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마드리드 열차 폭탄 테러
1. 개요
2004년 3월 11일, 마드리드에서 4대의 통근 열차에서 발생한 10차례의 연쇄 폭탄 테러 사건이다. 이 테러로 193명이 사망하고 2,0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유럽에서 팬암 103편 폭탄 테러 이후 최악의 테러로 기록되었다. 사건 발생 초기에는 ETA의 소행으로 추정되었으나, 이후 알 카에다의 연루가 밝혀졌다. 이 사건은 2004년 스페인 총선에 큰 영향을 미쳐, 이라크 파병을 지지했던 국민당이 패배하고 사회노동당이 집권했으며, 스페인은 이라크에서 철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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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 2004년 마드리드 열차 폭탄 테러 |
|---|---|
| 부분 | 이라크 전쟁의 여파 스페인의 테러 유럽의 이슬람 테러 |
| 위치 | 마드리드, 스페인 |
| 목표 | 마드리드 통근 열차 네트워크 민간인 |
| 날짜 | 2004년 3월 11일 |
| 시간 | 오전 7시 37분 - 오전 7시 40분 (CET) |
| 시간대 | CET (UTC+01:00) |
| 유형 | 대량 살인 시간 폭탄 테러 테러 |
| 무기 | 고마-2 폭발물로 채워진 배낭 |
| 사망자 | 200명 |
| 부상자 | 2,500명 |
| 범인 | 자말 주감 외 5명 |
| 동기 |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스페인의 참여 반대 |
| 영감 | 오사마 빈 라덴의 연설 |
|---|---|
| 연관 | 알 카에다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음, 자금 지원도 받지 않음 |
| 동기 부여 | 스페인의 이라크 전쟁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여에 대한 반대 |
| 유죄 판결 | 21명 |
|---|---|
| 무죄 판결 | 7명 |
| 놀라운 점 | 원래 공격 계획 혐의를 받았던 두 명이 테러 단체 소속으로만 유죄 판결을 받음 |
| 폭탄 수 | 10개 폭탄이 배낭 및 기타 가방에 숨겨져 폭발, 1개는 폭발하지 않고 해체, 3개는 경찰이 통제 폭발 |
|---|---|
| 수사 결과 | 알 카에다가 계획, 자금 지원, 실행에 관여한 증거는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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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주의 철도 교통 -
세르카니아스 마드리드
세르카니아스 마드리드는 스페인 마드리드 광역권의 통근 철도 시스템으로, 1851년 시작되어 현재 9개의 노선으로 마드리드 시내와 교외, 교외 간, 공항 등을 연결하며 마드리드 지역 교통 컨소시엄의 일부로 운영된다. -
스페인의 테러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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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대량 살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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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건 발생 및 경과
2004년 3월 11일 목요일 아침, 마드리드의 출퇴근 시간대에 알칼라 데 에나레스를 출발하여 아토차 역으로 향하던 4대의 통근 열차(세르카니아스)에서 10차례의 연쇄 폭발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발생한 날짜 때문에 "11-M"으로 불리기도 한다.
테러에 사용된 폭발물은 총 13개였으며, 모두 알칼라 데 에나레스와 아토차 역 사이의 같은 노선,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는 열차에 설치되었다. 폭발 현장에 도착한 폭탄 처리반 (TEDAX)은 남아 있던 3개의 폭발물 중 2개를 통제된 폭발로 처리했지만, 세 번째 폭탄은 유류품 가방에 섞여 있다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발견되었다.
4대의 열차는 07:01에서 07:14 사이에 알칼라 데 에나레스 역을 출발했으며, 폭발은 07:37에서 07:40 사이에 아토차 역, 엘 포조 델 티오 라이문도 역, 산타 에우헤니아 역, 그리고 아토차 역에서 약 800m 떨어진 칼레 텔레즈에서 발생했다.
08:00경, 응급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구조 작업을 시작했고, 다오이즈 이 벨라르데 스포츠 시설에 야전 병원이 설치되었다. 지역 주민들도 구조대원을 도왔다.
이 테러로 인해 스페인에서는 1987년 바르셀로나 히페르코르 폭탄 테러보다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1988년 팬암 103편 폭탄 테러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최악의 테러 공격으로 기록되었다.
원문: 2004년 3월 11일 테러로 시민 스포츠 센터 다오이스 이 벨라르데에 설치된 야전 병원으로 이송된 희생자들을 기립니다. 마드리드 시민들의 연대 의식과 구조에 나선 모든 서비스와 사람들의 용기와 관대함에 감사드립니다.
일본어 번역: 이 기념패는 2004년 3월 11일 공격을 받아 이곳 시민 스포츠 센터에 설치된 야전 병원으로 이송된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자를 도운 모든 사람들의 용기와 관대함에 감사드립니다.
2.1. 폭발 발생
2004년 3월 11일 목요일 아침, 마드리드의 러시아워 시간대에 알칼라 데 에나레스와 마드리드의 아토차역 사이를 운행하던 4대의 통근 열차(세르카니아스)에서 10차례의 폭발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발생일 때문에 "11-M"으로 축약되었다.
4대의 열차는 모두 07:01에서 07:14 사이에 알칼라 데 에나레스 역을 출발했다. 폭발은 07:37에서 07:40 사이에 발생했다 (모든 시간은 현지 시간 CET, UTC +1).
* 아토차 역 (열차 번호 21431): 세 개의 폭탄이 폭발했다. 역 보안 시스템의 비디오 녹화에 따르면 첫 번째 폭탄은 07:37에 폭발했고, 다른 두 개는 4초 뒤인 07:38에 폭발했다. 피해를 입은 열차 칸은 6번째, 5번째, 4번째 칸이었다.
* 엘 포조 델 티오 라이문도 역 (열차 번호 21435): 약 07:38에, 열차가 역을 막 출발하려는 순간, 두 개의 폭탄이 다른 객차에서 폭발했다. 피해를 입은 객차는 4번째와 5번째였다.
* 산타 에우헤니아 역 (열차 번호 21713): 약 07:38에 폭탄 한 개가 폭발했다. 피해를 입은 유일한 객차는 4번째 객차였다.
* 아토차 역에서 약 800m 떨어진 칼레 텔레즈 (열차 번호 17305): 약 07:39에 열차의 다른 객차에서 네 개의 폭탄이 폭발했다. 피해를 입은 객차는 첫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였다.
08:00에 응급 구조대가 폭탄 테러 현장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2.2. 피해 상황
이 폭탄 테러로 193명이 사망하고 2,084명이 부상당했다. 사망자 중에는 16명의 루마니아인을 비롯하여, 에콰도르, 불가리아, 페루, 폴란드 등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인 희생자는 없었다.
사망자가 발생한 장소는 아토차역 (열차 1)에서 34명, 엘 포조 델 티오 라이문도 역 (열차 2)에서 65명, 산타 에우헤니아 역 (열차 3)에서 14명, 칼레 텔레즈 (열차 4)에서 63명, 그 외 병원 등에서 16명이었다.
총 희생자 수는 스페인에서 발생한 다른 테러 공격보다 많았으며, 1987년 바르셀로나의 히페르코르 슈퍼마켓 폭탄 테러 (사망 21명, 부상 40명)보다 훨씬 많았다. 이는 1988년 12월 21일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발생한 팬암 103편 폭탄 테러 이후 유럽 최악의 테러 공격이었다.
2.3. 추가 폭발물 발견 및 용의자 자폭
2004년 4월 2일, 마드리드-세비야 간 고속철도(AVE) 선로에서 12kg의 고마-2 ECO 폭발물이 발견되었다. 이 폭발물에는 136m 길이의 전선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기폭 장치가 없어 폭발하지 않았다. 스페인 사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지 않아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4월 3일, 경찰은 마드리드 남부 레가네스에 있는 한 아파트를 용의자들의 은신처로 특정했다. 경찰이 아파트를 급습하려 하자, 용의자들은 폭발물을 터뜨려 자폭했다. 이 폭발로 용의자 7명과 스페인 경찰 특수 작전 그룹(GEO) 소속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11명의 경찰관이 부상당했다. 수사관들은 레가네스 폭발에 사용된 폭발물이 3월 11일 테러와 AVE 선로 폭탄 테러 시도에 사용된 것과 같은 종류임을 확인했다.
3. 사건 배경
2001년 9.11 테러 이후, 스페인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며 이라크 전쟁에 군대를 파병했다.
2003년 3월 16일, 포르투갈령 아소르스 제도에서 열린 "아소르스 정상 회담"에서 미국(조지 W. 부시) , 영국(토니 블레어), 스페인(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포르투갈(조제 마누엘 두랑 바호주) 4개국 정상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알 카에다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후세인에게 최후 통첩을 발령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이라크 전쟁의 시작으로 이어졌고, 미국과 영국은 그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는 이라크에 대한 지원과 다국적군의 주둔을 승인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 행동은 여러 국가에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스페인 내에서도 "전쟁에 반대한다(No to war)"라는 구호 아래 대규모 반전 시위가 일어났으며, 마드리드에서 56만 명, 바르셀로나에서 25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다. 반대 운동은 주로 좌익 계열, 반미 시민 단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동기가 석유 산업 지배에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인도적 파병이라 할지라도 이슬람 측의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3.1. 이라크 파병
2001년 9.11 테러 이후,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총리는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며 사담 후세인 정권에 대한 군사 행동에 동참했다. 2003년 3월, 스페인은 미국, 영국과 함께 이라크에 대한 최후 통첩을 발령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1483호 및 1511호에 따라 이라크에 대한 지원과 다국적군의 주둔이 승인되었다. 국민당 아스나르 정권은 인도적 지원을 명목으로 2003년 4월 움 카사르에 육군 의료 부대를 파견하고, 식량, 물, 필수품 등을 지원했다. 8월에는 안 나자프와 알 카이시야 지방으로 임지가 변경되어 남미 5개국 병사들과 합동 부대를 편성, 1,300명 규모로 2교대하며 2004년 5월 말까지 연 2,600명을 파견했다. 아나 팔라시오 외무 장관은 유엔 결의에 따라 이라크의 안정과 안전에 협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3.1.1. 파병에 대한 국내 반발
국민당 아스나르 정권은 2003년 4월 9일 이라크 남부 움 카사르 지방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목적으로 육군 의료 부대를 태운 함선을 파견했다. 그러나 스페인 국민 대다수는 이라크 파병에 반대했으며, "전쟁에 반대한다(No to war)"라는 구호 아래 대규모 반전 시위가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마드리드에서 56만 명, 바르셀로나에서 25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반대 운동은 주로 좌익 계열, 반미 시민 단체를 기반으로 하였으며, 이들은 "미국 배후의 동기는 석유 산업이 이라크의 석유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스페인의 경우에는 "인도적인 파병이라 할지라도 이슬람 측에서 오해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진보 진영에서는 이라크 파병이 스페인을 테러의 표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경고했다.
3.2.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위협
1980년대와 1990년대부터 스페인에는 다양한 이슬람 계열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9·11 테러 이후 이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특히 알제리인, 시리아인 계열 단체의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빈번하게 체포가 이루어졌다. 알 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은 2003년 10월 18일,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지원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영국, 스페인, 호주, 일본, 폴란드, 이탈리아 등 여러 국가를 위협하는 발언을 했고, 이는 알 자지라를 통해 보도되었다.
빈 라덴은 2004년 1월 4일, 알 자지라 방송을 통해 "우리가 이슬람교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시절 세계의 일부였던 알 안달루스(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의 경제력보다 약하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2003년 12월 8일, "이라크 민중 원조 정보"는 글로벌 이슬람 미디어를 통해 "아스나르(총리)는 이라크 주둔 스페인군이 단순한 인도적 지원을 위한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지만, 진실은 증오에 의한 침략이며 침략자 편에 서는 것이다. 이는 장래 스페인 국가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3.3. ETA 테러와의 혼선
ETA(바스크 조국과 자유)는 스페인 바스크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테러 조직으로, 1959년부터 2011년까지 약 50년 동안 스페인 각지에서 약 3,500건의 테러를 일으켜 853명의 사망자와 7천 명 이상의 부상자를 냈다.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총리는 1995년에 차량 폭탄 테러를 당할 뻔했지만, 간신히 피한 적이 있었다. 그는 ETA에 대해 적극적인 대책을 시행했으며, 이 때문에 2001년 미국 무역 센터 사건에서도 국제 테러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사건 직전에도 ETA는 마드리드에서 다음과 같은 폭탄 테러 미수 사건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3월 11일의 테러도 "ETA의 소행"이라는 오해가 생기는 원인이 되었다. 테러 발생 당일, 주요 정치인들은 ETA의 범행으로 간주하고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ETA의 정치적 중심 인물인 아르날도 오테기는 ETA의 범행이 아니라 "아랍의 저항"이라고 주장했다.
3월 12일, 바스크 주의 미디어 2사에 "ETA는 이것과 절대 관련이 없다."라고, 그 관계자를 자칭하는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왔다. 같은 날, 아세베스 내무부 장관은 ETA가 통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폭발물과 기폭 장치가 발견되었음에도 "주요 수사 대상은 ETA이다"라고 발표했다.
4. 수사 및 재판
2004년 4월 2일, AVE 고속철도 선로에서 고마-2 ECO 12kg과 기폭 장치 등으로 구성된 폭탄이 발견되었으나, 기폭 장치 문제로 폭발하지 않았다. 스페인 사법부는 이 사건을 조사하지 않아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4월 3일, 경찰은 마드리드 남부 레가네스의 한 아파트를 테러 용의자들의 근거지로 특정했다. 경찰이 급습을 시도하자 용의자들은 폭발물을 터뜨려 자살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관 1명도 사망했다. 수사 결과, 이 폭발물은 3월 11일 테러와 AVE 선로 폭탄 테러 미수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종류였다.
수사는 폭발물 출처를 추적했고, 은퇴한 광부가 발파 장비를 이용해 폭발물을 판매한 사실이 드러났다. 한편, 3월 11일 테러에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는 5~8명의 용의자는 도주했다.
2006년 12월, ABC는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총리에게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가 2004년 3월 11일 사건을 언급하며 정부가 요구를 고려하지 않으면 비슷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ETA는 공격 자체와는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후안 델 올모 판사는 테러 배후로 무장 이슬람 집단이나 모로코 이슬람 전투 그룹이 아닌, 인터넷에서 영감을 얻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지역 세포를 지목했다. 이들은 모로코 출신 하시시 밀매업자들로, 소규모 마약 거래로 얻은 돈으로 아스투리아스 주의 하급 절도범, 경찰, 민병대 정보원에게서 고마-2 ECO 다이너마이트를 구입했다.
2007년 2월 15일, 29명의 피고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엘 파이스는 법원이 ETA 연루설 등 모든 음모론을 반박했다고 보도했다. 피고인들은 이전 진술을 철회하고 연루를 부인했다. 재판은 2007년 7월 2일에 최종 심리가 열렸다.
엘 문도는 테러의 배후, 동기, 계획 시점 및 장소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스페인 사법부가 폭발물 종류에 대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결론을 내렸고, 알 카에다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인류학자 스콧 에이트런은 마드리드 재판을 "완전한 조롱거리"라고 묘사하며 알 카에다와의 작전상 관계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말했다.
2007년 10월 31일, 스페인 국립 법원은 28명의 피고인 중 21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주범 2명은 각각 4만 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는 40년 정도 복역할 것으로 보인다.
수사 과정에서 보안 당국의 과실과 경찰 간 조정 실패 사례가 드러났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를 감시하는 그룹은 규모가 작았고, 폭탄 테러를 막지 못했다. 폭발물을 제공한 범죄자 중 일부는 경찰 정보원이었으나, 정보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다. 일부 용의자는 2001년부터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마드리드 폭탄 테러 이후, 스페인은 국제 테러에 대응하기 위해 경찰 정보력을 강화했다. 국가 경찰과 민간 경비대는 대테러 서비스를 강화했고, 관련 인력은 임기 동안 35% 가까이 증가했다.
폭파 원인은 열차 내 시한폭탄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ETA의 소행으로 의심되었으나, ETA는 즉시 부인했고, 경찰도 ETA 관련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아부 하프스 알 마스리 순교 여단이라는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그룹이 런던의 아랍계 신문에 범행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스페인을 공격한 이유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협력을 지목했다.
경찰은 실행범으로 지목된 모로코인 3명과 인도인 2명을 체포했으나, 최종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16세 아랍계 소년뿐이었다.
4.1. 폭발물 출처 및 용의자 특정
경찰은 폭발물 가방에 있던 휴대 전화와 SIM 카드를 추적하여 용의자들을 특정하고 체포했다. 2004년 3월 13일, 세 명의 모로코인과 두 명의 파키스탄 무슬림이 공격 혐의로 체포되면서 이슬람 단체의 소행임이 확인되었다. 체포된 다섯 명 중 모로코인 자말 주감만이 최종 기소되었다.
2004년 4월 3일, 마드리드 남부 레가네스에서 스페인 경찰 특수 작전 그룹(GEO)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당했으며, 테러리스트 네 명은 자살 폭탄 테러로 추정되는 폭발로 사망했다.
후안 델 올모 판사는 테러 배후로 무장 이슬람 집단이나 모로코 이슬람 전투 그룹이 아닌, 인터넷에서 영감을 얻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지역 세포를 지목했다. 이들은 모로코 출신 하시시 밀매업자들로, 이미 체포된 알 카에다 세포와 원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규모 마약 거래로 얻은 돈으로 아스투리아스의 하급 절도범, 경찰, 민병대 정보원에게서 고마-2 ECO 다이너마이트를 구입했다.
자말 주감(1973년 10월 5일 출생)은 유죄 판결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이다. 2004년 3월 13일에 체포된 그는 살인, 살인 미수, 차량 절도, 테러 조직 가담, 4건의 테러 행위 혐의를 받았다. 모로코 출신인 주감은 마드리드 라바피에스 지역에서 '누에보 시글로'('새로운 세기')라는 휴대폰 가게를 운영했는데, 공격에 사용된 폭탄을 터뜨리는 데 쓰인 전화기를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폭탄 제조에도 관여했으며, 가장 먼저 체포된 인물 중 하나였다.
3월 11일 폭발 사건 이후 발견된 르노 캉구 밴에서는 뇌관, 코란 구절이 담긴 오디오 테이프, 휴대 전화가 발견되었다. 3월 12일 오전 3시, 아토차 역에서 두 역 전인 바예카스 파출소에서 "폭발물 13"으로 불리는 가방이 발견되었다. 이 가방에는 10kg의 "Goma-2 ECO", 구리제 기폭 장치, 휴대전화(미쓰비시, Trim, T110), 쇠못 등이 들어 있었으나, 배전선이 빠져 있어 폭발하지 않았다.
수사 결과, 3월 13일 마드리드 시 라바피에스 구의 휴대폰 가게 주인 자말 주감이 체포되었다. 3월 15일, 폭발물 처리반은 폭발물과 기폭 장치가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 주 아빌레스에서 온 것임을 확인했다. "고마-2 ECO"는 아스투리아스 주의 광산에서 주로 사용되는 폭발물이었다. 3월 18일, 호세 에밀리오 수아레스 트라쇼라스가 폭발물 공급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광산에서 5년간 일했으나, 2002년 조현병으로 퇴사했다. 그는 아스투리아스 주 꼰치타 광산에서 폭발물을 훔쳐 자말 아흐미단(별칭 "엘 치노")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총 200kg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4.2. 용의자들의 배경
대부분의 용의자는 모로코 출신이었으며, 인터넷을 통해 급진화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소규모 마약 밀매로 얻은 돈으로 아스투리아스 주의 전직 광부, 경찰, 민병대 정보원으로부터 폭발물(다이너마이트 고마-2 ECO)을 구매했다.
스페인 경찰 특수 작전 그룹(GEO)은 2004년 4월 3일 마드리드 남부 레가네스의 한 아파트에서 용의자들을 추적했다. 경찰이 아파트 진입을 시도하자 용의자들은 폭발물을 터뜨려 자살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관 1명도 사망했다. 수사 결과, 레가네스 폭발에 사용된 폭발물은 3월 11일 공격과 AVE 선로 폭탄 테러 시도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종류였다.
사건에 사용된 폭발물은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 주의 광산에서 사용되는 고마-2 ECO였다. 2004년 3월 18일, 호세 에밀리오 수아레스 트라쇼라스가 폭발물을 범인들에게 공급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광산에서 일하다가 2002년 조현병으로 퇴직했으며, 2001년에는 마약 밀매로 체포된 후 경찰의 정보 제공자로 활동했다. 그는 범죄에 사용될 가능성을 알면서도 자말 아흐미단(Jamal Ahmidan, 별칭 "엘 치노")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총 200kg의 폭발물을 전달했다.
범인들은 2003년 가을부터 연말까지 모라타 데 타후냐의 은신처에서 테러를 구상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은신처는 9.11 테러와 관련하여 수감된 알 카에다 조직원의 아내가 빌려준 곳이었다.
주요 용의자 및 관련 인물
4.3. 재판 결과
2007년 2월 15일, 29명의 피고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스페인 국립 법원은 2007년 10월 31일에 판결을 내렸는데, 28명의 피고인 중 21명이 위조에서 살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주범으로 지목된 자말 주감 등 2명에게는 각각 4만 년 이상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스페인에는 사형이나 종신형 제도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판결이 내려졌지만, 실제로는 40년 정도 복역할 것으로 보인다.
엘 파이스는 법원이 모든 음모론을 하나하나 무너뜨렸고,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가 폭탄 테러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음을 입증했다고 보도했다.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들은 이전 진술을 철회하고 연루를 부인했다.
엘 문도는 "마드리드 열차 테러를 누가, 왜, 언제, 어디서 계획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5. 사건의 영향 및 논란
2004년 마드리드 열차 폭탄 테러는 스페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정치, 사회적으로 다양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테러 발생 직후,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총리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ETA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역시 초기에는 ETA를 의심했다. 그러나 ETA는 자신들의 연루를 부인했고, 수사 결과 알카에다와 연관된 이슬람주의 극단주의 단체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테러 발생 3일 뒤에 치러진 총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라크 침공에 찬성하고 파병을 결정한 아스나르 정권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면서, 국민당은 선거에서 패배하고 스페인 사회노동자당(PSOE)의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가 이끄는 새 정권이 출범했다. 사파테로 정권은 즉시 이라크 주둔 스페인 군의 철수를 결정했고, 2004년 4월부터 5월 사이에 철군이 완료되었다.
일부 보수 언론과 국민당은 ETA 연루설을 계속 주장하며 정부가 정보를 은폐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법원은 ETA의 연루 가능성을 일축했다.
진보 진영에서는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아스나르 정권에 대한 비판이 거셌고, 시민들은 즉각적인 철군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스페인의 다국적군 철수에 대해 미국은 "테러에 굴복했다"며 비난했다.
5.1. 정치적 영향
이 사건은 3일 뒤에 치러진 총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라크 침공에 동참한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정권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져, 국민당은 실각하고 스페인 사회노동자당(PSOE)의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정권이 출범했다. 새 정권은 즉시 이라크 주둔 스페인 군의 철수를 결정했고, 2004년 4월 18일부터 5월까지 철군이 완료되었다.
공격 이전 여론 조사에서 5% 앞섰던 국민당은 테러 공격 이후 사회노동자당에 5% 차이로 패배했다. 사회노동자당은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스페인 군의 이라크 철수를 요구했고,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는 2004년 6월 30일까지 철군을 약속했다. 실제 철군은 이보다 한 달 일찍 완료되었다.
유권자의 28%는 폭탄 테러가 자신의 의견과 투표에 영향을 미쳤다고 응답했으며, 약 100만 명의 유권자가 사회노동자당으로 투표 성향을 바꿨다. 이들은 국민당의 전쟁 정책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았다. 또한, 170만 명의 시민들이 테러로 인해 투표에 참여하게 되었고, 30만 명은 투표를 포기했다. 결과적으로 총 투표율은 4% 증가했다.
스페인은 다국적군에서도 탈퇴했으며, 미국은 이를 "테러에 굴복했다"며 비난했다. 필리핀 등 총 6개국이 테러와 관련하여 철수를 결정하며, 테러가 국가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5.2. ETA 연루설 및 음모론
일부 보수 언론과 국민당은 ETA 연루설을 제기하며, 정부가 정보를 은폐했다는 음모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ETA의 연루 가능성을 일축했다.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총리는 마드리드 테러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으로 여러 차례 기자 회견을 열어 ETA의 연루를 언급했고, 스페인 정부는 이틀 동안 이 이론을 유지했다. 폭탄 테러가 총선거 3일 전에 발생했기 때문에, 상황은 많은 정치적 해석을 낳았다. 미국 역시 처음에는 ETA의 소행이라고 믿었다.
렌다카리 후안 호세 이바르체를 포함한 여러 성명들은 ETA를 주요 용의자로 지목했지만, ETA는 어떤 연루도 부인했다. 이후 증거는 극단주의 이슬람주의 단체의 연루를 강력하게 시사했으며, 모로코 이슬람 전투 그룹이 수사의 초점으로 지목되었다.
ETA는 마드리드에서 폭탄 공격을 감행한 전력이 있지만, 3월 11일 공격은 이전의 어떤 공격보다도 심각했다. 이로 인해 일부 전문가들은 사용된 전술이 알카에다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관찰자들은 ETA가 대량 폭탄 테러 전에 관례적으로 경고를 발령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며, 이 공격에 대한 경고는 없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유로폴 국장 위르겐 스토르베크는 이 폭탄 테러에 대해 "ETA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그들이 채택한 작업 방식과 일치하지 않는 공격을 다루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 분석가들은 ETA의 유죄가 아스나르 정부의 강력한 반테러 정책으로 인해 필사적인 수단으로 전락한 테러 조직의 종말이라고 여겨질 것이기 때문에, 국민당의 재선 가능성을 강화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에 이슬람 극단주의 공격은 스페인 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한 인기 없는 전쟁인 이라크 침공에 대한 스페인의 개입의 직접적인 결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폭탄 테러의 배후는 스페인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국민당(PP)의 일부와 PP에 우호적인 언론 매체(주로 《엘 문도》와 리베르타드 디지털 라디오 방송국)는 스페인 사법 조사에 모순과 상호 모순이 있다고 주장한다.
스페인과 국제 조사가 바스크 분리주의자 조직의 적극적인 연루 가능성이 낮다고 계속 주장함에 따라, 이러한 주장은 바스크 분리주의 단체의 직접적인 혐의에서 덜 구체적인 암시와 일반적인 회의론으로 바뀌었다.
5.3. 진보 진영의 입장
진보 진영에서는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아스나르 정권에 대한 비판이 집중되었고, 즉시 철병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대규모 데모가 잇따랐다. 야당도 함께 정권을 공격했고, 마침 총선 3일 전에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선거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선거 결과 국민당은 실각했고,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의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정권이 탄생했다. 새 정권은 성립 직후 이라크에서 철병을 결정했고, 4월 18일부터 5월까지 철수가 모두 완료되었다.
스페인은 동시에 다국적군에서도 탈퇴했으며, 미국은 "테러에 굴복했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필리핀 등도 그 후 테러와 관련하여 철수를 서두르거나, 수개월 만에 총 6개국이 탈퇴하는 결과는 테러가 국가에 대해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6. 추모 및 기억
2004년 3월 25일, 알무데나 대성당에서 이 사건의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는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 소피아 왕비, 희생자 가족,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을 포함한 여러 국가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원문: 2004년 3월 11일 테러로 시민 스포츠 센터 다오이스 이 벨라르데에 설치된 야전 병원으로 이송된 희생자들을 기립니다. 마드리드 시민들의 연대 의식과 구조에 나선 모든 서비스와 사람들의 용기와 관대함에 감사드립니다.
일본어 번역: 이 기념패는 2004년 3월 11일 공격을 받아 이곳 시민 스포츠 센터에 설치된 야전 병원으로 이송된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자를 도운 모든 사람들의 용기와 관대함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