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해골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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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S 해골 부대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SS) 산하 조직으로, 강제 수용소 경비와 운영을 담당했다. 1933년 나치 정권 수립 이후 '국가의 적' 수용을 위해 설립되었으며, 테오도어 아이케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다하우 강제 수용소 경비 부대를 재편하면서 '해골' 표식을 사용했다. 1936년 공식적으로 SS-Totenkopfverbände(SS-TV)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여러 연대로 확장되어 강제 수용소 감찰관의 지휘를 받았다. 이들은 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 등지에서 치안 유지 임무를 수행하며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고, 홀로코스트 기간에는 조직적인 학살, 증거 은폐, 수감자 고문 등 잔혹 행위를 자행했다. 종전 후 많은 부대원들이 전쟁 범죄로 재판을 받았으며, SS 해골 부대는 나치즘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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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해골부대 - [정부기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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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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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에스에스 토텐코프페어벤데) |
의미 | (죽음의 해골 부대) |
종류 | 준군사조직 |
역할 | 강제수용소 위병 |
소속 | 나치 친위대 |
활동 기간 | 1936년 ~ 1945년 5월 8일 |
본부 | 베를린 근교 오라닌부르크 |
지휘 | |
사령관 | 하인리히 히믈러 (1934–1945), Reichsführer-SS (국가지도자) 테오도어 아이케 (1934–1940) 리하르트 글뤽스 (1940–1945) |
규모 | |
직원 | 22,033명 (SS-TV 1939년 및 SS Division Totenkopf ) |
하위 기관 | |
관련 조직 | (친위대) (친위대 경비 부대) (해골) (친위대 해골 부대) (라인하르트 작전) (특수 파견대) |
2. 역사
1933년 나치당이 국가 권력을 장악한 후,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가두기 위한 수용소가 독일 전역에 생겨났다. 초기에는 임시 수용소 형태로 운영되었으나, 1934년 장검의 밤 사건 이후 친위대(SS)가 수용소 시스템을 장악하고 다하우 강제 수용소 등 국립 강제 수용소를 설립했다.
1933년 6월, 하인리히 힘러는 테오도르 아이케를 다하우 강제 수용소 소장으로 임명했다. 아이케는 자신에게만 종속되는 '''SS 경비 부대(SS-Wachverbände)'''를 편성하고, 수감자에게 가혹한 징계를 내리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 규정은 1934년 1월부터 모든 강제 수용소에서 채택되었다. 장검의 밤 사건 이후, 아이케는 강제 수용소 감찰관 겸 SS 경비 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돌격대(SA)가 관리하던 수용소는 SS로 이관되었다. 아이케는 1935년부터 수용소를 재편하여 소규모 수용소를 해체하고 다하우, 작센하우젠, 오라니엔부르크 강제 수용소를 중심으로 운영했다.
1936년 3월 29일, 강제 수용소 경비대와 행정 부대는 공식적으로 '''SS 해골 부대(SS-Totenkopfverbände, SS-TV)'''로 명명되었다.[19][24][25][26] 1937년 여름에는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가, 1939년 5월에는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가 가동되었다. 1938년에는 마우트하우젠-구센 강제 수용소 등 오스트리아에도 새로운 수용소가 건설되었다.
1935년부터 독일 내 강제 수용소 시스템이 확장되면서, 수용소 집단은 ''Wachsturmbanne''(대대)로 조직되었다. 1936년 3월 SS 해골 부대가 정식 설립되면서, 6개의 ''Wachtruppen''으로 조직되었다. 1936년 4월, 아이케는 SS 해골 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병력은 증가했다. 1937년에는 ''Wachsturmbanne''가 3개의 주요 ''SS-Totenkopfstandarten''(연대)으로 재편성되었다.
1936년까지 아이케는 강제 수용소 인력을 군사 조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1938년까지 SS-VT 병력이 최전선 "목적"으로도 사용될 것이 분명해졌다.
아이케는 소규모 수용소를 해체하며 수용소 시스템을 재편했다. 1937년 8월까지 다하우, 작센하우젠, 부헨발트, 라벤스브뤼크만 남았다.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오스트리아에 마우트하우젠 등 새로운 수용소를 건설했다. 힘러는 아이케가 SS-TV와 수용소 운영을 계속 지휘하도록 하여, 수용소 통제가 게슈타포나 SD로 넘어가지 않도록 했다.
1938년 4월, SS-TV는 4개의 연대를 보유했다. 1938년 8월 17일, 히틀러는 SS-TV를 SS-VT의 예비군으로 정했다. 힘러는 1939년 5월 18일 법령을 통해 SS-TV 병력을 확대하고 군사 장비를 제공하도록 지시했다.
1937년 7월 1일, 해골 부대는 3개의 연대로 편성되었다.
연대 | 주둔 강제 수용소 |
---|---|
제1SS 해골 연대 "오버바이에른" | 다하우 강제 수용소 |
제2SS 해골 연대 "브란덴부르크" |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 |
제3SS 해골 연대 "튀링겐" |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
오스트리아 병합 후 1938년 4월에는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에 주둔하기 위해 제4SS 해골 연대 "오스트마르크"가 창설되었다.[29] 1937년에는 총 1만 명의 수감자에 대해 4,800명의 해골 부대원이 있었으며, 대원 다수는 젊은이였다.[30][31][32]
각 해골 연대는 관할 강제 수용소에 감시대(Wachmannshaften)를 설치했다.[36] 감시대는 수용소 경비만 담당했으며, 수용소 직원과는 구별되었다.[37] 해골 연대 사령관과 강제 수용소 소장도 다른 사람이었다.[38] 수용소 소장에게는 감시대 지휘권이 없었다.[39]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44] 해골 부대는 폴란드로 파견되어 치안 유지 임무를 맡았다.
힘믈러는 친위대 특무부대(SS-VT, 후의 무장친위대)보다 자신이 직접 통제하기 쉬운 해골 부대에 주목했다.[47] 힘믈러는 해골 부대를 전선에 투입하는 전투 부대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1939년 10월 31일 해골 부대를 중심으로 제3SS 기갑사단 '토텐코프'를 창설했다. (사단장은 테오도어 아이케)[48] 무장친위대의 한 사단으로서 서방 전격전과 독소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아이케와 해골 부대원들은 강제 수용소 운영에 관여하지 않았다. 1940년 말에는 모든 해골 부대원이 무장친위대가 되었다.[49]
테오도어 아이케가 전투 임무로 재배치된 후, 리하르트 글뤽스가 새로운 강제 수용소 감찰관으로 임명되었다.[7] 글뤽스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용소 행정을 계속 관리했다.
1941년까지, "최종 해결" 이전, SS해골부대(SS-TV)가 운영하는 강제 수용소는 SS를 위한 제도화된 강제 노동의 거대한 시스템으로 성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로 구분되었으며, 홀로코스트 희생자로부터 현금과 자산을 도난하여 이윤을 얻었다.[4][5]
수용소 내부에는 수용소 근무에만 고유한 직책과 직위의 계층이 존재했다. 각 수용소는 ''Kommandant''(사령관) 또는 ''Lagerkommandant''(수용소장)라고 불렸으며, 수용소 부관 및 지휘 참모의 지원을 받았다. 절멸 수용소 내에서, ''Blockführer''는 수감자 ''존더코만도''(특수 부대)를 담당했으며,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희생자를 물리적으로 가스 처리하는 사람이었다.[8]
유대인 ''존더코만도'' 노동자는 ''Wachmannschaften''(경비병)이라고 불리는 트라브니키 사람들에 의해 테러를 당했다.[8] 수용소 경계와 감시탑은 ''Wachbattalion''(경비 대대)이라는 별도의 부대가 감독했다.
SS-TV는 "융통성 없는 가혹함"의 태도를 길렀다. 신병들은 혹독한 훈련과 나치 사상 주입을 통해 적을 증오하도록 교육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보조-SS" (''SS-Mannschaft'')라는 특별 그룹이 결성되어 수용소 경비병 및 행정 요원으로 복무했다.
SS는 홀로코스트를 통해 재정적 이득을 얻었다. 수용소의 노예 노동력은 민간 회사에 판매되거나, 수익성 있는 SS 운영 산업을 운영하는 데 사용되었으며,[12] 죄수 유지 비용은 최소화되었다.[13] 살해된 유대인의 재산은 도난당해 독일 대중에게 경매되었다.[14]
1945년 4월, 많은 SS-TV(해골 부대) 부대원들은 정체를 숨기고자 '해골' 휘장을 제거하고 직무를 떠났다. 수용소 임무는 "보조-SS"에게 넘겨졌는데, 이들은 해골 부대원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징집된 군인 및 민간인 경비병이었다.[11] 그러나 많은 부대원이 연합군에 체포되어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쟁 범죄로 재판을 받았다.[11]
2. 1. 형성 배경 (1933-1934)
1933년 나치당이 국가 권력을 장악한 후, 이른바 '국가의 적'들을 가두기 위한 수용소가 독일 전역에 "비 온 뒤 버섯처럼"(힘러의 인용구) 생겨나기 시작했다.[17] 초기에는 엔진실, 양조장 바닥, 저장 시설, 지하실 등 영구적인 구금 시설이 없는 임시 수용소 형태로 운영되었다.1934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벌어진 장검의 밤 사건으로 돌격대(SA)가 몰락하면서, 친위대(SS)가 초기 수용소 시스템을 장악했다. SS는 다하우 강제 수용소, 오라니엔부르크 강제 수용소, 에스테르베겐 강제 수용소 등 국립 강제 수용소를 설립했다.
1933년 6월 26일, 하인리히 힘러는 테오도르 아이케를 다하우 강제 수용소 소장으로 임명했다.[18] 아이케는 자신에게만 종속되는 '''SS 경비 부대(SS-Wachverbände)'''를 편성했다.[19] 그는 탈출을 시도하는 수감자를 즉결 처형(''Postenpflicht'')하고, 수감자에게 가혹한 징계를 내리는 ''Lagerordnung'' 규정을 만들었다. 그의 규칙은 1934년 1월 1일부터 나치 독일의 모든 강제 수용소에서 채택되었다.
장검의 밤 사건에서 에른스트 룀 등 돌격대(SA) 간부 처형에 참여한[20] 아이케는 SS-''Gruppenführer''로 승진하고 강제 수용소 감찰관이자 SS 경비 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SA가 관리하던 수용소는 모두 SS로 이관되었다.[22][23][24] 아이케는 1935년부터 수용소를 재편하여 소규모 수용소를 해체하고, 다하우 강제 수용소를 중심으로 작센하우젠과 오라니엔부르크 강제 수용소에 인력을 배치했다.
2. 2. SS 해골 부대 창설 (1936-1939)
1933년 나치당이 국가 권력을 장악한 후,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대규모로 수감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임시 수용소만 운영되었으나, 장검의 밤 사건(1934년 6월 30일 ~ 7월 2일) 이후 친위대(SS)가 수용소 시스템을 장악했다. SS는 다하우 강제 수용소, 오라니엔부르크 강제 수용소, 에스테르베겐 강제 수용소 등 국립 강제 수용소를 설립했다.1933년 6월 26일, 힘mler는 테오도르 아이케를 다하우 강제 수용소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아이케는 자신에게만 종속되는 '''SS 경비 부대(SS-Wachverbände)'''를 편성했다. 그는 수감자들에게 가혹한 징계를 내리는 규정을 만들었고, 이 규정은 1934년 1월 1일부터 모든 강제 수용소에서 채택되었다. 1934년 장검의 밤 사건 이후, 아이케는 강제 수용소 감찰관 겸 SS 경비 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SA가 운영하던 수용소는 SS로 넘어갔다. 아이케는 1935년부터 수용소 재편을 시작하여, 작은 수용소들을 해체하고 다하우, 작센하우젠, 오라니엔부르크 강제 수용소를 중심으로 운영했다.
1936년 3월 29일, 강제 수용소 경비대와 행정 부대는 공식적으로 '''SS 해골 부대(SS-Totenkopfverbände, SS-TV)'''로 명명되었다.[19][24][25][26] 1937년 여름에는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가, 1939년 5월에는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가 가동되었다. 1938년에는 마우트하우젠-구센 강제 수용소 등 오스트리아에도 새로운 수용소가 건설되었다. 모든 SS 수용소 규정은 다하우 수용소 모델을 따랐다.
1935년, 독일 내 강제 수용소 시스템이 확장되면서, 수용소 집단은 ''Wachsturmbanne''(대대)로 조직되었다. 1936년 3월 SS 해골 부대가 정식 설립되면서, 6개의 ''Wachtruppen''으로 조직되었다. 1936년 4월, 아이케는 SS 해골 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병력은 2,876명에서 3,222명으로 증가했다. 1937년에는 ''Wachsturmbanne''가 3개의 주요 ''SS-Totenkopfstandarten''(연대)으로 재편성되었다.
1936년까지 아이케는 강제 수용소 인력으로 군사 조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아이케가 개인적으로 통제했지만, 무장친위대 부대로 간주되면서 지휘 계통이 모호해졌다. 1938년까지 SS-VT 병력이 최전선 "목적"으로도 사용될 것이 분명해졌다.
아이케는 소규모 수용소를 해체하며 수용소 시스템을 재편했다. 1937년 8월까지 다하우, 작센하우젠, 부헨발트, 라벤스브뤼크만 남았다. 1938년 ''안슐루스'' 이후 오스트리아에 마우트하우젠 등 새로운 수용소를 건설했다. 아이케의 재편성과 강제 노동 도입은 수용소를 SS의 강력한 도구로 만들었지만, 게슈타포와 ''Sicherheitsdienst''(SD)의 수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적대감을 샀다. 힘mler는 아이케가 SS-TV와 수용소 운영을 계속 지휘하도록 하여, 수용소 통제가 게슈타포나 SD로 넘어가지 않도록 했다.
1938년 4월, SS-TV는 4개의 연대를 보유했다. 1938년 8월 17일, 히틀러는 SS-TV를 SS-VT의 예비군으로 정했다. 이로 인해 전쟁 기간 동안 ''무장친위대''와 강제 수용소 사이에 병력 이동이 발생했다. 힘mler는 1939년 5월 18일 법령을 통해 SS-TV 병력을 50,000명으로 확대하고 군사 장비를 제공하도록 지시했다.
1937년 7월 1일, 해골 부대는 3개의 연대로 편성되었다.
연대 | 주둔 강제 수용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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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SS 해골 연대 "오버바이에른" | 다하우 강제 수용소 |
제2SS 해골 연대 "브란덴부르크" |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 |
제3SS 해골 연대 "튀링겐" |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
오스트리아 병합 후 1938년 4월에는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에 주둔하기 위해 제4SS 해골 연대 "오스트마르크"가 창설되었다.[29] 1937년에는 총 1만 명의 수감자에 대해 4,800명의 해골 부대원이 있었으며, 대원 다수는 16세에서 20세의 젊은이였다.[30][31][32]
각 해골 연대는 관할 강제 수용소에 감시대(Wachmannshaften)를 설치했다.[36] 감시대는 수용소 경비만 담당했으며, 수용소 직원과는 구별되었다.[37] 해골 연대 사령관과 강제 수용소 소장도 다른 사람이었다.[38] 수용소 소장에게는 감시대 지휘권이 없었다.[39] 다만, 전시에는 블록 지도자(Blockführer)와 작업반 지도자(Kommandoführer)를 해골 부대원으로 충당하여, 죄수 관리에 직접 관여했다.[40]
2. 3. 제2차 세계 대전과 해골 부대 (1939-1945)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44] 해골 부대는 폴란드로 파견되어 치안 유지 임무를 맡았다. 제1SS 해골 연대 "오버바이에른"과 제3SS 해골 연대 "튀링겐"은 제10군 후방, 제2SS 해골 연대 "브란덴부르크"는 제8군 후방으로 보내져 반란 분자, 지식인, 유대인 등을 학살했다.[45] 이들 연대는 폴란드군과 직접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지만, 단치히에 있던 해골 부대의 "괴체 대대"는 국방군의 지휘 아래 전투에 참여했다.[46]힘믈러는 친위대 특무부대(SS-VT, 후의 무장친위대)나 LSSAH(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보다 자신이 직접 통제하기 쉬운 해골 부대에 주목했다.[47] 해골 부대는 무기나 장비 외에는 육군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힘믈러는 해골 부대를 전선에 투입하는 전투 부대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1939년 10월 31일 해골 부대를 중심으로 제3SS 기갑사단 '토텐코프'를 창설했다. (사단장은 테오도어 아이케)[48] 무장친위대의 한 사단으로서 서방 전격전과 독소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아이케와 해골 부대원들은 강제 수용소 운영에 관여하지 않았다. 1940년 말에는 모든 해골 부대원이 무장친위대가 되었다.[49]
2. 3. 1. 강제 수용소 운영
테오도어 아이케가 전투 임무로 재배치된 후, 그의 참모장이었던 리하르트 글뤽스가 하인리히 히믈러에 의해 새로운 강제 수용소 감찰관으로 임명되었다.[7] 글뤽스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용소 행정을 계속 관리했다.1941년까지, "최종 해결" 이전, SS해골부대(SS-TV)가 운영하는 강제 수용소는 SS를 위한 제도화된 강제 노동의 거대한 시스템으로 성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로 구분되었으며, 홀로코스트 희생자로부터 현금과 자산을 도난하여 이윤을 얻었다.[4][5]
수용소 내부에는 수용소 근무에만 고유한 직책과 직위의 계층이 존재했다. 각 수용소는 ''Kommandant''(사령관) 또는 ''Lagerkommandant''(수용소장)라고 불렸으며, 수용소 부관 및 지휘 참모의 지원을 받았다. 수용소 내의 수감자 막사는 ''Rapportführer''(보고 지도자)가 감독했고, 개별 수감자 막사는 ''Blockführer''(구획 지도자)라고 불리는 하급 SS-부사관이 감독했다. 절멸 수용소 내에서, ''Blockführer''는 수감자 ''존더코만도''(특수 부대)를 담당했으며,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희생자를 물리적으로 가스 처리하는 사람이었다.[8]
유대인 ''존더코만도'' 노동자는 ''Wachmannschaften''(경비병 또는 감시병)이라고 불리는 트라브니키 사람들에 의해 테러를 당했다.[8] 수용소 경계와 감시탑은 ''Wachbattalion''(경비 대대)이라는 별도의 부대가 감독했다.
SS-TV는 지배자들이 행사하는 "융통성 없는 가혹함"의 태도를 길렀다. 신병들은 혹독한 훈련과 나치 사상 주입을 통해 적을 증오하도록 교육받았다. 수용소 내에서 경비병들은 통제되고 훈련된 잔혹함의 분위기 속에서 수감자들을 복종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보조-SS" (''SS-Mannschaft'')라는 특별 그룹이 결성되어 수용소 경비병 및 행정 요원으로 복무했다.
SS는 홀로코스트를 통해 재정적 이득을 얻었다. 수용소의 노예 노동력은 민간 회사에 판매되거나, 수익성 있는 SS 운영 산업을 운영하는 데 사용되었으며,[12] 죄수 유지 비용은 최소화되었다.[13] 살해된 유대인의 재산은 도난당해 독일 대중에게 경매되었다.[14]
2. 3. 2. 종전과 전범 재판
1945년 4월, 많은 SS-TV(해골 부대) 부대원들은 자신들의 악명 때문에 정체를 숨기고자 '해골' 휘장을 제거하고 직무를 떠났다. 수용소 임무는 "보조-SS"에게 넘겨졌는데, 이들은 해골 부대원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징집된 군인 및 민간인 경비병이었다.[11] 그러나 많은 부대원이 연합군에 체포되어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쟁 범죄로 재판을 받았다.[11] 1945년 5월 9일에서 10일 사이에 소련군에 붙잡힌 해골 사단(Totenkopf Division) 장교와 사병들은 소련 내 여러 구금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6개월 안에 헬무트 베커를 포함한 많은 저명한 SSTK 장교들이 사라졌으며, 이들은 대부분 비밀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1]3. 조직 구조
리하르트 글뤽스는 강제 수용소 감찰관(CCI)으로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용소 행정을 관리했다. 전체 강제 수용소 시스템은 SS 경제행정본부(WVHA)의 권한 아래에 놓였고, 강제 수용소 감찰관은 WVHA 수장의 부하였다.[7]
수용소 내부에는 고유한 직책과 계층이 존재했다. 각 수용소는 ''Kommandant''(사령관) 또는 ''Lagerkommandant''(수용소장)가 지휘했으며, 부관과 참모의 지원을 받았다. 수감자 막사는 ''Rapportführer''(보고 지도자)가 감독했고, 개별 막사는 ''Blockführer''(구획 지도자)라고 불리는 하급 SS-부사관이 감독했다. 절멸 수용소에서 ''Blockführer''는 존더코만도를 담당하여 가스실에서 희생자를 처리했다.
유대인 ''존더코만도''는 트라브니키 사람들(협력자)에 의해 테러를 당했는데, 이들은 ''Wachmannschaften''(경비병)이라고 불렸다.[8]
수용소 경계와 감시탑은 ''Wachbattalion''(경비 대대)이 감독했다. 경비 대대 사령관은 감시탑 관리 및 수용소 외부 보안 순찰을 책임졌다. 대대는 전형적인 군사 체제로 조직되었고, 대대 사령관은 수용소장에게 직접 종속되었다.
강제 수용소에는 수용소장 아래의 본부 사무소에 소속된 보급 및 의료 인력과 함께, 게슈타포와 크리포 인력이 있는 보안 사무실도 있었다. 이들은 1939년 9월까지 ''보안 경찰''(SiPo) 사령관의 지휘를 받았고, 이후에는 국가보안본부(RSHA) 사령관의 지휘를 받았다.[7]
정규 SS 인력 외에도, ''카포''로 알려진 수감자 시스템이 존재하여 행정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존더코만도''는 절멸 수용소에서 시체 처리 등을 지원하는 유대인 수감자 그룹이었다. 그러나 수감자 가스 처리는 항상 SS가 수행했다.
thumb의 모습. 그의 칼라 패치에는 강제 수용소 직원이 착용한 ''해골 표식''이 표시되어 있다.]]
1936년 3월 29일 SS 경비 부대는 정식으로 '''SS 해골 부대'''(SS-Totenkopfverbände, 약칭 SS-TV)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19]
1937년 7월 1일 해골 부대는 3개의 연대로 편성되었다.
연대 | 본부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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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SS 해골 연대 "오버바이에른" | 다하우 강제 수용소 | |
제2SS 해골 연대 "브란덴부르크" |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 | |
제3SS 해골 연대 "튀링겐" |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
오스트리아 병합 후 1938년 4월에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 주둔을 위해 4번째 연대 "오스트마르크"가 창설되었다.[29]
각 해골 연대는 관할 강제 수용소에 감시대(Wachmannshaften)를 설치했다.[36] 감시대는 수용소 경비만을 담당하며, 수용소 직원과는 구별되었다.[37] 해골 연대 사령관과 강제 수용소 소장도 다른 사람이었다.[38] 전 시기에는 수용소 죄수의 관리를 직접 수행하는 블록 지도자(Blockführer)와 작업반 지도자(Kommandoführer)를 친위대 해골 부대 대원으로 충당했다.[39]
해골 부대가 사라진 후, 강제 수용소는 일반 친위대 예비대, 훈련 부족자, 돌격대 대원, 국방군 고령자, 협력자 등으로 창설된 "친위대 해골 대대"(SS-Totenkopf-Sturmbann)가 경비를 맡았다.[50]
1940년에는 강제 수용소 총감부(강제 수용소 직원)와 해골 대대는 함께 "수평 오른쪽" 해골 칼라 배지를 사용하게 되었다.[38]
해골 대대는 처음에는 일반 친위대 취급을 받았지만, 1941년 4월 22일부터 무장 친위대 취급을 받게 되었다.[38]
1942년 3월 16일 이후, 오스발트 폴이 지휘하는 친위대 경제 관리 본부(SS-WVHA) D국의 산하에 들어갔다. 리하르트 글뤽스는 WVHA의 D국 국장이라는 입장으로 이관되었다.
4. 잔혹 행위와 홀로코스트
SS 해골 부대는 수감자들에게 가혹한 처벌과 고문을 가했으며, 탈출 시도 시에는 즉결 처형을 자행했다.[6] 이들은 '최종 해결'(''Endlösung'') 계획에 따라 유대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절멸 수용소에서는 가스실 운영, 시체 처리 등 조직적인 학살을 주도했다.[9] 루돌프 회스, 프란츠 지어라이스, 카를 오토 코흐, 막스 쾨겔, 아몬 괴트와 같은 이들이 학살에 가담하였다.[6] 전쟁 말기에는 증거 인멸을 위해 수용소를 파괴하고, 수감자들을 '죽음의 행진'으로 내몰기도 했다.[10][11]
thumb–비르케나우에 도착한 유대인들]]
1941년, "최종 해결" 이전, SS-TV가 운영하는 강제 수용소는 SS를 위한 제도화된 강제 노동의 거대한 시스템으로 성장했다. 강제 수용소 인력은 의학적 퇴원을 거쳐 최전선 SS 부대에서 도착하기 시작했으며, 인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공격용 개가 도입되었다.[7] ''라인하르트 작전''의 특별 절멸 수용소도 생겨났다. WVHA 아래에서, 수용소는 강제 노동, 강제 수용소, 절멸 수용소로 구분되었다.[4][5]
수용소 내부에는 수용소 근무에만 고유한 직책과 직위의 계층이 존재했다. 각 수용소는 ''Kommandant''(사령관)이 지휘했으며, 수용소 부관 및 지휘 참모의 지원을 받았다. 수용소 내의 수감자 막사는 ''Rapportführer''(보고 지도자)가 감독했고, 개별 수감자 막사는 ''Blockführer''(구획 지도자)라고 불리는 하급 SS-부사관이 감독했다. 절멸 수용소 내에서, ''Blockführer''는 수감자 ''존더코만도''(특수 부대)를 담당했으며,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희생자를 물리적으로 가스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유대인 ''존더코만도'' 노동자는 차례로, 한 수용소당 약 100명 정도의 협력자 트라브니키 사람들에 의해 테러를 당했는데, 이들은 ''Wachmannschaften''(경비병)이라고 불렸다.[8]
수용소 경계와 감시탑은 ''Wachbattalion''(경비 대대)이라는 별도의 부대에 의해 감독되었다. 경비 대대 사령관은 감시탑 관리 및 수용소 외부 보안 순찰을 책임졌으며, 대대는 회사, 소대, 분대로 구성된 전형적인 군사 체제로 조직되었다. 대대 사령관은 수용소장에게 직접 종속되었다.
1942년, 글뤽스는 ''최종 해결''의 행정에 점점 더 관여하여, ''라인하르트 작전''을 지원할 인력을 제공했다. 1942년 7월, 글뤽스는 히믈러를 만나 강제 수용소 수감자에 대한 의학 실험에 대해 논의했다. 모든 절멸 명령은 글뤽스의 사무실에서 나치 독일 전역과 점령된 유럽 전역의 SS-TV 사령부에 발부되었다. 그는 특히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사용하기 위한 ''치클론 B''의 구매를 승인했다.
1943년, SS-TV 부대는 홀로코스트의 증거를 가능한 한 많이 은폐하라는 명령을 받기 시작했다. 히믈러는 나치 범죄를 은폐하는 데 가장 신경을 썼다.[10] 화장이 그 직후 시작되어 수용소의 공식 폐쇄까지 계속되었다.[11] 수용소는 세심하게 파괴되었고, 병든 수감자들은 총살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죽음의 행진을 했다.
1945년 4월까지 많은 SS-TV가 그들의 직무를 떠났다. 수용소 임무는 점점 더 소위 "보조-SS"에게 넘겨졌는데, 이들은 해골 부대원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징집된 군인 및 민간인 경비병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연합국에 의해 체포되어 1946년에서 1949년 사이에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쟁 범죄로 재판을 받았다.
5. 복장과 상징
SS 해골 부대(SS-Totenkopfverbände, SS-TV)는 다른 친위대 부대와 구별되는 특징적인 복장과 상징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모자와 옷깃에 부착된 해골 표식(토텐코프)이었다.[19]
초기에 SS 해골 부대원의 옷깃 견장에 부착된 해골은 "수직 왼쪽 방향"이었다.[19] 그러나 1940년에 옷깃 견장에 큰 변화가 생기면서, SS 해골 대대와 강제 수용소 통감부 소속원들은 "수평 오른쪽 방향 해골"을 착용하게 되었다.[39] 다만, 1942년경까지는 여전히 "수직 왼쪽 방향 해골"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39]
다하우 강제 수용소 근무자들은 "DACHAU"라는 문구가 새겨진 특별한 커프스 타이틀을 사용했지만, 다른 수용소 근무자들에게는 이러한 커프스 타이틀이 없었다.[39]
6. 비판
SS 해골 부대는 나치즘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조직으로, 인권 유린과 전쟁 범죄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이들의 행위는 국제법과 인도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해골 부대의 역사는 전체주의, 권위주의, 파시즘, 군국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중요한 교훈으로 남아있다.
특히, 한국은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유사한 억압과 탄압을 경험했기 때문에, 해골 부대의 역사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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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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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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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装SS全史I』、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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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ティン、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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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装SS全史I』、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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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ティン、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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