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호 관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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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호 관측기는 일본 제국 육군이 정찰, 포병 관측, 대잠수함 작전을 위해 개발한 오토자이로(autogyro)이다. 1939년 미국에서 수입한 켈레트 KD-1A를 기반으로, 카야바 제작소에서 수리 및 개량하여 1941년 5월 첫 비행에 성공했다. 카호 1형(Ka-1)과 2형(Ka-2)으로 양산되었으며, 총 98대가 생산되었으나 실전 배치된 것은 약 30대였다. 주로 대잠 초계기로 운용되었으며, 1944년에는 항공모함에 탑재되어 운용되기도 했다. 종전 시까지 주로 대잠 초계 임무를 수행했으며, 1945년 6월에는 일본해 노토 반도로 이동하여 종전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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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호 관측기 | |
---|---|
개요 | |
![]() | |
기종 정보 | |
유형 | 오토자이로 |
제조사 | 가야바 공업 |
설계자 | 불명 |
최초 비행 | 1941년 5월 26일 |
생산 기간 | 1941년-1945년 |
생산 대수 | 98대 |
주요 운용국 | 일본 제국 육군항공대 |
개발 기반 | 켈렛 KD-1A |
파생형 | 가야바 Ka-2 |
2. 역사적 배경
1920년대 스페인에서 오토자이로가 실용화된 이후,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군사적 활용 가능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국, 영국, 소련 등은 오토자이로를 도입하여 정찰, 연락, 함선 운용 등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며 군사적 이용을 모색했다.
이러한 국제적인 흐름 속에서 일본 제국 육군 역시 정찰, 포병 탄착 관측, 대잠수함 작전 등을 수행할 목적으로 오토자이로 도입에 관심을 가졌다. 1932년과 1933년에 걸쳐 영국제 시에르바 C.19와 미국제 켈레트 K-3를 소수 도입했으나, 이들 기체는 모두 항공 사고로 손실되었다.
오토자이로 개발의 직접적인 계기는 1939년 발생한 노몬한 사건이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 육군 포병이 운용하던 탄착 관측용 계류 기구가 소련군 전투기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기존 관측 수단을 대체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육군은 1939년 새로 도입했으나 사고로 파손된 미국제 켈레트 KD-1A 기체를 기반으로, 1940년 가야바 공업에 수리 및 유사 기체 개발을 의뢰하였다. 이것이 가호 관측기 개발의 시작이 되었다.
2. 1. 세계의 흐름
1923년 (다이쇼 12년) 스페인의 후안 데 라 시에르바가 실용화한 오토자이로는 1930년대에 들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미국 해군은 1931년 (쇼와 6년), 피토케언 PCA-2의 개량형인 Pitcairn OP-1영어을 사용하여 항공모함 랭글리에서 이착함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는 역사상 최초의 함재 회전익기 실험이었으나, 실제 채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후 미국 육군과 미국 해병대는 소수의 Kellett KD-1영어 시리즈를 도입하여 운용했다.
Cierva C.30영어 기종은 여러 국가에서 함선 운용 실험에 사용되었다. 1934년 (쇼와 9년)에는 스페인 해군의 수상기모함 데다로에서, 1935년 (쇼와 10년)에는 영국 해군의 항공모함 커레이저스와 이탈리아 해군의 중순양함 피우메에서 각각 이착함 실험에 성공하였다. 영국은 이후 배틀 오브 브리튼 당시 오토자이로를 레이더 기지 점검 등의 임무에 활용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 육군의 가상 적국이었던 소련에서도 오토자이로 개발이 활발했다. 1920년대 말부터 연구를 시작하여, Cierva C.8영어을 참고한 KASKR-1이 1929년 9월 25일, KASKR-2가 1931년 1월 11일에 각각 첫 비행에 성공했다. KASKR-2의 발전형으로는 Cierva C.19영어를 참고한 카모프 A-7이 개발되어 1934년 9월 20일에 초도 비행을 했으며, 이후 A-7bis와 A-7-3A (1936년) 모델도 개발되었다. 특히 카모프 A-7 시리즈는 세계 최초로 무장을 탑재한 오토자이로였다. 그러나 오토자이로는 탑재량과 항속거리의 한계가 지적되었고, 소련에서는 이후 STOL 성능을 가진 OKA-38 Aist영어 (독일 Fi 156 슈토르히의 복제 기체)로 대체되었다.
2. 2. 일본의 도입과 개발
일본 제국 육군은 정찰, 포병 관측, 대잠수함 작전 등을 목적으로 오토자이로 개발에 관심을 가졌다. 일본은 1932년 영국에서 시에르바 C.19 2기를 수입했는데, 1기는 해군이 연구용으로, 다른 1기는 아사히 신문사가 구입했다. 이듬해인 1933년에는 육군이 국방헌금을 이용해 미국에서 켈레트 K-3 2기를 구입했다. 그러나 해군의 C.19와 육군의 K-3는 모두 항공 사고로 손실되었다.1939년 8월, 육군 항공 본부는 당시 최신형이던 미국의 켈레트 KD-1A 1기를 다시 구입했다.[2] 하지만 이 기체는 일본 도착 직후 또는 1940년 2월에 발생한 사고로 수리가 어려울 정도로 크게 파손되었다.[2] 이러한 상황에서 육군 기술 본부는 기존의 기구를 대체할 탄착 관측 수단으로 오토자이로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는 1939년 노몬한 사건 당시 일본 육군 포병이 운용한 탄착 관측용 계류 기구가 소련군 전투기에 의해 쉽게 격추되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결국 육군 기술 본부는 항공 본부로부터 파손된 KD-1A 기체를 넘겨받아, 1940년 말 오사카부립대학 공학부의 전신인 오사카 고등 공업 학교의 미키 테츠오 교수의 지도 아래 가야바 공업에 수리 및 유사 기체 개발을 의뢰했다.[2] 같은 해, 가호 관측기와 병행하여 테호 관측기 개발 지시도 내려졌다.
가야바 공업은 일본 제국 육군의 요구에 따라 KD-1A를 기반으로 유사한 기체 개발에 착수했다. 첫 번째 프로토타입인 Ka-Go는 수리된 켈레트 KD-1A 기체에 240hp Argus As 10c 엔진을 장착한 형태였다. 이 프로토타입은 1941년 5월 26일에 첫 비행에 성공했다.[2] 이후 Ka-1이라는 이름으로 양산이 결정되었으며, 약 20대가 생산되었다.[1] 일본 제국 육군은 특히 짧은 이륙 거리(30m)와 낮은 유지보수 요구 사항을 높이 평가했다.[2] 1941년부터 생산된 Ka-1은 주로 포병 부대에 배치되어 조종사와 관측병이 탑승한 채 포병 관측 임무에 투입되었다.
이후 생산은 켈레트 KD-1과 유사하게 Jacobs L-4MA-7 엔진을 탑재한 Ka-2로 이어졌다. 그러나 생산 과정에서 로터와 엔진 등 핵심 부품 부족으로 인해 납품이 심각하게 지연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생산된 Ka-1과 Ka-2는 총 98대로 집계된다. 이 중 12대는 일본 제국 육군에 인도되기 전에 파괴되었고, 약 30대는 엔진이 장착되지 못한 상태였다. 실제로 일본 제국 육군에 인도된 것은 약 50대였으나, 이 중에서도 실제 작전에 배치된 것은 30대에 불과했다.[2] 일부 자료에서는 총 240대가 제작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확인되지 않은 수치이다.
3. 설계 및 개발
일본 제국 육군(IJA)은 정찰, 포병 관측, 대잠수함 작전을 목적으로 가호 관측기를 개발했다. 이 기체는 1939년 일본으로 수입되었으나 도착 직후 손상된 미국의 켈레트 KD-1A 설계를 기반으로 했다.[2] 가야바 공업은 육군으로부터 유사 기체 개발 임무를 받아 1941년 5월 26일 첫 번째 시제기의 비행에 성공했다.[2] 초기 개발 목적은 관측 및 포병 지원이었으며, 육군은 짧은 이륙 거리(30m)와 낮은 유지보수 요구 사항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파손되었던 켈레트 KD-1A는 1941년 5월 수리 및 복원되어 이타미 공항에서 아사히 신문 항공부 조종사들의 시험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를 바탕으로 육군 기술 본부는 가야바 제작소와 고베 제강소에 국산형 2기 제작을 의뢰했고, 이는 1943년 초에 완성되었다. 국산형의 동체는 가야바, 엔진과 구동 장치는 고베 제강소가 담당했다.
1942년 11월, 국산형은 카호 1형 관측기(카-1)로 제식 채용되었다. 가호 관측기는 기술 본부 주도로 개발된 포병 장비였기에 키 번호는 부여되지 않았다. '카호(カ号)'는 '회전익(回転翼)', '오호(オ号)'는 '오토자이로(オートジャイロ)'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오호'는 솔로몬 제도 전투의 '카호 작전'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1944년 이후 사용되었다.
초기 양산형 카-1은 아르구스 As 10C 엔진을 탑재했으나, 과열 문제로 약 20기 생산 후 중단되었다. 이후 생산은 제이콥스 L-4MA-7 엔진을 탑재한 카호 2형 관측기(카-2)로 전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카-1과 카-2를 합쳐 총 98대가 생산되었으나, 실제 운용 가능한 상태로 인도된 기체는 약 50대였고, 이 중 약 30대만이 실전에 배치되었다.[2]
3. 1. 기체 구조
본 기체는 주익과 보조익(에일러론)이 없는 독특한 구조를 가졌다. 동체, 수직 미익, 방향타(러더)는 강관 골조에 헝겊을 덮어 제작되었으며, 수평 미익은 목재 골조에 헝겊을 덮은 형태였다. 특이하게도 승강타(엘리베이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수평 미익은 좌우가 역 캠버(반전) 형태로 설계되어, 프로펠러 회전으로 발생하는 반동 토크를 상쇄하는 역할을 했다.로터는 강관 거더에 합판을 붙여 만든 3엽 구조였으며, 격납 시에는 뒤쪽으로 접을 수 있어 공간 활용성을 높였다. 프로펠러는 목재로 만들어진 고정 피치 2엽 형식이었다.
엔진은 시제기와 양산형 간에 차이가 있었다. 시제기(복원기)에는 제이콥스 Jacobs R-755|제이콥스 R-755영어 L-4MA-7 공랭성형 7기통 엔진이 탑재되었다. 이후 개발된 국산형 2기와 카호 1형에는 독일의 Fw 186 및 Fi 156과 동일한 아르구스 Argus As 10C|As 10C영어 공랭 도립 V형8기통 엔진이 채택되었다. 이 엔진은 고베 제강소에서 국산화되었으며, 전방 시야 확보와 공기 저항 감소에 유리했다. 그러나 아르구스 엔진은 실린더 온도 과승 문제가 자주 발생하여, 결국 카호 1형의 생산은 약 20기에서 중단되었다. 이후 양산은 시제기와 동일한 제이콥스 엔진(고베 제강소 국산화)을 탑재한 카호 2형 관측기(카-2)로 전환되었다.
기체 내부는 2인승으로, 앞좌석은 관측원, 뒷좌석은 조종석으로 사용되었다. 무게 중심을 맞추기 위해 연료 탱크는 관측원이 탑승하는 앞좌석의 양 측면에 배치되었다. 계기류는 양 좌석 모두에 설치되었으나, 앞좌석에는 항법용 계기 위주로 뒷좌석보다 수가 적었고, 뒷좌석 계기와 중복되는 항목이 많았다. 주요 계기류는 다음과 같다.
계기 종류 | 설명 |
---|---|
대기 속도계 | 비행 속도 측정 |
고도계 | 비행 고도 측정 |
승강계 | 상승 및 하강 속도 측정 |
선회계 | 기체 선회 방향 및 각도 표시 |
자침 | 비행 방향 표시 (나침반) |
시계 | 시간 확인 |
엔진 및 로터 회전계 | 엔진 및 로터의 분당 회전수 표시 |
유온계 | 엔진 오일 온도 측정 |
전황 변화에 따라 가호 관측기는 본래 목적인 중국 대륙에서의 탄착 관측 임무 대신 대잠 초계 임무에 주로 투입되었다. 이를 위해 앞좌석의 관측원 좌석을 개조하여 동체 하부에 60kg 폭뢰 1발을 탑재할 수 있도록 변경되었다. 이 경우, 폭뢰 무게만큼 관측원은 탑승하지 않고 조종사 1명만 탑승하는 단좌기로 운용되었다. 폭뢰를 탑재하지 않을 때는 다시 2인승 복좌기로 운용할 수 있었다. 그 외, 전투 지휘, 정찰, 연락 임무에도 사용되었다.
3. 2. 엔진
시제기인 Ka-Go는 수리된 켈레트 KD-1A를 기반으로 했으며, 240hp 아르구스 As 10c 엔진을 탑재했다.[1]초기 양산형인 카호 1형 관측기(카-1)에는 고베 제강소에서 국산화한 아르구스 As 10C 공랭 도립 V형 8기통 엔진이 탑재되었다. 이 엔진은 독일의 Fw 186 및 Fi 156 슈토르히에도 사용된 것으로, 전방 시야 확보와 공기 저항 감소를 위해 선택되었다. 그러나 아르구스 엔진은 실린더 과열 문제가 자주 발생하여, 카-1의 생산은 약 20기 만에 중단되었다.
이후 생산은 카호 2형 관측기(카-2)로 전환되었으며, 엔진은 제이콥스 L-4MA-7 공랭 성형 7기통 엔진으로 변경되었다. 이 엔진 역시 고베 제강소에서 국산화되었으며, 원본인 켈레트 KD-1 및 시제기(복원기)에 탑재되었던 것과 동일한 계열이다. 따라서 제이콥스 엔진이 시제기에만 탑재되었다는 기존의 일부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 엔진 생산 과정에서는 핵심 부품 부족으로 인해 납품 지연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2]
3. 3. 생산
1941년 5월, 일본 제국 육군 기술 본부는 미국에서 수입했으나 파손된 켈레트 KD-1A를 복원한 시제기를 바탕으로 국산형 오토자이로 2기의 제작을 가야바 제작소와 고베 제강소에 의뢰했으며, 이는 1943년 초에 완성되었다.[2] 동체는 가야바 제작소, 엔진과 구동 장치는 고베 제강소가 담당했다.1942년 11월, 이 국산형은 카호 1형 관측기(카-1)로 정식 채용되었고, 1943년에 60기, 1944년에는 매월 20기를 생산하는 양산 계획이 수립되었다. 카-1은 고베 제강소에서 국산화한 독일제 아르구스 As 10C Argus As 10C|아르구스 As 10Cdeu 공랭 도립 V형 8기통 엔진을 탑재했다. 이는 전방 시야 확보와 공기 저항 감소를 위한 설계였으나, 엔진 과열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생산은 약 20기에서 중단되었다.[1]
이후 생산은 시제기 및 원형인 켈레트 KD-1A와 동일한 제이콥스 Jacobs L-4MA-7|제이콥스 L-4MA-7eng 공랭성형 7기통 엔진(고베 제강소 국산화)을 탑재한 카호 2형 관측기(카-2)로 전환되었다.[2] 제이콥스 엔진 탑재형이 시제기에만 국한되었다는 기존의 설은 사실과 다르다.
기체 생산은 가야바 제작소 센다이 공장에서, 엔진 생산은 고베 제강소 오가키 공장에서 이루어졌다.[2] 그러나 엔진, 프로펠러 등 핵심 부품의 공급 지연으로 생산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결과적으로 종전까지 일본 제국 육군에 납품된 기체는 카-1과 카-2를 합쳐 총 98대에 불과했다.[2] 이 중 12대는 납품 전 공습 등으로 파괴되었고, 약 30대는 엔진이 장착되지 않은 미완성 상태였다. 따라서 실제로 운용 가능한 상태로 인도된 기체는 약 50대 전후로 추정되며, 이 가운데 약 30대만이 실전에 배치될 수 있었다.[2] 한때 240대가 생산되었다는 설이 있었으나, 이는 1944년 생산 계획에 기반한 추정일 뿐 실제 생산량과는 차이가 크다.
4. 운용 역사
수리된 켈레트 KD-1A를 기반으로 한 1호기 가호 관측기는 1941년 5월 26일 첫 비행 후 우수한 성능 평가를 받았다. 초기에는 중국 대륙 포병 부대 지원용으로 계획되었으나 전황 변화로 무산되었고, 일부는 필리핀에서 고쿠사이 Ki-76을 대체하는 연락기로 사용되었다.
이후 일본 육군은 가호 관측기의 주 임무를 대잠 초계로 결정하고, 1943년 7월부터 전문 조종사 훈련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2D급 화물선에서의 운용이 계획되었으나 비좁다는 이유로 무산되었고, 대신 육군 강습 상륙함 ''아키츠마루''에 배속되어 1944년 8월부터 활동하다가 11월 함선 침몰과 함께 운용이 중단되었다.[1]
1945년 1월 17일부터는 이키섬의 비행장을 거점으로 대잠 작전을 재개했으며, 정비는 후쿠오카현 간노스 비행장에서 이루어졌다. 1945년 5월부터는 쓰시마섬의 이즈하라 비행장에서도 초계 작전을 시작하여, 후쿠오카와 부산 항구를 잇는 마지막 해상 수송로 중 하나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미군 함재기들이 쓰시마 해협까지 진출하자, 1945년 6월 가호 관측기 부대는 일본해의 노토 반도에 위치한 나나오 기지로 이전하여 종전까지 작전을 지속했다. 전쟁 기간 동안 가호 관측기가 직접 잠수함을 격침시킨 기록은 없으나, 적 잠수함 탐지 및 위치 보고에는 유용하게 활용되었다.[1]
4. 1. 실전 배치
1호기 가호 관측기(수리된 켈레트 KD-1A)는 1941년 5월 26일 다마가와 비행장에서 처음 이륙했다. 그 후 육군 시험에서 성능이 매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래는 중국 대륙에 주둔한 포병 부대를 위해 가호 관측기를 파견하여 정찰을 수행할 계획이었으나, 해당 전역에서의 전쟁 상황 변화로 인해 이 계획은 무의미해졌다. 대신, 몇 대의 가호 관측기가 고쿠사이 Ki-76을 대체하여 연락기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보내졌다. 얼마 후, 일본 육군은 이 독특한 항공기의 최적 활용 방안을 최종 결정했으며, 다수의 가호 관측기 1형 및 2형이 대잠 초계기로 투입되었다. 이 전문 분야의 조종사 훈련은 1943년 7월에 시작되었으며, 첫 번째 훈련생 10명이 1944년 2월에 졸업했고, 그 뒤를 이어 1944년 9월에 40명의 조종사가 추가로 졸업했다.원래 계획은 가호 관측기 1형/2형을 2D급 화물선에서 운용하여 적 잠수함을 탐지하는 것이었지만, 이 선박들은 작전에 너무 비좁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가호 관측기 1형/2형 부대는 1944년 8월부터 1944년 11월 침몰할 때까지 육군이 운용하는 강습 상륙함인 ''아키츠마루''에 배속되었다. 1945년 1월 17일부터 대잠수함 작전은 이키섬의 비행장에서 재개되었으며, 정비 기지는 후쿠오카현의 간노스 비행장에 위치했다. 또한 1945년 5월부터는 쓰시마섬의 이즈하라 비행장에서도 대잠 초계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임무는 후쿠오카와 부산 항구 사이의 마지막으로 운영되던 일본 해상 수송로 중 하나를 보호하는 데 기여했다. 결국 미국 항모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이 쓰시마 해협에도 나타나기 시작했고, 1945년 6월 가호 관측기 1형/2형 부대는 일본해의 노토 반도에 있는 나나오 기지로 이전되어 종전까지 그곳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이러한 기체들은 전황 변화로 인해, 당초 예정되었던 중국 대륙에서의 탄착 관측 임무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극히 일부가 필리핀으로 보내진 것 외에는, 대부분이 대잠 초계 임무로 전용되었다. 그 당시에는 앞 좌석의 관측원 좌석을 개조하여 동체 하부에 작은 드럼통과 같은 60kg 폭뢰 1발(즉, 사람 1명 분의 탑재량)을 매달아 적재할 수 있도록 했으며, 그 무게만큼 관측원을 내리고, 뒷좌석의 조종사만의 단좌기로 운용되었다. 선단 호위 시에는 고도 200m를 비행하며, 적 잠수함 발견 시에는 고도 60m까지 강하하여 폭뢰를 투하했다. 발견하지 못한 경우에는 경고·위협으로, 선단의 전방에 투하했다. 이 대잠 초계기로 개조된 카호 관측기는 폭뢰를 적재하지 않을 때는 통상적인 복좌기로 운용할 수 있었다. 그 외, 전투 지휘, 정찰, 연락 임무에도 사용되었다. 가호 관측기 1형/2형은 전쟁 중 직접 잠수함을 격침시키지는 않았지만, 적 잠수함을 발견하고 위치를 보고하는 데 매우 유용했다.
구분 | 내용 |
---|---|
기체 제작 | 가야바 제작소 센다이 공장 |
엔진 제작 | 고베 제강소 오가키 공장 |
총 납품 대수 (종전까지) | 98대 (엔진, 프로펠러 등 부품 공급 지연으로 생산 더딤) |
손실 및 미완성 | 피폭 파괴 (약 10여 대), 엔진 미장착 (약 30대) |
실용화 추정 대수 | 50대 전후 |
실전 배치 대수 | 약 30대 |
대잠 초계기 투입 대수 | 약 20대 |
4. 2. 대잠 초계 임무
일본 육군은 가호 관측기의 가장 효과적인 활용 방안으로 대잠 초계기 임무를 결정했다.[1] 이 임무를 위한 조종사 훈련은 1943년 7월 시작되어, 제1기생 10명이 1944년 2월, 제2기생 40명이 같은 해 9월에 각각 과정을 마쳤다.[1]당초 육군은 카호 관측기를 전시 표준선을 개조한 호위 항공모함이나 2D급 화물선에서 운용하여 적 잠수함을 탐지할 계획이었으나, 이 선박들은 운용에 너무 비좁은 것으로 판명되었다.[1] 1943년 6월 4일, 특수 주정 모함 아키츠마루에서 발착함 실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카호의 생산 지연과 고정익기가 함재기 운용에 더 유리하다는 판단에 따라, 실제 항공모함에서의 대잠 초계 임무는 STOL 성능을 가진 3식 지휘 연락기가 맡게 되었다. 카호 관측기가 아키츠마루에 탑재되어 대잠 초계 임무를 수행했다는 통설은 자료에 따르면 오해이다.
훈련된 조종사들을 중심으로 1944년 10월, 히로시마 우지나의 육군 선박 사령부 내에 일본 최초의 회전익기 부대인 선박 비행 제2중대가 창설되었다. 1944년 11월 아키츠마루가 침몰하고[1] 남방 항로가 차단되면서, 카호 관측기는 일본 본토의 육상 기지에서 운용하게 되었다.
선박 비행 제2중대는 후쿠오카의 간노스 비행장으로 이동하여 훈련 후 이키 해협 등에서 초계 임무를 시작했다. 1944년 말 완공된 이키섬의 쓰쓰키하마 기지로 부대가 이전하면서, 1945년 1월 17일부터 본격적인 대잠 초계 및 호위 임무가 시작되었다.[1] 이 기지에는 약 200명의 병력과 20기의 카호 관측기가 배치되었으며, 운용 중 약 10기가 사고로 손실되었다. 1945년 5월부터는 쓰시마섬의 이즈하라 비행장에도 분견대가 파견되어, 하카타와 부산을 잇는 마지막 해상 수송로 보호 임무를 수행했다.[1] 미군 함재기의 위협이 증가하자 1945년 6월, 부대는 일본해 연안 노토 반도의 나나오 기지로 이전하여 종전까지 작전을 계속했다.[1]
대잠 초계 임무를 위해 카호 관측기는 앞좌석 관측석을 제거하고 동체 하부에 60kg 폭뢰 1발을 탑재할 수 있도록 개조되었다. 이 경우 조종사 1명만 탑승하는 단좌기로 운용되었다.[2] 선단 호위 시에는 통상 고도 200m에서 비행하다가 적 잠수함 발견 시 고도 60m까지 강하하여 폭뢰를 투하했으며, 발견하지 못할 경우 선단 전방에 경고 및 위협용으로 투하하기도 했다.[2] 폭뢰를 탑재하지 않을 때는 통상적인 복좌기로 운용될 수 있었다.[2]
카호 관측기는 전쟁 중 직접 잠수함을 격침시키는 전과는 올리지 못했지만, 육안 관측에 의존했음에도 불구하고 적 잠수함을 발견하고 위치를 보고하는 데는 유용했던 것으로 평가된다.[1] 한편, 같은 시기 미국에서는 시코르스키 R-4와 같은 헬리콥터가 실용화되어 대잠 초계 등에 활용되고 있어, 카호 관측기는 군용 오토자이로 시대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기체이기도 했다.
4. 3. 종전
1호기 가호 관측기(수리된 켈레트 KD-1A)는 1941년 5월 26일 다마가와 비행장에서 처음 이륙했으며, 이후 일본 육군 시험에서 우수한 성능을 인정받았다. 원래는 중국 본토 주둔 포병 부대의 정찰 지원을 위해 파견될 계획이었으나, 전선 상황 변화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대신 몇 대는 필리핀에서 고쿠사이 Ki-76을 대체하는 연락기로 운용되었다.[1]이후 일본 육군은 가호 관측기의 주 임무를 대잠 초계로 결정했다. 대잠 초계 임무를 위한 조종사 훈련은 1943년 7월 시작되어, 1944년 2월에 10명, 같은 해 9월에 40명이 추가로 양성되었다. 초기에는 2D급 화물선에서 운용하려 했으나 공간 문제로 실현되지 못했고, 대신 육군 강습 상륙함인 ''아키츠마루''에 배속되어 1944년 8월부터 활동하다가 11월 함선 침몰과 함께 운용이 중단되었다.[1]
1945년 1월 17일부터는 이키섬의 비행장을 거점으로 대잠 작전을 재개했으며, 정비는 후쿠오카현 간노스 비행장에서 이루어졌다. 1945년 5월부터는 쓰시마섬의 이즈하라 비행장에서도 초계 작전을 시작하여, 후쿠오카와 부산 항구를 잇는 마지막 해상 수송로 중 하나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미군 함재기들이 쓰시마 해협까지 진출하자, 1945년 6월 가호 관측기 부대는 일본해의 노토 반도에 위치한 나나오 기지로 이전하여 종전까지 작전을 지속했다. 전쟁 기간 동안 가호 관측기가 직접 잠수함을 격침시킨 기록은 없으나, 적 잠수함 탐지 및 위치 보고에는 유용하게 활용되었다.[1]
기체 생산은 가야바 제작소 센다이 공장에서, 엔진은 고베 제강소 오가키 공장에서 담당했다. 그러나 엔진, 프로펠러 등 주요 부품 공급 지연으로 생산은 더뎌 종전까지 총 98대만 납품되었다. 이 중 약 10대는 피폭으로 파괴되었고, 약 30대는 엔진이 장착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실제로 운용 가능한 기체는 50대 전후로 추정되며, 실전 배치된 것은 약 30대, 그중 대잠 초계 임무에 투입된 것은 약 20대였다.[1]
항목 | 수량 | 비고 |
---|---|---|
총 납품 대수 | 98대 | 가야바 제작소(기체), 고베 제강소(엔진) 생산 |
피폭 파괴 | 약 10대 | |
엔진 미장착 | 약 30대 | 주요 부품 공급 지연으로 인한 미완성 상태 |
실용화 가능 대수 | 약 50대 | |
실전 배치 대수 | 약 30대 | |
대잠 초계 임무 투입 | 약 20대 | 실전 배치된 기체 중 일부 |
5. 파생형
6. 제원 (Ka-1)
항목 | 내용 |
---|---|
제작사 | 가야바 제작소 (현 가야바 공업) |
생산 시기 | 1941년 |
승무원 | 2명 (폭뢰 장착 시 1명) |
크기 | |
전장 | 6.68m |
전폭 | 10.6m (로터 포함) |
전고 | 3.1m |
주 로터 직경 | 12.2m (3엽) |
중량 | |
자체 중량 | 750kg |
전비 중량 | 1170kg |
동력 | |
엔진 | 고베 제강소 제작 아르구스 As 10c 공랭식 도립 V형 8기통 엔진 1기 |
엔진 출력 | 240hp/2000rpm (이륙), 200hp (공칭) |
프로펠러 | 목제 2엽 고정 피치 프로펠러 |
성능 | |
최대 속도 | 165 km/h |
순항 속도 | 115 km/h (보통), 162 km/h (최대) |
최소 속도 | 43 km/h |
상승 한도 | 3500m |
상승 시간 | 1000m까지 3분 26초, 2000m까지 7분 49초 |
항속 거리 | 240km (보통 순항 속도 기준) |
항속 시간 | 2.1 시간 (연료 114L 기준) |
연료 소비량 | 54 L/h |
무장 | |
폭뢰 | 60kg 폭뢰 × 1 |
7. 등장 작품
- 칸코레 - 함대 컬렉션 -에서 함재 대잠 초계기로 "가호 관측기", "오호 관측기 개", "오호 관측기 개2"가 등장한다.
참조
[1]
웹사이트
European Helicopter Pioneers
https://web.archive.[...]
www.vectorsite.net
2010-08-15
[2]
서적
Japanese Aircraft of the Pacific War
Putnam & Company Lim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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