했다.
1928년에는 코파 알다오 국제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 대회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국내 리그 우승팀 간의 대결로, 이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의 초석이 되었다.
2. 4. 프로 리그 시대와 리그 5연패 (1932년-1950년대)
1932년, 페냐롤과 리버 플레이트는 프로 시대의 첫 경기를 치렀다. 페냐롤은 승점 40점으로 우루과이 프로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준우승팀 람플라 주니어스보다 5점 앞섰다.[23] 1933년과 1934년 준우승을 차지한 후, 1935년부터 1938년까지 4년 연속 리그 토너먼트에서 우승했으며, 1936년 토르네오 콤페텐시아에서도 우승했다.1932 시즌에는 27경기를 치러 17승 6무 4패의 성적을 거두며 프로 리그화 이후 첫 리그 우승팀으로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 9절에서는 프로 리그화 이후 첫 수페르클라시코에서 2-0으로 승리했다. 1933 시즌에는 2위를 기록했지만, 페드로 양이 33골을 기록하며 프로 리그화 이후 클럽 최초의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1935 시즌부터 1938 시즌까지 4연패를 달성했으며, 1938년에는 프란시스코 토체티가 2대 명예 회장에 취임했다.
1939 시즌에는 프로 선수들이 처음으로 파업을 일으켰다. 이 시즌에는 승점에서 나시오날과 동률을 이뤘지만, 우승 결정 플레이오프에서 패해 2위가 되었다. 1939 시즌부터 1943 시즌까지 나시오날에 우루과이 역사상 처음으로 5연패를 허용했다. 그 후, 1944년에 6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 1945년에는 2연패를 달성했다. 이 해에는 1955년에 팔라시오 페냐롤(페냐롤 팰리스, 농구 아레나 및 박물관 등이 병설)이 건설될 토지를 구입했다. 1948 시즌에는 프로 선수 조합이 다시 파업을 실시했고, 시즌은 도중에 중단되었다.
1944년 우루과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 (2경기 결승에서 나시오날을 0-0, 3-2로 꺾음)했다.[24] 1945년에는 니콜라스 팔레로와 라울 스키아피노가 각각 21골을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최고 득점자가 되어 타이틀을 유지했다.[25] 페냐롤은 오스카르 미게스가 최고 득점자로 4점 앞선 2위 나시오날을 제치고 1949년에 다시 승리했다.[26]
1950년 2위를 차지한 후, 페냐롤은 다음 해 우루과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27] 1950년대 동안, 1953년,[28] 1954년,[29] 1958년[30] 및 1959년에도 전국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31]
1950년, 브라질에서 개최된 FIFA 월드컵에서, 우루과이 대표팀은 결승 리그에 진출했다. 마라카낭에서 열린 브라질과의 경기 (마라카낭의 비극 또는 마라카나소)는 사실상의 우승 결정전이었다. 이 경기에는 페냐롤의 로케 마스폴리를 포함해 6명의 페냐롤 소속 선수가 출전했다. 동점 골을 넣은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 결승 골을 넣은 알시데스 기지아는 모두 페냐롤의 선수이다.
1958 시즌부터 1962 시즌에 걸쳐, 나시오날에 이어, 우루과이 2번째 국내 리그 5연패(킨케니오 데 오로)를 달성했다. 이 기간 동안, 1961 시즌과 1962 시즌에는 국내 리그 통산 역대 3위인 202골을 기록한 알베르토 스펜세르가 득점왕에 올랐다.
2. 5. 남미 챔피언과 세계 챔피언 도전을 시작하다 (1960년대)

1960년대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3번, 인터컨티넨탈컵에서 2번 우승하는 황금기를 맞이했다. 1959 시즌 국내 리그 우승으로 1960년 제1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출전권을 획득했다. 이 대회에는 남미 축구 연맹(CONMEBOL)에 가맹한 7개국(페루, 에콰도르, 베네수엘라는 불참)의 챔피언이 출전했다. 4월 19일 호르헤 윌스테르만(볼리비아)과의 개막전에서 카를로스 보르헤스의 대회 1호 골과 알베르토 스펜서의 4골 등으로 7-1 대승을 거두었다. 준결승에서 산 로렌소(아르헨티나)를 3차전 끝에 꺾고, 결승에서 올림피아(파라과이)를 합계 2-1로 꺾고 초대 챔피언이 되었다.[32] 이후 인터컨티넨탈컵에 출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 페렌츠가 있는 레알 마드리드(스페인)와 대결했다. 센테나리오 1차전은 무승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2차전에서 1-5로 패했다.

1961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서 파우메이라스(브라질)를 합계 2-1로 꺾고 2연패했다.[33] 같은 해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벤피카(포르투갈)와 1승 1패 후 3차전에서 승리, 첫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34] 1962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서 펠레의 산투스(브라질)와 1승 1패 후 모누멘탈에서 열린 3차전에서 0-3으로 패해 3연패에 실패했다. 1963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조별 리그에서 에베레스트(에콰도르)를 합계 14-1(원정 5-0, 홈 9-1)로 대파했다. 알베르토 스펜서는 홈 경기에서 4골을 기록했는데, 에콰도르 출신으로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에베레스트에서 뛰었다.
1965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서 인데펜디엔테(아르헨티나)에 패했다. 1966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서 리베르 플라테(아르헨티나)와 1승 1패 후 칠레 국립 경기장에서 열린 3차전에서 승리, 3번째 우승을 차지했다.[37] 같은 해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홈과 원정 모두 2-0으로 꺾고 6년 전 패배를 설욕했다.[38]
1968년과 1969년, 인터컨티넨탈컵 우승 클럽들이 모이는 에 2년 연속 출전했다. 레알 마드리드 불참 등으로 불완전한 대회였지만, 페냐롤은 1969년 대회를 제패했다. 이 대회는 오랫동안 비공식이었으나, 2005년 CONMEBOL에 의해 공식 타이틀로 인정되었다.
국내 리그에서는 1966년 9월부터 1969년 9월 리버풀전(0-2 패)까지 56경기 무패 기록을 세웠다.[39] 이는 우루과이 및 남미 프로 축구 리그(1, 2부) 최장 무패 기록이다. 아마추어 포함 시 보카 주니어스(아르헨티나)의 59경기(1924년 4월~1927년 6월)에 이은 기록이다. 이 시대 주요 선수로는 알베르토 스펜서, 후안 호야, 페드로 로샤, 루이스 쿠비야, 라디슬라오 마즈르키에비치, 엘리아스 피게로아 등이 있다.
1970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서 에스투디안테스 (아르헨티나)에 패했다. 1차 리그 (베네수엘라)전 11-2 승리는 대회 최대 득실차 기록이다.[137]
2. 6. 과도기 (1970년대)
1970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다시 결승에 진출했지만, 에스투디안테스 (아르헨티나)에게 패했다. 그 중 1차 리그의 (베네수엘라)전에서는 11-2의 큰 점수 차로 승리하여, 대회 사상 최대의 득실점 차 기록을 수립했다.[137]1973년에 CA 리베르 플레이트에서 가 입단했다. 이후 1978 시즌까지, 모레나는 6년 연속 득점왕 (아틸리오 가르시아의 7년 연속 (1938-1944)에 이은 기록)을 차지했다. 모레나의 활약으로 페냐롤은 1973 시즌부터 1975 시즌까지 3연패를 달성했다. 1978 시즌은 리그 우승을 장식함과 동시에, 모레나는 시즌 최다 득점 (36골)과 1경기 최다 득점 (7골, 우라칸 부세오전)의 리그 기록을 수립했다. 모레나는 1984년에 현역 은퇴하기까지, 국내 리그 역대 최다인 230골,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역대 최다 3회의 득점왕 (1974, 1975, 1982) 등의 기록을 남겼다.
1979년, 모레나가 스페인의 라요 바예카노로 이적했다. 1980 시즌은 나시오날, 몬테비데오 원더러스에 이어 3위로 마쳤다. 페냐롤이 3위 이하로 떨어진 것은 1940 시즌(4위) 이후 40년 만이었다.[140] 1981년, 1029000USD의 이적료로 모레나가 복귀하자, 1981 시즌은 2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고, 루벤 파스가 17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이 되었다.
2. 7. 재부상과 두 번째 리그 5연패 (1980년대-1990년대)
페냐롤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우루과이 리그에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했다. 1981년, 스페인에서 복귀한 페르난도 모레나의 활약에 힘입어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모레나는 17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다.[140]1982년, 페냐롤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 진출하여 칠레의 코브렐로아를 꺾고 16년 만에 남미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모레나는 이 대회에서 7골을 넣어 득점왕을 차지했다. 같은 해 인터컨티넨탈컵에서는 잉글랜드의 애스턴 빌라를 2-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86년에는 리그 일정 문제로 나시오날과의 승점 차이가 발생했지만, 우승 결정 플레이오프에서 승부차기 끝에 나시오날을 꺾고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1987년, 페냐롤은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 진출, 콜롬비아의 아메리카 데 칼리를 꺾고 5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디에고 아기레가 결승골을 기록했다.
1993년, 그레고리오 페레스 감독이 부임하면서 페냐롤은 다시 한번 리그 5연패(1993-1997)를 달성했다. 이는 우루과이 축구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었다. 이 시기에는 파블로 벵고에체아, 넬손 구티에레스, 다리오 실바 등 뛰어난 선수들이 활약했다.
2. 8. 새로운 강팀의 등장 (2000년 이후)
2000년대 이후 페냐롤은 국내 리그에서 나시오날과의 양강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데펜소르나 다누비오와 같은 새로운 강팀들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2000년부터 2019년까지 21시즌 동안 페냐롤은 6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나시오날(11회), 다누비오(3회), 데펜소르(1회) 등 다른 팀들의 선전으로 인해 과거와 같은 압도적인 지배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131][132]국제 무대에서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클럽들의 강세가 이어지면서 우루과이 클럽들의 입지가 좁아졌다. 그러나 2011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페냐롤은 오랜만에 결승에 진출하며 저력을 과시했다. 조별 리그를 통과한 후, 인테르나시오날(브라질),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칠레), 벨레스 사르스필드(아르헨티나) 등 강팀들을 차례로 꺾고 결승에 올랐다. 이는 1987년 우승 이후 24년 만의 결승 진출이었다. 결승전에서 산투스(브라질)를 만나 홈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원정 경기에서 네이마르 등에게 골을 허용하며 1-2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3. 엠블럼과 유니폼
페냐롤의 엠블럼과 유니폼은 클럽의 전신인 센트럴 우루과이 철도 크리켓 클럽(CURCC) 시절부터 이어져 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CURCC의 초기 유니폼은 오렌지색과 검은색을 사각형으로 배치한 디자인이었다. 이후 셔츠의 오른쪽 절반은 검은색, 왼쪽 절반은 오렌지와 검은색 줄무늬로 변경되었다. 1913년 페냐롤로 개칭된 후에는 노란색과 검은색 줄무늬 유니폼을 기본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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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냐롤은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의 유니폼을 착용해왔다. 1984년에는 가로 줄무늬 유니폼, 1987년에는 노란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 2000년대에는 전신 검은색, 노란색, 회색 유니폼을 입기도 했다. 1971년 인테르 브라티슬라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서는 녹색 유니폼을,[145] 2010년에는 금색 유니폼을 착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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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6월 1일,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코파 로베르토 체리 경기에서 페냐롤 유니폼을 입고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과 경기를 치렀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착용했으며, 경기는 3-3 무승부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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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엠블럼
클럽 역사 전체에 걸쳐 엠블럼에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원래의 색상은 유지되었다. 엠블럼과 깃발은 건축가 콘스탄테 파첼로가 디자인했으며, 검은색 바탕에 5개의 검은 줄, 4개의 노란 줄, 11개의 노란 별(11명의 선수를 상징)로 구성되어 있다.[50]3. 2. 유니폼
페냐롤의 유니폼은 클럽의 역사와 함께 진화해왔다. 창단 당시 CURCC의 유니폼은 조지 스티븐슨이 설계한 로켓 기관차에서 영감을 받은 노란색과 검은색이었다. 첫 번째 유니폼은 검은색과 노란색이 번갈아 가며 4개의 사각형으로 나뉜 셔츠였다.[51] 이후 한 변형으로 두 개의 수직 절반(오른쪽은 검은색, 왼쪽은 검정과 노란색 줄무늬)에 검은색 반바지와 양말을 착용하기도 했다.1911년부터 페냐롤의 공식 유니폼은 검정과 노란색 줄무늬로,[52] 약간의 변형만 있을 뿐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53]
기간 | 유니폼 회사 |
---|---|
1979–84 | 아디다스 |
1984–87 | 르 코크 스포르티브 |
1987–88 | 토퍼 |
1988–91 | 푸마 |
1991–96 | 난케 |
1996–97 | 엄브로 |
1998–2000 | 리복 |
2000 | 코바동가 |
2000–06 | 엄브로 |
2006–현재 | 푸마 |
페냐롤은 1966년 루마니아 클럽 FC 브라쇼브가 유니폼 색상을 흰색과 파란색에서 노란색과 검은색으로 변경하는 데 영감을 주기도 했다.[54]
1984년 가로 줄무늬, 1987년 노란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 2000년대 전신 검은색, 노란색, 회색 등 다양한 유니폼이 사용되었다. 1971년에는 녹색 유니폼,[145] 2010년에는 금색 유니폼이 채택되기도 했다.
1919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이 페냐롤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치른 적도 있다.
4. 경기장
페냐롤은 에스타디오 캄페온 델 시글로,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에스타디오 호세 페드로 다미아니(통칭 '라스 아카시아스')를 소유하고 있다.
- 에스타디오 캄페온 델 시글로는 2016년에 개장한 페냐롤의 홈구장이다. '20세기의 챔피언'이라는 뜻으로, 국제 축구 역사 통계 연맹이 페냐롤을 '20세기 남미 최고의 클럽'으로 선정한 것에서 유래한다. 수용 인원은 40,000명이다.
-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는 1930년 몬테비데오에 개장한 국유 경기장으로, 제1회 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유서 깊은 곳이다. 수용 인원은 65,000명이다.[144] 캄페온 델 시글로 완공 전까지 페냐롤의 사실상 홈구장으로 사용되었다.
- 에스타디오 호세 페드로 다미아니(라스 아카시아스)는 1916년에 개장했으며 12,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수용 인원과 시설 부족으로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1997년 람플라 주니어스 FC와의 경기에서 사용된 적이 있다. 캄페온 델 시글로 착공 전에는 이 경기장을 재건축하여 40,000명 규모로 증축하는 방안도 고려되었다.
4. 1. 에스타디오 캄페온 델 시글로

페냐롤은 2016년에 개장한 에스타디오 캄페온 델 시글로를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캄페온 델 시글로는 '20세기의 챔피언'이라는 뜻으로, 국제 축구 역사 통계 연맹이 페냐롤을 '20세기 남미 최고의 클럽'으로 선정한 것에서 유래한다. 수용 인원은 40,000명이다.
캄페온 델 시글로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국유의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를 사실상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는 1930년 몬테비데오의 바트예 공원 지구에 개장했으며, 같은 해 7월 30일 제1회 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유서 깊은 경기장이다. 수용 인원은 65,000명이다.[144]
에스타디오 호세 페드로 다미아니(통칭 '라스 아카시아스')도 소유하고 있다. 라스 아카시아스는 1916년 4월 19일에 개장했으며, 12,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수용 인원과 시설 부족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으며, 최근에는 1997년 8월 람플라 주니어스전에서 사용되었다. 캄페온 델 시글로 착공 전에는 약 40,000명을 수용하는 새 경기장을 건설하거나, 라스 아카시아스를 재건축하여 40,000명 규모로 증축하는 방안도 고려되었다.
4. 2.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는 1930년 7월 18일에 개장한 몬테비데오의 바틀 공원에 위치한 경기장으로, 65,235명을 수용할 수 있다.[58] 페냐롤은 안전 문제로 인해 자체 경기장인 에스타디오 호세 페드로 다미아니(라스 아카시아스)에서 경기를 할 수 없게 되면서,[57] 시에서 소유한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를 홈 구장으로 사용해왔다.
센테나리오는 1930년 몬테비데오의 바트예 공원 지구에 개장했으며, 같은 해 7월 30일에는 제1회 월드컵 결승전 무대가 되기도 한 유서 깊은 경기장이다.[144]
캄페온 델 시글로가 완공되기 전까지 페냐롤은 센테나리오를 사실상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4. 3. 에스타디오 호세 페드로 다미아니
에스타디오 호세 페드로 다미아니(통칭 '라스 아카시아스')는 1916년 4월 19일에 개장했으며, 12,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수용 인원과 시설 부족으로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1997년 8월 람플라 주니어스와의 경기에서 사용된 적이 있다. 에스타디오 캄페온 델 시글로 착공 전에는 약 4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 경기장을 건설하거나, 호세 페드로 다미아니를 재건축하여 증축하는 구상이 있었다.[19]5. 라이벌 관계
페냐롤은 나시오날과 라이벌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들의 경기는 수페르클라시코라고 불린다.
5. 1. 수페르클라시코
나시오날과의 경기는 클라시코 델 푸트볼 우루과요 (클라시코 또는 수페르클라시코)라고 불린다. 우루과이의 수페르클라시코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더비 매치이다.[142] 첫 경기는 1900년 7월 15일에 열렸으며, 페냐롤이 2-0으로 승리했다.[143] 2019년 12월 15일까지 544경기가 열렸으며, 페냐롤이 191승, 나시오날이 177승, 무승부가 176경기이다.[143] 두 강팀의 국내 리그 우승 횟수를 합산하면, 리그 개최 횟수 전체의 약 80%에 달한다.[133] 아마추어 리그 시대에는 나시오날이 약간 우세했지만, 프로 리그화 이후에는 차츰 페냐롤이 우세를 역전시켰다.서포터들 사이에서는 수페르클라시코에서의 수많은 에피소드가 전해져 내려온다. 대표적인 예로 1949년 10월 9일에 열린 국내 리그 8라운드 경기에서, 전반 종료 시점에서 페냐롤이 2-0으로 앞서고 있었지만, 나시오날은 후반 시작 시 피치에 나타나지 않고 경기장을 떠났다. 나중에 이 행위는 주심의 판정에 대한 항의였다고 주장했다. 1987년 4월 23일에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1-1 동점 상황에서 페냐롤은 3명의 선수가 퇴장당하여, 나시오날에 비해 3명 적은 8명으로 플레이를 해야 했지만, 호르헤 카브레라가 결승골을 넣어 2-1로 승리했다. 이 경기는 클라시코 델 로스 오초 콘트라 온세 (Clásico del los 8 contra 11, 8명 대 11명의 클라시코)로 알려져 있다.
6. 선수단
페냐롤은 현재 선수 명단과 임대 선수 명단을 통해 선수단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선수 명단은 2024년 8월 31일 기준이며, 임대 선수 명단은 다른 팀에서 임대되어 활동 중인 선수들을 포함한다.
페냐롤은 역사적으로 많은 주요 선수들을 배출했다. 네스토르 곤잘베스는 클럽 역사상 최다 공식 경기 출전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페르난도 모레나는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팀의 역대 최다 득점자이다. 알베르토 스펜서는 국제 대회에서 클럽 최다 득점 선수이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역사상 최다 득점자 중 한 명이다.[83]
페냐롤은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많은 선수들을 배출했으며, 특히 1930년 FIFA 월드컵과 1950년 FIFA 월드컵 우승에 기여한 선수들이 많다. 모든 월드컵에 우루과이 대표팀 선수를 배출한 유일한 클럽이다.[88]
세베리노 바렐라는 1938년 우루과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알베르토 스펜서는 58골로 클럽의 국제 대회 최다 득점자이다.
6. 1. 현재 선수 명단
Current squad영어 (2024년 8월 31일 기준)번호 | 포지션 | 이름 | 국적 |
---|---|---|---|
1 | GK | 케빈 모건 | |
2 | DF | 레오 코엘료 | |
3 | DF | 마르틴 지아놀리 | |
4 | DF | 구스만 로드리게스 | |
6 | MF | 로드리고 페레스 | |
7 | MF | 하비에르 카브레라 | |
8 | MF | 레오나르도 페르난데스 | |
9 | FW | 파쿤도 바티스타 | |
11 | FW | 막시밀리아노 실베라 | |
12 | GK | 기예르모 데 아모레스 | |
13 | MF | 에두아르도 다리아스 | |
14 | MF | 다미안 가르시아 | |
15 | DF | 막시밀리아노 올리베라 | |
16 | MF | 게르만 바르바스 | |
17 | FW | 루시아노 곤잘레스 | |
18 | MF | 카밀로 마야다 | |
20 | DF | 페드로 밀란스 | |
22 | DF | 다미안 수아레스 | |
23 | DF | 하비에르 멘데스 | |
24 | MF | 아드리안 페르난데스 | |
25 | MF | 이그나시오 소사 | |
26 | FW | 레오나르도 세퀘이라 | |
27 | DF | 루카스 에르난데스 | |
28 | FW | 하이메 바에스 | |
29 | GK | 워싱턴 아게레 | |
30 | FW | 니콜라스 로시 | |
31 | MF | 산티아고 베니테스 | |
33 | FW | 나우엘 아코스타 | |
34 | DF | 나우엘 에레라 | |
36 | MF | 토마스 올라세 | |
90 | FW | 펠리페 아베나티 | |
97 | MF | 알란 메디나 |
6. 2. 임대 선수 명단
포지션 | 선수 | 임대 구단 |
---|---|---|
GK | 티아고 카르도소 | 우니온 산타페 (2024년 12월 31일까지) |
DF | 안드레스 마두루가 | 람플라 주니어스 (2024년 12월 31일까지) |
DF | 마티아스 데 리티스 | 반필드 (2025년 12월 31일까지) |
DF | 발렌틴 로드리게스 | 김나시아 LP (2025년 6월 30일까지) |
MF | 브라우리오 기솔포 | 페닉스 (2024년 12월 31일까지) |
MF | 프랑코 곤잘레스 | 이베르동 스포르 (2025년 6월 30일까지) |
FW | 막시모 알론소 | 알비온 (2024년 12월 31일까지) |
FW | 브루노 베탄코르 | 렌티스타스 (2024년 12월 31일까지) |
FW | 오스카르 크루스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2024년 12월 31일까지) |
FW | 브라이언 만시야 | 데펜소르 스포르팅 (2024년 12월 31일까지) |
6. 3. 주요 선수
세베리노 바렐라는 1938년 우루과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알베르토 스펜서는 58골로 클럽의 국제 대회 최다 득점자이다.페냐롤의 주요 선수들은 다음과 같다.
- '''네스토르 곤잘베스''': 1957년 4월 28일부터 1970년 11월 28일까지 571경기에 출전하여 클럽 역사상 최다 공식 경기 출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 '''페르난도 모레나''':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팀의 역대 최다 득점자(203골)이다. 페냐롤에서 440골을 기록했으며, 1978년 한 시즌 최다 골(36골)을 기록했다.
- '''알베르토 스펜서''': 국제 대회에서 58골을 기록하여 클럽 최다 득점 선수이다.
- '''알베르토 스펜서''' 와 '''페르난도 모레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역사상 각각 48골과 37골로 최다 득점자이다.[83]
페냐롤은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에 많은 선수들을 배출했다. 특히 1930년 FIFA 월드컵과 1950년 FIFA 월드컵 우승에 기여한 선수들이 많다. 페냐롤은 모든 월드컵에 우루과이 대표팀 선수를 배출한 유일한 클럽이다.[88]
선수 | 포지션 | 페냐롤 소속 기간 | 비고 |
---|---|---|---|
로케 마스폴리 | 골키퍼 | 1941-1955 | 1950년 FIFA 월드컵 우루과이 대표팀 |
라디슬라오 마주르키에비치 | 골키퍼 | 1965-1970 | |
에두아르도 페레이라 | 골키퍼 | 1974, 1985-1987 | |
페르난도 알베스 | 골키퍼 | 1978-1984, 1988-1991, 1997 | |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 | 골키퍼 | 2003 | |
파블로 카바예로 | 골키퍼 | 2008-2009 | |
엘리아스 피게로아 | 수비수 | 1967-1971 | |
넬슨 구티에레스 | 수비수 | 1980-1985 | |
호세 오스카 에레라 | 수비수 | 1984-1989, 1998, 2001 | |
알폰소 도밍게스 | 수비수 | 1985-1991 | |
파올로 몬테로 | 수비수 | 1990-1991 | |
에드가르도 아디놀피 | 수비수 | 1996-1999 | |
다리오 로드리게스 | 수비수 | 1998-2002 | |
호에 비세라 | 수비수 | 1998-2004 | |
카를로스 디오고 | 수비수 | 2003-2004 | |
알레한드로 라고 | 수비수 | 2004-2005 | |
호세 안드라데 | 미드필더 | 19xx-1920, 1932-1935 | |
옵둘리오 바렐라 | 미드필더 | 1943-1955 | 1950년 FIFA 월드컵 우루과이 대표팀 |
루이스 쿠비야 | 미드필더 | 1957-1962 | |
루벤 파스 | 미드필더 | 1977-1981 | |
페드로 페델루치 | 미드필더 | 1992 | |
파블로 벵고에체아 | 미드필더 | 1993-2003 | |
파블로 가르시아 | 미드필더 | 1998 | |
파비안 카노비오 | 미드필더 | 2001-2003 | |
크리스티안 로드리게스 | 미드필더 | 2002-2005, 2017-2021 | |
에드가르 알바레스 | 미드필더 | 2003-2004 | |
디에고 페레스 | 미드필더 | 2003-2004 | |
레오니다스 다 실바 | 공격수 | 1933 | |
라이문도 오르시 | 공격수 | 1938 | |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 | 공격수 | 1943-1954 | 1950년 FIFA 월드컵 우루과이 대표팀 |
알시데스 기지아 | 공격수 | 1948-1953 | 1950년 FIFA 월드컵 우루과이 대표팀 |
카를로스 보르헤스 | 공격수 | ||
훌리오 아바디에 | 공격수 | ||
페드로 로샤 | 공격수 | 1959-1970 | |
알베르토 스펜서 | 공격수 | 1960-1970 | |
후안 호야 | 공격수 | 1961-1969 | |
페르난도 모레나 | 공격수 | 1973-1979, 1981-1983, 1984 | |
안토니오 알사멘디 | 공격수 | 1985 | |
카를로스 알베르토 아기레라 | 공격수 | 1988-1989, 1994-1999 | |
클라우디오 비아지오 | 공격수 | 1989-1990 | |
세르히오 다니엘 마르티네스 | 공격수 | 1991-1992 | |
마르셀로 오테로 | 공격수 | 1992-1995 | |
마츠바라 요시카 | 공격수 | 1993 | |
다리오 실바 | 공격수 | 1993-1995 | |
페데리코 마가야네스 | 공격수 | 1994-1996 | |
마르셀로 살라예타 | 공격수 | 1997 | |
디에고 포를란 | 공격수 | 1998 (유스), 2015-2016 | |
카를로스 부에노 | 공격수 | 1999-2005, 2008-2010 | |
아벨 에르난데스 | 공격수 | 2008-2009 |
7. 역대 감독
감독 | 임기 |
---|---|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 | 1975 ~ 1976 |
알시데스 기지아 | 1980 |
루이스 쿠비야 | 1981 |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 1985 |
오스카르 타바레스 | 1987, 1993 ~ 1994 |
디에고 알론소 | 2013 |
8. 통계 및 기록
페냐롤은 1900년 창단 이후 우루과이 축구 리그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으며, 아마추어 및 프로 시대를 통틀어 수많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아마추어 시대 (1900-1931)페냐롤은 1900년 우루과이 축구 협회 리그 창립 멤버 중 하나였으며,[15] 알비온과의 첫 경기에서 2-1로 승리했다.[16] 그 해 우루과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1901년, 1905년, 1907년, 1911년 등 총 9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1900년과 1905년에는 무패 우승을 달성했다.[96] 1908년에는 리그를 탈퇴하기도 했지만, 1913년 팀의 축구 부서가 분리되면서 페냐롤이 창단되었다.[18]
프로 시대 (1932-)1932년 프로 시대가 시작된 이후, 페냐롤은 나시오날과 함께 매 시즌 우루과이 선수권 대회에 참가한 유일한 팀이다.[103][104] 1932년 첫 우승을 시작으로, 2015-16 시즌까지 총 38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우루과이 리그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05]
페냐롤은 1966년 9월 3일부터 1968년 9월 14일까지 56경기 연속 무패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우루과이 리그 역사상 최장 기록이자 남미 프로 축구 역사상 가장 긴 무패 행진이다.[4]
국제 대회에서도 페냐롤은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1960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데 아메리카에서 무패 우승을 차지한 최초의 클럽이 되었으며,[4] 이 대회에서 총 5번 우승했다. 또한 인터컨티넨탈컵에서 3번 우승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페냐롤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최다 출전(40회),[109] 결승전 최다 출전(10회, 보카 주니어스 다음),[4] 최다 골 차 승리(1970년 발렌시아전 11-2),[110] 2경기 합산 최다 점수 차 승리(에베레스트 상대 5-0, 9-1) 등 다양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4]
8. 1. 리그 성적
페냐롤은 프로 시대가 시작된 1932년부터 현재까지 나시오날과 함께 매 시즌 우루과이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103][104]페냐롤은 우루과이 리그 최다 우승 기록(38회)과 최다 무패 우승 기록(6회)을 보유하고 있다.[105] 1949년과 1964년에는 가능한 승점의 94.44%를 획득하며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반면, 2005-06 시즌에는 승점의 32.32%만을 획득하며 16위로 시즌을 마감했는데, 이는 세로와의 경기 후 혼란으로 인해 12점 감점을 받았기 때문이다.[106][107]
다음은 프로 리그 시대의 통산 성적을 클럽별로 나타낸 표이다. (2015-16 시즌 종료 시점)
클럽 | 경기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차 | |
---|---|---|---|---|---|---|---|---|
아테나스 | 4 | 3 | 1 | 0 | 13 | 4 | +9 | |
바사녜스 | 4 | 3 | 1 | 0 | 11 | 1 | +10 | |
베야 비스타 | 101 | 70 | 17 | 14 | 217 | 95 | +122 | |
센트랄 에스파뇰 | 95 | 73 | 12 | 10 | 248 | 96 | +152 | |
세리토 | 12 | 7 | 4 | 1 | 24 | 11 | +13 | |
세로 | 139 | 96 | 24 | 19 | 311 | 120 | +191 | |
세로 라르고 | 9 | 7 | 1 | 1 | 22 | 6 | +16 | |
콜론 | 2 | 2 | 0 | 0 | 8 | 2 | +6 | |
다누비오 | 134 | 86 | 22 | 26 | 252 | 146 | +106 | |
데펜소르 스포르팅 | 174 | 106 | 42 | 26 | 374 | 188 | +186 | |
데포르티보 콜로니아 | 6 | 4 | 0 | 2 | 18 | 5 | +13 | |
데포르티보 말도나도 | 11 | 8 | 2 | 1 | 29 | 13 | +16 | |
엘 탕케 시스레이 | 11 | 7 | 3 | 1 | 19 | 6 | +13 | |
페닉스 | 62 | 43 | 14 | 5 | 139 | 64 | +75 | |
프론테라 리베라 | 4 | 3 | 1 | 0 | 10 | 5 | +5 | |
우라칸 부세오 | 56 | 31 | 20 | 5 | 110 | 60 | +50 | |
후벤투드 | 17 | 12 | 4 | 1 | 37 | 13 | +24 | |
리버풀 | 134 | 91 | 23 | 20 | 320 | 128 | +192 | |
미라마르 미시오네스 | 39 | 28 | 6 | 5 | 110 | 41 | +69 | |
나시오날 | 229 | 80 | 79 | 70 | 296 | 269 | +27 | |
파이산두 | 2 | 2 | 0 | 0 | 5 | 2 | +3 | |
파이산두 베야 비스타 | 8 | 6 | 2 | 0 | 18 | 5 | +13 | |
플라사 콜로니아 | 13 | 7 | 2 | 4 | 24 | 19 | +5 | |
프로그레소 | 40 | 23 | 11 | 6 | 73 | 35 | +38 | |
라싱 | 88 | 64 | 13 | 11 | 228 | 92 | +136 | |
람플라 주니오르스 | 122 | 83 | 23 | 16 | 281 | 104 | +178 | |
렌티스타스 | 47 | 30 | 11 | 6 | 97 | 40 | +57 | |
리베르 플라테 | 133 | 76 | 28 | 29 | 272 | 144 | +137 | |
로차 | 9 | 7 | 1 | 1 | 26 | 15 | +11 | |
수드 아메리카 | 89 | 62 | 18 | 9 | 228 | 74 | +154 | |
타쿠아렘보 | 27 | 20 | 6 | 1 | 57 | 17 | +40 | |
비야 에스파뇰라 | 9 | 6 | 2 | 1 | 20 | 8 | +12 | |
비야 테레사 | 2 | 2 | 0 | 0 | 7 | 1 | +6 | |
원더러스 | 150 | 75 | 48 | 27 | 260 | 161 | +99 |
8. 2. 기록
페냐롤은 아마추어 시대(1900년~1931년) 동안 우루과이 축구 협회 리그에서 26시즌을 뛰었으며(1923~26년 제외), 이 기간 동안 우루과이 선수권 대회에서 9번 우승했다.[95] 특히 1900년과 1905년에는 승점 손실 없이 우승을 차지했다.[96] 1901년,[97] 1903년[98] 그리고 1907년에는 무패 우승을 기록했다.[99][100] 아마추어 시대 최다 점수 차 승리는 1903년 트리운포를 상대로 기록한 12-0 승리이다.[102]1922년에는 2위를 차지했고,[95] 1924년에는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1925년 시즌 취소 당시 로베르토 체리를 상대로 10-0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102] 이 두 토너먼트는 반체제 단체였던 우루과이 축구 연맹(FUF)이 주최했다.
프로 시대(1932년~)가 시작된 이후, 페냐롤은 나시오날과 함께 매 시즌 우루과이 선수권 대회에 참가한 유일한 팀이다.[103][104] 페냐롤은 1932년부터 2013년까지 38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우루과이 리그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05] 또한 1949년, 1954년, 1964년, 1967년, 1968년, 1975년, 1978년에는 무패 우승을 달성하며 최다 무패 우승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105]
페냐롤은 1966년 9월 3일부터 1968년 9월 14일까지 56경기 연속 무패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우루과이 리그 역사상 최장 기록이다.[4] 이는 남미 프로 축구 역사상 가장 긴 무패 행진이기도 하다(아마추어 리그 포함 시 2위).[108]
페냐롤은 1960년에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데 아메리카에서 무패로 우승한 최초의 클럽이다.[4] 또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최다 출전(40회)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109] 보카 주니어스에 이어 결승전에 두 번째로 많이 진출(10회)했다.[4] 페냐롤은 1970년 발렌시아를 상대로 11-2 승리를 거두며 대회 최다 득점 차 승리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110] 2경기 합산 최다 점수 차 승리 기록(에베레스트 상대 5-0, 9-1 승리)도 가지고 있다.[4]
페냐롤은 인터컨티넨탈컵에 5번 출전한 팀 중 하나이며, 이 기록을 달성한 최초의 팀이다.
1932년 4월 29일, AUF는 프로 리그를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 페냐롤과 CA 리베르 플라테의 경기가 우루과이 프로 리그의 첫 경기였다. 1932 시즌, 페냐롤은 17승 6무 4패(총 27경기)를 기록하며 프로 리그 첫 우승을 차지했다.
아마추어 시대 (1900-1931) 요약
항목 | 기록 |
---|---|
프리메라 디비시온 재적 연수 | 26시즌 |
최고 순위 | 1위 (9회) |
최저 순위 | 7위 (1908년) |
최장 무패 | 30경기 (1922년, 1926년~1927년) |
1시즌 최다 득점 | 66골 (1928년) |
1경기 최다 득점 | 12골 (트리운포전, 1903년) |
1경기 최다 실점 | 4골 (5경기) |
1시즌 최다 승리 | 22승 (1927년) |
1시즌 최다 무승부 | 10무 (1927년) |
1시즌 최다 패배 | 6패 (1927년) |
1시즌 최소 승리 | 5승 (1913년) |
1시즌 최소 무승부 | 0무 (1900년, 1902년, 1905년, 1906년) |
1시즌 최소 패배 | 0패 (1900년, 1901년, 1903년, 1905년, 1907년, 1926년) |
통산 순위 | 2위 |
프로 시대 (1932-) 요약
항목 | 기록 |
---|---|
최고 순위 | 1위 (39회) |
최저 순위 | 16위 (2005-06 시즌) |
최장 무패 | 56경기 (1966년~1969년, 리그 기록) |
1시즌 최다 득점 | 91점 (2002년, 리그 기록) |
1경기 최다 득점 | 9점 (람플라 주니어스전, 1962년) |
1경기 최다 실점 | 7점 (다누비오전, 2005-06 시즌) |
1시즌 최다 승리 | 24승 (2000년, 2002년, 2003년) |
1시즌 최다 무승부 | 12무 (1983년, 1984년) |
1시즌 최다 패배 | 11패 (2005-06 시즌) |
1시즌 최소 승리 | 5승 (1983년) |
1시즌 최소 무승부 | 0무 (1994년) |
1시즌 최소 패배 | 0패 (1949년, 1954년, 1964년, 1967년, 1968년, 1975년, 1978년) |
1998년부터 2018년까지의 프리메라 디비시온 성적
9. 우승 기록
(리그)
(리그)
(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