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갈홍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갈홍기는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위를 한 인물로, 해방 후 이승만 정부에서 고위 관료로 활동했다. 1906년 강화에서 태어나 배재고등보통학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와 감리교신학교 강사를 역임했으며, 창영교회 담임목사,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연성국장을 지내며 친일 행적을 보였다. 광복 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를 거쳐 이승만 정부에서 공보처장, 외무부 차관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의 정책을 옹호했다. 말년에는 대한농구협회 회장, 말레이시아 대사 등을 지냈으며, 1989년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으며, 저작권 침해 논란도 있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제강점기의 전문학교 강사 - 조일명
    조일명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운동가이자 해방 후 북한 정치인으로, 화요파에서 활동하며 모스크바 유학 후 친일 행위를 했고, 광복 후 재건파에 가담했으나 한국 전쟁 후 간첩 혐의로 처형되었다.
  • 대한민국의 공보실장 - 전성천
    전성천은 대한민국의 목사이자 교육자, 언론인, 정치인으로, 교육계에 헌신하고 서울신문사 회장과 공보부 장관을 지냈으며, 광주대단지 폭동 중재 및 빈민 구호, 한국방송협회 회장, 기독교방송 사장 등을 역임하며 사회 활동을 이어갔다.
  • 남양 갈씨 - 갈소원
    갈소원은 2006년 서울 출생의 배우로, 2012년 드라마 《부탁해요 캡틴》으로 데뷔하여 영화 《7번방의 선물》에서 이예승 역을 맡아 이름을 알렸으며, 다양한 드라마와 광고, 뮤직비디오 등에서 활동하며 연기 관련 상을 수상했다.
갈홍기
기본 정보
본명갈홍기 (葛弘基)
출생1983년 12월 15일 (40세)
출생지대한민국 부산광역시
국적대한민국
직업기업가, 유튜버
학력
학력해운대고등학교 졸업
학력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 학사
학력스탠퍼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경력
경력보스턴 컨설팅 그룹 (BCG) 컨설턴트
경력쿠팡 Product Manager
경력VCNC (비트윈 운영사) Product Owner
경력쏘카 사업본부장
경력타다 (모빌리티 서비스) 대표이사
경력카카오 모빌리티 CFO (최고 재무 책임자)
경력코리아스타트업포럼 이사
경력쏘카 대표이사 (2024년 3월 ~ 현재)
기타
링크홍쓰Share 유튜브 채널

2. 생애

갈홍기는 1906년 경기도 강화군에서 갈형대의 아들로 태어나, 개신교 집안에서 성장했다.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미국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대학교수, 목회자, 일제강점기 친일 종교단체 간부, 대한민국 정부 관료, 외교관 등을 역임했다.

연희전문학교와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종교철학을 가르쳤다. 1937년 창영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으나, 1943년부터는 정춘수, 이동욱, 심명섭 등과 함께 감리교단의 대표적인 친일 목회자로 꼽히며 친일 행적을 보였다. 조선전시종교보국회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하고, 황도문화관 관장을 맡는 등 친일 행위로 비판받았다.

광복 후에는 이승만 정부의 고위 관료로 발탁되어 1951년 한일회담 대표, 1952년 외무부 차관, 1953년부터 1955년까지 공보처장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대변했다. 사사오입 개헌을 옹호하고 이승만을 찬양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이념적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대한농구협회 회장, 주 말레이시아 대한민국 대사, 아스팍 사회문화센터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다가 198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사망했다.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06년 경기도 강화군에서 사립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이자 유지인 갈형대(葛亨大)의 아들로 태어났다. 개신교 집안에서 성장하여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1928년에 졸업[2] 하였고, 미국에 유학하여 개렛 신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감리교신학교에서도 종교철학을 강의했다.

2. 2. 일제강점기 활동

1937년 창영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2년 동안 시무했다. 1943년에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의 연성국장을 맡아 교단의 지도자급 인물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으로 교단 내에도 황민화 운동 등이 활발히 벌어지던 시기에 이같은 역할을 맡은 갈홍기는 정춘수, 이동욱, 심명섭 등과 함께 감리교단의 대표적인 친일 목회자로 꼽히게 되었다.[2]

1938년 인천 지역에서 조직된 인천기독교연합회 서무를 담당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종교가 연합하여 학병 지원 독려를 위해 조직한 조선전시종교보국회에 감리교 대표로 포함되었고 지방 순회강연을 벌이며 황도기독교의 수립과 전쟁 지원을 역설했다. 《대화세계》 기자를 지냈으며 유서 깊은 상동교회를 폐쇄하고 세운 황도문화관 관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2]

1938년에 대동민우회에 입회하여, 전향 성명으로 교수직에 복직했다. 1943년에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에서 훈련국장 겸 상임위원을 지냈고, 학병 권유 활동 등을 위한 종교 연합 단체인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 메소디스트 대표로 위원을 지냈다. 1945년에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의 종교교육국장을 지내며, 일본에 의한 식민지 통치와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2. 3. 광복 이후 활동

광복 후 발간된 《감리교회 배신배족 교역자 행장기》에 친일 행적이 폭로되어 비난을 받으면서 감리교 일부와의 관계는 소원해졌으나,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를 잠시 거쳐 이승만 정부에서 고위 관료로 발탁되어 활동 반경을 정관계 쪽으로 넓히게 되었다.[2] 1948년숙명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공보실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에 한일회담 대표, 1952년에 외무부 차관, 1953년 3월 6일부터 1955년 2월 27일까지 제5대 공보처·공보실장을 지냈다.[2]

특히 1953년부터 3년간 공보처장으로 활동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이념적 대변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당시 이승만은 단독 북진도 불사하는 북진통일론을 내세우고 있었으며, 남북 간의 평화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호전적인 입장 때문에 평화회담을 촉구하는 국제사회 일각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갈홍기는 이같은 이승만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했고, 사사오입 개헌 때도 사실상 이승만의 종신 대통령직을 보장하는 내용의 개헌을 안보를 핑계삼아 옹호하여 비난을 받았다.[2] 공보처장 시절인 1955년 저술한 《대통령 이승만 박사 약전》에서 이승만을 예수석가모니와 같은 성인에 비유하며 찬양한 바도 있다.[2]

공보처장 직을 물러난 뒤에는 대한농구협회 회장(1956년)과 주 말레이시아 대한민국 대사(1967년)[3], 아스팍 사회문화센터 사무국장(1973년) 등을 지냈다.[2] 1956년에 대한농구협회 회장, 1957년에 동명학원 이사장, 1967년에 주 말레이시아 대사, 1973년에 아스팍 사회문화센터 사무국장을 지냈다.

이후 도미하여, 1989년 8월 25일에 캘리포니아주에서 사망했다.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

2. 4. 사망

Hong-ki Karl|칼 홍기|葛弘基영어, 1906년 ~ 1989년 8월 25일)는 1989년 8월 25일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사망했다.[3]

3. 논란 및 비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4] 연세대학교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가 선정한 '연세대학교 친일파 명단'에도 들어 있다.[4]

말년인 1980년대 중반 출간한 삼성문화사 판본의 《삼국지》가 해적판으로 인정되는 판본을 거의 그대로 베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3. 1. 친일 행적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종교 부문에 선정되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005년 연세대학교 교내 단체인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가 선정한 '연세대학교 친일파 명단'에도 들어 있다.[4]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교수직을 잃었고, 창영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1938년 대동민우회에 들어가 전향 성명을 내고 교수직에 복직했다. 1943년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에서 훈련국장 겸 상임위원을 지냈고, 학병 권유 활동 등을 위한 종교 연합 단체인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 메소디스트 대표로 위원을 지냈다. 1945년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의 종교교육국장을 지내며, 일본의 식민지 통치와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3. 2. 이승만 독재 옹호

1948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공보실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 한일회담 대표, 1952년 외무부 차관을 거쳐 1953년 3월 6일부터 1955년 2월 27일까지 제5대 공보처·공보실장을 지냈다. 1956년 대한농구협회 회장, 1957년 동명학원 이사장, 1967년말레이시아 대사, 1973년 아스팍 사회문화센터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이 외에도 『대화의 세계』 기자, 펀드 문화관장 등을 지냈다.

4. 사후 평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종교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005년 연세대학교 교내 단체인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가 선정한 '연세대학교 친일파 명단'에도 들어 있다.[4]

말년에 1980년대 중반 삼성문화사에서 출간한 판본의 《삼국지》가 해적판으로 인정되는 판본을 거의 그대로 베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기도 했다.

참조

[1] 웹사이트 갈홍기(葛弘基) https://encykorea.ak[...] 2023-11-21
[2] 서적 동연록
[3] 뉴스 12國大使任命의결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67-09-16
[4] 뉴스 민노당 연대 학생위, 학내 친일인사 7명 명단 발표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4-0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